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자 크기
화면

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인간은 왜 행동하게 되는가?성경신학[신학]

인간은 왜 행동하게 되는가?

이름 : 관리자(IP:124.59.84.82)

인간은 왜 행동하게 되는가?

-스토아 학파와 라이프니쯔와 화이트헤드의 철학을 고찰하면서-

2004년 9월 22일 이근호 목사

첨부파일 : 인간은왜행동하게되는가.hwp (80.0K), Down:56

관리자(IP:124.♡.84.82)

09-02-02 22:06

인간은 왜 행동하게 되는가?
-스토아 학파와 라이프니쯔와 화이트헤드의 철학을 고찰하면서-

2004년 9월 22일 이근호 목사

Ⅰ. 서 론

성도가 아닌 자가
성도이고 싶어 할 때,
그들은 어떤 행위론과 윤리관과 인생관이 펼쳐보는가?

이 점에서 관해서 이미 완벽하고 철저하게 정돈해 놓은 사상가들이 있다. 그들은 신과 인간에 대해서 최고의 깊이를 갖고 연구한 자들이다.

인간이라면 더 이상 추가될 것이 없을 정도로 완벽하게 제시했고,
인간의 머리에서 논의될 수 있는 것은 그들에 의해 다 파헤쳐졌다.

인간이라면 평소에 솔직하게 고백하고 싶은 것,
그들이 미리 다 고백해 놓았다.

인간이라면 솔직하게 살고 싶어하는 행위,
그들이 미리 다 그 절차를 다 정리해 놓았다.

인간이 살아가면서 신과는 어떤 관계에 놓여 있는가 하는 점까지
그들이 미리 다 알려주고 있다.

내가 누구며. 나는 어디서 왔으며, 나는 어디로 가는가 하는 점까지 그들은 신과 관련지어 다 소개해 놓았다.

천하의 복음 중의 복음으로 받들려져 왔다. 왜냐하면 너무 완벽하니까.

물론 그들의 명성에 대해
후대 사람들의 시기심을 발동하여
문제 될 것도 없는 논리를 트집잡아 흠집도, 비틀어보기도 한다. .

하지만 전체적인 면에서 볼 때,
이들 신학과 철학의 거장들은, 인간 편에 서있다.
인간을 변호한다.

인간을 편드는 복음을 제조해 놓은 것이다.
평소에 하고 싶은 윤리와 도덕의 기초를 그들은 형이상학적으로 닦아 둔 것이다.

그런데,
성경에 나타난 복음에는,
걸림돌이 있다.

물론 이 복음은 오늘날에도 예외없이 사람들로부터 거절당하고 있다.

그들은
시종일관 걸림돌 없는 복음만을 원한다.

성경에서 그것이 엉터리든 가짜라고 고발해도 전혀 개의치 않고 자신들이 좋아하는 신이요 윤리, 도덕이면 그것으로 족하다.

여기
걸림돌이 빠져있는
그들만의 복음을 소개해 본다.

Ⅱ. 스토아 학파에서 본 인간 행위 양식

인간이 자기 정체성을 구축하는 방식에는 두 가지 흐름이 있고 이것이 상호 중첩되어 왔다.

첫째는 자기 정체성을 인간 바깥에서 찾는 방식이다.

서양 중세 철학에서, 모든 사물은 신으로부터 얼마나 떨어져 있는가에 의해 평가된다.

플라톤 철학에서 모든 사물은 그것이 존재의 형상으로부터 얼마만큼 떨어져 있는가에 의해 평가된다. 형상들 중의 형상, 즉 선의 형상을 원점으로 본다면, 모든 사물은 그 원점으로 떨어진 거리에 따라 존재론적으로 배열되고 가치론적으로 평가된다.

운동하는 것도 마찬가지 원리에서 이루어진다.
운동이란 현재 결여되어 있는 형상이 이전의 형상을 대체하는 과정, 즉 가능태로부터 현실태로의 이행이다.

질료는 일정한 층위에서 형상이 결여된 가능태이고, 형상은 이 결여를 채울 규정성이다. 이 형상들은 존재함의 정도에 따라 시간 속에서 목적론적 계열을 이루며, 가능태들은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듯이 최고의 형상을 향해가면서 현실태들로 변환된다.

질료는 형상을 그리워한다.
그 마지막에는 근원적 능동인(因)s이자 동시에 목적인(因)인 신이 놓인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인간들은 자기의 정체성을 안에서부터 찾게 되었다.
자신이 갖고 있는 것은 신체이다.

이 생명이 있는 신체는 계속해서 새로운 형상을 창조한다.
자발성이다.
자발성에서 자신의 정체를 파악하려 한다.

그런데 여기에 두 가지 요소를 고려해야 한다.
하나는 공간이요, 다른 하나는 시간이다.

신체가 점유하는 공간은 가만히 있는 공간이 아니라 투쟁해야 하는 공간이다.
현실적으로 한 개인이 자신의 뜻대로 공간을 고정시켜 놓을 수 없다. 인간은 늘 특정한 집단의 소속되어 있다. 그리고 거기에는 힘의 위계가 있다.

따라서 단순한 욕망에 의한 세력 투쟁 대신 개체와 개체 사이에, 집단 과 집단 사이에 이성적 설득이 이루어지고 그 이해는 법이라는 이름의 객관성으로 정착된다.

신을 생각할 때는, 이성적으로 신이 정해준 운명과 질서를 곱게 수용하면 그만이다.
그러나 사회에서 투쟁해야 할 때는 이성보다 의지가 우선이다.

‘무엇을 아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무엇을 해야 하느냐?’가 실제 과제로 주어진다.
이성은 보편적인 것을 겨냥하지만 의지는 개별적인 것을 겨냥한다.
이성은 합리적인 데 반해서 의지는 감정적이다.

이로서 인간의 노동이 중요한 관심사로 등장한다.
노동이란, 인간이 몸을 써서 세계를 변화시키고, 그 변화를 통해서 스스로도 변화해 나가는 과정이다.

과학에서의 노동은 무엇인가?
바로 실험이다.

그냥 관찰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실험에 나선다.
의학적 맥락에서의 노동이란 해부 같은 것이다.
과학 시대에 있어 노동에 관여하는 도구들(과학적 기구들)이 인식에 핵심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망원경, 현미경 같은 초보적인 기구들로부터 오늘의 분과기, 고속가속기 등에 이르기까지 근대적인 인식의 역사는 곧 기계의 역사와 나란히 가는 것이다.

노동과 더불어 중요해진 개념으로 떠오르는 것이 ‘역사’이다.
역사라는 것은 더 이상 어떤 섭리의 구현이나 운명이 아니라 인간이 자연과 부딪치면서 노동을 통해 자연을 변형시키고 자기 스스로도 변형되어 나가는 과정으로서 파악된다.

그래서 역사란 바로 노동의 결과이고, 노동은 역사 속에서 그 위상을 부여받는다. 인간의 목적론적 성격이 역사에 투영되어 역사 또한 목적론적인 과정으로 파악된다.
진화론적 역사관이 바로 그것이다.

초기에 있어 진화론은 고전 철학의 틀에 단지 시간 지표를 붙인 것이 불과했다. 그러니까 생명의 사다리가 그대로 유지된 채 다만 그 위계가 시간 축에서 순서에 따라 펼쳐진다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 이 세상과 우주가 끝없이 시간 속에서 변해 온 과정이라고 한다면, 그리고 그 변화가 단순한 것에서 복잡한 것으로 가는 과정이라면, 우주를 지배하는 근본 원리는 신에 의해 한순간에 주어지는 섭리가 아니라 시간 속에서 끝없이 펼쳐지는 진화로 이루어진다고 한다면, 시간의 진정한 모습은 ‘우연성’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이제 인간의 경우, 좋은 삶이란 인간 이전에 주어진 뭔가에 있고 거기에 따르는 것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가 자기 삶을 창조할 수 밖에 없는 개방성에 있다.
미래는 본인이 열어 가는 것이다.

이로서 전에는 ‘창조’라고 하는 말은 신에 속하는 말이었지만, 이제는 드디어 인간에게 귀속된다. 인간은 자기 스스로를 초월해 나가는 존재임이 드러났다.

