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0206b 울산강의-창세기45장
20090206b 울산강의-창세기45장
이름 : 한윤범(IP:119.192.174.43)
20090206b 울산강의-창세기45장
(강의:이근호 목사)
5절부터 보면, “당신들이 나를 팔았으므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여기에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라는 말은 지금 낯선 현실이 덮쳐버렸다 이 말이죠. 뭔 뜻이냐 하면, 당신들 정신 똑바로 차려. 당신 행동 똑바로 해. 그런 뜻이 아니고, 새삼스럽게 당신들이 어떻게 해줄 걸 묻는 게 아니고 이런 겁니다.
지금 형제들이 있는데 요셉이 자기 신분을 공개했잖아요. ‘죽었던 요셉이 살았구나’ 공개할 때 요셉이 하는 말이, 당신이 나 때문에 근심하거나 한탄하지 마시고, 뭔가 새로운 현실이 우리를 덮치고 있다는 겁니다. 이것 상당히 중요해요. 만약에 두 사람 보면 인간 대 인간의 관계에요.
‘네가 나한테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느냐?’ ‘아, 저 사람은 나한테 잘해 주는구나.’ 이게 정이잖아요. 사람은 정에 울고 정에 웃고 하잖아요. 이런 걸 따지는 게 아니고, 사사로운 정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대로 지금 요셉이 사람들 위로하는 게 아닙니다. ‘아이고, 저 사람을 뭐로 위로할까? 신앙적으로 위로할까?’ 그냥 낯선 현실이 우리를 덮치고 있다는 거예요.
쉽게 이야기하면 이렇습니다. 둘이 형제간에 난로에 고구마 구우면서 내거다 하면서 싸우고 있는데 ‘어, 형. 밖에 눈이 와요.’ 하면 둘 다 싸우다가 어디 갑니까? 폭설 내리는 걸 창문 열고 보지요. 그걸 말하는 겁니다. ‘너, 똑바로 해.’ ‘미안해.’ 이런 인간 대 인간의 차원이 아니고, ‘어, 눈이 오네’ 낯선 현실이 우리가 애써 외면할 수 없는, 거부할 수 없는, 부인해도 소용없는, 아니라고 안 할 수 없는 어떤 현실이 온 거예요.
그래서 이 내용까지 십자가 안에 포함시키라 이 말이죠. 십자가를 믿는다는 말은, 아까 요한복음 6장 39절 말씀처럼, 내가 어떻게 새롭게 조정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고, 이미 십자가로부터 개시된 사태가 너, 나를 몽땅 다 덮어버렸어요.
덮어버리니까 어떤 현상이 나타나고 열매가 나타나는데 그게 뭐냐 하면,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왜? 둘 다는 누굴 의식했습니까? 나. ‘좀 더 잘할걸.’ 반성이죠. ‘좀 더 행동 똑바로 했으면 동생을 팔아먹는 일은 없었을 걸.’ 어떤 반성 차원의 나를 쳐다보면서 근심하고 한탄하고, ‘내가 왜 그랬을까’ 그러지 말라 이 말이에요. 서프라이즈, 놀람으로 끝나 버려요.
‘어, 눈 오네.’ ‘주님이 십자가 져버렸네.’ 놀라는 현상이지 내가 어떻게 반듯하게 살고, 이제는 착실하게 살아야지. 그것 다 거짓말입니다. 몇 분, 몇 초 못 가요. 착실하게 살다가도 운전하다 끼어들면 화나죠. 세상이 여러분들 착실하게 살라고 그냥 놔두질 않습니다. 화나게 만드는 세상이에요. 하나님께서 일부러 그렇게 해요.
자식도 내 마음대로 안 될뿐더러 집에 키우는 개도 고양이도 지 마음대로 안 되는데. 우리 집에 개미 와서 내 마음대로 안 돼요. 뿌려도 나오고 또 나오고. 심지어 집에 있는 개미도 내 마음대로 안 되는데 자식이 내 마음대로 된다는 것은 그거는 안 되지요. 그냥 서로가 서로를 이용해 먹기에요. 세상은 뭐냐? 이용해 뜯어먹기. 정이라는 이름으로, 친구라는 이름으로, 가족이란 이름으로 뜯어먹기에요.
그런데 뜯어먹기 하더라도 이젠 너무 한탄하지 마소서. 근심하지 마소서. 인간은 원래 그런 거예요. 고쳐도 안 돼요. 돌아서면 또 남 뜯어먹으려고 하는 게 인간이에요. 이용해 먹으려고.
그러니까 다른 건 다 되는데 한 가지 잊지 말아야 될 건 있지요. 요셉은 우리 때문에 팔렸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되지요. 그것 때문에 근심할 건 없고, 한탄할 필요는 없지만 하나는 알아야 되죠. 요셉은 하나님께서 우릴 구원하기 위해서 미리 보내셨는데 그 보내신 제자 가운데서 뭐가 들통 났다? 우리 인간들이 얼마나 나 위주로 나만 사랑하느냐가 그냥 들통 난 거예요.
시험할 때 리트머스 시험지 있지요. 학교 다닐 때 배웠지요. 산성인지, 알칼리성인지 종이 집어넣어서 꺼내보면 알잖아요. 그 리트머스 시험지가 누구냐 하면, 예수님입니다. 우리 속에 담가보면 벌겋게 되죠. 우리는 죄인이 되는 겁니다. 얼마나 주님이 깨끗한 의인이었으면 우리의 자세한 죄까지 거기에 다 죄가 죄로 노출되어 그대로 묻혀서 올라옵니다.
