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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광주 강의(08. 12. 26) 2강 녹취록자유게시판-

광주 강의(08. 12. 26) 2강 녹취록

이름 : 서경수(IP:116.37.101.23)

광주 강의(08. 12. 26) 44-2

첫째 시간을 요약해 보면, ‘하나님의 뜻’과 ‘예수 안’ 그리고 ‘생명의 약속’ 이것은 아무리 애써도 이방인들은 모른다고 했습니다. 왜? 그들은 자기밖에 모르기 때문에. 그런데 이방인들에게 공짜로(영생도 공짜로, 천국도 공짜로, 에덴동산도 공짜로) 준 이유가 하나님의 사랑만이 최고라는 것을 알리기 위한 작전으로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행함은 누가 하는가? 행함의 도사들은 유대인들입니다. 세계 최고의 종교인들입니다. 그런데 아침부터 저녁까지 신을 섬기는 그 종교가 무용지물이 되어버렸어요. 금식하고 기도하고 십일조하고 구제하고 열심히 했는데,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놀고 있네. 그게 무슨 소용이 있냐? 구원은 내가 그냥 주는 것이다.”

인간들의 열심과 행위가 소용없으면 교회 영업이 안 돼요. 교회 영업은 희망 팔아먹고 돈 받는 것이잖아요. 이 세상에서 희망을 말하지 않으면 교회 영업이 안 됩니다. ‘일곱 번 넘어져도 여덟 번 일어나면 됩니다. 시작은 미약하나 나중은 창대하리라.’ 이런 이야기를 하면,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교회 와서 이런 말씀 들으면 “야, 돈 낼만 하다.” 하고 헌금을 내는 거예요.

돈 내는 이유는 희망을 받아서 좋아서 내고, 또 혹시 돈 낸다고 귀여움 받아서 더 많은 돈을 복으로 받을 수도 있다는 생각으로 내는 거예요. 돈 놓고 돈 먹기지요.

그런데 희망을 가져봐야 희망은 누구의 희망이냐 하면, 나의 뜻의 연장이에요. 하나님의 뜻이 아니고 평소에 내가 음흉하게 노렸던 그 뜻이 엿가락처럼 늘어난 것뿐이기에 그 희망 가져도 허무가 찾아옵니다. 말할 수 없는 허무가 찾아와요.

사람이 선과 악을 초월해야지 자꾸 ‘선하면 복 줍니까?’ 이렇게 나오는데, 이렇게 되면 선한 그 자리에서 악이 들끓게 됩니다. 아무리 착해도 그 자리에서 악이 피어납니다. 만약에 내가 노인들 간병인 노릇을 한다고 하면, ‘하나님, 저에게 이런 어려운 사람들을 돌볼 수 있도록 은혜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런 마음으로 시작을 해도, 얼마 안 가서 ‘하나님, 하필이면 왜 나에게 이런 힘든 일을 시킵니까? 하나님께서 이 사람들 건강하게 해 주시면 내가 이런 수고 안 해도 되는데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왜 환자들 치료해 주지 않습니까?’ 이런 식으로 화를 내지요.

제 책에 보면 이런 것이 있어요. “‘비운의 왕비’라는 말이 있는데, 이것은 말이 안 된다.” 명성황후를 비운의 방비라고 흔히들 말하잖아요. 제가 보기에는 그 사람은 어릴 때부터 죽을 때까지 하나님 은혜를 안 받고 산 적이 단 한 순간도 없어요. 그런데 자기 마음에 안 차니까 ‘나는 조선의 국모지만 비운의 왕비다.’ 라고 합니다. 이런 말 대신 ‘나는 죄인 중의 괴수다.’ 이렇게 이야기를 해야지요.

어떤 인간도 ‘비운’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슬픈 운명이란 없어요. 받은 은혜를 돈으로 환산해 보세요. 공기와 물, 햇볕을 받았는데 이런 것들을 돈으로 환산해 보세요. 단 하루라도 하나님의 공짜 은혜를 안 받고 산 적이 있습니까? “해로 낮을 주관케 하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시136:8)

제가 얼마 전 설교시간에 이야기했지요. 정지훈이라는 가수가 노래 부르면서 ‘태양이 싫다.’고 해요. 10일만 장마가 계속되어 보세요. 태양이 싫은지. 비가 계속 내리면 빨래가 안 말라서 짜증납니다. 빨래 안 해본 사람은 잘 몰라요. 태양이 싫다니.

