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의 십자가는 필연인가, 우연인가?(읽으시는 분들의 소감 부탁 드림니다)
예수의 십자가는 필연인가, 우연인가?(읽으시는 분들의 소감 부탁 드림니다)
이름 : 김영완(IP:222.251.218.40)
-예수의 십자가는 필연인가, 우연인가?-
대구성서아카데미 원장
대구샘터교회목사
서울샘터교회목사
정용섭
오늘 나는 자칫 시빗거리에 휩싸일지 모를 이야기를 잠시 해야겠다. 그것은 곧 예수의 십자가 사건에 관한 것이다. 이미 기독교인들에게는 예수의 십자가가 구원의 절대적인 사건으로 각인되어 있기 때문에 여기에 대해서 왈가왈부 토를 단다는 것은 신성모독처럼 들릴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근본에 대해서 정직하고 진지하게 질문하는 일을 포기하면 광신에서 결코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도대체 예수의 십자가 사건은 왜 일어났는가? 예수의 십자가 사건이 아니면 인류가 구원받지 못한다는 말인가? 전능하신 하나님이 자기 아들을 십자가에 달리게 해야만 인간을 구원할 수 있다는 말인가? 만약 이 자리에서 “그게 바로 성서의 가르침이다.”라고 말하지는 마시라. 믿지 못할 일이라도 성서가 진술하고 있기 때문에 진리라고 주장하는 것은 그가 아직 하나님의 계시가 무엇인지 잘 모르고 있다는 증거이다. 예수는 십자가에 달려 죽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셨나? 우리가 믿는 것은 예수의 십자가인가, 그의 부활인가, 그의 사랑인가, 그의 행위인가, 그의 가르침인가? 아니면 그의 인격과 그의 운명인가? 우리는 도대체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의 무엇을 믿는가? 이런 모든 것을 포함한 예수 자체를 믿는 것일까? 혹은 우리는 예수를 믿는 게 아니라 예수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 행위를 믿는가? 위에서 무질서하게 나열한 질문들의 무게는 여기서 해결하기에는 너무나 무겁다.
다시 우리의 관심을 십자가의 역사 문제로 돌리자. 예수의 십자가는 역사의 필연인가, 아니면 우연인가? 만약 예수의 십자가가 그렇게 일어나지 않으면 안 될 필연의 과정에 불과했다면 그것은 인류의 구원할만한 사건이 될 수 없을 것이다. 일종의 역사 결정론은 성서와 기독교 신앙에서 말석도 차지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많은 기독교인들이 이런 역사 결정론에 사로잡혀 있다. 모든 게 하나님이 계획한 대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기독교인들은 생각한다. 그런 걸 예정, 또는 섭리라고 부른다. 그러나 예정론과 섭리론은 역사 결정론과는 격을 달리한다.
내가 보기에 예수의 십자가는 역사의 우연이다. 여기서 우연이라는 말은 주사위처럼 여러 가능성 중에서 어쩌다 선택되었다는 게 아니라 역사를 열려진 사건으로 본다는 의미이다. 예수에게는 이미 출생부터 십자가가 결정된 게 아니라 열려져 있었다. 그는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어야만 했다기보다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십자가에서 죽어야만 했다. 기독교 신앙을 설명할 때 이런 게 좀 까다로운 부분이다. 원칙적으로는 예수의 십자가가 인류를 구원하는 길이지만, 또한 예수의 십자가 사건으로 인해서 인류가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이 열렸지만, 그래서 인류를 구원하실 하나님의 섭리가 바로 이 십자가에서 이루어진 것도 사실이지만, 그렇지만 예수의 십자가가 이미 필연적으로 주어진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만약 이 세상이 이런 필연의 과정이라고 한다면 우리의 삶은 무의미하다. 우리는 오히려 우연 안에서 하나님의 개입을 발견할 수 있다. 우리의 예측을 벗어나는 게 바로 우연이라고 한다면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행위이고 능력이다. 이런 우연의 개입으로 인해서 우리의 삶에는 긴장이 작동하고 우리는 하나님의 신비에 마음을 열고 살아가게 될 것이다.
