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십자가마을 겨울수련회 역대기 제 6강
2009 십자가마을 겨울수련회 역대기 제 6강
이름 : 오용익(IP:59.3.201.241)
(2009년 십자가마을 겨울수련회, 강의 : 이 근호 목사)
역대기 제 6강
칠판에 그려진 그림을 보면서 잘 안 보이신다고 불평하실지 모르겠는데 이것은 교재에 있는 도표(열왕과 선지자들)를 그대로 그려놓은 것입니다. 다만 칠판에 그려진 그림에는 색깔로 구분이 되어 있습니다. 왜 빨강(선지자들)과 파랑(왕들)으로 색깔을 칠해 놓았느냐? 현재 북한의 정치를 유훈정치라고 하는데, 유훈정치란 죽은 귀신이 정치하는 것을 말 합니다.
솔로몬도 다윗도 이미 죽은 상태입니다. 지난시간에 열왕들의 이야기를 하나씩 끄집어내니까 여러분이 어렵게 들으실 것 같았습니다. 그림에서 이 전체를 로봇태권-V 라고 할 때, 아달랴(남)와 요람(북)정까지를 어깨부분으로 잡고, 그 다음에 요아스(남)와 예후(북)부터 웃시야(남)와 여로보암 2세(북)까지를 잡습니다. 여기까지를 배꼽부위로 잡습니다.
남쪽에서는 웃시야가 북쪽에서는 여로보암 2세때가 가장 번창했던 시기입니다. 여로보암2세라고 하는 것은 이미 앞선 시대에 여로보암이미 있기 때문입니다. 여로보암 1세라는 것은 따로 없고 그냥 여로보암인데 후대의 사람들이 헷갈리니까 이렇게 구분하는 겁니다.
그 다음에 북쪽의 경우에는 그 아래가 그냥 사라져버리는 느낌입니다만 남쪽의 경우에는 그나마 죽 다리같이 이어지게 됩니다. 그래서 어깨부분은 뭐고, 배 부분은 뭐고 다리부분은 뭐냐, 그것을 아시면 다 아는 것이 됩니다. 어깨, 배, 다리, 이런 식으로 있는데 여기서 심장, 허파, 신장 이런 것은 어디에 있는가? 이 중요한 중심부는 다 선지자들이 차지하는 거예요.
유혼정치라고 해서 아무리 왕들이 그 나라를 자기들의 나라라고 우기면서 ‘너만 왕이냐?나도 왕이다.’ 라고 하면서 북쪽 남쪽 번갈아 가면서 왕이라고 우겨도 실제로 하나님께서 다윗언약을 성취하는 것은 이런 왕들이 아니라 실제로 빨강색으로 표시되어 있는 선지자에 의해서 ‘포로 잡혀가는데도 불구하고 예례미아의 예언대로 70년만에 다시 돌아와서 옛날 성전을 회복하는 일에 성공했잖아!’ 라는 겁니다.
그렇다면 소위 왕이라고 하는 인간들은 전부 다 껍데기에 불과한 거예요. 김정일이 있어도 그것은 폼이고 북한 주민들은 여전히 죽은 김일성이가 최고다 이 말이죠. 제가 아까 강의하면서 자유주의자들이 하는 말이 ‘역사의 주체는 민중이고 그 민중이 주체가 될 때 하나님은 함께 한다.’ 고 하는데 그것은 옳지 않습니다.
역사의 주체는 하나님이시고 역사의 주체이신 하나님은 죽은 귀신, 여기서 죽은 귀신이란 다윗을 말하니까 죽은 귀신이라고 하면 안되겠고, 정확히 하면 다윗언약에 의해서 이루어지는데 그것을 어떻게 증명하느냐? 선지자들이 반드시 이런 소리를 해요. ‘…’ 이라고 해 놓고 그 다음에 ‘… 말씀대로 응하였느니라.’
예례미야도 그렇고 이사야도 그렇고, 이 도표에서 빨간색으로 표시되어 있는 선지자들의 한마디 한마디가 왕들이 아무리 패역하고 타락해도 그런 것은 껍데기, 혹은 갑옷에 불과하고, 진짜 알맹이에 해당되는 다윗언약은 묵묵히 선지자, 그냥 선지자가 아니고 고난받고 수난받는 선지자에 의해서 강물처럼 기어이 흘러왔다는 겁니다.
이것을 역대기, 열왕기 그리고 성경전체가 증명하는 거예요. 아모스 7장에 보면 아모스가 예언을 하니까 거짓선지자(제사장 아마샤)와 왕(여로보암 2세)은 ‘웃기네’ 하는 식으로 놀리기나 하는 겁니다.(아모스 7:10-17) 여러분은 이 그림을 보니까 뭐가 생각납니까? ‘머리는 그리스도의 너희는 몸의 지체….’(엡 4:15,16) 이런 성경말씀이 생각나지 않습니까?
문제는 이 빨간색과 파란색이 섞여 있다는 것입니다. 빨간 알맹이들은 따로 있는데 파란 껍데기들이 자꾸 설쳐대니까 누가 고난 받습니까? 진짜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이 교회에서 핍박을 받는 형국이 그대로 재현되는 겁니다. 역대기, 열왕기의 다윗언약이 역사속에서 파란색의 왕들은 가해자가 되고 빨간색의 선지자들은 피해자가 되는데 놀라운 사실은 이 가해자속에 거짓선지자들도 한몫을 담당하고 있다는 겁니다.
왕이 거짓선지자과 제사장들을 양성해서 자기편 만드는 것은, 옛날 다윗이 제사장과 선지자들을 두었던 그 외형적인 형식만 그대로 가져오고 다윗이 안고 있던 그 정신은 쏙 빼놓고 말았습니다. ‘아하, 이렇게 하니까 정치가 한정치 먹어주는구나. 나의 수하에 제사장과 선지자를 양성해서 나라를 세워가면 되겠다’는 식으로 합니다.