사람이 여유가 있을 때는 하찮게 여기던 것이 여유가 없을 때는 작은 것 하나도 정말 소중하게 느껴져요. 지극히 작은 것 하나하나가 다 귀한 것들인데, 좀 살만하고 여유가 생기면 교만해서 다 버리는 거예요. 그러니까 인간이 얼마나 자기 욕망 위주입니까?

하나님은 교만한 인간들에게 마음을 낮추라고 하시는데, 자기 마음을 낮출 재주 있는 인간은 없습니다. 한 번 맛을 보면 그 맛을 잊을 수가 없어요. 안 됩니다. 남자들이 결혼 적령기를 놓쳐 40쯤 되면 이상하게 젊은 여자를 찾아요. 비슷한 나이의 상대를 찾으면 되는데. 젊은 여자 아니면 돈 많은 여자를 찾고.

이게 뭐냐 하면, 한번 눈이 높아지니까 자기 힘으로 낮출 수가 없어요. 그러니까 마음을 낮춰서 구원 받는다는 것은 안 됩니다. 애초에 포기하세요. 인간은 한 번 맛본 것을 계속 기억하면서 그것을 원하고, 길들여진 맛을 포기 못합니다. 그냥 그대로 사세요.

그냥 사는 것은 그대로 사시고, 구원은 예수님이 거저 주시는 생명의 약속으로 구원 받습니다. 문지방에 어린양의 피가 묻어 있으면 그 방안에 무엇이 있는가를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앞에 있는 피를 보고 그 집안을 용서했다는 것이 유월절입니다. 그 유월절 피가 세례요한이 예수님 보고 ‘아, 바로 저분이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을 보라.’ 얼마나 반가웠겠어요? 유월절 그림자의 실체가 마지막 때에 예수님으로 나타난 것이지요.

이런 실체를 만나니까 세례요한은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요3:30) 자기의 관심, 자기로부터 벗어난 모습입니다. 오 목사님 사모님이 아픈 것이 가슴 아프지만, 강의를 하다보니까 사모님이 쇠해도 상관없고, 감기가 심해 폐렴에 걸려 입원을 해도 주님만 흥하면 됩니다. 이런 소리 하니까 사모님께 미안하긴 하지만, 건강하다고 구원 받는 것도 아니고, 아프다고 해서 지옥 가는 것도 아니고.

1장 3절을 봅시다. “나의 밤낮 간구하는 가운데 쉬지 않고 너를 생각하여 청결한 양심으로 조상적부터 섬겨 오는 하나님께 감사하고”

성도가 되면 자기 생각에서 벗어나 모든 일에 하나님께 감사하게 됩니다. 4절에 바울은 “너 보기를 원함은 내 기쁨이 가득하게 하려 함이라.”고 했고, 5절에 보면 “네 속에 거짓이 없는 믿음을 생각함이라.” 거짓 없는 믿음은 선물로 받은 것입니다. 자기가 집에서 조립한 것이 아니고 택배로 받은 것입니다.

교회에서 목사들이 설교를 하면서 믿음을 자꾸 집에서 조립하라고 가르쳐요. “여러분, 믿음이란 것은 지. 정. 의 세 가진데 먼저 지식이 있어야 되니까 성경을 읽으세요. 다음에 감정이 있어야 돼요. 성경 읽기 전에 항상 회개해서 깨끗한 마음으로 읽어야 하고, 그 다음 의지니까 열심히 전도하고 헌금해야 됩니다. 이렇게 해야 이것이 참된 믿음입니다.” 라고 설교를 합니다.

이런 설교를 듣고는 집에 가서 자기가 믿음을 만드는 거예요. 만들 때 어떻게 만드느냐 하면, 표를 작성해서 믿음인 것은 동그라미(0), 믿음 아닌 것은 가위표(X) 그래서 1번 성경읽기. 하루 성경 3장 읽어야 되는데 1장 밖에 못 읽었으니까 가위표. 2번 기도. 하루 10분을 해야 되는데 15분 했다. 그러면 동구라미(0). 이런 식으로 혼자 사단과 싸워요.

그러니 이 사람은 믿음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자기 의를 만드니까, 이 자기 의를 가지고 교회 가면 다른 사람의 의와 경쟁이 돼요. ‘나는 믿음이 좋은데 저 사람은 왜 믿음이 없을까?’ 이런 식으로 경쟁을 하게 되지요. 이렇게 되면 감사가 나오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화를 유발합니다. 이런 것을 우리는 조심해야 됩니다.

