삼상 15:24-27 (찢어진 사울의 옷)
삼상 15:24-27 (찢어진 사울의 옷)
이름 : 우리교회(IP:124.59.84.82)
본문 : 사무엘상 15장23-27절
제목 : 찢어진 사울의 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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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09-02-22 15:05
찢어진 사울의 옷
2009년 2월 22일 본문 말씀: 사무엘상 15:24-27
(삼상 15:24, 개역) 『사울이 사무엘에게 이르되 내가 범죄하였나이다 내가 여호와의 명령과 당신의 말씀을 어긴 것은 내가 백성을 두려워하여 그 말을 청종하였음이니이다』
(삼상 15:25, 개역) 『청하오니 지금 내 죄를 사하고 나와 함께 돌아가서 나로 여호와께 경배하게 하소서』
(삼상 15:26, 개역) 『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르되 나는 왕과 함께 돌아가지 아니하리니 이는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 왕을 버려 이스라엘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음이니이다 하고』
(삼상 15:27, 개역) 『사무엘이 가려고 돌이킬 때에 사울이 그의 겉옷자락을 붙잡으매 찢어진지라』
찢어짐의 반대말은 봉합입니다. 꿰맴입니다. 하지만 역시 ‘하나’가 아님에는 마찬가지입니다. 결국 찢어질 것들은 처음부터 하나이지 않았습니다. 하나될 수 없다는 말은 이질적인 것으로 일시적으로 만난 겁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인간적인 안목에서 볼 때, 사울에게 연민의 정을 느끼고 회개하는 그의 인격성에 박수를 보내고 싶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간절이 반성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그는 그토록 잘못한 점이 보이지 않습니다. 인간으로서 그 정도로 살았으면 괜찮은 지도자로 사신 것입니다. 독재한 것도 아니요 이스라엘의 적에 편에 선 것도 아니요 오로지 나라를 하나로 만들기 위해서 나름대로 고군분투해 왔습니다.
그는 우선 나라를 걱정했습니다. 할례받지 못한 하나님의 원수들의 공격에 대해서 나라를 수호하는 것이 왕으로서 당연한 책무라 여기고 백성들의 마음을 싸잡으려고 했습니다. 즉 그들이 막강한 적들 앞에서 동요하지 않도록 왕으로서 최선의 노력을 다 기우렸습니다.
백성들은 막강한 적들을 퇴치하는데 있어 자력으로는 불가능하고 하나님의 도움없이는 안된다는 사실에 동감들 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도움을 중재할 인물로서 사무엘 선지자의 권위를 존중했습니다. 이런 마음을 제 때에 헤아린 사울왕은 백성들을 다독거리가면서 어서 사무엘 선지자가 나타나 대표 제사 드릴 수 있기를 고대했습니다. 이게 뭐가 잘못된 일입니까? 왕으로서 제 할 도리를 다 한게 아닐까요?
하지만 사울왕이 원치 않는 사태가 일어났습니다. 백성들의 동요는 더욱 심해지고 사무엘 선지자는 약속된 시간에 약속된 장소에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누가 잘못했습니까? 사무엘 선지자가 백번 잘못했습니다. 어쨌든 사울과 같은 집안 식구인 아들 요나단에 의해서 블레셋 군대를 격파되었습니다. 어쨌든 승리했으면 되지 않았는가요?
아닙니다. 사울왕은 전쟁의 본질을 몰랐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생각해두고 계신 이스라엘과 그 지도자는 어쨌든 사울왕과 같은 자이어서는 아니된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왜 사울왕 같은 자는 아니되어야 하는 점을 우리가 모르고 있으면 안되겠지요. 이 점을 알려주기 위한 전쟁이 또 일어납니다. 이번에는 블레셋 군대가 아니라 아말렉 군대가 쳐들어왔습니다.
사무엘은 사울왕에서 아말렉 군대를 치라는 명령을 하달했습니다. 사울왕은 전쟁의 승리에 비중을 두었지, 전쟁 방식이 전쟁 승리보다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미처 몰랐습니다. 그러니까 아말렉 전쟁은 승리가 주안점이 아니라 그 승리를 이끄는 방식의 차이가 곧 하나님의 이스라엘 나라 운영의 핵심인 것은 사울왕이 몰랐던 것입니다. 그리고 백성들도 몰랐습니다.
분명 하나님께서는 사무엘을 통해서 아말렉에 관한 한 모든 것을 진멸하라고 하셨습니다. 그 어떤 흔적도 남겨두어서는 아니된다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백성들이 이를 거부했고 사울왕도 거기에 동조했습니다. 도무지 진멸시켜야 될 이유를 모르겠다는 겁니다. 그 아말렉이 현재 자신에게 패배당하는 입장이기에 본질적으로도 신앙적으로도 이스라엘에게 위협적인 존재라고 그들은 여겨지지를 않았습니다.
