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10장 2-12절 제목 : 나누지 못 함
막 10: 2-12 (나누지 못 함)
이름 : 우리교회(IP:220.81.176.150)
본문 : 마가복음 10장 2-12절
제목 : 나누지 못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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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09-01-04 13:24
나누지 못함
2009년 1월 4일 본문 말씀: 마가복음 10:2-12
(막 10:2, 개역)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나아와 그를 시험하여 묻되 사람이 아내를 내어버리는 것이 옳으니이까』
(막 10:3, 개역) 『대답하여 가라사대 모세가 어떻게 너희에게 명하였느냐』
(막 10:4, 개역) 『가로되 모세는 이혼증서를 써주어 내어버리기를 허락하였나이다』
(막 10:5, 개역)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너희 마음의 완악함을 인하여 이 명령을 기록하였거니와』
(막 10:6, 개역) 『창조시로부터 저희를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으니』
(막 10:7, 개역) 『이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막 10:8, 개역)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이러한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막 10:9, 개역)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하시더라』
(막 10:10, 개역) 『집에서 제자들이 다시 이 일을 묻자온대』
(막 10:11, 개역) 『이르시되 누구든지 그 아내를 내어버리고 다른데 장가드는 자는 본처에게 간음을 행함이요』
(막 10:12, 개역) 『또 아내가 남편을 버리고 다른데로 시집 가면 간음을 행함이니라』
사람이 몸으로 산다는 것은 곧 죄를 끊임없이 생산하면서 사는 겁니다. 비록 이성적으로 성경 말씀이 옳다는 것을 백년 동의해도 몸이 안 따라주면 그만입니다. 이런 죄를 지는 몸를 가지고 사는 인간 세상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미리 지옥과 천국을 마련했습니다. 이 세상은 그냥 지나쳐다는 과정에 불과합니다. 결국에는 지옥 아니면, 천국에 가게 됩니다.
그런데 천국 가는 사람이 천국에 갈만한 자이라서 가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유념해야 합니다. 천국 가는 사람도 지옥 가는 사람과 전혀 다를 바 없이 삽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천국에 도착해 있다는 겁니다. 참으로 기이한 현상입니다. 정말 의아해 여겨야 합니다. 마치 두 사람이 밭을 갈다가 한 사람이 데려감을 입고 한 사람이 버려둠을 입는 것과 같습니다.
두 사람이 나란히 잠을 자다가 한 사람이 데려감을 당하고 다른 한 사람이 버려둠을 당하는 것과 같습니다. 잠 자세가 똑바르다는 이유로 천국 가는 것이 아닙니다. 결국 죄 짓는 이 몸을 가지고 천국에 갈 수는 없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몸을 만드시면서 거기에 따라 법도 같이 만들었습니다.
아이들 장난감을 조립할 때에 설명서가 따라 붙는 것과 같습니다. 법이라는 것이 우리 신체가 있는 한 계속해서 작용합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9:27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즉 이 말씀을 피해할 수 있는 신체는 이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따라서 사람이 결혼한다는 것도 두 신체가 만나 한 몸을 이루는 법칙이 작용합니다. 하지만 인간은 죄를 지은 몸이기에 결코 두 몸이 한 몸이 되는 것을 현실로 인정치 못하고 어디까지나 내 몸은 내 몸으로 성립됨을 주장합니다. 즉 인간의 자아는 두 육체가 만나서 이루는 자아상아 아니라 자신의 신체만을 놓고서 만들어 내는 자아상입니다.
결혼을 서약하면 상대편 배우자의 맹세에 기대를 거는 것을 옳지 않습니다. 차라리 자신의 몸을 만드신 하나님의 맹세를 믿어야 할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만드신 몸이기에 이 몸에다 계속해서 하나님의 원칙이 작용해 달라고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법은 예수님의 몸과 인간의 몸, 양쪽을 다 겨냥해서 주어진 몸입니다.
우리 인간의 몸은, 하나님의 법을 지키지 못함을 들추어내는 법이요, 예수님을 향한 법은, 인간이 못지키는 예수님 홀로 다 지켜내었음을 증거하기 위한 법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이것을 모르는 바리새인들은 이혼가능성에 대해서 예수님에게 물었습니다. 그런데 인간들이 왜 갑자기 ‘아내 내어버리는 것’을 질문하는 겁니까?