그 다음 5절부터 보면, “이는 네 속에 거짓이 없는 믿음을 생각함이라. 이 믿음은 먼저 네 외조모 로이스와 네 어머니 유니게 속에 있더니 네 속에도 있는 줄을 확신하노라. 그러므로 내가 나의 안수함으로 네 속에 있는 하나님의 은사를 다시 불 일 듯하게 하기 위하여 너로 생각하게 하노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마음이니 그러므로 네가 우리 주의 증거와 또는 주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나를 부끄러워 말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좇아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

이 긴 말씀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너 신자 맞지?’ 이겁니다. 이 말을 왜 하는가 하면, 그 뒤의 말. ‘이제 당신을 신앙이라고 간주하고 내가 이야기할게.’ 그렇게 되는 겁니다. 준비 과정이에요.

‘네 외조모에게 그런 믿음이 있고’ 이런 것은, ‘디모데야, 너 신자 맞지?’ 만약에 신자가 아니라면 뒤에 연이어 하는 말을 못 알아듣게 되어 있어요.

뒤에 나오는 말이 뭔가 하면, 9절에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부르심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 뜻과 영원한 때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

우리의 행위로 구원 받은 것이 아니고, 영원 전부터 우리는 구원 받기로 작정되어 있었고, 시나리오가 그렇게 짜여서 오늘날 내가 구원 받았다. ‘디모데야, 넌 신자니까 내 말에 동의하지?’ 라고 나온 거예요.

그러면 불신자는 ‘저는 신자 아닌데요.’ 라는 말을 하는 것이 아니고, ‘창세전에 예정해서 구원 받으면 그러면 나는 아무것도 안 해도 구원 받네요. 그건 안 믿어지는데요.’ 라는 반응을 할 것이란 말이지요.

제가 지금 무슨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 이것은 아니란 말이지요. ‘신자 되세요.’ 이것은 성경에 없습니다. 뭐가 있느냐? ‘신자 맞지?’ 라고 하는 거예요. ‘오 목사님 신자 맞지요?’ 이렇게 나와야지, ‘오 목사님, 열심히 하면 신자 됩니다.’ 이건 아닙니다.

창세전에 하나님이 예정한 자에게만 복음이 이해되도록 되어 있어요. 성령을 받은 사람만 이 말씀이 이해되고 성령 받지 아니하면 이런 말씀을 전하는 사도에게 대들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뒤에 나오는 모든 말씀에 대해서 ‘아, 정확하네. 딱 내게 해당되네.’ 이렇게 되면 그 사람은 신자고, ‘저는 신자 맞습니다.’ 라고 아무리 큰소리 쳐도, 그 뒤에 나오는 사도 바울의 말에 대해서 ‘아닌데, 이상하다. 내가 알고 있는 것하고 다르네.’ 이런 사람은 ‘창세전에’라는 말씀을 이해 못하는 자입니다.

‘창세전’이라고 하면, “맞습니다. 내가 신자된 것은 선물입니다.” 하고 박자가 서로 맞아야지요. 말씀하면 그 말씀이 수용되고 깨닫게 되고, 사도가 “나는 죄인 중의 괴수다.” 라고 하면, “맞습니다. 제가 바로 그런 사람입니다.” 하고 서로 아귀가 맞아야 됩니다.

‘신자 되세요. 열심히 하면 가능합니다.’ 이런 것은 없어요. 교회에서나 이런 소리 하지 성경에는 이런 말 없습니다. 성경에는 창세전에 예정된 사람만 남고 나머지는 다 떨어져 나간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말씀대로 전하면 교회는 장사가 안 될 겁니다. ‘창세전에 예정된 사람만 남고 나머지는 다 교회에서 나가세요.’ 라고 하면 교회에 사람 모이겠습니까? 그러나 이것을 말하는 것이 진정한 전도입니다. 전도는 하나님의 예정된 뜻을 전하는 것이잖아요. 사람 꼬시는 것이 전도가 아니잖아요. 교회 좌석 채우는 것이 전도가 아닙니다. “창세전에 예정된 자이기 때문에 왔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남고, 내가 열심히 한 번 믿어보려고 온 사람은 나가주세요.” 라고 하면 이것이 바로 전도입니다.

다시 이야기합니다. 신자란 뭐냐? 나보다 더 중요한 분이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 신자입니다. 나보다 더 우선되는 분, 내가 있기 전에 계신 분을 인정하는 것이 신자입니다. 이게 하나님의 뜻이고, 내 뜻보다 하나님 뜻이 우선이고, 그 뜻에 의해서 예수 그리스도가 오셨고, 그분이 주신 것이 영원한 생명의 약속입니다.

