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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08대구강의17-인간구원을위한신학5-잘린부분(수정)자유게시판고린도전서

08대구강의17-인간구원을위한신학5-잘린부분(수정)

이름 : 구득영(IP:203.223.97.234)

이제 교재 156페이지의 '쏟아지는 강자들'을 살펴보자.

** 목사에게 참된 신앙이 있다고 하면, 그 사람은 그 어떤 장소에서든지 예수 그리스도와 교류하기에 여념이 없다. 이것은 눈앞에 아른거리며 설쳐대는 사람들의 웃음소리나 떠드는 소리보다도 더욱 더 우선한다는 이야기이다. 예수님 앞에 서 있는 목사는 자신이 죄인임을 심도 있게 인정한다. 그리고 고마움과 감사함에 몸둘 바를 모른다.

◈ 쏟아지는 강자들 !!

이렇게 그 무엇을 하든지 간에 주님이 크게 보이고 다른 것은 작게 보일 때, 그것이 곧 참된 신앙이 있는 목사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주님이 크게 보인다는 말은, 자기의 죄가 크게 보인다는 의미인데, 그러니 자기가 지금 살아있는 것에 대해서도 항상 감사가 넘친다는 것이다.

그러니 목사는 설교를 할 때, 자기가 바로 그런 인간임을, "저는 이렇게 살아있는 것만으로도 감사를 느낍니다" 라고 했을 때, 그것이 진정한 설교자의 모습이 아니냐는 것이다. 또한 "저는 지금의 죄인의 자리에서 예수님의 의인됨을 증거합니다" 라고 말이다.

◈ 설교자는 먼저 자기 죄가 크게 보여야 !!

그것이 바로 설교의 핵심이 되는데, 그러니 지금 자기 눈앞에 교인이 몇 명이 있는지, 그것이 자기의 눈에 들어올 수가 없다는 것이다. 설교시간에 아이들이 좀 떠들어도 그것에 짜증도 내지 않고 말이다. 물론 실제로 그렇게 되면 약이 오르기는 한데, 자기가 준비한 것이 있는데 다 엉클어지니 말이다.

설교를 하다가보면 별의 별 사람들이 다 있는데, 휴대폰을 들고 나가는 사람, 아이가 떠든다고 같이 야단을 치는 사람, 또한 졸음을 깨운다고 이상한 포즈를 취하는 사람도 있고 말이다. 그냥 잠이 오면 자면 되는데 말이다. 잠도 주님이 주시는 것인데 말이다.

그러니 교인들의 그런 작은 움직임에 너무 신경을 쓰지 말고, 또 심방을 10번을 가서 나오지 않아도 따지지 말라는 것이다. 단지 자기가 지금 이 자리에서 이렇게 감히 설교를 하고 있다는 것이 웬 기적인지, 바로 그러한 마음가짐으로 설교를 하면 된다는 것이다.

이제 교제 157페이지에 있는 성경구절만 하고 마치겠는데, 이게 오늘강의에서 제일 중요한 부분인데, 고린도전서 16장 22절을 한번 살펴보자.

(고전 16:22)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거든 저주를 받을지어다 주께서 임하시느니라

이 성경구절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주님을 사랑하지 못한다는 것을 인정해야하는데, 즉 순서가 어떻게 되는고 하니, 하나님의 사랑이 먼저 있고, 그 사랑에 맞는 사람으로 피조물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러니 있는 인간을 사랑하라는 말이 아니고, 그것은 전혀 안 되는데, 왜냐하면 인간은 자기 말고 다른 인간을 사랑할 수 없으니 말이다.

◈ 사랑이 먼저, 그 사랑을 증거하기 위해서 맞춤형 죄인을 !!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사랑을 먼저 완성시켜놓고서, 바로 그 사랑을 증거하기 위해서 맞춤형 죄인을 만들었는데 갖다 붙였는데, 바로 그러한 자만이 구원을 받게 되어있다는 것이다. 그러한 사람을 확인하기 위해서 뭐라고 하는고 하니,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거든 저주를 받을지어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맞춤형 인간은 "예, 맞습니다" 라고 하면서 고개를 끄덕인다는 말이다.

