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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20081212-(2) 서울강의녹취 : 에베소서 제 26강자유게시판에베소서

20081212-(2) 서울강의녹취 : 에베소서 제 26강

이름 : 오용익(IP:211.194.56.76)

에베소서 제 26강 (이 근호목사, 2008년 12월 12-b 서울의존교회)

‘원인 없는 결과로서 내가 되었다.’ 이것이 바로 신앙인, 성령 받은 사람은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성령 받지 못한 사람은 누가 살아 있느냐? 당당하게 자기가 살아 있습니다. 당당하게 자기가 살아 있는 경우는 온갖 더러운 욕심들이 다 튀어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주 안에서’와 ‘내 안에서’ 가 대비됩니다. 주님께서 죽으신 것은 ‘내 안에서’의 사람들로 인해서 죽었습니다.

‘나는 내 안에 있 나를 포기 못하겠다. 예수야, 꺼져라. 저리가라, 당신은 나를 괴롭게 하는 자다.’ 이것이 엘리야가 아합을 보고 한 이야기죠. ‘너는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 자로다.’ 라고 했는데 ‘예수 때문에 힘들다. 저리가라.’ 라고 했는데 이것이 주님보시기에는 욕심이 되고 방탕이 되는 겁니다.

내가 원인자로 살아 있으면 그 모든 것이 ‘주 밖에서’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에 그것이 바로 음란이고 방탕이고 탐욕이고 그것이 바로 더러운 것이 되는 겁니다. 이것을 모르고 사람들은 에베소서에 나오는 말씀들을 오해합니다.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를 이같이 배우지 아니하였느니라 진리가 예수 안에 있는 것같이 너희가 과연 그에게서 듣고 또한 그 안에서 가르침을 받았을찐대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사람을 입으라’ 라는 이런 대목들에서 예수님께서 내 안에서 나오는 것 말고 예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것으로서 살아가는 그것이 바로 새로운(new)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내안에서 나오는 것은 뭐냐? 옛것(old)입니다. 사람들은 나의 옛것을 가지고 이것을 조립한다고 ‘그래, 나는 이제부터 방탕 안 할 거야. 음란도 안 할 거야. 바르게 살아야지.’라고 나서고 있습니다. 나쁜 것을 가지고 좋은 삶을 살겠다고 하는 그것이 바로 썩어져 가는 욕심에서 나온 거예요. 하나님의 ‘주 안에서’ 쏟아지는 새로운 것은 뭐냐? 한마디로 용서입니다.

‘주여, 세상에 나 같은 인간도 용서해주십니까?’ 이게 새로운 것입니다. ‘나 같은 죄인도 용서해주시다니….’ 이게 새로움입니다. 목사들이 에베소서의 이 본문을 가지고 뭐라고 하는지 압니까? ‘여러분들은 구원받았습니까? 성경에 보니까 구원된 사람은 새사람을 입으라고 했는데 왜 교회에 헌금도 안냅니까? 만 날 노래방에 가서 놀기나 하면서, 맛있는 것 다 사다 먹어가면서 호의호식 하면서 왜 교회에 그토록 무관심하고 특히 돈을 안내십니까?’

그렇게 설교들을 하는데 그런 때는 ‘너나 잘하세요.’라고 해주세요. 정말 새사람 같으면 이렇게 나옵니다. ‘여러분, 나같이 돈만 하는 목사도 용서받았습니다. 나 강도입니다. 전과 14범입니다. 하지만 새로운 해석이 밀려왔습니다. 종말이기에. 마지막 때에 거저 주신다는 새로운 해석이 밀려와서 저는 사라지고 그저 저에게 말씀만 남았습니다. 주의 용서만 남았고 나의 나된 것은 그저 은혜일뿐입니다.’

이렇게 벌거벗은 임금님이 되는데 여러분도 벌거벗지 않으시렵니까? 그것이 에베소서의 해석입니다. 이것을 공자, 노자, 장자, 삼강오륜, 이런 식으로 지킨다고 얼마나 시달렸습니까? 해방입니다. 옛날에 바리새인들이 큰소리쳤던 이유가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성경연구에만 매달렸고 다른 직업이 없었던 사람들입니다.

그 밖에 다른 사람들, 백정이나 세리 같은 사람들이 성경 볼 시간이 없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자연적으로 계급이 생겼습니다. 인간이 얼마나 지킬 수 있느냐, 인간의 행함을 잣대로 사용했습니다. 성전에 기도한 바리새인이 나오죠?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구제하고 십일조 했습니다. 나는 저 세리와 같지 않은 것을 감사합니다.’ 라고 기도했지요.

그럴 때 세리는 뭐라고 기도했습니까? ‘성경 몇 장 읽고….’ 그렇게 하지 않고 ‘주여, 저는 죄인입니다.’ 그 때 주님께서 ‘둘 중에 누가 의인인가? 자기를 죄인이라고 하는 그 사람이 의인이다. 왜? 나는 죄인을 부르러 왔기 때문이다.’ 라고 했습니다.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것이 아니고 죄인을 불러서 의인되게 하고 구원시키러 왔다.’는 말입니다.

아까도 이야기했듯이 행동하는 사람이 판정을 내릴 것이 아니라 판정은 누가 내린다? 보이 않는 십자가지신 예수님이 최종 판정관입니다. 어느 목사가 나보고 ‘죄인이다’ 라든지 어느 집사가 나보고 ‘죄인이다’라고 해도 그런 말 듣지 마세요. 듣지 마세요. ‘예수님, 저 어떻게 생각합니까?’ ‘피 있나?’ ‘피 있습니다.’ ‘그러면 피를 보고 넘어가리라.’ 정말 간단명료합니다.

