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 10:46-52 (다윗의 자손)
막 10:46-52 (다윗의 자손)
이름 : 우리교회(IP:220.81.176.150)
본문 : 마가복음 10장46-52절
제목 : 다윗의 자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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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09-02-15 13:34
다윗의 자손
2009년 2월 15일 본문 말씀: 마가복음 10:46-52
(막 10:46, 개역) 『저희가 여리고에 이르렀더니 예수께서 제자들과 허다한 무리와 함께 여리고에 나가실 때에 디매오의 아들인 소경 거지 바디매오가 길 가에 앉았다가』
(막 10:47, 개역) 『나사렛 예수시란 말을 듣고 소리질러 가로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막 10:48, 개역) 『많은 사람이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그가 더욱 소리질러 가로되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지라』
(막 10:49, 개역)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저를 부르라 하시니 저희가 그 소경을 부르며 이르되 안심하고 일어나라 너를 부르신다 하매』
(막 10:50, 개역) 『소경이 겉옷을 내어버리고 뛰어 일어나 예수께 나아오거늘』
(막 10:51, 개역) 『예수께서 일러 가라사대 네게 무엇을 하여주기를 원하느냐 소경이 가로되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막 10:52, 개역)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니 저가 곧 보게 되어 예수를 길에서 좇으니라』
오늘 본문에 거지가 나옵니다. 그가 어느 정도로 절망이냐 하며는 신체적으로 소경입니다. 이 소경이 알고 있는 예수님과 소경이 아닌 우리가 알고 있는 예수님이 과연 같을까요? 다르다면 어느쪽이 옳은 예수님을 알고 있을까요? 이 소경은 기존의 인간 사회에서 밀릴대로 떠밀린 사람입니다.
쉽게 말해서 경쟁에서 피배자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인간 사회의 게임에서 이 거지는 달리 내세울 것이 없는 사람입니다. 흔히들 사람들이 사는 보람이라는 것은 우선 경쟁 마당이 형성되어야 하고 거기에 자신이 값을 해야한다고 여깁니다. 쉽게 말해서 내세울만한 것을 갖고서 게임에서 버텨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거기에서 진정 ‘내가 누구냐’를 찾으려고 합니다.
만약에 이 경쟁에서 패배하게 되면 사람들 마음 속으로 알 수 없는 공포가 밀려들게 됩니다. “이대로 내 인생이 손을 쓸 수 없을 정도로 굳어져 버린 것이 아닐까?”라는 두려움이 밀려듭니다. 한 번 밀리면 영원히 밀려서 평생 낙오자가 되는 것을 걱정하게 됩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 거지 소경처럼 큰 낙오자는 더물 것입니다.
이 거지가 생활고로 자살해도 누구하나 이상스럽게 여기지 않을 지경입니다. 그런데 이 소경은 뭔가를 보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세상 경쟁에 분주하기에 미처 보지 못하는 것을 이 소경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이 소경은 예수님으로부터 구원을 받았습니다. 장차 심판주되시는 분으로부터 미리 합격 통지를 받은 것보다 더 성공적인 인생이 또 있을까요?
만약에 이 세상 그 누구도 이 소경을 본 그 예수님을 같이 보지 못하고 있다면 그 사람은 결국 실패자가 되는 겁니다. 즉 예수님은 이 소경을 통해서 진정한 구원과 진정한 승자를 알려주신 것입니다. 따라서 이 점이 분명하다면 우리는 예수님에게 이렇게 외쳐야 합니다. “예수님은 제발 우리를 소경으로 태어나고 거지가 되어서라도 소경이 알았고, 소경이 구원받았던 그 예수님을 같이 알게 하옵소서”라고 말입니다.
왜 이런 기도를 우리가 겁을 집어먹고 하지를 못하는 겁니까? 어릴 때부터 우리는 경쟁에서 밀리면 사람 취급 못받는다는 세상적인 원리에 주눅이 들어있었습니다. 그러나 경쟁이라는 것이 실은 구원받지도 못할 자들끼리 모여서 자신들의 불실한점을 감추는 장에 불과합니다. 시편 73:2-5에 보면, “나는 거의 실족할뻔 하였고 내 걸음이 미끄러질뻔 하였으니 이는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질시하였음이로다 저희는 죽는 때에도 고통이 없고 그 힘이 건강하며 타인과 같은 고난이 없고 타인과 같은 재앙도 없나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사람이 왜 악의 형통을 보고 자칫 실족할 뻔했습니까? 그것은 자신도 모르게 자신의 내부에 세상적인 경쟁 타입의 인생관이 새겨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즉 사람들이란 자신을 두고 상상하기를, 세상 경쟁에서 밀리지 않는 수준으로 높게 책정합니다. 그래놓고서 남이나 하나님의 도움이나 자신이 지금 갖고 있는 것이나 모두 자신의 격을 채워줄 있는가를 놓고 늘 점검에 나서게 됩니다.
