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 65:23-25 (복된자의 자손)
사 65:23-25 (복된자의 자손)
이름 : 우리교회(IP:220.81.176.150)
본문 : 이사야 65장 23-25절
제목 : 복 된 자의 자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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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09-01-28 21:05
복된 자의 자손
2009년 1월 28일 본문 말씀: 이사야 65:23-25
(사 65:23, 개역) 『그들의 수고가 헛되지 않겠고 그들의 생산한 것이 재난에 걸리지 아니하리니 그들은 여호와의 복된 자의 자손이요 그 소생도 그들과 함께 될 것임이라』
(사 65:24, 개역) 『그들이 부르기 전에 내가 응답하겠고 그들이 말을 마치기 전에 내가 들을 것이며』
(사 65:25, 개역) 『이리와 어린 양이 함께 먹을 것이며 사자가 소처럼 짚을 먹을 것이며 뱀은 흙으로 식물을 삼을 것이니 나의 성산에서는 해함도 없겠고 상함도 없으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나님이 주시겠다는 복은 참으로 엉뚱합니다. 우리 인간들이 은근히 기대하고 고대하는 것을 복으로 주시는 것이 아니라 일방적으로 ‘이게 내가 내놓은 복이야’라고 하시면서 다가오십니다. 사자가 소처럼 짚을 먹는 것을 우리 인간들은 간절히 소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이 저주받아 살기 힘든 세상에서 걱정 근심 없이 많은 돈을 벌고 건강하고 자신이 이름이 드높아지기를 간절히 소원하고 있습니다.
마치 엄마가 자기 아들 생일이라고 하면서 차려놓은 생일상에 순전히 엄마가 좋아하는 음식으로 가득할 때의 황당함을 우리도 하나님 앞에서 경험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복된 자의 자손’이라고 부르십니다. 이들은 곧 이스라엘을 말하는데 이사야 44:8에 보면, 하나님은 자기 백성에서 ‘두려워말고 겁내지 말라’고 하십니다.
즉 그만큼 인간들은 평소에 늘 ‘두려움과 겁냄’ 속에 살면서 왜 자신이 그런 속성을 지니고 있느냐를 따져볼 생각은 안하고 이 두려움과 겁을 자기 방식으로 처리하려고 합니다. 인간의 모든 행동은 전부다 이 두려움과 알 수 없는 공포심에 쫓겨서 일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즉 두려움과 공포를 해소하는 식으로 인간은 자기 몸을 움직이게 됩니다.
마치 이리 앞의 어린양 같고 사자 앞에서의 소 같습니다. 인간의 팔자가 왜 이렇게 된 것입니까? 그것은 본래의 자리를 떠나버렸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는 ‘유혹’이라는 것이 사람이 그렇게 만든 원인이라고 합니다. 유혹이란 행위의 잘, 잘못을 논하는 것이 아니라 빠지지 말아야 구멍에 빠져버린 상태를 뜻합니다.
창세기 3장에서 뱀은 인간을 유혹합니다. 유혹, 혹은 유인이란 상대의 본래의 자리를 떠나게 해서 자신만이 아는 세상에 풍동 빠져 헤어나지 못한 상태를 말합니다. 따라서 유혹에 빠진 자는 그 유혹에서 두 번 다시 못 빠져나가는 이유는, 자신이 빠진 세계의 성품으로 이미 교체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 점을 하나님께서 이미 하셨기에 ‘선악과 따먹는 날에서 정녕 죽으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즉 선악과를 따먹는 것은 본래의 인간이 있을 자리가 아니라는 겁니다. 실은 인간으로서는 이미 ‘죽은 자의 자리’인 것입니다. 선과 악을 비교하는 데서 비로서 자신의 본 모습을 정립해보겠다는 것을 악마나 할 시도입니다. 인간은 해서도 아니되고 할 필요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이미 기껏 선과 악 속에서 자기 정립을 할 수 밖에 없는 그런 존재가 되고 말았습니다.
악이 있는 이상 그 악으로 인한 들이닥치게 되는 저주성을 한시도 잊을 수가 없는 겁니다. “내가 악을 저질렀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이상, 언제 어디서 들이닥치게 될 것인지조차 모르는 그 우발성을 몸부림치게 되어 있습니다. 선악의 사고방식을 가지고서 아무리 선을 많이 쌓아놓아도 그 선이 악에 의해서 훼손될 일을 예상하면 이것조차 두렵고 무섭고 부끄러워지는 겁니다.
