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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대구 2009년 1월 20일 강의 지옥의 하나님 159p강의[신학]

대구 2009년 1월 20일 강의 지옥의 하나님 159p

이름 : 우리교회(IP:124.59.84.82)

090120 지옥의 하나님 159p
십자가 영이 들추어내는 사랑(위기)완료

우리교회(IP:124.♡.84.82)

09-01-20 14:54

우리교회(IP:220.♡.176.150)

09-03-04 19:00

대구090120지옥의하나님p159

09 대구강의 1 - 지옥의 하나님 33 - 인간구원을 위한 신학6

09,01,20 강의 이근호, 정리 구득영

◈ 중력 오딧세이 ??

우리 교재 '지옥의 하나님' 159페이지에 보면 다음과 같은 성경구절이 있는데, 한번 살펴보자.

(벧전 2:21)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 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우리는 흔히 생각하기를, 예수님은 그 자리에 그냥 계시고 우리가 다가간다고 여기는데, 그래서 소위 '성화론'이 등장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성화론에서 주장하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까, 주님은 이제 십자가을 제대로 지셨기에, 그리고 부활과 승천도 다 하셨고 말이다. 그래서 우리 인간들의 몫이 남아있는데, 즉 우리가 다가가는 것, 그것이 바로 신앙이라는 것이다.

◈ 그리스도께서 친히 당기시는데 !!

그런데 방금 읽은 베드로전서 2장 21절에 보면, 우리가 다가가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친히 당기신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냥 잡아당기는 것이 아니라 어떤 기준, 혹은 원리가 있다는 말이다. 바로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실 때, 그것이 '십자가' 라는 이름의 사건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이 십자가가 새로운 삶의 원리로서 자리를 잡고 있고, 그 원리가 자기 백성을 당기는 식으로, 그렇게 해서 원리에 들어오도록 작용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가만히 있는 그리스도에게 다가가서 그분을 믿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리스도께서 어떤 새로운 기준을 원리로 삼아서 당기고 있다는 말이다. 즉 우리가 그리스도에게 가는 것이 아니라, 그분이 우리를 당긴다는 것이다.

◈ 그분만의 기준이고, 원리이기에 !!

그렇다면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런 예수님이 알고 있는 원리를 우리도 알아서 다가가면 되지 않겠느냐고 할지 몰라도, 그러나 그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게 새롭게 당기는 원리는 오직 십자가를 지신 분만이 알 수 있는 예수님만의 원리이기 때문에, 그래서 기존의 우리가 알고 있는 원리와는 마찰을 일으킨다는 것이다.

처음에 읽은 베드로전서 2장 21절에 보면,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 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라고 하는데, 즉 우리에게 힘을 주어서 우리들을 인도하신다는 것이다. 십자가의 원리가 바로 그 '본' 인에, 그런데 우리는 우리 나름대로의 '본'이 또 따로 있다는 말이다.

그러니 예수님은 당기는 것 가운데 곱게 당기는 법이 없다는 것이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가지고 있는 원리가, 즉 타인의 욕망에 의해서 "내가 저 사람처럼 되고 싶다" 라고 하는, 그렇게 자기 속에 있는 욕망이 자극을 받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우리 삶의 원리이고, 기준이고, 복이라는 것이다. 그것을 성경에서는 '돈'이라고 하기도 하고 말이다.

◈ 그러므로 성도에게는 마찰과 충돌과 부딪침이 !!

아무튼 그런 원리가 있는데, 그런데 그러한 우리의 기준과, 우리를 당기는 예수님의 기준과는 반드시 마찰과 충돌이, 즉 부딪침이 형성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런 마찰과 충돌과 부딪침이 없으면 성도가 아니라는 말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것을 오해해서 뭐라고 하는가?

그렇게 충돌이 일어난다는 것은, 자기가 평소에 생각한 것은 말고, 외부에서 주님의 십자가의 원리가 자기에게 작용을 하고 있다는 증거라는 말이다. 그러니 그런 마찰과 충돌과 부딪침이 있으면, 비로소 성도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참으로 하나님께 복을 받은 사람이라는 말이다.

물론 그것을 "완전히 제대로 하는가? 그렇지 않는가?" 라고 하는 것은, 그러나 사실 우리 인간에게 '완전함'이 어디 있겠는가? 그것은 곧 예수님의 원리인데, 우리는 기존의 인생을 살았던 우리 나름대로의 체험이 있고 인생관이 있는데 말이다. 그러니 우리 힘으로 우리 자신의 인생관을 도저히 부술 수는 없다는 것이다.

◈ 현대 신학자들은 이것을 '위기'로 !!

여기에 대해서 현대 신학자들은 감을 잡았는데, 물론 그들은 자세한 것은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래서 현대 신학자들은 이것을 일종의 '위기' 라고 보았는데, '크라이시스' 라고 말이다. 즉 인생의 위기라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문제점이 하나 있는데, 그들은 이것을 위기는 분명히 위기인데, 자기 인생의 '위기'로 보았다는 것이다.

이것을 '실존주의 신학' 이라고 하는데, 불트만이나 칼 바르트와 같은 사람들이 여기에 속하는데, 또 몰트만도 여기에 속하고 말이다. 아무튼 현대의 조직 신학자들이 이것을 많이 이야기했다는 것이다. 즉 십자가가 오게 되면 인간에게 위기가 닥친다는 것이다.

왜 신학자들이 이런 이야기를 하는고 하니, 그 당시 독일에서 실존주의 철학이 발달하게 되었는데, 그래서 교회가 사람들을 하나님에게 인도하기 위해서, 이런 실존주의 철학에 기초해서 실존주의 신학을 전개하게 되었다는 말이다.

◈ 도대체 누구의 '위기' 인가?

그런데 문제가 무엇인고 하니, 예수님의 십자가가 오게 되면 인생에 위기가 닥친다고 이야기했는데, 그런데 그 위기가 자기 인간들의 위기인줄로 이야기했지, 그것이 예수님의 위기라고 하는 것은 전혀 생각지도 못했다는 것이다.

좀더 쉽게 이야기하면, 자기가 예수님을 믿고 나서 위기가 닥쳤을 때, 사람들은 그것을 자기의 위기로 본다는 것이다. 즉 "야, 내 인생이 이렇게 하다가는 큰일이 나겠다. 예수님을 믿는데 왜 이렇지? 왜 고난이 오지? 베드로전서 2장에서, 고난을 따라오라고 하던데, 그러면 내가 따라가야지" 라고 말이다.

그렇게 사람들은 이렇게 위기를 자기의 위기로만 바라보는데, 물론 실존주의 철학에서는 그렇게 이야기하고, 실존주의 신학에서도 그렇게 말하지만 말이다. 그러나 그것은 전혀 잘못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인가? 즉 누구의 위기라는 말이다.

◈ 예수님의 고난이기에, 위기도 예수님의 역시 !!

