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십자가마을 겨울수련회 역대기
2009년 십자가마을 겨울수련회 역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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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역대기 십자가마을 겨울수련회 동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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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 십자가마을 겨울수련회a-역대기 <제1강>
(강의:이근호 목사)
역대상 1장 봅시다. 역대상 1장부터 아담, 셋, 에노스, 게난 사람 이름이 나와 있지요. 사람 이름이 1장, 2장, 3장, 4장, 5장, 6장 계속 나갑니다. 편집증을 갖고 있는, 정신적 환자가 아닌 이상 이걸 하나하나 볼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별 내용이 없거든요. 사람 이름만 쭉 돼있지. 나가다가 무슨 이야기 거리 없는가?
저는 역대상 앞부분을 보면서 아나운서들이 발음 연습할 때 ‘이것 보면 적당하겠다’ 생각이 들었어요. 이름들이 간단한듯 상당히 난해한데 이래 쭉 나가다가 역대상 드디어 12장에 들어가서 흥미를 끄는 사건들이 나오고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1장부터 11장까지 이야기가 왜 있느냐? 왜 있어야 되느냐? ‘이것 빼고 이야기만 하면 될 텐데 이게 왜 있느냐’ 하는 그런 의문점이 들 거예요. 그래서 이걸 성경이 문자로 돼있으니까 상당히 수평적으로 보이는데 이걸 제가 그림으로 수직적으로 그려보겠습니다.
다윗이란 사람이 여기 있다면, 다윗 위에는 하나님이 계시고, 하나님과 다윗 사이에 [다윗 언약]이라는 게 수립이 됩니다. 이 역대상 1장 1절부터, 아담부터 나오는 이야기는 아담부터 해서 족보들이 어디로 치고 올라가느냐 하면, 하나의 거대한 산을 이루는데 이게 수평적이 아니라 수직적으로 점점점 차고 올라옵니다.
처음에는 여러 갈래의 길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역대상 족보를 쭉 하다보면 길이 오직 하나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게 돼요. 뭐냐 하면, 유다 족속을 통해서 이 다윗이 될 때에 아담부터 시작해서 나오다가 유다지파로 해서 뭔가 합세를 하면서 유다지파에서 나온 다윗을 설명하면서 안 떨어지지요. 단절되지 않았지요.
아담에서 유다지파로, 거기 중간에 여러 가지 이스라엘 있습니다만 이스라엘은 여러분 알다시피 열두 갈래 아닙니까. 열두 지파잖아요. 열두 지파 가운데 유다 지파로 모이면서 유다 지파를 통해서 하다보면 어떤 인물을 남기는데, 다윗이란 인물이 나온다 이 말이죠. 다윗과 다윗 사이에 어디 가느냐? 솔로몬은 이쪽으로 더 올라가는 게 아닙니다. 솔로몬은 내리막길이에요. 다윗 위에서 안 보이니까 점선으로 하나님과의 유일한 관계가 성립됩니다. 이것을 [다윗 언약]이라 한다 이 말이죠.
다윗 언약이 나올 때 지금 여기 아담부터 나오는 사람이 전부다 ‘죽은 사람’이에요. 사람은 살다가 구십도 못 돼서 죽으니까 다 죽은 사람입니다. 죽은 사람이 만약에 이런 노선으로 뽑아내려면 만약 이 사람들이 안 죽고 살아있다면, 베냐민 지파, 스블론 지파, 여러 지파가 있으면 만약에 유다지파로 몰아오면 이 사람들이 얼마나 기분 나쁘겠습니까? 굉장히 기분 나쁘다 이 말이죠.
하나님께서 십자가마을로 모였는데 다 같은 자존심도 있고, 금지도 있고, ‘너만 복음 아나? 나도 안다.’ 하고 있는데 하나님께서 김대식 이라는 사람을 통해서 이렇게 몰아넣을 때 우리는 뭐가 됩니까? 다 같은 인간이고, 다 같은 복음 안다는데 왜 한쪽으로 김 씨 집안으로 몰아넣는다 말이에요. 집안이 무슨 김 씨입니까? 김해 김씨. 김대식 나오기 전에 김해 김씨로 몰아넣는다. 그러면 이 씨는 뭐고, 최 씨는 뭐냐? 죽은 사람이에요. 다윗 빼놓고 다 죽었다는 거예요.
다윗 빼놓고 다 죽었다는 말을 달리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언약이 없거든 산 사람 취급 받을 생각하지 마라. 그러면 죽을 인간을 왜 태어나게 했는가? 바로 그걸 설명한 거예요. 다윗만 인간이고 나머지는 인간이 아니라면, 그럼 아담부터 이건 왜 있는가?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단절되지 않은 인류 전체가 뭐가 있느냐 하면, [중심점]이 있다는 겁니다. 중심점을 모르면 그거는 구원은 안 되지요. 구원이 중심점으로 구원되니까.
구원될 때만 중심점이 나오는 것이 아니고, 구원되기 이전부터 우리가 그냥 사업한다든지, 농사짓는다든지, 편하게 교사로 일한다든지 우리가 일상적인 나만의 일, 우리 가족을 위해서 열심히 매진할 그 순간에도 하나님의 중심점은 따로 노는 겁니다.
어떤 사람이 한 사십 살다 교통사고 나서 죽었다. 우리 보통은 어떤 사람이 태어나서 사십이니까 몇 년생이에요? 1969년 태어나서 어느 학교 나왔는데 회사에 잘 다니다가 출근길에 그만 차에 치어 죽었다. 그게 우리 역사잖아요. 그게 우리 역사라면, 역대기는 그걸 뭐로 보느냐 하면, ‘야 이 인간 죽은 것이 다윗하고는 무슨 관계있지’ 하고 죽은 인간 뽑아내서 재배치하는 것, 이게 역대상하입니다. 강의 끝냅시다. 끝났습니다.