그런데 그러한 맞춤형 인간이 아니라고 하면 뭐라고 하겠는가? "아니, 말로는 사랑의 하나님이라고 해놓고, 저주를 하면 그것이 무슨 사랑의 하나님인가?" 라고 한다는 것이다. 이것뿐만이 아니라 사실 성경전체가 다 그러한데, 모든 성경말씀이 다 이러한 권면과 명령이라는 말이다. 그것은 이런 말씀을 지켜서 구원을 받으라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다만 하나님께서 자기 맞춤형 인간에게 속삭이는 것인데, "돈을 사랑하는 것이 일만 악의 뿌리이다" 라고 귀에 대고 이야기를 하면, "아하, 정말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라고 하면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참으로 낯선 것인데, 그러니 신앙은 오기로 가능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가 그런 말씀에 고개를 끄덕일 수 있다는 것에 대해서 자기도 이상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주님이 "먹는 것과 입는 것으로 족한 줄로 알라" 라고 하면, 맞춤형 인간은 뭐라고 하겠는가? "예, 알겠습니다" 라고 한다는 말이다. 참으로 이상하다는 말밖에 다른 말을 할 수가 없는데, 그것은 바로 맞춤형 인간, 즉 성도이기 때문에 그렇다는 말이다.

◈ 주님과 함께 있는 것이 좋은 것이여 !!

그런데 목회자가 교인 수에 신경을 쓰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주님은 두 세 사람이 있는 곳에도 함께 있겠다고 했는데 말이다. 그러니 제 아무리 교인 숫자가 적어도 자기 마누라가 있고 아이가 한 명만 있어도 세 명은 되는데, 물론 총각은 힘이 들겠지만 말이다. 그러니 제 아무리 사람의 숫자가 적어도 주님과 함께 있는 것이 좋지, 주님이 없는 곳에 천 명이 있고, 또한 만 명이 있으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는 것이다. 자기 오기만 높아가지 말이다.

교재 157페이지를 조금만 더 보자.

** 하고 싶은 대로 살아라, 아무 소리도 하지 않을 게. 단 교회에 정기적으로 돈만 내라.

목회자가 처음에는 그래도 말씀대로 하려고 애를 쓰는데, 그러나 아무리 해도 안 된다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남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 "그냥 당신 마음대로 사세요. 아무 소리도 하지 않을 게요. 그러나 단 교회에 정기적으로 돈만 내세요" 라고 말이다.

저도 시골에서만 20년을 넘게 목회를 했지만, 그래도 그렇게 몸이 피곤하고 연세가 많은 데도 주무시지를 않고, 그 말씀이 끝날 때까지 모두 다 듣고서는 '아멘' 이라고 한다는 것이 참으로 기적이라는 것이다. 물론 주무시는 분들도 계셨지만 말이다.

◈ 시골교회 교인들의 특징은?

시골교회 교인들의 특징이 다들 설교시간에 자는 것인데, 교회에 오면 사실상 분위기가 잠을 청하기 좋은데, 특히 장로님이 기도를 하면 몰려오는 졸음을 참기가 힘든다는 말이다. 이것이 과학적으로도 설명이 되는데, 즉 같은 파장이 반복되면 잠이 온다는 것이다. 장로님의 기도멘트가 바로 잠을 부르는 멘트라는 말이다. 마지막 찬송을 하면 잠에서 깨어나고 말이다.

그래서 여름철에는 교인들이 더워서 잠을 더 자게 되는데, 그래서 깨운다고 툭툭 강대상을 두드리면 그것도 동일한 파장이 되어서 또 잠을 청하고 말이다. 그래서 목회자는 하다가 하다가 다 포기하고는 "여러분, 그냥 돈만 내세요" 라고 하고 만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교재 157페이지를 한번만 더 보자.

** 그것뿐이다. 사람들이 만드는 교회는 교회가 아니다. 복음이 있는 그때만 일시적으로 교회가 될 뿐이다. 복음이 사라지면 교회도 곧장 사라진다. 만약에 교회가 스스로 교회가 되려고 한다면 복음은 그곳에서 철수한다. 그렇게 되면 참된 교회는 떠나고 유사교회가 그 자리를 대신한다.

