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2009년 1월 9일 에베소서 5장 1절
서울 2009년 1월 9일 에베소서 5장 1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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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0109 빛(조명빨,용서,가시떨기불꽃)으로만
살도록만(받기만하는) 되어 있는 그리스도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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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03-04 18:47
서울090109a엡5장1절a
에베소서 제 27강 (이 근호목사, 2009년 1월 9일, 서울의존교회)
에베소서 5장을 할 차례입니다. 에베소서 4:32에 보면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고 되어 있습니다. 사람은 누가 만들었습니까? 하나님이 만들었습니다. 그것을 다 압니다. 그러면 다음의 질문도 여러분이 알겁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만들 때 어떻게 만들었습니까? 흙으로 만들었습니다. 제가 그 이야기를 하기 전에도 여러분이 알고 계셨지요?
고린도전서 15장에 보면 ‘흙에 속한 형상’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흙에 속한 형상은 흙으로 돌아갑니다. 그런데 고린도전서 15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을 만들었는가? 흙으로 만든 사람은 그만 만들고 하늘에 올라갈 수 있는 신령한 몸을 만들겠다는 겁니다. 처음에는 사람이 없었고 하나님만 계셨습니다. ‘나’가 없었고, 아빠 엄마도 없었고 어린이여러분은 없었습니다.
우리가 없어지고 하나님만 있어도 ‘오케이’가 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께서 만든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만 있었던 그 시절이 되어도 우리는 좋습니다.’ 라고 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만 계셨는데 그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들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 만들었다.’ ‘오케이!’(무조건 좋다는 뜻으로) 그러면 제가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들었다.’에서 그 만들어진 사람, 곧 ‘나’를 지워버려도 좋습니까?
내가 없어져도 좋아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만 생각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만들어서 좋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나를 지워버려요. 지워버리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처음에 나를 만들 때 뭐로 만들었다고 했습니까? 처음에 흙으로 만들었다고 했지요. 흙으로 만들었으니까 무엇으로 돌아간다? 흙으로 돌아가는 거예요. 흙으로 만들었으니 흙으로 돌아가 버리고 무엇으로 만드는가?
고린도전서 15장에 49절에 보니까, “우리가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은 것 같이 또한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으리라.” 흙에 속한 형상이 따로 있는 것 같이 하늘나라에 갈 형상도 따로 있다는 겁니다. 이것을 흙에 속한 사람이라고 하고, 이 쪽을 하늘나라에 갈 수 있는 신령한 사람이라고 해 봅시다. 하나님께서 흙에 속한 사람을 신령한 사람으로 바꾸는데 흙에 속한 사람은 없애버리고 신령한 사람이 되게 하십니다. 이것에 대해서 좋습니까?
이것이 좋습니까? 나쁩니까? 어린이 여러분은 도로 흙이 되고 말겠습니까, 아니면 천사같이 되고 싶습니까? 천사같이 되어야 하겠지요? 흙에 속한 사람 따로 있고 천사 같은 사람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이 흙에 속한 사람을 천사 같은 사람으로 바꾸겠다는 겁니다. 그 대목을 읽어보겠습니다.
고린도전서 15:44-45 “육이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신령한 몸이 있느니라 기록된 바 첫 사람 아담은 산 영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 그러나 먼저는 신령한 자가 아니요 육 있는 자요 그 다음에 신령한 자니라 첫 사람은 땅에서 났으니 흙에 속한 자이거니와 둘째 사람은 하늘에서 나셨느니라 무릇 흙에 속한 자는 저 흙에 속한 자들과 같고 무릇 하늘에 속한 자는 저 하늘에 속한 자들과 같으니 우리가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은 것같이 또한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으리라.”
어제 밤에 전화를 받았습니다. 어떤 분이 입관예배를 부탁하길래 ‘금요일은 강의가 있어서 못합니다.’ 해 놓았는데 제가 다시 전화를 해서 ‘할 사람이 정 없으면 제가 하겠습니다.’ 했더니 ‘할 분이 정해졌다.’ 고 답변이 왔습니다. 돌아가신 할아버지는 중병에 걸려서 돌아가셨는데 제가 아는 사람이에요.
제가 만일 입관예배에서 설교를 한다면 거기 있는 가족들에게 무엇을 말할까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 가족들이 돌아가신 분을 생각할 때 흙을 빼버리고 그냥 사람이 죽었다고 생각한다면 제가 성경말씀을 전하기가 곤란합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죽은 것이 당연하다고 이야기해야 하는데 그분들이 들을 때 얼마나 화를 내겠습니까?
‘사람이 죽는 것은 당연하고 죽은 뒤에는 과연 악마 같은 사람인지 아니면 천사 같은 사람인지에 대한 심판이 있다’고 했습니다. 이 전부가 어디에 속했습니까? 하나님께서 다 계획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획에 보면 사람이 죽는 것이 포함되어 있고 그 죽은 사람이 다시 천사같이 되는 것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어린이여러분! 세상 근심걱정 하지 마세요.
사실은 어린이는 세상 근심걱정도 하지도 않지요. 세상을 알아야 근심걱정을 하지요. 이것은 어른들보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세상 근심걱정이 왜 생기는가 하면, 하나님의 계획은 안중에도 없고 하나님의 계획은 듣기도 싫어서 그래요. ‘내가 어떻게 사는가?’ 여기에만 몰두하다 보니까 하나님의 계획이 사라지는 겁니다.
성경을 신학에서는 ‘계시’라 하거든요. 계시란 ‘지시 한다’는 뜻입니다. 지시한다는 것은 ‘저기에 누가 있다고 지시한다.’는 겁니다. ‘얘들아, 저기 천국이 있다.’ 고 지시하는 거예요. 그런데 성경을 안 본다는 것은 ‘얘들아, 천국이 저기 있다.’는 말을 ‘그만이야기하세요. 듣기 싫어요.’ 하고 하나님의 지시를 거부하는 것이 됩니다.
이 말이 좀 어렵게 들리지요? 그러면 쉬운 말로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여러분의 가정에는 그런 일이 별로 없겠지만 엄마와 아빠가 싸울 때가 있습니다. 술을 매일 잔뜩 먹고 들어오는 아빠를 향해서 엄마가 화가 나서 하는 말이 ‘여보, 술 작작 먹고 오세요.’ 라고 합니다. 이것이 계시입니까, 계시가 아닙니까? 계시 아니지요. 이것은 ‘똑바로 해.’ 라고 하는 거거든요.
그런데 다음과 같이 말하면 계시인지 아닌지 잘 들어보세요. 역시 술을 잔뜩 먹고 돌아온 아빠를 향해서 소리 지르는 엄마가 있습니다. ‘여보, 술 작작 먹어요. 저기에 공동묘지가 있어!’ 라고 가리킬 때 이것은 계시입니까, 아닙니까? 이것은 계시지요? 그 차이를 아시겠습니까?
첫 번째 이야기한 것은 ‘똑바로 해!’ 인데 이것은 ‘현재 있는 것을 행복하게 살자.’고 잔소리하는 것이고 두 번째 이야기한 것은 ‘여보, 저기 공동묘지가 있는데 계속 술이나 먹다가는 저기 간다.’ 라고 한곳을 지시하고 가리키지요. 이게 계시다, 말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왜 그렇게도 성경을 싫어합니까? 사람들이 성경을 뭐로 봅니까? 성경을 잔소리로 보기 때문에 그래요.
‘똑바로 해! 똑바로 하라, 했잖아. 똑바로! 예수 믿는 사람들은 바르게 살라고 했잖아!’ 이렇게 자꾸 잔소리로 들으니까 ‘밥 먹고 살기 바쁜데 자꾸 바르게 살라고 하니 어떻게 돈 벌면서 나쁜 짓을 할 수밖에 없지 어떻게 착한 일만 하고 바르게 살 수가 있나?’ 자기반성, 자기개선을 하는 것이 성경인양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을 가지고 있으니까 복음을 전하고 성경을 전하는 사람들이 자꾸 무시당하고 천대받는 겁니다.
