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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05칠곡강의(뒤에서본한국교회)38-로마서4(강의정리)자유게시판로마서

05칠곡강의(뒤에서본한국교회)38-로마서4(강의정리)

이름 : 구득영(IP:203.223.97.234)

05칠곡강의 [뒤에서 본 한국교회] 38 - 로마서4

05,05,28 강의 이근호, 정리 구득영

◈ 로마서는 어려워 ??

* 질문 - 제가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리는데, 그런데 가만히 보면 형식과 절차에 얽매여서 드린다는 것입니다. 물론 얽매인다고 하면 좀 그렇지만, 그런데 문제는 그러한 형식과 절차가 새로운 틀을 만들어서 복음을 가리는 것은 아닌지 의문점이 들어요. 목사님, 그렇지 않나요?

그것은 아주 제대로 보았는데, 그런 형식과 절차가 복음을 가린다는 말이다.

* 질문 - 그런데도 우리가 그러한 형식과 절차를 굳이 고집을 하는 이유는 무엇이지요? 그것이 또한 인간의 한계인가요? 그리고 목사님이 계시는 우리교회에도 그런 형식과 절차가 있나요?

그것은 누가 고집을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이 세상에 있을 동안에는 그 무엇을 해도 그런 형식과 절차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교회는 두말할 필요도 없고, 다른 무슨 교회에서든지 마찬가지라는 말이다.

◈ 힘은 원래 '법'에서 !!

그런데 인간이 왜 그러한 형식과 절차를 가지는고 하니까, 그것이 자기에게 힘이 된다는 것이다. 이런 힘은 원래 '법'에서 나오는데, 즉 규칙이나 혹은 게임의 룰, 모두가 같은 말인데, 바로 그러한 것 안에 힘이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 힘은 자기를 정당화하는데, 왜냐하면 그 힘은 자기 존재의 힘이니까 말이다. 즉 "내가 이렇게 행동하는 것이 내가 보기에 정당합니다" 라고 할 때, 그것은 곧 "내 규칙은 이러합니다" 라는 의미라는 것이다.

◈ 그런데, 예수님의 법은 힘이 없어 !!

우리가 알다시피 힘이 없는 법은 법이 아닌데, 마치 학생들이 시험을 치지 않으면 공부를 하지 않는 것과 같다는 말이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공부하려는 예수님의 법은 힘이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쉽게 무시를 당하는데, 왜냐하면 힘이 없는데 누가 그 법을 지키려고 하겠느냐는 말이다.

* 질문 - 제가 목사님에게 주섬주섬 주워 들은 것을 가지고, 어제는 이런 힘과 수학을 결부를 시켜서 학원에서 강의를 했는데, 제법 좋았던 것 같아요. 지금 여기서 배운 것만으로 말입니다.

참 잘하셨는데,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닌데 말이다. 물론 이런 강의도 참으로 소중하지만, 혹시 시간이 되면 관련된 한번 책들을 찾아보라는 것이다. 사실상 그런 것을 강의하려면 인생을 정치판에서 깊이 연구를 하고, 또한 법에 대해서 공부를 해야 하는데 말이다.

◈ 존 롤드(?)'의 사회정의 - 도덕은 아니잖아 !!

이왕 말이 나왔으니까 이 법에 대해서 조금만 더 이야기를 해보면, '존 롤드(?)' 라는 사람은 이것을 '정의' 라고 했는데, 즉 '사회의 정의로움' 이라고 말이다. 이 사람은 이 사회정의를 분배정의로 보았는데, 즉 그 사회에서 경제적 이익을 얼마나 균등하게 나누어주었는지, 그렇게 분배정의를 이야기했는데, 그런데 그런 분배정의를 주장하면서 도덕을 그만 밟아버렸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도덕을 고려하게 되면 분배정의가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했는데, 상당히 새로운 이슈라는 말이다. 우리들의 상식은 오히려 도덕적으로 해야 제대로 분배가 이루어진다고, 즉 도덕이 정의라고 보는데 말이다. 그런데 이 사람은 그런 도덕이 정의가 되면 사회정의가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했는데, 그러니 얼마나 좋은(?) 아이디어냐는 말이다.

◈ 존 로크 - 분배를 통해서 소유의 정당성을 !!

그런데 그렇게 도덕이 정의가 되면 사회정의가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한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바로 그것이 '존 로크' 라는 사람에게서 나왔는데, 그 사람은 뭐라고 주장을 했는고 하니까, 그렇게 분배를 한다는 것은 그 앞에 먼저 그만큼 소유가 있다는 것이고, 그것은 바로 그것을 소유한 소유주가 또한 있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제대로 분배가 되려면 소유주의 정당성을 보장을 해주어야만 하고, 그리고 나서 분배정의가 실현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강제로 그런 소유를 모두 없애버리면 그것은 김일성 집단이 아니고 무엇이냐는 말이다. 그것을 좋은 말로 '사회주의' 라고 하는데, 그렇게 되면 도대체 사람들이 무엇 때문에 일을 하느냐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학교에서 시험은 쳤는데 성적도 발표하지 않고, 또한 성적표도 전혀 나누어주지도 않고, 그리고 자기가 몇 등을 했는지 그 등수도 전혀 매기지 않고, 그런 등수조차도 의미가 없다고 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런 시험을 누가 밤을 새워가면서 열심히 공부해서 치겠느냐는 말이다. 공부자체를 좋아하는 똘아이가 아니라면 말이다.

◈ 헤겔 - 법이란, '이제, 그만하세요' !!

헤겔에 의하면, 법이라는 것은 도덕을 위한 법이 아니고, 악의 확산을 저지하는 용도라는 것이다. 즉 착한 일을 하라고 법이 있는 것이 아니라, 나쁜 일을 조금이나마 줄이기 위해서 법이 있다는 말이다. "당신, 이제 그만 좀 하세요" 라고 말이다. 즉 사람들이 자기 마음대로 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 법이 있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담배를 피우는 것이 뭐가 나쁩니까?" 라고 하는데, 하지만 깊은 산 속에서 자기 혼자서 담배를 피워도 나쁜데, 왜냐하면 옆에 나무가 있고, 그 나무가 니코틴의 악영향을 입기 때문에 말이다. 또 꽁초를 던지면 산불이 날 수도 있고 말이다. 하물며 길에서 담배를 피우는 것을 오죽 하겠느냐는 것이다. 300미터는 그냥 퍼져버리는데, 그러니 간접흡연이 된다는 말이다.

◈ 자유권은, 상대방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범위에서 !!

그런데 그들은 이렇게 담배를 자유롭게 피우는 것을 뭐라고 하는가? '자유권', 혹은 '흡연권' 이라고 하는데, 그런 것을 보호하는 단체도 있고 말이다. 하지만 법치국가에서 '자유' 라는 이야기를 할 때는, 반드시 피해를 주지 않는 범위 내에서 자유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술을 마시는 것은 자유이니, 그런 자유를 달라" 라고 했을 때, 그런데 만약 음주운전을 해서 생판 모르는 다정한 신혼부부를 죽였다고 했을 때, 그것을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강제로 그런 놈들은 제거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남에게 피해를 주니 말이다.

다시 존 로크로 돌아와서, 그에 의하면 소유주가 가진 소유의 법적인 정당성을 인정해줄 때, 그것이 분배가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어떻게 돈을 벌었는지 그것은 '쉬쉬' 하고, 그것과 상관없이 제대로 잘 나누어주면 그것으로 그냥 넘어가자는 말이다.