만약에 그 사십 넘은 사람이 차에 치어 죽었기 망정이지 살아있을 때 그런 소리하면 기분 되게 나쁩니다. 이래 모여 있는데 하나님께서 김대식 성도님 중심으로 몰아가버리고 다른 사람은 존재가치가 뭐냐 하면, ‘그 사람이 농사지었다’ 이건 가치 없어요. ‘너는 김대식 성도한테 어떤 족보가 되느냐?’ 그걸 따지는 겁니다. 개인적으로 목사님, 집사님 소용없어요. 하나님이 지적한 사람과 어떤 관계가 있느냐를 따지는 겁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만약에 살아있을 때 이런 이야기를 툭 던져버리면 우리는 대번에 입에서 자존심 섞인 말이 나오지요. ‘하나님, 저는 왜 중심이 안 됩니까?’ 분명히 이래 나올 거다 이 말이죠. 그런데 그 이야기도 하나님께서 담아놨어요. 쉽게 예를 들어서 자꾸 이야기하는 걸 용납해주시기 바랍니다.
‘왜 김해 김 씨, 김대식이냐’라는 것에 대해서 반발하게 될 때 그 반발하는 것도 하나님께서 잊지 않고 기록해놨습니다. ‘그들은 악의 길을 갔습니다.’ 이렇게요. 전혀 본인은 악의 길을 간 게 아니고, ‘왜 하나님께서는 한쪽만 편애하고 나는 그쪽에 엮여져야 구원되느냐’라고 따지는데 뭐라고 하느냐 하면, ‘그는 여로보암의 길을 갔다. 그는 악한 길을 갔다.’ 그렇게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런 악한 인간을 숲을 헤치고 기어이 김해 김 씨를 통해서 김대식 언약으로 만들었다. 이렇게 나오더라 이 말이죠. 죽고 난 뒤에. 아담은 이미 죽었어요. 죽고 난 뒤에 마음대로 주무르지요.
회 먹으러 가보세요. 오징어 회 처먹고 그 다음에 마음대로 골라 먹잖아요. 살아있는 오징어 건드리면 화냅니다. 한데 다 죽여 버리고 산산조각 내놓고 먹으니까 아무 소리 못하잖아요. 문제는 뭐냐? 중심점. 따라 해보세요. 중심점. 중심점을 찾아내면 그만이에요. 모든 인류의 존재에 대한 중심점. 중심점인데 특징은 뭐냐? 다윗 빼놓고는 중심점이라고 껍죽대며 나서지 마라 이 말이에요.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부르는 게 있어요. ‘다윗은 중심점 돼서 좋겠다’ 하는데 여러분 아시다시피 다윗이 어떤 사람이냐 하면, 죽은 자입니다. 그러니까 중심점 되는 다윗이 죽은 자고, 제가 아까 다윗 빼놓고 다 죽은 자라 했습니다. 그 말 이어보면 모든 사람이 다윗처럼 다 죽은 자라는 그런 간단한 논리가 됩니다. 머리 나쁜 사람 이해 못하지요, 지금.
다시 이야기할게요. 다윗은 죽은 자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죽은 자에요. 부활이 안 돼요. 이건 사도행전 2장에 나옵니다. 다윗이 죽어서 무덤 그대로 있어요. 다윗은 죽은 자인데 제가 아까 이야기하기를 역대기에서는 모든 사람은 다윗 중심으로 모아진다 했습니다. 다윗은 죽은 자고, 다른 인간은 다윗에게 모아지고, 그러니까 모든 인간은 다 죽은 자가 되지요.
그것을 가지고 뭐냐? 이 밑에 내려가면서 ‘다윗의 묘실’ 하나의 개인 선영의 무덤이 의미를 지니는 것은 역대기뿐입니다. 또는 열왕기.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이스라엘 역사는 산 자의 역사가 아닙니다. 소위 살았다고 우기는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어떤 조치가 가해졌기에 죽으면서도 다윗과 연관을 맺으면서 하나둘씩 죽어 가느냐? 그들이 연관과 맺어질 때 죽은 다윗을 언약으로 살려낸다면 다윗과 함께 관련된 모든 사람은 다윗의 언약과 더불어서 함께 폭발하듯이 이 사람들은 영광스러운 부활에 참여하게 되는 거죠.
그래서 역대기는 뭐냐? 구약에 있어서 미리 당겨본 신약 성경이에요. 구약에 있는 신약성경. 제가 방금 설명한 이걸 문자적으로 수평적으로 깔아버리니까 역대상 보면서 앞에 열왕기상하 나오거든요. 열왕기상하 의미나 역대상하 의미나 뭐 좀 틀린 것 같이 보이는데 읽어보니 앞에는 시시한 사람 명단 나오고, 리스트 나오고, 리스트 쭉 빼다보니까 그 이야기나 열왕기 이야기나 되풀이 한 것뿐이다. 넘어가자.
그래서 성경을 하루에 정해서 차근차근 읽는 사람은 역대상 만나면 반갑습니다. 후다닥 읽어버리고 하루 숙제 끝났다. 그 후다닥 읽어버리는 역대상, 역대하를 이제 십자가마을 삼일 동안, 열 시간 강의를 통해서 낱낱이 그 담긴 의미를 우리가 해부해봅시다.
그렇다면 방금 제가 그림을 그려놨는데 이 그림이 과연, 그림 하나 그려버리면 오르막길이고, 내리막길로 보면, 교재를 봅시다. 교재 제일 마지막에 도표가 나와 있죠. 사울, 다윗, 솔로몬부터 해서 이거는 머리 부분이고, 솔로몬 이후 밑에는 가슴팍 부분, 팔, 다리가 있는 사람 모양 같죠. 두 개가 남북으로 갈라진 그런 이야기가 쭉 나옵니다.
