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특강 교재를 읽고......
겨울 특강 교재를 읽고......
이름 : 이미아(IP:119.149.22.58)
┃일단 제목을 바꿨으면 합니다. '구원 이후의 삶'이 아니라 '구원된 삶'이 적절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구원이 되고 난 뒤에는 인간이 관리할 수 있는 미래는 남아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새순교회 홈에서 펌)(겨울 특강 제목을 바꾸라고 퍼온 글이 아니라 내용이 좋아서 퍼왔습니다)
1. 구원, 그 이후란 없다.
구원된 삶만이 있을 뿐이다. 십자가에서 다 이루신, 이미 완료된 구원의 능력인 십자가라는 폭력에 휘둘림 당하는 사로잡힌 자만이 있을 뿐이다.
굳이 구원과 그 이후란 제목이 주는 뉘앙스는 한국 교회가 구원에 목숨 걸고, 구원 받은 증거로 자기 행위를 내세우는, 전혀 예수님의 이름이나 예수님이 주신 구원과는 상관없이 자기로부터 출발해서 자기만 남는 가짜 구원에 가짜 목사들과 가짜 성도들과 가짜 교회가 악마의 도구가 되어 부추김 당하고 있는 현실이기에 이것을 단죄하기 위한 것이리라 본다. 그들은 구원도 남는 장사요, 구원, 그 이후의 삶도 남는 장사일 뿐이다. 아무 것도 남지 않는 것은 생각지도 못한다. 생각조차도 할 수 없다. 그야말로 임파서블이다.
결국 인간은 밑지는 장사는 하지 않는다. 밑져봐야 본전치기는 한다. 본전이라는 것이 남아있다. 그러나 손해보는 장사할 바에야 흥정을 왜 하겠는가...손톱사이에 낀 때만큼이라도 남아야 하는 것이 인간이다. 다 없어져도 자기는 남는다. 자기가 자기를 스스로 버릴 수 없으니까....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았나이다(막10:28)...모든 것을 버린 나는 여전히 남아있다. 버림받으신 분은 단 한 분 밖에는 없으시다.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저주받은 자 예수님이시다. 죄인들은 마땅히 가야할 길을 가야 하지만 죄도 없으신 분을 대신하여 저주의 길로 가게 하시는 버림속에 두셨다. 하나님의 의 때문이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한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후5:21)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았나이다...베드로가 진짜 모든 것을 버렸을 때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못박히사 죽으시고 부활하셨을 때이다. 이미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외치신 말씀안에서이다. 성령께서만이 이 일을 하실 수 있으시다. 베드로 자신이 원치 않는 길로 갈 수 밖에 없게 되었다. "그래 좋다. 진정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는 것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겠다. 대충 버리는 것으로는 끝내지는 않겠다." 주님의 폭력이 시작되었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니라"(롬6:3-7)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리는 구원된 주체인 나(상상계)가 있고 나에게 합당한 구원만을 가져다 주는 대상을 만들어 놓는다. 내가 원하는 구원자, 그 구원에 걸맞는 나...그것이 난데없이 허물어져 갈 때...그것을 조율해가는 또 다른 나(상징계)가 있어 후회와 반성을 반복한다. 구원도 내가 하고 구원의 삶도 내가 산다. 그냥 죄인되기 싫기에 그냥 주는 구원이 싫다. 그냥 감사가 나올 수 없는 이유는 자존심 때문이다. 거지가 적선을 베푼자에게 고맙다고 인사를 해도 돈을 보고 하듯이 말이다. 이 자는 거지가 아니다. 거지처럼 흉내내는 자였을 뿐이다. 예수님의 버림받으심 안에 들어있지 않았다. 버림받음 안에 들어있다고 상상했을 뿐이다. 구원받은 자가 아니다. 구원받은 자처럼 행세했을 뿐이다. 믿음이라는 선물을 받은 자가 아니다. 선물 받은 자처럼 개수작을 떨었을 뿐이다. 예수님의 이름을 자랑하는 자가 아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자랑하는 자처럼 하면서 자기 이름을 자랑하는 자였을 뿐이다.
