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2월 3일 강의 죽은 신을 위하여
대구 2월 3일 강의 죽은 신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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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0203 죽은 신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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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03-14 16: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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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신을 위하여
[ 죽은 신을 위하여 ] 슬라보이 지젝 저 김정아 역 (도서출판 길 :2008)
2008년 12월 3일 이 근 호 목사
죽음 안에서 신에 대해서만 말할 수 있다고 저자는 밝힌다. 사도 바울에 의해서 그렇게 주장할 수 있다고 한다. 죽음, 그것은 헛수고를 의미한다. 인간이 하는 모든 것을 헛수고로 만들어버리는 신이 바로 죽음으로 말하는 신이다.
그런데 인간들은 자신의 종교 행위로 더 살고자 한다. 그렇다면 종교 행위는 자신의 저주를 재촉하는 행위에 해당된다. 사도 바울에 의해서 제시된 신은 어떤 신인가? 저자는 기존의 기독교 신론의 허점을 지적하면서 이 점을 파헤친다.
신은 숨어있는 신이다. 따라서 아무도 신이 존재하는가에 대해서도 모른다. 아니, 신은 없다. 신에 대한 인간적인 인식을 발동시키기 전까지는 그러하다. 인간이 신에 대해서 궁금하고 찾고자 하는 가운데 신은 그것을 부정하는 방식으로 자신을 드러내신다. 인간들이 신에 대해서 언급하고 알고자 하면 할수록 인간은 사실 신으로부터 고립되고 동시에 신 자신도 신에 대해서 고립되어진다.
예수는 가룟 유다에게 지시하기를 자신을 배반하라고 했다.(마 26:25) 이 세상에 온갖 신이 있다 할지라도 자기를 배반할 것을 요구하는 신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뿐이다. 가롯 유다는 열두 제자로 이루어진 최초의 기독교 동아리와 보편 교회의 창시자인 사도 바울 사이를 연결하는 ‘소실되는 매개자’이다. 즉 사도 바울은 가룟 유다의 자리를 대신 차지하고 들어가서는 그 역시 스스로를 배반해야만 하는 신인 예수를 소개하게 된다.
진정한 예수에 대한 신뢰와 신앙은, 추종자로 하여금 예수에 대해서 배신케 함을 유발한다는 점을 이해하는 것이다. 숨어있는 X를 이해하는 것은, X로 인하여 주어지는 자신의 배신을 수긍하는 것이다.
이처럼 인간은 예수 앞에 서면 예수로 인하여 모든 것이 노출되어진다. 예수는 곧 ‘타인’으로서의 시선이며 그 타인으로 인해 ‘나’가 규정된다. (불교의 허점은 그 타인의 시선을 삭제하는데 있다. 즉 타인 없는 가운데 자아마저 없애려고 한다)
그런데 이 타자성은 고정된 것이 아니다. (여기에서 레비나스나 데리다의 타자성이 문제가 된다. 그들이 주장하는 타자성이란 지루한 동일성을 지닌 타자다)
예수라는 타자는 예수라는 존재의 일관성에서 주어지는 타자성이 아니라 그의 명령을 통해서 그 명령에 호출되는 인간의 태도와 반응 속에서 주어지는 것이다. 그의 명령을 접하게 되면 모든 인간의 자아가 분열을 일으키게 되고 그 분열과 벌어짐 속에서 비로소 비쳐 나오는 타자성이 예수로 인한 타자성이요 신성이다.
예를 들면, “살인하지 말라”라는 명령이 주어지게 되면, 이 명령을 받은 인간은 “하지말라!…살인하라!”로 받아들여지게 되어 있다는 것이 로마서 7장에서의 사도 바울이 전한 계시다. 즉 “살인해야만 해!”가 “하지 말라!”라는 명령의 본 내용에 해당되도록 인간 내부에서 유발된다는 것이다.
이 “네 속에서 넘쳐나는 것을 거세하라”는 곧 불가능한 명령이 되고 만다. 만약 제 때 거세 못하면 처벌이 따른다. 하지만 인간은 그 처벌을 감수할 수밖에 없는데 그 이유는, 인간의 욕망이란 넘쳐 남을 향유하는 그것이 곧 처벌이기 때문이다. 처벌의 저주스러움이란 인간이 끊임없이 쾌락 너머의 것을 계속 집착하는데 있다. 현 쾌락으로 만족하는 법이 없는 것이다. 즉 얻어진 행복이 곧 저주스러운 상태가 된다. 결코 채워지지 않기 때문이다.
법이 욕망을 자극하고 그 욕망으로 쾌락을 얻게 되지만 그것이 저주스러운 처벌이요 대가가 된다. 그래서 인간은 법을 제공한 타인을 속이려든다. 이것이 바로 희생이다. 예수를 위해 희생하는 것은 예수에게서 뭔가 얻으려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속이기 위함이다.
이로서 예수는 인간과 멀찍이 떨어지게 된다. 법을 제공하므로 서 신은 최고의 위반을 저지르고 만다. 범죄자는 자신이 저지른 범죄에 대해서 응당한 처벌을 원한다. 하지만 신은 이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범죄자로 유발시킨 법 자체가 곧 정의라는 이름의 질서를 전복시키는 위반이기 때문이다. 신은 이로서 모든 원인을 제거한다. 신 자신의 죽었다는 그 죽음이라는 ‘결과’로서 모든 원인되게 하는 ‘원인’들을 삭제시켜 버린다.
신이 죽으므로 서 신은 내부적으로 균열이 일어났다. 신과 신 사이에 간격이 생겨버린 것이다. 이러한 간격은 더 이상 신이 인간의 신 인식에 의해서 포착되지 않기 위함이다. 인간들이 신을 포착하고자 한다면 예수는 가룟 유다처럼 ‘사라지는 매개자’가 되어 우리들의 신앙을 ‘배신한 신앙’으로 만들어버리는 위치로 만들어버린다.
사도 바울에 의하면 기독교의 구원은 타락을 이전의 상태로 되돌리는 것이 아니라 타락을 반복시키는데 있다.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의 선택은 실은 강요된 죄의 선택이었다. 따라서 아담의 죄성을 눈여겨 볼 것이 아니라 ‘아담에게 강요함’ 자체가 구원임을 알아야 한다. 달리 말해서, 타락이 자체로 타락이 아니라 타락이 자체로 구원이 된다. ‘타락으로 오인하는 구원’이 바로 이것이다.
인간이 보는 악이란 ‘악이 악을 보는 시선’에 불과하다. 타락조차도 구원으로 이해하는데서 비로소 ‘사랑으로 인한 자유’가 발생한다. 악은 실질적으로 선과 동일하다. 악은 생성 중인 선이다. 고린도후서 11장에서 사도 바울은 자처해서 악인으로 행세한다. “그래, 거짓 사도들아, 내가 어리석은 자다. 하지만 나의 어리석음이 곧 그리스도의 능력이다”
진정한 그리스도 닮기란 그리스도의 회의와 불신에 동참하는 것이다. 죄를 부인하는 것 자체가 죄의 궁극적 증거가 된다. 신을 법을 주면서도 항상 그 법에 대해서 창조적으로 해석하며 법을 곡해한다. 이로서 인간들이 주어진 법해석으로 신을 장악하려는 시도를 뿌리친다.