이렇게 그림을 그려줘야 르호보암 시대는 여로보암 하고 같은 동네고, 아비야는 누구 같으며, 아사는 바아사, 이렇게 두 나라가 깨어지고 깨어지면서도 떨어질 수 없이 뭔가 몸체에 붙어있는 사람 모양 같아요. 계속해서 사울과 다윗과 솔로몬이라는 한 몸통 안에서 팔, 다리 양쪽에는 오른 편, 왼 편처럼 갈라져서 나갑니다. 마지막 다음 페이지에 보면 드디어 북쪽 나라부터 망하고, 남쪽 나라 길지요. 한쪽 팔은 짧고, 한쪽 팔은 긴 팔이 되는 겁니다. 그리고 마지막 발판이 나오지요. 발판이 회복기인데.
결국 그림을 처음 보고 끝을 보니까 여러분 뭘 느껴집니까? 이스라엘은 멸망하기 위해서 있는 나라구나. 이스라엘은 어떤 나라냐? 멸망하기 위해서 있는 나라입니다. 이스라엘은 선택받았거든요. 선택받은 사람들, 선택받은 나라가 이 지상에서 마음껏 다른 우주에 보여줄 수 있는 그 특별한 임무가 뭐냐? ‘나, 멸망한데이.’ 이겁니다. 이것은 바로 오늘날 성도의 정신은 뭐냐? 성도가 평생토록 다른 사람에게 증거할 수 있는 것은 하나밖에 없어요. ‘나, 죽는다.’
세상에 어느 인간이 ‘자기 죽는다’는 그걸 하나님의 뜻으로 간주할 사람 누가 있습니까? 만약에 자기 죽는다는 것이 하나님 뜻이라면, 죽음을 아주 순하게 현실로 받아들일 거예요. ‘나 죽는다’가 아침에 일어날 때 무슨 비타민 한 알 먹습니까? 먹듯이 죽는다는 약을 늘 먹어보면, 비타민 씨를 아침에 먹으면 활기가 나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처럼 이렇게 나 죽는다는 것, 이것을 늘 약 먹듯이 털어먹고 하루 사는 사람은 오직 성도들밖에 없습니다.
교인들은 아니냐? 교인들은 아니죠. 교인들은 살려고 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불신자니까. 조심해야 됩니다. 교인들이 아니고 성도들. 목사가 설교할 때 약을 털어먹어야 돼요. ‘나 설교하다가 죽습니다’라고 먹어줘야 죽음의 설교가 나와요. ‘이 설교 듣고 난 밥 먹고 삽니다.’ 그거는 쥐약 먹은 거예요. 이상하게 딴 소리가 나와요. 그 사람은 구약을 모르는 사람이에요. 방금 봤던 사람 형체 같은 도표를 모르는 사람이에요.
이스라엘, 그들은 뭐였습니까? 하나님 백성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 아들이라고 칭했던 사람입니다. 출애굽기 4장에서.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의 백성? ‘오냐, 훌륭하다. 오냐, 대단하다. 네 할 일 하라.’ ‘옛 썰.’ 할 일 뭡니까? 멸망당하는 거예요.
‘그럼 목사님, 다 멸망당합니까?’ 다 멸망당합니다. 예레미야는? 예레미야, 에스겔, 다니엘, 이사야도 다 멸망당합니다. 그러면 성도는 없습니까? 멸망당하는 자가 성도라니까요. 성도의 기쁨은 뭐냐? 즐거이 멸망당해야 되기 때문에 당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즐거이 외칠 수 있는 사람은 선지자밖에 없어요. 눈에 뵈는 게 없어요.
히브리서 11장 보세요. 톱으로 켜는 것과 광야에 유리하는 사람이 누구에요? 바로의 공주의 아들 되는 것을 거부하고 고난 받기를 즐겨했던 사람이 누구였습니까? 그게 바로 모세나 선지자였잖아요. 선지자는 뭐냐 하면, 자기 처지를 생각한 것이 아니고, 선지자는 다윗을 통한 언약과 내가 출생한 그 의미와 어떤 연관성이 있느냐를 확실하게 알기 때문에 자신만만하게 자기는 죽는다는 것을 기쁘게 이야기할 수 있는 겁니다. 그럴 때 하나님의 언약의 나라는 바로 다윗을 통해서 새로운 나라가 이미 만반의 준비돼있음을 지상에서 나그네 삶을 살면서 증거하는 겁니다.
창세기 3장에서 인간이 에덴동산에서 쫓겨났지요. 쫓겨나고 난 뒤에 두 번 다시 근처에도 오지 말라고 아예 파수꾼을 세웠는데 그 사람들은 에덴동산을 지키기보다는 거기 성경에 보면 생명나무 가는 길을 지킨다. 그래서 생명나무의 가치가 타락한 인간에 의해서 피해 받지 않도록 그 가치를 영원토록 유지하기 위한 조치가 바로 생명나무 가는 길을 차단하는 하나님의 천사의 역할입니다. 생명나무에 오지 말라 했거든요. 왜냐하면 너희는 처음 만든 그때 그 인간이 아니다. 아니니까 이젠 오지 말고 바로 생명나무에 대해서는 관계없는 겁니다.
그래 놓고 하나님께선 계속해서사람을 이 땅에 번성하게 했지요. 그러면 그 번성한 사람들 한 사람, 한 사람은 뭐냐 하면, 한 사람, 한 사람에 뒤에다 붙이는 게 있지요. 생명나무 근처도 오지 마라. 이렇게 뿌리는 것과 똑같아요. 아담보고 그런 이야기했다는 말은 나머지 모든 사람은 아담의 후손이거든요. 아담에게 주어진 운명은 동일하게 주어지게 돼있습니다. 못 온다. 오지 마라. 못 온다. 오지 마라.
그런데 하나님께서 특별하게 그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사람을 거기서 만들어냈어요. 그리고 그들에게 뭐라고 하느냐 하면, ‘들으라 이스라엘이여.’ 하면서 하나님이 이런 소식을 전해버렸어요. 이것이 무슨 의미냐 하면, ‘들으라’ 하는 게 어떤 사람은 명령으로 보는데 성경에는 명령이란 게 없습니다. 성경은 명령이라 하지 않고 뭐냐? ‘규범’이라 하는 겁니다. 이거 어제 오후 설교했는데 그 설교 들은 사람은 알겠지요.