사람이란 불쑥 내뱉는 질문 속에서 평소에 자신의 정당함을 훼손해 왔던 골칫거리를 거론하게 되어 있습니다. 즉 ‘~한 문제만 없으면 나는 괜찮은 사람인데…’라는 여운을 드리우면서 사람은 살게 되어 있습니다. 자신의 약점을 장점, 내지는 강점으로 전환시켜버리면 더 이상 결점이 없는 괜찮은 사람으로 자신을 내세울 수 있다고 여깁니다. 사람은 편한대로 삽니다. 그래놓고서 꼭 자기 행동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동원시킵니다.
자기 신체가 못 견뎌서 이혼을 결심해놓고서는 그 행위마저 하나님 앞에서 옳은 결정임을 확인하고 싶어서 신의 말씀을 다시금 건드려보는 식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의 신체와 관련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신체와 관련있습니다.
우리 몸은 부활이 안되는 몸입니다. 즉 부활은 우리 몸의 영속성을 보장해주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몸의 영속성을 보장해주는 겁니다.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분의 몸은 예수님의 몸 뿐입니다. 우리는 흙에 속한 몸이 흙에 속한 몸으로 다시 부활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몸으로 부활되는 겁니다. 우리 신체에 근거해서가 아닙니다. 예수님의 신체가 기준이기에 부활될 수 있는 요건인 성령님도 순전히 예수님의 몸에서 나온 영이기에 그러합니다.
로마서 8:11에 보면,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에게 있어 결혼이나 부부라는 것은 모두 예수님의 몸을 구성하는 하나님의 작업의 비유 같은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6:15-20에 보면, “너희 몸이 그리스도의 지체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내가 그리스도의 지체를 가지고 창기의 지체를 만들겠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창기와 합하는 자는 저와 한 몸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일렀으되 둘이 한 육체가 된다 하셨나니 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이니라
음행을 피하라 사람이 범하는 죄마다 몸 밖에 있거니와 음행하는 자는 자기 몸에게 죄를 범하느니라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보면, 성도는 더 이상 자기의 몸을 자신의 몸이라고 말할 수 없는 입장에 있다는 겁니다. 즉 성령이 계신다는 이유로 인하여 이미 자신의 몸에서 예수님의 몸으로 전환되어 버렸습니다. 여기서 사도 바울은 음행의 죄와 일반적인 죄를 차별짓습니다. 예를 들면, 도적질을 하는 죄와 음행의 죄를 비교해 보겠습니다.
도적질은 타인의 물건을 가져오는 겁니다. 주안점은 타인의 물건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돈을 훔치는 것이나 살인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타인의 목숨을 없애는 죄악입니다. 하지만 음행은 타인의 몸도 아니도 자신의 몸도 아니라 예수님의 몸을 더러운 몸으로 전환시키는 그런 죄가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근본적으로 음행이라는 죄의 문제점은 딴데 있는 것이 아니라 과연 내 몸이 내 몸이냐 하는 문제를 근원적으로 살펴보라는 겁니다. 내 몸이 내 몸이 아니라 주님의 몸이라고 인정하면 결혼이란 곧 ‘예수님의 몸으로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그리스도와의 혼인을 증거하고 보여주는 작업에 참여하고 있는 바가 됩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짝 지어주신 것을 사람이 나눌 수 없느니라” 이 말씀은 곧 예수님과 한 몸 되었다면 인간의 힘으로 그리스도 몸 아닌 것으로 살아갈 방도는 없다는 뜻이 됩니다. 혼인 생활의 행복과 파탄에 대해서 언급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혼인의 중요함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것도 아닙니다. 그리스도와 한 몸되는 것의 중요함을 말씀하시는 겁니다. 과연 그리스도의 몸이 되어 하늘의 영광으로 덧입는 것에 참여 못할 자가 누구인가를 골라내는 방식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이미 우리가 그리스도와 한 몸 되었음을 잊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이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하나님 나라와 어린 아이
2008년 1월 11일 본문 말씀: 마가복음 10:13-16
(막 10:13, 개역) 『사람들이 예수의 만져주심을 바라고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오매 제자들이 꾸짖거늘』
(막 10:14, 개역) 『예수께서 보시고 분히 여겨 이르시되 어린 아이들의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막 10:15, 개역)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고』
(막 10:16, 개역) 『그 어린 아이들을 안고 저희 위에 안수하시고 축복하시니라』
천국이라는 것은 반드시 이 지상의 나라와 반대되는 나라로 등장합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만드는 이 세상을 이미 포기했습니다. 이 세상을 잘되게 하기 위한 하나님의 뜻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따로 있습니다. 사람들은 모르고 있고 보지 못하고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악마를 염두에 두고 이 세상을 다루고 계십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악마의 존재를 빼고서 이 세상을 규정하려고 합니다. 악마도 없고 신도 관여하지 않는 자기들만의 세상을 천국으로 발전시키고자 애쓰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행복이란 자신의 기대치에 의해서 그때그때마다 결정됩니다. 신의 계시도 필요치 않습니다. 신의 뜻도 필요없습니다.