사도 바울은 모든 법에 대해서 집행을 보류시킬 것을 요구한다. ‘마치-아닌-듯’의 원칙을 적용한다. “우리는 자들은 마치 울지 않는 자 같이 하며 매매하는 자들은 마치 없는 자같이 하며”(고전 7:20) 이것은 곧 신의 사랑 앞에서 법의 지켜야하는 인간 존재는 ‘아무 것도 아님’(nothing)이 되기 때문이다. 즉 사랑이란 인간이 행하는 내용이 아니라 사랑이 곧 신이다.
사랑은 단순히 법 너머에 있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법 안에 푹 빠져 있는 태도로 표현된다. 충분히 법리적으로 법을 해석하면 사랑이 나오지 완전한 법이 나오는 것이 아니다. (유대교의 문제는 ‘지나치게 법리적’이라는 것이 아니라 충분히 ‘법리적’이지 못하는데 있다.)
법에는 사랑이 너무 많다. 법과 신의 사랑은 대립되는 것이 아니다. 루터파 신학자들은 대립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법이 발생할 때 숨겨진 사랑도 같이 발생하므로 서 비로소 법을 주신 신도 같이 나타난다. 이것이 곧 구원이다.
구약 욥기의 주제는, ‘고통에도 의미가 있다’가 아니다. 도리어 욥은 고백하기를 ‘나의 고통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한다. 욥이 알게 된 신은 무능한 신이었다. 신은 정의롭지도 않았고 불의하지도 않았다. 단지 무능할 뿐이다. 욥이 깨달은 것은 이것이다. 욥에게 재앙이 닥쳤을 때 시험대에 오른 것은 욥이 아니라 신 자신이다 는 사실이다. 그리고 신은 보기 좋게 실패했다.
자신을 정당화 하는데 실패한 신, 이 신이 바로 참된 신이다. 덜미 잡히고서는 난처한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허풍을 늘어놓는 신이 바로 신의 무능함이다. 욥이 처음에 당혹감을 가진 것은 신을 불가해한 ‘사물’로 경험했기 때문이다. 즉 법 너머에 존재하는 선한 신인 것처럼 여겼던 것이다.
아버지가 강하다고 믿었었는데 그 아버지가 자기를 도와줄 수 없는 무능한 존재인 것을 알고 경악하는 아이와도 비슷하다. 이 경악이 예수에게 이어진다. “아버지에 왜 나를 버렸어요?”
신이 허풍을 떨면서 등장한 후부터 욥은 줄곧 침묵을 지켰다. 왜일까? 그것은 신의 우스꽝스러운 허풍이 바로 신의 무능함이 드러나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무지한 말로/이치를 어둡게 하는 자가 누구냐?/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네가 어디 있었느냐? 네가 깨달아 알았거든 말할지니라”(욥 38:2-5)
이로서 신이 도움을 요청할 것이 아니라 우리 인간이 도리어 신을 도와야 한다는 것이다. “나에게 점점 분명해지는 것은 오직 하나뿐입니다. 그것은 당신이 우리를 도울 수 없다는 것, 우리가 당신을 도와야 한다는 것, 우리는 당신을 도우면서 결국 우리 자신을 돕는다는 것입니다.”(1942년 유대인 수용소에서 한스 요나스가 한 말)
신은 왜 자진해서 무능한가? 그것은 무(無)를 창조하기 위해서다. 이 무로부터 세상이 창조되었다. 그래서 세상은 타락할 수밖에 없어야 한다. 이런 타락의 세상에서 진정으로 기도하는 자는 무신론자 밖에 없다. 실증적 존재자로서의 신을 거부하고 메시야적인 타자에게 기도하기 때문이다.
(평가)
지젝이 주장이 과연 사도 바울이 말한 (“다른 복음 전하면 저주받는다” 갈 1:8) 십자가 복음에 부합되는 내용인가를 살펴봐야 한다. 지젝의 지적은 오늘날 기독교에 자리 잡은 신론의 허점을 잡고 시작한 내용이다. 즉 신에 대한 변증과 변호를 통해 신을 믿는 그들의 자기 긍정을 도모하는 논리에 대해 공격한 것이다.
하지만 사도 바울의 십자가 복음은 ‘예수님 살해’를 출발점으로 삼고 있다. 이 예수님 살해에 사도 바울 자신도 가담하게 되어 있고 온 인류가 다 가담될 수밖에 입장에 놓여 있음을 없는 언약적으로 설명한다. “기록된 바 아브라함이 두 아들이 있으니 하나는 계집종에게서 하나는 자유하는 여자에게서 났다 하였으나 계집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자유하는 여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갈 4:22-23)
즉 인간 배후에 악마가 실제로 있었고 그 악마는 필히 ‘여자의 후손’이신 예수님을 살해해야만 한다는 약속에 준해서 정리된 복음이다. 이 논리는 인간의 실존적 의미로 채워지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을 예수님의 실존적 의미로 해명할 수는 없다. 예수님은 십자가 이전부터 자신이 사람들에게 고난 받고 사흘에만 살아나실 것을 예고하셨다. 그리고 인간들은 결국 사단의 세력에 이끌리어 움직인 것이다.
오늘날 기독교가 문제가 아니라 실은 인간 자체가 문제다. 왜냐하면 자신이 근원적으로 죄인 됨은 인간의 이성과 종교인 열심히 알아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직 성령이 임한 자라야지만 십자가로만 나타나는 하나님의 깊은 지혜를 안다.(고전 2:9-14)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과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고전 2:14)
김대식(IP:124.♡.85.5)
12-12-26 12:04
대구090203죽은신을위하여(슬라보이지젝)1
09 대구강의 2 - [죽은 신을 위하여]1 슬라보이 지젝 저, 김정아 역 (도서출판 길, 2008)
09,02,03 강의 이근호, 정리 구득영
◈ 죽은 신을 위하여 ??
오늘은 ‘죽은 신을 위하여’ 라는 책을 살펴보겠는데, 제목이 좀 이상하지요? 당연히 “하나님은 살아계신다” 라고 해야 하는데 말이다. 신이 그렇게 살아있어야 관계가 성립이 되고 대화가 가능한데, 죽은 시체와 무슨 이야기를 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일단 살아있어야 영광을 돌리든지, 또한 찬양을 하든지 경배를 드리든지 할 것인데 말이다.
◈ ‘내’가 죽어야 비로소 !!
그런데 이렇게 제목을 ‘죽은 신을 위하여’ 라고 해버리면, 그것이 무슨 의미인고 하니, 자기가 살아있다고 여기는 사람이 살아있는 하나님을 생각하는 것은 전혀 바람직하지를 못하다는 것이다. 정말로 하나님이 살아있다고 하면, 그것은 자기 자신이 죽은 자라고 여길 때만, 그때만 하나님이 살아있다고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나도 살아있고, 하나님도 살아있다” 라는 것은, 그런 것은 없다는 말이다. 자기가 살아있으면 하나님은 죽든지, 아니라면 자기가 죽으면 비로소 보이는 것이 하나님의 살아계심이라는 것이다. 왜 그런고 하니, 하나님이 여기에 이렇게 있고, 또 우리 인간이 여기에 있다고 하는 것은, 그것은 인간이 상상해서 만든 하나님이라는 말이다.