이 세 가지가 내 속에 파고들어오면 나에게는 감사와 기쁨밖에 나올 것이 없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행함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은혜로 됩니다. 9절에 나오지요.

행위로 구원 받은 것인지 은혜로 구원 받은 것인지 확실히 해야 합니다. 행위로 구원 받았다고 한다면 그것은 은혜가 아니고, 은혜로 구원 받았으면 행위 자랑하면 안 됩니다. 둘 다는 안 됩니다.

[부모]라는 노래 가사를 보면 ‘왜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났는가? 나중에 내가 자식을 낳고 부모가 되어서 알아보리라.’ 이런 내용이 있어요. 그런데 자식을 낳고 부모가 되면 그때 실상을 알아요. 뭐냐 하면, 부모의 은덕으로 내가 태어난 게 아니고 부모는 내 생각하지 않고 자기들끼리 좋아했는데 내가 태어난 거예요.

부모는 부모 값 한다고 사랑을 말하지만 사실은 부모는 자기밖에 몰라요. 여기에 자식들도 있지만 제가 솔직하게 이야기합니다. 너무 자녀를 학대하면 부모노릇 못한다고 욕먹을까 싶어 사랑하는 흉내 내는 것입니다. 인간은 자기 편한 것이 최고입니다.

세상에서 진리는 뭡니까? 진리를 다른 말로 하면 편함입니다. 사람은 어떻게 사느냐? 기분대로 살아요. 사람들이 제일 싫어하는 것이 뭔가? 기분 더러운 것을 싫어해요. 진리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기분대로 삽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뜻이 이거예요. 기분대로 사는 되먹지 못한 인간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자기 기쁘신 뜻대로 인도하시는데, 그 힘이 어디에서 나오는가? 인간한테 물어보지 않아요. 자기 기분대로 사는 인간에게 물어도 소용없어요.

‘너 왜 교회 안 나오나?’ ‘기분 나빠서 안 나간다.’ 그러면 끝나는 거예요. 자식이 부모한테 물어보고 행동 합니까? 안 물어봅니다. 자식은 자기 기분대로 살고, 부모는 부모 기분대로 삽니다. 식구가 5명 있으면 전부 다 자기 기분대로 삽니다. 부모가 자식을 위해서 때린다. 아닙니다. 기분 나빠서 때립니다.

이처럼 인간들은 자기 기분대로 살아가는데, 창세전의 시나리오가 없으면 일이 안 됩니다. “여러분, 알아서 하세요.” 사람들이 알아서 하면 기분대로 살기 때문에 이들이 넓은 길로 가겠습니까, 좁은 길로 가겠습니까? 자동적으로 넓은 길로 갑니다. 그러면 그 길은 멸망의 길입니다. 좁은 길로 가야 생명이 있는데 그러나 좁은 길을 찾는 사람은 적어요. 그만큼 인기가 없다는 말입니다. 인기가 없다는 것은 진리가 아니라고 보는 겁니다.

이 세상은 진리에 관심이 없고 자기 편한 것을 원합니다. 그러니까 9절에 뭐라고 합니까? “영원한 때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고 하지요. 우리의 행함이 아니고 예수님의 은혜로 됩니다. 여기에서 은혜는 원인 없는 결과입니다. 은혜는 나에게 원인이 없어요. 그냥 주십니다. 왜? 창세전에 계획된 것이니까.

내가 지금까지 살아온 것도 원인 없는 결과입니다. 이유도 없이 그냥 주신 것입니다. 여러분이 시험해 보세요. 나쁜 짓 한다고 벌 받는지. 그렇지 않습니다. 왜 그런 줄 아세요? 나쁜 짓 안 할 때도 나쁜 짓이었기 때문에. 죄인이 구태여 나쁜 짓 안 해도 나쁜 짓입니다. 이런 인간에게 원인 없는 결과로, 우리를 불쌍히 여기셔서 긍휼을 베풀어 주심으로 구원 받는데, 이것이 영원한 약속입니다.

우리는 죽을 때까지 내 기분 따라 돈 좋아하고, 이런 인간을 긍휼히 여겨 약속에 따라 구원하고 이 두 가지가 늘 같이 있습니다. 그런데 ‘나는 죄 안 짓는다.’ 라고 하면 그 사람은 기독교 신자가 아니라 불교 신자입니다. 이런 사람은 도 닦는 사람입니다.