◈ 존 로크 - 그냥 시장경제에 맡겨라 !!

그러니 당연히 여기에 대한 반발이 있는데, '로직(?)' 이란 사람이 여기에 대해서 반론을 펴고 했는데 말이다. 그런 그렇고, 아무튼 이 존 로크의 근본적인 정신이 무엇인고 하니까, 경제학에서는 이것을 '자유주의 사상' 이라고 하는데, 즉 그냥 시장경제에 맡겨두자는 것이다.

◈ 혹시 페스탈로치를 아세요?

교육학에 '페스탈로치' 라는 양반이 있는데, 아마 다들 조금은 알지 싶은데, 그런데 이 사람은 고아원을 세워서 전쟁고아를 돌본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독일의 아동 교육학에 있어서 뼈대를 처음으로 이루었다는 것이다. 또한 독일 교육학의 법적인 체제를 이룬 사람이고 말이다.

그의 주장에 의하면, 인간은 가만히 두면 자기 짐승이 되는데, 그러니 사회에서 그렇게 자기 멋대로 하도록 가만히 두면 어떻게 되겠느냐는 것이다. 짐승도 그렇게 하면 울타리를 만들어서 가두는데 말이다. 그렇게 강제로 막는 것이 바로 법이 된다는 말이다.

그런데 페스탈로치에 의하면, 그렇게 함부로 강제로 법을 집행하면 곤란하다는 것인데, 왜냐하면 그는 경찰관이 아니라 교육자이니 말이다. 그리고 인간에게는 다행히(?) 그런 법을 지켜야 되겠다고 하는 잠재적인 이성이 누구에게나 다 들어있다는 것이다.

◈ 교육은, 기존의 것에 자극을 주어서 !!

그러므로 교육은 새로운 것을 더 추가하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아동 속에 들어있는 잠재력에 자극을 주어서 개발을 하게 되면, 그렇게 되면 자율적으로 남의 피해도 생각하게 되고, 또한 자율적으로 남을 배려하는 인간이 되게 하는 것이 곧 교육의 목표라는 것이다. 자율적으로 말이다. 그러니 자연히 아동에게 관심을 가지게 되는데, 가능한 한 어릴 때부터 그런 교육을 시켜야하니 말이다.

◈ 인간은 기본적으로 짐승이기에 !!

물론 짐승은 본능적인 것밖에 없는데, 그런데 이런 짐승에서 인간이 되는 것은 이성이 있어야 하는데, 무엇이 옳은지를 따지고 계산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만약에 이것을 아동들에게 교육을 하지 않으면 무엇이 옳고 그름을 모르게 되는데, 즉 판단력이 흐려진다는 말이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짐승이기 때문에 본능을 발휘하는데, 그러니 그 본능에서 자유가 주어지게 된다면 그야말로 엉망이 된다는 말이다. 초등학생들이 PC게임에서 배운 운전실력으로 자동차를 몰고 나와서 남의 차를 다 긁어버리고 말이다. 물론 운전면허시험도 전혀 치지 않고 그렇게 한다는 것이다.

◈ 결국은 자기밖에 모르니 문제가 !!

페스탈로치나 교육학자들이 생각한 것이 바로 그것인데, 인간은 아동에서 어른이 되면서 세상을 바라보는 안목이 넓어지게 되는데, 그런데 안목이 좁다는 것을 결국은 무슨 말인가? 자기밖에 모른다는 것이다. 자에게서 타인에게 가는 그 길이 좁다는 것이니 말이다.

그렇게 자기만 편하면 된다고 하는 것은, 즉 자기밖에 모르는 것은 법이 없다는 말이 아니라, 자기가 편한 그 범위 내에서만 법이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자기 범위 안에서 자기 법을 세우는데, 즉 "저에게는 이것이 규칙입니다. 더 이상 저를 간섭하지 마세요" 라고 말이다.

그런데 아동에게 이것이 강해지면 그것이 '자폐증'이 되는데, 또한 그것이 커지면 '편집증'이 되는데, 그렇게 자기에게 몰두하다니 전혀 이성적이 아닌데, 즉 무조건 "내 욕망이 무엇을 요구하는가?" 라는 것만 따진다는 말이다. 그러니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다하려고 하고, 또한 그것을 부모에게 요구한다는 것이다.

◈ 자폐증이 편집증을, 편집증이 정신분열증을 !!

그런데 그렇게 하다보면 세상만사가 자기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되는데, 즉 자기는 좋은 대학에 가고 싶지만, 수능점수는 엉망이고 말이다. 바로 이럴 때 생기는 것이 바로 '정신분열증' 이라는 말이다. 이 정신분열증은 사회에 대한 이유 없는 반항과 공격성향을 나타낸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폐증이 편집증을 낳고, 편집증이 정신분열증을 낳는다는 것이다.

이런 것들이 발생하는 원인이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안목이 좁아서, 즉 자기밖에 몰라서 그렇다는 말이다. "내가 이렇게 행동하면 남들이 어떻게 생각할까?" 라는 것이 없다는 것이다. 그렇게 안목이 좁고 마음의 상처가 있으면, 그것을 '상흔(傷痕)' 이라고 하는데 말이다.

그런 것들이 발생하는 이유가 보통 유전적 요인을 70%정도로 보고, 또 환경적 요인을 30%로 본다는 것이다. 그러니 유전은 그렇다고 치더라도, 환경적 요인 30%는 어떻게 해서 그런 현상들이 생겼는가? 그것은 바로 제가 보기에는, 어릴 때부터 남들에게서 공격을 받은 경험이 있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이라는 말이다. 남에게 공격을 말이다.

◈ 사기를 당한 놈이 또 사기를 !!

이게 무슨 말인고 하니, 예를 들어서, 사기를 당한 경험이 있는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사기를 친다는 것이다. 물론 "내가 사기를 당했구나. 우짜겠노? 그냥 내가 참지" 라고 겉으로 말은 하겠지만, 그러나 그것이 내면에서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히려 내면적으로는 "내가 당한 만큼 갚아주리라" 라고 다짐을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기를 당한 사람이 사기를 친다는 말이다.

왜 군대에 가면 무엇을 잊어버리면 다른 사람에게서라도 훔쳐오지 않는가? 바로 그런 형태로 나타나는데, 남자의 경우에는 아내에 대한 구타가 그런 것이고 말이다. 물론 아내를 때린다는 것은 그만큼 사랑한다는 의미가 되기도 하고 말이다. 즉 "니는 내 것이야" 라는 것인데, 즉 "너는 철저하게 나에게 길들어져야 한다" 라는 것이다.

* 질문 - 안목이 좁아지면 편집증, 즉 집착을 한다는 말이지요?

안목이 좁아지면 점점 자기에게 집착을 하는데, 모든 것을 자기 중심으로 보게 된다는 말이다. 아내를 구타한다는 것은 그만큼 사랑한다는 것인데, '사랑한다' 라는 것이 말로 안 되니, 마구 패면서 그렇게 사랑한다는 말이다.

* 질문 - 그러면 때리지 않으면 사랑하지 않는 것인가요?

아내를 때리지 않으면 그 감정이 다른 곳으로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마치 마일리지 점수처럼 누적이 되면서 다른 형태로 드러나는데, 집에 늦게 들어온다든지, 바람을 피운다든지 하는 것으로 말이다.

* 질문 - 그러면 눈에 멍이 들도록 얻어맞은 여자는, 그만큼 남편의 사랑을 많이 받은 것인가요?