그래서 십자가라는 리트머스 시험지를 올려보면 십자가 안에 뭐가 들어 있느냐? 뜯어보면 신구약 66권이 다 들어 있지요. 돈을 사랑하는 것이 일만 악의 뿌리다. 십자가가 말씀의 완성이잖아요. 십자가 안에 뭐가 들어 있느냐?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다.” 그러면 우린 밖에서 ‘개 코로.’ “먹는 것, 입는 것 족한 줄 알라.” ‘미쳤나. 노숙자 되게.’ 그 다음에 “원수를 사랑하라.” ‘죽여 버린다. 내 원수.’ “모든 심판을 내 손에 맡겨라.” ‘미쳤습니까? 내 손으로 처리할란다.’
“천하 자식이라도 나보다 사랑하는 건 합당치 않다.” ‘주님을 버려도 내 자식 못 버린다.’ “먹는 것, 입는 것 그런 건 걱정하지 마라.” ‘나는 그것만 걱정됩니다.’ “네가 형제를 미워해도 살인죄다.” ‘그럼 살인죄 안 짓는 사람 누가 있겠습니까?’ 모든 것을 토를 달고. 속에서 반박하고. “탐내지 마라.” ‘거집니까? 탐 안 내게.’ 거지라도 탐내죠. 좋은 옷 있는데 왜 탐을 안 내. 좋은 아파트 있는데 왜 탐을 안 냅니까? 보면 탐이 나는데. 탐내지 마라에요. “욕심이 잉태하여 죄를 낫는다.” ‘그럼 난 죄 덩어리네.’
성경 말씀 모든 게 특히 “아내 된 자여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교회가 주께 복종하듯 하라.” ‘미쳤나.’ “남편 된 자여 아내 사랑하기를 네 목숨 바쳐라.” ‘아이고, 저 인간한테 내 목숨 바쳐? 귀한 목숨을.’ 전부다 모든 말씀이 우리하고 절대로 안 맞게 된 것을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라도 지킬 수 가 없어요. 어느 말씀도 지킬 수가 없어요.
그런데 교회에서 그걸 지켰다는 사람 있으니 희한해. 정말 이상하다니까. 내가 보기에 하나도 못 지키는데 그걸 지켰다는 사람이 있으니 말이죠. 그런 사람 붙들고 물 위를 걸어봐라 하고 싶어. 세숫대야, 욕조에 걸어봐라. 풍덩 빠집니다. 안 됩니다. 소용없습니다. 우리가 평소에 얼마나 나만 사랑했는가 들통 내기 위한 그분이 바로 복의 제공자입니다.
복을 주시되 어떤 자에게 복을 주시느냐? 바로 겸손한 자에게 높이시고, 교만한 자를 낮추시고. 복의 제공자는 하나님의 편에 서서 우리가 저주받아 마땅함을 일깨워줘서 그 점에 동의하는 사람이 바로 하나님이 무상으로 주는 겁니다.
성경에 ‘속하다’라는 말이 무슨 뜻이냐 하면, 이게 옛날 조선시대에 나와요. 백성이 나라에 죄를 졌을 때는 상해죄 같은 데는 돈이 많은 상인은 돈을 대신 갚아서 죄를 없애버리는 방법. 그게 속하는 방법이에요. 값을 치러서 있는 죄를 지워버리는 것이 속하다는 뜻입니다. 성경에 보면 사도 바울이 말하기를 예수님의 피가 우리 죄를 속했으니. 없애버렸다 말이에요. 따라서 죄진 것은 우리지만 그 죄의 결과가 예수님의 피로 없앴다는 것을 그걸 믿지 않는 사람은 누굴 모독하느냐 하면, 바로 십자가 피를 모독하는 사람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피로 죄 없어짐을 생각 안 하고 교회 와서 충성하고, 봉사하고, 헌금하고, 전도하고 이걸 통해서 자기 죄를 없애려고 합니다. 그걸 목사들이 유도해요. 왜? 교회 돈이 모이니까. 교회 돈 모으면 자기와 자기 가족이 노후대책이 되잖아요. 정낙원 목사님은 희망 없어요. 노후대책이 하나도 없잖아요. 있습니까? 사모님이 아주 심각한. 노후대책이 뭐 있어요. 나중에 연탄가스 피워서 둘이 손 꼭 붙잡고 여보, 살 뜻 없다. 가자. 참 하나님이 제대시키는 방법도 여러 가지에요.
따라서 제가 이 말 하는 것은 어떤 인간도 피 없이 구원받는 방법이 없어요. “피 흘림이 있은즉 사함이 있느니라” 히브리서 7장에 나오는 말씀. 왜 하나님께서 자꾸 그냥 피가 아니고 언약의 피, 언약의 피가 뭐냐 하면, 그 피 속에서 가해자와 피해자를 구분하고, 피해자가 누굴 구원한다? 가해자를 구원하는 방식이 바로 주의 이름으로 벌였던 약속의 전부였습니다. 다른 방법으로 구원받은 방법이 없어요. 다른 이름으로 구원한 이름이 없다 했습니다. 피해자가 가해자. 그렇다면 우리는 반드시 뭐가 돼야 되고? 가해자가 돼야 되고, 주님은 우리 가해자에 의해서 피해자가 돼야 되겠죠.
