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2009년 1월 23일 강의 디모데후서 1장 9절,14절
광주 2009년 1월 23일 강의 디모데후서 1장 9절,14절
이름 : 우리교회(IP:124.59.84.82)
090123 디모데후서 1장 9절,14절
나 아니요(틀렸고) 예수님만 옳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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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01-24 1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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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02-22 20:09
광주090123a디모데후서1장9절
광주 강의(09. 1. 23) 45-1
디모데후서 1장 9절을 읽어보겠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부르심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 뜻과 영원한 때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
이 문장은 서로 대조가 되고 있습니다. ‘ ~가 아니요.’와 ‘ ~이다.’가 서로 대조를 이룹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기 구원 받는 일에 급급해서 ‘ ~가 아니요.’ 라는 것은 잘 안 듣고 ‘ ~이다.’ 이 뒷부분에 관심을 갖습니다.
‘ ~가 아니요. ~이다.’ 이 경로를 밟아야 되는데 앞부분을 빼버리고 ‘ ~이다.’로 바로 와버리면 ‘ ~이다.’는 가짜가 됩니다. 반드시 ‘ ~가 아니요.’라는 과정에서 말씀의 샤워를 받아줘야 됩니다. 어떤 제품을 만들 때 살수차가 위에서 씻어주고, 이 씻는 과정을 통과해서 완제품이 되는데, 이 씻는 것이 귀찮아서 안 씻고 바로 제품을 만들려고 하면 이것은 불량품이 되지요.
그래서 ‘ ~가 아니요.’ 라는 것을 받고 난 뒤에, 그 다음에 중첩해서 그 위에 ‘ ~이다.’ 할 때 이 ‘ ~이다.’의 의미가 발생되는 겁니다. 제가 지금 굉장히 쉽게 이야기한 거예요. 그런데 제가 계속 강의하면 “너무 어렵습니다.” 라는 말이 나올 겁니다.
겨울 수련회에서 역대기를 했는데, 조 집사님은 참석 못하셨지요? 역대기 내용이 무척 어려운데 오늘 강의가 역대기보다 더 어렵다고 보면 됩니다. 어렵다고 그냥 어렵다는 말만 하면 안 되고 이것을 쉽게 설명을 해야 되는데 이것이 중요합니다.
‘ ~이다.’ 이것이 어려워요. 이것이 뭐냐 하면, ‘하나님이 예정하신 대로’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아, 그건 나도 안다.” 이렇게 나오는데, ‘ ~가 아니요.’는 생각하지 않고, 그냥 “예정하신 대로 구원 받았다는 것은 나도 압니다.” 이렇게 나온다면 이것은 곤란합니다. ‘예정하신 대로 구원 받았다.’ 이것만 챙기지 마세요. ‘ ~가 아니오.’가 없으면 예정하심은 엉터리 예정하심입니다.
제가 질문 드리겠습니다. ‘ ~가 아니요.’ 할 때, 여기에 뭐가 들어갑니까? ‘우리의 행위’가 들어갑니다. 우리의 행위대로 하지 않고 예정하심이잖아요. 그러면 여기에서 간단하게 정리하면 이렇게 되겠지요. 예정하심은 반대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인간의 행위이고, 이 행위는 목적을 갖고 있는데 어떤 목적인가 하면, ‘내가 구원 받기 위해서 뭘 해야 합니까?’ 이 생각. 이것 전부가 ‘ ~가 아니요.’에 해당 됩니다. 어렵지요?
이제 이 행위를 이야기하는데, 이 행위를 설명할 때 성경 전체가 다 동원됩니다. “목사님, 성경 내용을 한 마디로 말해서 뭐라고 할 수 있습니까?” 라고 물으신다면, “인간의 행위는 행위대로 쭉 가고, 그 위에 하나님의 예정하심이 올라타고 있습니다.” 이렇게 답할 수 있어요. 마치 달리는 말 위에 시라소니(혹은 사자)가 타고 달리는 것처럼.
그런데 사람은 뭐가 보인다? ‘지금 나는 달리고 있다. 나는 얼룩말이다.’ 인간의 행위가 보이고 예정하심은 안 보입니다. 이점을 제가 쉽게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빌라도가 예수님 재판한 후에 한 행위가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죄가 없다.” 라고 한 후에 뭘 했지요? 손을 씻었지요.
대아에 손 씻는다고 죄가 없어집니까? 소용없는 짓이지요. 그런데 사람들은 뭔가를 해서 ‘나는 죄 없습니다.’라고 드러내고 싶어 해요. 이것이 바로 인간의 행위입니다. 교회 다니면서 술을 마셨다면, 술 마신 것은 내가 마신 것이고, 하나님의 예정하심이 올라 타 있는데, 술 마셨다고 미안해서 교회 갈 때 헌금 10,000원 더 냅니다. 마치 빌라도가 재판 후에 자기는 죄가 없다고 손 씻는 것처럼.
내 행동을 통해 내 죄가 약간은 상쇄가 된다는 생각, 이것이 인간의 본성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쓸데없는 짓거리입니다. 사도바울이 ‘하나님의 예정하심으로 구원 한다.’는 말씀은 그 앞서서 우리가 무슨 짓거리를 한다? 쓸데없는 짓거리를 평생토록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내가 구원 받기 위해서 얼마나 착하면 됩니까? 헌금은 얼마나 할까요? 일주일에 교회 몇 번 나가면 됩니까? 성경 공부에도 참석 할까요?’ 이것 전부가 쓸데없는 짓입니다. 얼룩말 위에 누가 타고 있습니까? 사자가 타고 있다. 얼룩말은 죽으라고 달리는 거예요. 왜? 열심히 달리면 사자가 안 잡아먹을 줄 알고.
사도바울이 이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바울: 당신들이 열심히 행했지요?
성도: 예.
바울: 그것은 구원 받는데 아무 도움도 안 되는 쓸데없는 짓이었습니다.
성도: 왜 그렇습니까?
바울: 하나님의 예정하신 대로 구원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디모데전서 1장 9절에서 하신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다시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부르심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 뜻과 영원한 때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
예정하심의 원천을 이야기하고 있는데, 은혜가 어디에서 오는가 하면 예정하심에서 오는 거예요. 예정하심에서 쏟아져서 우리의 행위가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입니다.
지금까지는 쉽지요. 자, 이제 조금 더 진도를 나가 봅시다.
하나님의 뜻, 영원한 때 전부터 예정하신 뜻에 의하여 우리가 구원 받습니다. 늦게 오신 분을 위해서 다시 이야기를 하면, 우리가 지금까지 1장 9절을 살폈는데, 우리가 구원 받는 것은 우리의 행함이 아니요 하나님의 영원하신 뜻에 의해서 구원 된다고 했습니다.
이 내용은 아무리 반복해도 지겹지 않아요. 너무 좋은 말씀이에요. 아, 그렇구나. 내 행위에 내가 주눅이 들었구나. 내가 실수하고 죄 지었다는 것 때문에 주눅 들 필요 없는데, 영원하신 뜻대로 되는데, 문제는 영원하신 뜻이 우리에게 오게 되면 ‘ ~가 아니요. ~이다.’ 라고 했지요.
그러면 ‘ ~이다.’ 여기에서는 ‘영원한 뜻이다.’가 되는데, 영원하신 뜻이 누구를 죽일까요? 우리 행위를 죽여야 ‘ ~가 아니요.’가 성립이 됩니다. 그러니까 항상 우리 행위에 대해서 누가 공박을 하는가 하면, (구원 받은 사람에 한해서 하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영원하신 뜻이 우리 행위와 만날 때는 그 영원하신 뜻이 나의 행위를 구박하게 되어 있습니다.