비록
인간이란 존재가 ‘시간’이라고 하는 거대한 강물에 휩쓸려 온 조약돌 같은 존재이긴 하지만, 또한 진화의 우연적인 산물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인간은 그 진화가 빚어낸 최고의 걸작이고, 진화의 완성품이고, 나아가 자기가 진화되어 왔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깨달은 진화의 산물이다.

우리가 계속 진화되어 왔어도 만약 인간이란 존재가 탄생하지 않았다면 이 우주의 그 누구도 자기가 진화되어 왔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했다. 그런 점에서 인간은 진화의 산물이지만 동시에 진화를 초극하는 존재이다.

이처럼
과거의 인간은 이미 존재하는 의미를 발견하는 존재였다면 이제 인간은 의미를 만들어 내는 존재로 화했다.
이제 의미는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구성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노동이나 역사의 개념을 가능케 하는 개념이 따로 있다. 그것은 ‘자유’이다.
노동이란 인간에게 자유가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고, 바로 노동을 통해 인간이 보다 자유로워지는 과정이 역사이다.

그런데 문제는 인간의 자발성과 역사의 우발성이 상호 모순 관계에 놓여 있다는 점이다.
즉 인간은 사건들에 의해서 둘러싸여져 있다.

사건들로 가득찬 세계이다.
사건은 물질이 아니다. 물질로 환원될 수도 없다. 인간이 마음대로 다룰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그러면서도 인간은 사건과 더불어 살아가고 있다.

사건으로서 세계를 볼 때, 인간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스토아 학파는 철학의 분야를 자연철학, 논리학, 윤리학 세 가지로 나뉘었다. 그래서 스토아 학파의 현자들은 주머니에 달걀을 가지고 다녔다고 한다.

제가가 “스승이시여, 철학이란 무엇입니까?”라고 물어보면, 현자는 달걀을 꺼낸 다음 막대기로 그것은 친다. 그렇게해서 달걀을 깬다. 그리고는 노른자위가 자연철학이고 껍질이 논리학이며, 껍질과 노른자위 사이의 흰자위가 윤리학이라고 설명한다. 철학의 구도를 달걀을 가지고서 비유로 말한다.

노른자위는 심층의 차원, 즉 물질을 차원을 다루는 자연철학이다.
껍질은 이 물질의 차원 밖에 있는 의미, 기호, 그러니까 비물질적인, 비물질적인 차원을 다루는 논리학이다. 개념이나 말 같은 것은 물질이 아니다. 이런 것을 다루는 것이 논리학이다.
그러면 인간의 행위를 다루는 윤리학은 어디에 위치할까? 바로 물질의 차원과 의미, 언어의 차원 그 사이에 위치한다.

이런 구도에서 눈여겨볼 것은 이론과 실천의 관계이다.
우리가 사상 또는 철학, 아니면 사유… 등 등, 뭐라고 부르든 ld런 것들이 하는 작업은 가장 기본적으로는 이론적인 면과 실천적인 면 두 가지가 있다.

세계가 무엇이고 인간이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해명하는 이론적인 면이 있고, 우리의 실존적 삶, 도덕이나 사회 정의 같은 것들을 다루는 실천적인 면이 있다.

플라톤의 경우는 오늘날 우리가 흔히 과학의 대상이라는 생각하지 않는 그런 가치론적 존재들에 어떤 본질이 있다고 보았다. 그런데 현대인들은 그렇게 생가하지 않는다.

현대인들은 물질적 사물을 다루는 자연과학 같은 경우는 객관적이고 확실한 인식을 주지만 인간적인 가치가 들어가는 것들은 대단히 주관적이고 감성적인 인식만을 준다고 생각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론적인 인식에 관한 한 확실한 지식이 가능하지만, 윤리를 비롯한 가치론적인 것들에 관해서는 확실한 지식을 얻을 수 없다고 보았다.
다만 많은 경험과 토론과 반성 등을 통해서 어느 정도 개연적인 지식에 도달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러니까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보다는 가치론적인 지식의 확실성을 긍정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극기 상대적이고 회의적인 입장으로 나가는 것은 아니다.

여기에 비해서,
스토아 학파나 에피쿠로스 학파는 가치론적인 것의 고유한 차원을 부정하는 입장이다. 이것을 ‘자연주의’라 한다.
그들에 의하면, 가치론적인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은 궁극적으로 자연적인 사실들에 뿌리박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진화론 이후, 이 자연주의적인 생각은 큰 설득력을 얻게 된다.
스토아 학파에서 윤리학은 자연철학에 종속되기에 “자연에 따라 살라”는 것이 스토아 철학의 기본 입장이다.
스토아 학파에서는 법도 자연을 따라야 하는 것이고 그래서 자연법 사상이 대두된다. 인간이 만약 자연으로부터 불연속적으로 존재한다면 자연법이란 의미가 없게 된다.

그런데 과연 지식이 많다는 것과 올바르게 산다는 것이 과연 그렇게 확고한 관계를 맺고 있을까?
스토아 학파에서 추구하는 인식이란 기능적인 솜씨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 전체에 대한 인식, 자연 전체에서 인간이 차지하는 위치에 대한 인식 같이 근원적 인식을 말한다.

그런데 여기는 묘한 순환 같은 것이 있다. 행위를 바르게 하려면 올바른 인식이 토대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때 말하는 인식이라는 것이 단순한 지식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행위의 토대가 될 수 있는 철학적 인식을 말하는 것이고, 그러니까 어떤 갇도에서 보면 거꾸로 자연철학이 윤리학에 종속되어 있다고도 볼 수 있다.

자연을 인식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자연을 인식한다는 것은 곧 ‘원인들의 통일성’을 인식한다는 것을 말한다. ‘원인들의 그물망’, ‘물체들을 묶고 있는 총체적 끈’ 같은 것들이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원인들이란 다름 아닌 물체들이다. 결과는 물체들의 운동으로부터 생겨나는 사건들이다. 물체는 원인이고 사건이 결과라는 것이 스토아 철학자들의 정리한 바이다.

세계란 일차적으로 거대한 질서를 형성하는 물체들의 집합체이다. 여기에 바로 ‘비물체적인 것들’이 덧붙여진다.

스토아적 견지에서 보면, 인간이 삶의 표면에서 느끼는 가치는 물질적 운동의 결과일 뿐이다. 궁극적인 원인의 차원, 물질의 차원에서 보면 슬플 것도 없고, 기쁠 것도 없는 것, 그저 물체의 운동이 빚어낸 부대 효과일 뿐이다.

교통 사고를 당했을 때, 사건의 수준에서는 무척 고통스럽다. 하지만 원인의 차원에서는 그냥 자동차들의 입자들과 몸의 입자들이 부딪쳐 공간적 위치가 약간 달라졌을 뿐이다. 바로 이런 생각이 스토아주의를 ‘금욕주의’로 이끄는 것이다.

물론 세계의 변화는 한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하지만 변화를 파악할 수 있게 해 주는 어떤 실마리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사건’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사건을 해석하는 일이다. 이 점에서 사건은 ‘기호’의 일종이다.

물론 현대의 해석학과 스토아 학파의 해석이 다르다. 현대의 해석학은 숨겨진 의미를 드러내고자함인 반면에 스토아적 맥락에서 해석이란 계열화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사건들을 관계와 관계들로 엮어 놓으므로서 세계의 구조를 파악하려는 것이다.
이것은 또한 우주의 어떤 목적과 이유를 나름대로 반영하는 것도 된다.

예를 들면, 이 우주는 신의 선한 뜻에 의해 지배받고 있다는 생각 같은 것이다.
흔히 이것을 ‘섭리’라고 한다.
스토아학파는 우주를 지배하는 신성한 섭리를 믿는다. 우주 자체가 신이라는 것이다.

스토아 학파는 우주를 지배하는 순수 물리적 인과관계를 ‘운명’이라고 부른다. 오늘날 사람들이 ‘법칙’이라고 부르는 것을 그들은 그렇게 부른다.