물론 여자가 원한 것이 아니라 남자가 그렇게 하는데, 자기 룰은 자기 정당성이니 말이다. 즉 아내를 때리는 것이 사랑하기 때문에 때리지, 미워서 때리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즉 자기의 정당성인데, 그것은 바로 여자는 철저하게 자기의 여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인간은, 누가 뭐라고 해도 자기밖에 몰라 !!

그러니 그런 사람은 어릴 때부터 철저하게 폐쇄적이고, 자기밖에 모르는 그런 집안환경에서 자랐다는 말이다. 그러니 힘이 곧 정의인데, 그러니 결코 정의로움이 착함이 아니라 말이다. 그러한 힘이 사회에서 행세를 하면 진리가 되고, 가정에서 행세를 하면 정의가 된다는 것이다.

◈ 교육학자들, 그래도 교육을 시키면 ??

그러니 이 인간사회가 얼마나 개판(?)인지, 그래서 교육학자들은 인간이 교육을 받지 못해서 그렇다고 한다는 말이다. 어떻게 보면 일리가 있는 말인데, 교육이라는 것은 "남들이 어떻게 생각하는가?" 라는 것까지 다 포함하는 것이니 말이다.

* 질문 - 그런데 교육을 받아도 짐승과 같은 인간들이 많지 않습니까?

제가 지금 그것을 이야기하려고 하는데, 교육학자들은 인간이 교육을 받지 못해서 그렇다고 하지만 말이다. 그러나 '아담 스미스' 라는 경제학자는 주장하기를, 인간이 아무리 교육을 잘 받아도 행동을 제대로 하는 것은 경제적인 여유가 있을 때 그렇게 한다는 말이다. 즉 돈이 있을 때는 신사이고 요조숙녀라는 말이다.

◈ 아담 스미스 - 그러나 인간이 돈이 없으면 !!

그러나 경제적인 어려움이 닥치고 생활고에 시달리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신사고 숙녀고 나발이고 간에 자기가 그동안 교육을 받는 그 명석한 지식과 두뇌를, 일단 자기부터 살고 보자는 식으로 나아간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기밖에 있는 사람에게는 일단 복수를 하고, 또한 사회에 대해 보복을 하면서, 그렇게 극단적인 자기 중심의 입장으로 돌아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것은 교육학도 경제학도 사회학도 아니라는 말이다. 오직 십자가라는 말이다. 그 십자가 앞에서 자기가 얼마나 잘난 체를 하고 있는 놈인지, 마치 그것을 'X-RAY'를 찍듯이 찍어서, 자기가 얼마나 더러운 인간인지를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내를 보더라도, 마치 벌레 씹은 표정으로 바라보지 말고, 아내의 이마에 십자가가 새겨져 있다고 여기고 쳐다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감히 아내에게 손찌검을 하겠는가? 그렇게 해도 아내를 때린다고 한다는 것은, 그것은 바로 아내를 자기에게 붙여준 예수님을 때리는 것과도 같다는 말이다. 예수님을 말이다.

* 질문 - 그러니 우리가 손가락질을 할 이유가 못되는 것이, 모두가 다 똑같다는 말씀이지요?

물론 그러한데, 인간은 자기 법을 남에게까지 강요하면서 살아간다는 것이다. 그래서 마누라를 때리고 스카프를 사주고, 또 때리고 목도리를 사주고 비싼 곳에 가서 저녁도 사주고 한다는 것이다. "미안해. 내 마음이 아니었어" 라고 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후회는 하지를 않는데, 다만 채찍과 당근으로 길을 들인다는 것이다.

◈ 여보, 미안해 !! 메롱 ??

그런데 그렇게 아내를 길 들이려고 하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그만큼 자기 자신의 허전함을 채우지 못해서 그렇다는 말이다. 그래서 그 모자라는 2%를 아내가 채워주기를 바란다는 것이다. 사실은 모자라는 것이 2%가 아니라 그 반대로 98%이겠지만 말이다.

그렇게 아내에게 자기의 모자람을 채워줄 것을 요청하는데, 요청하는 방법이 바로 구타라는 말이다. 그렇게 길을 들여서, 자기가 집에 오면 마누라가 한복을 입고 자기에게 무릎을 꿇는 식으로 자기의 모자라는 부분을 보충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남자만 그런 것이 아니라 여자의 경우도 마찬가지이고 말이다.

* 질문 - 그런데 목사님은 말씀을 항상 극단적으로 하시는 것 같은데요? 방금 예를 든 것도 사실은 불과 2%(?) 정도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닌가요?

하지만 바로 2%의 인간이 자기 밑바닥에 있는 것이 독특하게 튀어나온 경우이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성적으로 그것을 감추고 있다는 것이다. 없는 것이 전혀 아니고 말이다. 그런데 사람이 그렇게 감추고 감추고 하다보면, 그렇게 감추는 무게가 너무나 무거워서 극단적인 방법으로 풀게 된다는 말이다.

* 질문 - 목사님께서 그렇게 극단적으로(?) 예를 들어서 말씀을 하니, 물론 머리 속에 잘 들어오기는 하는데, 그래도 아주 일부분을 마치 전체인 것처럼 말씀을 하시니 좀 그렇다는 말입니다.

◈ 우리는 왜 2%에 집착할 수밖에 없는가?

물론 통계학에서는 90%가 진리이고 나머지 10%가 특수한 경우라서, 그래서 10%는 보통 해당이 되지 않는다고 여긴다는 것이다. 하지만 사실을 그 속을 파헤쳐 보면, 90%의 사람들에게도 그 10%의 것이 다 들어있다는 것이다. 다만 90%는 그것을 숨기고 있지만, 그런데 나머지 10%는 자기 성질 때문에 숨기를 못하는데, 정신 분열증도 그렇고 말이다. 하지만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모두가 다 들어있는데, 다만 윤리와 도덕으로 감추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제가 그렇게 이야기할 수밖에 없는데,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는 90%, 아니 98%가 되더라도 그게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은 그 나머지 2%를 항상 보신다는 말이다. 그러니 우리 경우에 모두 그렇게 개판이 되어야 하는데, 그렇게 되지 않은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하심으로 인한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보자는 말이다.

그런데 그렇지 않고, 자기를 2%가 아닌 98%의 괜찮은 인간으로 자기를 바라보게 된다면, 그렇다면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와 그 인도하심이 도대체 무슨 소용이 있느냐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성경에서 말하는 '교만' 인데, 즉 하나님 없이도 자기는 얼마든지 자기 힘으로 살아갈 수 있다는 말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우리의 발걸음도 세신다고 하는데, 그렇게 하나님께서는 우리 자신보다도 우리를 더 세밀하게 관심을 가지고 있는데, 우리는 우리의 발걸음을 센 적이 없지 않느냐는 말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햇빛을 주시는데, 과연 그 햇빛으로 인해 감사한 적이 있느냐는 것이다.

그리고 이 세상의 그 어떤 화려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심지어 솔로몬의 그러한 영광조차도 들에 핀 백합화보다도 아름답지 못하다고 했는데, 그것이 도대체 무슨 의미인가? 그것은 바로, 이 세상의 모든 인위적인 것은 하나님 앞에서 결코 통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 주여, 제가 비록 이런 인간이지만 !!

그렇다면 어떤 사람이 아름다운가? "비록 제가 이런 인간이지만, 하나님께서 친히 입혀주시는 인생을 살게 해주시니 감사합니다" 라는, 그런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사람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피조물다운 것이지, 자기 잘남을 말하는 것은 결코 아니라는 것이다.