그리고서 주장하는 바란 ‘바로 우리가 정통적인 다윗언약의 계보를 잇기 때문에 다윗을 섬긴 것처럼 나를 좀 섬겨다오.’ 라는 식으로 그 나라를 자기나라 화 시킨 겁니다. 남쪽도 북쪽도 양쪽 다 마찬가지입니다. 아합 때는 이세벨이라는 이방여자가 왕비로 들어와서 심지어 제사장들을 자기 왕궁에서 숙식까지 제공하면서 양성했습니다.
그게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인데 850명이나 됩니다. 거짓선지자들 850명인데 엘리야는몇 명입니까? 달랑 한 명입니다. 갈멜산에서 850:1로 맞짱 떴습니다. 처음에는 바알아세라 선지자들이 정석대로 갔습니다. 그러다가 안 되니까 자기 몸을 찔러서 피를 흘려가면서 ‘이래도 기적을 내리지 않습니까?’ 라고 소리 질러서 부르짖었습니다.
그 때 엘리야가 조롱했습니다. ‘너희 신은 지금 주무신다. 흔들어 깨워야지 그렇게 해서 일어나겠나?’ 라고 했습니다. 엘리야는 빨간색 계통, 진짜 하나님의 다윗언약 계통을 입었기 때문에 이런 사람들에게 ‘너희들이 나라를 망치고 있다.’ 고 고발했습니다. 그래서 아합이 엘리야를 만날 때 한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왕상 18:16-19) ‘엘리야야, 네가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 자다.’
그 말에 엘리야가 대꾸하기를 ‘당신이 이스라엘을 괴롭힙니다.’ 둘 다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를 두고 소통이 안 되고 있어요. 아합이 보기에는 아합이라는 왕 수하에 있는 나라 이스라엘인데 ‘그 나라는 원래 다윗언약에서 본 그 나라가 아니올시다. 당신 지금 착각하고 있소.’ 라고 하는 겁니다.
그러면서도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도 나중에 온 이스라엘로 만나기 위해서는 이스라엘이 엉망이지만 그 나라도 유지해야 되지요. 그 유지하는 방법이 무엇인가? 엘리야가 기도하니까 3년 6개월 만에 비가 내렸잖아요. 엘리야의 기도에 의해서 비가 왔다는 것은 엉터리고 껍데기같은 왕에 의해서 훼손되고 훼방되더라도 여전히 하나님의 약속은 그 약속의 땅을 지켜 내야 되는 겁니다.
언제까지? 선지자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대로 그 땅에서 추방될 때까지. 그래서 북쪽은 BC 722년에 망하고 남쪽은 BC 586년에 망하는데 그러면 이스라엘이 떠나고 난 그 나머지 땅은 왜 있느냐? 우리가 묵고 있는 이 호텔의 청소시간이 보통 12-2시 사이였습니다. 여름철에 보니까 그 시간에는 투숙객들을 밖으로 나가게 하고 청소를 했습니다.
이 땅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다윗언약에 의한 하나님 개인의 땅이기 때문에 청소를 해야 되지 않습니까? 청소하는 기간이 몇 년이다? 70년 동안 청소를 하는 거예요. 호텔 청소하는 분들이 방마다 다니면서 죽 청소하듯이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에게 수난 받고 고통 받는 선지자 입장에서는 사적인 입장에서 ‘아, 하나님, 분하고 원통합니다. 왜 나입니까? 왜 내가 이렇게 수난 받아야 합니까?’ 라고 할 수 있겠지만 주님입장에서 볼 때는 눈 하나 깜짝도 안합니다. 왜냐하면 소모품이니까요.
(하나님) “어이, 선지자! 네가 한 번 들어가 봐라.”
(선지자) “왜요?”
(하나님) “욕 얻어먹어야지.”
(선지자) “저 욕 얻어먹었습니다. 억울합니다.”
(하나님) “알았다. 알았어.”
(선지자) “억울합니다.”
(하나님) “알았다니까!”
(선지자) “너무 너무 억울합니다.”
(하나님) “어허이, 알았어. 내가 다 알아서 할 테니까 너는 그만 끝났고 다음에는 누구를 보내서 욕을 얻어먹게 할까? 어, 저 스데반을 보내야 되겠구나.”
(스데반) “저는 돌에 맞아 죽었습니다.”
(하나님) “알았다. 알았어.”
아무리 선지자가 고난 받고 수난 받는다 할 찌라도 여전히 하나님의 일이 수난 받고 취소되는 법이 없습니다. 여전히 ‘하나님의 말씀에 응하게 하려 함이라.’ 해서 주께서 북쪽도 내보내고 남쪽도 내보내고 다 보내서 이곳을 청소하고 난 뒤에 다시 들어오게 하는 겁니다. 이 얼마나 낙관적입니까? 복음을 믿는 사람처럼 낙관적이고 희망적인 사람은 또 없어야 합니다. 문제는 자기를 안 넣기만 하면 되는 거예요.
남쪽에 요시아라는 왕(대하 34-35장)이 있습니다. 요시야 왕만큼 훌륭하게 개혁하고 요시아만큼 유월절을 성대하게 지킨 왕도 또 없습니다. 요시아는 어느 정도냐 하면 이미 잘려서 다리도 없는 북쪽의 지파들까지 초청해서 전 이스라엘이 여기서 유월절을 지켰습니다.(35:18)
이미 아사시대때부터 에브라임, 므낫세, 시므온 지파에서 ‘나는 신앙없는 곳에서 못살겠다.’ 고 하면서 많이 건너왔었습니다.(대하 15:9) 그만큼 하나님의 정신이 살아 있는 쪽으로 많이 움직인 겁니다. 그 당시 스마야, 아사랴, 하나니 같은 선지자들이 말을 할때 왕들이 말을 곧 잘 들었습니다. ‘이번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이니 당신은 끼어들지 말고 찬양대로 하여금 찬송을 부르게 하라.’ ‘알겠습니다.’