그러니까 누군가가 번개에 맞아 죽은 것이 운명이 아니고(그것은 부대 효과이다) 번개의 물체적 운동, 그리고 그 사람의 신체적 변화 등 그 운동을 지배하는 인과가 운명이라는 것이다. 이 운명이 곧 섭리이다. 이로서 스토아 학파에는 운동인과 목적인이 하나이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해서, 스토아 학파에서는 목적인이 운동인에 동반되는 것이다. 운동인과 목적인이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우주가 일정한 인과에 따라 운동하는 것, 장엄한 질서를 이루는 것 자체가 또한 섭리인 것이다.

지구가 태영을 돌 때 인과란 지구와 태양 사이에 성립하는 관계이다. 지구가 태영을 도는 것은 하나의 인과적 운동인 동시에, ‘우주=신’의 장엄한 섭리인 것이다.

여기에다 시간을 개입해보자.
우주에 대폭발이 일어나 우주가 형성되고 무수한 시간이 지나면서 생명체가 생겨나고, 공룡의 시대가 오고, 인간이 태어나고 … 하는 과정이 계속되었다면, 그리고 자신의 눈앞에 이 거대한 진화의 과정이 부채가 펼쳐지듯이 쫙 펼쳐진다면, 그 이럴 Ei 이 운동이 펼쳐지는 메커니즘은 운동인이지만, 그 장엄한 파노라마는 또한 섭리이기도 하다.

그래서 스토아 학파에서는 별도의 신의 의지가 없다. 그것은 이 우주 전체, 우주의 펼쳐짐 전체가 신이기 때문이다.

스토아 학파에서 우주 바깥에는 (물론 공간적 의미가 아니다) 아무것도 없다. 우주가 신이기에 그러하다.

이렇게 되면 인간에 대한 이해도 달라진다.
인간은 피조물이 아니라 신성과 거리가 먼 고독한 존재도 아니다. 우주는 신이고 우리는 우주의 조적들이다. 그러니까 우리 안에도 신성(神性)이 있는 것이다. 우리가 곧 신의 한 파편인 것이다. 아니 우주의 모든 것이 신인 셈이다.

단지 신과 개체들의 차이는 전체와 부분의 차이일 뿐이다. 우주가 거대한 불이라면 우주의 모든 개체들은 불티들이다.

그러니까 우주의 개체들 사이에 그다지 큰 불연속성이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모두 불에서 나와 불로 돌아가는 것이다. 우주와 내가 다른 것이다. 고향을 잃어버렸다고 슬퍼할 것은 없다. 이 세게 전체가 우리 모두의 고향인 것이다. 다만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서로들 아귀다툼을 하고 있다고 스토아 학파에서는 보고 있다.

이러한 사유는 ‘내재성’의 사유라고 부른다. ‘초월성’의 사유와 대비되는 사유이다. 사토아 학파에서는 초월적인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스토아 학파에서는 설명과 정당함이 분리되지 않는다. 설명한다는 것은 우주의 인과를 밝혀내는 것이고, 정당화하는 것은 우주의 섭리, 신의 위대함을 보여 주는 것이다. 이 둘이 곧 하나이다.

즉 사건을 해석한다는 것은 원인을 설명하는 것인 동시에 목적을 정당화하는 것이다. 요즈음 시대에서, 설명하는 것은 과학자의 할 일이고, 정당화하는 것은 사제가 할 일처럼 간주되지만 스토아 학파에서는 이런 분리가 없다는 말이다.

이처럼 하나의 사건을 해석한다는 것은, 결국 그 사건을 섭리적 운명으로부터 펼쳐지는 사건들의 계열에 복속시키는 것을 뜻한다. 즉 부분을 전체 속에 안착시키는 것이다. 그럴 때 인간은 그 사건이 어쩔 수 없는 것임을 깨닫고서, 한탄하거나 원망하는 마음을 거둘 수가 있다.

이런 작업의 궁극적 이상은 우주의 모든 사건들은 공현존(共現存)의 상태로 읽는 것이다. 과거와 미래가 한눈에 펼쳐지는 것이다.

인간이 이런 경지에 다다른다면 그때 신이 되겠지만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가능한 한 사건을 잘 해석해서 우주 전체의 운동에 편입시킨다면, 인간은 우주와의 합일(合一)에 보다 가까이 갈 수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눈여겨볼 것은 스토아 학파는 완벽한 결정론을 취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후대에 나오는 라이프니츠도 이와 같다. 우주는 완벽한 질서를 이룬다. 이점에서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와는 다르다.

결국 사건을 완벽하게 해석한다는 것은 사건이라는 하나의 단일성을 우주 전체의 한 매듭으로서 파악하는 것을 뜻한다.
그래서 도덕의 문제라는 것은 이 세상에서 우리가 겪는 하나하나의 사건들을 우주 법칙의 한 현실화로서 받아들이는 것을 뜻한다. 물론 이러한 완벽한 파악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지금 여기에서’의 현실화이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일단 현재이다. 그리고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긍정적인 일은 그 사건과 그 사건의 의미와 합일하는 것이다. 법칙을 파악할 수 있는 것은 한계가 있기 때문에 그 모자란 부분에서는 인식을 포기하고 나 자신을 던져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서 우주 전체와 화해하는 것이다.

사실 동양 윤리에서 ‘운명’이라는 말을 쓸 때는 주로 이런 의미이다. ‘체념’을 말한다. 섭리를 무리하개 해석하려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저 하늘의 뜻에 맡긴다. 맹자의 말처럼 “사람의 일을 다 하고 하늘의 명을 가리려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의미에서 인간들이란 모두 수행자들이다.
그런데 그 후에 그리스 철학에서는 조금씩 이런 운명관에서 벗어나는 것이 보인다.
운명으로부터 자율성을 획득되는 과정이다. 그러나 이 자율성은 물론 근대적인 자율성이 아니라 다만 운명에 완전히 순종하는 태도로부터 운명과 화해하는 태도로 바뀌는 것이다. 그것이 ‘용기’이다.

용기란 자신에게 닥쳐 온 운명을 피하거나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그 운명을 떳떳하게 받아들이는 것이다.
스토아 학파에서는 현재가 그 자체로서 완전한 것이다. 매순간의 현재는 우주적 인과의 한 매듭이다. 복속된다면 우주 전체의 인과-섭리일뿐, 어떤 미래의 목적에 복속되는 것은 아니다.

그 어떤 사건도 그 무엇인가를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우주의 인과, 섭리가 그렇기 때문에 존재할 뿐이다. 그래서 스토아 철학에서의 가능성 개념은 큰 위상을 부여받지 못한다. 현재가 중요하니까.

그래서 스토아 철학에서 진정한 ‘원인’은 작용자(개체)일 뿐이다. 목적이나 형상이 동원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목적이란 원인 그 자체에 동반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개체들의 전체가 신이고, 따라서 궁극의 실행자는 ‘실행하는 로고스’라고 할 수 있다. 스토아 철학은 ‘활동성’의 철학이다. 예를 들면, 산보하는 행위가 산보의 현재를 규정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스토아 철학은 함으로 간명한 철학이다.

최소한의 개념들 외에 불필요한 개념들을 모두 제거하는 매끈한 철학이다. 신이니 형상이니 목적이니 도(道)니 …하는 개념들을 일체 배제된다.

그런데 현재와 활동성을 중시하는 이런 생각은 실천적인 면에서 중요한 함축을 띤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경우에도 실천면에서도 목적론적 사유가 동원된다.

왜 공부하는가? 뭔가 알기 위해서다. 왜 알려고 하는가? 알면 좋기 때문이다. 왜 알면 좋은가? … 이런 식의 목적론적 사유가 펼쳐진다. 그런데 왜 알면 좋은가? 좋은 것이 좋기 때문이다. 이것으로 끝이다.

이런 목적을 궁극 목적 또는 자체 목적이라고 부르고, 그 자체 목적의 내용을 ‘행복’에다 둔다. 그런데 스토아 학파는 목적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중요한 것은 현재에 충실하는 것이다. 현재에 행복하면 된다.

반면에 아리스토텔레스에게 궁극 원인은 궁극 목적이고, 이 궁극 목적인 신이다. 그리고 신은 운동하지 않는다. 신을 바라보면서 그리고 가려는 존재들만이 운동을 한다.