하지만 정작 우리 속에 삽입되는 것은, 우리 자신의 위기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이 지상에서 경험했던 예수님 자신의 위기가, 고맙게도 평탄하게(?) 생활을 한 우리 인생 속으로 그만 찾아온다는 것이다. 즉 예수님의 위기가 우리 인생 속에 찾아와서 발생되는 위기라는 말이다. 그러니 우리 자신의 고난이 아니라 바로 예수님의 고난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고난과 '나'의 고난의 차이점이 무엇인가? 그렇게 '나'의 고난이 되어버리면, '나'를 힘들게 한 '나'의 적들이 있는데, 이웃집 아저씨(?)나, 교회의 목사라든지 말이다. 그렇게 되면 '나'의 원수가 생각이 나지만, 그러나 성도 속에 찾아온 것이 예수님의 고난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전혀 우리가 생각도 하지 못한 얼토당토 않는 적들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적들은 누구인가?

그렇다고 하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히게 한 적들이 과연 누구인가? 그것은 바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고, 또한 무지 목매한 민중들이라는 말이다. 예수님을 메시야라고 외치면서도, 막상 자기에게 불이익이 왔을 때는 도망치는 제자들이고 말이다.

물론 우리는 그런 경험을 하지 못했지만, 예수님께서 이러한 제자들 때문에 얼마나 가슴아파했는지, 즉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배신을 당했을 때 예수님이 그 얼마나 괴로워했는지 모른다는 말이다. 바로 그것이 예수님이 홀로 담당하신 경험과 아픔이란 것이다. 물론 그 배신의 절정이 십자가이고 말이다.

그렇게 예수님이 홀로 경험했던 예수님의 고난과 위기가, 이제는 '내' 속에, 전혀 '나'의 허락도 없이 침투가 되어버리면, 그렇게 되면 우리는 비로소 예수님의 적들이 과연 누구인지, 그들을 알게 되는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즉 '나'의 적이 아니라, 예수님을 적을 말이다.

◈ 새 며느리가 들어오면 !!

쉽게 예를 들자면, 어느 집안에 아들이 결혼을 해서 새로운 며느리가 들어왔는데, 그러면 당연히 집안 어른들은 무슨 기대를 하는가? 새 며느리가 들어왔으니, 살림을 잘하고 아들과 사이좋게 잘 지내다가 자식도 쑥쑥 낳으면 한다는 말이다. 그렇게만 되면, 새로운 며느리가 들어와도 그 집안에 전혀 위기는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 며느리가 들어오고 난 뒤에는 생전부지의 적들이 쳐들어온다는 말이다. 즉 매일같이 전화가 와서 하는 말이, "내가 이렇게 엄연히 살아있는데, 니가 그렇게 결혼을 하면 되는가?" 라는 식으로 말이다. 그렇게 그 며느리가 결혼을 하기 전에 가지고 있던 화려한 과거를 비롯해서, 그리고 그 며느리가 가지고 있었던 남모르던 아픈 과거도 같이 경험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남편과 시아버지와 시어머니와 모든 식구들이 다 며느리의 과거를 공유하게 되면, 이 집안은 그만 기존의 시아버지와 시어머니의 집구석이 아니라, 그만 며느리의 집구석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그야말로 조용한 연못에 개구리가 한 마리 들어와서 엉망으로 만들었다는 말이다.

◈ 그것이 곧 '아내의 유혹' ??

그것이 아침 연속극의 주된 내용이 아닌가? 또한 막장(?) 드라마로 일컬어지는 '아내의 유혹'이고 말이다. 그것이 얼마나 사람들에게 흥미를 유발하는지, 마구 욕을 하면서도 본다는 것이다. 광고도 처음 시작할 때는 3개였는데, 지금은 무려 20개가 넘는다는 것이다.

◈ 인간은 마귀박스 ??

그렇게 되면 "도대체 나는 무엇인가?" 라고 하면서, 자신에 대해서 살펴보게 되는데, 자기는 그야말로 인간은 '빈 상자' 라는 것인데, 사실은 비어있는 것이 아니라 마귀로 가득 차있지만 말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마귀가 가득한 '마귀박스(?)' 라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자기가 당했던 과거의 이력까지도 다 포함을 해서 이 마귀박스에 들어오니, 당연히 부딪침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즉 우주를 보고, 이 세상을 보고, 자신의 미래를 보는 말이다. 사람들에게 인식도 그렇고 말이다. 그러니 모든 분야에 있어서 사사건건 부딪치지 않는 것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교회가 무엇인가?" 라는 것도 그렇고, 또한 "성경말씀을 어떻게 볼 것인가?" 라는 것도 역시 그러하고 말이다. 그래서 구약 신명기를 보는데 있어서도, 그들은 예수님이 오시기 이전에는 모세가 최고였는데, 그래서 모세의 말을 지키고 준수해야 한다고 했는데 말이다.

◈ 너거 애비는 마귀다 !!

그런데 예수님이 그러한 바리새인들의 세계에 침투하게 되니 어떻게 되었는가?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보고 뭐라고 하셨는가? "내가 너희들을 정죄하기 전에, 너희들이 그렇게 떠받드는 모세가 먼저 너희들을 정죄해서 지옥에 보낸다" 라고 하셨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누구보다도 자기들이 모세를 통해서 말씀하신 그 하나님의 말씀을 존중한다고 여겼는데, 그런데 예수님이 오시고 난 다음에 그들은 어떻게 되었는가? 바로 예수님으로부터 "너거 애비는 마귀다" 라는 소리를 듣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욕을 우리도 동일하게 들어야 하는데, 왜냐하면 우리도 바리새인들의 그 모습을 그대로 가지고 있으니 말이다.

◈ 다시 정리하면 !!

이것을 다시 정리해보면, '나' 라고 하는 인생관, 즉 '나' 라는 본이 이렇게 있는데, 우리는 언제나 신이 있다고 하면 그 신을 찾아가는 식인데, 그것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과 동일하다는 말이다. 인간이니 말이다. 즉 신이 계시고, 그분이 말씀을 주시면, 물론 우리는 부족하지만 그 말씀을 지켜가면서 신에게 다가가면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난데없이 십자가 사건이 터지면서, 그 사건이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십자가의 사건으로 잡아당기는 식으로 이끈다는 말이다. 그러니 이렇게 되면 성화론은 그만 여기서 종말을 고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예수님은 자기만 아는, 즉 예수님만이 경험한 그 십자가의 낯선 경험을 우리 속에 집어넣는다는 것이다. 그 어떤 인간도 경험하지 못한, 세례요한도 경험하지 못한 말이다.

◈ 그러므로, 자기 인생의 위기가 아니라 !!

그렇게 되니, 우리의 인생은 어떻게 되는가? 우리 인생에게 날마다 위기가 발생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위기가 발생하는 것을, 물론 이것을 기존 신학자들이 감을 잡기는 했는데, 그런데 그것을 자기 인생의 위기로 보았다는 것이다. 겉으로 드러나는 것만을 보고 말이다. 그래서 "나는 왜 이렇지? 나는 왜 예수님을 믿고 되는 것이 없지?" 라고 하고 하면서, 항상 그 앞에는 '나' 라는 것이 붙게 되는데, 하지만 그것이 잘못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정작 우리 자신의, 즉 자기 인생의 위기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실 때 경험했던 그 마음을, 그러한 낯선 심정을 우리가 새롭게 알아간다고 하는, 바로 그 놀라운 경험의 세계에 우리가 초청을 받았다는 것이다.

◈ 십자가에서 나온 성령론이 !!