앞으로 SBS 연속극에 보면 [가인과 아벨] 한답니다. 요새 왜 [에덴의 동쪽]에다가 [가인과 아벨]에다가 왜 자꾸 창세기 4장이 이슈가 되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아벨은 피해자가 돼야 되고, 가인은 가해자가 돼야 됩니다. 모든 사람들은 가인의 속성을 그대로 지녔다는 걸 보여주죠.
사모님 연금 많이 넣어 노이소. 그것도 안 되는 사람은 경제가 어려울 때 보통 문제 아니죠.
그래서 제가 지금 이야기하는 것은 뭔가? 요셉이 이야기해요. 8절에 봅시다.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자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겸손해서 한 말이 아니고 진짭니다) 하나님이 나를 바로의 아비를 삼으시며 그 온 집의 주를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치리자를 삼으셨나이다” 그것은 뭐냐 하면, 요셉이 위대하다가 아니라 아버지와 당신들을 살리기 위해서 그렇게 했다는 거예요.
여기서 어려운 것 하나 해봅시다. 아브라함을 누가 살렸습니까? 아브라함의 아버지가 살렸습니까, 아브라함의 아들이 살렸습니까? 아들 이삭이 아브라함을 살렸어요. 이러면 희망이 부풀지요. 아브라함이 조상이고 아들이 후손 같으면 후손이 조상을 살리는데 성경은 거꾸로입니다. 다윗의 자손이 우리를 살리듯이 후손이 누굴 살리느냐? 이삭이 아브라함을 살려요.
그리고 야곱이 이삭을 살립니다. 어떻게? 아버지 이삭은 눈이 어두워서 그냥 자기 취향대로 했어. ‘어이, 나 고기 좋아한다.’ 자기 취향대로 했지만 그걸 바꾸는 계기를 마련한 건 야곱이 거짓말함으로써 바꿔졌어요. 거짓말 안 했으면 그냥 줬지요. 야곱이 거짓말 잘했다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아들의 거짓말을 통해서도 아버지의 인식 자체가 완전히 달라지게 만듭니다. ‘내가 바로 죄인이구나. 복을 주는 내가 바로 아들의 행동에 비춰서 내가 죄인 되었구나.’
유다의 사고방식 뜯어고친 사람이 아버지 아니고 누굽니까? 며느리 다말이거든. 날아온 돌, 가나안 지방의 여자 다말이 아버지의 사고방식을 완전히 정반대로 바꿔놨어요.
지금 야곱을 누가 살렸느냐? 요셉이 살립니다. 그 점에 대해서 설명해드리겠습니다. 창세기 46장 봅시다. “이스라엘이 모든 소유를 이끌고 발행하여 브엘세바에 이르러 그 아비 이삭의 하나님께 희생을 드리니 밤에 하나님이 이상 중에 이스라엘에게 나타나시고 불러 가라사대 야곱아 야곱아 하시는지라 야곱이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매 하나님이 가라사대 나는 하나님이라 네 아비의 하나님이니”
그러니까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의 약속을 누구한테 합니까? 사람에게 약속을 하면서도 그 약속의 성취자가 누구에요? 사람이 약속의 성취자가 아니고 도리어 사람은 항상 오해하고 있는 거예요. 반대로 성취를 생각하고 있는데 그 반대를 뒤집어서 옳게 만드는 게 누굽니까? 바로 하나님이잖아요.
하나님이 우리하고 약속해놓고 그 다음에 우리한테 맡기는 게 아니고 ‘너는 안 되잖아. 너는 약속과 반대로 하잖아.’라는 것을 일깨워주면서 성취단계에서 누가 개입합니까? 하나님께서 개입해서 네 공로로 한 게 아니고, 너는 훼방만 했을 뿐인데도 불구하고 이렇게 네가 복 받은 것은 그 과정 속에 개입한 하나님의 공로라는 것을 보여주는 방식으로 구원한단 말이죠.
그러니까 우리는 매 순간마다 나의 의로움과 ‘의로움’하면 잘 이해 안 되면 나의 정당성, 존재의 정당성, 나는 이렇게 할 때 더 의미 있고, 나는 가치 있고 더 살아야 되겠습니다. 항상 이것을 우리로 마음껏 뽐내게 만들고서 그 앞에서 십자가 내세워서 네 이름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그것이 바로 주의 이름을 모독하는 것이라는 것을, 나를 불필요하고 쓸데없는 존재로 네가 네 생각할 동안에 나는 쓸데없는 존재가 돼버렸어요.
‘나는 좀 더 착해야 될 텐데’ 하는 순간에 주님은 피는 쓸데없이 되었어요. ‘나는 왜 이렇게 못 됐지’ 하는 순간에 주님은 쓸데없습니다. 못된 것도 소용없고 잘난 것도 물론 쓸데없고. 의인이 없다니까. 그냥 누구를 사랑하면 돼요. ‘보고 싶다, 보고 싶다.’ 이런 것 있잖아요. 그냥 보고 싶다. 이것이 자기한테 의미가 일었을 때 주님이 보고 싶은 거죠. ‘나 같은 인간도 구원됩니까? 나 같이 나만 생각하는 나도 구원됩니까?’ 다시 한번 십자가의 약속이 택한 자를 잃어버리지 않고 마지막 때 다 살리는 이것이니라.