아무튼 진짜 하나님은 결코 우리 인간의 눈에 보이지 않는데, 그런데 그렇게 보이지 않으면서도 살아있다고 하는 것은, 어떤 경우에만 가능한고 하니까, 죽은 자를 살려낼 때, 그럴 때 비로소 액션으로, 즉 ‘행위’로 살아있고 할 수가 있다는 것이다. 어떤 존재로서 살아있는 것이 아니고, 그러한 행위로서 살아있다는 말이다.
◈ 이미 영화는 끝이 났기에 !!
왜 자꾸만 이렇게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는고 하니, 마지막 때, 즉 종말이 되면, 이 종말이 무엇인고 하니 다음과 같은 것인데, 예를 들어서, 극장에서 상영하던 영화가 이미 다 끝이 났는데, 그래서 청소하는 아줌마가 빗자루를 들고 준비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아직까지 그 영화를 보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뭔가가 조금 이상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아무튼 종말이라는 것은 이미 영화가 끝이 났다는 말이다. 그런데 그 영화의 내용이 무엇인고 하니까, 이스라엘과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의 관계라고 이야기할 수 있데, 왜냐하면 보이는 하나님은 우상이니 말이다. 그렇게 형상화가 되면 안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결코 붙잡을 수가 없는데, 그것이 역대하에도 나오고 말이다.
◈ 이방 신은, 인간의 자기 투사 !!
이스라엘을 통해서 그 이스라엘의 배후에 계시는 진짜 하나님, 그런데 그 영화는 이미 끝이 났다는 것이다. 그 주변에 있는 이방 신들은, 애굽뿐만이 헬라의 신들까지도 전부다 다 우상이니, 플라톤이 말한 그런 신도 말이다. 그것은 인간의 흔적이라고, 즉 존재의 흔적, 존재의 모사 등등의 여러 가지 표현이 있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나의 투사’ 라고, 즉 자기 존재의 반응이라는 것이다.
자세한 것은 다음에 라캉을 이야기하면서 그때에 하기로 하고, 아무튼 이스라엘과 진짜 하나님과의 관계를 다룬 영화는 이스라엘이 진짜 하나님으로부터 멸망을 당함으로 말미암아서, 그렇게 해서 모든 사실상 인류의 영화는 이미 끝이 났다는 것이다. 그렇게 영화가 끝남으로서 이 세상은 종말이 되고 말았는데, 그렇게 이스라엘이 끝장남으로서 나머지 남은 것은 심판밖에 없다는 것이다.
◈ 선지자들을 통해서 이미 종말을 !!
그런데 그것은 이스라엘이 갑자기 끝난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속에 선지자들이 있어서 점점 더 이스라엘이 끝장이 난다는 것을, 즉 이사야 때부터 하나님께서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한다” 라는 것부터 시작해서, 그들이 이미 종말을 여러 차례 강조를 해왔다는 것이다. 마지막 때는 하늘에서 불이 떨어지고 말이다.
이미 그렇게 모든 민족에게 다 심판이 떨어진다는 것이 이야기가 되어있는데, 바로 그 첫 번째 흔적으로서 이스라엘이 멸망을 당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이스라엘이 멸망을 당하면 어떻게 되는고 하니, 국가적인 의미에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성사시키는 그 모든 의미가, 이제는 바탕자체가 그만 사라지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미 볼 장을 다 봤다는 말이다.
◈ 다시 정리를 하면 !!
늦게 오신 분이 있어서 다시 하겠는데, 이 ‘이스라엘’을 두고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데, 요한복음에도 나오듯이 아들이 아니면 아버지를 알 수가 없는데, 이것이 예수님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구약의 이스라엘에게도 해당이 되는데, 즉 이스라엘이 아니면 하나님을 알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아버지를 알게 하는 아들이 그만 망해버렸으니, 아버지는 이제 없다는 말이다. 그리고 이 땅에 오신 아들인 예수님마저도 십자가에서 죽고, 그만 빈 무덤 속에서 사라지고 말았으니, 이제는 그야말로 모든 것이 다 없다는 것이다.
◈ 인간은 처음부터 산 적이 없어 !!
이렇게 이스라엘이 사라지고 예수님이 죽음으로 말미암아서 무엇이 등장하는고 하니까, 이것이 제일 중요한 것인데, 진짜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를, 이것을 두고 ‘살았다’ 라고 할 수 있고, 그 나머지인 주위에 있는 모든 것은 다 ‘죽었다’ 라는 것이 된다는 말이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알아야 하는 것은, 이 사람들이 살았다가 죽은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게 무슨 말인고 하니, 창세기 3장에 보면 에덴동산에 생명나무가 나오는데, 그 나무의 열매를 따먹지 못하면 원래부터 산 것이 아니라 죽었다는 말이다. 그러니 사실 처음부터 죽은 자였는데, 자기들이 펄펄뛰고 숨을 쉬고 움직이고 있으니, 자꾸만 살았다고 우긴다는 것이다.
◈ 십자가를 통해서 자기가 죽었음을 알 때 !!
다시 말해서, 인간은 뭐라고 하는고 하니, “자, 여기 이렇게 살은 사람이 죽고 난 뒤에 좋은 곳에 가서 또 살아야지” 라고 말이다. 그렇게 인간은 자꾸만 자기가 살았다고 하는데, 그런데 막상 이스라엘이 없어지고 나니까, 살았다고 하지만 사실은 모두가 죽은 것이 드러난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이 멸망을 당하니 말이다.
그렇게 죽은 자임이 드러날 때, 즉 이스라엘의 멸망을 통해서 하나님이 자기 백성의 멸망을 통해서 자기의 살아있음을 진짜로 보일 때, 혹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진짜 하나님을 보일 때, 바로 그러한 순간에 자기가 죽었다고 여기는 사람들에 한해서만, 비로소 하나님은 살려내는 하나님이 된다는 것이다. (저자의 주장이 아닌 이근호의 주장이죠?)
◈ 그러면 저자는 뭐라고 하는가?
따라서 이 책의 저자인 ‘슬라보이 지젝’ 이라는 사람은 뭐라고 주장하는가? 철학자이자 정신분석학자이기도 한 이 사람의 주장은 무엇인고 하니까, 기존의 모든 기독교는 기독교 2000년 역사를 통해서 하나님의 자꾸만 존재로 보기 때문에 문제라는 것이다. 이것을 칼 바르트도 비판했는데, ‘존재의 비유’ 라고 말이다.
다시 말해서, “나는 살아있다. 그러므로 나를 살게 하신 그 하나님도 살아있다” 라고 하는, 그렇게 자기가 살아있다는 것과, 그래서 하나님도 살아있다고 하는데, 그것을 논리학에서 ‘이미 유추’ 라고 하는데, 아무튼 자기가 살아있는 그 이유가 하나님도 살아있기 때문에 그렇다는 말이다. 그것이 안셀무스의 신 존재 증명에 보면 나오는데 말이다.
◈ 그래서 ‘죽은 신을 위하여’ !!