그런 식으로 곧 잘 말을 들었는데 북쪽 아합 같은 사람들은 선지자에 대해서 아주 반발이 심했습니다. 그래서 그쪽 선지자들이 수난을 많이 받았습니다. 남쪽 선지자들의 경우에는 그에 비해서 피해를 덜 받았습니다. 문제는 여호사밧이 혼인정책을 통해서 싸움하는 것을 중지함으로 말미암아 인위적인 조작을 가해서 마치 다윗의 평화, 솔로몬의 평화를 이루겠다고 할 때에 예후, 하나니, 엘리에셀 같은 선지자들이 강력하게 저지하고 반발했습니다.
처음에는 말을 좀 듣더니만 갈수록 점점 말을 안 들어요. 여호사밧 다음왕인 여호람왕은 아예 대놓고 아합이 자기네로 끌어들인 모든 문화를 다 수입해 버렸습니다. 그 왕은 아마도 그의 부인 아달랴(아합과 이세벨사이의 딸)가 시켜서 그렇게 했을 것이라는 설이 많습니다.(왕하 8:16-18) 여호람 다음 왕인 아하시야는 괜히 남의 전쟁 구경하다가 맞아 죽은 인간입니다.(대하 22:5-9)
북쪽이 아합왕은 나봇의 포도원사건으로 유명하고 그 뒤로 아하시야 - 요람으로 이어지는데 이쪽은 정말 개판입니다. 아하시야 왕(왕상 22:51-왕하 1:16)은 난간에서 떨어져서 병이 들자 그것을 여호와께 묻지 않고 에그론의 신 바알세붑에게 갔습니다. 그 때 엘리야가 ‘너는 반드시 죽는다.’ 고 했습니다.
그 말 했다고 엘리야를 잡아 죽이기 위해서 무려 50명의 군사를 보냈습니다. 언론노조 집회 한다고 전투경찰 2천명 보내는 것과 같습니다.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서 50명을 불살라 버렸습니다. 약이 오르니까 50명 또 보냅니다.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서 또 불살라 버렸습니다. 제가 열왕기하 1장의 그 대목을 보면서 무엇을 느꼈느냐 하면, 왕이 객기 부리느라고 보내는 그 군사들이 군에 입대하기 전까지는 다 귀한 집 자식들 아닙니까?
나중에 제대하고 나면 모두 국가의 훌륭한 일군이 될 사람들인데 그 왕이 객기를 부려서 무려 100명이나 죽었습니다. 아하시야왕이 독이 올라서 50명 또 보냈습니다. 그 때 마지막 50명의 오십부장이 처음부터 빌면서 들어갔습니다. ‘선지자님 살려주십시오.’ 그런 객기로 사건을 일으킨 왕이 아하시야입니다. 그 뒤 요람이라는 왕은 앞의 왕들과 좀 달랐습니다.
이 요람(혹은 여호람)왕은 엘리사를 먼저 찾았던 사람입니다. 북쪽 이스라엘에서는 수도를 변경하곤 했습니다. 여로보암왕은 세겜에서 시작해서 부느엘로 옮기고(왕상 12:25) 또 오므리왕은 수도를 사마리아로 바꾼다든지(왕상 16:24) 하는 식으로 자기정권의 정통성을 지키면서 자기역사를 새로 쓰는 시도를 했던 겁니다.
그런데 요람왕때에 북쪽 변방의 아람군대(벤하닷왕)가 사마리아성을 포위하고 심하게 압박을 가하고 있었는데 그 포위로 인해서 얼마나 백성들 사는 형편이 심각했던지 지나가는 임금에게 백성들이 즉석재판을 요청했습니다.(왕하 6:24-33) 재판의 내용인즉 백성중에서 ‘오늘은 내 아이를 삶아서 나눠먹으면 내일은 네 애를 삶아먹자.’고 약속을 했던 겁니다.
그래서 약속대로 자기 집 아이를 삶아먹고 그 다음날 저쪽 집 아이를 삶아먹으려고 하는데 그 아들을 숨기고 안내놓는 거예요. 그래서 재판을 요청한 겁니다. 백성들의 그런 청원을 요람왕이 듣고는 너무나 화가 나서 그런 사태를 야기 시킨 엘리사를 죽이기로 작심합니다. 또 요람왕 때의 유명한 사건이 나아만 장군이 문둥병 낫는 사건입니다.
아람나라에 포로로 잡혀 있던 이스라엘의 소녀의 말을 듣고 나아만이 이스라엘의 요단강에 몸을 일곱 번 담그고서 병이 나았다는 그 사건(왕하 5:14)의 시대도 요람왕의 시대입니다. 이런 사건들을 보면 이스라엘을 지키는 것은 왕들의 객기가 아니라 엘리야, 엘리사같이 수난 받고 욕 얻어먹는 선지자에 의해서 다윗언약대로 이스라엘 나라가 계획대로 차질 없이 일이 잘 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오늘날 교회가 목사, 집사, 장로 문제가 많이 있다 할 찌라도 성도 같으면 뭘 알아야 되느냐? 교회에 별별 문제가 다 있고, ‘우리가 누군가에게 당했다, 혹은 욕을 얻어먹었다’ 하더라도 세상 모든 일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응하도록 되어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은 하나님 보시기에는 하등 중요하지도 않고 웃기는 이야기가 되는 겁니다.
‘누구누구 때문에 교회 안 나온다.’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 보면 제가 봐도 웃기는데 하나님보시기에 얼마나 웃기겠습니까? 말씀이 그대로 응하고 이루어지는데 있어서 객기부리는 왕이나 피해보는 선지자들이나 양쪽 다 일종의 소모품에 지나지 않습니다. 대본은 따로 있고 그 대본의 연기 한 부분을 담당하는 연기자에 불과한 거예요.
이스라엘이 자기들 주변에 진치고 있는 소소한 나라들, 암몬, 모압, 에돔등의 나라들을 보면서 자기들 딴에는 ‘이 정도쯤이야 물리칠 수 있겠지.’ 하면서 선지자 말도 곧잘 듣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어떤 결과를 가지고 계시는가 하면, 아예 감당도 못할 아주 엄청난 몽둥이를 준비하고 계셨습니다.