제가 『피』라는 제목으로 책을 썼는데 사람들이 그 책 내용을 어려워들 하는 것 같아요. 우리교회 조 장로님도 ‘이 책이 글은 참 아름다운데 이 책의 전체 의도는 잘 파악이 안 된다’고 하십니다. 그래서 ‘아하, 이 책의 의도를 좀 알릴 필요가 있겠다.’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대충 그 취지를 지금 밝혀보면 이렇습니다.

그 책을 쓴 취지는 두 가지를 피했습니다. 첫째는, ‘피를 믿고 내가 구원받겠다.’ 라는 사람을 의도적으로 피해갔습니다. 그것이 틀렸다고 했습니다. 두 번째, 피를 예수님의 죽음으로 바꾸어서 예수님의 죽음, 또는 예수님의 사랑, 이런 것으로 바꾸어서 해석한 지난 2000년 기독교 역사가 엉터리라는 것을 알렸습니다.

성경에서는 예수님의 피로 구원하는데, 거기서 피를 빼버리고 예수님의 희생, 예수님의 죽음으로 바꾸어 버립니다. 아까 제가 이야기했잖아요. 하늘의 뜻과 지상이 만날 때 무엇으로 만난다? E.T가 만날 때 무엇으로 만나던가요? 손가락끼리 만나잖아요. 하나님과 인간이 만날 때 거기서 무엇이 발생되었습니까? 피가 발생되었습니다.

피가 발생되었다는 것은 무슨 말입니까? 모든 인간은 가해자입니다. 우리교회 이 ○○ 성도님이 계시는데 그 『피』읽기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아서 오후예배 때 기도하기를 ‘하나님 아버지, 제가 주님을 해친 가해자인데 피해자 이신 주님이 저 같은 가해자를 용서해주시니 감사합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야, 피라는 책을 이해하는 독자가 저렇게 우발적으로 생겼구나. 우발적으로.

‘그냥 용서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게 아니라 실존적으로 우리가 가담을 해 줘야 합니다. 어떻게? 가해자로 가담을 해 줘야 합니다. 아까 말한 대로 ‘우리가 가족 간에 단란하게 행복하게 웃는데 왜 그 웃음을 하나님께서 건방지게 빼앗아 가는가? 하나님이고 예수님이고 내 것을 건드리는 인간은 가만 놔두지 않는다. 나는 조져버린다.’ 라는 그 인간, 그 가해자를 용서해주니 욥처럼 입을 가리고 할 말이 없는 거예요.

‘주님, 저 잠잖지요?’ 그것이 아니라 ‘신이면 다인가?’ 말이죠. 『피』라는 책에 보면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나는 남이 다 나를 버릴지라도 지옥에 가서조차 나를 챙기겠다. 지옥에 가서조차 나는 내 사랑을 포기치 못하겠다.’ 그게 인간입니다. 어떤 가수가 그런 노래 불렀습니다. 지옥 천국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누가 나를 위로해줄까? 여러분!’

‘내가 나를 위로한다.’ 그런 인간을 하나님이 건드려 놓았으니 인간이 가만있겠습니까? 발작을 일으키죠. ‘뭐야 너는? 하나님이면 다야? 왜 내 인생을 망치는 거야.’ 라고 하는 인간, 주님께 가해자입니다. 『피』라는 책에 보면 다섯 가지 아주 공손한 말이 나오죠.

“옛날 어느 마을에 복음을 자기 목숨보다 더 귀하게 여기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사업하다가 부도를 당해 파산했습니다. 그래도 복음을 자기 목숨보다 더 귀하게 여겼습니다.

옛날 어느 말에 복음을 자기 목숨보다 더 귀하게 여기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아내를 병마에 보내고 자식은 가출해서 사고치고 지금 교도소에 수감되어 있습니다. 그래도 복음을 목숨보다 더 귀하게 여겼습니다.

옛날 어느 마을에 복음을 자기 목숨보다 더 귀하게 여기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개척교회를 하면서 가산을 다 탕진하도록 복음만을 전했습니다. 그랬더니 교인들이 하나 둘씩 줄기 시작해서 급기야 자기 가족외에는 단 한명의 교인도 남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그는 복음을 자기 목숨보다 더 귀하게 여겼습니다.

옛날 어느 마을에 복음을 자기 목숨보다 더 귀하게 여기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빈민들을 위해 산을 개간하다가 다쳐서 평생 불구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래도 그는 복음을 자기 목숨보다 더 귀하게 여겼습니다.

옛날 어느 마을에 복음을 자기 목숨보다 더 귀하게 여기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어느날 졸음운전을 하다가 막 신혼여행을 다녀온 신혼부부를 즉사케 했습니다. 합의금이 없어 여태껏 교도소에 있습니다. 그래도 그는 복음을 자기 목숨보다 귀하게 여겼습니다.”(11-12쪽)

왜? 해석을 어떻게 했습니까? 원인-결과, 내가 원인이 되었으니 결과도 주어진다는 그 해석, 내가 재산 바쳤으니까 교회 부흥된다는 그런 식의 원인 - 결과를 없애버리고, 원인 없는 결과가 주어지게 되면 ‘이런 못난 인간, 목회 성공 못하는 인간도 주께서 피로써 구원하다니 너무 감격스럽습니다.’가 됩니다.