그러므로 이 책의 저자가 하는 말이 무엇인고 하니, 이러한 모든 것의 문제점은 자기가 살아있다고 여기기 때문에 그렇다는 말이다. 그래서 저자가 하는 말이 “만약에 당신이 살아있다고 하면, 당신의 신은 죽어있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책제목이 ‘죽은 신을 위하여’ 라는 것인데, 그렇게 죽은 신이 진짜로 살아있는 신이라고 볼 때만, 그렇게 살아있다고 하는 자기 자신이 죽었다고 하는 것을 제대로 알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양반은 기독교 2000년 역사와 신학전체를 모두 다 싸잡아서 공격하는데, 물론 방금 제가 말한 것처럼 이스라엘을 중심으로 해서, 그렇게 이스라엘의 멸망으로 해석하는 것이 아니고, 루터의 십자가 신학에 근거해서 하는데, 즉 기존의 신학은 모두가 엉터리라고 본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차이점이 무엇인가요?)
* 질문 - 그러니 아담도 역시 ‘죽은 자’가 아닌가요?
물론 그러한데, 자기는 선악과를 먹으면 즉시 죽는 줄로 알았는데, 그런데 나중에 900살까지 살다가 죽었는데 말이다. 그러니 중요한 것은 지금 이 시점에서 죽고 사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멀리 어디서 당기고 있느냐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즉 사망이 힘이 당기고 있으면 죽은 자가 되고, 또 생명의 힘이 당기고 있으면 산 자가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진짜로 살려주는 생명나무의 힘이 당겨버리면, 죽은 자도 산 자가 되는데, 그 대표적인 근거가 예수님의 십자가이고, 그 다음이 곧 부활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바로 그 부활의 능력으로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말이다.
◈ 예수님은 성령에 의해서 십자가에 !!
좀 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부활의 영으로서 십자가에서 죽으셨다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고린도후서에서는 이것을 예수님은 성령에 의해서 십자가에 달리셨다고 하고 말이다. 그러므로 십자가에 달린 것도 예수님 자기 마음대로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을 신학자들은 신학적으로 구분하는데, 즉 십자가 이전에는 성령이 주도하시고, 십자가 이후에는 성령마저도 예수님이 주도하신다고 말이다. 십자가 이전에는 하나님의 영으로서 성신이었는데, 그런데 십자가 이후에는 예수님의 영으로서 성령이라는 것이다.
◈ 성령은 예수님의 영 !!
그래서 고린도후서 3장 17절에 보면, 주의 영이 있는 곳에는 자유함이 있다고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성령을 예수님의 영으로서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성령은 바로 예수님 자신에게서 나온 영이라고 본다는 말이다. 예수님의 영으로 말이다.
(고후 3:17)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
구약에서는 하나님에게서 나온 영인데, 그런데 이것이 신약에서는 예수님에게서 나온 영이 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바로 이 성령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예수님을 부담스럽고 쓸데없는 존재로 여기고 죽일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 육에서 영으로 가는 길은 없어 !!
이렇게 성령으로 출발을 하게 되면, 인간은 두 가지 밖에 없는데, 즉 육에 속한 자와 영에 속한 자로 말이다. 그런데 문제는 육에서 영으로 가는 갈이 그만 막혔다는 것이다. 그래서 육으로 영으로 바로 가는 것이 아니라, 육에서 십자가로 가서 영으로 가야 되는데, 그런데 이 육에서 십자가로 갈 방법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그렇게 육에서 영으로 갈 방법도 없고, 육에서 십자가로 갈 방법도 없는데, 그냥 육으로 난 것은 육이라는 말이다.
◈ 성령을 받은 사람은 예수님밖에 모르도록 !!
정작 성령이 있는 사람은 본인이 알아서 육에서 영이 된 전혀 사람이 아니고, 오직 십자가의 영이 임함으로 말미암아서, 즉 “죽었다가 살아난 예수님의 영이 너희 속에 임하게 되면, 죽은 너희도 산다” 라고 하면, 그렇게 되면 살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런 성령을 받은 사람의 특징은 무엇인고 하니, 오로지 예수님의 공로만 증거할 수밖에 없도록 되어있다는 것이다.
이것을 교회에서는 뭐라고 하는가? 목사가 교육을 시켜서 그렇게 된다고 하는데, 그러나 이것은 교육을 시켜서 될 문제가 아니라, 목사가 무엇을 안다고 가르치고 말고 하겠는가? 목사들이 설교를 하고 가르칠 때는 항상 무엇인고 하니, 자기를 부수고 파괴하는 식으로 해야만 하는데, 자기 자신을 얼마든지 부수어도 괜찮다는 것이다.
◈ 설교는 곧 철저한 자기 파괴 !!
그런데 목사들은 “그렇게 나를 부수면 나의 권위를 무시할 것이다. 그래서 내 말이 먹혀들지 않으면 어떻게 할까?” 라고 걱정을 하는데, 그러니 목사가 되면 권위를 가지고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권위로 가르치려고 하지 말고, 자기를 파괴하는 것 자체가 바로 성령의 가르침이라는 말이다.
그러니 목사의 설교는 다른 것이 아니라고, 자기를 부수는 것을 그대로 보여주면 된다는 것이다. 바로 그것을 하라고 목사로 세웠다는 말이다. 목사가 그렇게 자기를 쳐부수면, 그 나머지 문제는 주께서 다 알아서 한다는 것이다. 그것을 두고 곧 ‘자기 부인’ 이라고 하고 말이다.
◈ 대전에서 전화가 와서 !!
어제 대전에서 이번 3월에 목사 안수를 받는다고 여자 분에게서 전화가 와서, 자기 이름도 밝히지를 않고 시험적으로 저에게 질문을 던지는데, 그 내용이 무엇인고 하니, “제가 목사님의 글을 보았는데, 목사님은 성경내용이 그렇다는 것을 어떻게 알았습니까?” 라고 말이다.
아주 도발적인(?) 질문인데, 아마 나이가 마흔 정도가 된 것 같은데 말이다. 그런데 제가 전화를 상대방에 대해서 전혀 모르기 때문에 그냥 육적으로 대답을 했는데, 자기가 목사 안수를 받는다는 것도 대화를 하다가 나중에 안 것이고 말이다. 그런데 제가 뭐라고 했는고 하니, “총신 도서관에 공부를 좀 했습니다” 라고 말이다. (ㅋㅋ)
◈ 그런데 99명은 어디로?
제가 그렇게 대답을 하니 이제 자기도 이야기를 하는데, 뭐라고 하는고 하니, “목사님의 이야기가 맞는데, 그런데 왜 한국교회에는 그런 목사가 없습니까?” 라고 한다는 것이다. 즉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자기의 생각과 똑같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런 것에 주의해야 하는데, 처음에 자기 생각하고 똑같다는 사람들이 100명이라고 하면, 나중에 99명은 어디론가 가고 없다는 것이다. (ㅋㅋ)
그것은 그때 일이고, 아무튼 제가 거기서 참으로 감사하다고 했는데, 그러자 그 양반이 점점 흥분해서 이야기를 하는데, 왜 한국교회에는 그런 사람이 없느냐고 말이다. 그래서 제가 다시 육적으로 대답을 했는데, “도서관에서 공부한 사람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자꾸만 목회에 성공할 생각만 하고 말입니다” 라고 말이다. 그러자 “나중에 대전에 오면 한번 만납시다” 라고 마무리를 하고 마쳤다는 것이다.