나의 행위를 구박한다는 말이 무슨 뜻인가? 영원하신 뜻이 뭘 공격하는데, 무엇을 공격합니까? 우리의 행위입니다. 우리가 행위를 할 때는 반드시 목적이 있고 기대하는 바가 있습니다. 만약 시험을 친다면, “어, 여기 시험 문제가 있네. 읽고 답을 적어볼까?” 이렇게 시험을 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내가 시험을 잘 쳐서 합격을 하면 ~ ” 이런 기대를 가지고 시험을 치지요.
교사가 되어 학생을 가르친다면, 반드시 목적하는 바가 있어요. 오늘 수업의 목표는 이쯤 올라서는 것이다. 그것이 안 되면 화가 납니다. 열심히 수업을 진행하면서 진도를 끌어올리고 있는데 갑자가 학부모가 찾아와서 수업이 끊어지게 된다면 기분 나쁩니다. 왜? 분위기가 다 깨지고 그렇게 되면 내 목적이 달성될 수 없어요.
주식 투자하면서 목적 없이 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나는 1시간 후면 무조건 판다. 이런 것은 없습니다. 언제 주가가 오르고 내리는가에 주의를 기울이다가 적절한 시점에 사고, 팔고 하듯이 모든 행위는 목적이 있고 의미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영원한 뜻이 행위를 공격한다는 것은 무엇을 공격하는 겁니까? 내가 갖고 있던 목적과 의도와 기대를 공격합니다.
아까 예를 든 빌라도 이야기를 계속해 봅니다. 빌라도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준 후에 대아에 물 떠놓고 손을 씻으면서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나는 무죄하니 너희가 당하라(마27:24).”고 하지요. 왜 빌라도가 이런 짓을 했을까요? 행여나 일이 잘못되어 신께서 노한다면 그 일에 가담했던 자신에게 불이익이 올 수 있지요. 그런 사태에 대비해서 자신은 발뺌하기 위해서 이런 행동을 취한 것입니다. 모든 인간의 행동은 자기에게 유리하게 하기 위해서 하는 겁니다.
스데반 집사가 돌에 맞았습니다. 그가 의도한 것이 있었습니까? 스데반은 돌에 맞는 것을 예상 안 했어요. 그냥 설교할 뿐이었지요. 그런데 돌이 날아오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고.
간음한 여인을 예수님이 부를 때, 간음한 여인이 뭘 기대했겠습니까? ‘이제 죽었구나.’ 생각했을 겁니다. 우리가 주님 앞에 나갈 때 ‘나는 죽었구나.’ 하는데, 주님은 이런 자에게 “내가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리라.” 라고 하십니다. 이게 복음 아닙니까. “내가 너를 용서할 것이다.” 정죄하지 않으시는 것이 하나님의 예정하신 구원의 뜻이지요.
우리는 늘 ‘내가 유리할까, 불리할까?’를 생각하면서 어떤 목적과 의도를 가지고 행동하는데, 여기에 대해서 예수님은 우리의 의도와 기대와는 전혀 상관없이 십자가 지심으로 내 유익을 위해 행동하면서 파생되어 나오는 모든 죄들을 용서해서 우리를 구원하십니다.
그러면 이 예수님의 구원 속에는 반드시 ‘우리는 죄인이다.’ 라는 것이 있어야 됩니다. 우리가 죄인일 경우에만 비로소 주님의 영원하신 뜻이 드러나게 됩니다. 만약 ‘우리도 의인이고 주님도 의인이다.’ 이렇게 되면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가 성립이 안 되겠지요?
오늘 강의 처음부터 디모데후서 1장 9절의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가 전제되어 있지요. 그러려면 주님의 뜻이 우리 목적과 의도를 치고 꺾어야 해요. 그래야 9절 말씀이 부각이 됩니다. 만약 내 목적대로 다 되면 내 행위로 내가 구원 받는 것이 되니까 9절 말씀과 안 맞는단 말이지요.
성경은 하나님의 계시입니다. 제가 지난 대구 강의에서 그런 말씀을 드렸어요. “여러분, 창세기 2장에 보면 부부 사이에는 벌거벗었어나 부끄러워하지 않지요? 사랑이 뭐냐 하면 감추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모든 것을 드러내고 싶어서 환장한 것이 사랑입니다.” 그래서 연애하다가 막 결혼을 하게 되면 직장에 가서도 빨리 집에 가고 싶어요. 직장에서는 예의를 갖춰야 되고, 도덕적이어야 하고, 행동을 조심해야 되고, 남들을 의식해야 되지만, 직장 끝나고 집에 돌아가면 반바지를 입든지 체육복을 입든지 전혀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연예 시절에는 내숭을 떨어요. 식사시간에 자장면이 먹고 싶은데 혹시나 먹다가 입가에 묻으면 어쩌나 하고 내숭을 떨면서 못 먹지요. 그러다가 결혼하고 나면 자장면이든 짬뽕이든 상관없이 음식에 걸신들린 사람처럼 눈치 안보고 막 먹습니다. 비빔밥도 고추장 발라서 숟가락에 수북이 담아서 입이 찢어지도록 퍼 넣습니다. 이게 사랑입니다.
그래서 사랑보다 더 좋은 게 없어요. 왜냐하면 더 이상 자기 자신을 감출 이유가 없기 때문에. 이럴 경우에 주의할 것은 상태 배우자를 절대로 탓하면 안 됩니다. 탓하면 그렇게 드러내는 그 사랑을 보관할 공간이 없어집니다. 자기는 모든 것을 드러내도 모든 것을 용납해 주는 행복한 그 공간을 이제 비로소 만났는데 만약 상대가 그것을 따지게 되면 ---
이처럼 사랑이라는 것은 모든 것을 용납하는 거예요. 창세전에 하나님이 예전하신 뜻이 사랑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다른 사람한테는 감추되 자기 백성에게는 하나님의 모든 것을 다 공개를 해버려요.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감추지 않고 모든 것을 공개합니다. 그런데 만약에 부부 싸움이 일어나면 각 방 쓰잖아요. ‘내 영역에 들어오지 마. 너에게 더 이상 내 모습 드러내기 싫어. 만날 잔소리만 하는데 어떻게 같이 있어.’
구원은 우리의 행위로 안 됩니다. 오늘 이 이야기를 열 번 정도 했지 싶은데, 이 말이 정말 중요합니다. 열 번 아니라 백 번해도 됩니다. 절대로 우리 행위대로 되지 않고, 감춰진 뜻대로 하는데, 그 감춰진 뜻이 뭔가 하면 ‘사랑’입니다. 묻지도 않고 따지지도 않아요. 그냥 처음부터 우리가 무슨 짓을 하든 상관없이 다 용서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받으려면 뭘 공격받아야 돼요? 내 나름의 행위는 밟혀야 됩니다.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그런데 우리는 기껏 하는 짓이 뭐냐 하면 빌라도처럼 ‘하나님, 나는 잘 못 없습니다. 벌 내리지 마세요. 저 사람들이 한 짓입니다. 나는 손 씻었습니다.’ 이러고 있어요.
손 씻는 거나 전도하는 거나 헌금하는 거나 똑같은 거예요. 이런 것이 자기를 구원하는 일에 전혀 보탬이 안 됩니다. 괜히 그런 것 하면 하나님이 복을 주지 않을까 싶어 하는데 다 헛짓입니다. 이것은 자기가 자기를 구원하려는 시도입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비켜갑니다.
사람이 양심이라는 것이 문제가 있어요. 양심적으로 하면 안 됩니다. 양심적으로 한다는 것이 굉장히 위험한 것입니다.