‘명령’이라 하는 것은 상대를 중립 위치에 놓고, 아직까지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냐를 확정짓지 않는 미확정 상태라 간주해서 ‘네가 명령대로 순종하면 복 받고, 순종하지 않으면 저주 받는다’ 이렇게 할 경우에 명령이고, ‘규범’이라 하는 것은 이미 어떤 말을 줄 때 ‘너는 이런 인간이야’라는 것을 확정지은 채 알려주는 방식의 말을 할 때 그게 규범이라 하는 겁니다. 하나의 서울대학생 같으면 서울대학교 배지 같은 거예요.
이거 뭐예요? ‘네 신분이야.’ 배지인데 그 배지가 뭐냐? ‘들으라 이스라엘이여’라고 말하는 겁니다. 그래서 성경 전체는 ‘들으라’ 했으니까 오직 처음도 그렇고 마지막 요한계시록까지 ‘들을 귀 있는 자’를 골라내는 하나님의 능력의 살아있는 말씀이 성경책입니다.
만약에 같은 문자로 활자화되어도 이것이 명령으로 듣는 사람은 애초부터 이스라엘 아닌 사람이고, 이걸 규범적으로 듣는 사람은 처음부터 그 사람은 택한 백성, 성도가 되는 겁니다. ‘아하, 나구나’라고 알아듣는 것과 ‘내가 새삼스럽게 어쩌란 말입니까’ 쪽으로 해버리면 이건 하나의 명령이죠. 이거는 자기 주제파악이 안 된 사람.
그래서 불교라든지 이슬람교에서는 많은 오해를 해요. 심지어 중세 신학자도 오해를 하는데요. 불교는 말할 것도 없지요. 불교 중들은 자기가 인간인 줄 알고 있습니다. 아까 사우나 가니까 중을 만났어요. 머리 깎은 사람. ‘목사님은 왜 중을 만납니까?’ 이렇게 하는데 여러분도 사실은 저보다 자주 만나지만 여러분은 관심이 없기 때문에 그냥 뭐가 스쳐지나갔다고 알지만, 저는 항상 믿음이 좋아서 그런지 몰라도 구별됩니다. ‘저 인간이 이스라엘 사람일까?’
그러니까 ‘이스라엘 사람일까’ 하는 것은 ‘들으라 이스라엘이여’ 말 전해보면 듣는 사람이 ‘뭐야? 뭔데? 어쩌라고?’ 우리는 ‘들으라 단군 자손이여’ 이 이야기해달라는 거예요. ‘이스라엘이 왜 등장하는데. 엉뚱한 소리하고 있네.’ 경제가 어려운데 ‘들으라 이스라엘’하고 경제하고 무슨 관계가 있는데 이래 되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들으라 이스라엘이여’ 할 때 이 이스라엘이 어떤 나라냐 하면, 이스라엘이 없는 나라에요. 없는 나라에서 새로 생긴 나라가 이스라엘입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이여’ 할 때 이스라엘 나라, 이 세상에 없어요. ‘아니, 야곱의 후손 열두 지파가 이스라엘이지 않습니까?’ 눈 보기에 이스라엘이죠. 그걸 만약에 이스라엘이라면, 열두 지파 이스라엘 만들고 난 뒤에 역사 끝입니다. 예수님이고 세례 요한이고 올 필요 없어요. ‘어이, 가져가. 천당으로’ 가면 되는 겁니다.
여기에서 열두 지파에서 이스라엘 형성되는데 아담에서 열두 지파 될 때 이게 수평적 족보라 하고, 그 앞에 나오는 단편 족보, 수평 족보 같은 이야기에요. 여기서 유다로 올라가는 걸 수직적, 라이너니까 직선적 ‘깊이 족보’라 하고. 깊이 족보고 넓이 족보에요. 족보 보면 그리 돼있어요.
삼각주 있지요. 쭉 모아서 하나로 모아진다. 처음에는 모든 인간은 연관성이 있다는 걸 보여주고, 넓게 보여주다가 갑자기 속도를 내면서 하수구에 물이 빠지는 것처럼 획 하고 중간에 다윗 쪽으로 몰아가버려요. 족보에 증거가 나온다고요. 미리 한번 볼까요? 미리 보면 안 된다. 중요한 건 나중에 봅시다.
어쨌든 지금 이스라엘 나라가 여기서 성립되었으면, ‘들으라 이스라엘이여’에서 이 사람들은 그냥 ‘어이, 가자 천당으로’ 가면 돼요. 이 이스라엘이, 이 이스라엘 아니라는 거예요. 그러면 유다? 아니지, 아니지. 그러면 다윗? 아니지. 그럼 이스라엘? 이스라엘이 이 세상에 없어요. 이스라엘은 위에서 내려가야 됩니다. 이스라엘 가지고 하나님의 아들이라 했거든요. 그런데 이 아들은 무슨 아들이냐 하면, 이 땅에서 어떤 아들? 이스라엘 운명이 뭐라 했습니까? 이스라엘은 뭘 할 것이다? 멸망. 야, 다 잊어버렸다. 큰 일 났다. 이번 강의 힘들게 됐다.
이스라엘은 멸망이죠. 마태복음 3장에서 세례 하면서 뭐라고 합니까? “이는 사랑하는 아들이요” 아들이 따로 나온다고. 아들이 따로 나오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어떤 이스라엘이냐 하면, 이거는 집단이면서도 집단이 아니고, 하나님은 아들로 본다니까. ‘아들들’이 아니고 ‘아들’로 봐요.
이것도 모르고 어떤 유명 신학자는 왜 하나님은 자꾸 아들이라 하느냐? 딸은 인간이 아니냐 하는데. 지금 이스라엘에 여자가 있더라도 남자가 있더라도 남녀를 묻는 게 아니고, 통째로 장차오실 미리 보여주기 위해서 죽는 역할을 함으로써 우리는 애초부터 죽어야 되고, 진짜 산 아들은 하늘에서 내려와야 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그림자 역할하기 위해서 이스라엘 역사가 있는 겁니다.
