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 그 이후]의 폭력 폭력?
[구원 그 이후]의 폭력 폭력?
이름 : 관리자(IP:124.59.84.82)
[구원 그 이후]의 폭력 폭력?
구원 그 이후의 폭력 폭력?, 아니 구원 그 자체, 사랑 그 자체의 폭력
선악과를 따먹은 죄인들이라서 폭력 폭력 하니까 자꾸 악처럼 느껴지고
또 그동안 종교꾼들(선악으로 선을 외치던 성화론 목사 삯꾼들)에게 하도 속아서인지
상당히 낯설고 위기스럽고 거부감이 들고 멀리하고픈 의미로 다가옵니다.
그런데 복음의 원리인 십자가의 의미로 다시 재조명해서 본다면
인간이 자기 스스로를 부인하지 못하는데 있어서
성령의 활동은 항상 자기부정으로 인도한다는 점을 볼때에
(갈 5:17, 개역)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일종의 깨뜨린다는 점이 바로 폭력이라는 표현과 같은 의미인데도 불구하고
마치 다른냥 깨뜨림은 받아들이겠는데(워낙 종교꾼들이 많이 써먹으면서 세뇌시켜서)
폭력은 못받아들이는(항상 덕스러움의 가면을 늘 의식하도록 삯꾼들이 유도했기에)
이상한 현상이 벌어지는 것 같습니다. 의미상 같은데 단어 곧 언어적으로는 달리보겠다는 이런 인간의 본성이 왜 그럴까요?
더 놀라운 것은 바로 그런 상태에서 또 그 의미가 막상 나 혼자에게만 해당되는냥 겁먹다가도, 오히려 놀랍게도 하나님 자기 자신의 치심 또는 예수님 버림당하심 으로 보게 되는 성령의 인도를 받게 되면, 아 나만 폭력 당하는게 아니구나? (안도감) 라는 아주 이기적인 발상을 곧잘 하다가, 그 폭력성의 잔인함이 심하게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충격적으로 다가오면, 이것은 그 십자가의 못의 뚫어버리는 위력적인 시선 앞에서 그런 생각도 잠시, 모든 것은 쇼킹하게 느껴져 허걱 거리는, 할 말을 잃어버린채 모든 것이 삭제(분리) 당한 듯이, 아무리 다혈질적인 불쑥 불쑥 즉각적으로 달려드는 감성도 멍하게 만들고, 온갖 지혜로 냉철하고 합리적이고 명확한 사건 해석을 내리는 완벽하기 짝이 없는 그 잘난 이성도 입이 쑥 들어가 버리는
십자가 라는 철저한 모순 앞에서는 잠잠케 됩니다. 예수님 자신을 갈기 갈기 찢어버리심.
모든 시선이 저 분이 도대체 누구이며 왜 내 앞에서 저 분이 죽어야만 하는가로 몰입이 될 정도로 그 사건의 장면 하나 하나의 이미지가 모든 것을 압도케 만드는 것 같습니다.(성령은 바로 이 폭력적인 이미지 하나 하나를 우리에게 적용시킵니다. 앞서서 참선지자들이 그러했습니다. 또 믿음의 선배들 또한 그러했습니다. 금식할 필요 없이 그 인간 하나 하나가 금식[겉은 후패 속은 날로 새로움 고후 4:16] 자체가 되어서, 금식(회개=기도)이 나를 덮쳐서 그 폭력으로 깨어진 현장 하나 하나를 깜짝 깜짝 놀라면서 누리도록 되어 있습니다. 세상에 나 같은 놈이 기도를 해? 그럴 리가?, 회개를 해? 그럴 리가?, 금식을 해? 설마?, 행함의 여부인 법의 세계를 이미 떠나서, 사랑이 무조건 덮쳐져서 안 누리고는 못배기는, 죽음 보다 강한 그 질투에 자근 자근 짖 밟히는 그 기쁨을 사도들은 넉넉히 이긴다고 철저한 모순적인 언어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남들은 불 속에 들어갔다고 인생 종 쳤다고 끝낫다고 보고 있는데, 정작 불 속에 도살장에 끌려간 그 당사자들은 반대로 불 밖의 사람들을 향해 나처럼 나처럼 넉넉한 이김을 누리는 기쁨을 누릴 생각이 없냐고 아주 아주 놀려먹듯이 도리어 큰소리 치는 폭력을 가하고 있습니다. 후회할 것이라는 둥, 이 승리 못 누리면 넌 실패자야 라고 오히려 역으로 비웃고 있습니다. 