목사님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 똑바로 하세요.’ 그것이 계시가 아니고 ‘여러분 천국이 있습니다.’ 이것이 계시지요. ‘천국이 있습니다. 십자가가 있습니다.’ 목사는 사람들이 어떻게 사는지를 알 도리가 없으니까 목사님은 그저 계시를 전해야 합니다. ‘똑바로 하란 말이야.’ 그러면 교인들이 이럽니다. ‘너나 똑바로 해라. 세상살이 너도 해봐라. 그게 똑바로 되는지.’
우리가 성경을 대하는 이러한 인식자체가 확실하게 달라지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계시, 이 성경말씀에 의하면 하나님의 계획이 나와 있습니다. 그 계획은 우리로 하여금 흙에 속한 형상이 하늘에 속한 형상으로 바꾸어지는 것이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그렇게 될 때에 누구를 바꾸는가 하면 흙에 속한 우리를 바꾸는 겁니다. 흙에 속한 우리 자신을 신령한 사람으로 바꾸는 작업을 하게 됩니다.
그러면 질문을 하나 하겠습니다. 바꿀 때 어떻게 바꾸지요? 흙에 속한 형상에서 신령한 형상으로 바꿀 때 흙에서 천사로 바로 갈까요? ‘얘야, 흙에서 천사되어라.’ 하면 흙에서 천사로 바로 바뀝니까? 안되지요. 이것은 약간 어렵습니다. 왜 흙에 속한 사람이 천사처럼 안 바뀌느냐 하면 흙에 속한 사람은 흙에 속할 수밖에 없는 성질(또는 속성, 본성)이 있습니다.
흙에 속한 사람이 흙에 속할 때는 어떻게 그리 되느냐 하면, 흙에 속한 사람이 죄를 짓기에 흙으로 돌아갑니다. 흑인이 세수한다고 백인 될 수 있습니까? 흑인으로 태어났는데 백인이 되려고 애를 쓴 사람이 있었습니다. 누구입니까? 뒤로 걷는 사람. 마이클 잭슨. 그 사람은 처음에 흑인으로 태어났는데 백인 되려고 얼마나 애를 썼는지 몰라요.
이 사람은 자기 속에 흑인이라는 성질이 있는 것을 모르고 껍데기만 바꾸려고 하는데 그것과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흙에 속한 사람이 있고 천사 같은 사람이 있다.’고 하니까 ‘나도 천사처럼 될래.’ 라고 하는데 여러분, 안됩니다. 왜 그러냐 하면, 우리가 흙에 속했다는 것이 그냥 흙에 속한 것이 아니고 죄를 지어가면서 흙에 속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어떤 말씀을 하셔도 우리가 그 성질에서 벗어나서 ‘자, 난 천사다.’ 할 재주가, 능력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흙에서 천사로 바꾸는 이것은 사람이 한다는 말입니까? 하나님이 한다는 말입니까? 하나님이 하시지요? 그러면 묻습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해서 바꿉니까? 너무 어려우니까 다시 해 봅시다. 흙에서 사람 될 때 하나님이 개입해서 흙에서 사람이 되었는데 하나님께서 어떻게 개입해서 흙에서 사람이 되었습니까?
뭘 제공했지요? 뭘 제공했습니까? 생령, 하나님께서 영을 부어주니까 흙에서 사람이 되었지요? 그런데 그 사람은 흙에서 사람이 되었기 때문에 죄짓고 나서는 다시 흙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러면 현재 이 사람은 흙입니까? 사람입니까? 흙에서 사람이 되었다가 다시 흙이 되었으니까 모든 사람은 사람입니까, 흙입니까? 예를 들어 이명박 대통령은 흙입니까, 사람입니까? (사람이오) 죄송합니다. 흙입니다. 흙이 청와대에 살고 있어요.
박 지성 선수가 흙입니까, 사람입니까? 흙입니다. 지나가는 사람보고 성씨가 어떻게 됩니까? ‘최 아무개입니다.’ 그러면 ‘아, 최 흙이군요.’ 지나가는 아주머니 보고 아주머니는 성씨가 어떻게 됩니까? ‘김 아무개입니다.’ 그러면 아 ‘김 흙이군요.’ 그러면 그 사람은 화냅니다. 그러면 제가 이렇게 하지요. ‘진짜 사람이 있습니다. 당신은 사람이지만 이것을 흙이라고 간주했을 때에만 진짜 사람이 눈에 보입니다. 당신은 자꾸 사람이라고 여기니까 진짜 사람이 안 보이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이 만든 신령한 사람이 안 보이는 거예요.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도 흙으로 왔다고 생각하면 되는데 내가 자꾸 사람으로 왔다고 여기니까 진짜 천사 같은 사람이 안 보이는 거예요. 천사 같은 사람이 안보이니까 자꾸 뭐가 보이느냐 하면 나를 천사 같은 사람으로 만드는 하나님의 계획이 안 보이는 겁니다.
내가 흙이며 하나님이 만드실 천사 같은 사람이 따로 있다고 생각할 경우에만 누가 좋으냐? 예수님이 좋고 하나님이 좋은데, ‘하나님, 내가 세상에서 이런 어려운 일을 당했으니까 빨리 보상해 주세요. 빨리 이 어려움을 회복해 주세요.’ 라고 들이밀면 하나님의 계획이 별로 안 좋아요. ‘하나님, 빨리 기적을 베풀어 달란 말이야. 내가 당신에게 헌금을 얼마를 했고 봉사도 많이 했으니까 내가 원하는 대로 그런 모습을 만들어 내라는 말이야.’
이렇게 윽박지르면 하나님께서 원하는 것은 천사 같은 사람을 만들어 내기를 원하는데 그 사람은 자기의 원함, 자기가 손해 본 것을 보충해 달라고 빌면서 그렇게 복달라고 하는 거예요. 진짜 복은 천사 같은 사람이 되는 이것인데. 진짜 복은 뭐냐? 천사 같은 사람이 있고 나는 지금 흙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그것이 복입니다.
내가 지금 하루 세끼를 먹고 어떻게 살든지, 나는 지금 흙으로서 아파트에 살고 흙으로서 교회 다니고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을 때, 하나님의 어떤 작용에 의해서 내가 천사 같은 사람이 되느냐, 거기에 대해서 마음이 즐겁고 기쁠 것이 아니냐, 그 말입니다. 제 말이 틀린 말이 아니지요? 틀린 말이 아닌데도 기분이 별로 안 좋아요. 이상하지요? 어떤 부자가 와서 ‘의존교회 출석하는 사람에 한해서 1인당 10억씩, 애들은 5억씩, 목사님은 한 20억 드리겠습니다.’ 하면 얼마나 감사하고 기분 좋은지 모릅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흙이고 장차 천사됩니다.’ 그만 해라 많이 들었다. 별로 즐겁지도 않고 기쁘지도 않아요. 그만큼 사람은 흙으로 돌아가면서 자기생각만 한다는 그 죄를 평생토록 인간은 안 버리고 살아요. ‘나는 내 생각에서 벗어날 의사가 없습니다. 나는 평생토록 내 생각대로 살 겁니다. 흙이라도 좋다. 지옥이라도 좋다. 까짓 거 지옥이라도 간다. 하지만 나는 하나님의 말씀은 별로입니다.’ 이 왕고집, 이 독한 것!