성경 전체를 봅시다. 이것이 성경인데 이것을 펼쳤습니다. 제일 먼저 창세기가 있고 맨 마지막에는 요한계시록. 창세전의 영원하신 뜻이 사랑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에 사람들이 쭉 살고 있습니다. 그 중 이번 가야산에서 했던 역대기가 있습니다.
역대기가 어렵다는 이야기를 많이 했기 때문에 이것을 잠시 설명 드리고 진도 나가겠습니다. 전체적인 해답은 이미 이야기했습니다. 성경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인간들의 행위가 있지만 여기에 하나님의 사랑이 올라타기 때문에 ‘인간의 행위’ 이것을 하나님의 사랑이 공격하게 되어 있어요. 사랑이 공격한다고 하니까 말이 재미있지요?
하나님의 사랑이 사랑으로 되기 위해서는 인간이 내 행함으로 구원 받는다고 하는 이런 어 슬픈 몸부림, 자기 자랑 이런 것을 공격해야만 됩니다. 그 중 하나가 뭐냐? 이번 수련회에서 살핀 역대기에요. 참석하신 분도 있지만 역대기가 너무 어렵기 때문에 제가 다시 한 번 쉽게 이야기하겠습니다.
역대기에 보면 두 가지가 들어 있어요. 하나는 ‘인간의 행함’이고, 그리고 ‘하나님의 영원한 뜻’이 들어 있습니다. 성경 해석은 이것만 하면 돼요. 인간의 행함과 하나님의 뜻을 알아야 하고, 이 두 가지 사이에서 영원한 뜻이 인간의 행위를 부정한다는 이것까지 알아야 돼요.
기존 교회에서나 기존 신학에서는 이것만 이야기해요. “인간의 행함이 있고, 하나님의 영원하신 뜻이 있습니다.” 이러고 말아요. 그러니까 사람들은 “우리의 행함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 돌리자.” 이런 식으로 나와요. 이렇게 되면 디모데후서 1장 9절의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라는 말씀이 거짓말이 돼요.
예수님이 계시를 통해서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라고 하셨다면, 왜 ‘아니요’라고 하셨는지를 알아야 해요. 영원하신 분의 단독 행위이지 인간이 협조해야 될 문제가 아닙니다.
그래서 이사야에는 영원한 뜻과 인간의 행위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영원하신 뜻이 인간의 행위를 부정하게 되어 있지요. 신약에 오면 이걸 십자가로 말씀하고 있고, 십자가를 분석하면 ‘자기를 부인하고’ 가 되지요.
제가 지난 수요일 설교 했습니다. 십자가 지라고 하니까 자기가 십자가 지고 간단 말이지요. 자기가 십자가 지면 십자가에 목 박을 때 못을 살살 칩니다. 안 아프게. 아파도 견딜 만큼만 아프게. 내가 만약에 십자가를 지고 간다. 내가 십자가에 못 박힙니다. “근호야 살살 쳐라. 아프면 뛰어 내려간다. 견딜 만큼 쳐라.” 이게 무슨 십자가입니까?
이것은 자기 부인이 아니고 즐기는 것입니다. 십자가 지는 것 자체를 즐기는 거예요. “신이시여, 참 대견하지요. 제가 십자가 지고 가잖아요. 얼마나 착합니까? 나같이 이런 착한 인간을 구원하시지 않으면 누굴 구원합니까?” 이것이 바로 인간의 행함에 포함되는 것입니다. 이 짓을 누가 했는가? 다윗이 했어요.
수련회에서 역대기를 강의할 때 산을 그렸지요? 산 위에 뭐가 있다고 했습니까? 점선이 있지요. 그런데 다윗은 어디까지만 간다? 밑에서 올라와서 점선까지는 못 미치고 다시 쭉 내려오지요.
사람들의 생각은 하나님이 다윗과 계약을 맺었다고 여겨요. 그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다윗과 계약을 했다면 뭐가 성립이 안 됩니까? “인간의 행함이 아니요”가 성립이 안 되지요? 다윗을 불러서 계약을 해놓고, 불러낸 다윗하고는 계약을 안 합니다. 점선 위에 다윗 같은 분이 있어요. 이분이 누구냐? 이분은 점선입니다. 신약에 오면 밝혀지는데, 바로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역대기가 어려운 것은 다윗과 계약을 하는 것처럼 올라갔는데 쭉 미끄러져서 솔로몬 이후에 지리멸렬했습니다. 제가 이것을 [마징가 Z]처럼 그렸지요. 기억나십니까? 몸통은 사울, 다윗, 솔로몬 해놓고, 어께위에 이쪽은 북 이스라엘, 이쪽은 남 유다로 표시했는데 나중에는 다 사라져 버리지요. 멸망당하죠. 이것을 유훈 통치라고 했잖아요. 죽은 김일성이 통치하고 김정일은 김일성 이름으로 인민들을 관리하고.
바로 이런 식으로 다윗의 자손, 다윗과 점선으로 이러진 사람이 오기를 기다리는 거예요. 그렇다면 인간은 어디까지인가? 아무리 올라가도 기껏 다윗까지만 올라가고, 다윗까지 올라간다 해도 쭉 미끄러져서 내려오게 되지요.
다윗 언약이 보여주는 것은 뭐냐? 인간은 죽은 자이기에 죽은 자와는 계약을 안 합니다. 하나님은 죄를 지어 죽은 자와는 약속을 안 합니다. 그러면 이 하나님의 다윗 언약은 누구하고 언약합니까? 죽은 아담의 혈통이 아니라 멜기세덱의 족보를 따르는 주와 계약을 맺습니다. 하나님이 아들 예수님과 계약을 합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이 계약을 맺으면 어떤 효과가 있는가 하면, 인간들이 땅에서 행한 행위에 저촉을 안 받지요. 오늘 강의에서 제일 중요한 대목입니다. 다시 이야기할 게요. 하나님과 하나님이 계약을 맺으면 어떤 효과가 있는가 하면, 구원 받을 인간들이 자기 딴에 좋다고 여긴 어떤 짓들이라도 그 계약 내용에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왜? 계약의 당사자가 아니니까.
이러면 영향이 있어요.
하나님: 어이, 다윗
다 윗: 예.
하나님: 너 똑바로 해.
다 윗: 똑바로 하겠습니다.
하나님: 너와 약속했다.
다 윗: 예 알겠습니다.
하나님: 너 왜 밧세바를 취했어? 계약 취소한다.
이렇게 되면 어느 인간이 구원 받겠습니까? 이렇게 된다면 다윗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다윗은 아담의 아들(후손)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누구의 아들입니까? 역시 아담의 아들이에요. 아담은 실패했지요. 다윗도 실패했지요. 그리고 우리도 실패하지요. 그러면 누가 구원 받습니까?
그러니까 사도바울이 말하기를, “우리의 행함이 아니요”라고 한 거예요. 우리의 행위에 대해서는 묻지도 않고 따지지도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 사람들이 “우리가 착하지도 않은데 어떻게 구원 받아?” 하니까, “하나님의 영원한 약속이 은혜로 주어졌다.”고 합니다.
다시 한 번 설명해 드릴게요. 앞에 있는 것은 창세기. 뒤에 있는 것은 요한계시록. 인류의 역사지요. 인류의 역사를 설명할 때 디모데후서 1장 9절에 의하면 세상을 어떻게 해석한다? 두 가지로 나누는데, 하나는 영원하신 뜻. 또 하나는 인간의 행함. 그런데 이 둘만 있으면 안 된다고 했지요. 영원하신 뜻과 인간의 행함 사이에 어떤 일이 발생한다? 그냥 조용히 가는 것이 아니고 ‘인간의 행함이 아니요.’ 이 부정적인 것이 신약의 십자가에서 나타났다고 했지요.