하나님의 찾는 끝에 오류가 없고 실수가 없다면 목사는 할 일이 없습니다. 할 일이 없으면 빨리 죽는 것도 괜찮아요. 주께서 모든 것을 하시니 목사는 할 일 없어요. 할 일 없다고 놀면서 할 일이 없는 게 아니고, 자기 딴에 부지런히 하면서 ‘역시 나는 할 일이 없었구나’ 깨닫는 방식으로 주께서 부지런히 일을 시키죠. 3시까지 글 쓰시고 그렇게 하죠.
여기서 야곱이 이상하게 하나님 앞에 들어가느냐 봅시다. 어렵습니다. 야곱이 이삭의 하나님 복에 어떻게 들어갈 수 있느냐? 못 들어가요. 뭘 거쳐서 들어갑니다. 이삭의 하나님이 뭐라 합니까? “야곱아 네가 애굽에 내려가기를 두려워 말라” 애굽에 누가 기다리고 있어요. 요셉이 기다리고 있지요.
여기서 어려운 게 뭐냐 하면, 야곱에게 요셉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이미 죽은 존재 아닙니까. 없을 무(無), 없는 존재라고. 이게 야곱한테는 정말 희한한 일이라니까. 하나님이 야곱한테 복 준다고 분명히 약속했지요. 네 복이 넘칠 것이고 네가 만인의 복의 근원 될 것이라. 야곱은 자기가 복의 근원인 줄 알았다 이 말이죠.
그런데 브엘세바에서 들은 것은 뭐냐? 야곱의 복의 근원이 아니고 이것이 자기한테 이미 죽은 존재, 없는 존재가 자기에게 복을 주는, 배제하고 있으면서 자기에게 복을 줘버리죠. 야곱에게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었습니까? 하나님은 없는 있게 하고, 죽은 자를 살리는 것 이 두 가지 다 무엇을 통해서 이뤄졌습니까?
아브라함이 이걸 알게 된 것은 누구 때문에? 이삭 때문에. 이삭은 원래 없는 존재, 엄마 태가 죽은 존재에서 있게 되었고, 이삭은 어떻게 했습니까? 이삭을 모리아 산에서 잡았지요. 잡았는데 하나님께서 수양을 준비해서 살았잖아요. 그렇다면 하나님의 약속은 결국 이거잖아요. 없는 자를 있게 하고 죽은 자를 살리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그렇다면 성도가 뭐예요? 울산 경제 죽었단다. 이게 성도의 관심사가 됩니까? 깜둥이하고 아직 사나 몰라, 그 집안. 이게 제일 중요한 관심사가 되느냐 이 말이죠. 아니죠. 왜냐하면 그런 것은 눈에 보이는 거잖아요. 울산 살아 있어요. 내 자식 살아 있잖아요. 그럼 내 자식을 아빠가 살립니까, 주님이 살리십니까? 이건 유치부한테 물어봐야 돼. ‘유치부 여러분. 여러분의 동생을 누가 살립니까?’ 유치부 아이들 잘 알아요. 하나님 배웠다고. ‘하나님.’ 네가 커 봐라. 그게 믿어지는지.
그냥 눈에 보이는 정도가 아니고 없는 준재, 모든 사람이 심지어 목사마저 예수 안 믿는 이 시대가 그 악하고 악한 시대를 일부러 조작하신 이유는, 믿음을 그 가운데 보석처럼 빛내기 위해서 세상에 온통 경제문제, 자기 생계문제, 온통 가정의 행복문제, 부부갈등문제 전부다 거기다 몰두하도록 만들어요. ‘너도 가려느냐?’ 너도 관심사 예수한테 끊어버리고 가지 왜? 그 동네 가버리지. 너, 예수해도 시큰둥 알아주는 사람도 없는데.
목사가 설교할 때 복음 전하다 제일 큰 좌절이 그거잖아요. 아무도 귀 기울이는 사람 없어요. 아무도. 교회에서 집사들끼리 자존심 싸움 때문에 한바탕 벌어지지 복음 때문에 한바탕 벌어진다면 그건 행복한 교회에요. 그야말로 새순교회입니다. 복음 때문에 싸운다면 제일 무서운 것은 복음조차 화젯거리로써 이미 종결 돼버렸어요. 없어질 때 그게 교회입니까? 무서운 단체에요. 그냥 정으로 살면 되지.
시편 봅시다. 시편 16편 10절 누가 읽어보세요. “이는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지 않게 하실 것임이니이다”
군포에서 사람 때려죽인 안산 상록에 산다는 사람, 이름 뭐예요? 여자 일곱 명 죽인 사람. 그 사람이 죽였던 시체가 현장 검증할 때 그 시체가 완전히 썩었지요. 또 삼년 전인가 자기 동거한 여자 죽여서 썩었지요. 우리는 눈에 보일 때 그게 마지막 지점이죠. 썩다니. 썩은 것은 실패요, 죽은 것은 실패 아닙니까. 인생 쪽 났잖아요. 팔십까지 살 사람을 차 한 번 잘못 탔다 죽었잖아요. 졸지에. 돈 벌겠다고 노래방 도우미하다 죽었잖아요. 누가 봐도 그 아줌마는 인생 실패한 여자죠.
하나님께서 일부러 실패한 마지막 장벽을 뚫을 수 있는가를 보는 거예요. 여기 시편 16편 10절에 보세요.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음부에 버려진 영혼이 누구 영혼입니까? 강도한테 얻어맞던 누구한테 얻어맞던 죽은 내 영혼이고, 썩어진 뼈다귀, 백골이 누구 백골이에요? 내 뼈다귀 아닙니까. 그게 우리의 마지막이라 이 말입니다. 세상은 그걸 마지막으로 봐요. 그래서 그걸 보고 전부다 가족들은 애타고 안타까워 울고 그게 전부에요.