◈ 누가복음 7장의 어떤 여인처럼 !!

누가복음 7장에 보면, 어떤 여인이 눈물을 흘리면서 자기 머리카락으로 예수님의 발을 씻겨드렸는데, 그때 교양이 있고 신사적인 바리새인이 옆에서 보고 비웃었다는 말이다. "도대체 여자가 이 대낮에 저게 무슨 짓이고? 그 비싼 향유를 발에 붓고, 생쇼를 다 하는구나" 라고 말이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뭐라고 하셨는가? "많이 용서를 받은 자가 많이 사랑한다" 라고 하셨다는 것이다.

(눅 7:37) 그 동네에 죄인인 한 여자가 있어 예수께서 바리새인의 집에 앉으셨음을 알고 향유 담은 옥합을 가지고와서
(눅 7:38) 예수의 뒤로 그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씻고 그 발에 입맞추고 향유를 부으니

그러므로 그런 예수님의 말씀이 바리새인에게는 어떻게 말씀하는 것이 되겠는가? "니가 나에게 용서함을 받는 적이 있는가? 너는 너의 잘남으로 나름대로 나에게 점심을 대접을 한다고 하지만, 그러나 그것이 도대체 무슨 소용이 있는가?" 라고 한다는 말이다.

그러니 우리가 성경공부를 하면서도 항상 "하나님은 어떻게 생각하시는가?" 라는 것에 초점을 맞추어야만 하는데, 그러니 "그래도 나는 이 정도 되는데" 라고 생각하지 말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보시는 그 기준은, 즉 하나님의 안목은 우리와는 전혀 다르다는 것이다.

◈ 그런데 왜 중앙에 '나' 자신이 있는가?

제가 지금 안목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이 바로 그런 점인데, 인간이 제 아무리 안목이 넓고 교육을 제대로 받아도, 그 중앙에 바로 '나' 라는 것이 있기 때문에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왜 중앙에 '나' 라는 것이 자리를 잡고 있는가? 인간은 선악과를 따먹고 난 다음에 그만 독보적인 존재가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하나님이고, 예수님이고, 성령님이고 간에, 자기가 먼저 있고 난 다음의 일이란 말이다.

그렇게 "이 세상에서 내가 제일 귀하다" 라는 것을 아주 천박하게(?) 드러내는 것이 자폐증과 같은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아주 신사숙녀로 드러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은 어디까지나 호주머니 사정이 좋을 때 이야기이고, 그때는 남에게 자선도 베풀고 구제도 하지만 말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으면 자기 앞에 누가 보이든 간에 한 대 쥐어박고 싶다는 것이다. 그런데 제일 만만한 것이 마누라이니 동네북처럼 때리고 말이다.

◈ 인간은 두 얼굴의 사나이 ??

그런데 이러한 두 가지 중에 어느 것이 본심인가? 항상 그런 두 가지가 다 잠재되어 있는데, 본인은 평소에 교양이 있는 그 모습이 자기의 본래 모습이라고 점수를 후하게 준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하나님께서 돈을 허락하고 건강을 허락해서 그런 것이지, 그렇지 않고 정말 모든 상황이 다 악화가 되었다고 하면, 그때 우리 자신의 모습은 어떠한지, 바로 그런 상태에서 우리를 보는 것이 하나님의 입장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가면을 벗듯이 항상 우리의 자신에게 씌어진 껍데기를 벗겨내어야 하는데, 그렇게 벗어버리면 그것처럼 홀가분한 것이 없다는 말이다. 그런데 언제나 벗지 않으려고 몸부림을 치니까 온갖 문제들이 다 따라오고, 또한 생긴다는 것이다.

◈ 아, 구름 속을 걷고 싶어 ??

그렇게 자기가 죄인임을 깨닫게 되면 그야말로 기분이 째지는데, 산 위에 올라가서 구름 속에 자기 자신을 던지고 싶다는 것이다. 그렇게 뛰어내려서 죽어도 좋다고 할 정도로, 그럴 정도로 자기가 무가치한 존재임을 깨달을 때, 그때만큼 자유를 만끽할 때가 없다는 말이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라 "나는 가치가 있어. 나는 너무 고귀해" 라고 하면, 그것이 바로 비개 덩어리가 되어서 자기 몸을 짓눌러서, 나중에는 숨쉬기조차도 힘들어진다는 것이다. 마치 몸무게가 300KG가 넘어서 기중기가 아니면 자기 몸을 움직이지 못하는 사람처럼 말이다.

* 질문 - 그러니 자살하는 사람들은 그렇게 자기를 포기하는 것이 아닙니까?

자살은 전혀 그런 것이 아니고, 방금 제가 말한 것은 그런 이 세상 사람들이 하는 자살을 이야기한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오히려 그런 자살은 자기 잘남의 극단적인 표현이라는 것이다. 자기 말고는 그 누구도 믿지 못하기에 자살을 한다는 말이다.

◈ 로마서 7장을 하기 이전에 !!

오늘은 로마서 7장을 강의할텐데, 그러나 그 이전에 아직 몇 가지를 더 이야기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로마서 7장에 너무나도 심오하기 때문에, 그래서 신학자들이 이 로마서 7장을 손대기를 주저한다는 것이다. 이 로마서 7장에서 무엇이 제일 난해한고 하니, 일단 7장 7절을 한번 보자.

(롬 7:7)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

◈ 로마서에서 가장 난해한 7장 7절을 !!

그것이 여기 7장 7절 마지막에 나오는데,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 라는 구절이란 말이다. 이것은 바로 "내가 나를 아는가?" 라는 문제인데, 과연 인간이 자기가 자기 자신을 잘 알까요? 박 집사님은 어떻게 자기 자신을 잘 아는가요?

* 질문 - 어떤 경우에는 저는 제가 왜 그렇게 하는지 전혀 감이 잡히지 않을 때가 있어요.

그것은 바로 '나' 라는 것이 없기 때문인데, 그런데 인간들은 '나'가 없지만 일단 그렇게 '나' 라고 상정을 해놓아야 그 다음에 정리가 된다는 말이다. 즉 우리 인간들은 그런 '나'가 있다고 자꾸만 우기고,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 인간에게 그런 '권리'가 없다고 하신다는 것이다.

◈ 인간은 걱정하고 두려워할 권리가 없어 !!

성경은 우리 인간들을 어떻게 보는고 하니, 무엇을 걱정하고, 고민하고, 두려워할 자격이 없다고 본다는 말이다. 즉 그럴 권리가 전혀 우리 인간에게 없다는 것이다. 두려워할 권리도 없고, 걱정할 자격도 안 되는데, 그런데 우리는 걱정근심을 도맡아놓고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이 보시기에, 우리 인간이 걱정을 하는 이유가, 우리 인간이 스스로 걱정을 만들어놓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걱정을 하는 자아를 만들어놓으니, 그 자아가 공격도 하고 방어도 해야 하니, 그러니 그 자아가 얼마나 걱정 근심이 많겠느냐는 말이다.

◈ '자아'는 마귀가 던져준 것 !!

이 자아가 만들어진 이유가, 그것이 마귀로부터 만들어진 것인데, 그러면 악마가 없는 자아를 왜 만들었는가? 그것은 바로 "너도 신이 한번 되어봐" 라는 것인데, 그러면 신이란 무엇인가? 신은 피조물이 없는 가운데 있는 것인데, 그러니 인간보다 더 원천적이라는 말이다. 피조물이, 즉 '내'가 없는 가운데 신이 계신다는 것이다. 이것을 믿는 것이 참된 믿음이고 말이다.

