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먼 자들의 교회
눈 먼 자들의 교회
이름 : 김대식(IP:124.59.84.82)
눈먼자들의 도시(Blindness, 2008)
http://movie.daum.net/moviedetail/moviedetailStory.do?movieId=46027
줄거리
전 인류가 눈이 먼 세상...오직 나만이 볼 수 있다.
평범한 어느 날 오후, 앞이 보이지 않는 한 남자가 차도 한 가운데에서 차를 세운다.
이후 그를 집에 데려다 준 남자도, 그를 간호한 아내도, 남자가 치료받기 위해 들른 병원의 환자들도, 그를 치료한 안과 의사도 모두 눈이 멀어버린다.
시야가 뿌옇게 흐려져 앞이 보이지 않는 정체불명의 이상현상.
눈먼 자들의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면서 정부는 그들을 병원에 격리수용하고, 세상의 앞 못 보는 자들이 모두 한 장소에 모인다.
그리고 남편을 지키기 위해 눈먼 자처럼 행동하는 앞을 볼 수 있는 한 여인(줄리안 무어)이 있다.
아수라장이 되어버린 병동에서 오직 그녀만이 충격의 현장을 목격하는데...
2008년 11월, 충격적인 상상이 현실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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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먼 자들의 도시 - 김대식
이 영화를 보고 깜짝 놀랐다.
(뭐 하긴 서양 영화들이 워낙 성경컴플렉스라서)
출애굽 이후의 광야 이스라엘 즉 광야교회와
그 광야 이후의 구약이스라엘 전체 역사와 너무 똑같아 보였기 때문이다.
모세 혼자만이 유일하게 눈을 뜬자로써
이 여인은 모세처럼 구원자 아닌 구원자 역할로 떠맡겨지게 된다.
그런데 모세는 봐야 할 것이 있다.
하나님을 만난 유일한 자로써(눈뜬자로서)
광야 이스라엘을 통해서 얼마나 인간의 잔인한 모든 면들을 말이다.(곁으로 가장 가난하고 나약하고 미약하지만 가장 악마성이 다 드러난다. 물론 부요하다는 인간은 부요해서 가리우는 것이 그만큼 많기 때문에 이런 들추임을 당하지 않는다. 즉 이스라엘 자체가 할례 당하는 부끄러움의 수치를 도려내는듯이 모든 민족을 대표해서 할례당하는 것이다.)
(우상숭배, 간음, 마귀의 광야 3가지 경제 종교 정치를 통한 인간의 자아의 하나님 됨, 오늘날 이 영화보다 더 실감나는 곳은 교회다. 우리교회도 예외 될 수 없다. 모든 인간의 더러움이란 더러움은 다 봐야 한다. 뼈저리게 실감이 날 정도로 현실적이다.)
도대체 인간 속에 무엇이 들어있는가를 말이다.
하나 하나 그 현장 속으로 고고 고고 하면서 그 현장의 목격자로써 남아야 한다.
그리고 원치 않는 인간의 내면을 적나라하게 까발림의 현장을 모세 또한 같이 격어야만 한다.
아니 도리어 하얀 소경(소경 자체가 어두움 그 자체임에도 불구하고 하얗다 라는 것 밖에 안 보인다, 유사품 빛? 유사품 광명?) 속에서만이 들추어지는
도저히 상상도 못할 가난 궁핍 연약함 속에서
더욱더 잔인한 인간 속의 악마 하나 하나를 만나야만 한다.
마치 구약 이스라엘 역사를 함축 시켜놓은 내용처럼
하나 하나 벌겨벗김을 당하는
껍데기 수치를 한꺼플 한꺼플 벗길때마다
그 악마성의 배후에게 깊이 다가가게 된다.
이 영화를 보면서 이런 세상의 문화도 이제 현대는 구약을 나름대로의 해석을 비스무리하게 하는구나 라는 생각을 했다. 현대교회의 목사 보다 훨씬 낫다 라고 할 정도로?
방금 이 전에 본 지구 최후의 날도 그런 뉘앙스를 풍겼다. 인간은 가망없다. 인간의 손에서 지구를 구원시키고자 하는 외부의 생명체 개입.
그런데 웬걸 항상 새언약인 신약에 와서는 한결같이 마귀가 심은 메시야 사상을 그대로 드러낸다. 마치 오늘날 하나님 나라 라는 새생명의 삶 운동 펼치는 놈들의 주장과 같은 식이다.
즉 희망이다.
인간이 희망을 본 이상은 아무리 이전것의 과거가 죄악적이라도
그 죄악을 만회할 희망의 진화가 남아 있다는 주장
근육을 안 사용해서 그렇지 사용만 하면 새롭게 된다는 주장은 이 영화도 예외가 아니다.
역시나 인간의 본능인 것 같다.
이것을 마치 새언약인냥 떠벌리고 사기를 치는 모습은 이 세상 교회와 다를바 없다.
그렇다면 새것이란 무엇일까? 새것이다, 라는 의미는 곧 새영인 성령과도 연관된다.