그래서 오늘 제가 의존교회 여러분의 환상을 다 깰 겁니다. 여러분은 흙입니다. 아주 제가 독하지요? 제가 아까 돌아가신 할아버지 이야기를 했어요. 할아버지 되었으니까 돌아가셨다, 그렇게 하지만 저도 할아버지 되고 여러분도 할아버지 됩니다. 내가 할아버지 될 때 그런 소리하면 기분 나쁘지요. 어쨌든 그분은 우리보다 약간 몇 발자국 앞서서 이생을 떠난 거예요. 우리도 마찬가지로 순서 따라 곧 떠날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도 떠날 때 그런 생각하지 말고 지금부터 왜 떠나는지 하나님의 계획이 뭔지, 하나님의 계획만 알면 오늘 떠나든지, 지금 떠나도 그리 섭섭해 할 필요 없습니다. 그것이 진정한 자유 아닙니까? ‘하나님, 오늘 떠나도 괜찮습니다. 오케이. 섭섭한 것 없습니다. 그 정도 되어야 기쁨이 충만한 것이고 은혜가 충만한 것이고 하나님을 알게 된 보람이 거기에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께 기도해서 돈 몇 푼 얻어 챙기는 것, 돈 얻고 나면 하나님 안 찾을 것 아닙니까? 그리고 돈 떨어져야 돈이나 달라고 하나님 찾을 것 아닙니까? 그렇다면 인간은 자진해서 천사 못된다. 왜? 흙에 속할 때는 흙에 속한 만큼 그 죄가 계속 뿜어져 나오기 때문에 ‘누가 내 몸에 손을 대. 안 돼. 나는 내 몸 내가 알아서 할 거야. 천사가 되든지 악마가 되든지 내 몸이니까 내 몸은 내가 알아서 할 거야. 손대지 마. 하나님도 손대지 마. 내 몸 내가 착실하게 알아서 할 거야.’
이러한 악한 본성, ‘나는 내 나름대로의 계획이 있단 말이야.’ 이런 본성 하에 성경을 백독하고 천 독 하고, 성경공부를 아무리 해 보세요. 이것 천사 안 됩니다. 지금까지는 쉽다 하고 더 어려운 것을 하겠습니다. 이런 것이 참 어렵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들 때 흙으로 살아라. 아무개, 아무개 내가 천사되게 해줄게.’ 이런 식으로 하시면 될 문제를 하나님께서 어떻게 했느냐? 이 문장 잘 들어보세요. 어렵습니다.
흙에 속한 죄악 된 사람들이 죄를 지으면서 살아가는 그 모습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천사같이 신령한 사람으로 만드는 그 모델과 유형을 그 속에서 찾아내기 위해서 죄를 지은 사람들이 그냥 그대로 살게 하신 겁니다. 어려운 소리인줄 알았지만 그냥 했습니다. 이것을 쉽게 풀이하면 이렇습니다. 여러분 바벨탑 알지요? 제 2롯데 월드를 짓는다는데 그게 122층이랍니다. 그 조감도를 보니까 꼭 바벨탑 생각이 나요.
하나님께서 죄를 지은 사람들이 그들이 어떻게 살아가는가, 그것을 하나님께서 지켜보니까 그들이 모여서 탑을 쌓아요. 그 탑이 무슨 탑입니까? 바벨탑입니다. 바벨탑을 높이 짓게 된 것은 무슨 연유냐 하면, ‘바벨탑을 짓는 너나 나나 남자나 여자나 우리는 모두 다 한마음이다. 우리는 두 마음이 아니라 딱 한마음으로 뭉쳐져 있다.’ 고 표를 낸 겁니다.
우리는 무슨 마음? 두마음? 세 마음? 아니지요. 한 마음. 성경을 보면서 이 바벨탑이 한 마음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성경을 해석하는 사람이 참 많이 있어요. 예를 들면 ‘나는 천국이 너무 좋아서 천국가고 쟤는 지옥을 너무나 좋아하기 때문에 지옥 가. 그래서 네 마음과 내 마음은 딴 마음이야.’ 라고 이렇게 자꾸 오해들을 하시는데, 모든 인간은 누굴 만나도 한 마음입니다.
불교신자, 기독교신자, 이슬람신자, 교회 안다니는 사람, 어른, 어린이, 남자, 여자, 건강한자, 병약한 자 할 것 없이 전부 다 똘똘똘, 뭉치게 되어 있습니다.『피』라는 책의 첫 페이지 첫 문장이 뭐냐 하면 ‘사람은 정으로 산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스스로 ‘나 지옥갈래. 너는 천당 가.’ 하든지 ‘나는 천당 갈래. 너는 지옥 가.’ 라는 식으로 사람들끼리 천당과 지옥을 분리해서 천당 가고, 지옥 가는 그런 것은 없다는 거예요.
지옥가고 싶은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마는 천국가고 싶든 지옥가고 싶든 그 마음은 다 한마음입니다. 그 한마음이 탑을 건립하는 정신인데 그 한마음이 뭐냐? 성경에 나오는 대로 제가 적어보겠습니다. ‘우리 이름을 하늘에 닿게 하자.’ 제가 바벨탑 이야기를 했고 그 바벨탑을 쌓는 이유는 ‘흩어짐이 없이 전부 한마음이 되자.’고 했기 때문에 바벨탑이 올라갔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바벨탑을 쌓은 이유가 뭘까요?
제 2롯데월드를 짓는 이유는 상가분양을 위한 것이라면 옛날에 사람들이 바벨탑을 지어서 높이 올린 이유는 너 나 할 것이 없이 한마음이 되기 위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 한마음이 뭐라고요? 다 같이 따라서 해 봅시다. ‘우리 이름을 하늘에 닿게 하자.’ 이것이 바로 한 마음입니다. 그러니까 ‘지금은 땅에 살지만 나중에는 우리가 전부 다 하나님께로 가자.’ 이것이 한마음입니다.
종교지요. 교회 나오는 목적도 이것 때문에 절에 가는 목적도 이것 때문, ‘우리 이름을 하늘에 닿게 하자.’ 다시 말해서 이 지상에 있는 인간을 탑처럼 올리고 또 올려서 올라가면 어디에 도달됩니까? 하늘에 도달되죠. ‘야, 드디어 우리 힘으로 하늘에 올라간다.’ 라고 하는 것이 모든 인간들의 한 마음입니다. 평양에 가면 유경호텔이라고 십수년 넘게 짓고 있는 호텔이 있답니다. 그 빌딩이 105층짜리에 높이가 300미터가 넘는 건물입니다.
왜 평양에 그런 건축물을 짓느냐 하면 그걸 보는 북한 주민들이 뭘 생각하겠습니까? ‘우리가 지금은 힘들고 배고파도 저 빌딩처럼 우리도 한 마음 되면 기어이 우리나라를 부강하게 할 수 있다.’ 이렇게 마음이 하나 되겠지요? 탑을 세울 때는 이렇게 마음이 하나 되는 겁니다. 2002년도에 상암 축구경기장에서 온 국민이 월드컵 치르면서 하나 되었죠.
그 때 어떤 미친 시민이 ‘대한민국 대표팀은 예선 탈락이나 해라.’고 고함지르면 얻어맞습니다. ‘왜 전부 다 4강 진입 하도록 한 마음으로 원하는데 너 혼자 딴청 피우나.’ 하고 얻어 맞습니다. 만약에 16강도 아니고 4강도 아니고 우승했으면 ‘대한민국 만세’ 하면서 대단했을 거예요. 예선탈락도 아니고, 16강, 4강, 결승, 급기야 우리이름이 제일 꼭대기에 올라가는 거에요.
여러분의 엄마들이 여러분에게 요구하는 것이 뭡니까? ‘너는 부지런히 공부해서 더 높은 곳을 향하여 네가 최고의 사람이 되어라.’ 우리 엄마나 아빠들이 애들에게 그렇게 곧잘 가르치지요? ‘너는 천사가 되어야 한다.’ 그런 소리는 안하지요? 교회 다니니까 하기야 하겠지만 주로 하는 소리는 ‘너는 점점 더 실력을 쌓아서 남들과의 게임에서 패배하지 말고 이기고 또 이겨라. 이기리~라!!!(♬)’
여기에 한 마음으로 탑을 세웠다는 어떤 사람도 예외가 없다는 뜻입니다. 자기 자신도 흙이며 죄를 지었으며 성경의 하나님의 계획은 생각지도 아니하고 ‘내가 어떻게 하면 내 믿음이 하늘에 올라갈까.’ 하는 그 방향성이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모두 다 꼴아박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고 모두 다 더 높은 곳으로 나은 곳으로 올라가기를 원합니다.