이처럼 고대 사유에서 궁극적 원인은 늘 부동(不動)의 존재로 파악된다. 궁극 원인 자체가 움직이면 말이 안 된다.

“우주는 운동하지만 우주를 운동하게 만드는 근본 원인 자체는 운동하지 않는다”. 이것이 그리스적 생각이고 또 상식적 생각이다.

그런데 스토아 학파는 내재성의 사유이다. 스토아 학파에서는 우주 자체가 신이고, 개별적인 운동들은 전체적 운동의 국면들일 뿐이다. 그러니까 궁극 원인(신=우주)이 운동하는 것이다.
이렇게 운동하는 원인을 상정하는 것이 그 당시 사람들에게 기이하게 생각되었다.

그런데 만일 인간이 우주의 인과를 총체적으로 인식한다면 기다림, 후회, 절망, 희망…이런 것들이 의미가 있을까? 우리의 섭리를 완벽하게 이해해서 그 변화가 우리 눈 앞에 펼쳐져 있다면, 기다림이라든가 후회하든가, 희망, 절망이 별의미가 없어져 버린다.

이처럼 스토아 학파에서는 올바른 행위는 우주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전제한다는 것이다. 스토아 학파는 인식을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와는 반대로 감각에서 출발해서 이해한다.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의 경우(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보다 보다 경험주의적이긴 하지만), 우리가 이 세계의 참된 모습을 발견하려면 감각적인 것을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즉 감각적인 것을 넘어서야 한다.

예를 들어, 여기에 돌멩이 다섯 개가 있다면, 우리는 거기서 다섯이라는 수를 발견한다. 하지만 엄밀히 말해서 다섯이라는 수는 내가 볼 수도 들을 수도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다섯이라는 수를 발견한다.

그런데 우리가 돌멩이에서 다섯이라는 본질을 보려면 크기, 모양, 색깔, 맛, 향기 … 등등의 감각적 성질들을 빼야 한다. 그리고서 사물의 비감각적인 면을 이해했을 때, 우리는 그 사물의 형상을 알게 된다. 즉 돌멩이의 여러 감각적 성질을 뺐을 때 5라고 하는 형상을 파악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스토아 학파는 그렇게 보지 않는다. 모든 인식을 감각에서 출발할 경우 그 어떤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인식도 가져오지 못한다는 게 플라톤의 입장이다. 플라톤은 감각을 배제하고 이성적으로 세상을 봐야 실재를 볼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스토아 학파의 입장은 감각에서 출발하되, 감각으로부터의 인식에서 인식 주관에 의해 왜곡되는 측면과 그렇지 않는 측면을 구분한다.
자연에는 객관과 주관을 이어 주는 끈, 그래서 주관의 인식을 객관적인 그 무엇으로 만들어 주는 끈, 세계와 영혼을 이어 주는 자연의 끈이 있다는 것이다. 영혼이 우주 전체의 한 조각이기 때문이다. 자기 스스로를 사건과 동일시하는 것이다. 스스로를 그 사건의 자리에 놓는 것이다. “사건들을 그들이 일어나는 데로 원하라”라는 원칙이다.

스토아 학파에게는 구체적인 물체로부터, 또는 형태나 양태로부터 우리가 찾아내야 할 그 어떤 형상이나 본질(예를 들어, 플라톤적 의미의 실체)이란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는다.

마치 스피노자가 실체와 속성을 동일시하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스토아 학파에게 있어서도 실체와 속성(형태를 지닌 물질, 구체적인 물체, 형태 또는 양태)은 동일시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같은 스토아 학파적 실체, 즉 구체적인 물체들은 결코 정적인 것들이 아니라, 자기 안에 에너지를 지니고서 행위하며 서로 뒤섞이는 그런 물체들이다.

그것들은 발생 또는 생성( 이것들은 효과-사건들을 가리킨다)하는 구체적인 물체들, 그리고 이 발생 또는 생성이라는 변형들을 통해서만 자신들의 형태 또는 양태들을 취하는 구체적인 물체들인 것이다.

물론 이렇게 취해지는 형태 또는 양태들은 곧 구체적인 물체들 그 자체를 이룬다. 따라서 스토아 학파적 실체, 즉 구체적인 물체들은 오로지 발생 또는 생성을 통해서만 자신들의 존재를 유지하는 물체들이다.

물체적인 것이 이루어지는 것이 거론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이다. 한편 스토아 학파는 물체의 이같은 행위와 뒤섞임으로부터 스토아 학파의 고유의 사건의 논리학을 끄집어낸다.

우선 스토아 학파는 인과관계를 결코 같은 단위로 잴 수 없는 두 개의 질서들은 원인들의 질서와 효과(결과)들의 질서로 구분한다. 왜냐하면 원인들의 질서는 물체들의 뒤섞임과 행위로부터 비롯되는 반면, 효과들의 질서는 그것과는 전혀 다른 본성을 지닌 효과-사건(들뢰즈가 표면 효과라고 부르는 것들)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즉 원인들은 물체들인 반면, 효과-사건들은 그 어떤 형태나 양태도 지니지 않는 무형의 것들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효과-사건들은 그것들 자체가 이처럼 무형의 것들이라는 점에서 본질적으로 언어적으로만 표현이 가능하다.

하지만 이와 동시에 효과-사건들은 궁극적으로 보아 물체들에게 속성들로 부여될 무형의 변형들이기도 하기 때문에, 그것들은 결국 물체들의 어떤 속성들이기도 하다.

바로 이 ‘효과-사건’들, 즉 물체들에게 속성들로 부여될 무형의 변형들이로되 오로지 명제의 표현된 내용으로만 존재하는 것들, 따라서 분명 명제 밖에서는 존재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신들의 언어적인 본성으로 환원되지는 않는 것들이 곧 스토아 학파가 비물체적인 것들이다.

스토아 학파에서의 사건이란 개인적 입장을 고려하는 것이 아니라 우주적 관점에서 이해하고 개인과 우주의 거리를 무화(無化)시켜 버린다. 즉 “내 운명은 나 이전에 이미 존재했으며, 나는 그것을 구현하려고 태어난 것이다.” 예를 들면, 개인이 겪을 사건으로서의 상처는 개인 이전에 운명의 한 매듭으로서 존재했으며, 개인은 그 사건의 수행자라는 것이다.

달리 말해서 사건이란 우리에 의해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서 발생하는 것이다. 이처럼 스토아 학파에게 있어 운명이란 절대적이며 완벽하게 결정적이다.

Ⅲ. 라이프니츠의 형상철학으로 파악한 인간의 행동 양식

형상철학의 특징은 무엇일까?
그것은 우리가 형험하는 세계, 즉 물질적으로 나타나 있는 세계를 논하기 전에 우선 이 세계를 바로 이렇게 존재하게 만드는 비물질적 차원울 먼저 논하면서 등장된 개념이다.

형상, 리, 섭리, 법칙, 구조 … 등등이 바로 그런 것들이다.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상. 기독교의 ‘말씀’, 성리학의 리(理) 등이 그러하고 과학에서 말하는 법칙이나 구조 등도 여기에 해당된다.

라이프니츠가 내세우는 모나드, 즉 단자(單子)도 일종의 형상이다. 그리고 그에 물질이 가미되어야지 우리가 경험하는 개체가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이프니츠의 모나드론은 그리스도적 형상론다 다르다.

라이프니츠는 변화를 토대로 하고 있다. 고대 사상이 우선 영원불변의 형상을 전제하고 그 후 운동을 문제삼았다면. 근대 사유는 우선 변화를 본래적인 것으로 보고 그 다음 정지를 설명한다.

그런데 이 때 이 변화를 외적으로 파악하는 경우도 있다. ‘관성의 원리’가 바로 그런 경우이다. 그리고 내적으로 파악하는 경우도 있다. 근대 초의 대체적인 경향이 전자로 흘렀다면, d라이프니츠는 바로 후자를 강조한 대표적인 경우이다.

다시 말해 라이프니츠의 변화는 단순히 외부적 힘에 의한 운동이나 외적으로 관찰된 변화가 아니라 모든 모나드들이 자체 안에 지니고 있는 내적 힘을 말하는 것이다. 이 점에서 ‘활동성’이라고 부를 수 있다.