피를 예수님의 죽음, 희생으로 해석해 버리면, 나는 안 죽고 예수님은 그냥 나의 대상이 됩니다. 대상이 되면 예수님이든 하나님이든 소유하려 듭니다. 소유하게 되면 내가 부인되는 것이 아니고 내가 더욱더 팽창되고 배불러집니다. ‘야, 내가 예수도 알고 사도바울도 알고 ….’ 자기가 부풀려집니다. 예수가 하나의 대상으로 있으면 자기가 위대해집니다.

‘하나님, 어때요? 제가 하나님 알아주니까 좋지요?’ 자기가 더욱더 커져요. ‘저 인간 저거, 예수도 모르는 인간이….’ 이렇게 됩니다. ‘이게 어디서, 성경 백독도 못한 게. 나는 천 독 했는데.’ 점점 더 자기가 팽창합니다. 기독교 2천년 역사란 예수를 이용해서 자기자아를 발전시키고 팽창시키고 늘어나게 하는데 보탬 되는 신앙을 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런 신앙을 무척 좋아한 겁니다.

자기는 절대로 가해자가 안 되고 마치 피해자인 것처럼 행세하는 겁니다. 사람의 행동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그 방정식이 있습니다. 우선 자기를 원통하고 억울한 사람으로 간주를 합니다. 그 다음에 신에게 빌면 자기의 한 맺히고 원통한 그것을 신이 보상해주면 자기는 원상 복귀 되어서 아주 정당한 사람이 된다고 봅니다.

예를 들어서 제가 지금 이 음료를 마십니다. 누가 묻습니다. ‘목사님, 왜 마십니까?’ ‘강의한다고 내 원기가 다 빠져서 피곤해 죽겠으니까 아주 억울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걸 마심으로 원상회복 되어서 아주 정당한 사람이 됩니다.’ 라고 하죠. 그래서 모든 인간의 행동은 ‘내가 여기 있다는 것이 당연하다.’는 그 정당함을 과시하기 위해서 행동에 나섭니다.

그래서 행동을 하기 전에 자기를 미리 원통하고 억울한 사람으로 만들어줘야 자기가 어떤 행동을 해도 ‘그래, 네가 그렇게 원통한 행동을 했으니까 내가 봐줄게.’ 라고 전부 다 그냥 용서해 주면서 넘어갈 수가 있습니다. 보세요. ‘용서해 줄만 해서 용서해준다.’ 하고 ‘죄인인데 용서해준다.’ 하고 어느 것이 정답입니까?

어느 것이 하나님의 용서입니까? 1) 너무 억울해서 용서해준다. 2) 나쁜 짓 했는데 용서해준다. 어느 것이 하나님의 용서입니까? 2번입니다. 2번인데 우리는 성경 보면서 자꾸 1번으로 보는 거예요. ‘세상 살면서 너무 고생하니까 불쌍하다고 성경 보게 해 주셨구나. 하나님 제가 성경 봤습니다.’ ‘그래 착하다. 내가 용서해줄게.’

자꾸 우리는 내가 어떤 착한 일을 했다는 내 쪽의 원인과 그 보상차원에서 용서해준 그것을 가지고 구원받은 줄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사도바울이 예수 믿는 사람 몇 명 죽였습니까? 엄청 죽였습니다. 그 사람은 예수 믿는 사람들을 그냥 교도소에 가두기만 한 사람이 아닙니다. 많이 죽였다고 했습니다.

그 사람이 예수 믿는 사람들 죽일 때 그들의 가족을 생각 안했겠습니까? 30대 가장을 죽이면 그의 아내와 어린 자식들의 뒷일을 생각 안했습니까? 하지만 사도바울은 ‘그것이 하나님의 정당한 일이다.’ 라고 여긴 겁니다. ‘그 가족은 불쌍하지만 하나님의 뜻이 이것이니 잡아 죽여야겠다.’ 라고 여기고 많이 죽였습니다.

그렇게 많이 죽였는데 하나님께서 그를 그 보상차원에서 구원했습니까? 아닙니다. 디모데전서 1장에 보면 하나님은 창세전에 이미 사울을 바울 되게 하기로 작정했기 때문에 그런 코스를 밟게 했습니다. 이런 소리 들으면 남에게 사기 당해서 한 맺힌 사람들 저를 때려죽이려고 들 겁니다.

‘당신 논리에 의해서 실컷 나쁜 짓만 골라서 해도 피만 한 방울 바르면 구원받는다는 그 말이지? 이 땅에서 빼앗기고 한 맺히고 억울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하나님이 그런 사람들의 원한을 들어주는 식으로 구원하는 것이 맞잖아!’ ‘아닌데요. 신약 때는 모든 사람들이 다 예수를 버렸고 심지어 제자들도 예수를 버렸는데요.’

베드로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라겠습니다.’ 라고 할 때에 예수님이 오지 말라고 했습니다. 왜? ‘네가 있을 자리가 못된다.’고 했습니다. 천국은 어떤 인간도 그 칸막이를 뛰어 넘을 수가 없습니다. 이미 에덴동산에서 쫓겨날 때부터 ‘너희들끼리 놀아라.’ 라고 내어버려두셨습니다. 자진해서 천국갈수 없습니다. 그냥 마지막 때에 주께서 용서하심으로 그냥 구원하는 겁니다.