그런데 시편 16편을 들춰보세요. 썩지 않게 해주실 것이고, 음부에 머물지 않고 영광스럽게 변하게 해준다. 분명히 나와 있다 이 말이죠. 법 조항처럼. 그런데 이것이 왜 우리한테 그렇게 좋은 소식이 안 되고, 복음이 안 되느냐 이 말이죠. 이 시대가 얼마나 악하면 기쁜 소식이 안 되느냐 이 말이죠.
기껏 목사 불러다가 굿거리 하듯이 흔해빠진 위로나 한다고 할 게 아니라 정말 성도라면, 더 이상 엄습하는 알 수 없는 공포와 불안에서 약속을 믿고 깔끔하게 날아가 버려요. 경제가 어렵고, 흉악범이 설쳐대고 여자 죽인 사람이 있더라도 세상 원래 그렇다. ‘내가 언제 세상 믿었나. 내가 백골이 되고 난발이 된다 할지라도 나는 시편 16편 10절을 여전히 감사하게 받겠다, 약속을.’
명절 때 모여서 할머니들, ‘야, 너 기도해봐라.’ ‘우리 할머니 백골 되더라도 부활 믿게 하옵소서.’ 아마 떡국도 못 얻어먹고 쫓겨나죠. 항상 모든 기도와 모든 성도의 행동에 바로 죽음마저 뚫고 바라보는 뚫는 응시의 힘이 있어야 돼요. 십자가의 부활의 힘이 있어야 된다고. 어떤 행동에도 놀라지 말고 두려워하지 말라 했잖아요. 성경에. 이스라엘아, 야곱아 놀라지 말라. 두려워 말라.
저는 목회를 하면서 하는지 모르겠습니다만 목회하는 노는 일을 하면서 제가 만나고 싶은 사람은 훌륭한 사람, 착한 사람을 만나고 싶은 게 아니고, 진짜 기적을 믿는 사람을 만나고 싶어요. 기적은 안 되는 거잖아요. 안 되는 줄 알면서 믿는 것, 얼마나 멋있습니까?
낙타가 바늘구멍 못 들어갑니다. 바늘구멍 가운데 가장 좁은 바늘구멍이 십자가에요. 그런데 그 바늘구멍 뒤에서 바늘구멍을 볼 수 있는 눈이 있기를, 이미 통과해서 바라볼 수 있는 ‘아이고, 내가 우에 저걸 통과했노?’ 하고 감사할 수 있는 그런 기적적인 사람을 만나고 싶어요.
왜, 어디에 근거해서? 노아가 방주 크게 만들 때 노아는 아마 삼천 명 수용 예정이었을 거예요. 죄송합니다. 노아가 건진 사람 숫자 몇 명이에요? 자기 빼놓고 일곱 명이에요. 크기가 장충체육관만 할 거예요. 배가 안 부끄럽나? 큰 배 지어놓고 고작 여덟 명. 애초부터 여덟 명 같으면 예배당 요 앞에. 노아는 믿음으로 살기 때문에 방주가 크던 작던 간에 반드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은 놓치지 않는다는 것을 믿었어요. 그렇기 때문에 트릭, 인위적인 꼬시기라든지, 인간적인 그들이 원하는 걸 제공해서 구원받지도 못할 인간을 억지로 당겨서 구원시킬 용의는 노아한테는 없었어요.
그걸 히브리서에서 노아의 위치가 이 점이라면 히브리서 11장에서 예수님의 입장이 이 지점이기 때문에 노아가 미리 당겨서 노아 됐거든요. 노아의 믿음은 자기 믿음이 아니에요. 이건 선물이에요. 주의 믿음을 선물로 보는 거예요. 그것 때문에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 자기가 증인이라니까요. 내가 끄집어내면 증인이 아니고 생산물이죠. 열심히 했더니만 되더라. 이거는 자기 작품이잖아요. 노아의 믿음은 노아의 자기 작품이 아닙니다. 장차오실 메시아의 작품이에요.
그러니까 성경의 세계에서는 예수님이 자기 백성에게 미리 줘서 장차오실 예수님께서 노아에게 믿음을 줬기 때문에 방주를 만들었고, 이 방주는 선물로 받지 않은 사람은 못 들어오게 돼있어요.
근데 노아는 이렇지만 오늘 본문에서는 노아 방주 역할한 사람이 누굽니까? 요셉이죠. 야곱과 요셉을 하나님께서 만나도록 하시는데 이때 요셉은 야곱에게 없는 자식이고 이미 죽은 자식이죠. 없는 자식, 죽은 자식 들어가서 살게 되는 게 뭡니까? 그것이 바로 십자가고, 오늘날 우리에게 주어지는 성령 안에 계시는 십자가 주님입니다. 예배당 있는 예수님 말고, 한국교회 안에 예수님 말고, 없는 자 같은데 계시고, 죽은 자로서의 예수님. 그러니까 십자가 복음을 전하는 데만 예수님이 계시고, 십자가 피가 빠진 곳은 교회도 아니고 그건 절간입니다. 신학교 아니고 승가대학입니다.