연초가 되면 교회 마다 신년대축복성회, 7주연속축복성회를 합니다. 이곳 신정동에도 많이 있을 거예요. 그것은 교회가 돈을 받고 희망을 팔아먹는 겁니다. 돈 주고 희망을 살생각만 하지 하나님의 계획에는 관심이 없어요. 사람들이 무조건 한마음으로 원하는 것은 뭡니까? ‘올해는 희망찬 새해가 밝기를 원하는 것.’ ‘올해는 희망찬 새해가 밝기를 원한다.’는 그 말은 ‘올해, 2008년도는 별로 희망차지 않았다.’는 그 말이거든요.
‘2008년도는 내 맘에 안 든다.’ 그 말입니다. 그런데 흙인 주제인 인간이 ‘2008년도는 내 마음에 든다.’ 혹은 ‘내 맘에 안 든다.’ 그렇게 평가할 수 있는 권한이 있습니까? 없잖아요. 여러분은 2008년도를 누구 덕분에 살았습니까? 제가 지금 자신만만하게 단언할 수 있는 것은 2008년에서 살아남은 사람만 지금 여기 있습니다. 이것은 거짓말이 아니죠.
누구덕분에 살았어요? 주님 덕분에 살았잖아요. 그러면 거기에 대해서 감사했습니까? 감사하는 것이 아니고 ‘2008년도는 영 내 맘에 들지 않다.’ 고 하는 거예요. ‘내 맘에 들지 않는다.’ 는 뜻이 뭐냐 하면 ‘2009년도는 희망찬 새해가 되게 해 달라.’는 거예요. 그만큼 2008년도는 시답지 않고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거예요. 그러면 2008년도 끝나고 2009년도는 마음에 듭니까?
인간이라 하는 것은 하늘에 닿기 전에는 마음에 드는 인생이 없어요. 왜? 하늘에 닿기 전에는 항상 미흡함이니까. 저는 신자건 불신자건 간에 하나님의 계획에 대해서 관심이 없다는 것 자체가 너무 너무 안타까워요. 자기계획만 잔뜩 있고 하나님의 계획은 없어요. 자기계획만 잔뜩 짜놓고 하나님이 그것대로 해주기를 바라는 거예요. 그래야 보람찬 한해가 된다는 거예요.
신자건 불신자건 하나님이 관리하지 내가 나를 관리하지 않습니다. 내 뜻대로 절대로 안 됩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되어가고 있어요. 내 뜻대로 안되어도 하나님의 뜻대로 되면 감사가 나와야 되는데 내 뜻대로 안된다고 감사가 안 나오는 그것이 문제가 됩니다. 하루하루 감사가 없는 생활 = 하나님의 계획이 안중에도 없는 생활.
제가 이렇게 흙에 속한 사람을 잔소리처럼 길게 늘어놓았는데 그 이유가 뭐냐? 흙에 속한사람이 신령한 사람 될 때, ‘어이, 너 흙에 속했으니 신령한 사람으로 바꿔 들어가라.’ 그런 식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이 신령한 사람의 본질이 이 흙에 속한 자기밖에 모르는 이 속에 침투하는 식으로 된다는 겁니다. 그게 어디 나오는가? 고린도후서 4장에 나옵니다. ‘겉사람은 후패하나 속은 날로 새롭다.’고 합니다.
고린도후서 4:16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
어려운 것이 또 있는데 계속 해봅시다. 바벨탑으로 인해서 다 한마음이 되어있는데 하나님께서 이것을 심판하시는 것이 아니고 이것을 흩어지게 했어요. 흩어지니까 위로 올라간 바벨탑이 옆으로 흩어진 바벨탑이 되었어요. 왜냐하면 바벨탑을 짓던 사람들이 온 지구상에 흩어지니까 그것은 바벨탑의 긴 그림자라 그 말입니다.
이들이 흩어진 것이 바벨탑을 짓기를 그만 둔 것이 아니고 단지 유보했을 뿐입니다. 이들이 흩어졌다고 해서 하나 아닌 것은 아니라는 말이죠. 바벨탑의 그 정신, ‘우리가 하늘 대까지 닿게 해서 우리 이름을 내자.’ 하는 그 한마음의 정신이 이제는 옆으로 퍼진 거예요. 키가 작은 사람 밥 많이 먹으면 어떻게 됩니까? 키가 더 자라는 것이 아니고 옆으로 퍼지는 거죠.
그렇게 옆으로 퍼지니까 흩어지니까 언어가 맞는 사람끼리 만나서 각 민족이 생기고 그들의 언어가 생깁니다. 언어가 맞는 사람끼리 흩어졌는데 인간이 소통하기 위해서 사용하는 모든 인간의 언어에는 항상 무엇이 깔려 있느냐? ‘우리가 이런 식으로 해서 하늘에까지 우리 이름을 내자.’라는 것이 들어있는 말들을 한다 이 말이죠.
바벨탑 쌓을 때 그들이 말을 했는데 그 말만 재미있게 한 것이 아니고 목적이 있었는데 ‘우리 이름을 하늘에 내자.’ 하는 목적으로 말들을 했잖아요. 그것을 뭉개니까 그대로 퍼진 채 재잘재잘 하는 소리가 뭡니까? ‘우리는 우리 이름을 하늘에 내자.’ 하는 식이 되어버린 겁니다. 이렇게 뭉친 인간이 흩어져도 결국은 한 덩어리에 지나지 않는다 하는 겁니다.
천사 같은 신령한 사람을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이 이야기를 미리 해야 합니다. 다니엘서에 나오는 금신상, 그것도 한 덩어리잖아요. 그렇다면 만약에 하늘나라 가는 사람이 있다면 똑같은 언어를 사용할 것이고 똑같이 한 덩어리가 되겠지요. 예수님께서는 물로서 사람을 구원합니까? 아니면 복음으로 사람을 구원합니까? 십자가복음으로 구원하지요.
그 대목을 읽어볼게요. 로마서 10장에 보면 어떤 사람이 천국을 보여달라고 하니까 천국도 안보내주고 지옥을 보여 달라고 하니까 지옥도 안 보여줘요. 안보여주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로마서 10장 8절에 있는 말씀으로 답합니다.
로마서 8:8-10 “그러면 무엇을 말하느뇨 말씀이 네게 가까워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 하였으니 곧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이라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라. ”
무엇이 네게 가까이 있다고 합니까? ‘말씀이 네게 가까’이 있지요. 그 말씀이 ‘믿음의 말씀’인데 그 믿음의 말씀의 내용이 뭐냐 하면, ‘예수님이 죽은자 가운데서 살아났다.’ 그 말이죠.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이죠. 그것을 믿으면 10절에서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면 어디에 이른다? ‘구원에 이른다.’ 그러면 다시 봅시다.
사람이 구원받는데 물위를 걸어야 합니까? 오병이어 기적을 봐야 합니까? 하늘에서 불이 떨어져야 합니까? 어떻게 해야 구원받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믿으면 누구든지 구원받지요. 11절에 ‘누구든지’라고 나오지요? ‘성경에 이르되 누구든지 저를 믿는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고 하지요. 제가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 바벨탑을 세울때에 무엇으로 세웠습니까?
벽돌로 세웠기는 했지만 그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서로 같은 말을 주고받는 언어가 같았잖아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다 흩어 버리니까 다 흩어졌지요. 그러면 어떤 사람이 천국 가는 사람이냐 하면, 똑같은 하나님의 계획을 이해하는 사람은 필리핀에 있든지 미국에 있든지 하나의 바벨탑처럼 한 형제가 되고 한 몸이 되겠지요.
그래서 한국이면 한국말로, 미국이면 미국말로 말씀을 전해서 그 듣는 사람이 ‘그렇다.’ 하고 입으로 시인하면 천사처럼 된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간단한데 왜 어려우냐 하면 기존의 흙에 속한 사람에게 무엇이 있습니까? 이미 사용하는 언어가 있지요. 그 언어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내 이름을 하늘에 닿게 한다.’는 목적입니다.