사람은 자기 죄를 충분히 알아야 됩니다. 그냥 짓는 죄 말고. 교도소 간 죄 말고, 숨어있는 데서 터져 나오는 욕망 이런 것을 아주 만끽해야 돼요. 이것을 기피하지 말고 즐겨야 돼요. 내 욕망이 남 못지않다는 것을 즐거워해야 된다니까요. 왜? 이미 용서 되었으니까. 그 죄를 내가 처리하려고 한다면 감당할 수 없습니다. 내가 돈 좋아하는 것을 성경 몇 장 읽는다고 해소가 됩니까?

만날 자기만 사랑하고 하나님 미워하는 그 죄를 어떻게 씻겠습니까? 전도 천명 한다고 해결 되겠습니까? 안 됩니다. 그러니까 나라는 인간은 나밖에 모른다는 것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 같은 죄인을 구원하신 것을 볼 때, 하나님의 약속이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고 죄인을 불러서 의인되게 했다.” 주님의 피로 말미암아 의인 되게 하시는 겁니다. 이게 복음입니다.

이 복음을 디모데에게 “너도 믿지?” 라고 하는 겁니다. “남들이 이해할 수 없는 이 말을 너는 믿지?” 라고 하는 겁니다. 이것이 디모데후서의 시작입니다. “너도 행했지?”가 아닙니다. “너도 믿지?” “믿고말고요.”

12절을 봅시다. “이를 인하여 내가 또 이 고난을 받되 부끄러워하지 아니함은” 사도바울이 이 복음에 대해서 부끄러워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우리교회 장로님이 자기가 떠나온 교회를 너무 사랑하고 안타까워서 이전 교회 교인들을 만나서 [피]라는 책과 [고린도전후서 녹취록]을 줬어요. 왜냐하면 그 교회가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믿는다고 하고, 예수 믿는 사람은 다 한 형제라고 고백하기 때문에. 그렇다면 네 교회 내 교회 없이 예수 안에서 한 형제니까 복음을 나누고 복음 안에서 같이 기쁨을 누리자는 취지에서 책을 전했는데, 죽을죄를 지은 사람처럼 심하게 당했어요.

그럴 때 장로님이 속이 상했습니다. 그런데 장로님이 이걸 아셔야 돼요. 뭐냐 하면, 베드로전서 4장 14절에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욕을 받으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고 했어요. 그리고 마태복음 5장 10절에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고 하셨고, 11절 이하에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라는 말씀이 있어요.

그러니까 제가 하는 말은, 본인이 구원 받은 기쁨이 없으면 고난을 못 이겨요. 하지만 고난을 여유 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 ‘나 같은 인간이 구원을 받았다니’ 하는 구원의 기쁨이 있으면, 남들 보기에 고난이라고 하지만 자기한테는 고난도 하나의 절차요 과정이고 은혜 자체란 말입니다.

현재 장로님이 생활은 어렵지만 밥은 먹고 살잖아요. 그러기에 ‘하나님, 나는 복음 전하려고 하는데 왜 이렇게 힘들게 합니까?’ 이것이 아니고, ‘나 같은 죄인도 구원하시다니’ 이런 기쁨이 있으면 어지간한 고난은 고난 축에도 안 들어갑니다.

구원에 대한 감격과 기쁨이 없을 때는 갑자기 고난에 대해서 예민해지면서 하나님께 항의를 퍼붓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 제가 뭘 잘못했습니까? 나는 복음 전한 죄밖에 없는데 왜 나에게 이런 고난을 주십니까? 그러면 더 이상 복음 못 전하겠습니다.” 이런 식으로 삐치게 됩니다.

교회에서 장로, 권사 투표해서 떨어졌을 경우에 이런 현상이 자주 발생하는데, “하나님, 내가 이 교회에 헌금한 것이 얼마인데, 이럴 수가 있습니까? 투자한 것이 얼마인데, 교인들은 내 돈만 빼먹고 나를 헌신짝처럼 버리고, 하나님 왜 이렇게 나를 비참하게 합니까?” 이렇게 원망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뭐라고 하시는가 하면, “너 지금도 감사하고 기쁘냐?” 이렇게 물어요. “불쾌합니다.” 그러면 “너는 너 기분대로 사는구나.”

내 기분 좋고 나쁘고 그것과 상관없이 구원 받았습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고난을 이야기하면 ‘나는 고난은 싫다.’ 이러지 마시고, 고난보다 너끈하게 기쁨이 더 클 경우에 고난은 고난도 아니란 말이지요.