이 말대로 이스라엘 같으면 예수님 십자가 필요 없어요. 신학교 교수한테 물어보세요. 이렇게 질문해보세요. ‘교수님 질문 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구원하실 때 아브라함이 예수 아닙니까?’ 물어보세요. ‘아브라함이 오고 난 뒤에 바로 오면 되는데 아브라함 아니다. 이삭도 아니다. 왜 자꾸 질질 끕니까? 한꺼번에 해치워버리고 택한 백성 끌고 가면 되는데 왜 예수님께서 하는 겁니까?’ 만약에 아브라함에게 의미를 두고 아브라함의 선행, 이삭의 공로, 야곱의 충성 거기에 의미를 두는 사람 같으면 답변 못합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역할이 있어요. ‘사람은 원래 죽어야 마땅하다.’ 그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죽음 속에 뭐가 들어 있느냐 하면, 최초의 인간이 죽었던 아담과 하와의 죽음의 정보가 섞여서 내려와요. 섞여서 내려오기 때문에 성도는 뭐냐? 죽는 이유를 아는 사람이 성도고, 불신자는 뭐냐? 지가 죽어가면서도 왜 죽는지를 모르는 사람이에요.
성도는 죽으면서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을 내 뱉으면서 죽어가요. 성도는 똥 덩어리인데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포함된 똥 덩어리에요. 죄에요. 지휘자는 뭐냐? 예수님이 지휘자에요. 첼로건 바이올린 전부다 개다. 짖으면 돼. 강마에가 그런 소리 안 했습니까?
모든 성도는 그리스도의 지체로써 머리를 증거하는 거예요. 머리 없는 지체는 소용없어요. 지체만 덜렁, 지체 누가 안 알아줍니다. ‘나는 머리 있다’라는 말하기 위해서 지체 있지, ‘나 지체 있다’ 이야기하기 위해서 지체 있는 게 아닙니다.
교회라 하는 건 간단합니다. ‘우리는 죽어도 괜찮데이.’ 그 이야기하려는 게 교회에요. 살려는 사람이 아니고, ‘우리는 구태여 살 필요 없어’라는 이야기하는 곳이 교회지요. 스데반 집사 같은 경우야 대표적인 인물이죠. 설교해놓고 강사비 어디 있어요. 돌멩이, 짱돌 날아왔는데. 그리고 하는 말이 ‘주여, 저들이 하는 짓을 모릅니다. 용서해달라’고 했습니다.
참 이스라엘은 바로 신약에 와서 신약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의 이야기를 앞 당겨서 신약의 역할을 모델케이스로써 다윗이 예수님 역할을 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목사님. 아담부터 다윗이 정상이라면 이 뒷부분, 정상에서 내려오는 하산하는 것까지 다 알아야 역대기가 쉬워질 것 아니겠습니까?’라고 물으신다면 ‘딩동댕’ 맞는 이야기에요. 그래서 역대기는 뭐냐 하면, 역대기 제일 마지막에 보면 뭐라고 돼 있느냐? 첫 시간부터 다 떼어버립시다. 그래야 마음 든든하게 있지. 약 오르잖아요. 감질나잖아요.
역대상 1장 1절 했습니다. 이젠 마지막 봅니다. 역대하 36장 21절. “이에 토지가 황무하여 안식년을 누림같이 안식하여 칠십 년을 지내었으니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의 입으로 하신 말씀이 응하였더라” 22절에 보면, “바사 왕 고레스 원년에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의 입으로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시려고 바사 왕 고레스의 마음을 감동시키시매 저가 온 나라에 공포도 하고 조서도 내려 가로되” 이래 돼있지요.
방금 읽었던 36장 22절 그걸 기억하면서 에스라 1장 1절 보세요. 제가 읽습니다. “바사 왕 고레스 원년에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의 입으로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시려고 바사 왕 고레스의 마음을 감동시키시매 저가 온 나라에 공포도 하고 조서도 내려 가로되” 이래 돼있지요.
그러니까 역대하가 역대하로 끝난 줄 알았더니만 역대하가 에스라까지 계속 이어져간다. 말 하나, 문자 하나 안 틀려요. 똑같아요. 에스라 했으니까 에스라 1장 끝나면 2장 계속 나오잖아요. 에스라 끝나니까 뒤에 느헤미야까지 나오는데. 결국은 뭐냐 하면, 에스라, 느헤미야가 끝난 입장에서 처음부터 아담을 다시 한번 생각한 책이 역대기가 되는 거죠.
이 말은 뭐냐 하면, 역사를 다 지켜보고 멸망할 건 다 멸망하고 그리고 에스라, 느헤미야에 나오는 에스라 부흥운동, 느헤미야 성전신축운동 많이 신앙적으로 부흥했는데, 제가 물어보겠어요. 그래서 이스라엘이 어떻게 됐습니까? 안 망했습니까? 그래도 망하죠. 그러니까 이건 뭐냐 하면, 역시 망하는 거구나. 그런데 이것이 망하면 망할수록 다윗이란 존재가치가 뚜렷하게 더욱더 부각이 된다는 점이 즐거운 점입니다.
사람들이 오해하기를 건강할 때 주의를 하는 것 같지요. 그 사람은 진짜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에 해당돼요. 왜? 여러분, 아플 때 주의되든가요? 우리 권사님 만날 아프신데. 아플 때 봉사하고 싶어도 몸이 안 움직여지지요. 겨울 되면 얼마나 괴롭습니까?
그러면 아플 때 주의를 못할 때 구원은 누가 시킵니까? 주님이 하시잖아요. 자기 솜씨께나 안 부릴 때, 교회 하는 것도 없을 때 그때 공짜가 더욱더 공짜로써 기분 좋게 와 닿는 거예요. 이게 교회에 도움 되는 이야기인지 아닌지 그건 모르겠습니다만.