오로지 자신의 뜻과 자신의 욕망이면 그것으로 행복하게 사는데 있어 가치관은 이미 확립되어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이런 자신의 관점을 탓하거나 나무라거나 정죄할 수 있는 그 어떤 근거도 갖고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그 근거를 쏙 들이 미십니다. 그들이 누구냐? 대단한 신학자? 아닙니다. 대단한 설교가? 아닙니다. 대단한 전도자? 아닙니다. 바로 어린 아이입니다.
이 세상에서의 어린 아이란 곧 ‘미성숙자’를 의미합니다. 눈이 덜 뜨인 자들이 어린 아이입니다. 철이 없는 존재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께서는 이 어린 아이편을 어른들을 질책하는 자리로 삼아버리시는 겁니까? 그만큼 철이 덜 든 것이 아니라 세상 죄악에 그만큼 덜 때가 덜 묻은 겁니다.
그만큼 예수님 보시기에 이 세상이 위험하다는 겁니다. 세상이란 실은 인간들로 구성되어 있고 그 인간들 사이에 서로 통하는 의식 같은 것이 있습니다. 어린 아이는 여전히 타고난 순수성이 유지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세월 지나면서 어린 아이들은 어른들로부터 명령을 듣게 됩니다.
즉 그런 식으로 살면 빌어먹는다고 말입니다. 빌어 먹는다는 것은 얻어먹는다는 뜻이요 얻어먹는다는 말은 자립적인 노동이 이 세상에서는 값으로 쳐주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즉 사람이 살아가려면 세상에서 값으로 쳐주는 것을 내놓을 수 있어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것을 내놓아야 합니다.
세상사람들이 필요로 한다는 것은 세상 정신을 인정해주고 키워줄 만한 것을 내놓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세상은 자신들이 어디로 끌려가고 있는 줄도 모르고 무조건 발전을 외치고 있습니다. 무엇을 위한 발전이며 누구를 위한 발전이며 그 발전의 도착점이 무엇인지를 알길도 모르는채 무조건 발전을 추구합니다. 이 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 것을 내놓아야 그 노동에만 값을 쳐줍니다.
실은 그 발전이라는 것은 자기를 신으로 인정해줄만한 증빙이 되는 힘을 두고 말합니다. 힘이 세면 셀수록 자신은 신됨을 뚜렷해지는 법입니다. 옛날에 딸을 낳은 여인은 아들을 낳은 여인보다 가문에서 기를 펴지 못했습니다. 그 때는 아들을 낳아야 가문의 세력이 커진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가문의 힘이 세진다는 말은 가문 그 자체가 신의 경지, 즉 절대적 가치가 더욱 돈독해진다는 의미입니다.
이처럼 이 세상에서는 따로 절대적 신의 세계를 열심히 만들고 있습니다. 창세기 4장에서 가인의 후예들이 했던 일들이 바로 그런 것들입니다. 아벨 계열과 전혀 다르지요. 가인과 그 후예들이 신경쓰는 일은 스스로 신처럼 행세하며 사는 겁니다. 즉 따로 신이라는 존재가 필요치 않는 것을 목표로 하여 움직이는 겁니다.
그런데 문제는 인간들 자기들 끼리 열심히 싸운다는 겁니다. 평화라는 것은 기껏 자신이 끌어모은 힘 안에서만 평화입니다. 즉 가정이라는 것이 아빠의 힘으로 유지된다면 아빠 중심으로 일시적 평화를 나타내는 것으로 보이지만 아빠라는 자가 허랑방탕한다든지 경제적인 부를 외부에서 가져다 주지 못한다면 아버지로서 자격은 상실하고 대접도 받지 못합니다.
이처럼 인간 사회에서 원하는 것을 무조건적인 힘입니다. 힘을 가져다주지 못하면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는 것이 이 세상의 풍토입니다. 교회라는 것도 말할 것도 없습니다. 교회에 만약에 세상적인 힘이 가득하다면 사람들은 구태여 가정에 몰입하지 않고 교회일에 열중할 것입니다.