십자가 안에 뭐가 들어 있습니까?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 지라. 이 말은 ‘인간의 행함이 아니요.’가 되고, 이것이 역대기에 가면 다윗과 약속을 해놓고 ‘다윗의 행함은 아니요.’가 되지요. 그러면 ‘아니오’의 이유를 밝히면 되겠지요?
다윗이 하나님과 약속을 해서 올라갔는데 정상에는 뭐가 있다고 했습니까? 점선. 이 점선 부분까지는 못 올라가고 쭉 미끄러졌지요. 미끄러진 그 결과가 지리멸렬. 그러니까 다윗의 자손들(남쪽 유다)도 지리멸렬. 그리고 다윗과 상관없는 자들(북쪽 이스라엘)도 지리멸렬. 양쪽 다 멸망당함. 이렇게 되지요.
그러면 다윗에게 문제가 있지요? 사람들은 다윗과 하나님과 약속을 맺었다고 생각하는데, 자세히 조사를 해보니까 다윗과 맺은 것이 아니고 다윗 위에 점선으로 되어 있지요. 다윗과 맺은 것이 아니고 다윗 위에 계신분이 있지요. 다윗까지는 혈통이 누구 혈통입니까? 인간 아담의 혈통이고, 다윗 윗부분의 혈통은 멜기세덱의 반열인데, 멜기세덱은 아비도 없고 족보도 없는 하늘에 속한 사람입니다.
하늘에 속한 예수님과 다윗 언약이라고 했으니까 다윗은 구원 받아야 될 것 아닙니까? 이 사이에 어떤 것이 개입되는가 하면, 예수님은 산 자요 다윗은 죽은 자요. 그러니까 다윗 밑에 있는 유다 왕들이 구원 받으려면 다윗의 묘실(무덤)에 들어가야 합니다.
유다와 이스라엘의 차이점이 뭔가? 이스라엘 왕들은 그냥 죽지만 유다 왕들은 어디에 갔다? 다윗의 묘실에 들어갔다. 이것을 ‘다윗의 등불’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예외로 아하스 왕은 빠집니다.
방금 역대기를 예로 들었는데, 역대기 속에도 이미 영원한 뜻과 인간의 행함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역대기뿐만 아니라 열왕기, 예레미야, 에스라, 느헤미야 전부다 마찬가지겠지요. 그래서 디모데후서 1장 9절을 해석하면서 바울이 어떻게 해석했습니까? ‘ ~은 아니요. ~ 다.’ ‘인간의 행함은 아니요. 하나님의 영원하신 뜻이다.’ 이렇게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 영원하신 뜻이 어떻게 이뤄지는지 그 뒤를 봅시다.
디모데후서 1장 10절을 봅시다. “이제는 우리 구주 그리스도 예수의 나타나심으로 말미암아 나타났으니 저는 사망을 폐하시고 복음으로써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드러내신지라.”
이 말은 결국, ‘우리의 행위대로 하지 않고, 하나님의 영원한 뜻으로 이뤄진다.’는 것입니다.
늦게 오신 분을 위해서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 ‘ ~가 아니요.’를 거치지 아니하면 ‘ ~이다.’가 이해 안 된다고 했습니다.
그 이유가 10절에 나옵니다. 왜 인간의 행위는 아닌가 하면, 인간 속에는 죽음이 들어있어요. “사망을 폐하시고 ---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드러내신지라.”
고린도전후서 녹취록 다 읽으신 분계십니까? 저도 얼마 전에 다 봤어요. 그걸 보고난 뒤에 뭘 느꼈느냐 하면, 이렇게 강의를 했는데도 불구하고 실로암교회에서 나왔다는 것이 참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실로암교회는 이것 말고 성경을 어떻게 해석하는지 그것이 궁금했어요. 여러분들은 안 궁금합니까? 나 혼자 궁금한가?
고린도전후서 녹취록에 보면 이런 것이 있어요. 영1, 영2, 영3이 있어요. 육1, 육2, 육3이 나온다고. 이게 뭐냐 하면, 밥 먹는 예수님의 육체를 육1 이라고 하면, 예수님께서 문을 닫아놓았는데 들어오신 것은 또 다른 육2 라면, “만지지 말라. 내가 아버지께 아직 안 갔다.” 할 때, 영광중에 올라가는 영광스런 몸은 육3 이란 말이지요.
그러면 예수님의 육체 종류가 몇 개냐 하면, 마리아에게서 태어날 그 때의 몸과 문을 뚫고 들어오는 그 몸과 영광스럽게 하늘로 올라가는 그 몸도 있지요. 그러니까 첫 번째 육1은 우리 인간들과 같이 있는 거예요. 인간들과 같이 있는 입장에서 육2와 육3을 볼 때 이것을 귀신으로 보는 겁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사실은 육1에서 육2, 육3으로 갈 수 없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베드로를 봅시다. 베드로가 육1을 갖고 있지요? 엄마에게서 태어난 몸을 갖고 있지요? 베드로가 물 위를 어떻게 걸었습니까? 그 육체는 어떤 육체입니까? 예수님이 물 위를 걸을 때 사람들이 뭐라고 했습니까? “야, 유령이다.” 하여튼 인간들은 자기 몸과 다르면 다 유령이라고 여깁니다. 인간들의 해석이.
이 말은 자기는 살아있고, 자기와 같지 않은 것은 다 죽은 세계에 있는 것으로 보는 거예요. 그런데 이것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후에는, 오늘 본문 1장 10절처럼 이것을 바꿔서 생각해 보란 말이지요. 육2의 입장에서 보면 누가 죽은 겁니까? 육1을 갖고 있는 인간이 죽은 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말하기를, 아직도 나이가 40밖에 안 되었기에 안 죽었다는 거예요. 관속에 들어간 것이 죽은 것이지 나는 아직 건강하고 멀쩡히 살아 있으니까 살았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서 바로 복음(십자가) 안에서 세상을 보는 것과 밖에서 보는 것과 차이가 나는 거예요.
사도바울이 말할 때는 어느 관점이냐 하면, 육1 관점이 아니고 육2, 육3 관점에서 볼 때 예수님만 살아 있고 인간은 나이와 건강상태와 상관없이 죽인 자입니다. 문제는 어떻게 이 관점으로 바꾸느냐 하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관점을 바꾸면, 나는 죽은 자고 본격적으로 살려면 죽는 날이 오면 본격적으로 산다. 이렇게 바뀌겠지요. [피]라는 책이 보면 나오잖아요. 다니엘 친구들이 불속에 들어가니까, 다른 사람이 보면 다니엘 친구들이 불속에 들어갔는데, 불속에서 보니까 오히려 저쪽이 불바다 속에 있는 거예요. 자기는 멀쩡하고 저쪽은 지금 불에 타고 있는 거예요. 똑같은 불이라는 칸막이를 두고 이쪽과 저쪽이 서로 반대의 관점으로 본다 이 말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불 속에서도 살 수 있는가? 이것은 의사나 법관이 된다고 해서 알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에서도 이것을 안 가르쳐 줍니다. 어떻게 영생을 얻는가 하는 그 문제.
사도바울은 어떻게 해석하는지 봅시다. 11절에 “내가 이 복음을 위하여 반포자와 사도와 교사로 세우심을 입었노라.”고 했는데, 이것은 설교자들이 꼭 들어야 하는 말씀입니다. 설교자 주변에서 갖가지 일이 벌어지고 난리가 나더라도 설교자의 사명은 복음을 전파하는데 있습니다.