예수의 십자가를 역사의 우연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도대체 오늘 우리의 신앙과 무슨 상관이 있다는 것일까? 그건 단지 신학적 유희에 불과한 걸까? 이 문제를 좀더 실감하기 위해서는 2천 년 전 예수의 십자가 죽음을 아무도 구원의 길로 생각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예수의 십자가 사건이 유대인들에게는 거리끼는 것이고 헬라인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었다. 철저한 실패에 불과한 예수의 십자가가 바로 인류를 구원하는 길이라는 사실은 초기 기독교에서 매우 천천히 인식되고 고백된 것이다. 전혀 주목받지 못한 사건이, 더 정확하게 말해서 오히려 경원의 대상에 불과했던 사건이 인류의 운명을 결정짓는 사건으로 부각되었다는 이 역사의 신비 안에서 살아가는 기독교인은 오늘도 그런 일들이 어디서 일어나고 있는지 민감하게, 깨어있는 영성으로 살펴야만 한다. 이런 사람들이 많아진다면 그만큼 기독교는 구원에 가까운 공동체로 자리를 잡아갈 것이다.
이렇게 말해도 아직 감이 잡히지 않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내가 여기서 무엇을 더 설명해야하는가. 이왕 말이 나왔으니까 한 마디만 더 설명하자. 예수의 십자가를 하나님의 역사 개입인 우연이라고 아는 사람이라면 새 땅과 새 하늘이 열리는 종말이 우리의 예측을 벗어나서, 우리의 계획과 우리의 열정을 벗어나서, 전혀 새로운 방식으로 시작된다는 사실을 깊이 깨닫고 그것을 기다릴 것이다. 초기 기독교가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던 예수의 십자가에서 인류 구원의 길을 발견했듯이 말이다.
조 규 현(IP:117.♡.150.124)
09-01-31 09:01
본인의 견해는 다음과 같다.
1. 필자가 “만약 이 자리에서 ‘그게 바로 성서의 가르침이다’라고 말하지는 마시라.”하였다.
성경의 가르침이 아니면 예수의 십자가 사건을 불경이나 유교 경전을 통하여 설명할 것인가? 목사로서 언어도단이다.
2. 필자는 “내가 보기에 예수의 십자가는 역사의 우연이다.”라고 하였다.
성서에는 우연이라는 것이 없다. 필연뿐이다.
(마10:29)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눅12:7)
너희에게는 심지어 머리털까지도 다 세신 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니라.
3. 필자는 “우연이라고 한다면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행위이고 능력이다. 예수의 십자가를 하나님의 역사 개입인 우연이라고 아는 사람이라면 새 땅과 새 하늘이 열리는 종말이 우리의 예측을 벗어나서, 우리의 계획과 우리의 열정을 벗어나서, 전혀 새로운 방식으로 시작된다는 사실을 깊이 깨닫고 그것을 기다릴 것이다.”라고 하였다.
한 마디로 필자의 궤변이다.
역사란 인간의 사상일 뿐 하나님의 섭리하심이다. 따라서 역사 결정론이란 용어가 적절하지 못하며 하나님의 묵시일 따름이다.
그리고 십자가 사건은 하나님의 언약이다. 따라서 우연이 될 수 없다.
성경에 이미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언약하고 있다. 해당되는 구약은 다음과 같다. 사53장, 단9:26, 시22장, 슥12:10, 창22장이다.
예수님께서도 자기의 죽음에 대하여 이미 기록된 대로(마26:24) 응하시기로 하셨다(마16:21, 막8:31-9:1,눅9:22-27).
“다 이루었다(요19:30)”고 하신 주님의 언약의 실현의 말씀을 바울은 십자가의 도라 하였다. 이 십자가의 도가 하나님의 능력으로서 성도에게 역사(役事)하고 있다.(갈2:20)
소위 목사라는 자의 입에서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를 하는가!
