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 65:17-20 (새하늘과 새땅)
사 65:17-20 (새하늘과 새땅)
이름 : 우리교회(IP:220.81.176.150)
본문 : 이사야 65장 17-20절
제목 : 새 하늘과 새 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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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09-01-21 20:47
새 하늘과 새 땅
2009년 1월 21일 본문 말씀: 이사야 65:17-20
(사 65:17, 개역) 『보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나니 이전 것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생각나지 아니할 것이라』
(사 65:18, 개역) 『너희는 나의 창조하는 것을 인하여 영원히 기뻐하며 즐거워할지니라 보라 내가 예루살렘으로 즐거움을 창조하며 그 백성으로 기쁨을 삼고』
(사 65:19, 개역) 『내가 예루살렘을 즐거워하며 나의 백성을 기뻐하리니 우는 소리와 부르짖는 소리가 그 가운데서 다시는 들리지 아니할 것이며』
(사 65:20, 개역) 『거기는 날 수가 많지 못하여 죽는 유아와 수한이 차지 못한 노인이 다시는 없을 것이라 곧 백 세에 죽는 자가 아이겠고 백 세 못되어 죽는 자는 저주 받은 것이리라』
우리는 성경에서 ‘새 하늘과 새 땅 창조’라고 나오면 굉장히 반깁니다. 현재 내가 가진 것에다 추가해서 하나님께서 더 보태준다고 여깁니다. 즉 지금 내가 이만큼 인생 산 것을 대단히 자랑스럽게 여기는 마음 태도에다 추가적으로 새 하늘과 새 땅까지 챙겨주신다고 여깁니다. 하지만 이것은 엄청난 오판입니다.
한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제가 병원을 찾았다고 합시다. 의사 선생님이 하시는 말씀이 “아휴, 아저씨는 이것 저것 고치기 보다는 새로 창조하는게 낫겠네요”라는 말을 했다면 우리들이 얼마나 기분 나쁠까요. 자기 딴에 이 정도 몸 유지하는 것도 힘들게 지탱했다고 하는데 의사 선생님의 ‘창조’ 언급은 그 한마디로 우리의 모든 노력을 묵사발 만드는 발언처럼 들릴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도 이와 같습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한다는 것은 이미 인간들이 저주 받아 지상에서 늙어 죽어가고 있음을 염두에 두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 20절에서도 ‘저주’ 이야기가 나옵니다. 100세가 못되어 죽은 자는 마치 저주받은 자처럼 취급 받을 것이라는 겁니다. 우리는 신약의 내용을 압니다. 거기에는 백세 정도가 아니라 영원히 산다고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100살 산다는 것이 별로 구미 당기는 소식으로 들리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취지는 그게 아니라, 인간 사회에 뒤따라오면서 하나님의 저주와 축복을 주시는 마당으로 사용하신다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우리가 저주받아 마땅하다는 것은 도대체 누가 우리에게 저주를 베푸느냐를 하는 그 주인공을 알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저주를 내리시는 그 당사자께서 또한 축복도 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쉽게 말해서 저주와 축복은 인간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생명나무와 함께 있는 것이 축복이요 생명나무와 상관없이 있는 것이 저주라는 증표로서 오늘 본문에 100세 이야기한 겁니다. 즉 선악과가 에덴동산에서 저주받은 땅으로 이전된 후에, 곧 이어 법은 뒤따라 들어왔고 이로서 이 세상이 저주성은 더욱더 그 실체가 확연하게 곳곳에서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이런 와중에서 생명나무 생명성은 이 저주받은 세상에서 어떤 식으로 피어날까요?
시편 90:9-11에 보면, “우리의 모든 날이 주의 분노 중에 지나가며 우리의 평생이 일식간에 다하였나이다. 우리의 년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년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누가 주의 노의 능력을 알며 누가 주를 두려워하여야 할대로 주의 진노를 알리이까”고 되어 있습니다.
즉 그동안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일관성 있는 저주에 노출되어 왔던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우리가 여지껏 살아온 것은 하나님의 은혜 때문입니다. 즉 은혜란 저주를 배경으로 해야지만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이로서 육체의 열매가 왜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는지가 드러났습니다.
갈라디아서 5장에 의하면 생명이란 성령을 통해서만 주어지게 되어 있고, 그 성령은 여기서 우리는 과연 저주받을 그 육체 안에서 육체를 이루는 요인들이 어떻게 인간들로 하여금 점차 늙어 죽어가게 만들었는지를 알 필요가 있습니다. 즉 순함이 폭력으로 전환될 수 밖에 없었던 그 내력을 알아야 합니다. 그동안 육체는 하나님으로부터 매일 저주받고 있었던 것입니다.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로서 ‘하나님의 나라’란 성령의 열매로 가득찬 곳임이 드러났습니다. 성령의 열매는 이러합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격동하고 서로 투기하지 말지니라”
성령의 열매란 결코 법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법이 동원되면 성령의 열매는커녕 도리어 육체의 열매만 양산할 뿐입니다. 그렇다면 성령의 열매가 맺히려면 법이 아닌 것에 기초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될 수밖에 없습니다. 법이 빠진 곳에서 생명이 주어진다면 이는 최초의 에덴 동산의 상황이 재현이 되는 겁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저주 아래 있으면서도 계속 은혜를 입고 있었는데 육체의 열매를 내뿜는 자들은 그 은혜를 죄로서 가리워왔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은혜성을 내놓지 못하는 자들은 수시로 그 모든 육체의 열매를 내놓을 수밖에 없습니다. 성령께서는 그 해결책으로 제시한 것이 바로 ‘날마다 십자가’입니다.
늘 그 육체를 십자가에 데리고 가져다가 못 박아 죽임으로서 육체의 열매가 성령의 열매로 바뀌게 하시는 겁니다. 나의 열매가 아닙니다. 성령의 열매입니다. 왜냐하면 나라는 인간은 현재 십자가 못 박힌 채로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 지려면 제대로 십자가 지고 가고 있는지를 알 수 있는 제 3의 시선이 필요합니다.
기독교 2000년 동안에 나오는 신학의 맹점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자신이 제대로 십자가가 지고 가는 지를 평가할 제 3의 시선을 신학 안으로 들여놓을 수 없다는 겁니다. 십자가에 못 박을 때 자신이 자기에게 못 박는 것은 그것 또한 육적인 일일 뿐입니다.
새 하늘과 새 땅에 합당한 사람은 성령이라는 제 3의 능력에 의해서 예상 밖의 사태에 직면한 자에 국한 됩니다. 그 사태를 통해서 자신은 철저하게 하나님의 은혜로만 새 하늘과 새 땅에 들어가 살 수 밖에 없는 사람임을 알게 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내가 나를 관리하는 것도 육체적인 일임을 알고 그저 주시는 생명나무의 축복은 오직 은혜로만 가능함을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