아람보다 더 북쪽에서부터 내려오는 앗수르라는 나라는, 그 어떤 왕도, 심지어 요시아라는 왕조차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그림 1) ‘아브라함경로’ 를 봅시다. 아브라함의 이동경로가 나와 있습니다. 갈대아 우르(현 이라크) - 바벨론(현 이라크) - 마리 - 하란(터키의 남쪽) - 다메섹(현 레바논) - 세겜(이스라엘) - 브엘세바(이스라엘) - 소안(이집트)까지 갔다가 다시 브엘세바로 돌아오는 여정을 겪는데 앗수르는 지도에서 보이는 우르 바벨론 이런 지역일대를 다 점령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적들을 동원시킬 때 넓은 범위에서 동원시키는데, 이스라엘과 유다는 넓은 범위의 적들은 모르고 자기들 코앞에 있는 아람, 암몬, 모암, 에돔, 블레셋, 뵈니게 등만 상대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이루기 위해서 예상한 것 이상의 엄청난 폭풍을 동원시켜서 아예 잿더미를 다 만들고 맙니다.
예례미야, 이사야같은 선지자들은 이미 큰 폭풍이 온다는 것을 예언했습니다.(사 10:5,6) 이사야 같은 경우에는 ‘고레스라는 사람이 다시 회복할 것이다. 그가 메시야다.’(사 45:1-4) 할 정도로 수백 년 앞을 다 내다보고 있습니다. 여로보암 시대의 어떤 선지자는 ‘당신이 세운 이 산당의 모든 제사장은 300년 후의 요시아왕 때에 다 뭉개질 것이다.’(왕상 13:2) 라고 다 예언했습니다.
그걸 보고 ‘와, 세다.’ 할 수도 있는데, 하나님이 주신 것은 300년이나 30년이나 천년이나 아무 차이가 없는 게 그게 뭐가 어려운 겁니까? 알려주는데 알릴 도리밖에는 없죠. 그만큼 선지자의 시야는 넓은 겁니다. 그런데 선지자가 그런 소리를 해도 아하스나 히스기야나 이런 사람들은 모릅니다. 그저 자기 사는 것, 자기 나라 보존하는 것, 그 것 밖에는 모릅니다.
소위 신앙이 있다는 이 작자들도 세상을 넓게 볼지 모르고 좁게 봐요. 큰 것이 몰려 오는 지는 모르고 작은 것을 가지고 이야기를 합니다. 제가 얼마전에 그런 설교를 했습니다. 어떤 사람이 ‘당신 죄인입니다.’ 하니까 ‘예, 죄인 맞지요.’ ‘어째서 죄인입니까?’ 물으니까 ‘방귀 끼고 코 흘리고 ….’
그런 것은 죄 축에도 못 들어갑니다. 영영한 지옥불속에 들어갈 수밖에 없는 것이 죄지 살면서 실수하고 실패하는 것은 죄 축에도 안 들어가요. 큰 덩어리가 온다는 것을 몰라요. 선지자의 시선에 근처도 못가는 거예요. 요시아가 믿음 좋고 훌륭한 것 압니다. 애굽군대가 바벨론과 싸우기 위해서 유브라데강가로 올라오니까 요시아가 애굽군대를 막겠다고 하나님이 시키지도 않은 짓을 하다가 전사하고 맙니다(대하 35:20-24, 렘 46:12).
그렇게 훌륭한 요시아, 그렇게 훌륭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더니 전사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것을 보고 보수주의 학자들은 ‘요시아가 잘 죽은 것이 아니냐? 그 뒤에 다가올 험난한 꼴을 안 보게 되었으니 결과적으로 잘 죽었다.’고 요시아의 죽음을 이해하기도 하는데 그것은 우리 개인적인 입장에서 변명하는 것에 불과한데 그렇게 변명하지 말고 어차피 유혼정치, 귀신정치 아닙니까?
다윗언약이 살아 있는 한 선지자가 있으면 그것으로 된 겁니다. 앗수르 다음에 바벨론이라는 나라가 등장하는데 북쪽은 앗수르에 의해서 망하고(왕하 17:1-6) 남쪽은 바벨론이 칩니다(왕상 25:1-7, 대하 36:5-16). 이것을 이사야가 예언했고 예례미야가 수차례 예언했습니다.(렘 21:1-7) 그런데 그것을 듣는 사람들은 자기 입장만 생각해서 ‘망했다. 망했다. 이제 우리는 망했다.’ 합니다.
망한 것 아닙니다. 가짜가 제거되는 것이지 망한 것이 아닙니다. 가짜란 자아이미지입니다. 그 가짜인 자기이미지가 자꾸 눈앞에 보이니까 내가 사는 시대에 내가 원하는 국가 이미지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것이 자신의 소박한 포부인지는 모르겠습니더만 그 소박한 포부란 자아와 합쳐져서 생겨난 엉뚱하고도 일방적인 자아의 세계 아닙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과 대조를 해 봐야지요. ‘하나님, 저는 소박하게 이것만 되면 족합니다.’ 라고 할 때에 말씀과 한 번 대조를 해 봐야 된다는 말입니다. 신학교 다닐때에 신학자나 그밖에 다른 사람들로부터 ‘큰 교회가 복음적으로 문제점이 많고 큰 교회에 있다 보면 물든다.’ 하는 이야기를 듣고 난 뒤에 하는 소리가 ‘하나님, 저는 큰 교회 바라지 않습니다. 그저 100명 정도만….’
그것은 자기딴에는 소박할지 모르겠습니다. 자기딴에는 낮춘다고 낮춘겁니다. ‘남들은 3000명을 구한답니다. (세상에 그런 이단들이 다 있나? 3000명씩이나 구하는 그 욕심이 다 뭔가? 교회가 무슨 장터인가?) 저는 그렇지 않습니다. 딱 50명만 구합니다.’ 그렇게 합니다. 50명을 원하는 그것은 이단이 아닙니까? 자기 딴에는 그것이 소박한데 그런 마음을 성경전체와 대조해 보았습니까?