에베소서 4:17,18

“그러므로 내가 이것을 말하며 주 안에서 증거 하노니 이제부터는 이방인이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함같이 너희는 행하지 말라 저희 총명이 어두워지고 저희 가우데 있는 무지함과 저희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

하나님의 생명이라는 것은 인간의 행함으로 만들어낼 수 없습니다. 만일에 가족도 친척도 아무도 돌보지 않는 어떤 나이든 노인을 제 아내와 함께 돌본다고 합시다. 그럴 때 어떤 마음이 들겠습니까? ‘하나님, 제가 새사람 되어서 예수님 본받아서 착한 일 하고 있습니다.’ 이런 마음이 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이 노인이 아프지 하시든지 이렇게 아프면 조용히 주무시는 것처럼 조용하게 데려가시든지 해야지, 왜 이분도 힘들고 나도 힘들도록 하십니까?’ 라는 원망이 나온다는 말이죠. ‘하나님, 목사인 제가 자식도 아니고 친척도 아니면서도 하필 일요일날 이런 일을 해야만 되겠습니까?’ 라는 원망을 속으로(겉으로는 안하면서도) 하게 되지요.

이것이 짜증으로 나오지요. 그것이 속에 그냥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자기 딴에는 선을 행하면서도 갑자기 자기원망이 튀어나와버립니다. 이것이 바로 방탕이고 옛사람의 특징입니다.

에베소서 5:1,2

“그러므로 사랑을 입은 자녀같이 너희는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고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서 향기로운 제물과 생축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

여기 보면 “사랑가운데서 행하라.”고 되어 있지요? 이게 새사람입니다. 만약에 이런 마음으로 홀로된 노인을 돌볼라 치면 ‘목사님, 힘드시지요?’ 할 때 ‘제 팔자인데 어쩌겠습니까?’ ‘안 오셔도 되는데.’ ‘사실은 저도 안 오고 싶습니다.’ ‘그러면 그냥 가셔도 되는데요.’ ‘갈까요?’ ‘그냥 오신 김에 좀 더 있다 가세요.’ ‘그러면 좀 더 있다 가죠. 뭐.’

우리 노회에 계신 어떤 목사님과 녹취록발간 때문에 함께 동행 하는 중에 큰 은혜를 받았어요. ‘목사님, 우리 교회 어떤 분은 헌금할 때 십의 2조, 3조 하는 분이 있습니다. 제가 그냥 가만 놔둡니다. 그만큼 헌금이 많이 들어오거든요.’ 제가 가만 듣고 있으면 칭찬을 안 할수 없었습니다. 아직 40도 못된 분이 목회를 제대로 할 줄 몰랐습니다.

아마 어지간한 목사 같으면 ‘신약에 무슨 십일조가 있습니까?’ 이렇게 따지고 들것인데 가만히 놔둔다는 것, 이것은 ‘교회란 내가 간섭하고 관리한다고 해서 교회가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도 이것은 누구 교회다? ‘주님이 관리하는 교회다.’라는 겁니다. 그러면 ‘십일조 하지 말라.’ 가 복음입니까? 아니죠. 십일조, 십의 2조, 3조를 해도 우리는 무엇을 받아야 구원받는다? 용서 받아야 구원 받는다.

이런 쪽으로 목회의 감, 목회의 필링이 이런 쪽으로 가야 합니다. ‘내가 적어도 복음을 아는 목사인데 이런 내가 목회하는 교회가 아직도 저런 구습에 잡혀 있다니 내가 용서 못해.’ 이것은 교회가 주님의 교회가 아니라 자기 교회고 자기 자존심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그러면서 ‘주님이여, 제가 바른 목회 하는데 사람들이 안도와줍니다. 좀 이상한 소리 하면 안도와줍니다.’ 이런다고요. 주님께서 ‘교회 네 꺼냐?’

목사 입에서 ‘너도 나도 사랑받고 용서받아서 구원받습니다.’ 라는 이야기를 그냥 해버리면 그 사람이 십일조를 하든 십의 이조를 하든 그런 것은 주님의 사랑 앞에서 다 의미 없는 것이 되어 버립니다. 그것을 ‘하라. 하지 말라.’ 하는 이야기를 해야 할 이유가 없다니까요. 돈 들어오면 좋지 않습니까? 그걸 가지고 ‘정신상태가 복음이 아니다.’라는 식으로 왜 따지냐는 말이죠.

헌금을 얼마를 하든 가만 놔두고 다만 그것을 가지고 자랑을 할 때는 ‘집사님, 헌금 참 많이 하셨는데 다 주의 은혜로 하신 것 아닙니까?’ 라고 하면 되지 자기 돈도 아닌 것을 가지고 ‘하라. 하지 말라.’ 라고 간섭할 입장이 못 된다는 말입니다. 제가 ‘아하, 저 젊은 분이 목회 감각 있다.’ 했습니다. 이렇게 원인에 대해서 붙잡히지 않는 것이 새사람입니다. ‘나는 원인 없는 결과로 주어진 사람입니다.’ 라는 것, 모든 행동에 대해서 마음껏 자유를 느끼고 누리면서 살아가야 됩니다.