2. 구원과 그 이후를 나눌 수 없다고 확정하심.
이미 성도는 십자가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못박혔기에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사시고 계시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성도는 여지없이 주님의 십자가 사건안에 놓여 있을 수 밖에 없다. 매일같이 죽음에 넘기워 도살당한 어린 양의 피가 흥건하다. 폭력을 휘둘러서 살아남은 자가 있다면 그 자는 저주받은 자요...폭력을 휘둘러서 죽은 자가 있다면 그 자는 산 자가 되는 것이다. 진정한 폭력자는 죽었다. 살이 다 찢기고 피를 다 쏟으셨다. 그러나 죽음은 피를 쏟아 내었지만 그 피는 생명을 창출해 내었다. 죽음과 삶의 새로운 인식, 죄인과 의인의 새로운 자리, 저주와 구원은 예수님의 이름, 그 비밀에 담겨 있는 것이다. 나의 이름은 삭제되고 주님의 이름만 남는 그 감격은 성도만이 맛볼 수 있다. "성령이 임해야지만 성도가 된다." 떠밀침 당한 세상에서 절망과 억울함과 원통함과 분함이 무차별 폭력으로 가해질 때 주님의 사랑만이 보인다. 칠흑같은 어두운 밤 하늘에 한 줄기 빛을 발하는 반짝이는 샛별이 보인다.
"성령께서는 줄곧 예수님을 평생 인도하신 그 영이시다. 따라서 구원이란 세상 것을 추가적으로 받은 상황을 만들어내시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일평생을 재현해 주시는 것으로 가닥을 잡으셨다. 따라서 진정한 구원론이란 성령을 받은 상황을 무대로 해서 본격적으로 설명이 가능하다. “너희 중에 아비 된 자 누가 아들이 생선을 달라 하면 생선 대신에 뱀을 주며 알을 달라 하면 전갈을 주겠느냐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눅 11:11-13)"
3. 결론
구원, 그 이후, 또는 구원 이후의 삶에 대해서 라는 제목과 주제로 겨울 특강을 합니다. 그것이 가져다 주는 혼란으로 갑자기 구원 그 이후의 삶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되고 구원 그 이후의 삶이 있냐 없냐를 따지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역시나 구원, 그 이후의 삶을 완전히 박살내는 교재의 내용을 읽고 기쁨을 감추지 못합니다.....이것이 무슨 자랑이겠습니까???역시나 인간의 본심을 들추어 내시는 성령의 책망을 발견하는 것이겠지요... 고린도 전후서 녹취록을 읽으며 재미있는 표현을 발견하였습니다. "성도는 허리에 차인 쌈지와 같다. 쌈지에 말씀을 넣어주시는 것이다" 라는.
"..........따라서 [구원, 그 이후‘의 개인적 관점은 바로 이 ’무너짐‘에 있다. 늘 무너지는 것이 구원받은 자의 이후의 삶이다.
그러니까 성도는 날마다 자신의 가치성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가운데 도리어 하나님이 주신 말씀 성취의 완료성(하나님의 의)을 찬양하라는 말이다. 아직 이런 작업들이 남아 있기에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그가 이같이 큰 사망에서 우리를 건지셨고 또 건지시리라 또한 이후에라도 건지시기를 그를 의지하여 바라노라”(고후 1:10)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빌 3:10-12).
넘치는 은혜 받으시기 바랍니다. "실로 몸으로는 떠나 있으나 영으로는 함께 있어서 거기 있는 것 같이..."(고린도전서5:3). 강의를 듣지도 않고 교재만 읽고 성급히 글 올린 것에 대해서 참으로 죄송스러울 따름입니다.
이름 : 이미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