사도바울이 어떻게 살았으며, 스데반 집사는 어떻게 살았으며, 베드로는 어떻게 죽었으며 야고보 사도는 어떻게 살았는지, 실제 성령 받은 사람들이 어떻게 살았는지, 그것과 자기가 소박하다고 여기는 그 정신 상태와 대조를 해 봤는가, 하는 겁니다.
성경 속에 성령 받은 분들과 대조하는 것이 아니고 기껏 대조하는 것들이 만날 홍 정길, 옥 한음, 하 용조, 이 동원, 박 영선, 성경에 나오지도 않는 이 근호, 그런 사람들과 왜 대조합니까? 그런 인간들은 성경에 나오는 선지자도 아닌데요. ‘말씀이 응하게 하려 함이라.’ 그 소리를 지금 장난처럼 여기고 있는 겁니다.
마태복음에 보세요. 예수님이 일 한번 벌일 때마다 그 뒤에 그림자처럼 따라오는 것이 있습니다. ‘말씀이 응하게 하려 함이라.’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영원히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이것을 사람들이 농담으로 들어요. ‘내가 원하는 소박한 그것을 성경에서 보고 싶습니다.’ 하나님께서 안보여줍니다. ‘차리리 네가 성경을 아예 대신 쓰고 새로 써라.’ 그렇게 이야기 합니다.
사도행전의 마지막을 보세요. 사람들은 교회에 와서도 ‘희망의 2009년도!’ 그렇게들 이야기하고 외치는데 사도행전 28장 마지막에 뭡니까? 그게 희망입니까?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고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한다.’ 라고 끝나버립니다. 그런데도 사도바울은 절망이 없습니다. 왜? 그는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것을 믿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지금 구약에서는 땅을 청소하는 거지요. 마지막 때는 새 하늘과 새 땅만 남기기 위해서 헌 하늘과 헌 땅을 불에 전부 태웁니다. 불에 탈 때 그 모습을 보면서도 새하늘과 새땅을 위해서 탈것은 타야 된다고 믿는 사람이 누가 있느냐, 하는 말이죠. 성령을 받은 사람만이 그것을 안다는 말입니다. ‘목사님, 나중에 불에 탈 때 그때 알겠습니다.’ 불에 탈 때 알지 말고 지금 알아야 됩니다. 지금!
지금 멀쩡하게 푸른 하늘, 맑은 공기 마시면서 산과 들이 멀쩡하게 그냥 있을 때 ‘이것들 다 불에 타서 없어진다. 왜? 말씀에 그렇게 되어 있으니까.’ 라고 그렇게 믿어져야 된다는 말입니다. ‘구름타고 오리라.’ 그러면 구름의 밀도가 얼마이며 예수님의 몸무게는 얼마인지, 그런 것을 따진다고요. 그러면 성경에서 당나귀가 말하는 것에 대해서 이야기를 좀 해보라고 하지요.
지난 크리스마스 연극할 때 제가 대본을 쓰면서 다섯 번을 바꾸었습니다. 대본 중에 ‘달인을 만나다’라는 대목이 있습니다. ‘16년 동안 기적만 행해왔던 김 달인 씨를 모셨습니다.’ 그 때 사회자가 묻습니다. ‘어떤 기적을 행하셨습니까?’ 그 기적의 달인이 ‘… 기적을 행했습니다.’ 라고 하겠지요. 그런데 당나귀가 말을 하는 기적 앞에서 기적을 자랑할 수 있는 사람 있으면 나와 보라고 하세요.
집에 가서 개 한 마리 사놓고 말을 한번 시켜 보라니까요? 안됩니다. 당나귀가 말을 하는것이 안되거든요. 인간이 알고 있는 과학이라는 것은 수동적이라서 자기 편리한 대로 실용성만 따지지 전체를 부수고 달려드는 그 말씀의 선지자의 안목은 아무리 과학적으로 규명을 한다 해도 과학으로 접근이 불가능합니다.
그런데 오늘날의 구약학의 구약해석은 해석이 아니고 고고학입니다. 처음에는 추춤추춤하면서 역시 성경이 최고이고 고고학은 나중이다, 그런 식으로 했는데 나중에는 강아지를 안방에서 키우면 결국에는 안방 차지한다는 이야기처럼, 성경말씀은 뒷전이고 고고학이 차지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현재 구약학은 성경을 공부하는 것이 아니고 고고학을 공부하면서 ‘성경은 이래서 틀렸고 성경은 이래서 틀렸고…,’ 이런 식으로 합니다.
‘홍해 바다는 실제 바다가 아니고 갈대바다’라는 겁니다. 그것을 보고 창조과학회는 방어한다고 난리를 피우고 있습니다. ‘때리는 시어머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밉다.’ 고 창조과학회가 더 미워요. 왜냐하면 뭘 안 받겠다? 고난을 안 받겠다는 겁니다. 그러나 고린도전서에 보면 성령을 받은 사람은 ‘어리석다’ 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세상 사람에게 어리석게 보이는 그것이 우리에게는 구원의 능력이고 지혜가 된다.’는 말입니다. 자기 자존심이나 챙겨서 어리석지 않게 하려고 할 필요가 없습니다. 세상의 어떤 인물이 구원하는 것이 아니고 말씀이 작용하면 구원하는 거예요. 그러나 그 말씀과 더불어서 우리는 고난 받아야 되는 겁니다.
여호야김왕은 예례미야를 죽이려고 한 사람입니다. 요시야 왕에게 세 아들이 있습니다. 엘리야김(여호야김), 여호아하스, 시드기야입니다. 요시야의 둘째아들인 여호아하스가 먼저 왕이 되고(석달재위) 여호아하스는 애굽왕 느고에게 폐위당한 뒤에 애굽으로 볼모잡혀가고 그 애굽왕의 손에 의해서 그 형인 여호야김이 왕위에 앉게 됩니다(대하 36:1-4, 왕하 23:31-33).