그런데 이러한 작업을 누가 하시는고 하니, 즉 십자가에서 여기까지 오는 작업을 말이다. 바로 그것을 우리가 아닌 성령께서 하신다는 것이다. 성령께서 그렇게 하심으로서 새로운 성령론이 여기서 전개가 된다는 말이다. 즉 십자가에서 나온 새로운 성령론이 말이다.

◈ 아하, 그래서 '희망의 신학'이 !!

이러한 십자가에서 나온 성령론을 바르트나 불트만이나 몰트만이 시도를 했는데, 바르트가 제일 먼저 했고 말이다. 그런데 그들은 십자가의 의미로 돌아가는 식으로 성령론을 전개한 것이 아니라, 이러한 성령론이 십자가에서 나온다는 이야기를 하면서도, 결론이 무엇인고 하니, "인생에 있어서 어떤 힘든 일이 있어도 참아야 한다" 라는 식으로 돌아가고 만다는 것이다. 인간실존에게 희망을 주는 말이다.

그래서 몰트만의 신학이 그 유명한 '희망의 신학' 인데, 그 출처가 십자가에서 나왔으면 그 십자가로 다시 되돌아가야 하는데, 그것이 오늘 살펴본 베드로전서 2장 21절의 말씀이고 말이다. 즉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 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들의 신학은 교회위주의 신학이기 때문에, 즉 교회로 사람들을 끌어 모으는 신학이라는 말이다. 그러니 당연히 그리스도에게 돌아가야 하는 것인데, 그것이 아니라 인간위주로 흐른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희망을 준다는 식으로 말이다.

심지어 칼 바르트도 그러한데, 시작은 십자가로 해놓고, 즉 서로가 영원히 떨어져 있어서 연결이 될 수 없다고, 그렇게 십자가로 시작을 했는데, 그런데 마지막에는 인간사랑으로 나가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니, 교회론도 모두 다 새롭게 정립이 되어야 하는데, 십자가에서 시작해서 십자가로 돌아가는 것으로 말이다.

◈ 결국은 인간해방 !!

미국 대통령 바락 오바마가 하는 말이, 루터 킹 목사의 정신을 이어받아서 하겠다고 하는데, 하지만 루터 킹 목사가 뭐라고 했는지, 그의 연설문을 보면 그 핵심이 바로 '인간해방' 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인간해방이 되면 신학적으로 어떤 문제점이 발생하는고 하니, 이런 것이 좀 어려운데 말이다.

그렇게 되면 예수님을 죽였던 그 원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되고, 즉 그들이 십자가의 원수가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구원을 받는 자기는 그만 십자가가 원수가 아닌 것으로 된다는 말이다. 그렇게 되면 충돌이나 마찰이 없다는 것이다.

◈ 십자가는 인간이 전혀 이해하지 못할 사건 !!

하지만 예수님의 십자가는 모든 인간이 전혀 이해하지 못할 사건으로서 다가온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십자가에서 위기가 우리에게 주어진다면, 우리의 내부에서도 강력하게 이 십자가를 반대하는 자기 자신의 인생관에 의해서, 즉 자기가 살아왔던 자기 인생의 원리와 기준에 의해서 엄청난 대충돌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 당시의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아마추어가 아닌 전문적인 종교인 것을 유념해야 하는데, 즉 그들은 신론에 의해서, 즉 하나님께 영광을 위해서 자기의 인생관을 정립한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도 역시 교회에 나올 때는, 이렇게 하나님 주권중심으로 신앙생활을 한번 해보겠다고 다짐을 한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모습이나 오늘날 우리의 모습이나 모두가 다 동일하다는 말이다. 즉 그렇게 하나님의 주권중심으로 나간 것이, 곧 그렇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겠다고 하는 사고방식 자체가 바로 십자가의 원수라는 것이다.

◈ 예수님은 감별사 ??

그러니 누구를 어떻게 구원시키느냐는 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대한 감별사로 오셔서, 그렇게 해서 구원을 받은 자로 가별이 된 사람은 십자가의 본을 쫓아서 오게 되어있는데, 그렇게 쫓아오는 과정에 대해서 예수님의 제자들과 사도들이 잘 보여주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극한 어려움과 위험에 처해 있으면서도 그것이 곧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감사가 터져 나오고, 우겨쌈을 당해도 쌓이지 않는 기쁨이 나왔다는 것이다. 죽은 자 같으니 산 자이고, 무명한 자 같으나 하늘나라에서 유명한 자라는 말이다. 날마다 자기 속에 예수님의 죽음이 찾아오지만, 그것으로 인하여 날마다 자기가 살았음을 느끼게 된다는 것이다.

◈ 성도는 오히려 '위기'로 인해서 산 자가 !!

다시 말해서, 사도들과 제자들은 예수님의 죽음으로 인하여 오히려 그만 살아있는 자가 되어버린다는 말이다. 그러니 그 누구라도 예수님의 죽음이 찾아오지 않으면, 그런 사람은 숨을 쉬고 살아 있어도, 그만 죽은 자가 되고 만다는 것이다.

그렇게 모든 것이 기존의 알고 있던 것과는 정반대가 되는, 그런 정반대의 원리로서 이끌림을 받고 있다는 것이 외부에 표현이 되고 고백이 될 때, 그것이 곧 예수님에 대한 증거가 된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자기 나름대로의 의사표현은 인정을 받을 수 없고, 오히려 그런 것은 계속해서 충돌을 야기시키는 원인을 제공할 뿐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의 자유의지가 있는가?" 라고 했을 때, 그러한 자유의지가 있고 없고 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즉 그런 자유의자의 유무가 문제가 아니라는 말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인가? 그것이 그 무엇이 되어도 "그것이 왜 죄인가?" 라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 무엇이 죄(罪)이고, 무엇이 의(義)인가?

그래서 이러한 십자가의 원리와, 그 반대가 인간의 원리인데, 물론 악마의 원리이지만 말이다. 인간의 원리는 있음과 없음인데, 즉 "있음은 선이고, 없음은 악이다" 라는 것이다. 그런데 십자가의 원리는 무엇인가? 무엇이 있고 없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무엇이 죄(罪)이고, 무엇이 의(義)인가? 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 예수님은 우리 집에 돈이 100억이 있는지, 200억이 있는지, 그것을 묻는 것이 아니라, 단 돈 10원이 있더라도, 그 10원이 있는 것이 죄인지, 의인지, 그것을 묻는다는 말이다. 교회도 역시 마찬가지인데, 교인이 얼마나 모이는지, 그것을 묻는 것이 아니라, 과연 주님의 십자가의 의가 있는지, 그것을 물어보신다는 것이다.

그러니 전혀 접근하는 것이 다르다는 전혀 말이다. 인간 쪽은 항상 있음의 원리인데, 하지만 예수님의 십자가는 전혀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니 그런 십자가의 원리가 우리 인간에게 들어왔을 때, 우리는 뭐라고 하는가? "주여, 있게 하옵소서" 라고 한다면, 그렇게 되면 결국은 마주침에서 부딪침으로 이어질 수밖에는 없다는 것이다. 계속해서 말이다. 그러한 가운데 감사가 나오는데, 그것이 바로 성도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이러한 마주침과 부딪침은 우리 자신의 위기가 되고, 이런 위기를 통해서 주님이 십자가에서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그런 주님의 위기를 알 때, 그것이 곧 감사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그러한 면에서는 우리 자신에게 먼저 위기가 닥친다는 것이다.