부부간에 싸울 때는 아주 사소한 것을 가지고 싸웁니다. 보통 아내가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여보, 내가 아무소리도 않알 테니까 당신 과거를 이야기 해봐라.’ 멍청한 남편이 그런 소리를 듣고는 ‘진짜 아무소리 안 할거지?’ ‘그럼, 내가 아무소리 안하겠다고 했잖아.’ ‘사실 당신 만나기 전에 여자 한 서너명 쯤 사귄 적이 있었거든.’ 그 남편 다음부터 죽는 일만 남습니다.

현재 둘이 살아가는 그 자체를 그냥 원인 없는 결과로 받으면 되는 거예요. 좋은 부부, 좋은 관계, 훌륭한 부부 필요 없습니다. 세상에 좋은 부부가 어디 있습니까? 휼륭한 부부 없습니다. 그냥 있게 된 것이지 무슨 좋은 부부가 있습니까? 헤어지면 헤어지는 것이고 조정에 들어가면 조정에 들어간 것이고 그것은 다 구원하고 아무 상관도 없습니다.

그것이 새사람하고 아무 관계도 없습니다. 새사람 되어도 이혼합니다. 새사람이라는 것은 ‘내가 이렇게 하나님의 용서를 받았습니다.’ 그것이 계속 나올 때 하나님의 생명입니다. 그 때 생명이 새사람 된 그 사람을 계속 움직이고 있다고 말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하니까 제가 속이 다 시원합니다. 이런 것 때문에 얼마나 신학교 다닐적부터 짐이 되었습니까? ‘이게 골치아프다니까요?’

“너희는 유혹은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4:23) 하니까 온갖 옛날 습관들 다 끄집어내서 그것을 고치느라고 바쁩니다. 해봐야 사흘도 못가는 것을.

에베소서 4:25

“그런즉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으로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 이는 우리가 서로 지체가 됨이니라.”

참된 것이 뭡니까? 내 것은 참된 것이 없습니다. 아까 우리가 떡을 먹었는데 학생이 떡을 참 맛있게 먹었습니다. ‘떡이 어떻게 맛있습니까?’ 하고 묻는다면 어떻게 맛있기는 그냥 맛있지요. ‘어떻게 맛있냐고?’ 그게 말이 됩니까? ‘달콤하기도 하고 텁텁하기도 하면서….’라고 했다고 칩시다. ‘주안에서 거짓말하지 말라고 했는데 왜 텁텁하다고 하느냐?’라고 소리 지를 겁니다.

세상에서 기준은 다 각자 자기기준 자기표준이 다릅니다. 그래서 아무리 진실을 이야기해도 각자 가진 기준으로 자기 맘대로 해석을 해놓고 ‘너, 거짓말 했지?’ 라고 합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목욕탕에 갔습니다. 아버지가 탕 속에 들어가서 하는 말이 ‘어, 시원하다!’ 합니다. 아들이 탕 속에 들어가 보니 시원하기는커녕 뜨거워서 죽을 맛입니다. 그래서 나온 말이 ‘이 세상에 믿을 놈 없다.’ 하는 그 말 아닙니까?

각자 자기 기준이 있어서 기준대로 한 겁니다. 아버지기준으로 보면 시원한 것이고 아들 기준으로 보면 뜨거운 겁니다. 여기서 거짓이라는 것은 각자 자기 기준에서 본 진리가 아니고 너, 나도 다 용납이 되는 거짓 없는 진리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의 지체가 되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교인들이 모이면 진리이야기만 하고 복음이야기만 하라고 하는데 내가 보기에는 그것도 참 법 같아요.

예를 들면 다 같이 앉아 있는데 ‘지금부터 시작!’ 하면 ‘예수님은 누구시며 성령님은 누구시며 …’ 이렇게 하라는 것입니까? ‘요새 노○○ 전 대통령 버렸다. 봉화마을도 다 버려놨다.’ 이것도 진리고 복음이라니까요. ‘노○평 그 사람, 돈 30억 받아 놓고도 안 받았다고 오리발 내밀더니 ….’

이래도 단순하게 정치이야기 하는 것 같지만 그 뉘앙스가, ‘우리도 똑같은 진흙덩어리지만 이미 우리는 이미 그쪽세계에서 벗어나서 예수님의 사랑을 받은 입장에서 그런 이야기도 넉넉하게 할 수 있다.’ 하는 것을 다 알잖아요. 느긋하게 그런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거예요. 제가 촌에 가보면 ‘백 금녀씨 장녀 백보람 제 ○○회 사법시험합격’, 그런 내용의 플래카드를 보게 됩니다.

거창 쪽을 지나다 보니까 ‘○○○ 종친회 자녀 ○○○ 세계요리대회서 금메달수상’ 이런 것도 봤습니다. 그 플래카드를 보면서 붙은 사람과 그 가족들과 관계된 사람들은 좋겠지만 떨어진 사람들은 기분 어떻겠습니까? 그런 플래카드는 안 내겁니다. ‘○○○씨 딸 ○○○ 사법시험 일곱 번째 도전해서 또 떨어졌음.’ 이런 것은 안 붙잖아요.

교회가 꼭 성공한 것, 뭔가 해낸 것, 이런 것만 자랑스러워 할 것이 아니라, ‘그런 것은 아무것도 아니야.’ 이게 교회 아닙니까? 원인 없는 결과, 어떤 것에도 얽매이지 않는 그게 진정한 새 생명이고 자유라는 말입니다. 정치, 경제, 사회의 어떤 화제를 다 잡아도 괜찮은데 그런 것이 다 허망한 것들이고 그것으로 인하여 구원되고 안 되고가 아무 상관이 없음을 맘껏 누리는 화제로 바꾸면 그것이 교인들의 화제 거리가 되는 겁니다.