여호야김 뒤에 그 아들 여호야긴이 왕위를 잇는데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바벨론으로 잡아가고 바벨론 왕에 의해서 요시아의 막내아들 시드기야가 유다의 마지막 왕이 되는데 시드기야를 끝으로 유다왕조는 멸망하게 됩니다.(BC 587년, 왕하 25;1-7) 쉽게 하면 요시아의 두 아들인 여호아하스와 여호야김은 애굽의 똘마니들이었고, 시드기야는 바벨론에 망해버렸습니다.
아무리 요시야왕이 믿음좋다, 믿음좋다, 해도 앗수르 몰려오고 바벨론 몰려오면 잘리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성경 보면서 ‘요시야왕은 참 아깝다. 이 사람이 먼저 태어나서 진즉부터 통치했으면 이스라엘이 크게 부흥되었을 것이 아닌가?’ 그게 성경해석을 잘못한 겁니다. 이스라엘은 망하도록 되어 있는 거예요.
이스라엘은 귀신정치, 유혼정치, 보이지 않는 언약이 정치를 해야 됩니다. 이것이 중요한 대목입니다. 언약, 사람들이 보기에 어리석게 보이는 그 지혜, 말씀이 응해서 이루어지는 것인데 그것을 흉내 내고 그것을 모방해서 교회라는 이름으로 껍데기 인간적인 지도자 행세하면서 설치는 것들, 이 사람들이 주의 일을 한다고요? 천만의 말씀, 그들은 개 오줌 누듯이 자기영역만 넓히는 겁니다.
우리교회 근처에 교회 세우지 말라, 하는 식으로 개들이 오줌 찍찍 갈기면서 자기영역 표시하듯이 자기영역만 넓히고 있는 거예요. 그 사람들이 예수님 십자가 때문에 우는 것이 아닙니다. 교인들이 자기교회에 나왔다가 옆에 교회로 가는 그것 때문에 울어요. 제가 설교시간에 그런 이야기 했습니다. 교회에도 카스트제도(계급)가 있어서 교회에도 귀족층과 서민층이 있다고 했습니다.
교회 귀족층은 십일조 하는 사람이고 그 뒤로 5퍼센트 하는 사람, 보통 때는 5천원, 만원 내다가 어쩌다가 감사헌금 십 만원도 내는 사람, 제일 마지막에 천원 내는 점심값도 안 나오는 사람이 죽 서열화 되어 있습니다. 진짜 복음을 위하는 설교자라면 ‘하나님의 말씀 안에 있는 교회는 절대로 여러분들의 눈에 보이고 소망하는 그런 교회가 아니올시다.’라고 외치는 설교자가 되어야 합니다.
자기교회를 부술 수 있어야 그게 설교자입니다. ‘그러다가 진짜 부서지면 어떻게 합니까?’ 그런다고 부서질 것 같으면 그것은 진짜 교회도 아니죠. 어줍잖은 인간목사가 깬다고 깨질 교회 같으면 그것은 교회가 아닙니다.
아마스왕 같은 경우에는 개인적으로 에돔나라에 한이 맺혀서 군대를 모으고 이스라엘에서 용병까지 모았습니다. 그때 어떤 이름도 없는 선지자가 와서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하고 말렸습니다.(대하 25:5-8) 그러니까 아마샤가 생각하기를 ‘아하, 사적인 보복으로 에돔을 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는 말은 에돔을 치는 일에 실패한다는 뜻이렸다. 그러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면 내 뜻을 이룰 것이다.’
이런 계산을 해서 용병을 원래대로 돌려보냈습니다. 돌려보내니까 기껏 취직하러 왔던 북쪽의 용병들이 비정규직이라 회사 갑자기 잘리면 촛불집회 하듯이 돌아가면서 분한 김에 유다 성읍들을 초토화시켰습니다(대하 25:13). 그런 일이 있고난 뒤에 이스라엘왕 요아스에게 시비를 걸었습니다. 그러자 요아스왕이 비웃으면서 ‘레바논의 가시나무가 백향나무한테 딸을 며느리로 달라 하느냐?’ 했습니다.
그 전쟁에서 하나님께서 붙이시매 어설픈 북쪽이 정통 남쪽의 아마샤 군대를 대패시켜서 아마샤는 포로로 잡혔다가 겨우 살아났습니다.(대하 25:22-24) 결국 백성들에게 비난을 받았습니다. 요람(남)이라는 왕은 에돔도 이겼던 괜찮았던 왕이고 아하스는 아예 막가는 인간이었습니다.
아하스 시대에 유명한 예언이 나왔습니다. ‘처녀가 잉태하여 아이를 낳으리라.’(사 7:14) 웃시야(남)나 여로보암 2세(북)때는 먹고 사는 것이 괜찮았을 때입니다. 여로보암 2세때 활동했던 선지자가 요나, 아모스 선지자들입니다. 그들이 빈부의 격차에 대해서 아주 심하게 고발하는 대목이 나옵니다. 무역항과 무역업이 발달하면서 나라살림이 윤택해졌습니다.
그 동안 이스라엘의 경제는 농사를 바탕으로 한 자급자족경제가 대세였는데 갑자기 수출을 위한 집약산업으로 정책이 바뀌게 됩니다. 아합의 시대에는 사마리아와 아람의 다메섹이 경제특구를 조성하기도 했습니다. 유다나 이스라엘이, 농사만 지어서는 나라가 부강할 수 없다는 것을 이미 이방나라에게 배운 겁니다. 그래서 수출추진정책을 쓴 겁니다.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국가라는 개념이 원래 없습니다. 같은 동족끼리 자기 먹을 것 자기가 생산하면 그것으로 끝입니다. 아까 이야기한 잉여를 노릴 하등의 이유가 없습니다. 자급자족의 농경제가 유지되려면 가족이 흩어지면 안 되기에 사촌끼리도 결혼을 해서 한 가족을 이루어서 한 부족을 이루고, 그 부족이 모여서 지파를 이루었던 겁니다.