이렇듯 본래의 자리에 이탈해버린 인간상에 대해서 욥기를 통해서도 알려집니다. 욥 41:11에서 하나님께서는 욥에게 이렇게 이야기하십니다. “누가 먼저 내게 주고 나로 갚게 하였느냐 온 천하에 있는 것이 다 내 것이니라” 즉 고난을 당하기 전에도 욥은 하나님의 것이었고, 고난을 당한 후에라도 욥은 여전히 하나님의 것입니다.
즉 인간은 하나님의 것을 가지고 막무가내 ‘자기 것’이라고 우기면서 자신의 것으로 전환하기 위해 선과 악의 능력을 사용하게 됩니다. 이 많은 재산과 이 엄청난 명예가 하루 아침에 와르르 무너지지 않을까 노심초사 하는 겁니다. 이것을 예방하기 위해서 무리하게 움직일 수 밖에 없습니다. 그것을 지켜내기 위해 무리수를 둘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다 보니 인간은 자기가 보는 그것이 진리라고 우깁니다. 하지만 실은 인간은 자신의 눈이 보는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보고 싶은 것만 보고 있는 겁니다. 자신의 욕망에 준해서 자신의 기각과 눈과 코와 혀가 움직이게 되어 있습니다. 이 모든 작동들이 총동원되어 자신의 의로움을 지탱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불안과 초조와 근심과 걱정을 그 어느 장소에서도 찾아들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인간의 사정을 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야곱아, 이스라엘아, 너희는 두려워말고 무서워 말라”고 말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복주시는 그 내용과 방식은 인간들이 몸부림 치는 것과 전혀 다릅니다.
흔히 사회의 범죄 가운데 ‘약자를 유인해서 사취’하는 범죄가 있습니다. 교회에 나오려는 약자가 어떤 자일까요? 이런 사람들은 자기 내부에 선악 의식으로 가득차서 현재 자신이 하는 일이 다 잘 안되는 것은 자신이 죄를 너무 지어 벌받고 저주받아서 그렇다고 여기고 있습니다.
즉 그 어떤 인간이든 선악적인 욕망의 목소리를 감추고 살 수는 없기에 그것을 그대로 교회에 와서 내뱉는 법입니다. 이것을 본 목사나 장로는 그 사람을 유인해서 돈을 갈취하고자 합니다. 즉 “당신은 지금 하나님을 안 섬기고 말씀을 안 섬기기 때문에 하늘로부터 저주를 받고 있으니 우리 시키는대로 하면 당신은 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고 유혹합니다. 마치 악마가 인간을 유혹하는 것과 같습니다.
참된 목회자라는 그 약한 사람에게 ‘인간 본래의 자리’를 소개해주어야만 합니다. 그 자리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생명나무와 함께 했던 그 시절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 속에 생명나무의 열매를 심어주십니다. 그리고 그것이 그 사람의 본질이 되게 하십니다. 모든 변화는 우연이지만 그 우연이 되풀이되는 것을 통해 낯선 본질이 열매처럼 생겨났음을 알게 합니다.
즉 선악적인 안목이나 사고방식이 아니라 생명책에 기록되게 하시는 그 안목과 사고방식을 알려주는 겁니다. 그 방식은 이러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에게 일부러 주변에서 사태와 사건을 일으키게 하십니다. 그러면서 평소에 안일하게 선악적 사고방식에 준해서 자기에게 봉사하던 하나님 백성이 갑자기 들이닥친 사태로 인하여 다시금 여호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복을 바라보게 됩니다.
그 복이란 바로 평소에 죄 짓고 있었던 자신들에 대한 자비와 용서입니다. 이 자비와 용서를 배터지게 먹고 나면 더 이상 선악적인 판단에 의해서 타인을 지배하거나 두려워하는 마음이 가시게 됩니다. 이러한 복음적 사태를 되풀이해서 발생하는 그 틈새를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으로 하여금 복받을 자손임을 자인하게 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이름이 생명책이 기록된 의미를 매일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