이걸 믿는 사람한테는 ‘근심하지 마소서.’ 오늘 그것 배웠다. ‘한탄하지 마소서.’ 자기 죄 지은 것 때문에 한탄하지 마라. 그건 피를 모독하는 겁니다. ‘속했다’는 말이 뭔 뜻이에요? 이미 대신 값을 치러버렸는데 네가 왜 걱정하고 있느냐 말이죠. 보고 싶은 영화가 있는데 돈은 없는 거예요. 저 앞에서 주님이 ‘들어 온나, 들어 온나.’ 이러고 있다고. 내가 이미 값을 치뤘다는 거예요. ‘안 들어갈래.’ 무슨 그런 똥배짱이 있어. 왜? ‘내가 돈 안 냈는데 우에 들어갑니까?’ ‘들어와. 천국에 들어와.’ ‘안 들어갈래요.’ 왜? ‘나는 나쁜 놈이니까.’ 그게 나쁜 놈이라. 맏형 없이 자기가 맏형 되려고, 자기 의로 천당 가려고.
바로 이러한 성경 창세기 45장, 이런 것이 더 어려운 이야기해보겠습니다. 적어 볼게요. 어려울 땐 적어야 돼. 이게 우리 안에서 사건화 된다는 것, 이게 설명을 해야 돼요. 우리가 성경을 보고 공부를 하고 아는 것은 지식으로 머리에 들어와요. 이게 소용없다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한테 지식을 줘요. 그 다음에 사건을 일으키는 겁니다.
사건을 일으키면 우리는 내가 알고 있는 성경지식과 복음 지식을 총동원해서 그 힘든 사건 이겨보려고 나름대로 용을 쓰지요. 그 다음에 소용없다는 걸 깨닫게 하십니다. 내가 아는 지식, 이것이 엄습하는 불안과 이유 없는 근심, 미래에 대한 난감, 현재 미리부터 걱정하는 이 오류, 이걸 아무리 내가 도를 닦고 성경책을 집안에 도배를 해보세요. 영화 오멘처럼. 도배를 하고 뭘 해도 귀신 안 물러갑니다. 왜? 내가 귀신이기 때문에. 절대로 물러가지 않아요.
본인이 걱정하는데 이게 미국간들 ‘아이고, 근심 되거든 미국여행 갔다오이소.’ 그랜드캐년, 나이아가라 폭포에 가도 소용없어요. 근심, 걱정은 그림자 같아. 항상 졸졸졸 따라 다녀. 이건 항상 땜질보다 강하게 붙어 있어서 내가 가는 곳에 근심, 걱정이 안 따로 올 수가 없어요. 나중에 근심, 걱정 없으면 심심해서 뭔가 이상하다 해서 지어냅니다.
학급에 담임해보면 어떤 날 조용할 때가 있다고. 위험스러워요. 아주 초조합니다. 뭔가 사건이 터져야 되는데. 그럴 줄 알았어, 터질 줄 알았어. 사람이라 하는 것은 이처럼 자기의 지식은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건이냐 하면, 내가 이 지점에 있다가 풀썩 주저앉는 지점, 내가 내려앉는 지점을 통해서 이 사건이 은혜요, 축복인 것을 발견케 합니다. 뭔 뜻이냐 하면, 내가 이 자리에 있어서 내 힘으로 해결하려고 할 때는 절대로 짜증과 불안과 근심밖에 안 나오는데 아이고, 나는 무슨 자요? 없는 자요, 누구같이? 요셉 같이. 나는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버림받아 마땅한 자라는 것을 깨달을 때 푹 내려앉아 보면 이 사건이 하나의 축복, 은혜 덩어리로 아는 겁니다.
그리고 나같이 잃어버린 자가 하나님 은혜로 되찾아질 때 이 사건은 범사에 감사하게 돼있습니다. ‘아하, 내 자식이 내 자식이 아니고 주님께 맞구나.’ 그 짧은 순간이지만 깨닫게 되고, 남편이 내가 선택한 남편이 아니고, 주께서 붙여준 남편 맞구나. 너무 짧은 순간이지만 2초요.
교회가 숫자 적다고 성경공부하다가 ‘세상에 이런 교회가 어디 있어. 감사할 뿐이다.’ 짧은 순간 알게 되고. 교인들이 교회가 그렇다는 걸 알고 ‘내가 너무 헌금을 아꼈구나’라고 다음에는 헌금 천 원씩 했는데 이젠 이천 원 올린다. 내가 천 원이 뭐고. 복음 알아 놓고. 하고 이천 원 올릴 그 순간에 그 시간 다 지났어. ‘천 원만 하지 천 원 한다고 지옥 가나.’ 딱 그 순간 시간 끝. ‘내가 이것 안 해도 구원받는데 뭐 하려고 하노. 저 집사 돈 많은데 하라 해라.’ 손 떼버려요. 그래서 우리교회 계속 적자에요. 은혜 받을 때 하면 되는데 은혜 받고 문 열고 나가면서 다 쏟아버려요. 돈으로 환산되질 않아요.
그런데 그런 교인도 복음으로 만나게 해주면 감사할 때는 바로 목사 자신이 그것보다 더 낮아질 때 ‘세상에 저렇게 예쁜 교인이 어디 있을까 헌금하다가 손 빼는 교인도 귀하다’라고 느낄 때 사랑으로 설교를 하고 사랑으로 복음으로 전합니다. 만약에 목사가 안 변하면 다음에 설교할 때 보자. 성경대로 완벽하게 입도 못 띠게 만들어야지. 벌써 인상 그리고 나오고 목에 힘 들어가서 설교하는데 들어보면 다 맞는 이야기인데 이상하게 날 미워하는 것 같아. 치는 것 같아. 목사 본인이 낮아지지 않기 때문에. 아무도 없다고 생각하고 교인도 오다가 한꺼번에 다 죽었다고 생각하고, 죽은 듯 없는 듯 할 때 오시면 ‘아이고, 살았다’ 그런 감사와 기쁨, 그것 없이는 목회 못합니다.