사람들이 건강할 때 일한다고 자꾸 오해를 하는데 건강한 사람도 결국 늙습니다. 늙는다는 게 아프다는 뜻이에요. 결국 아플 때 옛날처럼 주의 일을 못하면 그 사람 지옥 가야 됩니까? 이스라엘 사람이 역대기를 쓰는 사람과 보는 사람 모두가 그들은 지금 자기가 주의 일 하고 싶어도 나라도 없고, 성전도 깨지고 뭐 될만한 게 없을 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구원받는다면 도대체 왜 우리가 구원받느냐 이 말입니다. 우리가 지금 하는 게 없는데. 그 사람이 능력도 없는데.
헌금을 하나, 전도를 하나, 예배를 참석하나. 그냥 쭈그려 앉아서 경제 어려운 것만 탄식하는 이 마당에. 그런 마당에서 하고 싶어도 몸이 아파서 못하고, 돈이 없어서 못하고, 직장에 매여서 못하고, 주일날 됐는데 사람들 없어서 못하고, 아무것도 못할 때 아무것도 못하는 그것이 우리의 본 모습이에요.
몸이 아프니까 우선 찡그리고, 이웃 사랑이요? 컨디션 좋을 때 기침 안 날 때 지금 용각산 먹는데. 이웃 사랑도 미소께나 띠울 때 이웃 사랑이지, 온유와 화평과 자비와 양선? 컨디션 좋을 때 이야기입니다. 팔십 넘어 구십 가까이 된 치매 걸린 권사님들 옛날에 시골에 있을 때 가봤어요. 손자들이 마지막 보내신다고 찬송가 불러주니까 대번에 ‘찬송가 듣기 싫다. 내 앞에서 예수 소리하지 마라.’ 권사님으로 오십 년, 사십 년 이상 보낸 사람의 고백입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은 그때는 두뇌가 썩었잖아요. 치매니까. 시냅스와 시냅스가 연결이 안 되잖아요. 남는 건 머리가 안 도니까 육체가 갖고 있던 흔적, 육체적인 어떤 관성의 버릇, 이것이 이성이 날아가 버린 상태에서 머리가 날아가니까 본성에서 그대로 유감없이 발휘되는데 그게 뭐냐? 역시 난 나훈아의 ‘청춘을 돌려다오’ 그게 좋다는 거예요. 그래서 그 집에선 찬송가 대신 유행가 틀어요.
그걸 보고 여러분, 안타깝게 여기지 말고 ‘아하, 내가 빨리 저 모습 돼야 위선이 그때나 벗겨지는데’라고 아주 축하 인사를 해주셔야 됩니다.
몸이 아프니까 그 정도 수준 되면 뭐까지 모르느냐 하면, 내가 아프다는 것까지 몰라요. 지난 주일날 아침인가 그런 예를 들었지요. 수요일인가 요새 치매가 있어서 기억이 안 나는데. 새벽에 운동하는 중에 할머니가 치매 걸려서 전부다 물어봐요. ‘육서깐 문 열었습니까?’ 육서깐이 지금 전라도 사람, 서울 사람 무슨 말인지 몰라요. 정육점을 육서깐이라 합니다. 옛날 말로. 새벽 네 시인데. ‘육서깐 문 열었습니까?’
그걸 보고 제가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야 저게 본성이다.’ ‘육서깐 문 열었습니까’ 할 때 내가 이런 소리하면 남한테 얼마나 욕하겠느냐 그런 자아가 하나도 없거든요. 자아가 없는 상태, 저게 우리 도달해야 될 성도의 목표입니다. 성화가 뭐냐? 저렇게 치매가 와서 완전히 돌아버렸어요.
왜 진작 우리는 안 돌아버리느냐 이 말입니다. 자꾸 신앙 있는 척하고, 좋은 척하고, 괜찮은 척하고 있느냐? 몸만 아파 보세요. 뭔가 똑똑해져 보세요. 진짜 그야말로 ‘나 같은 인간 왜 구원했습니까?’ 이게 바로 ‘너 같은 인간이니까 구원했지’라는 하나님의 새로운 언약의 말씀이, 우리가 말씀을 믿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말씀이 우리 속에 침투해서 구원받는 거예요.
다윗의 묘실에 이쪽의 이스라엘, 어디 쪽이 오른 쪽인지 모르겠습니다만 지금 헷갈립니다만, 이스라엘 왕들이 다윗의 묘실에 못 들어가요. 그 사람이 얼마나 착하냐 중요한 게 아니고, 당신이 죽는 자리에 어디에 합류하느냐가 중요하다고. 다윗의 묘실에 못 들어갑니다. 그런데 이쪽에 유다 나라는 왕들이 개판 오 분전이에요. 이쪽 이스라엘이나 저쪽의 유다나 똑같은 인간들이에요.
하지만 다윗의 등불이 계속이 유지되는 한 다윗의 묘실에 들어간다 했어요. 다윗의 등불이 꺼지지 않기 때문에 그들은 다윗의 묘실에 들어간다. 단 못 들어가는 사람 있어요. 너무 못 되서 아하스란 왕은 못 들어갔어요. 다른 왕은 다 들어갔어요. 등불이란 말은, 결국은 이 땅은 어둡다는 뜻이에요. 이미 빛의 세계가 여기 있다면, 다윗의 기도에서 나옵니다. 역대기는 기도가 그거에요.
광주에 차타고 가니까 지붕 열리는 나이트클럽이 있어요. 한국나이트클럽. 역대기에서 지붕 열리는 것은 기도밖에 없어요. 그래서 역대기 족보에서 중요한 것은, 야베스 기도가 나옵니다. 야베스 기도를 통해서 앞의 족보와 뒤에 족보가 내용이 달라집니다. 기록 방법이 달라집니다. 다음 시간에 저녁 먹고 ‘야베스 기도’ 하겠는데, 기도를 통해서 비로소 뚜껑이 열려버립니다. 나이트클럽의 지붕이 확 열리면서 별이 보이고 하늘하고 내통하는 게 기도에요. 히스기야의 기도. 기도가 중요해요.