이런 일들 때문에 내가 복음을 전해서 사람을 살리는 일을 소홀히 한다든지 신경을 다른데 쓰면 안 돼요. 어떤 경우라도. 그리고 설교자가 복음을 전해서 사람을 살린다는 것을 즐거워해야 됩니다. 이 즐거움이 있으면 주변에 어떤 일이 일어나도 계속 즐겁고, 복음을 전하는 즐거움이 없으면 주변에 약간만 무슨 일이 일어나면 낙담하고 낙심하고 우울증 걸리고 책도 보기 싫어지고 아무것도 하기 싫다고 하고 그렇게 됩니다.
즐거운 사명이 있는데 그것은 생각 안하고 ‘내 꼴이 왜 이래.’ 이렇게 되면 복음이 죽지요. 내가 복음을 훼방하는 것이 돼요. 복음의 원수는 있습니다. 내 기분대로 살아가는 내가 가장 복음의 원수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세상이 아무리 악하고 내 집안에 문제가 있더라도 하나님은 안 바뀌었잖아요. 하나님이 계시면 아무 문제없는 겁니다. 십자가 복음이 안 바뀐 이상 문제될 것은 없습니다. 폭설이 내렸다고 해서 십자가 진리가 변합니까? 사람들이 나를 안 알아준다고 해서 하나님이 변합니까? 아니잖아요. 복음이 안 바뀌었으면 그것으로 즐거워해야지 무슨 엉뚱한 생각을 하고 있냔 말이지요. 마귀가 노리는 것이 이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심판하실 때 심판의 기준이 뭔가 하면, 십자가 피가 기준이고, ‘너는 죄인인데 십자가 피로 용서한다. 피로 말미암아 넘어가리라.’ 이것이 심판의 기준인데, 세상 기준은 뭐냐 하면, ‘너 완벽해야 돼.’ 이겁니다. 이것은 마귀가 세운 기준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심판을 그대로 가져다 줄 자가 누구냐? 이것이 바로 복음 전도자입니다. 따라서 복음 전도자는 사람들의 칭찬에 솔깃하면 안 되고, 주여 저는 십자가 앞에서 늘 죄인입니다. 설교자 본인이 십자가 앞에서 늘 서있어야 십자가가 크게 보이고 그 앞에 예수님이 피를 흘리고 그 앞에 자신이 죄인으로 서있어야 그 다음에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거예요.
복음 전하면 주위에서 온갖 공격과 핍박이 몰려와요. “넌 완벽하냐? 넌 돈밖에 모르잖아. 너는 밥 먹고 살려고 그 짓 하지?” 등등 온갖 소리를 해도 세상의 심판은 신경 쓸 필요조차 없습니다. 왜? 복음 전하는 재미가 있어서. 이 즐거움을 누가 빼앗아요? 성령이 주는 기쁨인데.
수요일 제가 그런 설교 했습니다. 사람들은 성령의 열매를 뭐로 바꾸느냐 하면 내가 만든 나의 열매로 바꿔요. 이게 바로 성화론입니다. 성령의 열매는 성령께서 맺으십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못을 칠 때 나는 완전히 쪼다가 되고, 그 때 나오는 열매가 성령의 열매입니다.
만약 나의 열매가 되면 여기서 시기, 질투, 미움이 나온단 말이지요. ‘하나님 나는 교회에서 이렇게 열심히 했는데 저 사람이 나를 방해합니다. 정말 불쾌합니다.’ 이게 뭐냐 하면, 성령의 열매가 아닌 자기 열매를 맺으니까 마귀가 얼씨구나 좋아하지요.
이렇게 되면 마귀의 표적이 됩니다. 벌떼같이 달려듭니다. [미이라] 영화를 보면 흉측한 벌레들이 시체에 달려들거든요. 이런 시체 같은 우리(육1)가 시선을 나에게 두지 말고, 이미 살아있는 입장(육2, 육3)에서 죽은 나를 바라보면 되는데, 자꾸 죽은 시체인 내가 내 행위를 통해 나를 살리려고 하니까 여기에 시꺼먼 딱정벌레 같은, 요한계시록에 의하면 무저갱에서 올라온 귀신의 앞잡이들이 달려들어서 귀, 코, 눈을 공격해서 내 몸을 다 파먹는 거예요.
사도바울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우리는 현재 죽어있는데 생명으로 옮기는 복음이 있다. 10절 “사망을 폐하시고 복음으로써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드러내신지라.”
그 다음 12절에 보면, “이를 인하여 내가 또 이 고난을 받되 부끄러워하지 아니함은” 이라고 했는데, 아까 이 부분 설명 드렸지요. 다시 말씀드리면, 창세기 2장에 보면 처음 아담과 하와의 사이는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않았어요. 이 관계를 ‘사랑’이라고 했지요.
우리교회에 부부의사가 있는데, 남자가 집안일을 다 해요. 여자는 퇴근하면 지쳐서 아무것도 못해요. 병원에서 환자들을 대하면서 얼마나 피곤했던지 집에 오면 그냥 퍼져요. 이렇게 사랑이라는 것은 남들이 뭐라고 욕을 해도 주님 앞에서는 부끄러움이 없어요. 왜냐? 복음은 원래 사랑이기 때문에, 사랑이란 것은 감추지 말라는 이야기거든요.
주님께서 ‘제발 감추지 마라. 다 용서해 줄게.’ 우리 행위는 아예 묻지를 않고, 구원하는 것은 영원하신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말합니다. ‘내가 고난은 받되 부끄러워 아니한다.’ 바로 그 복음이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갑니다.
10분 쉽시다.
(2009. 2. 20. 10:38 녹취 마침)
우리교회(IP:220.♡.176.150)
09-03-04 18:43
광주090123b디모데후서1장13절광주 강의(09. 1. 23) 45-2
디모데후서 1장 13절에 보면 믿음과 사랑이 나오죠? 이게 사라진다는 거예요. 지금 신앙생활 하는 사람들이 제일 힘든 게 뭐냐 하면, “맞습니다. 사랑입니다. 믿음입니다.” 라고 했는데, 이것이 지속되지 않고 몇 초 후에 사라진다는 겁니다.
여기서 분석해 봐야 돼요. 뭔가 사라진다는 말은 내 소유가 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믿음과 소망과 사랑은 내 소유가 아니에요. 결코 내 소유가 될 수 없어요. 그러면 내 소유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믿음과 소망이 잠시잠깐이라도 생겼다가 없어진다는 말은 나의 소유주가 따로 있다는 뜻입니다.
믿음, 소망, 사랑을 고린도전서에서는 은사라고 합니다. 은사라는 말은 어렵기 때문에 쉽게 은혜라고 합시다. 은혜라는 말도 어렵습니까? 그러면 선물로 합시다. 자, 믿음, 소망, 사랑이 선물인데, 선물을 받았으면 내 소유가 되어야 마땅하지 않습니까? 그렇잖아요. 그런데 이 선물은 얼마나 특이한지 왔다가 사라지고, 사라졌는데 또 나타나고 합니다.
그렇다면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 선물이 아니라 믿음, 소망, 사랑이 주체가 되고 나는 믿음, 소망, 사랑을 담는 그릇이 되고 선물이 되지요.
여러분, 욕망이 대상입니까, 주체입니까? 우리가 보통 욕심이 있다. 욕망이 있다고 할 때 이것을 하나의 대상으로 봅니다. 그런데 이것은 잘못이에요. “나는 욕심이 있어.” “그렇게 이야기하는 너는 뭔데?”
조사를 해보면 욕망과 욕심이 로마서 7장에 의하면 욕망이 하나의 대상이 아니고, “이건 욕심이야. 이건 욕심이 아니야.” 라고 구분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라, 욕망이 내 주체를 형성했어요. 그러니까 욕망으로서 욕망을 파악하니까 그 욕망이 제대로 파악이 안 되지요.