쉽게 말해서 ‘나를 얼마나 유명하게 하고 내 가치를 얼마나 돋보이게 하느냐?’ 이미 그 정신이 가득 들어 있잖아요. 그 정신이 들어 있는데 외부에서 무슨 말이 날아온다? ‘주님께서 우리 죄 때문에 죽으시고 부활했다.’는 새로운 복음이 우리 속에 들어오지요. 그러면 우리 내부에서 어떤 다툼이 있겠습니까? 내속에서는 내가 위대하고, 들어오는 말씀은 예수님의 이야기이고, 그 내부에서 예수님이 위대하냐, 내가 위대하냐, 그 충돌을 일으키겠지요?
그 충돌을 일으키는 작업을 누가 하느냐, 처음에 흙이 사람 될 때 무엇을 주었다? 하나님께서 생령을 준 것처럼 흙이 천사되려면 성령께서 개입하는데 어떻게 개입하는가? 복음의 말씀으로 개입해서 기존에 우리가 가지고 있던 우리의 타고난 죄성, 나밖에 모르고 나의 위대함만 강조하는 것을 정죄하고 책망하고 부수는 방법을 통해서 우리로 하여금 ‘우리 속에 날마다 새롭다.’ 이 말입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사업이 부도나서 한 10억을 손해 봤습니다. 교회 와서 ‘하나님아버지, 10억을 찾아주옵소서.’ 그렇게 기도를 했습니다. 그럴 때 목사가 ‘여러분, 기도하시면 10억을 주십니다.’ 그렇게 해야 되겠어요? 그 사람이 왜 10억을 되찾으려고 하겠어요. 그 사람이 10억을 가지고 있을때는 보통사람이 1억 2억가지고 있다 하면 그 사람은 10억을 가지고 있으니까 얼마나 부자입니까?
그 사람은 바벨탑으로 치면 1층은 아니고 한 4층쯤 올라갔잖아요. 물론 20층보다는 못하지요. 20층은 200억가진 사람이 올라가 있거든요. 하늘꼭대기까지는 또 어림도 없겠지요. 거기는 한 수백억을 가지고 있으니까요. 하지만 이 사람도 한 4층정도는 올라갔지요. 그런데 10억이 부돈났으니 4층에서 어디로 내려갔습니까? 1층이 되어버렸습니다.
1층이 되니까 4층 시절이 그립잖아요. 그래서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1층에서 4층 되게 해주세요.’ 라고 기도하잖아요. 이것이 바로 인간이 흙이 될 수 밖에 없는, 하나님께서 흩어지게 할 수 밖에 없는 죄가 된다 이 말입니다. 그런데 목사가 뭐라고 합니까? ‘당신이 기도하시면 20억을 벌어서 4층이 8층이 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이야기를 해 버리면 그 사람은 계속해서 그 안에 4층에서 8층, 이런 바벨탑을 쥐고 있지요. 그러면 그것은 자기계획입니까, 하나님의 계획입니까? 자기계획 아닙니까. 그런데 그 사람을 향하여 ‘그런 것은 생각하지 마시고, 그것이 바로 죄인데 그 죄를 위해서 주께서 죽으시고 당신은 오늘 밤에 죽어도 낙원에 갑니다. 천사됩니다.’ 할 때 그 교회 교인이 그 교회에 다시 오겠습니까, 안오겠습니까?
교회 안 나오겠지요? 노리는 목적이 달랐으니까요. 그래서 그 교회는 교인수가 줄면서 5층짜리 교회가 몇 층 되었어요? 3 층 되었지요. ‘목사님, 오늘 본문에 안 들어가고 왜 주변 이야기 같은 엉뚱한 소리만 하십니까?’ 라고 하실 수 있겠는데 오늘 본문의 이야기에 나오는 그런 사람을 못 만든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므로 사랑을 입은 자녀같이 너희는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고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이런 인간은 없습니다. 없기 때문에 성령께서 그런 인간을 우리 내부에서 책망해가면서 만들어 내는 거예요. 쉽게 그림을 그리겠습니다. 여러분, 조명기구 아시지요? 이것이 환하게 비추는 조명기구입니다.
만약에 이 조명기구에 나비모양의 딱지를 붙이면 그림자에 나비가 나오겠지요. 만약에 코끼리딱지를 붙이면 그림자는 코끼리 그림자가 나오겠지요. 에베소서 4장과 5장에 이런 저런 말씀들, ‘빛의 자녀처럼 살라.’는 등의 말씀들이 많이 나오지요. 이게 뭐냐 하면 주님이 만든 십자가조명기구에 인간이 이렇게 딱지처럼 붙어 있으면 빛은 조명기구에서 나와서 우리는 하나의 빛의 사람으로 그리스도의 뭘 보여주는냐?
그리스도의 용서를 보여주는 사람이 되는 거예요. 무슨 뜻인지 알겠지요? 조명기구에 이렇게 모양을 붙여보면 이런 식으로 그림자가 있을게 아닙니까? 그 조명기구에서 용서가 나온다면 그 용서가 우리를 투과해서 세상에 무엇을 남긴다? 용서를 남기는 거예요. 그런데 사람들은 이 성경말씀을 내가 받아서 내가 실시해버리면 나는 뭡니까? 흙이잖아요.
그러면 용서를 하건 뭘 하건 간에 다 누구 이름을 빛낸다? ‘나처럼 용서 잘하는 사람 나와보라고 해. 나처럼 화 안내는 사람 있으면 나와 보라고 해. 나처럼 착한 사람 나와보라고 해.’ 전부 다 자기 이름을 빛내는데 이것이 동원되는 거예요. 그래서 목사님들이 ‘여러분, 에베소서 5장을 보세요. 여기 있는 대로 새사람을 입었으면 새 생활을 해야지.’ 라고 하니까 실제로 성경을 보니까 성경이 안틀리거든요.
문제는 세상에 나가서 돈벌이에 바쁘다 보니까 이 성경말씀에 위배되는 생활을 해야 되고 그런 말을 해야 된다는 말이죠. 예를 들어서 ‘술 취하지 말고 성령에 취하라.’고 하니까 직장에서 술 먹는데 안가니까 그만 승진에서 누락되어서 생계가 말이 아닌 거예요. 예수님이 시키는대로 못하니까 예수님이 자꾸 잔소리를 하는 셈이 됩니다.
계시가 뭐라고 했습니까? 잔소리라고 했습니까? 지시라고 했습니까? 예수님의 용서를 저쪽 사람에게 지시한다는 말이죠. 그러면 나는 조명기구에 붙는 딱지가 되어서 용서를 따라서 저쪽에 가서 증거 하면 되는 거예요. 그러면 용서를 전하려면 나는 뭐가 되어야 합니까? 나는 날마다 용서받은 사람이 되어야 용서가 나오지 ‘나 잘났다.’고 하면 무슨 용서가 나옵니까? 자기 잘난 것이 나오지요.
모든 인간의 본성이 뭡니까? ‘어떻게 하면 내 이름이 우수하고 훌륭하고 대단한가?’ 이것이 인간에게 담겨 있는 본성인데, 거기다가 용서하라고 하니까 더 기가 살아서 ‘그렇지, 내가 제일 용서를 잘하지.’가 되어 버리면 그것이 주님의 용서입니까, 자기 자랑입니까? 그것은 자기 자랑이 되는 거예요. 다음시간에 계속 합시다.
2009-02-26 23:07:15 녹취 : 오용익
우리교회(IP:220.♡.176.150)
09-03-04 18:50
서울090109b엡5장1절b에베소서 제 28강 (이 근호목사, 2009년 1월 9일-(2), 서울의존교회)
두 번째 시간입니다. 하나님께서 마지막 때에 교회를 세워서 그리스도의 몸, 교회만 구원이 됩니다. 교회만 구원이 되니까 교회 아닌 사람이 구원이 될 리는 없고 반드시 교회인 사람만 구원이 되는데 이 교회는 머리가 예수님이 계신 곳이 교회입니다. 에베소서 4장에나 5장에 보면 ‘너희 안에 그리스도가 계심같이’ 또는 ‘너희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같이’ 이 교회는 …,
여기보세요. 바벨탑은 밑이 넓고 위가 좁은 탑 모양으로 되어 있지요? 바벨탑은 밑에서부터 차츰차츰 지어 올라가서 ‘우리 이름을 하늘에 내자’는 것인데, 여기 이 교회에서는 이미 하늘에 속한 분이 자기 사람을 데려가는 방식으로, 교회의 머리되시는 분은 예수님이고, 예수님 지금 하늘에 계셔요, 하늘에 계신 예수님께서 이 지상에 교회를 만듭니다.