◈ 목사가 복음을 잘 전하는지 감시하세요 !!

이번에 장로와 집사 임직식을 하면서 참으로 감사했던 것은, 설교를 하고 권면을 한 목사님의 동일한 멘트가 무엇이었는고 하니, "임직자 여러분, 목사가 복음을 잘 전하는지 감시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임직을 받았습니다" 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러니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 이야기들을 다른 목사님들이 앞에서 모두 하고 말았는데, 그래서 저는 그냥 간단하게 다음과 같이 권면을 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즉 "여러분, 자기가 훌륭하게 되려고 노력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왜냐하면, 성도는 복음에 진지해야지, 자기 자신에게 진지해지면 안 됩니다" 라고 말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축사를 한 목사님은 뭐라고 했는고 하니, 옛날에 사람을 사형시킬 때 시체를 함께 묶어서 죽이는 방법이 있었는데, 시체가 썩어서 그 사형수의 몸에 들어가면 죽게 되는 그야말로 끔찍한 방법이라는 것이다. 그것을 예로 들면서, "여러분은 이제 예수님과 함께 묶여서 죽었습니다" 라고 했다는 것이다. 참으로 무시무시한 이야기인데 말이다. 그것이 어디 임직식에서 축사를 하는 목사의 입에서 나올 소리냐는 것이다.

◈ 복음이 아니면, 목사의 설교는 객소리에 불과 !!

그러므로 정말 이러한 모든 것에 대해서 감사하지 않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물론 우리교회의 경우도 복음이 아니고 교회중심이라고 하면 당연히 교회가 아니고 말이다. 그렇게 되면 목사의 설교가 설교가 아니라, 그야말로 객소리가 되고 만다는 것이다. "내가 이런 설교를 하면 몇 명이나 더 붙을까?" 라는 것이니 말이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복음이 복음대로, 즉 십자가의 용서하심이 용서하심 그대로 유지될 때만 교회인 것을 알았사오니, 우리 자신부터 사람을 의식하지 말고, 오로지 주님의 십자가만이 크게 보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09,01,27 00시 01분에 마침.

설이라고 이틀을 푹 쉬었는데, 그런데 이 초조함은 뭐지?

[영화평] 눈먼 자의 도시 (Blindness)
08,12 이근호

주제 사라마구의 원작 소설(해냄 출판사)을 페르난도 메이렐레스 감독이 영화로 만들었다.

[ 줄거리 ]

복잡한 대도시의 네거리.

신호가 왔음에도 맨 앞에 있는 차가 출발을 하지 않는다. 졸지에 일본인 운전사가 앞이 보이지 않는 것이다. 그 뒤에 그가 접촉한 모든 이들, 친절을 가장한 차 절도범, 치료를 했던 안과의사 등등 모든 사람들이 실명을 해버린다. 그들이 보고 있는 것은 ‘백색의 바다’ 뿐이다.

하얀 스크린 외에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질병이 삽식 간에 그 도시에 번진다. 행정 당국은 크게 당황하고 안과 질환의 전문가 집단 내부에서도 원인 모를 실명 사태가 일어난다. 당국은 군을 동원해서 실명한 자들을 따로 격리시킨다.

이때부터 실명한 자들은 생소한 장님의 생활을 해야 한다. 전에는 각자 독특한 직업에 종사하더라도 이제는 장님이라는 점 외에는 모든 차이와 차별이 인정되지 못한다. 남과 여, 노인과 아이의 차이도 무시된다. 그동안 남의 눈 병을 치료하면서 단란한 가정을 갖고 있었던 주인공 가정도 당국의 명령에 따라 수용소에 갇히게 된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여자 주인공인 안과 전문의의 아내(줄리안 무어)는 실명을 하지 않고 있다. 그녀는 남편을 돌보아주기 위해 당국을 속이고 남편의 곁에서 그 수용소 생활을 같이 하게 된다. 이로서 그녀는 유일하게 ‘보는 자’이다.