사울 같은 경우에는 베냐민 지파이기에 자기지파에서 농사를 짓는 겁니다. 왕이 필요 없습니다. 위급한 전쟁의 경우에는 지파마다 인원을 차출해서 모였다가 전쟁이 끝나면 다시 흩어지는 식이었는데 그래서는 전문적인 군대(킬러)가 양성이 되지 않습니다. 농사만 짓는 사람이 갑자기 태권도가 됩니까? 전문적인 군대를 키우려면 군사고문관이 있어야 되고, 국가가 군대를 유지할 수 있는 여유자금이 많이 있어야 됩니다.
여러 사람이 한사람처럼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전투 병력이 되려면 집체훈련, 집중훈련이 필요합니다. 거기에 지도자가 필요하고 그 최종 우두머리가 왕이 되는 겁니다. 거기에 대한 비용은 어디서 대는가? 무역을 통해서 이윤을 얻어야 되는 겁니다. 과거 프랑크왕국을 비롯한 중세 때의 모든 유럽 국가들은 왕이 없었습니다.
전쟁이 터져서 위급할 때 같은 경우에 왕을 세워서 군사를 동원할 수 있는 권한과 치안을 담당하는 권한을 줘서 전쟁을 치르고 전쟁이 끝나면 원래대로 각기 영주의 권한 밑으로 들어가는 봉건제도하에 있었습니다. 왕이 없지만 전쟁 때에는 왕이 필요하고 그 왕은 절대군주가 되어야 했습니다.
나중에는 그것이 뒤집어져서 ‘너만 좋은 것을 먹나? 우리도 먹어야겠다.’ 하는 식으로 부르조아라고 불리우는 시민상공업체가 세력화해서 의회를 만들고 이제는 국가가 신분이 아닌 법에 의해서 모든 사람이 모든 사람의 대우를 받는 민주주의가 시작된 겁니다. 그 민주주의 바이러스가 현재 콜라 마시는 아프리카 부시맨들에게까지 다 전파되어서 물든 겁니다.
부시맨들이 달랑 팬티 같은 거 입고 사냥이나 하던 사람들에게 자본주의가 전염되니까 TV를 통해서 드라마 같은 것 다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기름 값 오르고 원자재 값 오르니까 다 굶어죽게 생겼습니다. 그전에는 서로 도와주면서 살았던 그 시대가 이제는 기름 값 올랐다 하면 전에는 밥이라도 먹고 살던 아프리카는 오지까지 다 굶어죽게 생겼습니다.
그 소박한 소말리아 사람들이 총 들고 해적노릇 하고 있습니다. 종교? 정치? 그런 것은 안중요합니다. 자본주의에서 중요한 것은 살아남는 것입니다. 소떼 몰고 가는 <오스트레일리아>라는 영화에서 보듯이 소를 키우는 것이 낭만적이고 목가적인 일이 더 이상 아닙니다. 기업이고 기업은 게임입니다. 저쪽 기업과의 경쟁에서 내가 이겨야 군대에 납품할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됩니다.
외부에서 보면 소농장이 아름답고 목가적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 기업을 한번 맡아보세요. 그게 아름다운가. 컴퓨터 화면 들여다보면서 국제 소 가격변동 살펴야 되고, 사료 값 얼마나 뛰나, 그것 쳐다보고 있어야 됩니다. 도대체 사는 것이 사는 것인지 죽는 것인지 모릅니다. 그렇게 살다가 어느 날 갑자기 ‘나 유황불속에 와 있을 뿐이고….’
가장 나라가 융성할 때 선지자의 말을 듣지를 않았어요. 그래서 호세아, 아모스가 빈부의 차이를 격하게 꾸짖게 된 경위는 소위 특화사업 때문에 자기의 직업을 다 버리고 수출드라이브정책에 매진했던 사람들이 날이 갈수록 제때에 상품을 만들어내지 못했습니다. 추가적인 상품을 만들어내지 못하면서 벌금을 물면서 차압당하고 급기야 노예로 전락하게 되는 겁니다.
거기에 대해서 호세아, 아모스는 ‘옛날 출애굽 때 하나님이 주신 그 상태로 돌아가라. 이방나라 본받지 말라.’ 고 그렇게 외쳤지만 왕들과 거짓선지자들이 죽이려고 달려들었습니다. 아하스라는 왕은 신이란 신은 뷔페식으로 다 섬긴 왕입니다. 자기자녀를 불살라서 제사하는 짓까지 서슴치 않고 다 했습니다(대하 28:1-4).
이사야 선지자가 하는 말이 ‘아하스 왕이여, 하나님의 징조가 떨어질 것이다.’ ‘나는 하나님의 징조 같은 것, 안 구한다. 내가 하나님을 괴롭게 할 것이 뭐가 있느냐?’ ‘그게 아니고 너는 잘렸다는 말이다. 당신은 잘렸다.’ ‘그럼 남은 자는 누구인가?’ ‘여기 있다. 임마누엘’ ‘그것은 누구집인데?’ ‘누구집이 아니고 처녀가 애를 낳는다.’
보통 아이를 낳으면 누구의 아버지, 이렇게 하거든요. 그런데 처녀가 애를 낳으니 아버지가 없어요. ‘아버지 없는 애를 낳아서 하나님의 열심으로서 새로운 이스라엘을 일으킬 것이다.’ 이사야가 고레스를 지나서 신약성경 마태복음 1장까지를 다 내다 본 거예요. ‘이름도 있다.’ ‘뭔데?’ ‘비로소 그때에야 하나님이 함께 있을 것이다. 비로소, 임마누엘!’
신약과 구약이 어떻게 연결되는가? 그것은 유혼정치, 선지자들이 다윗언약을 고수하면서, ‘모든 인간들은 알아듣지도 못한 채 엉망진창인 가운데 선지자들은 순교당하더라도 그러한 수풀과 가시덤불속에서도 유유하게 70년 만에 돌아올 것이다.’ 합니다. 그런데 다니엘에 들어가면 70년이 아닙니다.