평소에 교인들은 ‘하나님과 함께 하심’을 남발하면서 느낌으로는 항상 따로 지내고 있다는 의식을 지울 길이 없습니다. 뭔가 갭이 있습니다. 간격을 느낍니다. 이 간격을 교인들은 자체적인 선함으로 메우려고 시도하게 됩니다. 바로 이것이 사울적 사고방식입니다. 사울은 자신이 개입하는 방식으로 하나님 전쟁이 승리로 이끈다고 여깁니다. 왜 이런 아이디를 버리지 못하느냐 하면 그래야 하나님 승리가 자기 승리로 이어진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사실은 사울왕의 도움없이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 하나님 전쟁의 특징입니다. 야구 선수가 공을 칠 때, 야구 방망이가 처음과 끝이 끝까지 단단해야 공을 멀리 쳐 보낼 수 있습니다. 만약에 중간이 부러지면 아무리 힘주어 공을 쳐도 공은 “톡”하고 바로 앞에 떨어질 뿐입니다.
사람들은 대 홈런같은 승리를 노리고 자신의 의로움이라는 방망이를 힘껏 휘두르게 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송두리째 그 정신을 배격하십니다. 잠언 16:4에 보면, “여호와께서 온갖 것을 그 씌움에 적당하게 지으셨나니 악인도 악한 날에 적당하게 하셨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악마조차 부리십니다. 그래서 자기 백성들이 악마로부터 시달리게 하십니다. 사실은 시달리는 것이 아니라 얼쑤구나 좋아서 같이 춤추게 하시지요. 악마는 말합니다. “너는 성도로서 성도답게 살아야 한다. 완전에 도달되도록 살아야 합니다. 반듯하게 살아야 너의 소원도 이루어진다. 악을 버리고 선으로 승리하라”고 합니다.
이왕 선악과를 따먹게 된 인간은 이러한 악마의 도전에 보란 듯이 실천에 옮기기 위해서 혼신의 힘을 다하게 됩니다. 비록 완전하지는 않지만 완전치 못함에 대해서는 마음을 예민하게 가져가서 반성과 회개를 멈추지 않고 반복하게 됩니다. 마치 오늘 본문에 나오는 사울왕과 같이 말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악마의 전공분야라는 점을 잊어서는 아니됩니다. 스가랴 3:1-5에 보면, “대제사장 여호수아는 여호와의 사자 앞에 섰고 사단은 그의 우편에 서서 그를 대적하는 것을 여호와께서 내게 보이시니라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사단아 여호와가 너를 책망하노라 예루살렘을 택한 여호와가 너를 책망하노라 이는 불에서 꺼낸 그슬린 나무가 아니냐 하실 때에
여호수아가 더러운 옷을 입고 천사 앞에 섰는지라 여호와께서 자기 앞에 선 자들에게 명하사 그 더러운 옷을 벗기라 하시고 또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 죄과를 제하여 버렸으니 네게 아름다운 옷을 입히리라 하시기로 내가 말하되 정한 관을 그 머리에 씌우소서 하매 곧 정한 관을 그 머리에 씌우며 옷을 입히고 여호와의 사자는 곁에 섰더라“고 되어 있습니다.
악마가 얼마나 얼굴이 화끈거리겠습니까. 즉 우리 성도 안에서 단단하게 꽂히는 야구 방망이는 선악과 지식이 아니라 생명나무의 효력입니다. 이스라엘은 결코 자신들의 자질이 타민족으로 우수하기 때문에 구원된 것이 아닙니다. 신명기 9:5를 보게 되면, “네가 가서 그 땅을 얻음은 너의 의로움을 인함도 아니며 네 마음이 정직함을 인함도 아니요 이 민족들의 악함을 인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심이라 여호와께서 이같이 하심은 네 열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하신 맹세를 이루려 하심이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모든 맹세는 죽은 자를 살리고, 없는 자를 새삼 있게 하는 식으로 움직이십니다. 여기에 인간의 모든 협조나 노력은 거부됩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설치면 그 인간은 정녕 죽은 자가 아니라 마치 자신들이 살아야 될 가치있는 존재자라도 되는 것처럼 착각하게 마련이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하나님은 살리시기도, 죽이기도, 부하게도, 가난하게도 하십니다. 이 모두가 축복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의 선악 지식이 하나님의 사랑을 훼방됨을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