예수님이 교회를 만들 때 그 용서가 누구 용서냐 하면, 여기 예수님 안에 하나님의 자기백성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용서한 그 용서가 나와야 되고 예수님께서 사랑한 그 사랑이 나와야 돼요. 그런데 여기 바벨탑에서 나오는 것은, 제가 에베소서 5장에 나오는 것을 죽 적어보니까, ‘방탕과 우상숭배와 음행과 더러운 것과 탐욕과 누추함과 어리석음과 희롱과 도적질과 분을 품는 것과 어두움의 일’ 이것은 전부 다 어디서 나온 겁니까?
이것은 전부 다 사람에게서 나왔지요? 그렇잖아요. 그런데 이 사람이 예수 안에서 어디에 가 있습니까? 이 안에 있을 때 예수님께서 자비하심 또는 용서, 또는 불쌍히 여겨주심, 불쌍히 여겨주시니까 이런 인간이 이렇게 되니까 여기서 뭐가 나와야 돼요? 나, 이런 죄인데 예수님한테 이런 용서 받았으니까, 바깥으로 뭐가 나옵니까?
용서가 나오고, ‘나는 이런 죄인인데 예수님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사랑을 받았’으니까 뭐가 나와요? 사랑이 나오죠. 용서와 사랑이 나오면 ‘그리스도 안’ 이고, 이런 것이 나오면 그 안에 아무것도 없지요. 예수님이 안계시잖아요. 예수님이 안계시고 자기 자신만 있지요. 자기 자신만 있는 상태에서는 이런 것들이 계속 나오는 겁니다. 이런 것들이 계속 나올 수밖에 없어요.
왜냐?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더러운 품성이 있으니까 이런 것들이 나온다 이 말이죠. 자, 물어보겠습니까?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하면 또 용서를 행하려고 사랑을 행하려고 애를 쓸거예요. 여러분, 사람이 살다보면 방탕도 나오고 누추함도 나오고 화도 내고…, 이게 편합니까? 예수님의 용서와 사랑이 나오는 것이 편합니까? 어느 것이 좋습니까?
참, 제일 중요한 질문을 했네. 여러분, 예수님이 내 안에 계셔가지고 나로부터 사랑이 나오고 용서가 나오는 이것이 맞는 줄은 아는데 그 맞다는 것을 묻는 것이 아니고, 지금 이렇게 되기를 소원하십니까? 이것이, 이렇게 되는 것이 즐겁습니까? 아니면 성질낼 것 성질 다 내고 화낼 것 다 내고 술 잡숫고 싶은 대로 다 잡숫고 … 여기에 술 취하는 것이 빠졌네요.
술 취하는 것, 내 배후에 아무도 없고 내 안에도 아무도 없고 나 만 있는 것, 나 만 있으니까 누구 이름으로 나입니까? 나는요, 나만 위해서 살아요. 나는 내 이름을 위해서 살아요. 여러분, 모든 인간은 자기이름을 위해서 삽니다. 자기 이름을 위해서 살다보니 이런 것이 나온다 이 말이죠. 화내고 마음대로 안 되니까 짜증나고 시기 나니까 술 처먹고, 남에게 피해를 주고 한다 이 말이죠.
자기 이름을 높이는 이것, 여러분, 이게 옳다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아시는데 제가 지금 묻는 것은 이게 편합니까? 예수님의 용서와 사랑이 나오는 것, 이것이 편합니까? 어느 것이 옳으냐를 묻는 것이 아닙니다. 어느 것이 평소에 자연스럽고 어느 것이 편안하게 내 성질에 딱 맞다, 하는 느낌이 오느냐 이 말입니다. 이쪽이냐, 이쪽이냐? 교회쪽이냐, 바벨탑쪽이냐? 말이죠.
이것을 설명해 드릴게요. 제가 수련회 때 이것에 대해서 이야기 했습니다. 사람은 죄성이 있어요. 죄성이 있다는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여러분, 오늘 배웠으니까 좀 써먹으세요. 인간에게 죄성이 있다는 말은 내 이름을 어디까지 높인다? ‘역시 나는 위대해. 역시 나는 좀 더 살아야 돼.’ 자기 가치를 어디까지? 일층? 5층? 6층? 아니에요.
사람은 5층 올라가면 10층까지 또 올라가야 돼요. 어디까지 올라가야 마음이 편하냐 하면 하늘끝까지, 대통령도 안돼요. UN 사무총장, UN 사무총장보다 더 높은 신까지, UN사무총장보다 더 높은게 목사고 목사보다 더 높은게 신 아닙니까? 차곡차곡 높아지는데 이것이 마음대로 안될 때에는 이런 것들이 나온다는 말이죠.
이게 성도한테도 있습니다. 있는 정도가 아니라 똑같지요. 불신자나 신자나 똑같은데, 정말 예수 안에 있는 사람이 특이한 점은 잠깐 짧은 시간에 바로 이 구조가 틈새를 비집고 불쑥 예상도 못하게 튀어나온다는 사실이에요. 우리의 대부분 생활은 어느게 편하냐, 입니다. 사람은 편한대로 살거든요. 이것이 옳은줄 알아요. 옳은줄 알지만 대부분 이겁니다.
애 학교 성적 나쁘면 화나고, 해가 졌음에도 불구하고 분을 품고, 그러잖아요. 이게 우리한테 편해요. 왜 편하냐 하면 우리 부모로부터 받은 죄, DNA가 여기에 딱 들어맞게 되어 있어요. 우리 부모로부터 뭘 받았습니까? ‘내 이름을 낮추는 것은 내가 용서하지 않겠다.’ 이거 참, 어느 교회도 말썽 일어나는 것은 이거 하나밖에 없어요.
‘내가 이 교회 충성 봉사했는데 왜 자꾸 내 신경을 건드리나. 나 교회 안나온다.’ 이게 목사님들의 가슴에 못을 박는 거예요. 예수님의 손에는 못이 박혔지만 목사님의 손에 못을 박는 것은 뭐냐하면 삐지는 것. ‘집사님, 그런 뜻이 아니고요. 목사님의 설교내용은 집사님을 두고 하는 것이 아니고 모두 다를 향해서 한 겁니.’ ‘아니다. 나를 표적삼아서 했다. 나를 노리고 했다.’
그게 아니고 ‘최집사님 이야기를 한 것은 그런 뜻이 아니고 다 성경에 있는 이야기 아닙니까?’ ‘아닙니다. 어, 다르고 아, 다른데 이것은 나를 밟아 죽이려고 하는 것입니다.’ 아니, 죄인이면 밟아 죽여도 괜찮잖아요. 밟혀죽으면 천당 갈 수 있잖아요. 밟아죽인 것이 뭐 그리 화가 납니까? 그런데 사람은 평소에 ‘나는 신앙좋다. 나는 겸손하다.’ 이렇게 해놓고, 다른 사람 건드릴 때는 같이 호응해놓고 막상 나 하나 건드릴 때 ….
‘머리 어느 미장원에서 했어? 머리 잘못 나왔네.’ 이것 하나 말했다고 그 다음부터 2주동안 교회 안 나옵니다. 실컷 좋아한다. 부부도 마찬가지입니다. 실컷 사랑한다, 좋아한다, 하다가 아무것도 아닌 것, ‘나는 장서희 TV에 그만 나왔으면 좋겠다.’ ‘나는 더 나왔으면 좋겠는데.’ TV 보다가 싸워서 그 다음날부터 삐져서 일주일동안 밥도 안 해주고 쌈하고.