이 ‘활동성’이란 무엇일까? 다름 아닌 한 모나드의 질적 변화를 하나는 것이다. 다시 말해 한 모나드를 구성하고 있는 속성들의 운동을 말하는 것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모나드들 사이에 질적 구분이 없다면 그들의 변화를 간파해 낼 도리가 없는 것이다.

기계론이나 원자론은 결국 모든 질적인 것들의 양적인 요소들, 즉 크기, 모양, 위치(의 이동)에 관한 것이라면 라이프니츠에 있어 차이점이란 질적 차이가 우선이다. 두 사물이 질적으로 구분이 없다면 두 사물을 같은 것으로 봐야 한다는 것이 라이프니츠의 생각이다.

이 말은 똑같은 질을 가진 것을 사이에는 구분지을 수 없기에 모든 모나드들이 구분이 된다는 말은 질적으로 같은 모나드가 없다는 말이고, 이는 세상에는 다질적인 모나드들만 있다는 말이다.

라이프니츠가 세계의 ‘질적 다양성’을 강조하기 위해 이 원리를 제시했다.
라이프니츠는 신이 우주를 창조할 때 모나드를 먼저 만들었다고 한다. 이것은 라이프니츠가 물질을 이야기하기 전에 우선 모나드를 이야기하는 것과 상통한다.

질료를 빚어서 개체를 만든 것이 아니라 개체를 어떻게 만들 것인지 그 규칙성부터 먼저 만들었다는 말이다.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는 말의 철학적 의미이다. 그리고 나서 질료를 만들어 그에 모나드를 구현시켜 개체들을 만든 것이다.

일종의 건물의 설계도가 건물보다 먼저 있는 이치와 같다. 플라톤과 비교해 보면, 플라톤의 경우 형상의 세계와 데미우르고스(만물을 조성하는 장인 匠人)가 따로 있고, 데미우르고스가 형상을 본떠서 질료를 빚는다. 그런데 기독교 전통에 속해 있는 라이프니츠의 경우, 형상은 신의 머리(오성) 속에 들어있는 것이고 질료는 나중에 창조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오로지 건축가만 있었던 것이다. 그 후 건축가가 자기 머리 속에 들어 있는 관념들을 이리저리 결합시켜 갖가지 설계도를 만들었고, 그 중 괜찮은 것을 선택해 질료를 만들어 그에 구현시킨 것이다.

그러나 특정 인간의 개체가 죽 해체되어도 그 인간의 설계는 신에게 남아 있는 것이다. 이것이 모든 형태의 형상철학이 공유하고 있는 기본적인 사유 패턴이다.

그런데 문제는 일단 설계된 모나드는 완벽하게 결정론적으로 존재하느냐 하는 점이다. 다만 라이프니츠에 있어 주름으로서 접혀 있던 규정성이 조금씩 펼쳐지고 있는 점이 차이나는 점이다.

그렇다면 완벽하게 결정된 모나드들은 각기 철저하게 개별적으로 고립되어 있는가? 그것이 “모나드에는 창이 없다”라는 의미인가? 그렇지 않다. 고립되기는커녕 오히려 모든 모나드들이 무한히 중첩되어 있다. 라이프니츠에게 있어서는 모든 것을 신(神)에 귀속시키려고 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전근대적 사유는 인간의 정체성을 인간 바깥에서 찾았다. 형상, 신, 하늘, 리 등이다. 라이프니츠에게서 신은 절대적 객관성이다.

그러나 칸트 이후 철학자들은 주체와 자유의 철학을 전개했다. 인간 의식이 자유이다. 인간이 절대적 주관성이요 주체성이다. 선택과 거기에 따른 책임성을 스스로 끌어안고 있다고 보았다.

인간이 발견한 모든 객관은 인간 주관의 어떤 조건들 하에서만 가능하다고 본 것이다. 그래서 인식론이 중요하게 부각된 것이다.

이 조건을 망각할 때 인간은 자신이 발견한 객관을 절대화하게 되고 급기야 자기 자신을 그 객관의 원칙 속으로 함몰시키게 된다. 이것이 철두철미한 과학적 사유방식의 특징이다.

예컨대 유전자를 발견하고 그것을 인식론적 반성 없이 절대화하게 되면 결국 인간은 ‘이기적 유전자’의 껍데기로 전락하는 것이다.

이렇게해서 결국 참된 사유한 세계와 나, 우주와 인간, 객관성과 주체성의 영원한 변증법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라이프니츠의 형상 철학은 이러한 균열의 골을 메우고 통합하려는 시도에서 비롯되는데 그 가운데서 모나드론이 나타나 있는 것이다. 모나드론의 핵심은 개체적 사물의 철저한 ‘자기 동일성’에 있다. ‘자기 본존에 대한 열망’을 각자의 모나드가 어떻게 발휘하고 왜 발휘하게 되느냐를 살피는 것이다.

플라톤의 ‘이데아’는 부동의 존재이다. 영원하고 자기 동일적인 존재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형상에 운동성을 부여하려고 한다. 운동은 왜 발생하는가?

형상은 질료에 구현되는데, 바로 이 질료에 의해 운동이 발생한다. 여기에 목적론적 사유 g양태가 핵심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라이프니츠의 실체는 활동성을 그 기본 성격으로 하고 있다.

고대에는 움직이지 않는 것이 원래 세상의 본모습이고, 움직인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든 그 본모습이 타락한 것이라고 보았다. 그래서 고대에는 “왜 움직이는가”를 설명해야 했던 시절이다.

그런데 근대에 와서는 거꾸로 되었다. 근대에 와서는 세계는 기본적으로 운동하는 것으로 파악된다. 그리고 거꾸로 사물이 “왜 정지할까”를 설명하려고 한다. 물음 자체가 거꾸로 된 것이다.

이것은 근대 물리학의 제1원리가 ‘관성의 원리’인 이유이고 근대 물리학자들이 몰두했던 문제들 중 하나가 ‘마찰’에 관한 이유이다.

그런데 라이프니츠 철학의 성격은 이런 근대 철학적 성격을 가지면서 동시에 넘어선다. 즉 그에 따르면 세계는 운동할 뿐만 아니라 그 운동의 뿌리는 각 모나드들 자체 내에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라이프니츠가 실체에 본질적인 속성으로서 활동성을 부여하는 것은 상당히 의미심장한 내용인 것이다. 라이프니츠에게 모든 사물은 넓은 의미에서의 생명체들이고, 따라서 실체란 마로 생명체들이다. 활동성을 가지지 않는 것은 실체가 아니라는 말이다.

그렇다면 바위나 흐르는 강물까지 생명체로 보는가? 이들은 활동성이 영(0)으로 수렴하는 생명체, 그러니까 생명체의 무한소라고 할 수 있다.

데카르트의 기계론이나 원자론 등에서 모든 운동의 원인은 그 실체의 외부에 있다고 한다. 데카르의 경우과 신과 사유를 제외한 모든 존재는 연장(延長)으로 설명되고 이들은 관성을 통해서 정의된다.

운동 원인이 바깥에 있다는 것이다. 나아가 데카르트는 연속적 창조를 제시하기까지 한다. 즉 신이 매순간 이 세계에 개입해서 계속 창조해 나간다는 것이다. 원자론의 경우 원자들은 일단은 스스로 움직인다. 그러나 그 움직임은 무규정적인 맹목적 운동이고, 오늘날의 브라운 운동(기체의 분자 움직임처럼 일방적이고 임의적인 운동)과 흡사하다.

그러한 운동에서 실제 사물들을 산출하는 운동이 발생하려면 그들이 서로 충돌해서 그 결과가 일정한 질서를 낳아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원자론의 경우 실질적인 운동(사물들을 형성하는 변화)의 원인은 사무들에 대해 외적이다.

이에 비해 라이프니츠의 경우 모든 개별적 존재들이 각자 그 안에 운동 원인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내적 원리에 따라 움직인다. 그리고 그 내적 운동들 전체가 신의 소관이다.