◈ 요한 복음 1장 - 태초에 생명이 !!

요한복음 1장에 보면 "태초에 생명이 있었다" 라고 했는데, 그것이 얼마나 놀라운 말씀이냐는 것이다. 보통 사람들은 생명은 어디에 있다고 이야기하는가? 자기 자신이 있을 때, 비로소 거기에 자기 목숨인 생명이 있다고 하는데, 하지만 성경은 그것이 엉터리라는 것이다. 즉 피조물이 있기 이전부터 이미 생명은 따로 있었다는 말이다.

(요 1:4)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그러니 자기 생명이 없어져도, 태초의 그 생명이 자기 생명을 다시 만들어내면 되지 않느냐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기 자신을 두고 생명이고 부활이라고 하셨다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재가 되고 티끌이 되어서 사라진다고 해도 생명이 되시는 그분의 계획이 따로 존재한다면, 그 설계도에 의해서 우리 자신은 다시 만들어지고 부활이 된다는 말이다.

* 질문 - 그러면 생명과 하나님을 같은 개념으로 보아야 하겠네요?

요한복음에서는 그러한데, 그러니 아무튼 우리 자신을 좀 놓아버리라는 것이다. 한번 살겠다고 그렇게 자꾸만 끌어당기고 감싸지만 말고 말이다. 우리 인간이 24시간 동안 하는 일이 무엇인고 하니, 자기 자신을 구상하고 만드는 일인데, 즉 계속해서 자기 자신을 다듬는 작업을 한다는 것이다.

인간은 그렇게 자기 자신을 다듬고 정돈하고 규정시켜서, 물론 그 다음에는 광을 낸다는 말이다. 그런 경우에 당연히 여자는 돈이 좀 더 많이 들겠지만, 왜냐하면 남자는 구두만 광을 내면 되는데, 여자는 온 몸 전체를 다 광을 내어야 한다는 것이다.

◈ 마네킹은 주인이 입혀주는 옷만 !!

그런데 주인의 입장에서는, 그렇게 자기가 스스로 꾸미고 광을 내는 마네킹이 있다고 하면, 아마 갖다 버리지 않겠느냐는 말이다. 왜냐하면 마네킹은 주인이 옷을 입혀주는 그대로 해서 서있어야 하는데 말이다. 그런데 그렇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옷을 가져다가 입고 폼을 잡고 서있다고 한다면 주인이 어떻게 하겠는가? 부수어서 창고에 넣어버리지 않겠느냐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보시기에 우리 인간은 그야말로 마네킹인데, 그래서 하나님이 입혀주시는 들에 핀 백합화를 입고 감사하면서 서 있으면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자꾸만 자기가 알아서 옷을 주섬주섬 자기 마음에 드는 옷을 입으려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당연히 쇼윈도우에서 그만 탈락이라는 말이다.

◈ 도대체 니, 뭐꼬 ??

마태복음 6장에 보면,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 라고 하시는데, 물론 요즘은 몇 백만 원씩 들여서 호르몬 주사도 맞고 하는데 말이다. 이것은 무슨 의미인가? 이미 주께서 그렇게 한 자나 키워준 키인데, 그런데 그것을 가지고 만족해하지 못하고 더 커야만 한다고 우기는 "너는 도대체 누구인가?" 라는 것이다.

(마 6:27)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
(마 6:28)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다시 말해서, 그것은 신이신 하나님 자신이 알아서 할 문제인데, 그런데 하나님도 아니면서 신의 흉내를 내면서 자기 키를 더 키우겠다고 하는, 그런 우리 인간이 도대체 누구인지, 바로 그것을 묻고 계신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인간은 이제 신과 경쟁에 들어가고 주도권을 다투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악마의 모습이라는 말이다.

◈ 인간의 몸은 결국 회수를 당해 !!

그러므로 신앙은 "내 것이 없다" 라는 것에서 출발을 해야 하는데, 그것을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회수' 라고 하는데, 즉 인간은 죽을 때에 비로소 자기가 자기 것이 아님을 안다는 것이다. 물론 죽기 이전에는 자기는 자기 것인 줄로만 알다가 말이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죽고 난 뒤에 자기를 좋은 비싼 대리석에 넣어달라고 하는데, 아니 죽고 난 뒤에 대리석에 들어가든, 그냥 흙에 묻히든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느냐는 것이다.

사실은 우리 몸이 우리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인데, 그래서 하나님은 마치 폐건전지를 환경오염 때문에 회수를 하듯이 그렇게 회수를 하신다는 말이다. 그리고 나서 하시는 말씀이, "그래, 봐라. 니는 니 것이 아니라 내 것이 맞지. 그런데 말도 안 되는 자아를 만들어놓고는, 마치 니가 니 것인 것처럼 구상을 해서 폼을 잡았지"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 하나님은 법으로 인간의 자아를 공격 !!

그래서 하나님은 계속해서 이런 인간의 자아를 공격하게 되는데, 왜냐하면 "자아는 없다" 라는 것을 일깨워주기 위해서 말이다. 그런데 그렇게 공격하는 수단이 바로 '법' 이라는 것이다. 구약에서의 율법, 즉 하나님의 법이라는 말이다.

우리가 일요일에 교회에 나오지 않고 집에서 딩굴게 되면 자아만 남게 되는데, 그런데 교회에 와서 설교말씀을 듣게 되면 자아는 없어지고, 그 현장에 주님의 것으로서의 자기 몸이 남게 된다는 것이다. 물론 문을 열고 나가면 또 마찬가지이겠지만 말이다.

* 질문 - 그런데 그런 과정이 반복해서 계속되는 이유가 있나요?

그것이 바로 우리 몸이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을 증거하는 증거용이라는 말이다. 그러니 계속해서 반복되면서 증거가 된다는 것이다. 우리 인간들은 돌아서서 또 '헤헤' 거리면서 자기 생각만 하니 말이다.

* 질문 - 그러면 그 증거를 자기에게 하는 것인가요?

그렇지 않고 온 우주에 하는 것인데, 즉 하나님께서 만나게 해주는 타인들에게 말이다. 물론 교회에 간다고 증거하는 것은 아니고, 그것 자체가 하나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누구에게 얽매여 있는 모습이라는 말이다. "아하, 저 사람은 하나님께 매여있구나" 라고 말이다.

* 질문 - 그러면 교회에 몰래 가는 것보다는 떠들면서 가는 것이 좋겠네요?

물론 그것은 욕심인데, 하나님께서 시키는 데로 하면 된다는 것이다. 두 명을 모아서 보내면 두 명이 가면 되고, 100명을 모아서 보면 100명이 가면 되고 말이다. 또 몰래 숨어서 가도록 하면 숨어서 가면 되고, 떠들면서 가도록 하면 마구 떠들면서 가면 된다는 것이다.

* 질문 - 사실 그런 문제는 우리 인간이 어떻게 할 수 없는 것은 알지만, 우리의 자아 문제도 역시 그렇고 말입니다. 그런데 목사님은 우리가 또 어떤 장소나 형식과 틀에 들어가서 자아가 부수어져야 한다고 하셨는데, 과연 그런가요?

그렇게 자아가 부수어지는 것이 아니라, "아하, 나의 자아가 이런 모습으로 피어있구나" 라고, 자기의 실체가 드러나게 된다는 것이다. 자아가 결코 없어지는 것이 아니고 말이다.