해인이 아빠가 아프다고 하시니까 딸로서 얼마나 마음이 고난스럽습니까? 그러나 그동안 건강하게 지낸 것, 사실은 늘 아파야 되는데 그동안 안 아프게 한 것이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안 아프게 하신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면 아프게 하신 것도 은혜의 한 출처로 포함을 시켜버리잔 말이지요.

제가 화요일 그런 강의 했습니다. “해(태양)가 똑똑합니까, 사람이 똑똑합니까?” 정답은 해가 더 똑똑합니다. 왜? 해는 근심 걱정을 안 하니까. 그런데 인간은 쓸데없이 걱정합니다. 거저 주셔서 구원 받았다고 백날 이야기해도 아침에 눈만 뜨면 걱정을 시작합니다. 그러니까 해가 보면 인간이 얼마나 한심스럽겠습니까? 그래서 오뉴월에 개가 인간보다 낫습니다. 내일 죽더라도 오늘 다리 펴고 잡니다. 국회에서 데모를 하든지, 집값이 내리든지, 현대자동차가 파업을 하든지 상관없이 편안하게 자고 있어요.

‘제발 좀 편안히 주무세요.’ 바로 그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즉 ‘너 신자 맞지?’ 그런 뜻이에요.

12절에 아까 제가 이야기한 것이 나오네요. “고난을 받되 부끄럽지 않은 것은 나의 의뢰한 자를 내가 알고 또한 나의 의탁한 것을 그 날까지 저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함이라. 너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으로써 내게 들은바 바른 말을 본받아 지키고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네게 부탁한 아름다운 것을 지키라.”

이 말을 다른 말로 하면, ‘너 신자 맞지?’ 그런 이야기입니다. 신자가 아니라면 이 말을 못 알아들어요. ‘선생님, 제 마음을 어떻게 아셨습니까?’ 이렇게 서로 교류가 되어야지요.

원래 사도바울이 터키 남부지방에서 전도하고 있을 때 디모데를 알았어요. 그래서 데살로니가, 그리고 베뢰아, 고린도 등지로 데리고 다니고 했어요. 그렇게 하다가 바울이 로마 옥에 갇히게 되고 그 때 편지를 디모데에게 쓴 것입니다.

그런데 골로새서 1장이나 이런 곳을 보면 바울과 함께 디모데도 로마 감옥에 같이 갇혀서 ‘사도된 바울과 형제 디모데는 골로새에 있는 성도들에게 편지한다.’ 이런 대목이 나와요.

그걸 보면 디모데는 바울의 수제자 또는 믿을만한 바울의 비서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디모데가 제대로 배운 거예요. 제대로 배울 때 제일 먼저 한 것이 하나님의 예정하심을 전한 겁니다.

자, 지금까지 한 것을 요약해 보겠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거저 주는 것이고, 인간의 뜻은 비는 것입니다. 간단하지요? ‘많이 빌면 복 많이 받고 태만하면 복 적게 온다.’ 이것은 이방인들의 뜻이고. 진짜 하나님의 뜻은 ‘인간은 다 똑같다. 꼬리에 불타는 것은 마찬가지니까, 내가 인간에게 받지도 않고 따지지도 않는다. 다만 창세전에 예정된 자에게는 공짜로 줄게.’ 이게 바로 성령 받은 자에 한해서 개 같은 이방인들도 믿을 수 있습니다. 그 성령이 너에게 있느냐는 것입니다. 성령을 받았다면 이 말을 듣는데 하등 지장이 없단 말입니다.

그 다음 15절 이하에는 자기 사정을 이야기하는데, 17절을 보면 “로마에 있을 때에 나를 부지런히 찾아 만났느니라. 원컨대 주께서 저로 하여금 그 날에 주의 긍휼을 얻게 하여 주옵소서. 또 저가 에베소에서 얼마큼 나를 섬긴 것을 네가 잘 아느니라.”

정락원 목사님이 쓰신 글을 보면 이런 것이 있어요. 참 중요한 글을 썼어요. ‘초대교회 때는 예수 믿는 것 발각되기만 해도 잡혀 죽었다. 그래서 지하 땅굴에 숨어서 예배를 드리고 했는데, 그런 시절에 어떻게 헌금 거둬서 예배당 짓고, 그 건물을 교회라고 말하고 그럴 수 있느냐?’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정목사님은 주장은, 교회의 표준, 교회의 모델을 예배당 있고 사람 모이고 이것으로 하지 말고, 초대교회 때 그들이 지하 동굴에서 모이면서 무슨 소식을 들었느냐? 그 소식을 교회 표준으로 삼자는 이야기에요.