에베소서 4:26-27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로 틈을 타지 못하게 하라.”

이 말을 곧이곧대로 이해해서 시계 보면서 해 지는가 봐서 해 졌으면 한바탕 하겠다는 식으로 나오면 안 됩니다. 이것은 세상에서 화나면 화를 내더라도 계속 화내는 식으로 갈 것은 없다는 뜻입니다. 내가 화를 버럭 낼 때는 ‘내가 억울한 일을 당했기에 그 억울함에 대해서 보상을 받아 내야겠다.’는 공식으로 화를 냈는데 ‘내가 참 쓸데없이 화를 냈구나.’ 라는 식으로 해버리면 마귀가 틈을 못 탑니다.

마귀의 특징이 뭔지 알아요? 완벽하지 못하다고 고소하는 것이 마귀 아닙니까? ‘누가 너를 정죄하리오.’에서 그 정죄하는 게 마귀 아닙니까? ‘똑바로 해. 계속 코 팔래? 코 후벼파지마!’ 코는 습관이 되어서 파는 것뿐인데 이런 식으로 자꾸 본인도 못 지키는 것을 가지고 시비를 건다고요. 그럴 때 ‘마귀야, 쓸데없는 헛짓 하지 마라. 주께서 이미 피를 보고 넘어가 버렸다. 그것이 새 언약이다.’

화를 낸다는 것은 아직도 자아에서 원인을 찾고자 시도한다는 뜻인데 화를 낼 때는 내야지요. 화를 내더라도 ‘이것이 옛날 사람의 모습이 이렇구나.’ 하고 잊어버리면 그만이라는 뜻입니다. 그런 뜻에서 다 하나님의 뜻이었고 그것도 은혜라는 말입니다.

에베소서 4:28

“도적질하는 자는 다시 도적질하지 말고 돌이켜 빈궁한 자에게 구제할 것이 있기 위하여 제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

이것을 억지로 하게 되면 짜증내면서 하게 됩니다. 그런데 용서를 아는 사람은 ‘내가 도적질 안하고 착한 일을 하는 것도 참 주의 은혜다.’ 라는 생각으로 하게 됩니다. 그리고 직장생활 하는 사람들, 도둑놈 아닌 사람들 한사람도 없습니다. 연말정산 할 때 구라 안치는 사람 한 사람도 없고요. 한 달에 헌금 500만원 해놓고도 1000만원 쓰는 사람 비일비재합니다.

회사생활이라는 것이 본인 말고 회사의 방침과 남들의 강제적인 의견에 따라서 본인의사에 관계없이 사기를 안칠래야 안칠 수 없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뭐냐? ‘혹시 사기를 안치게 되거든 주의 은혜인줄 아시기 바랍니다.’ 생각을 바꿔야 돼요. ‘아하, 주의 은혜로 도둑질에서 잠시 (진짜 잠시입니다.) 빠졌구나.’ 그렇게 생각하시면 됩니다.

이 말씀 하나 하나 우리 힘으로 못 지킵니다. 주께서 해 주셔야 됩니다. 그래서 도둑질하는 것도 싱글벙글 도와주죠. ‘왜 도와주십니까?’ ‘원래 내가 도둑놈이거든요.’ 이렇게 됩니다. 도둑놈이면서도 ‘하나님 뜻에 의해서 이렇게 합니다.’ 라고 된다는 말이죠.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려야 됩니다. 산다는 것은 남의 눈물을 내면서 사는 거예요.

내가 웃기 위해서 남을 울릴 수밖에 없어요. 이것이 왜 그러냐? 자원은 제한되어 있고 사람은 많고, 그러니 여유부릴 틈이 없고 자비를 베풀 형편이 못됩니다. 그리고 자비를 베푸는 것도 있을 때 자비를 베푸는 것과 없을 때 자비를 베푸는 것과는 다르거든요. ‘있을 때는 자비를 베풀고, 없을 때는 아끼고.’ 그것이 아니라 자비라는 것은 있을 때나 없을 때나 하나님의 뜻이 있으면 있더라도 안할 수가 있고 없더라도 할 수가 있습니다.

어떤 경우라도 주님의 은혜로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뭐냐? ‘혹시 자비를 베풀었거든 하나님의 은혜인줄 알아라.’ 그것이 정답입니다. 그 다음에 4장 29절에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이것 참 힘듭니다. 왜냐하면 예수님 자신부터 욕을 했거든요. ‘이 독사의 새끼들아.’ 했습니다. ‘이 독사의 자제분이여.’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독사의 새끼들아,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마 23:33)

욕설은 김○○집사님이 한가락 하잖아요. ‘네가 주인공도 아니고 네가 화를 낼 이유가 없잖아. 네가 세상의 중심도 아니고 네가 화를 왜 내?’ 화를 내더라도 ‘내가 또 쓸데없이 주인공인양 오해했구나.’ 그렇게 되어야 합니다. 사람이 화를 내는 경우는 확신이 없을 때 화를 내게 됩니다. 제자들이 길을 가는 중에 확신이 없으니까 ‘하나님, 저놈들 하늘에서 불을 내려서 다 불태워버리세요.’ 그럴 때 주님께서 말렸잖아요.