그래서 제가 남긴 옳은 건 아니지만 유명한 말이 있어요. ‘기대와 희망이 곧 죄다.’ 왜? 기대와 희망은 항상 나를 지금보다 있는 걸 더 있게 만들고, 살아있는 걸 더 살게 만들기 위한 기대와 희망과 비전이라 하거든요. 선교단체에서 만날 비전, 비전하잖아요. 야망을 가져라. 이거는 마귀의 역사거든요. 이런 기대와 소망이 절대로 감사로 이어지지 않습니다. 생색으로 이어져요. 하지만 이것이 죄인 걸 알았을 때 주어진 모든 것이 전부다 하나님 은혜죠.
여러분 하나 물어봅시다. 빈 라덴에게 주어진 물방울하고, 오바마 대통령한테 주어진 물방울하고 다릅니까? 같지요. 그러면 선인과 악인에게 주어진 햇빛 성분이 같잖아요. 절대로 성도에게 주어진 비는 달콤하고 절에 내리는 비는 막 빗방울이 아니다 이 말이죠. 하나님께서 선인과 악인에게 자비를 베푸시면 누가 그 자비가 자비인 줄 아는 사람, 마음을 죄인 이건 안 줘도 되는데 하고 감사하는 사람에게만 은혜로 보이지, 건방떠는 교만한 불신자한테는 이것이 뭐로 보입니까? 그거 당연한 거 아닌가. 그래서 성령께서는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로 하여금 자근자근 우리의 의를 다 밟아주시죠.
지난 수요일 날 그런 설교했죠. 스데반 집사가 성령 받아서 뭐 했습니까? 인간이 만든 성전에는 하나님이 계시지 아니한다고 인간의 의를 박살내듯이 성령 받은 특징이 뭐냐? 내가 갖고 있는 모든 의를 아주 감사하게도 그릇 깨듯이 다 깨주시고 깨줄 때 가리웠던 예수님께서 속죄해주시고 용서해주시고 아무 묻지도 않고 천국 보내주신 영생주신 그것이 감사하게 한 겁니다.
창세기 45장 5절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그런 관점에서 다같이 읽어봅시다.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으므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그러니까 하나님의 일에 생명이 개입 안 되는 건 없어요. 전부다 모든 일은 영적으로나 육적으로나 죽어 있는 우리를 생명을 주시려고 우리 앞에 예수란 분이 이천 년 전에 돌아가셨다는 그야말로 경제가 어려운데 아주 엉뚱한 소리, 십자가 이야기를 끄집어내는 겁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생각하는 생명은 사실은 죽은 거다 말이죠. 몇 초 안 가지만 그 틈새를 통해서 다시 한번 생명을 집어넣어주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지금도 일하시는 겁니다. 우리가 이상하게 낯설게 된 우리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는데, 있는 것을 근거로 기대와 소망을 하거든요. 그런데 없다고 생각한다면 현재 있는 것도 감사할 뿐입니다.
애가 성적이 안 오른다. 갑자기 이유 없이 살이 찌지 않는다. 여러 가지 근심, 걱정 다 있지만 난 요새 항상 도착하면 차를 보내고 십 분 기다리고. 왜 그런지 몰라. 뭔가 굿을 해든지 해야지. 왜 자꾸 차는 꼴보기 싫어 떠나느냐? 내가 기도를 소홀히 했다든지 성경을 안 봐서 그런가? 하는데 그런 뜻 전혀 아닙니다. 그런 게 아니고 너는 차 탈 자격도 안 된다는 뜻입니다. 그것도 고마운 줄 알고 감사할 줄 알아라. 그 뜻이에요.
돈을 사랑하지 마라. 이것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된다는 말은, 돈을 사랑하게 되면 방향이 교만하게 돼요. 돈을 없애란 말이 아닙니다. 돈을 없애도 역시 방향이 이쪽 같으면 마찬가지에요. 악이에요. 돈을 없애거나 많이 사랑할 것이 아니라 돈보다도 돈을 주신 주님을 사랑하면 돼요.
세상에 이런 뜻입니다. 남자들 호주머니 있지요. ‘호주머니를 사랑하지 마라’ 이 말은 호주머니를 사랑합니까? 그냥 달고 다니죠. 그처럼 돈을 사용한다 하면 될 건데 돈을 사랑하지 마라 하는 거예요. 마음을 그만큼 앞쪽으로 낮춰버리면 주님께 감사하지 돈에 감사하지 않는다 이 말이죠. 없는데서 있게 하고 죽은 자를 살린다 했습니다.