◈ '나' 위기의 시간적, 공간적 요소 !!

이것을 조금 더 생각해보면, '나'의 위기가 두 가지 요소 때문에 벌어지는데, 하나는 시간적 요소 때문이고, 또 하나는 공간적 요소라는 것이다. 시간적 요소라는 것은 자기가 일찍 죽는다는 것인데, 지금 이 순간에도 바로 죽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자기 인생이 그렇게 끝난다는 것에 대해서 위기를 느낀다는 말이다.

그래서 길을 가다가도 넘어지면 "아하, 이렇게 내가 가는구나" 라고 말이다. 그것은 결코 좋다는 것이 아닌데, "아이, 미치겠네. 이렇게 허망하게 죽으면 안 되는데" 라고 하면서 자기 본성이 튀어나온다는 것이다. 이렇게 시간적으로 위기를 느끼는데, 그런 위기는 바로 죽음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불교라는 것은 이런 인생의 자기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서 등장한 것인데, 즉 시간적인 위기를 말이다.

여기에 비해서 공간적 위기라는 것은 무엇인고 하니, '나' 라고 하는 것을 구성하고 있는 여러 가지 요소들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즉 '나'를 구성하고 있는 집안이나 학벌이나 직장이나 키나 얼굴 생김새 등등이 여기에 속한다는 말이다. 특히 요즘같이 경제적으로 어려운 때는 이 직장이 얼마나 소중하고 중요하냐는 것이다.

오늘 아침뉴스에 보니, 서울 용산에서 재개발을 하는 가운데 자기 가게를 지키려고 하다가 불이 나서 5명이나 죽었다고 하는데 말이다. 그리고 자기는 평당 천 만원에 분양을 받았는데, 나중 온 사람들은 7백 만원에 받아서, 열을 받아서 데모도 하고 말이다. 요즘 대구에 이런 경우가 종종 있는데 말이다. 또 자기 아이의 성적이 내려가는 것도 그렇고 말이다.

그런 것이 바로 자기를 구성하고 있는 것에서 비롯되는 위기인데, 즉 '나'를 구성하고 있는 요소 하나 하나가, 즉 '나'에게서 공간을 차지하고 있는 것들이 자기가 원하는 대로 그렇게 되지 않을 때 위기가 찾아온다는 것이다. 그렇게 시간과 공간의 위기가 들이닥친다는 말이다.

◈ 결국은 '감추기' 인데 !!

그런데 이렇게 '나'에게 위기가 찾아온다는 것은 결국은 무엇인고 하니, '감추기' 라는 것인데, 즉 원래의 자기의 그런 모습들이 부끄럽다는 것이다. 자기가 죽는다는 것이 부끄럽고, 자존심이 상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마라" 라는 말도 있고 말이다. (ㅋㅋ) 그러니 부모도 자기 자식이 공부를 못하면, 그 어디를 가도 자식 공부에 대해서는 이야기는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무튼 그렇게 자기 자신을 감추고 싶다는 말이다.

◈ 그러나 십자가는 드러내기 !!

그런데 십자가는 무엇인고 하니, 이러한 감추기와는 정반대라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의 고마운 점인데, 그것이 무엇인고 하니, 우리가 보기에는 십자가에서 벌거벗고 죽은 그 부끄러운 모습을, 예수님께서는 자기의 택한 백성에게는 감추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런 사람에게는 자기의 비밀을 공개한다는 것이다.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 찌어다" 라고 하면서 말이다.

바로 이것을 사도바울은 두고 '사랑' 이라고 하는데, 창세기 2장에도 뭐라고 하는가? "서로가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랑은 드러내고 싶어하는 것인데, 즉 하나라도 더 알려주고 싶다는 말이다.

◈ 사랑은,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 찌어다 !!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지심으로 인한 구원의 능력과 죄 사함의 능력과 용서하심의 사랑을, 아무튼지 간에 자기 택한 백성에게는 하나라도 더 알려주고 싶어한다는 것이다. 물론 다른 사람들에게는 국물도 한 방울 없고 말이다. 즉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 찌어다" 라고 하면서 말이다. 그것을 두고 '사랑' 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은 자기의 그런 두 가지 위기에 그만 주눅이 들어서, 그것을 그만 감추기에 급급해한다는 것이다. 마치 죄를 짓고 난 다음의 아담처럼 말이다. 그것이 또한 현실이고 말이다. 즉 "나는 더 오래 살아야 합니다. 그냥 이렇게 죽으면 제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습니다. 나를 구성하고 있는 것들이 드러나면 나는 부끄러워서 얼굴을 들 수가 없습니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인간은 그렇게 자꾸만 자기 자신을 감추고 숨기기에 급급한데, 하지만 그것은 결코 사랑이 아니라는 말이다. 왜냐하면, 사랑은 뭔가 하나라도 더 알려주려고 하고 드러내기를 원하고, 또한 벌거벗었으나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인데 말이다.

◈ 우리, 벌거벗고 한번 만나자 !!

그러므로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이러한 것을 전부 다 합치면, 예수님과 인간 사이에는 무엇만이 남는고 하니, 우리 인간의 죄에 대해서 묻거나 따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이 아니라 예수님은 "너의 죄를 감추지 말고 드러내어 놓으면, 내가 십자가의 벌거벗음을 드러낼 테니, 우리가 중간에서 한번 만나자" 라고 한다는 것이다. 마치 견우와 직녀처럼 말이다.

그렇게 되면, 우리 인간은 내놓을 것은 위기밖에 없으니 그런 죄인이 되고, 그러면 주님께서는 그런 우리 인간의 죄를 용서하시면서 사랑으로 다가오신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그 이전까지는 자기 자신의 위기에 대해서 골몰하다가, 갑자가 예수님께서 그 놀라운 용서하심의 사랑으로 다가오게 되니, 우리의 인생이 어떻게 되는가?

이제는 관심사가 자기 자신이 아니라, "아이쿠, 주님도 어지간 고생을 하셨구나. 나도 고생을 좀 했나 싶었는데, 주님은 나보다 훨씬 더 고생을 많이 하셨구나" 라고 하면서 주님의 아픔을 이해하게 되고, 주님의 그런 고난에 대해서 너무나 감사하게 되고 고마워하게 된다는 것이다.

바로 그렇게 할 때, 그 사람의 인생은 무엇으로 둘러 쌓이게 되는고 하니, 주님의 십자가의 사랑으로 차고 넘치게 된다는 것이다. 또한 바로 그러한 현상이 날마다 일어나는 곳이 교회이어야 하고 말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계속해서 부딪치고 감추어진 것들이 드러나고, 그래서 여기 저기서 부끄럽다고 하는 소리가 나와야 하고, 또한 마찰이 일어나고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새순교회는 너무나 조용하고 평화로워 보이는데, 이름이 새순이라서 그런가? 싸우는 모습이 없다는 것이다. 혹시 노골적인 우리의 인간성을 서로가 알 필요가 없다고 하면서 감추고 있는 것은 아닌지 궁금한데, 마치 화투패를 감추듯이 말이다.

◈ 야, 화투살이와 인생살이가 똑같네 !!