너 환란 당해 봤어? 안 당해 봤으면 말을 말어!, 너 곤고 핍박 기근 적신 위협 칼 당해 봤어? 안 당해 봤으면 말을 말어! 그들은 자신만만하게 뻔뻔스럽기 짝이 없게 외칩니다. 그 자체를 즐기는 듯이 오해가 들 정도로 말입니다. 그들이 그것 하나 하나를 이길 재간이 분명히 없음에도 큰소리로 놀려먹듯이 외치는 것은 믿는 구석이 있는데 그들에게 끊어지지 않는 십자가의 피가 작살처럼 꼿혀 있다는 겁니다. 아무도 못 빼더라 라고 외치는 겁니다. 핍박도 환란도 이 사랑의 작살을 빼낼 자가 없다고 합니다. 심지어 사도바울은 사단의 가시 그냥 가시가 아닌 사단의 가시도 박힌채로 그 사랑에 뿅가버리도록 허벌나게 당했으니 오히려 그런 소리가 안 나온다면 이상한 겁니다. 선악의 법 곧 죄악에서 빠져나갈 재간이 없었듯이 또 율법을 통해서 철저하게 갇혀서 아무도 외부에서 빼내어 줄 자가 없었듯이 안으로나 밖으로나 가망이 없었듯이, 이제는 반대로 이 십자가의 용서의 사랑에서 벗어날 재간이 없도록 안으로나 밖으로나 가망없게 되었습니다. 아니 이것을 그래 성화라는 되도 않는 사기로 돈을 삥땅 쳐먹냐 말이죠? 그래 마음껏 쳐 먹어라. 단물 다 빨아먹고 나면 어차피 뱉어버릴테니 말이다. 항상 어떤 조건을 따지고 다가오는 그런 악마인 인간들과 다른, 예수님 자신이 친히 자기자신을 치시는 폭력으로 다가왔다는 사실에 우리의 귀는 저 달콤한 거짓선지자들의 부드러운 말 솜씨에 다 당해본 입장입니다. 놀랍게도 그것도 완료 앞에서는 다 은혜였습니다. 이제 참선지자의 거침없는 부정적인 그 폭력이, 아 완료 되었다는 것에서 자기 이미지 관리할 필요 없이 도리어 오해를 유발케 하면서 완료된 것만 오라는 껍질을 깨고 반토막 내어 쪼개어버리는 폭력임을 알게 됩니다. 겉 사람의 후패성을 더더욱 노골적으로 드러냅니다. 성령 때문에 말이죠. 성화론자들의 이미지 관리와 완벽한 정반대죠.)
(롬 8:31, 개역)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롬 8:32, 개역)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롬 8:33, 개역)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롬 8:34, 개역)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롬 8:35, 개역)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협이나 칼이랴』
(롬 8:36, 개역)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롬 8:37, 개역)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롬 8:38, 개역)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롬 8:39, 개역)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결국 성경 전체는 법이 하나도 없고 (지킬 것이 단 한 개도 없고)
사랑의 폭력에 당하는 것 뿐인 누리는 것 뿐입니다.
정작 그 폭력은 성경 전체 특히 구약 하나 하나의 모든 이야기 속에 늘 가득 채워져 있었고 또 다른 의미가 나올 수 없도록 전개 되었건만
우리의 눈은 어두어서 아무리 지금 다시 찾아봐도 알 수 없고
오직 예수님이 오심으로 말미암아 그 의미가 드러나며
예수님 곧 십자가에 죽기 까지 복종하신 그 사건의 내막을 다 담고서 다가오시는 예수님
그 예수님이 또한 성령을 주시지 않으면
구약을 보는 시각처럼 또 신약도 그렇게 지키느냐의 여부로 따지게 됩니다.