아내가 남편에게 복종할까 말까를 결정하는 것이 먼저 자신의 격과 품위와 위신을 먼저 염두에 두고 거기에 부합되는 남편일 경우에만 복종할 의사가 생기게 마련입니다. 자신이 미리 생각해둔 남편 이미지와 맞지 아니하면 복종이란 어림도 없는 일입니다.
이렇게 되니 심하게 자신이 현 수준보다 낮아지지 아니하면 항상 자신의 야망과 관련된 하나님상을 포기 못하게 됩니다. 즉 하나님마저 자기 수준에 맞게 조정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참 하나님이냐 아니냐를 놓고서 자신의 야심먹은 것이 제대로 달성되느냐 여부로 가지고 결정하려고 합니다. 심지어는 자신이 아는 복음이나 십자가 이야기를 가지고서도 이 성경 지식 바닥에서 승자로 군림하려는 밑천으로 삼게 됩니다.
그러나 거지 소경 바디매오는 이 모든 경쟁에서 밀려나 있는 자입니다. 하지만 변두리로 밀려났기에 비로소 그는 경쟁 없는 청명한 곳에서 제대로 예수님을 만난 수가 있었습니다. 그에게 있어 격에 맞는 주님은 자신을 무한정 용서하시는 그런 주님이었습니다. 그는 남들이 자기를 높이는 경쟁마당에 뛰어들 동안에 제대로 예수님을 보고 있었던 사람입니다.
소위 본다는 자들이 엉뚱한 시합을 벌릴 때, 그는 예수님과 서로 통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불렀습니다.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라고 불렀습니다. 그가 부른 그 자리에서 우리가 같이 그런 예수님을 부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아니하면 우리는 우리가 조작해낸 엉터리 예수를 믿고 산 셈이 됩니다.
‘다윗의 자손’ 속에서 무한한 용서와 사랑과 불쌍히 여김이 나온다는 사실을 이 소경을 알고 있었습니다. 이사야 9:6-7에 보면,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위에 앉아서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자금 이후 영원토록 공평과 정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다윗의 자리에 앉으신 다윗의 자손께서는 하나님의 옳음을 주시기 위해서, 사람의 열심히 아닌 하나님의 자기 열심히 활동하심을 이 소경을 알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뻔뻔스럽게도 그는 ‘다윗의 자손’을 외쳐 불렀던 것입니다. 이러한 외침 속에서는 기존의 인간 사회에서 통용되는 기준이 모조리 무용지물이 된다는 점도 포함됩니다.
어떤 모임에서 저는 탁자에 놓인 유자차를 제가 잘못 알아서 모과차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어떤 분이 지적하기를 “그것은 모과차가 아니라 유자차입니다”고 했습니다. 세상적으로 봐서 그 분의 말이 맞습니다. 하지만 영적 세계에서 예수님께서 그 차 이름을 모과차로 한다면 누가 뭐래도 모과차가 맞는 겁니다. 그리고 유자차라고 우기는 것은 곧 인간들의 죄에서 파생된 행동이라고 지적받을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자기 열심히 구원받을 자에게 용서를 베푸시는 것은 인간들의 경쟁 마당에서는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반칙입니다. 왜냐하면 인간들의 상식에 의하면 죄있는 자가 죄없는 자들만 갈 수 있는 그곳에 들어갈 수 없는 노릇이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하지만 이런 주장은 어디까지나 인간들의 생각이고,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누구에게 어떻게 죄 문제와 저주문제를 해결했느냐가 관권인 것입니다.
간음하다 잡힌 여인을 일방적으로 예수님께서 용서해주게 되면 그 여인의 운명은 ‘용서’라는 완성된 운명으로 코팅됩니다. 바로 이 점을 안 소경이야말로 진작부터 세상을 다 보고 있었던 승자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승자의 모습으로 오신 분이 예수님이 아니라 진정 죄인의 모습으로 오신 분이 예수님인 것을 우리가 죄인과 저주받은 자리에 앉게 하심으로서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