라이프니츠의 창조설에 따르면, 신은 영혼을 먼저 만들고 그 영혼을 물질에 구현시킨다.
모나드란 개체의 설계도, 프로그램이 되고, 개체는 결국 산아 설계한 프로그램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 된다. 이것은 진정한 자생성(自生性)과는 거리가 멀다.. 마치 미리 감아 놓은 태엽이 풀리는 것과 같은 과정이 된다.

인간 관계로 이와 같이 진행된다는 것이다. 서로가 서로를 지각하고 서로 관계 맺는 것도 서로의 태엽이 풀리는 작업이 공통적으로 만난 결과이다. 하나의 모나드란 이러한 요소들의 집합체이다.

라이프니츠에게 있어 이 세계의 기본 특징은 다채롭다는 것이다. 세계가 풍요로우면 풍요로울수록 신의 위대함을 더욱 더 표현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변화하는 존재의 ‘세부 사항들’이 곧 모나드의 내적 복수(複數)성(=다수성)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또 이것을 ‘주름’이라고 한다.

사건의 활동이란 바로 이 주름이 펼쳐지는 과정이다. 주름 하나만 그 모나드들은 상호 다른 모나드들이다. 그래서 라이프니츠에게서의 모든 차이는 개념적 차이인 것이다. 그렇지 때문에 라이프니츠에게서 한 개체의 신체는 그렇게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는다.

대학의 영문학과 건물이 불에 탔다고 해서 ‘영문학과’라는 비물체적 형상이 사라지는 것이 아닌 과과 같다. 영문학과의 건물은 단지 영문학과의 껍데기에 불과하다. 개인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신체가 비록 다 썩어도 그 사람의 모나드만 신이 알고 있다면 언제라도 복제가 가능한 것이다.

그런데 어떤 측면은 변화하고 어떤 측면은 변화하지 않는 것은 신이 개입할 경우에 그러하다. 자연적으로 변화하면 연속적으로 변화하지만 신이 개입하면 불연속적인 변화가 생겨난다. 하나 하나가 변화한다는 것은 모나드의 주름이 하나씩 펼쳐진다는 뜻이고 나머지가 남는다는 의미는 바로 그 나머지로만 유지되는 실체성이 여전히 존속하고 있다는 말이다.

이러한 실체성에 대해서 모나드가 어떤 식으로 지각하게 될까? 라이프니츠에게 있어 지각들이란 첩첩히 내부에 접혀 있다. 한 모나드 안에 무한한 많은 지각들이 내속되어 있지만 이들 모두가 의식되지는 않는다.

라이프니츠는 지각을 통각과 의식으로 둘로 구분한다. 통각이란 인간의 자기의식적 수준, 즉 ‘정신’의 수준에서 성립하고, 의식이란 영혼을 가진 모나드의 수준에서 성립한다. 그러니까 모나드/정신/통각의 3분법이 성립한다. 모나드에 해당되는 것은 지각이고, 정신에 해당되는 것는 의식이고, 통각에 해당되는 것은 통각이다.

그는 왜 이렇게 구분지었을까?
사람은 죽은 상태를 예를 들면, 사람이 죽었다는 것은 미세지각 상태에 떨어진 것을 의미한다. 즉 극미한 상황이지만 그 안에도 미세한 주름이 접혀 있다는 것이다. 데카르트와 같은 물질주의자들은 물질 자체를 애초에 죽은 것으로 간주하지만, 라이프니츠는 그렇게 보지 않고, 완전한 소멸의 상태로 보지 않고 있다.

충만한 삶과 0에 가까운 삶 사이에 무수한 위계가 있다는 것이다. 데카르트와 같은 물질주의자들은 죽음으로 인해 물질과 영혼이 전적으로 분리되었다고 보는 반면에, 거기에 비해 라이프니츠는 영혼과 신체는 늘 같이 존재한다. 영혼이 명료한 지각을 갖기 위해 신체가 요구될 수 밖에 없다는 겁니다. 단지 개체마다 영혼의 물질의 배합이 다른 것이다.

이처럼 모나드의 구조에 있어서는 지각이 있다. 하지만 그 모나드의 생성에 있어서는 지각이 아니라 욕동(浴動)이 작렬한다. 욕동이란 한 지각으로부터 다른 지각으로의 변화와 이행을 가능케하는 내적 원리에 의한 활동이라고 보고 있다.

이것은 곧 주름을 펼치려는 힘이기도 하다.
각각의 모나드는 자체 안에 잠재적 주름을 내포하고 있는데, 그래서 모나드들은 그 주름들을 펼치려고 하는 것이다. (마치 종이접기 한 작품들이 오래 놔두면 다시 원상태로 펼쳐지려는 모습을 보이는 것과 같다)

그러니까 라이프니츠에서 지각이란 두 타자가 우발적으로 만나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두 타자 안에 내포되어 있는 주름이 동시에 펼쳐지는 것이다. 현대적인 용어로 말하자면 욕구(욕망)이라는 말이 적당할 것이다.

이 욕동은 자기 확충을 위함이다. 이처럼 라이프니츠의 함이란 외재적인 것이 아니라 실체 그 자체와 거의 동일시될 수 있는 근본적인 것이다. 오늘날로 말하면, ‘에너지’에 가깝고 동양철학 용어로 말하면 ‘기(氣)' 가깝다. 라이프니츠의 힘이란 자연철학적 힘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이런 점에서 욕망은 또한 현실적 무(無) 끊임없이 증식시키는 힘이기도 하다. 즉 현실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것을 의식 속에서 상상을 통해 표상함으로써 가능적 존재로 만들어 내는 것이다.

한 생명체가 얼마나 고등한가는 그 생명체가 현존의 차원으로부터 얼마만큼 멀어질 수 있는가에, 즉 추상화의 능력이 비례한다.

눈에 앞에 금강산이 보이지 않더라도, “금강산에 가고 싶다”를 욕망한다. 금강간을 상상을 통해서 욕망한다는 것은 얼핏 우리 마음을 가능적 금강산으로 채웠다고 해야 할 것 같지만,사실 우리 마음 속에 금강산의 무(無)가 표상된 것이고 그만큼 우리 마음이 움푹 패인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 패인 부분을 메우려 애쓴다. 즉 금강산을 현실적 존재이자 가능적 무로 바꾸는 것이다. 바로 이 욕망이 우리 행위의 원동력이 된다.

이것을 존재론적으로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현존의 존재는 주체의 소멸을 항상 동반하게 되어 있다. 그 이유는, 존재가 원래 주체의 과제가 되기 때문인데, 새로운 존재가 과제의 전개 과정에 등장하면서 기존 존재 위에 애매하게 겹쳐지기 때문이다. 그렇게해서 돌출된 ‘초과 존재성’이 바로 국가, 학교, 계급 사회, 교회, 회사, 가정 같은 것이다.

따라서 당연히 여기서는 존재의 공백이 발생한다. 이 존재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초과 존재를 상정하고 그 공백을 몰아내는 일을 하는 것을 새로운 자기 임무로 간주하는 양상을 띤다. 이것이 ‘메타-구조’를 형성한다. 그러나 이것으로는 그 공백에 다가설 수 없다. 따라서 결국 존재론적으로 볼 때, 무를 표상하는 욕망으로는 자신의 주체성 충실해 해명해 낼 수 없는 것이다.

인간을 늘 특이점을 찾게 되어있고, 그 특이성으로 인해 자기 존재의 공백에 접근할 수 없으면서도 자기 자아성을 찾아 떠도는 유령으로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이 유령은 늘 대상의 범주를 파괴하고 그 파괴로 말미암아 주체를 결정지을 범주도 더불어 같이 파괴되는 것이다.

그래서 종교적인 사람들은 신을 그 와중에 등장시켜 그 신이라는 진리를 매개로 하여 대상과 주체를 일치시키려고 시도하면서 방황을 그만 두려한다. 그 중의 한 사람이 바로 라이프니츠이다.

모나드가 단순한 물질 덩어리가 아니라고 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지각작용과 욕동 작용에 근거를 두고 있다.