제가 사는 옆집이 202동인데, 거기에 사시는 할머니가 이런 이야기를 했다는 것이다. 제 아내가 집을 나서는데, 그때 할머니가 나오더니만 자기도 나가는데 차를 같이 타고 가면 되겠느냐고 해서, 그렇게 해도 된다고 했더니, 그 할머니의 말씀이, "아이쿠, 이런 행운이 있나. 화투살이와 인생살이가 똑같네" 라고 한다는 것이다. 자기가 아침에 화투패를 보았는데, 지금 그것과 똑같다는 것이다.

저는 '화투살이' 라는 말을 그때 처음 들었는데, 그러면 할머니가 왜 그런 화투살이를 하는가? 물론 심심해서 하는 것도 있겠지만, 이 세상을 바라보는 인생관이 무엇인고 하니, 미리 좀 당겨서 보자는 것이다. 지난 시간에 이것을 '사주팔자'로 강의를 했는데, 즉 자기 인생살이를 화투의 우발적인 변화를 가지고 미리 읽을 수 있다고 본다는 말이다. 그럴 때 비로소 안심을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세상관은 어디에서 나왔는가? 그것은 '나'에게서 나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보기에 이 세상이 허구인 것은, 그런 세상이 없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이 흘러가든지 전부다 다 누구 중심인고 하니, 자기의 위기를 감추는데 불리한지 유리한지, 그런 식으로 진행된다는 것이다. 바로 그것이 인간이 이 세상을 살아온 원리가 되고 본이 되고 말이다.

◈ 마구 치고 들어오는 주님의 인생살이 !!

그런데 그런 인생에 십자가가 들어오니, 이 십자가가 얼마나 생뚱맞고 낯설겠느냐는 것이다. 예수님의 인생관이 치고 들어오니 말이다. 우리는 예수님이 전혀 아닌데, 그리고 지금부터 2000년 전에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모르고 말이다. 그런데 성령을 통해서 "예수님은 이렇게 살았단다" 라고 하는 것이, 우리의 허락도 전혀 받지 않고 일방적으로 우리의 마주침으로 인해서 들어온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니, 그때부터는 우리는 어떻게 되는가? 언제나 무엇인가를 감추기에 급급했던 자기 자신의 인생이 얼마나 비복음적이며, 또한 것이 전혀 사랑도 아니고, 그야말로 자기 고집에 불과하다는 것이 백일하에 드러난다는 것이다.

그런데 주님은 그런 자기의 벌거벗음을 전혀 부끄럽게 여기지 않고, 자기의 택한 백성들에게 모두 다 주니까, 그래서 그것을 살펴보면서 "아하, 주님은 나에게 묻지도 않고, 나의 죄를 처리하려고 스스로 그렇게 하셨구나" 라고 하면서 십자가의 희생을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우리가 주님 앞에서 감추지 말아야 하는데, 감출 것이 없으면 자유라는 말이다. 그렇게 감출 것이 없다는 것은 감출 자아가 없다는 것이고, 그렇게 자아가 없으면 관심사가 자기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그런 우리를 구원하신 그리스도께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성도는 감출 것이 없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렇게 이야기를 하면, "나는 이제 이런 놀라운 것을 알았으니, 내가 알아서 다가가야지" 라고 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냥 우리가 가만히 있으면 주님이 알아서 다가온다는 말이다. 십자가를 통해서 말이다. 그렇게 우리를 찾아와서 그 자취를 따라가게 한다는 것이다.

◈ 고난과 고생은 달라 !!

제가 10년 전에 박사교회에 있을 때 이런 설교를 한 기억이 나는데, 즉 "고난과 고생은 다르다" 라는 것이다. 물론 평소에는 같은 의미로 사용하지만, 그러나 비교해보면 다르다는 말이다. 고생은 일종의 우격다짐인데, 고생을 하겠다는 것도 억지이지만, 그런 고생을 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도 역시나 억지라는 것이다.

아무튼 어떻게 하든지 고생은 모두 것이 다 우격다짐인데, 그런데 여기에 비해서 고난은 그냥 가만히 있어도 찾아온다는 말이다. 그러니 애를 쓰든 말든, 그것과는 전혀 상관이 없이 올 사람에게는 반드시 찾아오고야 만다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용을 쓴다고 해서, 물론 화장실에서는 좀 필요하겠지만 말이다. 그렇게 애를 쓰는 것은 잘못이지만, 하지만 예수님의 아픔을 이해하는 것, 그것이 옳다는 말이다. 물론 우리가 이해를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이해를 시킨다는 것이다.

◈ 교회관도 당연해 달라져야 !!

그렇다면 어떤 식으로 이해를 시키는가? 바로 그것 때문에 예수님은 인간세상이 교회를 만드셨는데, 그러니 이제 교회관이 달라지게 되는데, 이러한 교회를 누가 만드는가? 주님이 만드심에도 불구하고 교회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의 능력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교회를 주님이 세웠다고 하니 또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만 자기의 인생관에 의해서 교회를 '있음'으로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교회가 있으니, 현재에 있는 자기가 교회를 통해서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여긴다는 말이다.

2000년 동안의 모든 신학자들의 오해가 바로 여기에 있는데, 십자가로 구원을 받는데, 그런데 교회의 머리가 주님이니, 그 교회를 통해서 구원을 받는다고 말이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바로 '칼빈' 인데, 또 다시 인간의 원리와 기준이 등장한다는 것이다. 이것을 제가 아무리 이야기해도 알아듣지를 못한다는 것이다.

◈ 하지만 교회도 중요하지 않는가 ??

우리 십자가 마을의 강의를 사람들이 듣고 비판하는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뭐라고 하는고 하니까, 사실 우리가 그들의 음성도 들어야 하는데 말이다. 그것이 곧 우리의 허물을 살펴보는 것이니 말이다. 그런데 문제는 들어보면, 십자가의 원리가 그것이 아니라 이런 것이라고 우리의 잘못을 지적해보면 좋겠는데, 우리가 오해하고 있었던 부분이 있다고 하면 말이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라, "당신들의 하는 말도 맞는데, 교회도 중요하다" 라고 나온다는 것이다. 하지만 제가 말하는 것은, "교회는 있어도 없는 것으로 여기고 살아야 한다" 라는 것인데, 물론 제가 이야기하는 것도 어렵지만 말이다.

◈ 야, 교회가 여기 있다 !!

왜 제가 이렇게 어렵게 말하는고 하니, 사실은 어려운 것이 아닌데 말이다. 구원은 오직 십자가로만 되는데,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십자가를 증거하는 현장으로서 교회를 만들어 놓았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니 사람들이 그만 눈에 보이는 교회를 붙잡는데, 즉 "야, 교회가 여기 있으니, 이 교회를 붙잡아서 구원을 받자" 라는 식으로 말이다.

하지만 제가 말하는 것은, 그러한 것이 아니라 교회는 깨어지고 부딪치기 위해서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자체를 소유함으로서 구원이 되리라고 하는 자기의 잘못된 본성, 즉 용을 쓰고 애를 쓰는 것이 교회에서 또 발휘가 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근호' 라는 목사가 교회를 친 것은, 오직 십자가만으로 구원이 된다는 것을 부여주기 위해서 그렇게 했는데, 그런데 사람들은 뭐라고 하는가? 그 십자가의 원리는 그만 못 들은 척하고서, 그 다음에 하는 말이 "이근호, 당신은 왜 교회를 치는가?" 라고 나온다는 것이다.