여기 화평교회도 예배당 건물 없다고 왔다가 안 오는 사람이 있는지 모르겠는데, 기존의 교회 개념은 어느 정도 돈이 있어서 고딕식 교회를 짓고, 주차장 있고, 교육관 있고 이래야 교회고, 집에서 모이면 교회 아닌 것으로 여기는 이것은 기존 잘못된 교회관에서 유포된 것이란 말이지요.

로마서 16장에 보면 ‘가이오의 집’에서 모였어요. 그리고 사도바울이 편지 끝부분에 몇몇 사람의 이름을 거론하는데, 이름을 거론한다는 것은 그만큼 숫자가 적었다는 것입니다. 숫자가 많으면 이름을 거론할 수가 없지요. 그러니까 이 말은 그 당시 창세전에 예정된 사람이 몇 명 안 되었습니다. 복음은 전해도 진짜 성령 받은 사람은 따로 있단 말이지요.

로마서 8장 9절을 보겠습니다.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아무리 교회 다녀도 그 사람은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에요. 그러나 그리스도의 영이 있으면 어떤 혜택이 있는가? 10절에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 영은 의를 인하여 산 것이니라.”

성령이 와야 될 이유가, 우리 행함으로 구원 받는 것이 아니고, 우리 죽을 몸을 살린 것은 우리 노력이 아니에요. 나도 매일 아침마다 1시간씩 걷는데, 내가 걷는다고 해서 사는 것이 아닙니다. 죽을 몸이 사는 것은 내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영 때문에 살아요. 그 영이 무슨 영이냐? ‘죽은 예수님도 살려낸 그 영이 너희 안에 거하면 죽을 너희 몸도 살리시리라.’ 이것이 아까 이야기한 ‘약속’ 아닙니까.

11절을 다 같이 봅시다.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인간: “하나님, 하루에 착한 일 몇 가지 할까요?”

주님: “착한일 하나 안 하나 너는 죽을 몸이다.”

인간: “그러면 돈을 버릴까요?”

주님: “돈을 버려도 교회 바쳐도 소용없다.”

왜 그렇습니까? 어차피 죽을 몸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판사가 되어 좋은 일 할까요?” 판사가 되도 90살 되면 다 죽습니다. 사람이 무엇을 하든 다 죽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런 것 안 묻습니다. “너 직업이 뭐냐? 좋은 직업을 가졌네. 잘했다. 천당 보내 줄게.” 이런 것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아무 것도 필요 없습니다. 희망 안 가져도 돼요. 왜? 약속 속에 희망이 들어있기 때문에 새삼스럽게 자기 희망 가질 필요 없어요. 하지만 우리는 늘 희망을 갖잖아요. 왜 그러냐? 우리는 죽을 몸인데 죽을 몸을 좀 더 그럴듯하게 하기 위해서 그렇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죽일 놈이죠.

‘죽을 몸’을 다른 말로 하면 ‘죽일 놈’이죠. 늘 살면서 나밖에 모르니까 죽일 놈이죠. 이것을 주님이 아십니다. 그러니까 성령이 온 겁니다. 감히 하나님의 영이 더러운 우리 속에 들어와서 우리로 하여금 우리 죄를 까밝히고, 그 죄에도 불구하고 맞은편에서 하나님의 긍휼히 여겨주심이 퍼부어집니다.

탕자가 집에 돌아올 때 돈 얼마 가지고 왔습니까? 한 푼도 안 가져 왔습니다. 탕자는 부끄러워서 집으로 가서는 아들이 아닌 종으로 취급받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그 아들의 손에 가락지를 끼워줬어요.

탕자가 아버지가 끼워주신 가락지를 끼고 동네에 가서 ‘내가 탕자생활 해서 이 가락지 얻었다.’고 자랑합니까? 혹시 누가 ‘가락지 어디서 났니?’ 라고 묻으면 ‘아버지가 그냥 주셨어요.’ ‘너, 뭘 잘했다고?’ ‘잘한 것 없습니다.’ ‘그런데 왜 끼고 있어?’ ‘그냥 아버지가 주신 것이니까 끼고 있어요. 이것을 아버지가 기뻐하시거든요.’ 이게 신자입니다.