* 질문 - 그런데 목사님은 일요일에 교회에 가야 된다고 하셨잖아요?

그것은 꼭 교회에 가야 한다는 말이 아니라, 교회에 가야 복음적인 설교를 들을 수가 있으니 말이다. 무당들이 하는 설교를 들으려고, 교회인지 절인지 구분도 안 되는 곳에 간들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러니 집에서 설교를 들어도 된다는 것이다.

* 질문 - 교회를 가도 설교를 듣는 사람에게 그러한 시너지 효과가 항상 나타나는 것은 아니지 않지 않습니까? 저의 경우에는, 어떤 날은 은혜가 되지만, 또 어떤 날은 그냥 멍하게 앉아있거든요? 그러니 그것이 반드시 그런 행위적인 측면으로 되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물론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고,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은혜를 분명히 주시는데, 그러나 "내가 이렇게 했더니만 은혜가 되더라" 라는 것은 없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의 그런 방법조차도 포기하게 하신다는 말이다.

◈ 문제는 자아 속에 '악'이 도사리고 있어 !!

다시 정리하면, '자아' 라는 것은 이미 형성이 되었는데, 그러니 자기가 자아를 부순다고 해서 부수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런데 이 자아가 그냥 가만히 있으면 괜찮은데, 그런데 문제는 이 자아 속에 자기도 모르는 것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을 로마서 7장에서는 '악' 이라고 한다는 말이다.

일단 로마서 7장 17절과 18절을 살펴보자.

(롬 7:17) 이제는 이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롬 7:18)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여기에서 사도바울은 "이제는 이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아주 극단적으로 이야기하는 것 같은데, 과연 그것이 아까 말한 그 2%에 해당하는 것인가? 아니면 모든 인류의 보편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는가? 당연히 보편적이라는 것이다. 물론 대부분의 사람들은 인정을 하지 않겠지만 말이다.

그것은 바로 모든 인간은 본인이 알아서 행하는 것이 전혀 아니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아는 그냥 껍데기에 불과하니 말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뭐라고 하는가? 자기들이 알아서 행한다고 이야기한다는 말이다. 모든 것을 다 자기가 알아서 판단을 하고 그렇게 행한다는 것이다.

◈ 죄는 율법에 반발심을 드러내는데 !!

하지만 자아는 없는데, 그런데 '나' 라고 등장하는 것에 대해서 대표적으로(?) 이름을 붙이니, 그것이 바로 '죄' 라는 것이다. 그렇게 죄가 고개를 '쏘옥' 하고 내민다는 말이다. 그렇게 해서 죄가 퍼지는데, 그런데 이 죄가 언제 드러나는고 하니, 그냥 가만히 있으면 아무 문제가 없는데, 말씀을, 특히 율법을 들으면 이게 반발하는 식으로 고개를 내민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주님은 사랑입니다" 라고 하면, "개코로(?)" 라고 하고, "모이기를 힘써야 합니다" 라고 하면, "니 혼자 모여라" 라고 한다는 말이다. 그렇게 모든 일상에서 죄가 성립이 되는데, 그런데 아이들은 왜 그런 모습이 나타나지 않는고 하니까, 어른들보다도 진리의 법을 들을 기회가 엄청 적은데, 아이들은 주로 칭찬을 듣는다는 것이다. "예뻐요. 참 잘했어요" 라고 말이다.

◈ 아니, 저 놈이 마귀새끼 ??

그런데 그런 아이들에게도 "야, 하지마. 그건 아니야" 라고 해버리면, "도대체 저 놈이 내 새끼인가? 아니면 마귀새끼인가?" 라고 할 정도로 극단적인 반발심을 드러낸다는 것이다. 그래서 밥을 먹다가 숟가락을 던진다든지, 앉아서 두 다리를 마구 튼다든지 말이다.

아마 어릴 때 모두들 그런 경험이 있지 싶은데, 또 자식들을 키우면서 보았을 것이고 말이다. 그것은 논리적으로 설명이 되는 것이 아니라, 실제의 우리 모습이 그렇다는 것을 보여준다는 말이다. 즉 우리 인간의 속성이 그렇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모습이란 말이다.

그런데 여기서 철학자들이나 신학자들은 무엇이 어려워하는고 하니까, "거룩한 법이 왔는데, 그런데 왜 우리는 거기에 대해서 반발을 하는가?" 라는 것이다. 즉 도대체 거룩한 법에 대해서 왜 인간들이 반발을 하는지, 그 이유를 모르겠다는 것이다.

아까 로마서에서 제일 어렵다고 말한 7장 7절을 다시 보자.

(롬 7:7)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

여기에서 사도바울은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 라고 하는데, 그러나 사람들은 이러한 말이, 지금 우리 사회에서나 실제적인 교육현장에서는 전혀 맞지가 않다는 것이다. 상식적으로 보면, "이것을 해" 라고 하면 하고, 또 "이것은 하지 마" 라고 하면, 하지 않는 것이 맞지 않느냐는 말이다.

◈ 우리의 상식 - 야, 그렇게 하지 마 !! - 예 !!

예를 들어서, 아이가 이렇게 의자를 삐딱하게 앉아있다고 하면, "얘야, 그렇게 하면 안 돼" 라고 하면, 그 아이가 "예, 알겠습니다" 라고 하면서 바로 앉는다는 것이다. 물론 말도 전혀 안 듣고 뺀질거리는 아이도 있겠지만 말이다. 아무튼 인간은 그렇게 가만히 두면 계속해서 하는데, 하지만 "그것은 안 돼. 하지마" 라고 하면, 계속해서 그렇게 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니 인간 속에는 무엇이 있는고 하니까, 비교적 고분고분하게 말을 잘 듣는 이성적인 양심과 같은 것이 있어서, 그렇게 교육을 시키고 가르치면 더욱 더 훌륭한 사람이 될 수가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알고 있는 상식이고 선입관(?)이라는 말이다.

◈ 사도바울 - 야, 그렇게 하지 마 !! - 이제 해야지 !!

하지만 사도바울의 경우에는, 기존의 우리가 알고 있는 상식과는 정반대의 이야기를 한다는 것이다. 즉 "야, 하지 마" 라고 하는 순간부터 "이제 해야지" 라고 말이다. 그러니 차라리 "하지 마" 라고 하지 않았다면, 그냥 그대로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있었을 것인데 말이다.

하나님이 머리가 얼마나 좋은지(?), 지금 사람은 죄를 모르는데, 그런데 언제 죄가 성립되는고 하니, "하지 마", 혹은 "해" 라고 하는 법이 있을 때 죄를 알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런 법이 없으면 죄가 없다는 말이다. 그냥 '툭탁, 툭탁' 소리만 날 뿐이고 말이다.

◈ 방귀는 무죄 ??

예를 들어서, 사람이 방귀를 뀌더라도 평소에는 아무 문제가 되지 않았는데, 그런데 "방귀를 뀌지 마" 라고 했을 때, 그때부터 '뿌웅' 이라는 방귀가 그만 죄가 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냥 방귀를 '뿌웅, 뿌웅' 하고 뀌는 것이지, 그것이 결코 죄는 아니라는 말이다. 물론 냄새는 전혀 변함이 없을지 몰라도 말이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율법을 준 것은 그 이유가 무엇이라고 하는가? 죄로 하여금 더욱 더 죄가 되도록 하기 위해서,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다 율법을 주었다는 것이다. 쉽게 말해서, 없는 죄를(?) 만들어내기 위해서 율법을 주었다는 말이다.