하지만 "왜 교회를 치는가?" 라고 하면서 짜증을 낸다고 하는 것 자체가, 그 사람은 이미 무엇을 붙들고 있는고 하니, 교회를 붙들고 있기 때문에 그렇다는 말이다. 교회는 누구나 다 눈에 보이니 말이다. 하지만 십자가는, 오직 그 십자가가 찾아온 사람만이 알기 때문에 전혀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교회는 어떠한가? 들을 귀가 없어도 들리고, 또한 보인다는 말이다.

◈ 예수님은 왜 배척을 당하셨는가?

예수님께서 그렇게 십자가를 반드시 져야만 한다면, 그냥 저기 자기 혼자서 만들어서 올라가서 지면 되는데, 자기가 집안의 목수 일도 했으니 십자가 정도는 얼마든지 만들 수가 있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그런데 왜 예수님은 몸소 성전에 가서 비둘기를 파는 자들을 엎어버리고, 그들로부터 침 뱉음을 당하도록, 그렇게 반대를 하도록 유도를 했느냐는 것이다. 또한 자기 제자들 중에서 마귀를 하나 두어서 왜 자기를 팔도록 했느냐는 말이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이 십자가를 진 뒤에 벌어지는 교회에서 벌어지는 모든 상황들을 미리 앞당겨서 다 보여주었기에 그렇다는 말이다. 그렇다고 제자들이 다 지옥에 갔는가? 가롯유다를 제외하고는 다 천당에 갔다는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가롯유다 제외하고 맛디아를 집어서 넣어서 처음 12제자를 만든 것이 아니라, 반드시 이 가롯유다가 들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예수님의 제자인 12명의 모임이 분명히 교회가 맞지만, 그러나 그 교회가 우리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십자가의 사건만이 우리를 구원한다는 것이다. 바로 이렇게 십자가의 관점에서 교회를 봐야 한다는 것이다. 십자가로 말이다.

◈ 왜 신학교 교수들은 복음을 모르는가?

정말 우리나라에 이러한 신학자들이 있다면, 비용이 조금 들더라도 초청을 해서 세미나도 열고 함께 말씀을 나누고 싶은데, 그런데 아무리 그들이 쓴 신학서적을 보아도 이러한 복음에 대한 안목이 없다는 것이다. 물론 그 이유에 대해서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말이다.

그들이 신학교에 입학해서 유학을 가겠다는 사고방식 자체가 복음과는 전혀 무관하게, 즉 이 복음에 대한 목마름으로 간 것이 아니라 자기 한 몸 출세하겠다고 간 놈들이기 때문에 말이다. 그렇게 해서 학위를 따고 돌아와서는 신학교 교수를 하든지, 아니면 큰 교회에 가든지 해서, 아무튼 이 세상에서 출세를 해보겠다고, 그렇게 좋은 인식을 얻어보겠다고 자들이기 때문에 말이다.

그러니 그러한 자들에게 복음을 기대한다는 것 자체가 무리라는 것이다. 유학을 갔다가 돌아와서는 당연히 신학교나 큰 교회에 기웃거리고, 이러 저리 찔러서 비겁하게 줄을 대고 한다는 것이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개척교회를 하다가 조용히 죽는 것이 더 낫지 말이다.

◈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

계속해서 교재 159페이지를 보면, 마태복음 25장 33절과 40절의 말씀이 나온다는 말이다.

(마 25:33)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
(마 25:40)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한 것이니라 하시고

심판을 위한 분류는 이미 이러한 기준으로 진행되고 있다는 것인데, 사람들은 아마 이 말씀을 보면, 전부가 다 양이 있는 오른쪽으로 달려가려고 하겠지만, 그러나 전혀 그게 아니라는 것이다. 인간들이 제 아무리 오른쪽으로 가든지 왼쪽으로 가든지 간에, 그 감별은 오직 예수님이 하신다는 것이다. 누가 양인지 염소인지를 말이다.

◈ 그것은 예수님이 선택할 문제 !!

우리의 체험이나 인생관으로는 그것을 알기가 전혀 불가능하고, 우리가 그것을 제대로 알려고 하면 우리들 속에 그런 예수님의 새로운 기준이 삽입이 되고 침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것이 전혀 우리 자신이 선택할 사항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알아서 골라잡을 문제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 인간들이 쓸데없이 어디로 뛰고 하고 말고 할 이유가 전혀 없다는 것이다. 다만 주님의 새로운 기준이 주어지면, "아하, 이러 이러한 것이 오른편이고, 이러 이러한 것이 왼편이구나. 주께서 십자가를 가지고 그렇게 자기가 다 알아서 하시는구나" 라는 것을 알게 된다는 말이다. 즉 십자가의 본을 쫓아서, 그 십자가의 능력이 임한 사람은 오른편에 있는 것이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왼편에 있다는 것이다.

◈ 의인의 길과 악인의 길 !!

이것은 중고등부 시간에 설교한 것인데, 쉬운 것이지만 우리가 자꾸만 잊어버리기 때문에 다시 이야기를 하겠는데, 잠언서에 있는 내용인데 말이다. 여기 이렇게 의인이 있고 악인이 있는데, 두 종류의 사람이 다 나름대로의 자기 인생을 살아간다는 것이다. 3살, 20살, 50살, 70살을 모두가 그렇게 말이다. 이런 것이 모여서 무엇이 되는고 하니, 그것을 성경에서는 '길' 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의인과 악인의 차이점이 무엇인가? 먼저 악인은 자기가 어떤 길 위에 있다고 하는 사실을 모를 때, 그것이 곧 악인이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의인은 무엇인가? 자기가 지금 서있는 길이 어디로 빠지는 것인가를 알 때, 그것이 바로 의인이라는 것이다. 잠언서에서 말이다.

그래서 악인을 자기의 길을 생각하지 않는데, 물론 "이것은 잘못된 길이다" 라고 해서 잠시 생각할지 몰라도, 그러나 곧 돌아온다는 것이다. 하지만 의인은 무엇인고 하니까, 자기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지금 자기를 이끌고 있는 길이 우선이지 자기가 아니라는 것이다. 하지만 악인은 길이 아니라 자기 몸뚱이리를 먼저 생각한다는 말이다.

이것을 아까 말한 '위기'와 연관을 시켜보면, 즉 위기는 이 길과 관련해서 생각하자면 미래에서 오는 것인데 말이다. 마태복음 25장에 보면, 그렇게 양이 있고 염소가 있는데, 그렇게 양과 염소로 구분이 되는 최종적인 상태가 미리 앞당겨서 다가올 때에, 그것을 미리 눈치를 챈 사람은 의인이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악인이라는 것이다.

◈ 성경은 전래동화책 ??

이것을 더 간단하게 이야기를 하면, 악인은 성경말씀이 있다는 것 자체를 통 채로 부정하는 것인데, 즉 성경을 옛날의 무슨 전설이나 전래동화책 정도로 여기고 말이다. 그러니 먹고살기에 바쁘다보면 당연히 성경말씀을 보지 않는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기들에게는 동화책에 불과하니 말이다. 동화책을 누가 바쁜데 보겠는가?