요즘 모든 인간들은 이 새것에 대한 해석을 한다.
새것이 없으면 죽고 미래는 없으며 멸망하며 심판하며 희망없고 절망 뿐이다 라는 것이다.
결국 이 영화 조차도 새 것에 대한 해석에 도전하는 것이다.
새 것이 뭘까? 새로운 마음이 뭘까?
물론 이 영화를 섬기는 행함, 봉사실천의 희생정신이다. 곧 사랑이다.
이 사랑에 대한 해석을 겨우 끄집어 내는 방식들이 이런 내용으로 채운 것이다.
성경을 흉내 내어놓다가 결국은 자기들의 숙제인 인간 하기나름이다 라는 식의 인간숙제로
그래야 구원 받을 값어치를 한다는 성화론의 원리 그대로이다.
성당 안의 인물 조각상들의 한결같은 하얀 눈가리개들은
마치 구약 이사야 1장의 이스라엘을 더러버서 꼴보기 싫다고 안보겠다고 안듣겠다고 고개를 저으면서 내 마당을 밟지 말라는 구원단절의 그 차단을 보는 것 같다.
자 이제 모세만이 본 그 구원단절인 차단성을
막힘담을 헐어버리듯이 뚫어야할 사명을 지닌채
인간의 숙제를 홀로 담당해야 한다.
이것은 놀라울 정도로 오늘날 개혁주의 설교와 같다.
이제 작은 예수로써 주변의 악의 세력으로부터 구원자의 사명을 담당하라는 것이다.
더욱더 소경이 소경의 길로 인도하는 것 같았다.
마치 한국영화 밀양처럼
용서 받아야할 대상이고
구원 받아야할 대상임을 보여주기 위해서
모조리 모든 인간을 다 눈 멀게 했건만
눈 뜬 자들 보다 더 몇천배나 악랄한 짖만을 골라서 할 수 밖에 없는
육의 본성을 도리어 눈이 가리워졌다는 이유로 더더욱 노골적으로 한다는 것이다.
신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으니 나는 어쩔수 없다는 핑계를 정당화 하면서 말이다.
꼭 목사들의 핑계와 같다. 목사인 나를 힘들게 했으니
교인들을 강간해서라도 목사인 자신의 목사됨을 추구하겠다는 권력의 교회를 마치 칼처럼 마구 마구 휘두르겠다는 것이다.
이것은 내 교인이니 하나님 당신은 빼앗을 권한이 없다는 것이다.
마치 구약 이스라엘이 왕을 뭣도 모르고 세운뒤에
그 왕에게 강간 당하면서 모든 것을 빼앗김 당하듯이 사망의 왕노릇을 이스라엘은 격어야만 했다.
이제 그 왕 노릇을 이런 희망을 심어준다는 이유로 똑같이 강간을 하는 우상숭배의 거짖영을 이 영화 또한 톡톡히 그 값어치를 하고 있다.
새언약에 대한 해석
구원에 대한 해석
사랑에 대한 해석을 이 영화가 얼마나 엉터리로 하고 있는지를
오늘날 교회가 하는 짖과 같은 모습을 보면서
적나라하게 예수님이 불뱀의 모습으로 나무에 달려
너의 불뱀의 모습을 다 까발리겠다는 십자가의 사건만이 유일한 구원인 것처럼예수님의 숙제 하심만 그 십자가의 사건만 바라보게 된다.
주여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나는 소경입니다. 저를 불쌍히 여겨주소서.
(물론 당연하지만 이 영화 속에서는 예루살렘 도시에서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라는 어린아이의 찬양 외침, 시각이 없다.
또 동시에 다윗의 자손이여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 보기를 원하나이다. 라는 소경의 외침도 없다
또 동시에 말라비틀어진 무화과 나무(종말)도 없다.
고로 진짜 어두운 권세인 죽음의 실체와 전쟁을 벌리시는
젖먹이를 통해서 거룩한 피 전쟁이 없다.
그저 인간이여 희망을 포기하지 말자 라는 트릭만 난무하다. 아무리 성경 흉내를 내어도
이 눈먼자들의 도시는 예루살렘 도시 보다더 더 배불러 터져있다
이미아(IP:119.♡.96.73)
09-01-23 16:25
눈 먼 자나 눈 뜬 자나
빼앗은 자나 빼앗김을 당한 자나
아는 자나 모르는 자나
힘이 있는 자나 힘이 없는 자나
잘난 자나 못난 자나
가진 자나 없는 자나
...........................
무화과 나무를 저주하신 그 저주를 피할 길 없다(아무 때나 치시고 싶으면 치셔도 되는 그런 존재이다).
그리고
두 사람이 맷돌질을 하다가 한 사람은 데려감을 당하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하는
예수님의 선별 행위만이 진리임을 거부할 수 없다.
참으로 하나님은 무서운 분이시다. 이 폭력적인 하나님 앞에 당해낼 인간은 하나도 없다.
그렇게 인간이 무서운 존재라는 것을 아셨기 때문이다.
십자가마저 갖고 놀 자들이라는 것을 아셨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