그런데 인간들은 무엇인가? 선악과를 따먹었기 때문에 악에서 선 쪽으로 가려고 하고, 그러나 하나님은 그와 반대로, 사실은 선하지도 않지만 그렇게 스스로 선하다고 여기는 쪽에서 악으로 몰고 간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렇게 인간의 악을 노출시키는 방향으로 일을 하시는데, 바로 여기에 동원된 것이 하나님의 법, 즉 율법이라는 말이다.

◈ 교회가 곧 악마의 전당 !!

그러니 오늘날 교회가 바로 지옥인데, 교회에 다니기 전에는 십일조를 하지 않다가 교회에 다니면서 십일조를 하니 말이다. 그렇게 해서 죄가 와르르 쏟아지는데, 교회가 곧 악마의 전당이라는 것이다. 악마를 모셔다놓고 살아간다는 말이다. 그것이 바로 인간세계에서의 교양이고 상식인데, 즉 악에서 선으로 가는 성화론이라는 것이다. 예수를 믿으면 착해진다는 말이다.

* 질문 - 그러니 보통 사람들이 말하는 성화론이라는 것이, 굳이 성화론이라기보다는 그냥 지옥으로 간다는 말이지요?

그러한 것 자체가 죄인데, 물론 선에서 악으로 가는 것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의 취지이고, 그러한 역할을 율법이 한다는 것이다. 옛날에는 선지자들이 했고 말이다.

* 질문 - 그러니 그런 것을 전혀 모르던 상태에서, 인간이 선악과 따먹음으로 율법이라는 것 자체를 우리 인간이 받아버린 것인가요?

그러므로 인간은 죄에 의해서 법을 유발시키는 기계장치가 되었다고 볼 수 있는데, 즉 인간은 법만 들어오면 죄를 짓는 자동기계가(?) 되었다는 말이다. 예를 들어서, 원래 간음 그 자체는 죄가 아닌데, 그런데 "간음하지 마라" 라는 법이 들어옴으로서 죄가 되어버렸다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여기에 한 수를 더 떠서, 인간이 간음을 하고 싶어하는 마음조차도 죄라고 하셨고 말이다.

* 질문 - '자아' 라는 것이 형성이 된 것도 죄인데, 그런데 율법이 나타나서 "무엇을 하라, 하지 마라" 라는 것도 죄가 아닙니까? 그렇다면 이 두 가지의 차이점은 무엇인가요?

사실은 두 가지가 차이점이 없는데, 그런데 총체적으로 모인 죄가 있고, 또한 그렇게 모으는 과정으로서의 죄가 있다는 것이다.

* 질문 - 그런데 '원죄(原罪)' 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그것은 인간들이 만든 용어인데, 성경에는 그런 원죄가 없다는 말이다.

* 질문 - 그런데 집합론으로 보면 어떻게 되지요? 율법을 통해서 죄가 드러나는데 말입니다. 자아가 형성된 그 관계에서의 죄는 어떻게 되느냐는 것입니다.

물론 논리적으로 보면 집합론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 집합은 개념규정 때문에 생긴 것인데, 그렇게 경계를 친다는 것은 그 안과 밖이 다른 속성이라는 것이다. 차별화를 시켜서 말이다. 물론 차별화가 되고 안 되고 간에 인위적으로 원리를 설명하기 위해서, 일단 임시적으로라도 그렇게 울타리를 친다는 것이다.

◈ 총체적 죄와, 그러한 과정으로서 죄 !!

방금 이것이(?) 실제라고 했는데, 그런데 논리적으로 할 때는 죄를 그렇게 따로 설명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논리적으로 규정을 하다보니 말이다. 그러므로 총체적인 죄가 있고, 또한 죄가 죄 되게 하는 과정으로서 죄가 있다는 것이다. 즉 죄가 죄 되게 하는 과정 자체도 죄가 되는데, 바로 거기에 법이 동원된다는 말이다.

그러니 결국 이 둘은 끝에서 만나게 되는데, 물론 우리는 그 정답을 알고 있는데,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이 죄라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 이 이야기는 예수님 이전의, 율법으로 말하는 인간의 보편적인 죄에 관한 것이라는 말이다. 예수님과 관계가 없는 말이다(??). 즉 율법으로도 그것이 죄가 된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그것을 보다 더 분명하게 하기 위해서 오셨고 말이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인간이 자기 속에 죄가 장악하고 있음을 아는 순간부터, 그것보다 더 행복한 것이 없다는 것이다. 전혀 불행이 아닌데, 오히려 그런 것을 모르는 것이 불행이라는 말이다. 왜 행복인가? 자기가 구태여 고치고 말고 할 것이 없기에 그렇다는 것이다.

◈ 죄 문제는 고민할 필요가 없어 ??

그런데 그것을 가지고 고민한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웃기는 일인지, 어디 고민한다고 이 죄의 문제가 해결이 되겠는가? 성경은 우리에게 그것을 고민하라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너는 이것이야" 라고 미처 우리도 몰랐던 우리의 정체를 밝혀주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런 사실에 대해서 박수를 치면서, "하나님, 감사합니다" 라고 해야 한다는 것이다.

◈ 죄는 구원받은 자들만 알 수 있어 !!

만약에 이 죄의 문제가 걱정근심을 해서 해결이 된다면, 우리가 당장에 합숙을 해서라도 근심을 하고 고민을 하면 되겠지만 말이다. 그러나 그것이 전혀 아니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선택해서, 그들에게 이 로마서 7장의 말씀을 주셔서, "너희 인간들의 정체가 바로 이것이야" 라고 하면서, 죄의 문제를 드러내신다는 말이다.

이미 구원이 되었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이지, 만약에 구원이 되지 않는다면 이런 까발림에 대해서 거부하면 된다는 것이다. 즉 "나는 예수를 믿지 않을 거야. 믿어도 예수님은 나에게 욕만 하고" 라고 말이다. 물론 그런 인간은 자기 자신을 믿는 것이 된다는 말이다.

* 질문 - 그러면 어린아이들도 악마가 만들어놓은 자아가 있지요? 단지 율법적인 것에 대해서 아직 어리고 경험이 없어서 자극을 받지 않아서 그렇지 말입니다.

물론 태어날 때부터 반드시 그러한 악마의 자아가 있는데, 자라면서 다양하게 경험을 한다는 것이다. 아무튼 지금 신학자들이 제일 힘들어하는 부분이 무엇인고 하니, 지금 이것이 너무나 어려워서 저도 강의를 하기가 좀 주저가 되지만, 그래도 해야하겠지만 말이다.

일단 로마서 7장 17절과 18절을 다시 보자.

(롬 7:16)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내가 이로 율법의 선한 것을 시인하노니
(롬 7:17) 이제는 이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 내가 아닌, 내 속에 거하는 죄 !!

제가 왜 이렇게 뜸을 들이는고 하니, 여기 17절에 보면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라고 하는데, 상식적인 표현은 "내가 아니고 너" 라고 해야 말이 된다는 것이다. 또한 그렇게 되려면 서로가 동등한 입장이 되어야만 하는데, 즉 "이근호가 아니고 차범근(??)", 이런 식으로 말이다. 그러니 "이근호가 아니라 박하사탕", 그렇게 해도 말이 안 된다는 것이다.