다시 말해서, 성경말씀을 현실이 아니라 종교적인 아이디어에 불과하다고 보는 사람은 염소의 편이 되고, 그 성경말씀을 자기의 실존보다 더 우선하는 사람은 예수님의 위기가 찾아온 사람인데, 즉 자기 자신의 위기보다 더 그 예수님의 위기를 먼저 생각하면서 살아간다는 것이다. 그런 사람이 바로 양에 속한 사람이라는 말이다.

◈ 착하게 살면 양, 악하게 살면 염소 ??

그러니 목사가 설교를 하면서, "바르게 살면 양이 되고, 악하게 살면 염소가 됩니다" 라고 해버리면 어떻게 되겠는가? 성령을 받지 않으면 그런 설교를 하게 되고, 또한 교인들은 '아멘'을 하게 되는데, 그런 사람들에게 성경말씀을 이야기하게 되면, 그 성경자체를 부정해버린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시간에는 잠을 잔다는 말이다. 그러다가 축도를 할 때 깨는데, 또 제직회를 할 때는 눈이 초롱초롱한데, 시빗거리를 찾으려고 말이다.

하지만 그렇게 성경을 통 채로 부정하는 인간이 어디에 가겠는가? 다만 자기가 그것을 참고사항으로 여길 뿐이지, 진리라고 인정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런 자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그야말로 진주를 돼지에게 던지는 꼴인데, 사실은 던지고 싶어도 못 던지겠지만 말이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성경이나 불경이나 전혀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이다.

◈ 오네시모 복지회에서 있었던 일 !!

제가 강도사 시험을 치고 나서 이런 일이 있었는데, 저기 가창으로 가다보면 교도소를 나와서 기독교 정신으로 개종을 해서 사회로 다시금 내보내는 복지시설이 있었는데, 제 눈에는 그 원장도 깡패처럼 보였는데 말이다. 그런데 저는 거기서 눈치도 없이 로마서 7장을 설교했는데, 그 분위기가 성경말씀을 듣겠다는 것이 아니라, 빨리 설교를 끝내고 보조금이나 주고 가라는 것인데 말이다.

방금 그 단체 이름이 생각났는데, '오네시모 복지회' 라고 말이다. 이름도 얼마나 독특한가? 즉 이렇게 좋은 단체가 있으니 교회에서 도와주는 것이 서로 좋은 것이 아니냐는 것이다. 교회는 구제를 해서 좋고, 자기들은 돈이 들어오면 재소자들을 상대로 착한 일을 하니 좋고 말이다. 아무튼 그런 사람들은 전혀 말씀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가운데서도 조금은 특이한 현상은, 거기 재소자들 중에서도 복음을 좋아하는 사람들도 있더라는 것이다. 물론 싫어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지만 말이다. 그런데 그 중에서도 그 복지원 원장이 제일 인상을 많이 쓰고 있었는데 말이다. 어디서 저런 초보자가 와서 분위기 파악도 하지 못하느냐는 식으로 말이다.

이것이 오늘날 교회와도 비슷한데, 제가 어디를 가서 설교를 하면, 제일 싫어하는 인간이 바로 당회장 목사라는 것이다. 교인들은 '아멘' 이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말이다. 교회가 그만 복지시설이 되고, 또한 목사가 복지시설 원장이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 이제 '악마의 중력'을 느껴보자 !!

이제 교재 159페이지에 있는 '악마의 중력'을 보겠는데, 제목이 제법 섬뜩하지요? 이 중력은 당기는 힘인데, 그런데 이 중력이 어디서 나왔는지 아직도 물리학자들이 풀지를 못했다는 것이다. 이 세상에는 5가지의 힘이 존재하는데, 그 중에서도 제일 약한 것이 무엇인고 하니, 그것이 바로 '중력' 이라는 것이다.

◈ 잠시, 물리학 수업을 !!

이런 것은 상식적으로도 알아놓으면 좋은데, 먼저 분자가 깨어지면 원자가 있고, 그 원자는 전자라는 구름과 핵으로서 구성이 되어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핵은 양성자와 중성자로 결합이 되어있다는 말이다. 이 양성자는 '+'인데, 원래 이런 '+'는 서로 밀치게 되어있다는 것이다. 물론 전자는 '-'이고 말이다. 그런데 이렇게 밀치는 힘이 결합이 되어있다는 것은, 그렇게 밀치는 힘보다도 훨씬 더욱 강한 힘이 있다는 말인데, 그것을 말 그대로 '강력' 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이 세상을 구성하는 5가지 힘 가운데서 제일 센 힘인데, 이렇게 강력한 힘, 즉 강력이 없으면 이 세상은 존재하지 않는데, 그냥 허물허물 해지고 만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강력과 멀찍이 떨어져있는 전자에게는 전기적인 힘도 있는데, 이 전기의 힘 사이에 서로 에너지가 형성이 된다는 말이다.

그것은 바로 이런 에너지가 있기 때문에, 제가 이렇게 손가락으로 칠판을 마구 찔러도 칠판이 뚫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칠판에는 전자와 핵 사이의 에너지가 있어서, 그 에너지가 제가 이렇게 손가락으로 찌르는 힘보다도 강하기에 뚫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 하지만 예수님은 그냥 들어오셨는데 !!

제가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고 하니,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이 부활하고 난 다음에도 문을 꼭꼭 닫고 있었는데, 왜냐하면 엄청 겁이 나서 말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런 제자들에게 어떻게 나타나셨는가? 문도 전혀 열지 않고 그냥 안으로 들어오셨다는 것이다. 그 이전에는 반드시 문을 열고 다니셨는데 말이다.

여기에 대해서 과학자들은 환장을 하는데, 왜냐하면 문은 목재나 금속으로 되어있기에, 물론 그 당시에는 나무이지 싶은데 말이다. 그런데 이 나무는 분자로 구성이 되어있고, 분자는 원자로 되어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 안에는 에너지가 있어서 함부로 통과하지 못하는데, 즉 그렇게 에너지로 막아놓았는데, 예수님이 과연 그런 에너지의 틈을 뚫고 들어왔는지, 도대체 어떻게 들어왔느냐는 말이다.

이것이 고린도전후서 녹취록에 보면 잘 나오는데,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시기 이전의 육체와 죽고 난 다음과, 또 부활과 승천하신 이후의 육체가 모두가 다 다르다는 것이다. 그야말로 '육체1', '육체2', '육체3' 인데 말이다.

◈ 중력은, 그 중에서 제일 약한 힘인데 !!

아무튼 여기서 중력은 그렇게 강력한 힘은 아니고, 5가지의 힘 중에서 제일 엷은 힘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중력을 뉴턴이 사과나무에서 사과가 떨어지는 것을 보고 발견했다고 하는데, 그러나 그것은 거짓말인데, 즉 뉴턴을 존경해서 후대의 사람들이 만들어낸 이야기이라는 말이다. 갈릴레오의 "그래도 지구는 둥글다' 라는 이야기도 좀 의심스럽고 말이다.

그런 이야기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아무튼 사과가 떨어졌다고 하는 것은, 사과가 지구 쪽으로 떨어졌다는 것만이 아니라, 이 커다란 지구가 조그마한 사과에게 매달려서, 즉 사과에게 당겨온다는 것이다. 이것도 전혀 처음 듣는 이야기인가요? 즉 둘 다 서로 당겨서 만다는 말이다.

◈ 고대 철학자들은, '사랑'과 '미움'으로 !!