사실은 이러한 내용은 신학교에서도 언급을 한 것인데, 물론 학생들은 관심이 없어서 듣지도 않지만 말이다. 자꾸만 이런 것이 들리지가 않고 외면하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어떻게 하면 육의 사람을 영의 사람으로 바꾸어서 목회에 성공할까?” 라고, 그렇게 교회자체에 관심이 있지, 도대체 “예수님이 무슨 일을 하시는가? 라고 하는, 거기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어서 그렇다는 말이다.
◈ ‘되기’인가? ‘만들기’인가?
그래서 이것을 간단하게 정리하면 이러한데, 복잡하게 생각할 것이 아니라 아주 간단한데, “되기인가? 만들기인가?” 라는 것인데, 즉 ‘되기’ 라고 하면 “내가 무엇을 만드는 것”이고, ‘만들기’는 “예수님이 나를 어떻게 만드는가?” 라는 것이란 말이다.
우리가 성경을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볼 때, “주께서 나를 어떤 식으로 만들 것인가?” 라는 것인데, 왜냐하면 자기는 안 되니 말이다. 인간은 이미 에덴동산에서 추방을 당한 존재이니 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백 날을 무엇을 해도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당연히(?) “그렇게 안 되는 것을 예수님이 어떻게 만들어주시는가?” 라는 것에 초점을 맞추어서 성경해석을 해야 하는데, 그런데 막상 어떻게 하는가? “내가 그 성경 말씀을 듣고서, 내가 어떻게 육에서 영으로 되어 가는가?” 라는 것에 모든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두 개가 있는데, 그 차이점이 하늘과 땅이라는 말이다. 아무튼 ‘되기’와 ‘만들기’인데, 그런데 그 주체가 전혀 다르다는 것이다.
◈ 영이 등장할 때 비로소 육의 정체가 !!
이 육과 영을 다시 이야기하면, 이 육이라는 것은 영이 등장할 때 비로소 그 육의 정체가 드러났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종말은 무엇인가? 모든 자가 다 육이었는데, 그것이 예수님의 십자가로 드러났는데 말이다. 그런데 육인 인간에게 십자가를 믿으라고 하면 믿을 수 있는가?
도저히 믿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자꾸만 믿으라고 하면 가짜 십자가를 만들어서 믿는다는 말이다. 자체 내에서 조작을 해서 말이다. 그런데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영이 나오는데, 그것이 바로 성령이고, 또한 요한복음의 주제라는 것이다.
바로 그 십자가의 영이 육에 속한 사람을 영에 속한 사람으로 바꾸는 작업을 하는데, 그런 일이 일어날 때, 이렇게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이, 즉 영에 속한 자들이 고백하는 것이 바로 멸망을 당했던 이스라엘과의 연속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들이 바로 이스라엘이 되고, 이들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데, 비로 이러한 자들이 등장하게 되면, 그때가 바로 마지막 때라는 것이다.
◈ 영에 속한 참 이스라엘이 등장하면 마지막 때 !!
이렇게 마지막 때에 천국으로 갈, 즉 생명나무를 따먹을 사람이 생겨날 때, 그들 가운데서만 비로소 진짜 하나님이 등장한다는 것이다. 즉 “예수님이 우리 안에, 우리가 안에 예수님이, 그리고 아버지가 예수님 안에, 또한 아버지 안에 우리가 있다” 라는 말이다. 그렇게 하나의 결합체가 되는데, 그것이 곧 그리스도의 몸이고 말이다.
(요 17:21)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요 17:22)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저희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그렇게 되면, 이러한 하나님과 현재 기독교 2000년의 역사가 만들어낸 육적인 하나님과는, 그 사이에는 십자가의 연속적인 사건이 계속해서 진행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이것을 잊으면 안 되는데, 그래서 갈라디아서 6장 14절에서 사도바울은 뭐라고 하는가?
(갈 6:14)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 십자가를 앞두고, 진짜 하나님과 가짜 하나님이 !!
이렇게 “예수님 때문에 이 세상이, 즉 너희들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서 죽었고, 또한 내가 또한 너희들을 대하여 죽었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즉 예수님의 십자가를 앞두고서 진짜 하나님과 가짜 하나님이 등장한다는 말이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영에 속한 사람은 반드시 십자가를 거치는데, 그것은 자기가 거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이렇게 오셔서 육의 사람을 데리고 십자가를 거침으로서,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만 증거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육의 사람은 무엇인가? 가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이스라엘이 멸망을 당했다는 사실조차도 모르고, 옛날 이스라엘을 재생하려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 육의 사람은 항상 ‘주체’가 남아서 !!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생각할 때 반드시 기억해야 하는 것은, 이 십자가에서 예수님을 누가 죽였느냐는 점이라는 것이다. 물론 예수님을 그 당시 유대인들이 죽였는데, 그런데 그들이 바로 자칭 이스라엘이고, 또한 자칭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육에 속한 자들이 만든 가짜 하나님과 진짜 하나님과는 어떻게 되는가? 바로 이 십자가로 인해서 그만 차이가 나고 만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 십자가가 무엇이 되었든지 간에, 육에 속한 사람에게 남는 것은 무엇인가? 육에 속한 사람은 바로 자아, 즉 자기 ‘주체’만이 남게 된다는 것이다. ‘주체’가 말이다.
◈ 슬라보이 지젝 - 신을 죽인 세상이 과연 죽은 세상이 아닌가?
오늘 우리가 공부하려는 이 책에서 저자가 지적하는 것이 바로 이러한 점인데, 즉 “이 주체가 만들어낸 신은 너희들이 보기에는 살아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가짜이다. 하지만 그런 너희들의 눈에는 죽은 신으로 보이는 그분이 바로 진짜 하나님이다” 라는 것이다. 그러니 이 저자가 말하는 죽은 신이 바로 십자가를 의미한다는 말이다. 이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죽었으니 말이다.
다시 말씀을 드리면, 신 자신이 사람에게 버림을 받아서 그만 그 신이 죽어버렸다는 것이다. 그렇게 신은 죽음 속으로 들어가 버렸는데, 그렇다고 한다면 나머지 살았다고 하는 것들은 도대체 무엇인가? 그런 살았다고 하는 것 전체가 모두가 사실은 죽음의 세계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신을 죽인 세계이니 말이다.
그러니 그렇게 자기들이 신을 죽여놓고는 정작 자기들이 살아있다고 하면 말이 되겠느냐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렇게 신을 죽였다고 하는 것 자체가 보여주는 게 무엇인고 하니, 이미 이 세상은 죽음의 세상임이, 그렇게 해서 들통이 나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이 책에서 저자가 주장하는 내용이라는 말이다.
◈ 복음증거, 그 자체로서 만족해야 !!
김성환 목사님이 우리교회 사이트에서, 신학교 교육을 어떻게 해야 하고, 또 어떻게 목사를 양성하게 되는지, 그러한 것이 궁금해서 질문을 올렸다는 말이다. 그런데 제가 그런 대화를 하면서 여러분에게 당부하고 싶은 것은, 기존교회와 싸워서 이기려고, 즉 자기의 자존심이 상하지 않으려고 게임을 하듯이 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러면 똑같이 되니 말이다.