다니엘에서는 70이 아니고 70×7 해서 여기에 창조의 의미가 붙여집니다. 70이레가 나옵니다. 시간상으로 일주, 또 일주 하다가 70이레가 되어버리면 비행기가 부웅, 날아가 버리듯이 지상의 인간적인 시간개념과 결별을 선언하면서 묵시적세계가 됩니다. 천년이 하루같이 하루가 천년같이 된다는 겁니다.
다니엘 10:23-27
“곧 네가 기도를 시작할 즈음에 명령이 내렸으므로 이제 네게 고하러 왔느니라 너는 크게 은총을 입은 자라 그런즉 너는 이 일을 생각하고 그 이상을 깨달을 찌니라 네 백성과 네 걸룩한 성을 위하여 칠십 이레로 기한을 정하였나니 허물이 마치며 죄가 끝나며 죄악이 영속되며 영원한 의가 드러나며 이상과 예언이 응하며 또 지극히 거룩한 자가 기름부음을 받으리라 그러므로 너는 깨달아 알찌니라 예루살렘을 중건하라는 영이 날 때부터 기름부음을 받은 자 곧 왕이 일어나기까지 일곱이레와 육십이 이레가 지날 것이요 그때 곤란한 동안에 성이 중건되며 거리와 해자가 이룰 것이며 육십이 이레 후에 기름부음을 받은 자가 끊어져 없어질 것이며 장차 한 왕의 백성이 와서 그 성읍과 성소를 훼파하려니와 그의 종말은 홍수에 엄몰됨 같을 것이며 또 끝까지 전쟁이 있으리니 황폐할 것이 작정되었으니라 그는 장차 많은 사람으로 더불어 한 이레 동안의 언약을 굳게 정하겠고 그가 그 이레의 절반에 제사와 예물을 금지할 것이며 또 잔포하며 미운 물건이 날개를 의지하여 설 것이며 또 이미 정한 종말까지 진노가 황폐케 하는 자에게 쏟아지리라 하였느니라.”
예례미야같은 경우에는 70년 만에 돌아온다고 해서 BC 605-70=535년, 이것이 다니엘이 예언한 때부터 학개 성전을 다시 지을 때까지의 그 기간이 70년이 됩니다. 하지만 그것은 역사적인 70년이고 다니엘은 70이레라고 함으로써 시간에 구애받지 않는 초시간적인 70이레를 말했고 마지막 제일 끄트머리의 한이레는 십자가부터 마지막 재림까지의 전체를 포괄적으로 뜻한 겁니다.
그 이레는 뭐냐? 새로운 시간이 등장할 때는 새로운 인물이 등장하죠. 그 인물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 처녀가 낳은 아기, 그 인물이 새로운 시간개념으로서 모든 자기 백성을 새로운 시간 속으로 끌어 올린다는 약속을 다니엘을 통해서 한 겁니다.
히스기야왕 때에 ‘앗수르 왕 산헤립이 쳐들어왔다가 천사가 그들의 군대 18만 5천명을 하루 아침에 송장을 만들었다.’(왕하 19:20-35)고 했지요. 그런데 히스기야가 얼마나 철이 없는지 바벨론에서 사신이 왔을 때 그 바벨론이 선지자가 예언한대로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준비해 두신 몽둥이라는 생각은 안하, 또 구원될 생각은 안하고 자기 입장만 생각해서 ‘바벨론의 사신들이여, 보세요. 제가 금과 은을 이만큼 모았습니다.’(왕하 20:12,13) 라고 자랑하고 있더란 말이죠.
이사야가 예언합니다. ‘다 빼앗길 것이다.’(왕하 20:16-18) 라고. 히스기야가 병들었을 때에는 이사야가 ‘당신이 죽을 것이다.’ 라고 하니까 죽으면 그냥 죽으면 되는데 죽는다고 또 난리를 피웁니다. 그 때 이사야가 기적을 베푸는데 ‘15년 동안 연장될 것이며 그 징조는 해그림자가 10도를 물러갈 것이다.’ 라고 합니다.
그런데 해시계가 여기 세워져 있다고 합시다. 해시계의 기적이 재미있는 것은, 보통 기적은 자신이 관찰자고 그 기적의 현장에서만 기적이 보이는데, 해시계의 해 그림자의 경우는 들여다보고 있는 모든 사람들의 그림자도 다 같이 10도가 물러갑니다.
해시계의 그림자가 비춰버리면 해시계의 그림자만 물러가는 것이 아니고 그것을 쳐다보고 있는 우리 모두가 그 기적 속에 이미 합류되어서, 하나님의 말씀은 어느 누구도 예외 없이 함께 휩쓸려 간다는 것을, 히스기야의 철딱서니 없는 기적요구에 맞추어서 다 같이 보여주는 겁니다.
그러니까 아하스, 히스기야, 므낫세…, 전부 다 한꺼번에 앗수르, 바벨론에 의해서 양동이의 물로 확 부어서 ‘에라, 다 사라져라. 껍데기들아!’ 하고 다 날라 갈 사람들인데 고맙게도 그 날려간 그 자리가 어디냐? 바로 다니엘이 끌려갔던 바벨론입니다. 그 바벨론에 포로잡혀 갔던 어떤 사촌남매는 거기서 미스선발대회에서 진으로 뽑혀서 나중에 아하수에로왕의 왕후가 되어서 아름다움이 힘보다 세다는 것을 보여주게 됩니다.(에 2:17,18)
바로 에스더입니다. 어떤 사람은 ‘죽으면 죽으리이다.’ 하는 그것이 장렬하다고 보겠지만 모든 힘은 하나님이 주신 아름다움보다 못한 거예요. 튕겨져서 날아온 돌이 말씀이 따라오니까, ‘죽으면 죽으리이다.’ 말씀에 순종하니까 이방나라도 말씀 앞에서는 껍데기에 지나지 않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번시간 마치면서 당부하고 싶은 것은 우리가 ‘어떤 직장, 혹은 어떤 가정이 되었으면 좋겠다.’ 하지만 그것은 다 자기 욕망에 의한 핑계일 뿐입니다.
어떤 자리이든지 상관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시면 오늘 밤에 낙원에 있습니다. 다 죽으라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10분 쉽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