이근호(IP:117.♡.136.111)
09-01-31 09:49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죽인 이유가, 필연을 우연으로 바뀌어놓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래야지만 가룟 유다 자신은 유의미하고 예수는 무의미해지기 때문입니다. 정용섭 씨는 자신이 하는 것을 유의미하게 하기 위해 다른 예수상을 새로 만들고 있습니다. 이처럼 가룟 유다나 정용섭씨에게 있어 십자가 피는 걸림돌이 되는 겁니다. 정용섭 씨 뿐만 아니라 모든 한국의 개혁주의 신학들은 십자가 피를 기피합니다. 그 이유는 가룟 유다처럼 자신의 신학과 목회와 행함이 무의미하게 된 것을 도저히 견딜 수 없기 때문입니다.
박윤진(IP:122.♡.53.20)
09-01-31 15:11
여기 코끼리 한 마리가 있습니다. 한 남자가 이렇게 말합니다.
"이 코끼리를 빨간색 종이컵에 넣는 것이 옳습니까?, 아니면 파란색 종이컵에 넣은 것이 옳습니까?"
그런데 갑자기 코끼리가 양손에 종이컵을 들고 설치던 그 남자를 밟고 지나가 버렸습니다. 남자는 목이 부러져 죽고 말았습니다. 구경하던 사람들 중 한사람이 죽은 사람에게 이렇게 질문합니다.
"코끼리가 당신을 밟아 죽인 것은 필연입니까, 우연입니까?"
강구만(IP:125.♡.86.112)
09-01-31 19:26
부딪치는 돌과 거치는 바위 이것은 동시에 시온에 둔 귀한 머릿돌이니 예수 그리스도이다. 이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님은 엄격하게 숨어 계신 하나님으로 자신을 계시 하신다.여기서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믿음에만 계시 하기 위하여 결정적으로 자신을 숨기신다. 그리고 자신의 나라를 선포 함으로 그는 자신의 무한한 사랑을 선포 하신다. 진리로 부터 나온자는 그의 음성을 듣는다. 그러나 누가 진리에 자신의 근원을 갖고 있는가 누가 하나님 자신을 보는가 오히려 그로 부터 피해 가기위해 셀수없는 수 많은 변명을 늘어 놓지 않겠는가.(중략) 우리가 진리의 기적에 대해 열려있지 않고 준비가 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기적이 일어 날수 없다면 진리는 기적 없이 단순히 자신의 내재적 논리를 통해 우리에게 하나의 심판이 된다. 믿음 의 사랑 그리고 하나님 이라고 그가 일컫는바 곧 유한한 목표를 추구하는 온갖 뜀박질 가운데서 인간은 하나님께서 이 시온의 한가운데 이 지상적인 하늘 안에 자신이 영원한 자 로서 찾아 구해지는 바로 그 곳에 은혜로 자신을 찾게하는 바로 그 영원한 분 이라고 하는 사실을 확정 하셨다는 것에 수치를 당하지 않을 수 없다. 믿는자 만이 이 부딪침과 걸림에서 수치를 당하지 않을 것이다.믿지않고 "추구하는자",그는 여기서 필연적으로 한 푼 어치의 가치도 없는것을 거두어 들일 뿐이다. 그는 막다른 골목 안으로 내달려 가는 사람 모양 부딪치게 된다. '인식의 위기''종교의 파국'이 돌발된다. - 칼 바르트 '로마서 강해'중에서-
강구만(IP:125.♡.86.112)
09-01-31 20:13
정용섭씨 자신에게 포착 되지않는 십자가 이기에 개념이고 종교 일뿐입니다.
진리를 찾아 떠도는 구도자 입니다.
구득영(IP:203.♡.97.234)
09-02-01 22:12
믿음이 없는 목사가 교회에 나오는 현대인들에게 할 수 있는 말은 그럴 수밖에 없겠지요. 그래서 나중에는 '아이 돈 노우' 라고 말입니다. 하지만 필연과 우연은 이 양반처럼 사용이 되면 안 되고, 주님에게는 필연적인 사건이, 우리 인간에게는 우연이라고 이야기해야 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은혜이고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