그러니 그것이 아니라 그냥 이 복음을 전하는 그 자체가 좋아서 해야 하는데, 그것을 ‘사명’ 이라고 하는데 말이다. 물론 개인적으로 먹고 살아가기 위해서 투잡을 하든지 쓰리잡을 하든지 간에 그것이 문제가 아니라, 자꾸만 이러한 목회 자체에다 기대를 걸고서, 그런 것을 통해서 먹고살려고 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마지막 때는 어떠한가? 젊은 자나 늙은 자나 모두가 다 환상을 보고 예언을 한다고 했는데, 그것은 바로 목사가 되지 않았다고 해서 기가 죽을 필요도 없고, 여자라고 해서, 또한 나이가 적든지, 아니면 많다고 해서 전혀 주눅이 들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여자도 얼마든지 복음을 전할 수가 있고 말이다. 여성시대에서(?) 그렇게 떠들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 혹시 열등의식의 발로는 아닌지?
복음을 전하면 그게 목사인데, 그러니 굳이 “여자도 목사가 되게 주세요” 라고 할 필요가 전혀 없다는 것이다. 꼭 기존에 있는 전통적인 남들이 인정해주는 종교적인 틀에 맞추려고 한다면, 그러한 사람은 아무리 기존 교회를 공격해도, 그것은 자기의 열등의식의 발로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게임에서 졌다고 하는 그 패배감인데, 그것은 마귀도 이미 알고 있다는 말이다.
* 질문 - 그래도 신학공부를 해야 하지 않습니까?
그것은 당연히 해야하는데, 신학은 우리 자신의 과거의 육적인 흔적인데, 그러니 반드시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한 육을 모르고서 무슨 영을 안다고 할 수 있느냐는 말이다. 그렇다고 제가 마스터하라는 의미는 아니고 말이다.
◈ 복음의 실체를 만져야 !!
제가 이번에 가야산에서 역대기를 강의하면서 잠시 이런 이야기를 언급했는데, 개혁주의 신학을 비판하면서 말이다. 이 개혁주의 신학은 초급, 중급, 고급단계로 해서 복음의 단계로 들어가는데, 그런데 그것이 과연 맞느냐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여기 이렇게 커다란 바위가 하나 있는데, 지금 파도가 쳐서 난리라고 하면, 어떤 사람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 바위의 실체를 제대로 바로 잡아서 바위 위로 올라가야 되는 것이지, 그것이 아니라 그 바위에 끝에 매달려 있다고 하면 파도에 휩쓸려가지 어떻게 살아남겠느냐는 것이다.
그러니 어떤 단계를 밟아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지금 자기는 신학도 모르고 철학도 모르고 아무 것도 모른다고 하더라도, 그러니 그냥 시장에서 콩나물만을 팔 줄 아는 시골에 사는 할머니라고 해도 어떠한가? 정말이지 이런 복음의 실체를 접하게 되면 구원을 받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글자도 제대로 몰라도 말이다.
그렇다고 해서 마냥 모르고 있어서 될 문제도 아닌데, 교회에 다니면서 성경말씀을 통해서 예수님이 누구인지, 또한 자기의 죄가 무엇인지도 알아야 하니 말이다. 또 성경에 창세기만 있는 것이 아니라 요한계시록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하고 말이다.
물론 그렇게 안다면 좋기는 하지만, 아무튼 구원은 자기가 알고 있는 지식이 아니라 그야말로 ‘실체’ 라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첫사랑, 즉 예수님이 자기 죄 때문에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다고 하는 말이다. 그러니 그러한 첫사랑은 항상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 예수도 부처도, 모두가 같은 사람 !!
그런데 목사들의 대부분이 어떠한고 하니, 신학을 하고 20년 정도가 지나고 나면 예수님을 믿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냥 자기 교회만 믿지 말이다. 그래도 그 중에서 용기가 있는 사람은 노골적으로 뭐라고 하는고 하니, “예수도 부처도, 모두가 다 같은 사람이다” 라고 말이다. 즉 지금 남들이 말하고 싶어서 근질근질하는 것은 대변해서 내뱉어준다는 것이다.
그래서 용기가 있는 사람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를 하는데, “여러분, 사람이 곧 신입니다. 예수쟁이들이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데, 그러나 그것이 아니라 당신이 곧 예수이고, 부처입니다” 말이다. 물론 본의 아니게(?) 다른 사람들을 대신해서 그렇게 해준다는 것이다.
◈ 껍데기만 더듬다가 결국은 껍데기로 !!
그런 사람들이 그래도 신학공부를 나름대로 제법 한 사람들인데, 하지만 그러한 사람들은 도서관에 가더라도(?) 한번도 예수님의 실체를 만져본 적도 없고, 그냥 껍데기만 계속해서 더듬고 가다가, 결국에는 껍데기로 끝나고 만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하면 정말 복음을 아는 사람은 어떠한가? 신학을 하면 할수록 자기가 공부한 신학은 그야말로 아무 것도 아니라고 하는 것을, 참된 복음은 오직 십자가밖에 없다고 하는 것을, 그것을 계속해서 증거한다는 말이다. 그것이 자기 자신을 파괴하는 식으로 드러난다는 것이다.
◈ 신학이 아니라, 왜 복음인가?
그러니 이렇게 성경이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있는데, 그 어디를 뚫어도 실체가 나와야 하는데, 동시에 거기서 나오는 신학을 거론하면서 “신학이 아니고 왜 이것인가?” 라고 하는 것을 이야기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느헤미야의 경우라면, “왜 느헤미야의 신학이 아니라 왜 느헤미야에게 있는 십자가인가?” 라는 것을 전해야 한다는 말이다.
신학교 도서관에 가보면 느헤미야나 에스라에 관한 논문이 굉장히 많은데, 대부분의 주제가 무엇인고 하니, 신명기 사학파와 역대기 사학파의 관계라든지, 또한 그 책들이 언제 편집이 되었는지, 대부분이 그런 내용들이라는 것이다. 또 기본적으로 원어가 어떠한지를 파헤치고 말이다.
물론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은 아니라는 말인데, 그러니 아무리 열심히 해도, 어디 그렇게 한다고 해서 구원을 받는가? 그러니 제대로 신학을 했다고 하면, “그것이 아니라, 오직 십자가 복음입니다” 라고, 그 느헤미야서를 통해서 이야기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 그래도 가끔은 외식을 ??
이번 여름 수련회 때는 스가랴와 다니엘서를 하려고 하는데, 혹시 다른 분이 복음적으로 강의한다면 정말이지 그러한 분들도 좀 세우고 싶다는 것이다. 저 혼자서 계속해서 하는 것보다도 말이다. 매일 몸에 좋다고 보리밥을 먹는 것보다도, 그래도 가끔은 먹을 수만 있다면 외식도 조금은 해야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그렇게 되려고 하면, 그 사람이 물론 신학도 많이 공부를 해야 하겠지만, 정말 복음이 계속해서 나오는지 조사를 해봐야 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자기 파괴가 없다고 하면, 그것은 세울 수가 없는데, 복음을 이야기해야 하는 자리에서 교회를 이야기하면 용납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서 !!
서론은 이 정도로만 하고 본론으로 들어가도록 하겠는데, 그런데 지금 이 교재의 글이 어렵기 때문에 하나씩 읽어보면서 하겠는데, 이제 교재를 한번 살펴보자.
** 죽음 안에서 신에 대해서만 말할 수 있다고 저자는 밝힌다. 사도 바울에 의해서 그렇게 주장할 수 있다고 한다. 죽음, 그것은 헛수고를 의미한다. 인간이 하는 모든 것을 헛수고로 만들어버리는 신이 바로 죽음으로 말하는 신이다.