이것을 고대의 철학자들은 '사랑' 이라고 보았는데, 왜 그런고 하니, 고대 물리학에서는 이러한 것을 사랑과 미움으로 봐서, 그런 사랑과 미움을 구체화시킨 것이 곧 신화라는 것이다. 그러니 신화의 배경에는 반드시 사랑과 미움이 있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그들은 왜 그렇게 생각했는가? 이러한 사랑을 하게 되면 시간과 공간도 축소가 되고 늘어났다가 하는데, 즉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으면 아무리 오래 있어도 시간이 너무나도 빨리 간다는 것이다. 하지만 미운 놈하고 있으면 어떻게 되는가? 단 5분도 견디기가 힘든다는 말이다.

그러니 이 세상에서 제 아무리 힘든 일이 있다고 해도, 사랑의 힘으로 되지 않는 것이 없다는 말이다. 그런데 나중에 이것이 생물학적으로 보니, 동식물의 번식본능으로 드러났다는 것이다. 닭이 병아리를 키우고, 또 까치가 자기 둥지에서 새끼를 품을 때, 무슨 힘이 없으면 번식이 되지 않는가? 무조건적인 사랑이 없으면 안 된다는 말이다.

◈ 생물학의 물량적인 기호가 곧 'DNA' !!

이것을 생물학에서 물량적인 기호로 본 것이 DNA인데, 이 DNA는 스스로 번식을 하는 능력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을 고대에서는 사랑으로 보았는데, 그런데 그것이 사랑이 아니라 DNA인데, 이 DNA를 누가 갉느냐는 말이다. 괴물인데 말이다.

왜 그런고 하니까, 이 DNA는 무조건 DNA를 번식하는 목적이기 때문에, 이 DNA는 세포의 핵 속에 있고 말이다. 그러니 그 나머지는 모두가 다 DNA에게 봉사하기 위해서, 즉 이 DNA를 위해서 존재하는데, 그것이 단백질이고, 그것이 세포를 이루고 있다는 것이다.

그 세포 중에는 두뇌세포도 있는데, 그러니 결국은 그 머리 속에 있는 DNA가 "나는 번식하고 싶어" 라고 하면, 그 명령을 받아서 세로로 구성된 인간의 몸이 적당한 여자를 찾게 되고, 결혼을 해서 번식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자식을 낳으면, 이런 번식의 본능에 의해서 또 자식에게 작용을 하고 말이다.

◈ 자식사랑이 아니라, 번식의 욕망 !!

그런데 그것을 사람들은 뭐라고 하는가? "아이쿠, 엄마가 되어서 자식을 저렇게 끔찍이도 사랑하네" 라고 하는데, 그러나 생물학적으로 보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DNA의 자기 번식의 기계적 작용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것을 들뢰즈는 뭐라고 했는고 하니, 욕망이 스스로 알아서 작용을 한다고 이야기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내막을 전혀 모르니, 고대인들을 이것을 사랑과 미움으로서, 즉 전 세계를 사랑과 미움으로 해명했는데, 그렇게 해명함에 있어서 하나 하나 일일이 가져다 붙인 것이 곧 신화인데, 즉 신들을 일일이 붙여서 나름대로 설명을 했다는 것이다.

◈ 오뎅꼬지가 아니라 해꼬지 ??

그것은 우리 동양도 역시 마찬가지인데, 동양적인 무속신앙의 특징이 무엇인가? "남들과 원한관계를 맺으면 해꼬지를 당한다" 라는 것인데, 즉 한이 맺히면 어떻게 된다구요? 오뎅꼬지가 아니라 해꼬지라는 말이다. (ㅋㅋ) 그러니 그런 한을 풀게 되면, 그것이 자비로 주어지게 된다는 것이다.

◈ 참한 무당 하나 골라서 !!

그렇다면 여기에 하나님과 예수님을 대비해보면 어떻게 되는가? 그렇게 원한이 맺힌 것은 하나님과 예수님을 섭섭하게 해서 그런 것인데, 그런데 그 한이 풀리게 되면, 즉 악이 복으로 바뀐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을 어떻게 풀면 되는가? 그것이 바로 뇌물인데, 즉 상납고리라는 말이다. 이것이 바로 단군의 무속신앙인데, 무당은 그렇게 풀어주는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그것을 교회에 적용시키면, 한을 풀어주면 교회부흥, 그렇지 못하면 교회망함인데, 그러므로 오늘날 교회에서 누구를 찾겠는가? 그런 민중들의 맺힌 한을 풀어주는 무당을 찾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목회성공이 그렇게 어려운 일만은 아닌데, 교인들의 한을 풀어주면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세상은 사랑과 미움이니 말이다.

◈ 사랑이 곧 하나님 ??

실제로 성경을 이렇게 해석하는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많은데, 그래서 성경에서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라고 하면, "아하, 그렇구나. 사랑이 곧 하나님이구나" 라고 바꾸어버린다는 것이다. 그러니 기독교에만 구원이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종교에 다 있는데, 심지어 종교가 없는 자들에게도 그 안에 신의 사랑이 살아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성경에서 말하는 양과 염소, 또한 천국과 지옥은 모두가 다 그냥 겁주는 멘트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러니 사실상 그런 것은 없고, 하나님은 사랑이기 때문에, 또한 사랑이 곧 하나님이기 때문에, 사랑하는 자는 모두가 구원을 받는다고, 그렇게 자유주의 쪽에서는 주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목사와 신부와 중이 모여서 같이 이야기를 하게 되면, 그 주제의 흐름이 항상 이렇게 될 수밖에는 없다는 말이다. 그렇지 않으면 깽판이 되든지 말이다. 즉 하나님이 있다면 그분은 사랑의 하나님이기 때문에, 그야말로 서로 사랑하는 것이 참된 복음의 완성이라는 말이다. 그러니 목사가 중을 좋아해서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미워할 수밖에 없는 중을 좋아한다는 것이 바로 하나님이 자에게 주신 사명이기에 그렇다는 것이다.

바로 그러한 서로 사랑하는 사명을 제대로 감당하는 자들이 바로 참된 기독교인라고 하는 것이 오늘나날의 천주교나 감리교 계통의 주장이라는 것이다. 요즘은 장신도 여기에 거들고 있고 말이다. 한신 쪽은 옛날부터 막걸리나 마시고 취해서 돌아다녔지만 말이다.

우리교회(IP:220.♡.176.150)

09-03-04 19:02

◈ 십자가 사건은 이 모든 것이 허구임을 !!

그러므로 이러한 모든 것이 다 허구임을 드러내는 것이 바로 십자가 사건인데, 이 십자가 사건으로 말미암아서 우리는 본의 아니게 십자가의 원수가 되어버렸다는 것이다. 사실은 본의로 그렇게 된 것이지만 말이다. 그렇게 십자가의 원수가 된 입장에서는 사랑을 이야기할 수 있는 처지가 전혀 아닌데, 그런 자격도 없고 말이다.

그런데 그렇게 저주를 받아서 마땅한 우리에게, 바로 그 십자가를 통해서 자기의 택한 백성만 사랑을 해주니, 오직 그러한 십자가를 아는 자만이 양이고, 나머지는 다 염소라는 것이다. 무슨 말인지 이해를 하겠지요? 우리가 이런 차이를 두고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 다시, '악마의 중력'을 !!

오늘 제목이 '악마의 중력' 인데, 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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