지난 수요일에 이야기했어요. 모든 신학의 문제점은 뭐냐 하면, 그 신학이 제대로 된 것인지를 아닌지를 바라볼 수 있는 제 3의 시선이 신학에 안 들어 있는 것이 문제입니다. 무슨 뜻인지 아시겠습니까? “‘나는 이런 신학을 갖고 있다.’ 라는 것이 문제지”라고 하려면 나를 떠나서 제 3의 시선으로 바라봐야 된단 말이지요.
내가 십자가를 지고 간다면, 나는 지금 십자가를 잘 지고 있어요. 그런데 내가 십자가를 진 것이 제대로 진 것인지 아닌지, 제 3의 시선에 대해서 우리는 모르는 거예요. 이게 문제에요. 그러니까 자기 딴에는 십자가를 진다고 졌지만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지금 사기를 치고 있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베드로가 말하기를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쫓아가겠나이다.” 라고 했어요. 이것이 정말 철없는 소리이고, 또 이것이 인간의 한계입니다.
다시 이야기합니다. 욕망은 대상입니까, 주체입니까? 주체지요. 주체가 되면 “나에게 욕심이 있다.”는 말이 옳은 말입니까, 거짓말입니까? 거짓말이죠. 욕심쟁이가 “나는 욕심이 있다.”는 것은 말이 안 되지요. “나는 욕심이 많아.” 라고 하는 사람은 아직 욕심이 뭔지 몰라요. 그런 소리 한다는 것은 마치 ‘자기는 건전한데 욕심이 있어서 욕심 때문에 내가 괴롭다.’는 이야기잖아요. 글쎄 그것이 불교입니다.
욕심을 줄이고, 욕심을 버리고 스스로 도를 닦는데 ‘그런 짓을 하는 자체가 바로 죄야. 욕망이야.’ 라고 알려줄 타이밍이 어떤 타이밍이냐? 바로 왔다가 사라지는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죠.
왔다가 사라지는 것이 믿음, 소망, 사랑입니다. 그러니 이것은 내 소유가 될 수 없지요. 내 소유가 되면 안 되지요. 나는 욕망이기 때문에. 욕망의 소유는 같은 욕심이에요. “목사님, 저는 믿음 좋아요.” 이건 말이 안 돼요. 나라는 욕망이 내 것을 만들어 놓았으니까 그 믿음도 욕망이 되는 겁니다.
제 논리가 뭐냐 하면, 왔다가 사라진 것은 내 소유가 될 수 없다. 내 소유가 되면 마치 욕망이 혹은 죄인이 “이건 죄야.”라고 하는 말도 안 되는 짓이 어디 있냔 말이지요. 그래서 일반 교회에서 죄라고 하면 만날 거짓말 한 것, 남을 속인 것 등등을 회개하잖아요. 그게 말이 됩니까? 죄인이 죄를 회개하니까 그 죄는 죄가 아니지요.
빌라도가 대아에 손 씻는다고 죄가 없어집니까? 오늘날 교인들이 빌라도가 손 씻는 것과 같은 짓을 하면서 교회 다니고 있어요. “주여,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런다고 자기 죄가 없어집니까?
그래서 왔다가 사라진다는 말은 “나는 믿음, 소망, 사랑을 붙잡을 자격이 없다.”는 말입니다. 정신 차려야 돼요. 어떤 사람은 “주여, 나는 늘 사랑과 소망이 넘쳤으면 좋겠습니다.” 라고 하는데, 그런 생각 하면 안 돼요. 믿음, 소망, 사랑 속에는 내가 죄인으로 허구적으로 만든 주체 말고, 믿음과 소망과 사랑 가운데서 비로소 나라고 하는 주체가 여기에 담겨서 나에게 와요. 이걸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합니다.
1장 12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나의 의뢰한 자를 내가 알고 또한 나의 의탁한 것을 그 날까지 저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함이라.”
여기서 ‘나’가 있지요? 이 ‘나’ 자체가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새로운 피조물이 나에게 주어진 거예요. 그러니까 이 ‘나’는 기존의 ‘나’ 같으면 내가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하나의 대상으로 삼고 내가 장악하는 반면에, 새롭게 주어지는 믿음과 소망과 사랑은 그것을 주시는 그 주체 앞에 나라는 인간이 종속된 한 덩어리가 되어서 나에게 주어지는 거예요.
기존에는 ‘나’가 따로 있고, 그 다음에 욕망, 죄라는 것을 나 바깥에 하나의 대상으로서 “저건 죄야, 저건 욕심이야.”라고 내가 평가했다면, 이런 상태에서 만약에 믿음과 소망을 줘버리면 믿음, 소망, 사랑이 내 소유가 되고, 그렇게 되면 1장 9절의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에 위배됩니다.
하나님의 영원한 뜻이 오게 되면 반드시 어떤 현상이 일어나는가? “넌 아니야.”가 반드시 일어납니다. “하나님, 이번에 내가 죄를 지었습니다.” “네가 죄 지은 것하고 구원은 아무 상관이 없어.” “왜요?” “넌 원래부터 죄인이야.”
모든 좋다는 것은 다 갖고 싶고, 하늘에서 왔다는 것은 다 소유하고 싶어 해요. 그런데 그것을 갖고 있는 나는 욕망 덩어리입니다. 죄인이 좋은 것을 가져봤자 그것은 소용없다는 것이 창세기 3장에서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에덴동산에서 추방한 이유입니다. 추방된 이유가 딱 하나밖에 없어요. 뭡니까? 선악과를 따 먹었기 때문입니다.
선악과를 먹었으면 그것은 원래 하나님이 만든 그 인간은 아니지요. 원래 하나님이 만든 그 인간이 아닌 것이 죄가 되는데, 이 죄인인 상태에서 아무리 고치고 변형을 시켜도 원래의 모습이 아니기는 마찬가지란 말이지요.
그러면 하나님의 뜻은 뭐냐? 영원한 뜻이 주체가 되고, 인간은 하나의 대상이 되면 됩니다. 그러나 내가 하나님을 바라볼 때 하나님은 나의 대상이 되지요. 내가 있고 저쪽에 하나님이 계시면 하나님은 나의 대상이 됩니다. 그렇게 하지 말고 자리바꿈이 있어야 돼요.
[피]라는 책에 보면 이런 것이 있어요. 사도바울이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자기는 하나님의 모든 말씀을 흠 없이 다 지켰지요. 그런데 ‘내가 하나님 말씀 다 지켰다.’는 그 덩어리 자체가 예수님 만나고 난 뒤에는 ‘육’이라고 했어요. 그러니까 사도바울로 하여금 착한 사람을 예수 믿게 하는 것이 아니고, ‘나는 하나님의 모든 말씀을 지켰다.’고 하는 그 사람을 예수님께서 구원했다는 말은, 그 사람 전체가 육이고 그 육의 생각을 현재 우리가 그대로 갖고 있다는 뜻입니다.
육의 생각을 갖고 있어야 ‘네 행함이 아니요’가 의미가 있잖아요. 그러면 육의 생각을 먼저 알아야겠지요. 육의 생각은 뭐냐? 내가 주체가 되고 모든 좋은 것을 이 주체에 끌어 담는 거지요. 하나님의 영생도 내 것, 천국도 내 것, 믿음도 소망도 사랑도 내 것. 모든 것을 자기에게로 끌어당기지요. 이 짓이 바로 선악과 따먹은 채로 생명나무도 따 먹겠다는 짓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지옥 갈 인간들이 그 짓을 계속 하지요. 우리가 교회 다니면서 그 짓을 하고 있잖아요. “하나님, 괴롭습니다. 뭐 즐거운 것 없습니까?” 자기 자리를 바꾸지를 않아요. 자기 자리는 고수하면서 각양 좋은 것은 다 끌어 모으려 해요.