만일 이 우주에 물질 덩어리만 있다고 생각해 보면, 지각이나 욕동이라는 것은 없을 것이다. 예를 들어 어떤 두 물질 덩어리가 있다면 그 덩어리들은 그냥 공간 속에서 같이 있을 뿐이다. 그런데 그 두 물질 덩어리가 서로 지각을 하고, 또 상호적으로 어떤 일정한 활동을 한다면, 그 때 우리는 그들을 그냥 물질 덩어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다. 그 때 우리는 그 덩어리들 안에는 물질이 아닌 어떤 것, 즉 영혼이 들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일반적인 모나드의 상태는 의식이 동반되지 않는 상태이다. 그러니까 식물적인 상태라고 할 수 있다. 혹은 인간의 경우를 말한다면 기절을해서 아무런 꿈조차 꾸지 않는 깊은 잠에 떨어진 미세 지각의 상태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까 지각없는 모나드란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동물이 되면 비로소 영혼으로서의 모나드라고 할 수 있다. 사람의 경우를 보면, 기절하기 전에 통각했고, 기절해 있었을 때 통각하지 못했고, 다시 깨어났을 때 통각한다는 점으로 미루어 볼 때, 기절해 있었을 때도 지각은 있었다는 것이다. 지각이 없어졌다가 갑자기 다시 생길 리가 없다.

즉 존재에서 무로 갔다가 존재로 다시 돌아올 수는 없다. 다만 밑바탕에서의 연속성 위에서 어떤 불연속성이 있는 것이다. 마치 물을 국자로 떠냈다가 다시 담았다가 다시 떠내는 행위와 같다.

하나의 지각은 바로 이전의 지각에 의해 결정되는데, 바로 앞에 아무 기각도 없는데 갑자가 지각이 허공에서 뚝 떨어질 수 없다. (無에서 생성될 수 없다) 기절 뿐만 아니라 죽음의 경우도 이런 논리로만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모나드에게는 절대 죽음이라는 것은 엇는 것이다. 이것을 라이프니츠는 지각론을 통해 증명한다.

절대 죽음만 없는 것이 아니라 라이프니츠에게는 절대 무도 없다. 예컨대 우주가 멸망해서 그 어떤 형상도 존재하지 않는 상태로 변했다고해도 거기는 미세 지각들로 출렁이고 있다는 보는 것이다.

그리고 기회가 되면 다시 우주는 그 안에서 발생해서 높은 정신 상태가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래서 미세 지각 상태는 일종의 흐름이지 정지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다.

이처럼 퍼올려지지 못한 채 명멸하고 있는 지각들로 되어 있는 모나드를 라이프니츠는 ‘벌거벗은 모나드’라고 부른다. 영혼이 없는( 더 정확히 말하면 미세한 영혼밖에 없는) 모나드이다.

동물에서는 높은 지각 작용이 부여되는데 여기에는 ‘높은 지각이란 분명히 기억을 동반하는 지각이다. 이러한 지각은 미세 자각들이 조직될 때, 그리고 통합될 때 성립한다. 동물들은 이런 조직화, 통합을 신체 기관을 가지고 행하게 된다.

이 기관은 햇살이나 공기의 파동들을 모으고 이들을 결합해 보다 큰 효과를 나타내도록 만든다. 후각, 미각, 촉각, 또한 아직 우리가 모르는 감각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이렇게해서 영혼에서 일어나는 일이 신체 기관에서 일어나 일을 표상하게 된다. 표상이란 재현이라는 말이기도 하다. 물리적 차원과 정신적 차원이 표상관계를 형성한다는 것은 그들이 다른 존재임에도 서로 일치한다는 뜻한다. 물론 다른 실체니까 동일하다는 것이 아니라 구조적으로 상응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칸트에서 이러한 일치는 부정된다. 감성과 이성(오성)의 일치는 부정된다. 칸트에 있어 ‘이데어’는 세게 저편에 있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의 관점을 가리킨다. 그런데 그 관념이 물질적 존재로부터 생겨나는 게 아니라 별도의 차원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즉 인식은 경험으로부터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경험과 더불어 생겨난다는 뜻이다. 오성이 인식 질료를 ‘구성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라이프니츠의 형이상학적 구도(물질-정신)가 칸트의 인식론적 구도(감성-오성)로 바뀌고, 그 와중에 예정조화설이 구성주의로 바뀐다. 라이프니츠에서의 ‘조화’와 칸트에서의 ‘구성’의 대비는 근대 주체철학의 탄생을 선명하게 보여준다.

라이프니츠에 있어 영혼 수준에서의 모나드에게 일어나는 지각은 ‘느낌’의 수준이다. 그런데 의식적 지각에다가 기억까지 동반되면, 그런 지각은 늘 일정한 느낌으로서 발생하게 된다. 그래서 감동이라는 말이 나온다.

만약 기억 작용이 없다면 지각 하나나가 다 고립된다. 하나하나의 지각이 시간 속에서 이어지지 않고 그 자체로서만 존립할 경우, 그런 존재는 오로지 매순간 단절되는 현재들만을 살아가는 것이다. 그럴 경우 영혼이라는 고급한 모나드는 성립할 수 없다. 그래서 물질의 경우에는 기억이라는 희박하다.

그리고 고등한 존재일수록 더 고급한 기억을 갖는다. 인간의 경우를 보면 아주 어릴 때는 방금 봤던 것도 기억 못한다. 어마니가 나가면 아주 사라진다고 생각해서 울게 된다. 그리고 완벽한 기억을 가진 존재, 그래서 어떤 의미에서는 기억 자체가 필요없는 존재, 바로 그런 존재가 신이다.

이렇게 되면 물질로부터 신까지 존재의 등급을 매길 때, 그 중요한 기준들 중 하나가 바로 기억이 되는 것이다.

라이프니츠는 일반적인 모나드로부터 영혼으로, 그리고 이제는 인간으로 관심이 넘어간다. 그리고 나서 신으로 넘어가게 된다. 논의가 아주 저급한 것으로부터 점차 고급한 것으로 나아간다. 인간에 관한 이야기도 인간에게서 가장 저급한 부분, 즉 동물성과 연속적인 부분으로부터 이야기를 시작하게 된다.

라이프니츠는 기억에만 의존하는 경험적 인식의 수준을 말하고 있다. 그리고 이럴 경우 인간은 동물과 별반 차이가 없다는 것이다. 동물들도 기억에 의존하니까.

그런데 동물과 인간을 구분해 주는 것은 곧 이성이다. 즉 경험적 인식과 이성에 입각한 인식은 다르고, 이성에 입각한 인식을 통해서 인간은 동물과 다른 경지를 개척하는 것이다.

그래서 일반적인 모나드(완성태)→영혼을 가진 모나드(동물)→ 정신(이성을 가진 모나드/인간)→신 으로 구분된다.

본질의 양을 달리 말하면, ‘분화의 정도’이다. 달팽이의 완전성, 호랑이의 완전성, 독수리의 완전성, 인간의 완전성, 이것은 결국 각 존재의 형상/본질/실체가 얼마만큼 분화되어 있는가, 복잡한가, 얼마나 많은 특이성을 잠재적으로 함축하고 있는가를 뜻하는 것이다.

즉 한 단계 더 완전한 존재는 한 단계 더 분화된 존재이고, 그것은 하나의 차이를 더 함축한다는 뜻이다. 그 차이는 다름 아닌 특이성이다. 특이성을 더 가지고 있다는 것을 결국 한 가지 방식으로 더 행동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완전성이란 ‘활동성의 정도’라고 볼 수 있다.

결국 행동이란 주름이 펼쳐지는 것, 즉 표현이다. 그런데 신에 있어서 완전성이 절대적이다. 이 말은 곧 모든 모나드가 신에 포함되어 있으니까 신은 실재의 양에 있어 최고인 것이다.

중세인들은 신을 ‘가장 많이 존재하는 존재’라고 불렀다. 신은 무한히 완전한 존재, 최대 실재의 존재이다. 즉 완전성은 양적인 함축을 띠고 있기에 무한-유한의 개념과 연관된다.

이로부터 피조물들은 신의 영향으로부터 각자의 완전성을 갖게 된다. 신의 빛, 은총을 나누어 가지게 되는 것이다. 신의 빛이 만물에 스며들어 있는 것이다.