그 다음에 46장 계속 가봅시다. 그래서 애굽으로 내려가라 했습니다. 애굽에서 4절에 보면,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이삭의 하나님께서 나타나신 것은 야곱에게 주신 축복이 도중에 무효가 안 되고 지금 제대로 일이 착착 잘 되고 있는 겁니다. 참 하나님 방법 이상하죠. 내가 기대했던 코스, 내가 예상 그 코스는 아니지만 그것을 비껴가면서 이 안에는 나의 명예, 나의 명성, 나의 유명세, 나의 자존심 있는데 이걸 꺾어버리면서도 주께서는 뭡니까? 일을 아주 정상적으로 착착 잘 되고 있는 거예요. 나한테 숨어있는 방법으로 내가 미처 모르는 방법으로 일을 잘 되고 계시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세상에서 너무 염려하지 마세요. 마음만 낮춰버리면 일 잘 되고 있는 게 보여요. 마음을 높이니까 자기 방식을 고집하니까 안 되는 겁니다. 흔히 저한테 부부관계 상담하고 할 때 ‘남편이 말을 안 들어요.’ 남편이 어쩌고저쩌고 하는데 그거는, 내가 설교시간에 그런 이야기하니까 놀라는 사람이 있는데, 여자가 임신을 할 때 그것은 바로 여자의 흔적이 아니고, 남자의 흔적이라는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전부다 여자의 흔적이라고 예상하다가 남자의 흔적이라고 하니까 교인들이 깜짝 놀라는 사람이 있어요.
여자가 임신했다는 말은 내 남자가 이 남자라는 것을 보여주는 흔적이 여자한테 있잖아요. 그러니까 성도는 안에 무슨 흔적이 있느냐? 없는 자의 흔적과 이미 죽은 자가 오히려 나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여자 임신하듯이 예수 그리스도를 임신하고 그런 형국이 되는 겁니다. ‘너 보기에는 내가 육체로 보는데 나는 내 안에는 이미 죽었다 살아나신 분과 너희는 보이지 않는 분이 나한테 있어.’ 그 예수의 흔적을 보여주면서 살아갑니다.
그 살아가는 모습이 착하고 선한 게 아니고 자기를 자꾸 비우고, 자기를 부인하고, 내 덕이 아니고, 내 공로가 아닙니다. 내가 나 된 게 내 덕이 아닙니다. 주님 은혜입니다. 그렇게 하는 겁니다. 그걸 자기가 나서서 자기 방식으로 복수 아닌 것처럼 복수를 하고, 위장으로 결혼해서 집안에 들어와서 집안을 바꾼다든지, 감히 물 속에 빠뜨려 죽여. 한번 당해봐라. 하는 식으로. 일곱 시 사십 분 연속극, [아내의 유혹] 그 복수할 때 사람들은 재미있어서. 왜? 복수만큼 재미있는 게 어디 있습니까? 자기 이름이거든요. 이제는 내가 주인공 되는데 세상에 그것보다 더 재미있는 게 어디 있습니까? 더러운 세상 내 이름으로 뭔가 한다는 게 이게 사는 보람 아닙니까.
그게 바로 죽은 자가 흔적으로 남아 있는 것, 그것이 이삭이 야곱에게 내준 축복입니다. 일이 야곱은 맹탕으로 ‘아이고, 우리 애 죽었구나’ 울고 있을 때 죽은 요셉이 일을 정상적으로 잘 되게 하나님 뜻에 의해서 범사에 합력하여 선을 이루고 있었어요. 야곱이 복 받고 구원받는데 아무 지장 없었어요. 괜히 내가 자식 하나 죽였구나. 자기 혼자 한탄하고 근심했지만 주께서는 근심한 건 보지도 않고 일을 착착 잘 진해되고 있는 거예요. 그게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임신한 우리의 모습이어야 된다 이 말이죠. 그게 실제 상황이고. 그래서 갔습니다.
마지막으로 이것만 봅시다. 애굽으로 내려간 이스라엘 가족이 이러하니 야곱과 그 아들 해서 칠십 명 나오지요. 여기에 17절. 하여튼 성경 보다가 사람 이름 나오면 진도 잘 나가요. 의미 없기 때문에. 그런데 어떤 약간 편집적인 사람은 원어 따지고 원어의 본 뜻은 다 거짓말입니다. 성경에서 원어하는 것 다 거짓말로 보면 돼요. 그냥 실제로 이런 게 있었구나 하고 넘어가면 돼요.
창세기 15장 13절, 이것 설명하고 마치겠습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정녕히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 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게 하리니 그 섬기는 나라를 내가 징치할지며 그 후에 네 자손이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오리라”
하나님께서는 주특기 뭐냐 하면, 사람에게 약속을 던져놓고는 그 사람이 이루는 게 아니고 이루기는 누가 이룹니까? 그 사람을 붙잡고 하나님이 여러분을 덮쳐서 하나님 약속을 이뤄나가십니다. 십자가요? 지금 여러분 속에서 이뤄지고 있어요. 만날 내 자랑하다가 얻어터지고, 교만하다가 얻어터지고 이게 십자가 아니고 뭡니까?
내 공로로 구원받는 게 아니고 주의 공로로 구원받는구나. 이걸 여러분들이 직장이든 교회에서 그것을 ‘나도 사랑하는 사람 있데이. 날 사랑하는 사람 있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있다.’ 이것을 이 사랑은 법이 아니고, 지키는 게 아니고 좋아서 싱글벙글 그것이 이 어려운 상황에서도 성령 받은 기적적인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언약의 백성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이 약속에 휘말린 것을 감사합니다. 내 힘으로 뚫을 수 없는 천국, 그러나 약속이 덮치니 십자가 피가 우리 죄를 대신 속해주시니 바로 우리가 천국 가는 사람 되었고 영생 얻게 되었습니다. 이 공짜로 주신 고마운 은혜와 선물을 우리가 너무 감추지 말고 너무 아까지 말고 마음껏 털어내면서 대외적으로 자랑할 수 있는 성도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