이러한 상태를 사도바울은 ‘육’이라고 했고, 저는 이것을 바로 ‘욕망 덩어리’라고 했습니다. 욕망이라는 것은 죄를 대상으로 봤지 자기 자신을 바로 욕망덩어리로 보지는 않는단 말이지요. 욕망을 자기 주체 속에 집어넣지는 않았단 말이지요. 내 안에 욕망이 끓는다는 말을 안 한단 말이지요.
내가 얼마나 똑똑해서 신학을 하고, 하나님을 알 것인가? 이것만 생각했지 내 자체가 멀미가 나서 어지러운 상태에 있는데 거기다가 하나님을 집어넣고 예수님을 집어넣으면 예수님도 같이 멀미하실 겁니다. 하나님, 예수님, 믿음, 소망을 집어넣어도 지금 내 몸이 망가진 이상은 뭘 집어넣어도 다 토해버립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는가? 13절에 보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으로써 네게 들은바 바른 말을 본받아 지키고”라고 했는데, 우리는 믿음 따먹고, 사랑 따먹고 하잖아요. 이러지 말고 믿음, 사랑이 어디 안에 들어있습니까? 예수님 안에 들어 있죠. 그러면 믿음이 들어온다는 것은 뭐가 들어오는 것입니까? 우리는 내가 주인인 채 있었는데 이제는 예수님이 들어오셔서 예수님이 주인이 된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우리는 주께 의뢰, 의탁한 것이 되지요.
주님께서 들어오시게 되면, 나는 독자적인 입장이 못 되고 그분의 종이 된 것을 나는 부끄러워하지 않고 자랑스럽게 여긴단 말이지요. 그러니까 종이 자기를 위해 염려할 필요가 없지요. 주인이 계시는데 왜 걱정 합니까?
만약 이 집에 파출부가 왔다면, 그냥 청소 끝났으면 가면 되는데 “아주머니, 자식 그렇게 교육시키면 안 됩니다. 살림을 그렇게 살면 안 돼요.” 이러면 안 되지요. 파출부로 왔으면 자기 할 일 하면 되지 왜 시어머니 노릇까지 하려 합니까.
교회 장로, 목사들 다 주의해야 돼요. 예수님 피로 용서 받았으면 종속되어야 하는데, 자기가 시어머니 노릇하면 다른 사람들이 착각을 해요. 예수님 외에 어른이 또 있는 것으로. 착각 하는 사람도 나쁘지요. 어른이 안 보이니까 어른을 대체해 버린 거예요. 목사가 어른이 되고 장로가 어른이 되 버렸어요.
이것을 자리바꿈이라고 하는데, 자리가 바뀌면 안목도 바뀝니다. 세상을 보는 안목이 바뀌어야 합니다. 복이 뭐냐? 소유하는 것. 이런 안목 바뀌어야 되지요. 왜냐하면, 복이 뭐냐 하면, 예수님께서 뭘 복이라고 했습니까?
기존의 신학은 뭐냐 하면, ‘인간은 이성적이고 합리적이고, 짐승은 본능적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인간을 이성을 통해서 하나님 형상을 본받게 한다.’ 이게 기존 신학입니다. 그런데 이성 밑에 뭐가 있느냐 하면 욕망이 있어요. 그래서 인간은 짐승보다 못해요.
신학은 ‘인간은 이성적이다.’ 라는 것부터 시작하면 안 되고, ‘인간은 짐승보다 못한 존재다.’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성경에도 나오지요. “지렁이 같은 너 야곱아(사41:14).” 짐승보다 더 못해요. 지렁이는 죄는 안 짓잖아요.
짐승보다 더 못한 인간이 있는 곳에는 마귀의 지배가 있는 곳입니다. 귀신의 대장은 누구입니까? 악마지요. 악마가 집 주인이고 인간은 그 집에 갇혀 있는 가구들입니다. 이 가구를 빼날 때 예수님께서 어떻게 하십니까?
우리가 이성적인 존재 같으면 “가구야, 나와. 왜 거기 있어.” 이렇게 하면 될 것인데, 인간은 이성적이 아니고 악마에 묶여 있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누굴 상대하십니까? 인간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에요. 예수님은 예수님을 상대하십니다.
베드로가 뭐라고 했습니까? “주여, 그럴 필요까지 있습니까? 우리들이 지키겠습니다.” 그 때 예수님이 “사단아,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베드로는 아무리 자기 자신을 봐도 자신이 사단에게 사로잡힌 것이 안 보여요. 그래서 평소의 예절대로 스승에 대한 존경심을 가지고 이야기를 했어요. “선생님이 고생을 하다니요. 고생은 우리가 해야지요.” 아주 윤리적이고 양심적으로 이야기했는데, 주님은 베드로가 보지 못하는 뭘 봤어요? 자리바꿈이 뭐라고요? 안목 바꿈.
베드로가 하는 소리가 바로 마귀가 하는 소리에요. 그래서 예수님은 “사단아, 물러가라.”고 했어요. 이게 뭐냐 하면, 인간의 밑에 지하층에 가면 악마가 주인공이고 인간은 여기에 갇혀 있는 거예요. 그러면 이런 상태에 있는 자에게 복이 뭡니까? 이곳까지 예수님이 찾아와 주신 것이 복이잖아요.
주여, 마귀에게 사로잡힌 인간 그냥 버려두셔도 되는데 이 지하층까지 찾아오십니까? 이게 빌립보서 2장 8절에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며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우리는 마귀를 이기지 못합니다. 사단이 밀 까부르듯 하려고 베드로를 청구하고, 주님은 베드로가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십니다(눅22:31). 예수님이 베드로를 위해서 기도하니까 마귀는 그 청구서가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알고 포기하지요.
그러니까 인간의 행함이 아니고 하나님의 영원하신 뜻이 베드로를 구원한단 말입니다. 그렇게 되려면 우리가 좋은 것을 챙기는 것이 아니고 자리 바뀜이 일어나고, 안목도 바뀌어야 합니다. 안목이 바뀌면 내 자리 안에 예전에는 마귀가 들어 있었는데 이제는 예수님의 십자가가 있어서 그 십자가에서 용서가 쏟아지고 사랑이 쏟아집니다.
아까 한 이야기 다시 해 보겠습니다. 사랑은 함께 있어도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 오히려 다 보여주고 싶은 게 사랑이에요. 얼마 전에 부부사이에 강간이 성립된다고 판결이 났습니다. 처음부터 그랬을까요? 아니겠지요. 살다보니까 정이 떨어져서 그렇습니다. 남자는 그것도 모르고 “예전에는 좋아하더니 이제는 왜 그러지?” 아내의 말이 “그 때는 사랑이 있었고 지금은 사랑이 없거든”
사람들은 사랑을 받는 것이라고 하는데, 사랑은 노출되는 것입니다.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이 사랑이에요. 사랑은 받아 챙기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사랑 200g. 나는 300g. 이런 양적인 문제가 아니고, ‘나는 주님 앞에서 부끄러워 아니한다. 주께서는 내가 엉터리인 것을 다 아신다.’ 이게 사랑이에요.
자리가 바뀌어야 됩니다. 나는 주님의 대상이 되고, 나는 꽃이 되고 주님은 꽃을 아름답게 보는 하나의 시인이 되고. 김춘수의 시 [꽃]에 이런 구절이 있어요.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하나의 꽃이 되었다.”