그런데 스데반집사님은 어떻게 했습니까? 심판에 확신이 있으니까 ‘주님, 저들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했습니다. 얼마나 심판에 확신이 있으면 여유만만하게 ‘주여, 저들은 저들의 하는 일을 알지 못합니다.’ 한단 말이지요. 믿음이 없으면 ‘주여, 확 쓸어버리시면 그때 제가 믿겠습니다.’ 그런 식으로 믿음 없는 것을 자기 성질로 드러내는데 성질 낼 때는 내야 되지만 돌아서서는 ‘쓸데없는 짓을 했다고 후회하시기 바랍니다.’

‘아하. 내가 또 에베소서 4장 29절의 말씀을 잊어버렸구나.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 이것이 아까 스데반 집사가 ‘주여, 저들이 하는 짓을 알지 못합니다.’ 가 되는 겁니다.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라.’(고전 13:4)고 했습니다.

에베소서 1:30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속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

‘근심되게 하지 말라,’는 말은 보이지 않는 분이 마치 엄마처럼 ‘이놈아, 보이지 않더라도 날 잘 섬겨야 돼.’ 라고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말라.’는 뜻입니다. ‘근심되게 한다’는 것이 뭐냐? 하나님의 뜻은 ‘범사에 감사하고 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는 것,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기도하는 것’입니다.

감사와 기쁨과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의식이 없어질 때, 성령께서 근심합니다. 근심하는데서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이제 그만해라. 이제 그만하고 감사와 기쁨으로 돌아와야지. 성내고 화내는 것을 보니 네가 네 인생의 중심이고 주인공인양 하는데 그게 아니잖아.’ 라고 말씀을 통해서 일깨우십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이 말씀을 다 지켰다.’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평생토록 따라다니면서 이 말씀 들이대고 또 이 말씀 들이대면서 우리 잘못과 우리 부족을 깨닫게 하는 겁니다. 그것이 지키는 겁니다. ‘이 비타 500을 믿나?’ 라고 하니까 우리는 이것을 마시면 된다고 생각하고 ‘한 병 다 마셨다.’ 하는데 그것이 아니고 ‘이 비타 500 보이나?’ ‘보입니다.’ ‘시원하나?’ ‘시원합니다.’ 그 다음에 또 들이대고 ‘보이나?’ ‘보입니다.’

이런 식으로 항상 말씀은 우리의 잘못을 깨닫게 해서 주의 사랑, 용서하심을 크게 감사하는 것,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의 뜻입니다. 그래서 말씀을 소유하려고 들면 안 됩니다. ‘나’는 사라지고 뭐만 남는다? 항상 나는 사라지고 내가 사라진 그 자리에 에베소서 4장의 말씀은 가득하도록 해야 됩니다. 내 주장, 내 주의는 사라지고 ‘주의 말씀대로 내가 일하고 있고 살아가고 있구나.’ 하는 것을 아는 겁니다.

에베소서 4:31-32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훼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하나님이 안보이죠? 하나님이 안보이니까 여기에 점선으로 표시하겠습니다. 하나님이 안보이는 분이니까 하나님도 안보이고 하나님의 용서도 안보이죠. 그런데 ‘서로’는 보입니다. 하나님도 안보이고 하나님의 용서도 안 보이는데 ‘서로’는 보이죠. 그런데 A라는 사람이 B라는 사람에게 말을 함부로 했어요. 하나님도 안보이고 용서도 안보이니까 이것을 없다고 여겨버리면 저 사람이 나를 공격한 셈이 됩니다.

그러면 저쪽에서 내 쪽으로 공격을 해 왔기에 내 쪽에서는 방어를 해야 합니다.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항상 보상을 받으려고 시도합니다. 왜? 나는 항상 정당하니까. A가 B를 공격하면 B입장에서는 ‘나는 억울하다. 신이시여, 내가 어떤 일을 하더라도 봐주소. 왜? 나는 억울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내가 욕하는 것도 정당합니다.’ 이렇게 나오더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둘 다를 누가 용서했습니까? 하나님께서 용서해주면 결국 그 사람이 나를 공격하는 것은 ‘현재 내가 하나님의 용서를 아직도 잊지 않고 있느냐?’ 하는 것을 테스트 하는 하나님의 뜻이 담겨 있다는 겁니다. 왜냐? 우리는 하나님의 용서가 오면 올수록 즐겁고 행복하니까. 우리는 우리가 얼마나 행복한지를 잘 몰라요.

그런데 불뚝 성질을 내다가도 성질내는 그 순간에 성령이 찾아오게 되면 ‘아, 내가 또 성을 냈구나. 에베소서 4장에 성을 내지 말라고 했는데, 욕하지 말라고 했는데….’ 하게 되면 그 사람이 나를 욕하고 억울하게 한 것을 원인으로 보지 않고 그 전체를 원인 없는 결과로 보는 겁니다. 원인 없는 결과로 주어진 용서하심을 깨닫게 하기 위해 유발시킨 하나의 사태로 본다는 말입니다.

말은 길게 했지만 간단한 이야기입니다. ‘저 사람이 나를 욕한 것은 이미 내가 입고 있는 하나님의 용서를 깨닫도록 하기 위한 수단으로 했다.’ 는 겁니다. ‘목사님, 그렇게 되면 성자수준이 아닙니까?’ 라고 하시겠지요. 그것을 성자수준이라고 하지 말고 새사람수준이라고 하자는 말입니다. 새사람은 언제 나타나느냐하면 내가 옛사람에 불과하다는 것을 느낄 때만 새사람이 나타나요.