무슨 말인지 알겠지요? 그렇게 비교를 하려면 서로가 동등한 인격체가 되어야 하는데, 그러니 지금 신학자들이 무엇 때문에 고민인고 하니까, 물론 믿음이 없어서 그렇지만 말이다. 도대체 죄가 어떻게 인격체이냐는 것이다. 왜냐하면, 지금 사도바울이 자기 자신과 죄를 동등하게 비교하니 말이다. 바로 이 부분이 그들에게 제일 어렵다는 것이다.

◈ 어떻게 '나'와 '죄'를 비교할 수 있는가?

하지만 우리의 교양과 상식은 무엇인가? 죄라는 것은 전혀 인격체가 아닌데, 자기가 무엇을 행했는데, 그런데 그 결과가 나쁘게(?) 나타나는 것을 두고서 죄라고 하니 말이다. 그러니 이런 상식적인 논리를 가지고 성경이 전혀 풀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 죄는 이미 나의 분신 !!

그러나 사실은 그런 잘못된 논리를 가지고 있는 것 자체가 성경을 왜곡하고 있다는 것이다. 흔히들 교회에서 뭐라고 하는가? "여러분, 이제는 죄를 짓지 맙시다" 라고 하는데, 그러나 그것이 전혀 말이 되는가? 왜냐하면, 죄는 나쁜 결과가 나타나는 인간의 행동이 아니라, 이미 인간 속에 들어와서 자리를 잡고 있는 것인데 말이다.

다시 말해서, 인간이 잘못 행하면 죄가 되고, 또한 잘만 행하면 죄가 아닌 것이 아니라, 이미 인간은 죄가 덮어 씌어진, 그래서 죄의 조종을 받는 '괴물' 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은 죄가 시키는 데로 할 수밖에 없는, 그런 죄의 영원한 하수인이라는 말이다.

* 질문 - 인간이 죄로 덮어 씌어있다기보다도, 아예 죄 덩어리라는 표현이 더 적합하지 싶은데요?

지금 집사님의 질문이 조금 전에 한 그 '2%' 하고는 영 분위기가 다른데, 질문이 왔다갔다해서 지금 제가 헷깔리는데(ㅋㅋ), 그러니 우리가 걱정 근심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런 고민할 권리와 자격이 없기 때문에 말이다. 즉 전혀 우리 차원에서 고민한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 백합화, 들풀, 그리고 '나' !!

누가복음 12장에 보면, 백합화가 나오고 들풀이 나오는데, 그들이 그 얼마나 배뿔락(?) 한지 모른다는 것이다. 혹시 황우석 교수가 몇 시간 자는지 아는지 모르겠는데, 하루에 4시간을 잔다는 것이다. 그러면 참새는 몇 시간 자겠는가? 배부르면 그냥 잔다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 그 말씀을 하고 나서 29절에서 뭐라고 하셨는가?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하여 구하지 말며 근심하지도 말라" 라고 했다는 것이다. 근심도 하지 말라고 말이다. 왜 그런가? 그것이 28절에 있는데,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만큼 우리는 예수님에 대해서 믿음직하게 여겨야 한다는 것이다.

(눅 12:27) 백합화를 생각하여 보아라 실도 만들지 않고 짜지도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눅 12:28)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눅 12:29)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하여 구하지 말며 근심하지도 말라

* 질문 - 그러면 목사님도 근심걱정을 하세요?

물론 그런 근심과 걱정을 하는 것이 저의 할 일인데, 단지 그것이 정말 부질없다는 것을 알면서 매일같이 하고 있다는 것이다. 전혀 그것이 달라지지 않는데, 또한 굳이 변명을 하자면, 하나님께 맡기는 준비작업이라고 할 수 있고 말이다.

* 질문 - 그러면 전혀 저희들과 다를 것이 없잖아요?

그렇다면 정말로 감사한 일인데, 사실은 그것밖에는 더 할 말이 없다는 것이다. 고맙고, 귀엽고, 또한 사랑스럽고 말이다. 사도바울의 심정이 바로 그러한 것인데, 여기서 로마서 7장 24절과 25절을 보자.

(롬 7:24)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롬 7:25)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여기서 24절에서 사도바울이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저내랴" 라는 것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 제대로 알려주시니 너무 감사하다는, 그런 내용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25절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즉 그런 예수님의 안목이 아니라면 자기가 어떻게 그 엄청난 사실을 알았겠느냐는 말이다.

◈ 예수님은,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

그리고 난 다음에 8장 3절에 보면 유명한 말씀이 나오는데, 즉 예수님은 자기와 같은 인간을 위해서 죄인의 모습으로 오셨다는 것이다. 그렇게 오셔서 이 죄의 문제를 인간은 죄인이기 때문에 해결할 수 없지만, 죄인의 모습으로 오신 예수님이기 때문에, 그 모든 것을 완벽하게 해결하셨다는 것이다.

(롬 8:3)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그렇게 예수님께서 모든 것을 다 해결을 하시고 손을 털었기에 생긴 결과가 8장 11절에 나오는데, 즉 그리스도를 믿는 그리스도의 영이 자기 안에 들어온다는 말이다. 이렇게 예수님의 영이 들어왔다는 것은, 더 이상 죄의 문제에 대해서는 시비를 걸지 말라는 것이다. 예수님 자신이 다 알아서 해결을 해놓았다는 말이다.

(롬 8:11)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 예수님은 현대 마이카 ??

다시 말해서, 예수님은 '마이카(?)' 라는 것이다. 그런데 왜 그런 교통사고 때문에 고민을 하고 말고 하느냐는 것이다. 현대해상의 마이카가 다 알아서 해주는데 말이다. 그렇게 손을 털었다는 의미에서, 사도바울은 예수님을 믿으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로마서 1장에서, 예수님을 믿으면 의인이 되고 또한 구원받는다고 하는데, 그것은 바로 이미 당사자가 고민을 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완벽하게 처리를 해놓았다는 말이다. 그렇게 이미 모든 과정을 다 처리해놓고 통보를 해주었다는 것이다.

물론 그렇게 통보를 받은 그 순간부터 우리는 과거로 돌아가는데, "아하, 내가 이렇게 살았구나. 이런 인간이었지" 라고 말이다. "탐내지 말라는 그 순간부터 나는 탐을 내는 인간이었구나. 그렇고 그렇고 그런 인간이구나. 그러나 나는 악마의 종이었구나" 라고 말이다.

◈ 인간은 '리틀 GOD' !!

그렇게 인간은 자기 한 평생을 살아가면서 '자아' 라는 허구가 만들어낸 허상에 속아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데, '작은 신(?)'의 역할을 자청하면서 말이다. 물론 성도의 경우는 그것을 사도바울처럼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라고 하면서 깨닫는 것이고, 불신자들은 그냥 그렇게 살다가 폼만 잡다가(?) 지옥으로 간다는 말이다.

* 질문 - 목사님, 제가 8장 11절을 보면서 생각이 났는데, 우리가 "죽었던 죄인" 이라고 해야 합니까? 아니면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 이라고 말이 됩니까?

◈ '죽었던'과 '죽을 수밖에 없는'의 차이점은?

참으로 괜찮은 질문을 했는데, 먼저 성경에서 "죽었던 죄인" 이라고 할 때는, 그 표현자체의 시제가 과거로 되어있는데, 이미 죽었다는 의미이니 말이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이렇게 헬라어로 과거로 되었다고 해서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한글과 같은 의미의 과거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신분의 차별을 의미하는데, 그렇다고 해서 "너희들이 과거에는 이런 이런 신분이었는데, 지금은 다른 이런 신분이다" 라는 의미가 아니라, "너희들이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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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