꽃이 있어도 아무도 보지 않으면 의미가 없어요. 그런데 누군가가 아름답다고 보면 그 때부터 의미가 생기는 것이지요. 누군가가 꽃을 보고, 꽃은 자기를 봐주는 사람을 느끼고 그렇게 될 때 사랑가운데 서로를 아는 거예요. 이럴 경우에 내 인생은 나의 것이 아니고 주님의 것입니다.
12절을 다시 읽어봅시다.
“이를 인하여 내가 또 이 고난을 받되 부끄러워하지 아니함은 나의 의뢰한 자를 내가 알고 또한 나의 의탁한 것을 그날까지 저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함이라.” 이게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과 소망과 사랑 때문에 그렇다는 말입니다.
아까 한 이야기 다시 해 봅시다.
짐승보다 못한 것이 인간입니다. 악마에게 사로잡혀 있기에 짐승보다 더 못해요. 참새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시편 19편에 해와 달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요. 그런데 유독 인간만큼은 악마에게 사로잡혀 하나님께 욕을 돌리지요. “하나님을 알되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롬1:21) 모든 영광을 나에게 쏟아 붓고 자신이 신인 것처럼 착각하는 인간.
이런 인간 속에 누가 파견됩니까? 디모데야 네가 가라. 가면 어떤 고난이 있습니까? 세상에서 고난 받는다는 것 - 우리가 예수 믿고 난 뒤에 집안에서 설움 받는다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그 사람들이 하루 3끼 먹는데 우리는 굶는다는 그런 의미가 아니고, 같이 밥을 먹고 해도 세상을 보는 안목이 달라요.
지금 사도바울한테는 예수님이 주인공이고 자기는 예수님이 이런 분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하나의 대상이죠. 예수님은 나를 도화지 삼아 그림을 그리지요. 더러운 죄인이 어떻게 구원 받는가? 영원하신 뜻에 의해서 용서와 사랑으로 구원 받는다. 이걸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들은 예수님과 한 통속이지만 그러나 저쪽에 있는 인간들은 악마에게 붙잡혀있으면서도 자립적 존재인 것처럼 착각하고 살아요.
이렇게 마귀에게 속한 자와 예수님께 속한 자가 있는데 여기에서 고난이 옵니다. 2장 3절에 보면, “네가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을지니”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게 디모데가 자리바꿈이 안 일어나고 안목 바뀜이 없으면 이런 고난을 감당 못합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하는 말이 “디모데야, 너도 나처럼 은혜 받았지. 그러면 고난도 감당할 수 있어”
이렇게 은혜 받은 것은 자리가 바뀌어야 됩니다. 우리가 구원 받는 것은 우리의 행함이 아니고, 우리의 고난 때문에 구원 받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영원하신 뜻에 의해서 예수님이 찾아오셔서 우리로 하여금 내 자체를 용서와 자비로, 믿음과 소망으로 우리 속에 주님이 계시니, 앞으로 고난이란 것이 닥쳐와도 도리어 우리 속에 계시는 믿음과 소망과 사랑과 확신, 하나님이 나를 지킨다는 것. 이런 것을 통해서 더욱 더 분명하게 드러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고린도후서 1장 9-10절을 보겠습니다.
“우리 마음에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뢰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뢰하게 하심이라. 그가 이같이 큰 사망에서 우리를 건지셨고 또 건지시리라. 또한 이후에라도 건지시기를 그를 의지하여 바라노라.”
그러니까 항상 자기는 하나의 도화지, 대상이 되고 주체는 예수님이에요. 그 주체가 어떤 분이냐 하면 1장 19절에 보니까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예 하고 아니라 함이 되지 아니하였으니”
그러니까 예수님과 함께 있는 이상은 구원이 안 된다든지, 못 된다든지 실패한다든지 중도에 포기한다든지 하는 것이 있을 수 없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내가 결정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내가 결정했다면 중도에 포기도 할 수 있는데, 내가 주인공이 아니고 주님이 주인공이기에 그렇습니다.
우리는 다만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자비를 비춰주는 거울입니다. 거울보고 뭘 하란 말이 아닙니다. 우리 앞에 그리스도가 걸어가면 그 모습을 비춰주기만 하면 되는 겁니다. 우리는 죄만 짓고 주님은 용서하시는데, 죄인이 용서되는 모습을 보여주면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고난을 받는다고 하니까 사람들이 어떤 식으로 오해를 하는가 하면, 고생한다고 여겨요. 고생과 고난은 달라요. 성경에서 말하는 고난은 예수님과 함께 있음으로 예수님 때문에 발생되는 것이 고난이고, 고생은 내가 내 기대와 소망과 포부가 안 이뤄지니까 마음적으로 고생이 일어나는 거예요. 왜 내 뜻대로 안 되나? 하면서.
우리의 진정한 소망은 안목 바뀌기와 자리 바뀜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항상 ‘내가 주인공이 아니다. 주님이 주인공이고 나는 주님을 보여주는 거울이다.’ 이렇게 될 때 이것이 바로 주님이 주신 축복입니다.
원래 축복이라는 것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축복을 받았지요? 좋았겠습니까, 무서웠겠습니까? 무섭지요. 사람이 언제 안 무서운가 하면, 내 예상대로 될 때는 안 무서워요. 그런데 예상 밖의 일이 벌어지면 무서워요. 오랜만에 절벽위에 선 사람은 무섭습니다. 그런데 평생을 절벽위에 오른 사람은 절벽이 하나도 안 무섭습니다. 왜? 익숙해 졌으니까.
우리가 진짜 복을 받으면 당황스럽습니다. 복이라는 것은 항상 내가 기대하지 않는 방법으로 와요. 내가 예상한 것은 복으로 안 와요. 예상한 대로 오면 허무해져요. 그런데 내가 예상치도 않았는데, 하나님께서 어떤 고난을 주실 때는 다른 창문을 열어서 피할 길을 따로 마련하시지요. 그 창문을 우리는 사전에 몰라야 됩니다. 왜? 내가 주체가 아니기 때문에. 내가 내 인생의 주인공이 아님을 깨닫게 하는 것이 복이기 때문에 ‘네가 주인공이 아니야.’라는 복을 주기 위해서 우리로 하여금 내가 기대한 10가지가 있다면 그 10가지를 다 피해서 예상 밖의 길로 인도하시는 거예요.
그렇게 해서 우리로 하여금 깜짝 놀라게 만들고 당황스럽게 만들면서 감사의 눈물을 흘리게 해요. ‘내가 또 주인공 노릇 했구나. 그것 때문에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셨구나.’ 하는 것을 다시금 깨닫게 하는 겁니다.
고생을 이기는 방법은 독하면 돼요. 독한 감기를 이기는 방법이 뭘까요? 독한 소주에다 고춧가루 타서 먹으면 되지요. 고생은 독하면 이길 수 있지만, 고난은 낯설면 돼요. 그래서 디모데와 사도바울이 가는 길은 항상 자기들이 예상 못한 사태가 벌어져요. 그렇게 해야 내 인생은 내가 주인공이 아니고 예수님이란 것을 사건과 사태를 통해서 새롭게 깨닫게 됩니다.
며칠 전에 [적벽대전 2]를 봤습니다. 병사들이 화살이 없다고 하니까 제갈공명이 사흘 만에 화살 10만개를 만들어내겠대요. 그래서 주유란 사람이 “당신이 화살 10만개 못 만들면 목을 치겠다.”고 했어요. 그런데 기한 날짜가 가까워 오는데 아무 것도 안 하는 거예요. 사흘이 다 되었는데 제갈공명이 날씨가 안개가 낀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