고상한 말로 해볼까요? ‘상대는 동기를 유발한다.’ 『피』라는 책에 나오는 말입니다. 반드시 상대가 있기에 그 상대로 인하여 나에게 동기가 유발됩니다. 나에게 욕을 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이근호가 이단이다.’ 하는 사람들이 있어줘야, ‘아니, 나를 욕하는 저놈을 때려 죽일까요?’ 하다가 갑자기 ‘네가 정당하냐? 네가 왜 설치냐? 너도 정당하지 않은 인간인데….’ 그 때 ‘알겠습니다.’ 하고 쑥 들어가지요.

이것이 바로 에베소서 4장 32절입니다. ‘서로 인자하게 … 서로 용서하기를 … .’ 이미 제가 이야기했습니다. 제일먼저 무엇이 나온다? 보이지 않는 분, 보이지 않는 분에 의해서 우리가 새사람 되었기 때문에 항상 우리가 무엇을 생각해야 한다? 보이는 사람은 생각할 필요 없어요. 왜냐하면 눈에 보이는 사람은 눈에 보이지 않는 분에 의해서 그 결과가 주어진 것이기 때문에.

아내가 라면을 끓이는데 나보다 더 못 끓인다. 그래서 ‘저 라면을 내가 끓일까? 아내가 끓이도록 내버려둘까?’ 그러는 와중에 라면도 하나 제대로 못 끓이고 성의 없는 아내에 대해서 화가 났다. 그런데 아내가 ‘미안해요. 성의 있게 잘 끓여 볼게요.’ 라고 나올 줄 알았는데 도리어 ‘네가 뭐 잘나서 그런 것을 바라나.’ 하는 식으로 나올 때, 여기까지도 봐주겠는데 가만있는 시댁까지 다 들먹거리면서 욕을 할 때, 그 때는 에베소서 4장의 말씀이 이런 식으로 적용됩니다. ‘하나님이여, 제 아내에 대한 하나님의 용서를 취소시켜 주옵소서.’

우리 교회 어떤 권사님 말씀대로 ‘저런 인간이 구원받는다면 나는 구원 안 받습니다.’ 얼마나 솔직한 말인지 몰라요. 결국은 서로 용서한 것이 아니고 나만 용서했지요. 나 위주였던 겁니다. 평소에는 몰랐지요. 건드리니까 불쑥 성질이 솟아올라서 눈에 보이는 것이 없지요. 그 정도로 우리는 평소에 문제성이 많은 인간이었던 겁니다.

그런 사태, 아내가 라면도 성의 없이 끓이는 그런 사태가 안 올 때는 ‘마땅히 나는 라면 잘 끓이는 인간이고, 잘 끓인 라면만 먹어야 되는 존재다.’라는 식으로 자기를 정당화했던 거예요. 그래서 마음을 낮춰야 합니다. 어디까지? 십자가까지 죽기까지 낮추고 첫사랑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의 자리는 높은 자리가 아닙니다.

주님이 가신 자리가 어느 자리입니까? 십자가 죽는 자리잖아요. 주님과 같이 죽는 자리가 십자가, 바로 그 자리입니다. 우리는 자꾸 상상을 해서 더 높은 자리 남에게 칭찬을 받아야 되는 자리라고 자꾸 오해를 하는데 십자가의 자리가 바로 주님과 우리의 공통의 자리입니다. 비록 우리가 그 자리에 있다 할지라도 하늘로부터 뭘 받았다? 용서를 받았다.

에베소서 5:2,3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같이 너희도 사랑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생축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은 너희 중에서 그 이름이라도 부르지 말라 이는 성도의 마땅한 바니라.”

이제 성경해석 알겠지요? 역시 그리스도는 보이지 않습니다. 항상 보이지 않는 분이 주체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해석을 어떻게 합니까? 내가 사랑한 것처럼 자꾸 오해를 합니다. 목사들이 그렇게 했고 신학자들이 그렇게 만들었어요. ‘사랑해! 사랑해!’ 만 날 이런 식이라! 보이지 않는 분의 사랑이 오게 되면,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생축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뭡니까? 우리는 ‘그냥 받았느니라.’입니다.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은 너희 중에서 그 이름이라도 부르지 말라 이는 성도의 마땅한 바니라.” 다시 말해서 용서하신 그 하나님의 생명만, ‘나는 이렇게 보이지 않는 분에게 용서 받았습니다.’만 자랑한다면 여러분은 얼마든지 낮아질 수가 있습니다.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 은 자기가 높아지기 때문입니다. ‘나는 이런 행동을 해도 정당해.’ 라는 이것이 하늘나라에서는 ‘음란이고 더러운 것’ 이 됩니다.

자신이 늘 정당하다고 여기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정당했다면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을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가 너무나 못난 인간이기 때문에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었기 때문에 그 십자가에 앞에서 자신을 되비쳐 보면서 내가 지금껏 산 것도 주님의 은혜인줄 알고 감사할 수 있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불쑥 불쑥 성질나는 것, 바로 그런 것이 있어야 우리가 용서받은 것이 빛이 나는 것을 알았습니다. 우리의 옛사람이 생생하게 살아 있기에 새사람의 가치가 돋보이고 고귀하고 빛납니다. 저희들 옛사람은 미워하게 해 주시고 새사람을 사랑하게 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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