각 사물들은 신의 영향으로 완전성을 분유(分有)하고 있지만, 유한한 본성으로 말미암아 각자의 불완전성을 가지게 된다. 이 유한성이란 바로 만물은 자신의 몸/신체를 가진다는 것을 뜻한다. 즉 물질성을 초탈하지 못하기 때문에 불완전한 것이다.

그리고 물질성을 더 많이 가질수록 더 불완전하다. 마치 성리학에서 기(氣)가 더 탁할수록 더 불완전한 존재인 것과 같다.

그러니까 이런 사유에서는 한 사물의 존재론적-가치론적 위상은 마이너스를 통해서 성립한다. 더하기보다는 빼기를 통해 성립한다. 얼마나 더 가졌느냐보다는 신(神)이라는 기준으로부터 얼마나 떨어져 있는가에 의해 성립한다.

라이프니츠는 현실적 사물들의 불완전성을 잘 나타내주는 예로서 ‘관성’을 들고 있다. 관성의 법칙이란 외부의 어떤 힘이 가해지지 않는 이상 자기가 하고 있던 운동을 계속하는 성질을 말한다. 그것은 거꾸로 말하면 수동적이라는 말이다. 자체적인 활동력이 없다는 말이다.

완전성이란 곧 활동성의 정도라고 규정한 바에 의하면 관성이란 자기의 활동성이 외부에 의해서 좌우되는 것을 말한다. 그러니까 관성이란 활동성이 부재를 뜻하는 것이고, 그만큼 수동적인 존재 양태를 말하는 것이다. 곧 그만큼 불완전하다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거기에 비해 신의 오성 없이는 가능성들 내에 어떤 실재도 존재하지 않는다. 신이 모든 것의 최종 근거, 최종 이유임을 천명하는 주장이다.

그런데 우발성의 경우 신의 ‘의지’가 개입한다. 라이프니츠는 우발성을 신의 소관으로 돌린다. 우발성이란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다는 의미에서 가능성의 여백을 남긴다. 필연적이라는 것이 오로지 하나의 길이 있는 것이라면, 우발적인 것은 길이 여러 개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라이프니츠는 기본적으로 신의 자유 또는 신의 의지를 긍정하기 위해서 우발성을 언급한다.

즉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는데, 신이 바로 이것을 선택했다는 논리이다. 그러니까 신이 이렇게 밖에는 창조할 수 없어서 이렇게 창조한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런데 이렇게 되면 신이 전능한 존재가 아니게 된다. 신이 이렇게 할 수도 있었고 저렇게 할 수 있었는데, 신이 선하고 전능한 존재이기 때문에 최선의 세계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라이프니츠의 존재론은 신을 옹호하는 변신론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거기에 비해 스피노자는 우발성이나 가능과 관계가 없다. 모든 것은 필연적이다. 세계 자체가 신이고, 모든 것이 필연적으로 신의 본성, 신의 본질로부터 연역되어 나오는 것이다. 이것은 세계가 끝없이 내재적으로 변양되어 나간다고 논리이다. 라이프니츠와 스피노자에게는 이런 차이점이 있는 것이다.

이처럼 가능하면 자동적으로 실존하는 특권이 신에게 있다면 신이 아닌 존재는 어떨까? 가능하지만 실존하지 않을 수 있다는 말이다. 그것이 바로 ‘가능 세계들’이다. 그래서 이 세계, 피조물의 세계는 우발적인 세계인 것이다.

우발적인 진리들의 경우는 무한 분석이 필요하기 때문에 경험이 필요하다고 한다. 영원한 진리들은 신의 오성 속에 있다. 이 말은 인간의 모든 소통은 신을 경유해서만 가능하다는 말이다. 그래서 피조물은 신에 의존한다. 그러나 신의 의지에는 의존하지 않는다. 그런데 우발적 진리들은 ‘적합’ 또는 ‘최선의 선택’이라는 원리에 의거한다.

이로서 신은 매순간 세계를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세계를 계속 지탱시켜 주는 것이다. 세계가 진행된 도안은 이미 모나들 안에 내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창조’라는 용어가 아니라 ‘밝힘’이라는 용어를 쓰고 있다.

라이프니츠에게 있어 지금 이 세계는 그 자체가 신이 숙고해서 만든 세계이다. 신이 가능한 한 가장 완전한 존재가 되도록 숙고해서 만든 존재이고, 그 숙고의 가본 원리들 중 핵심적인 것이 바로 공가능성이다.

즉 지금 이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다 함께 가능하기 때문에 지금 이렇게 존재한다는 것이다. 라이프니츠가 볼 때 공가능하지 않은 것들, 상호 적합지 않은 것들은 이 세계에 애당초 들어 있지도 않은 것이다.

라이프니츠의 경우 불연속성과 불공가능성는 세계들 사이에 있을 뿐 이 세계 자체는 완전히 공가능하고 적합한 것이다. 그래서 이 세계(또 각각의 세계)는 기본적으로 조화로눈 것이다., 이것이 라이프니츠적 낙관주의이다.

신이 배려했다는 말은 각 모나드가 걸어가야 할 길을 따로따로 배정해 주었다는 이야기이다. 그런데 지각 자체가 표상이 되려면 그 표상의 주체는 수준 높은 모나드여야 한다. 예컨대 하나의 책상 앞에 사람이 서 있다고 한다면, 비록 그 책상이 사람을 표상하지 못하지만 사람은 그 책상을 표상한다. 그러면서 타자들이 서로를 인지하게 되고 소통하게 된다.

라이프니츠는 모든 모나드가 거울인

목록으로

이근호 목사 · 577건 중 1 페이지

번호 구분 제목 분류 날짜
577 성경신학 [철학과 현대신학과의 연관성] [철학] 최고관리자 10-01-21
576 성경신학 2009년 3월까지 십자가마을 모든 문서파일 [신학] 최고관리자 09-09-24
575 성경신학 구원, 그 이후 미가 최고관리자 09-02-25
574 성경신학 성경신학세계1 중복 글 (실제적용은 bt1,bt2,bt3) 누가복음 최고관리자 09-02-05
573 성경신학 성경신학2 중간정리 090204 [신학] 최고관리자 09-02-04
열람 ➜ 성경신학 인간은 왜 행동하게 되는가? [신학] 최고관리자 09-02-02
571 성경신학 알기 쉬운 "라캉의 정신분석학" [신학] 최고관리자 09-01-31
570 성경신학 성경신학 1 (1996) 정리 완료 - 96년 이후의 글은 성경신학2로 옮겼습니다. [신학] 최고관리자 09-01-20
569 성경신학 죽은 신을 위하여 : 기독교 비판 및 유물론과 신학의 문제 고린도후서 최고관리자 08-12-03
568 성경신학 복음으로 본 사주팔자 - 최고관리자 08-08-27
567 성경신학 불교의 우주론과 구원론 [신학] 최고관리자 08-08-16
566 성경신학 창세기 6장 - 11장 교안 창세기 최고관리자 08-05-04
565 성경신학 창세기 4장 교안 창세기 최고관리자 08-05-04
564 성경신학 창세기 2장 3장 교안 창세기 최고관리자 08-05-04
563 성경신학 [기독교 세계관의 이해와 적용]을 읽고 마태복음 최고관리자 08-05-04
562 성경신학 사르트르와 야스퍼스의 사상 [신학] 최고관리자 08-01-15
561 성경신학 차이와 반복 - 최고관리자 07-11-14
560 성경신학 [루만과 하버마스] 창세기 최고관리자 07-10-19
559 성경신학 비트겐슈타인의 언어분석과 종교관 - 최고관리자 07-06-07
558 성경신학 칸트의 윤리 - 최고관리자 07-05-29
557 성경신학 현대 신학의 단초 - 헤겔 사상과 하이데거의 사상 [신학] 최고관리자 07-05-20
556 성경신학 자본의 두 얼굴 : 이진경의 마르크스 재해석에 대한 반론 - 최고관리자 07-05-17
555 성경신학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 최고관리자 06-12-27
554 성경신학 주름 - 최고관리자 06-12-26
553 성경신학 1 설교 고린도후서 최고관리자 06-12-07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