이게 다 뭡니까? ‘우리 이름을 하늘에까지 닿게 하겠다’고 하니까 상당히 어렵게 들리는데 쉽게 말하면 뭐에요? 자존심 아닙니까? 자존심, 자존심이거든요. ‘내가 나를 건드리면 괜찮은데 왜 나 말고 타인이 나를 건드리냔 말야. 내가 이만한 자존심 지키는 것만 해도 얼마나 애쓴건데, 내가 이만큼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서 얼마나 용을 썼는데 이걸 건드려버리면 너는 나의 원수다.’
이것이 폭탄입니다. 우리 모두가 폭탄입니다. 그래서 인간에게 자연스러운 것은 뭐냐?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서 자기 방어에 나서고 때로는 공격에 나서는 것, 이것이 우리의 자연스러운 본성이고 이 본성이 그대로 어디에 들어가 있습니까? 예수 믿는 인간들 안에도 그대로 들어 있어요.
있는데 이상스럽게도 여기서 예수님의 용서가 그 성질내는 틈 사이에서 한 2초? 5초?, 갑자기 ‘나도 참 주님한테 용서받은 인간인데 아니 용서받은 죄인 주제에 뭐가 잘났다고 내가 그 사람에게 큰 소리를 쳤지? 아, 바보, 바보!’ 이것이 한 2초 지나면 사라집니다. 2초 지나서 사라지든 말든 그런 십자가의 용서가 떠오르거든 그 사람은 새사람입니다.
주께서 그 안에서 작업하고 있어요. 천사 만들기 위해서. 그것이 성령의 역사입니다. ‘야,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은 것은 생각 안하고 내 자존심 상한 것을 가지고 교회에서 큰 소리를 쳤고 다음부터 교회 안 나온다고 큰 소리를 쳤고, 야, 그래서 그 다음부터는 부끄러워서 교회를 못나갈 지경이죠. 그래서 다음에 교회 못가는 이유가 부끄러워서 못가요.
그래서 교회 갈 때는 ‘김 집사는 나한테 그런 뜻으로 말 한 것도 아닌데 내가 괜히 내 자존심 건드렸다고 나 혼자 생각해서 그렇게 화를 냈구나. 참 미한하다. 교회가서 만나면 사과하고 다시는 안 그러겠다고 해야지.’ 라고 교회 가서 김집사의 얼굴을 보는 순간 그 2초가 끝났어요. ‘한번만 더 나한테 그러기만 해봐라.’
사람은 누가 관리한다고 했습니까? 사람은 하나님이 관리해요. 성도는 하나님이 관리합니다. 자기가 자기를 절제? 절제 안 됩니다. 절제하면 절제한 만큼 자기 자존심이 더 높아져요. 나는 두 번이나 절제했다. 그것이 자기 이름을 더 높인다니까요. 하나님이 사람을 관리해서, 다른말로 하면 성령께서 사람을 인도해서 천국까지 이끌어 가십니다. 의롭게 하시고 영화롭게 하십니다.
그런데 분을 내면 안 된다는 것을 어디서 봤어요? 에베소서 4장에서 봤습니다. 그러니까 평소에 늘 성경을 보고 있으면 성령께서…성경을 보고 있으면 자기딴에는 지킨다, 지킨다 하지만 바쁘다 보면 못 지키거든요 … 그런데 성령께서는 빠지지 않고 이 성경말씀으로 우리한테 지적해서 ‘너, 너만 생각하지. 네 행동만 정당하지. 네 속에서 용서가 나왔나? 용서하는 마음으로 다가갔나? 주님이 너를 사랑한 것처럼 상대방을 무한히 사랑했나?’ 라는 생각이 번쩍 번쩍 들면 그 짧은 순간이 바로 빛이 나오는 순간이에요.
그게 바로 조명기구에 뭘 붙였다? 아까 딱지 같은 것, 그림을 붙여 놓으면 그냥 나는 붙어 있을 뿐인데, 빛이 나를 투과해서 상대방에게 뭐가 전달됩니까? 나의 용서가 아니고 누구의 용서? 예수님의 용서와 예수님의 사랑이 전달되는 것, 그것이 바로 5장 1절입니다. 다같이 5장 1절을 읽어봅시다.
에베소서 5:1
“그러므로 사랑을 입은 자녀같이 너희는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고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같이 너희도 사랑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생축으로 하나님게 드리셨느니라.”
주께서 성도 안에서 그 짧은 순간 순간마다 이것을 주께서 행하도록 해 주시는 겁니다. 만약에 이것을 인위적으로 계속 유지한다고 한다면 그 사람은 또 하나의 뭐가 돼요? 또 하나의 자존심이 더 채워지는 거지요. 이것을 보고 ‘야, 나는 전에 사랑했다.’ 이러면 안 되고, 이 말씀을 보고 ‘야, 나는 도저히 이 에베소서 5장 1절의 말씀을 (한번이라도 할 수 있다, 없다?) 절대로 못합니다. 주여, 주의 뜻대로 날 통하여 이 사랑이 나타나게 하옵소서.’
그러면 주님께서 ‘너는 죄인이다.’ 그러므로 이렇게 보면 되요. 죄인이라는 말이 무슨 뜻이냐 하면 여기 요런 더러운 것들을 내 뱉는 누가 살아 있습니까? 자기가 살아있죠. 자기가 살아 있는 것을 성경대로 하면 자기이름이죠. 자기이름을 높이는 거죠. 자기가 살아 있다. 자기 이름이 있다. 자기가 살아 있으면 이런 것이 나와요.
그런데 만약에 주의 이름이 이 사람에게 가면 주의 이름이 어떻게 합니까? 자기 이름을 무의미하게 ‘너는 있으나 마나 한 인간이야.’ 하고 죄를 지적하게 되면 내 이름은 없어지고 짧은 순간이지만 누구 이름이? 주의 이름으로 용서하고 사랑하겠지요. 이것을 보고 성경에서 하는 말이 ‘네가 누구를 용서할 때도 누구의 힘으로 하라?’ ‘주의 이름으로 하라.’ 이 말이 그 말이에요. 주의 이름으로 한다는게.
너는 빠지고 주의 사랑이 전달되고 주님의 용서가 전달될 때 그 매체가 바로 성도라는 겁니다. 왜? 우리는 쓸모없는 인간이니까. 우리는 쓸모없는 인간이에요. 여러분, 우유마실 때 쓰는 빨대 있지요. 빨대는 우유가 아닙니다. 빨대는 우유가 아니지만 빨대를 꽂으면 안에 있는 우유가 그 빨대를 통해서 오지요. 우리는 빨대에요. 문제는 빨대가 막혀 버리면 뭐가 튀어나오느냐 하면 유유가 튀어나오는 것이 아니라 빨대가 튀어나와요.
나는 예쁜 빨대, 나는 잘난 빨대 된다니까요. 주님의 사랑, 주님의 용서가 통과하는 파이프 역할을 하는 겁니다. 그걸 가지고 빛의 자녀라고 합니다. 그것을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합니다. ‘ 의 형상을 본받는 자가 되라.’ 그렇게 되는 겁니다. 다시 이야기 할게요. 이게 잔소리입니까? 아니면 지시입니까? 묻습니다. 이제는 알아야 돼요.
하나님의 계시가 잔소리입니까, 지시입니까? 지시, 누구를 지시합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지시하는 거지요. 어떤 행동을 할 때 잔소리를 하면 모든게 자기행동을 하는 자기한테 와버려요. 그런데 진짜 성령받은 성도에게 해 버리면 누구를 이야기한다? ‘예수님이 하셨습니다’ 라고 하고 그것이 빈말이 아니라 진짜로 예수님이 다 한거예요. 몇초동안? 2초동안.
사람이 교회에서 고아원 방문한다고 해보세요. 처음에 할 때는 감격스러워요. ‘주여, 이 미천한 인간, 죄밖에 모르는 인간이 남을 도울 수 있다니…’ 하면서 라면하고 떡하고 싸가지요. 갈 때 그 때 뿐입니다. 가서 나눠줘 보세요. 나눠줘 보면 은근히 화가 나요.