◈ 죽음 안에서만 신에 대해서 !!
저자는 죽음 안에서 신에 대해서만 말할 수가 있다고 하는데, 또한 사도바울이 그렇게 주장을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소리를 듣고서 바울서신들을 읽어보면 실망을 할 수밖에 없는데, 왜냐하면 사도바울은 뭐라고 하는가? 역시 육에 속한 사람에게는 선한 행위가 나온다고 하니 말이다.
그러니 사람들이 책이나 논문을 쓰면서, “누가 이렇게 이야기했다” 라고 하면서 다른 참고도서를 인용한다고 하더라도, 사실은 그것을 그대로 믿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실제로는 다른 이야기가 대부분이니 말이다. 편의상 자기가 그냥 그렇게 갖다 붙인다는 것이다.
◈ 피 - 모든 것을 죽음 안에서 !!
아무튼 인간이 하는 모든 것을 다 헛수고로 만들어버리는 신의 죽음, 즉 신이 바로 그러한 죽음으로 말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제가 쓴 ‘피’ 라는 책의 제일 마지막 부분에 보면 나오는데, 즉 “모든 것을 죽음 안에서 이야기한다” 라고 말이다.
사도바울이 이야기하는 인간의 행함은 하나밖에 없는데, 그것이 바로 “니가 죽어야 남이 산다” 라는 것이다. 그런 내용도 그 책의 중간에서 뒷부분 정도에 보면 나와있는데, 그러므로 자기도 살고 남도 사는 법은 없다는 것이다. 즉 한 알이 밀이 죽어야 열매를 맺는다는 말이다.
◈ 육에 속한 사람의 특징은?
그렇다면 육에 속한 사람의 특징이 무엇인가? 프로이트에 의하면, 인간의 생존의 본능이 누구나 다 있기 때문에 살고자 한다는 것이다. 물론 죽고자 하는 것이 있어서 분열이 일어나기도 하지만 말이다. 그런데 살고자 하는 자가 사도바울의 글을 이해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되는데, 그런데 “이왕 죽은 놈 어떻게 죽는지, 그 꼴이나 한번 보자” 라고 하면, 그의 편지가 이해가 안 될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렇게 십자가를 보면, “아하, 내가 죄인이기 때문에, 저 율법이 나를 죽였구나” 라고, 그렇게 전부가 다 이해가 되는데, 그런데 자기도 살고 남도 산다고 하면, 사실 그것은 핑계이고 “내가 살 테니 너는 죽어라” 라는 것이 솔직한 표현인데, 즉 교회에서 목사가 자기가 살려고 몸부림을 칠 때는 그야말로 교인들은 다 죽인다는 말이다. 양이 강도를 만난 꼴이니 말이다.
이번에 군포에서 잡힌 그 양반이 여자를 배려해서 차비가 없다고 태워주는 것이 아닌데, 정말로 잡아먹으려고 태우는 것이지 말이다. 그러니 이것은 무릇 그 사람만의 문제가 아니라, 반드시 육과 육의 만남에서는 자기가 살고자 하면 반드시 남을 희생시켜야만 하는, 그런 교차가 일어나게 되어있다는 것이다. 바로 그것 때문에 이스라엘이 멸망을 당했다는 것을 십자가를 통해서 알아야 하고 말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그런데 인간들은 자신의 종교 행위로 더 살고자 한다. 그렇다면 종교 행위는 자신의 저주를 재촉하는 행위에 해당된다. 사도 바울에 의해서 제시된 신은 어떤 신인가? 저자는 기존의 기독교 신론의 허점을 지적하면서 이 점을 파헤친다.
◈ 인간은 결코 자기를 포기하지 못해 !!
어제 오전설교가 무엇인고 하니, 마태복음 10장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니 자신을 버려라” 라고 했는데, 사실은 버림을 받은 자가 자기를 버리겠다는 것은 오류인데, 즉 그게 말이 안 된다는 것이다. 인간이 아무리 자기를 버린다고 해도, “나는 주님을 위해서 버렸습니다” 라고 하는. 즉 자아는 결코 버릴 수가 없다는 말이다.
그러니 자기를 버렸다고 하는 것이 거짓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인간이 아무리 처나 자식을 버리고 주님을 따르고, 또한 주님의 말씀을 지킨다고 해도, 그것은 전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렇게 버리는 자기 자신을 버릴 수가 없기에 말이다.
(마 19:29) 또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
◈ 스님들의 엉큼한 속셈은?
그렇게 자기를 버리겠다고 설치는 것이 바로 절의 중들인데, 모든 것을 다 버리고서 속세를 떠나도, 심지어 자기의 머리카락까지도 다 버려도 안 된다는 것이다. 인간은 그렇게 자기 자신을 버릴 수가 없다는 말이다. 정말로 자기를 버린 사람이라면 중을 하겠는가? 그냥 장사나 하고 말지 말이다. 아직까지 뭔가 자기에게 기대하는 것이 있기 때문에 도포를 입고 머리를 민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책의 저자가 자꾸만 사도바울을 언급하는데, 그렇다고 해서 사도바울의 글들을 읽었다고 해서 무조건 이런 저자와 같은 결론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뭔가 새로운 안목을 가져야만 이런 이야기를 할 수가 있다는 것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사도바울에 의해서 제시된 신은 어떤 신인가? 저자는 기존의 기독교 신론의 허점을 지적하면서 이 점을 파헤친다. 신은 숨어있는 신이다. 따라서 아무도 신이 존재하는가에 대해서도 모른다. 아니, 신은 없다.
이 양반은 말하는 것이 아주 거칠 것이 없는 사람인데, 신은 숨어있다고 하다가 결국은 ”신은 없다” 라고 까지 한다는 것이다. 이 책의 저자는 라캉의 철학에 근거해서 이 세상을 보는 사람인데, 그런데 이 라캉의 철학에 보면 “신은 없다” 라고 하는 것이 어떻게 표현이 되는고 하니, 신은 텅 빈곳만 남겨두는 것이지, 그만 사라지고 없다는 것이다.
◈ 인간이, 자기를 신과 동일시하면 !!
라캉이 왜 이렇게 주장하는고 하니까, 만약에 신이 있다고 하면, 이것을 동일시라고 하는데 말이다. 인간이 그 다음부터는 그만 신과 같이 한 뭉치가 되어서, 그때부터는 신의 이름의 아닌 인간의 이름으로, 즉 ‘나’의 이름으로 행동에 나선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성화론인데, 예수님의 십자가에 대해서 “예수님, 감사합니다” 라고 하고 나서는, 그 다음부터는 십자가를 지나고 부활의 능력으로 어쩌고저쩌고 하는데, 그렇게 되면 신의 이름이 아니라 누구의 이름이 되는가? 인간의 이름으로 나아가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나’의 이름이 기초가 되어서, 그렇게 ‘나’의 이름을 앞장세우고 나아간다는 말이다.
◈ 인간은 엄마와 하나였는데, 그 버릇이 !!
그러니 인간은 누가 “괜찮다, 훌륭하다” 라고 하면 그것을 자기와 동일시시키려고 하는데, 왜 그런고 하니, 여기에 대해서 라캉은 말하기를, 어린아이가 엄마의 자궁에서 나왔을 때는 이미 엄마와 자기의 갈라짐, 이것을 분열이라고 하는데, 그렇게 깨어진다는 것이다.