그런데 다윗의 묘실이라 하니 결국 뭐냐 하면, 그들이 어떻게 살았느냐가 아니라 죽을 때 어디서 죽느냐? 누구 품에 안겨서 죽느냐 이 말이죠. 나사로가 낙원에 갔는데 누구 품에 안긴다 했습니까? 아브라함 품에 안겼다. 그 사람이 죽을 때 누가 그 사람의 죽음을 건사하느냐, 이걸 받아 챙기느냐? 받아 챙기는 사람에 의해서 그 사람이 갖고 있는 영역에 합류한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 역대기는 뭐냐? 구약의 신약성경이죠. 구약은 뭐냐 하면, 구약은 얼른 보면 전부다 명령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규범적이죠. 신약성경의 핵심은 ‘육이냐, 영이냐’에요 구약에는 아브라함이 이렇게 하나님의 제단을 쌓더니만 복을 받아서 소떼가 늘어나고 양떼가 늘어나고, 이삭도 소떼가 늘어나고 양떼가 많아서 브엘세바에서 우물 하나 가지고 싸우다가 나중에 계약 맺었고 어떻고, 야곱도 복이 많아서 축복, 축복이 나온다고요.
잠언서에 보면 오른 편에는 부귀요. 왼 편에는 장수요. 욥도 욥이 고난 받기 전보다 고난 후에는 곱빼기 복을 받아서 재산이 늘어났다. 딸도 얼마나 예쁜 딸이 세 명 낳는데, 이래 나온다고. 구약은 전부다 땅과 그 땅이 어떻게 풍성해지느냐? 번성 문제, 얼마나 쿠데타가 일어나지 않고 단절, 끊지 않고 이어지느냐 하는 그런 문제지만
신약에 보면 육과 영이란 말이에요. 신약에 보면 네가 재산 얼마나 묻지 않고, 네 자신이 육에 속하느냐, 영에 속하느냐 이거 묻거든요. 영에 속한 특징이 뭐냐? 죽어도 살고,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한다는 거예요. 이미 경험적으로 살아다는 거예요. 영은 죽어도 죽었고, 살아도 죽었고. 그러니까 신약성경에는 ‘너 죽은 자야, 산 자야’ 그걸 따지는 거고, 구약에서는 ‘너 얼마나 소유했느냐’ 그걸 따지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 역대기에서는 이미 그런 역사가 다 끝났고, 에스라, 느헤미야까지 다 끝장내고 다 마감되어서 다시 마감 쪽으로 가서 총 정리를 해보는 거예요. ‘역시 우리가 절망 가운데 있어도 멸망당해도 우리는 멸망당했지만 이 멸망케 하시는 그 작업, 그 손길은 하나님의 다윗에서 나온 착실한 빈틈없는 약속 때문에 즐겁게 멸망당하고, 즐겁게 망할 수밖에 없는 그런 기쁨의 우리는 역사를 가졌다’는 것이 역대기입니다.
오십 분 됐습니다.
2009-01-13 15:39:39 녹취 : 한윤범
우리교회(IP:124.♡.84.82)
09-01-16 15:47
cross090105b
2009 십자가마을 겨울수련회b-역대기 <제2강>
(강의:이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 시작하겠습니다.
역대상 1장 5절부터 23절에 흐름이 이렇게 돼있습니다. 야벳이 먼저 나오고 그 다음에 함이 나오고 그 다음에 셈이 나옵니다. 노아의 세 아들 가운데 이렇게 나오는데 순서 배치를 야벳 먼저 하고 함하고 셈을 배치해놓고 셈에다 악센트를 치지요. 여기에 주목하라 이 말이죠.
족보에 있어서 마지막에 스톱되는 그 지점을 위하여 다른 것이 모아져 있는 겁니다. 단면 또는 단편 족보에서 넓이 족보에서는 마지막에 악센트를 주고 있습니다. 이것은 그 다음에 나오는 이스마엘과 그리고 이삭에 관해서는 1장 19절에서 34절에 나오는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에서 이스마엘 족보를 먼저 이야기하고 그 다음에 끝에 이삭을 여기다 해서 이삭에다 강조점을 두고 있어요.
35절에서 에서와 야곱 가운데서도 에서가 먼저 출발하면서 야곱과 마지막에 거론된 것과 관련이 있으면서 야곱이 출중하게 연결돼있습니다. 그래놓고 계속해서 2장 3절에 보면 여기에 뭐가 나오느냐? 야곱 이름이 바뀌었죠. 이스라엘로. 그렇다면 순서가 ‘노아에서 셈에서 이삭에서 이스라엘로’ 이런 라이너, 선형을 갖추면서 곁가지들을 몰고 다니며 이렇게 된다 이 말이에요.
그러면 이 이스라엘이 앞으로 가는 곳마다 단독적으로 나가는 것이 아니고, 이스라엘 되게 했던 주변에 배치된 그러한 족보들, 이스라엘 되기 위해서 에서가 먼저 있었고, 그 다음에 이스마엘 있었고, 함, 야벳이 있었던 이런 족보들이 앞으로 이스라엘이 처해있는 장소, 그 공간에서 계속해서 이들이 뭔가 관련성을 가지면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주면서 다른 주변의 곁가지들, 넓은 족보에 참여했던 자들을 가지고 이스라엘을 돋보이는데 사용한다 이 말입니다.
여기 그림4에 보면 이 지도가 아주 좋은 지도입니다. 이것도 [피]라는 책에 그 이유가 나와 있습니다. 상세한 것이 좋은 지도가 아니죠. 필요한 것만 기록된 게 좋은 지도에요. 성경이 그래요. 성경이 세계 역사 기록한 게 아닙니다. 필요한 것만 돋보이게 하는 그런 것이 성경이고, 요한계시록도 마찬가지고. 진짜 정작 필요한 건 따로 한다고.
그래서 그걸 모르고 만날 ‘가인은 누구하고 결혼했습니까?’ 여자하고 결혼했지. ‘그 여자가 어디서 나왔습니까? 아담의 자식은 가인과 아벨밖에 없는데 왜 여자가 툭 튀어나왔습니까?’ 하는데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생명나무에 가는 필요한 것만 골라서 하는 겁니다.