인간들의 종교놀이(성화놀이) 종교사기(새생명의 삶, 개혁주의) 등등으로
정작 하나님 자신이 자신에게 폭력을 가하는 그 입장에서
모든 것을 허물어 뜨리는 그 현장의 실제상황에서
(요 2:17, 개역) 『제자들이 성경 말씀에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 한 것을 기억하더라』
(요 2:18, 개역) 『이에 유대인들이 대답하여 예수께 말하기를 네가 이런 일을 행하니 무슨 표적을 우리에게 보이겠느뇨』
(요 2:19, 개역)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요 2:20, 개역) 『유대인들이 가로되 이 성전은 사십육 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 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뇨 하더라』
(요 2:21, 개역) 『그러나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요 2:22, 개역)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야 제자들이 이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및 예수의 하신 말씀을 믿었더라』
정작 인간의 모든 행동 하나 하나는 일관되게 뭔가 건립하고 세우기에 집념한다는 것이, 노아홍수로 인한 바벨탑 쌓기에 몰입하는 그 모습과 같은 맥락임을 알게 됩니다.
결국 노아홍수 조차도 십자가의 의미로 보게 되니, 이 십자가의 의미를 저지하기 위한 것이 자연스럽게 그 반작용으로 십자가의 의미를 철폐시키는 즉 노아홍수폭력습격사건을 철폐시키는 활동이 바로 새생명의 삶, 성화론, 하나님 나라 운동임을 알게 됩니다.
왜냐? 폭력성이 없거든요.
나의 죄악을 미워하고 깨뜨릴 폭력성 = 질투가 없거든요
나의 전남편 손에서 끄집어 낼, 자기(예수님) 스스로를 치심으로써 나타난 한 의(義)가 없거든요.(그러나 성화론은 완벽하게 정반대임)
나의 선악이라는 법인 여리고성처럼 단단한 그 껍질을 톡 하고 반토막 내는 쪼개어버리는 그 전쟁(십자가 지고 뺑뺑이 도는) 즉 피비린내 나는 잔인한 폭력만 죽음만 난무하는 죽음의 전쟁이 없거든요.
(그렇다고 은혜를 더할려고 죄를 더할 수는 없습니다. 결국은 죄도 은혜도 우리가 다룰 수 없는[전쟁은 여호와께 속했기에] 입장임을 피조물 즉 십자가로 인한 새 피조물 새 창조물의 자리에서 더더욱 그 사랑의 깊이 높이 넓이 길이가 어떠함을 보도록 성령이 그 자리로 이끄시는 겁니다.)
결국 현장에서 간음하다 잡힌 여인은
법을 쥔 바리새인과
이미 용서를 벌써 하신 상태에서 완료된 은혜를 퍼붓는 예수님 사이에서
중간에 갇혀진 포로된 입장에서 고래 싸움에 새우등 터지는 그 폭력에 의해서
그 폭력의 내막이 정작 자신의 쪼개지는 죽음이 아니라 놀랍게도 자신(간음한 여자=죄인)을 건지실려고 그 법의 형벌을 대신 폭력 당하신 그 죽음으로 인한 모든 허물을 사하심을 미리 용서의 세계를 누리라고 주시는 그 긍휼 앞에
그 여인은 죽음보다 강한 질투, 죽음 보다 더 강한 폭력 앞에
자신의 먹보다 더 검은 검디 검은 죄악도 흰 눈의 폭력으로 검은 죄가 다 물러감을 보게 됩니다.
비로소 예수님의 죽음인 십자가의 의미로 자신이 새피조물 곧 흠도 티도 없는 완벽한 거룩을 이미 완료로써 창조된 앞으로 거룩을 그 여인이 더 갖출 필요도 없는 완료된 사랑이 왔기에 첫사랑이 늘 그녀를 붙잡고 놓지 않고 떠나지 않고 늘 함께하는 아주 아주 강력한 스토커가 있기에 감히 죽음도 그 앞에 무릎 꿇게 되고 선악의 법= 죄도 그 앞에 무릎 꿇는 그 십자가의 사랑의 내막을 그 여인은 죽을때까지 누리도록 그 사랑의 발자국 하나 하나를 밟는, 온 세상의 죄악 마저도 다 덮고도 남은 흘러 흘러 넘친 소복히 쌓인 흰 눈을 아무리 더러운 신발로 밟고 밟고 폭력을 가해도 그 흰눈은 더더욱 뽀드득 거리면서 더더욱 뭉쳐진 사랑으로 흰 눈 위를 밟을 수 있도록 지탱해 주고 있다는 첫사랑의 완료를(다 이루었다) 보여주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