처음에 아기가 6개월까지는 태어나서 우는데, 그렇게 우는 것에 의미를 두는 사람이 누구인가? 바로 엄마인데, “아기야, 배가 고팠지. 찌찌 줄게” 라고 하면서 말이다. 엄마가 그렇게 의미를 부여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기도 옆집 아저씨를 보고 울지 않고 엄마를 보고 우는데, 즉 “당신은 나와 함께 있었잖아. 얼마 전까지” 라고 하면서 말이다. 그런데 그렇게 함께 있어놓고, 왜 자기를 두고 화장실에 가고 시장에 가느냐는 것이다.
아무튼 인간의 기본적인 인식이 무엇인고 하니, 아기가 엄마 자궁 속에 있을 때는 하나였는데, 영양분도 같이 나우어서 먹고, 서로 생각하는 사고방식도 같았다는 말이다. 그래서 엄마가 골초라고 한다면, 아이도 그만 골초가 된다는 것이다.
◈ 어디, 붙을 때가 없을까?
그렇게 하나된 것이 엄마의 뱃속에서 나오면서 그만 분열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니 인간은 어찌되었던 간에 과거의 엄마와 같은 그런 첫사랑을 위해서, 뭔가 괜찮다고 여기면 의미를 두어서 자꾸만 하나가 되려고, 그렇게 자꾸만 붙으려고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버릇이 신에게도 그대로 연결이 되어서 신과 하나가 되려고 한다는 말이다. 그러니 아이가 엄마를 위해서 우는 게 아닌데, 즉 “엄마, 저 때문에 시장에 가서 고생이 많지요?” 라는 아이는 없다는 말이다. 물론 “엄마가 내 장난감을 사준다고 얼마나 고생이 많을까?” 라는 아이도 없고 말이다.
그 아이가 울고불고 하는 까닭은 무엇인가? 엄마에게 무슨 일이 있든지, 그 이유가 어떻게 되었든지 간에 “무조건 엄마는 내 곁을 떠나지마” 라는 의미라는 말이다. 그렇게 무책임하게 오빠에게 자기를 맡기고서 가버리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이러한 타고난 본능이 있기 때문에, 마구 달라붙으려고 하는 말이다. 그래서 신이 있다고 하면, 즉시 달려가서 한 덩어리가 되고 만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렇게 되면, 결국은 그 모양세가 자기가 신을 잡아먹은 꼴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 신의 형상을 본받지 말라 ??
바로 이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유대교에서는 “신의 형상을 본받지 말라” 라고, 그렇게 하나님이 십계명을 통해서 지시를 했다고 주장한다는 것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까, 그렇게 신을 멀찍이 두어야 경외함과 경배함과 찬양함이 된다는 말이다. 그런데 그 신이 바로 자기 앞에 있다고 하면 어떻게 되겠는가? 너무나 부담스럽지 않겠느냐는 말이다.
◈ 삐리리 리리리, 하나님에게서 전화가 왔나?
아무튼 유대인들이 그렇게 신을 뚝 떨어지게 해놓고, 그 사이에다 느헤미야와 에스라가 말한 제사를 집어 넣어버린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신은 저만치 떨어져있고, 다만 신이 남겨준 지시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율법이라는 것이다.
◈ 그런데 왜 난데없이 하나님이 이 땅에 !!
그래서 우리 인간들이 그 율법을 열심히 잘 지키고 있는데, 그런데 그 신이 육신을 입고서 이 땅에 왔다고 하는 것이 말이 되느냐는 것이다. 우리가 이렇게 율법을 지키고 있는데 왜 이 땅을 방문하느냐는 것이다. 그렇지 않는가? 그러니 신이 왔다는 것은 율법을 지킨다고 하는 자기들에게 뭔가 문제가 있다는 말이 되는데 말이다.
예를 들어서, 선생님이 열심히 잘 가르치고 있는데 교장 선생님이 왜 들어오느냐는 것이다. 부담스럽게 말이다. 그냥 교장실에 앉아서 어떻게 하면 이 학교에 사고가 생기지 않고 조용조용하게 잘 돌아갈지, 자기 몸조심을 하면서 그런 것이나 잘 챙기라는 말이다. 그래도 조바심이 나면 화단에 물이나 주던지 하라는 말이다. 아무튼 강의하는 것은 선생님에게 맡기라는 것이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이 땅에 오신 신을 죽여버렸는데, 예수님이 “내가 곧 하나님이다” 라고 하니, 그냥 그분을 죽여버렸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올 이유가 없다는 것인데, 왜냐하면 뚝 떨어져 있어야만 하니 말이다. 그렇게 떨어져서 그분이 주신 말씀을 지키면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다. 그러니 신이 하나가 될 수 없다는 말이다.
◈ 잠자는 신을 깨워라 !!
하지만 인간은 신과 하나가 되었는데, 그것이 유대인들에게는 ‘율법’ 이지만, 이방인들에게는 ‘감정’ 이라는 말이다. 일종의 굿거리이고, 부흥회인데, 이것이 칸트에 의하면 “내 안에 신이 있다” 라는 것이고 말이다. 니체가 이것을 잘 이야기하고 있는데, 자기 안에는 창조적인 신이 있는데, 그 신을 잘만 개발하면 초인이 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위브맨, 즉 초인이 될 수 있다는 말이다. 인간을 초월하는 인간이 될 수 있다는 말인데, 즉 마음껏 능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것이다. 기업체에서 사원들을 훈련시킬 때 이것을 이용하는데, “잠자는 신을 깨워라. 하면 된다” 라고 하면서 말이다.
이것을 두고 라캉도 그렇게 이야기를 했고, 그 이전에 포이에르바하가 뭐라고 했는고 하니까, “신은 인간의 투시이다” 라고 했다는 것이다. 신이라는 것은, 인간의 자기 투시, 즉 자기를 반영한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마치 인간의 그림자처럼 말이다.
◈ 라캉 - 신은, 신이 없는 곳에 !!
그래서 라캉은 주장하기를, 그러한 신을 응시하는 눈이 인간에게 있는데, 그러나 그것은 잘못이라는 말이다. 왜 그런고 하니까, 그것은 어릴 때 엄마와 일치하려고 하는 것 때문에 그렇다는 말이다. 진짜 하나님은 영원히 분열이 되기 때문에, 그래서 신은 어디에 있는고 하니, “신은, 신이 없는 곳에 있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말이 참 어렵지요? 이런 이야기를 다 하고 난 뒤에, “신은, 신이 없는 곳에 있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신이 없다는 것이 아니라, 신들이 먼저 있어줘야, 그러한 신들이 없는 곳에 신이 있다고 하는 것이 밝혀진다는 것이다. 그러니 우상들이 양 사방에 깔려 있어줘야 하는데, 또 전국의 산골짜기마다 부처들이 있어야 하고 말이다. 그러니 “~은 아니다” 라는 식으로 신은 있다는 것이다.
◈ 예수님은 삐딱이 ??
그렇다면 “~은 아니다” 라는 것을 누가 이야기했는가? 이 땅에 직접 내려오셔서 항상 그렇게 말씀하신 분이 계시는데, 그것은 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