여기 4페이지에 보면 암몬, 다메섹, 모압, 에돔 나와 있지요. 위치가. 그림이 여기에 동그라미 두 개가 보이는데 길쭉한 동그라미를 사해, 소돔과 고모라 이 지점에 있고, 작은 동그라미가 갈릴리 바다. 이 사이를 흐르는 강을 요단강이라 합니다. 요단 강 이쪽 편에서 더 나가 있는 암몬, 모압, 에돔 있고 저 위에 북쪽에 아람, 수도 이름이 다메섹인데.
이 역대기나 열왕기를 보면서 이 안에 이 나라가 이스라엘입니다. 갈라지기 전에 북쪽은 이스라엘, 남쪽은 유다라 하는데 어쨌든 처음에는 이스라엘인데 이스라엘이 이스라엘 되기 위해서 아람, 암몬, 모압, 에돔 이런 나라가 있어줘야 이스라엘이라는 가치가 왜 하나님께서는 다른 나라 말고, 앗수르, 바벨론 나오지만 그런 나라가 위주가 아니라 왜 이스라엘을 주목해야 되고, 이스라엘 도처에 전 세계에 많은 민족들이 있지만 왜 하필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우리에게 이야기하고자 하느냐 말이죠. 이 안에 구원의 비밀이 들어있거든요.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우리는 단군의 자손 같으면 단군의 자손 된 줄 알지 남의 나라, 수입품 이스라엘을 왜 자꾸 따지느냐 하는데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 사람 되셔서 오신 그분이 이스라엘로 왔거든요. 그분이 다윗의 자손 계통으로 왔다고. 로마서 1장 3절에 보면.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내에 이미 잠재돼있던 비밀이 있었고, 그것이 마지막 때에 하나님께서 히브리서 1장 1절에 나오지요. 마지막 때는 하나님의 아들로 이야기하는데 그 아들이 석가모니도 아니고, 공자, 맹자도 아니에요. 그 아들은 나사렛 예수란 분이 아들입니다. 못 믿겠다고요? 그거는 사울이라는 사람이 다메섹 내려가다가 얻어맞았어요. 뭔가 천둥이 치는데 누구십니까? 하는데 ‘난 나사렛 예수다’ 했어요.
그때부터 사울은 중심점, 제가 첫째 시간에 뭐라 했습니까? 중심점. 중심점은 하나님이 만들어줘야 되지 인간들끼리 투기해서 ‘어이 중심점 미국 할까, 필리핀 할까’ 이래서 중심점이 아니에요. 중심점은 하나님이 지정해주는 겁니다. 오래된 팥죽 딱딱할 때 젓가락으로 하게 되면 굳어진 젤 상태가 하면서 중심점이 생기지요. 하나의 무늬가 생기잖아요. 이렇게 젓가락 쑤셔서 흔들어 소용돌이 만드는 것은 우리 소관이 아니고, 바로 하나님이 중심점을 심어준다 이 말이죠.
그럼 예수님이 오실 때 ‘나는 이방인들 위해서 온 것이 아니고,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을 찾으러 왔다’ 이래 돼있어요. 여전히 이스라엘이에요. 로마서 11장 26절에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에 구원을 얻으리라” 했습니다. 그럼 우리는 뭔데? 이방인들은 개지 뭐. 개인데 왜 필요하냐? 중심점을 위해서. 이스라엘의 중심점을 강조하기 위해서 이렇게 하는 겁니다.
여기에 보면 여기서 강이 하나 있고 여기에 뭐 있느냐 하면, 성경에서는 가사라 했고, 현대에서는 가자라 했거든요. 가자 이 지역이 블레셋이죠. 현대말로 하면 팔레스틴입니다. 이거 지금 조지고 있어요. 가자 지구. 이스라엘은 여기 있고 블레셋은 여기 있거든요. 블레셋 하면 기분 나빠하니까 팔레스틴이라 해요. 난민들.
여기 주변에 있는 국가들이 계속 하나님께서 번성케 하거나 임의대로 조절하시고 하나의 야구방망이, 몽둥이 앗수르죠. 그땐 야구가 없기 때문에 몽둥이인데 요샌 야구방망이 같은 앗수르를 사용해서 이스라엘을 진짜 이스라엘답게 강조점을 두는 것입니다.
[친구]라는 영화를 보면 아주 인상 깊은 장면이 나오지요. 선생님이 시계를 풀면서 ‘너거 아버지 뭐 하시노?’ 그때 ‘건달인데요.’ ‘이게 장난치나.’ 그때 가만있던 친구가 ‘선생님. 실수했습니더.’ ‘실수했어? 뭘 실수했는데?’ 애들은 알아요. 장동건 아버지가 진짜 건달인 것을. 그런데 선생님들은 모르지요. 함부로 건드리면 안 된다는 걸. 이스라엘을 함부로 건들면 안 된다는 걸. 선생님 실수했다는 걔가 더 많이 맞았다고.
그래서 여기 이스라엘 사람들이 친구 대목이라면 만약에 여러분 같으면 어떤 사람이 와서, ‘권사님 아버진 뭐 하시노?’ 물으면, ‘하나님인데요.’ ‘이게 장난치나.’ 이건 ‘건달인데요’와 똑같은 짓이에요. 이스라엘은 본인들이 하나님이 아버지 됨을 원치 않아요. 왜? 너무 튀니까.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 아버지 대신 남들처럼 눈에 보이는 왕을 구했던 것입니다. 그거 실수한 겁니다.
이스라엘은 다른 나라와 뭔가 달라야 되는데, 다른 나라 보면 건장 하니까 ‘아하 탁월한 지도자 있기 때문에 있구나’해서 우리도 멋있는 아버지를 해보겠다는 겁니다. 사람 아버지, 하나님 아버지 말고. 다른 사람에게 ‘너거 아버지 뭐 하시노?’ 하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