‘주여, 이 어려운 일 꼭 우리가 해야 됩니까? 다른 사람이 하면 안됩니까? 전능하신 주께서 축복 주시고 이 아이들을 다 부자되게 해주시면 그만 우리가 다시는 여기에 안 찾아와도 되는데 왜 우리로 하여금 힘들게 찾아오게 만듭니까?’ 이런 불평불만이 생기게 마련입니다. 몇초, 몇분 가지고 않아요. 얼마 가지도 않아서 또 ‘나같이 고상한 인간이 이런 더러운 일을 해야만 되는가.’ 이렇게 나옵니다.
갑자기 ‘자기가 죄인 중에 괴수며, 십자가 은혜가…’ 말은 그렇게 번지르하게 해 놓고 곧장 돌아서면 ‘나같이 괜찮은 인간이 꼭 이런 일을 해야 됩니까?’ 주님께서 ‘네가 뭔데? 도대체 네가 뭔데?’ ‘주여, 내 이름 괜찮아요.’ 그게 뭐냐? 그게 바로 바벨탑, 바벨탑 노선이란 말입니다.
이런 것은 실제로 매일 일어나요. 부부사이에서도 ‘아이고, 저것도 남편이라고 밥을 해줘야 하나.’ 그런 생각이 매일 같이 드는데 그래도 은혜 받으면 ‘맞아, 살게 해주신 것도 하나님의 은혜다. 나같이 죄 많은 여자에게 저런 남편을 주셨다니 감사합니다.’ 그게 한 3 초갑니다. 금방 성질나서 설거지 합니다.
자식도 마찬가지입니다. 애들이 말 안들을 때 ‘하나님, 기도해서 낳은 자식이고 기도해서 키우는데 왜 저렇게 말을 안 듣습니까?’ 하다가 ‘아이고, 자식 없는 사람도 많고 병든 자식도 있는데 이렇게 건강하게 해주니 그저 감사합니다. 나 같은 여자에게 애 키우는 기쁨을 주시다니 ….’ 그것이 5초갑니다. 금방 또 성질나서 말 안들으면 ‘공부해!’라고 고함지르죠.
우리는 이 타고난 죄성을 평생 못버립니다. 못버리는데 흙에 속한 형상이 어떻게 천사의 형상으로 변한다? 그것은 누가 작용하느냐? 그것은 성령께서 작용하는데 오늘 배웠던 말씀을 가지고 기억나게 해서 책망하는 식으로, ‘너는 용서받은 자가 그래서 되겠느냐?’ 성령께서 책망하는 식으로, 그래서 우리는 회개하는 순간, 회개했다 싶으면 거기서 뭐가 나오느냐, 주의 빛이 나오고 회개 안하면 뭐가 나오느냐 하면 잘난 내가 나와버려요.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성도라고 해서 완전한자라고 생각하면 여러분의 큰 오해입니다. 성도는 완전한자가 아니고 이미 완전한자에 속한 사람이기 때문에 완전한 자죠. 다시 이야기합니다. 교회는 하늘로부터 만들어져요. 바벨탑은 누가 만든다? 땅에서부터 인간들이 만들지만 교회는 예수님께서 만들어서 자기 사람을 포섭하는, 사로잡힌 자를 사로잡고, 데리고 붙잡아서 관리하는 그런 거꾸로 된 모습입니다.
그러니까 여기서는 뭐가 나오느냐 하면, 바벨탑에 속한 사람에게서 나올수 없는 두가지가 나와요. 뭐가 나옵니까? 용서가 나옵니다. 4장 32절을 제가 읽어봅니다.
에베소서 4:32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앞에 보면 도둑질 하지 말라고 했지요. 도둑질 하는 도둑놈이 도둑질하면서, 그 집의 물건을 훔치면서 그 집의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면서 용서를 합니까? ‘아이고, 이 집 주인 아저씨요, 미안합니다. 나도 급해서 들고 나갑니다.’ 이렇게 하지 ‘세상에, 이집 아저씨가 이 금목걸이를 하려고 얼마나 고생해서 벌었는데 ….’ 이렇게 상대방을 이해합니까? 택도 없는 소리죠. 자기만 생각한다고요.
도적질하는 것이 자기만 생각한다면 보통 일반 직장에서나 교회에서나 자기만 생각하는 것은 도적놈 아닙니까? 마찬가지 아닙니까, 자기만 생각해서 도적질 하는 것이나. 꼭 물건 훔쳐야 도둑놈입니까? 자기만 생각하는 것도 도둑놈 심보다 이 말이죠. 거기서 무슨 용서가 나오고 사랑이 나옵니까? 그래서 뭘 어떻게 하라는 이야기입니까?
용서하지 말고 사랑하지 말라는 이야기죠. 왜? 내용서 내 사랑이 누구를 가립니까? 주님의 용서와 사랑을 가려버리니까 ‘나는 용서할 줄도 몰라요. 나는 나 밖에 몰라.’ 그런 순간에 성령이 계시면 뭐가 튀어 나와요. 그런 죄인을, ‘내가 너를 용서하는 사람되게 하고 사랑하는 사람 되게 할 테니까 네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 네 상황을 굉장히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면 OK!’
‘오케이’가 무슨 뜻이라고 했습니까? 좋습니다. ‘내 몸에서 용서가 나오고 내 입에서 사랑이 나오다니 좋습니다.’ 이것을 지키라는 것이 아니고 이것이 좋아져야 되고 이것이 편해져야 된다는 말입니다, 지금 제 이야기는. 그리고 여기 바벨탑, 이것은 불편해져야 되고 이것은 이렇지 않을 수는 없는데요, 이럴 때 마다 우리는 괴로워해야 된다고요, 괴로워해야.
이것을 보시고 ‘참, 내가 주님의 용서를 받은 자가 이게 무슨 짓이냐.’ 이것은 괴로워하고 싫어져야 하고 이 용서와 사랑은 마음이 편해져야 한다, 이 말입니다. 실제로 성도는 용서와 사랑이 나오면 한마디로 뭐합니까? 실제로 감격해요, 감격. 여러분이 성도 아닙니까? 성도 맞지요.
실제로 짧은 순간이지만 ‘ 가 죄인이며 내가 남을 용서하는 것이 마땅하지’ 이런 생각이 들면 ‘야, 이런 생각이 들다니…’ 오히려 본인이 감격해요. 짧은 순간이지만! 그게 바로 성도로서의 사는 재미고 기쁨입니다. 돈을 십억 벌어보세요. 감사가 나오는가? 안 나옵니다. 진정한 감사는 ‘내가 십억 받을 자격도 못되는 인간인데 십억을 구했으니까 얼마나 나쁜놈이냐’ 라는 것을 깨닫는 그 순간에 터져 나오는 그 기쁨, ‘이런 인간도 구원하시다니’ 라는 그 기쁨, 그 기쁨은 돈 십억 주고도 못삽니다.
18절을 봅시다. 다같이 시작!
에베소서 5:18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여기에 보면 술 취하지 말라, 했으니까 이것은 어린이들은 술을 안마시니까 상관없지만 술을 마셨다고 생각해 봅시다. 술을 먹을 때 누구 좋으라고 먹습니까? 이게 술잔이라고 하면 이 술을 이렇게 마십니다. 술은 내가 마셔놓고 ‘어이, 친구야! 기분좋지? 너 얼굴 벌겋잖아. 봐라.’ 이런 사람 봤습니까? 술은 왜 마십니까? 누구 좋으라고 마십니까? 자기 취하려고 마시지요.
어린이들은 술 마셔본적 없겠지만 술은 자기 취하려고 마시지요. 그죠? 그러니까 술취하지 말라, 는 말씀이 뭔가 하면 너 자신을 위한 행위는 꼭 뭐와 같다? 나만을 위한 행위이기 때문에 이것은 바로 성령의 뜻과는 배치되지요. 그런데 인간은 평소에 24시간 누구만 생각합니까? 24시간 아침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