이제 남은 것은 수용소 내에서 어떻게 집단생활을 평화롭게 하면서 목숨을 부지하느냐 하는 문제뿐이다. 세 병동으로 짜인 수용소에서 제 3의 병동이 다른 병동에 대해서 절대적 권력을 행사하게 된다. 왜냐하면 그들의 우두머리에게는 유일하게 권총이 있기 때문이다. 골고루 주어지던 시 당국의 급식이 수용소 자체에서 일어난 새로운 질서 개편으로 인하여 제 3병동의 두목이 다 장악하게 된다. 하지만 여전히 그도 눈이 멀어있기는 마찬가지다.

하지만 전직 바텐더였던 그가 권력을 원활하게 펼칠 수 있은 것은 그의 곁에 애초부터 장님이었던 사나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즉 어두움의 세계에 대해 다른 사람에 비해서 그만큼 숙달되어 자였던 것이다. 실명의 세계에서는 장님 되었던 자가 월등히 유리하다. 거기에다 권총까지 갖고 있는 자와 합세했으니 이는 곧 생명 여탈권을 의미하는 것이다.

숙달될 장님과 권총의 힘으로 그들은 모든 양식을 독점해서 다른 병동, 다른 사람들에게는 고가의 귀금속을 받고 되팔아먹는다. 결국 사람들이 내놓은 보석마저 고갈되자 급기에 여자를 상납하기를 요구한다. 여자를 내놓지 아니하면 그 병동에는 급식을 팔지 않겠다고 선언한다.

아내를 가진 남편과 아내들은 심적인 갈등을 일으킨다. 사랑하는 아내를 폭력자에게 빼앗길 수 없다고 주장하는 남편들과, 거기에 비해서 양식을 구해서 조금이라도 목숨을 부지할 수만 있다면 그까짓 윤리 도덕은 나중 문제라는 여성들의 주장이 맞서지만 결국 남편들도 양식 앞에서는 무력하다.

유일하게 눈을 뜬 의사의 아내는 가위를 들고 들어가서 한참 여자를 탐하고 있는 두목의 목을 찔려 죽여 버리고 그 와중에서 불이 나면서 살아남은 자들은 모두들 황급히 수용소 마당으로 나온다. 평소에 나왔다가는 군인들이 총을 맞게 되지만 왠지 조용하다. 의사가 아내가 육중한 수용소 문을 열고 보니 이미 그 도시의 모든 인간들이 어느 누구랄 것이 없이 장님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더 이상 수용에 수용이 불가했던 것이다. 수용소 안이나 수용소 밖이나 보이는 자는 오직 의사의 아내뿐이었다.

도시는 더럽게 황폐해졌다. 먹을 것을 찾아서 사람들은 더듬거리면서 슈퍼마켓을 강탈하고 있었다. 아무도 손대지 못한 음식 창고를 발견한 의사 아내는 수용소에서 가깝게 지내는 몇몇을 데리고 옛날에 살았던 자기 집을 찾아 들어간다. 그리고 정성껏 그들의 손발이 되어 수발해준다.

서로가 서로를 못보고 있는 시간을 함께 보내고 있기에 상대방이 흑인이든 백인이든 노인이든 젊은이든 그런 조건을 따지지 않고 그들의 서로의 마음만 점검하면서 하나가 되어 간다. 마음만 따뜻하다면 다른 조건들은 상관없었다. 이 진리를 찾기까지 그들은 눈이 멀어지는 경험을 한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맨 처음 장님이 되었던 그 일본인 남자가 눈이 보이기 시작했다. 모두들 절망에 빠져 있다가 일본인 남자가 시력이 회복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드디어 희망이라는 것을 갖게 된다. 나도 언젠가는 세상을 다시 보며 살날이 올 것이라고…

[평가]

감독은 강력한 메시지를 모호하지 않으려 했다. 그것은 바로 모든 이가 눈이 감겨 사는 세상에서 유일하게 세상을 제대로 보고자가 행사해야 할 의미와 사명에 관한 것이다. 본인 아니게 유일한 희망으로 남게 된 여자 주인공은, 처음에는 자기 남편만 편하게 하면 된다고 생각해서 수용소에 잠입했지만 막상 남편을 행복하기 위해서는 다른 장님들에게 대해서도 동일한 봉사를 수행해야 한다는 점을 알게 된다.