잃어버린 양을 찾아 데리고 올 때 어떻게 옵니까? 어깨에 메고 오지요. 우리가 목자 같으면 끌고 오면서 ‘너 때문에 99마리 양 도망갔다.’ 하면서 화를 내면서 때리면서 끌고 올 건데, 예수님은 99마리는 버려두고 잃었다가 찾은 그 한 마리 양을 어깨에 메고 왔습니다. 왜? 잃었다가 얻었다는 그 자체가 하나님 본인이 행하신 행위를 하나님이 좋아하시기 때문입니다. 이게 복음이고 이게 기쁜 소식입니다.

우리는 그냥 죽을 몸이에요. 그리고 죽일 놈이에요. 교회 와서도 돈이고 교회 문밖을 나가면서도 돈입니다. 이 세상은 돈이 있어야 사람대우 받습니다. 교회와도 돈 없으면 사람대우 못 받습니다. 솔직한 이야기잖아요.

지난 화요일 성경공부 후에 제가 말실수를 했어요. 아직 젊은 분인데 아기를 못 낳는다고 이혼을 당하고, 그런 처지의 어떤 분이 교회 찾아왔다는 어떤 목사님 말씀을 듣고, 그 목사님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젊은 분이 이혼당하고 상처가 심할 텐데 목사님이 잘 다독거려 주셔야 합니다.” 라고. 그럴 때 제 건너편에 앉은 성도(뇌수술 2번하고, 생활보호 대상자고, 언제 돌아가실지 모르는 50대 후반의 여자 집사님)가 말씀하시기를 “목사님, 약하다고 해서 오냐오냐 하면 사람 의지합니다. 약할수록 더 강하게 말씀을 주셔야 천국을 바라보지요.”라고.

그리고 저에게 한 마디 더 했어요. “보세요. 목사님이 저한테 특별히 관심 안 가져도 저는 아무 상관없잖아요.” 라고. 그 집사님 말씀 듣고 제가 얼마나 미안한지.

없는 사람이라고 해서 더 돌봐주고 그렇게 하지 말라는 거예요. 긍휼을 받은 탕자인데, “아이고 참 예쁘구나.” 탕자가 무슨 예쁜 탕자가 있습니까? 탕자에게는 아버지가 그냥 주시는 긍휼의 가락지만 있으면 되지.

그래서 우리가 세상을 살 때에 나에 대해서 기대와 희망을 갖지 말고, 지금까지 살아온 것도 하나님의 은혜고, 은혜는 창세전에 준비된 자에게 거저 주시는 것이기에 은혜로 받고, 우리는 그냥 죄인이고, 죽을 우리 몸도 살리시는 그 하나님의 영이 역사하시기에, 모든 공로를 예수님께 돌리면 그것이 바로 최고의 하나님의 뜻이 되는 겁니다.

한 구절만 더 하고 마치겠습니다. 1장 10절을 봅시다. “이제는 우리 구주 그리스도 예수의 나타나심으로 말미암아 나타났으니 저는 사망을 폐하시고 복음으로써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드러내신지라.”

나의 썩지 아니하는 몸은 이미 준비되어 있습니다. 그러기에 지금 우리가 가진 이 몸 안 썩으려 하지 마세요. 이 몸은 죽어야 됩니다. 어차피 죽어야 할 몸에 대해 두려워하지 마세요. 90세에 죽어나 60세에 죽어나 죽는 것은 똑같아요. 그렇다고 일부러 일찍 죽을 필요는 없습니다. 아직 살아 있다면 그것도 다 하나님의 뜻이니까 살 때까지는 살고, 죽을 때 섭섭하게 여기지 말고, 영원한 생명, 썩지 아니할 생명이 있는 곳으로, 썩을 세상에서 썩지 않을 세상으로 풀쩍 뛰어올라가는 거예요. 중고에서 신품으로 갈아입는 겁니다.

이것을 위해서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죽었지요. 죽었다가 사흘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이 코스, 죄로 인하여 죽었다가 하나님의 의로 인하여 부활되는 이 코스가 예수님이 첫 번째라면, 두 번째 세 번째는 누구한테 해당되겠습니까? 바로 성령 받은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이것이 바로 10절에서 이야기한 복음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옛날 초대교회 때 사도바울이 이방인들에게 전했던 그 복음을 우리가 그대로 받아보았습니다. 성령이 오게 되면 창세전에 예정된 대로 구원된다는 것을 깨달았사오니 어지간한 고난은 고난으로 여기지 말고 그것마저 감사할 수 있는 여유 있는 여생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09. 1. 23. 10:52 녹취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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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