즉 섬겨야 할 자를 정하는데 있어 막상 당해보니 자신이 선택할 사항이 아니라는 것이고 상황이 도리어 자신을 선택했다는 사실에 직면한다. 하지만 자기 혼자서 수많은 장님들을 다 수발하기에 너무 힘들기에 그녀는 차라리 자신마저 장님이 되어 섬김 받음과 섬김 해줌의 관계 자체에서 해소되어버릴 것을 원한다. 하지만 그녀의 봉사는 단순히 장님들의 일상생활의 어려움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사람의 집단에서 필히 발생하는 권력의 횡포마저 결정적으로 제거시키는 일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즉 감독은 외치고 싶은 것이다. 권력자들이 지배하기 위한 권력을 창출하는 일을 하고 일반 대중들이 생존이라는 점을 들어서 거기에 순복하는 현실들은 모두 자신들이 영적 장님이기에 발생되는 사태라는 것이다. 참으로 그 중에 영적으로 제대로 세상을 보는 자가 있다면 그 권력 창출의 무모함과 억지를 근원적으로 제거해 버리고 자유를 향하여 탈출할 것을 계시할 것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눈 먼 자들에게 있어 눈 뜬 자는 공연히 시기와 질투의 대상일 뿐이다. 다수의 대중들이 원하는 것은 자신들도 눈 뜬 자와 같이 눈 뜨고 싶은 것이다. 더 이상 눈 뜬 유일한 여성 지도자에게 억매이기 싫은 것이다. 하지만 세상 모든 이가 다 장님이 되었다는 소식은 곧 그들로 하여금 눈 뜰 수 있다는 희망은 있을 수 없다는 사실에 직면하여 절망적인 미래만 그리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영화는 마지막에 기적을 만들어 낸다. 맨 처음 영문도 모르는 채 장님이 되었던 그 자가 다시 세상을 보게 되므로 말미암아 드디어 그 남자에게 일어날 기적이 언젠가는 자기에게도 일어날 수 있다는 희망이 온 누리에 퍼지게 된 것이다. 마치 예수님께서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신다는 소식은 곧 자신의 부활로 이어질 수 있다는 소망을 들뜨게 하는 것과 유사하다.(고전 15:20-22)

(평가)

복음적 입장에서 볼 때, 이 영화는 마치 기독교 교리와 연관된 상징과 비유들의 나열처럼 보인다. 요한복음 9:39-41에 보면,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소경 되게 하려 함이라 하시니 바리새인 중에 예수와 함께 있던 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 가로되 우리도 소경인가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소경 되었다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저 있느니라. 고 되어 있다.

즉 소경된 자이기에 자신의 누리고 있는 행복과 사랑과 희생과 봉사와 소망의 가치를 모르고 권력과 재물로 사람의 가치를 평하는 천지가 되었다는 것이다. 참으로 영적으로 눈이 열진 자의 입장에서 보면, 그런 가치들은 그저 ‘뭔가 보인다. 는 이 극히 단순한 행복과 다행함과는 족히 비할 바가 못 되는 것이다.

그 증거가 영화 마지막 근처 장면에서 하늘에서 소나기가 쏟아지니 모든 거리의 장님들은 그 장대비를 맞으면서 은혜에 잠겨 감격해서 어쩔 줄 모른다. 눈을 뜨고 살 때에 아무런 의미가 없었던 대수롭지 않는 작은 일 속에 그토록 고귀하고 숭고한 행복이 덩어리째 담겨 있었던 것을 그들이 미처 몰랐던 것이다. 그만큼 영적으로 소경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증거다.

하지만 이 영화는 끝까지 절망을 그려내고 있지 않다는 점에서 비복음적인 색채를 비쳐낸다. 참으로 신의 심판을 궁극적으로 믿는 자라면 손에 만져지는 당장의 무서운 저주의 형벌보다는 차라리 용서를 구하게 된다. 즉 하늘에서 불이 떨어지기를 요구했던 제자들의 요청을 예수님의 거부하시고 스데반 집사의 마지막 말은 성경은 귀하게 담아 낸다.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가로되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행 7:60)

신앙은 오기가 아니라 낯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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