교회에는 자신을 신으로 만들 아무런 힘을 얻지 못하면서 자연적으로 교회에 관심을 끊게 마련입니다. 이런 것들이 다 성인 사회에서는 각자 신이 되고자 노력하는 모습들입니다. 이런 힘만이 대우받는 인간 사회에서는 약한 자에 속하는 어린 아이는 아직 인간으로 대접받지 못합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은 예수님께서 바로 힘없는 자편에 서서 같이 ‘힘없고자’ 하신다는 점입니다.
즉 ‘힘없는 편’에서 서서 힘을 키워주시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힘다 빼고 힘없이’ 끝까지 밀어 붙이겠다는 겁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십자가에 달려 죽어실 때도 참으로 ‘힘없이’ 죽어셨습니다. 고린도후서 13:4에 보면, “그리스도께서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나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으셨으니 우리도 저의 안에서 약하나 너희를 향하여 하나님의 능력으로 저와 함께 살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살아남는 것이 사시는 목적이 아니라 ‘힘없는 세계’를 통한 천국의 존재성을 알리시는 것이 사시는 목적이었습니다. 따라서 경쟁과 다툼과 싸움판에서 희생자로만 떨어져 나갈 수밖에 없는 그 어린 아이들의 세계가 도리어 천국을 말해줄 수 있는 적당한 예가 되는 것입니다. 진정한 평화란 바로 이곳에만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내 세운 평화의 인물인 ‘어린 아이’는 본인의 욕망이 가미될 수 없는 처지에 놓여 잇습니다. 주면 주는대로 받아먹고 위협을 가하면 가하는대로 겁을 낼 수 밖에 없는 그런 처지에 놓여 있는 것이 어린아이입니다. 즉 어린 아이는 운명을 자신을 결정지으려고 하지를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기대한 ‘선택’ 개념입니다.
마태복음 1125-26에 보면,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고 되어 있습니다. 즉 감추어져 천국의 진리가 어린 아이 같은 자들을 통해서만 전달되는데 이들은 자신의 운명에 대해서 자신의 권리나 자신의 주장을 펼치지 않습니다.
영생과 돈
2009년 1월 18일 본문 말씀: 마가복음 10:17-22
(막 10:17, 개역) 『예수께서 길에 나가실새 한 사람이 달려와서 꿇어 앉아 묻자오되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막 10:18, 개역)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막 10:19, 개역) 『네가 계명을 아나니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거짓 증거하지 말라, 속여 취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였느니라』
(막 10:20, 개역) 『여짜오되 선생님이여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키었나이다』
(막 10:21, 개역)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사 가라사대 네게 오히려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하시니』
(막 10:22, 개역) 『그 사람은 재물이 많은고로 이 말씀을 인하여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가니라』
영생은 돈을 취득하듯이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돈이란 그것을 얻고자 하는 자에게는 목표로 자리잡게 됩니다. 왜 돈을 버느냐라는 질문에 대해서 대답은 없습니다. 영생에 대해서 어떤 사람이 질의를 하면 예수님은 그저 영생은 이러이러하다고 말씀만 하시면 될터인데 왜 그 사람이 돈이 많은 부자라는 점을 지적하시고 그 돈을 왜 없애기를 당부하시는 겁니까?
그 부자의 돈이 결코 교회로 흘러들어오지 않는다는 점에 유념해주시기 바랍니다. 즉 돈은 마치 물과 같아서 그냥 흩어지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줄기와 새로운 평지와 새로운 마을을 이루게 됩니다, 마치 십자가 복음을 말하는데서 ‘십자가 마을’이 생기는 것처럼 돈이 원하는데서 새로운 ‘돈의 마을’이 생깁니다. 이 돈의 마을을 오늘날 ‘기업’이라고 합니다.
사람이 사업을 벌리는 것은 과잉의 가치를 인위적으로 조장해 내기 위해서입니다. 즉 옛날에는 돈 자체는 물건과 물건을 교환하는 증표에 불과했습니다. 예를 들면 제가 여기 종이에다 자동차 그림을 그리면 이게 곧 자동차가 되는 겁니까? 결코 아니지요. 그냥 자동차 그려진 종이에 불과합니다. 즉 휴지이지요. 그런데 이 휴지조각 같은 자동차 낙서를 수천 장, 수만장을 찍어내어서 제가 간직하고 있다고 자랑하면 아무도 거기에 대해서 부러워한 분은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실제 자동차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야기를 좀더 진전 시켜봅시다. 우리집 식구가 세 명인데 자동차가 1대 있습니다. 이것을 과잉이라고 하지를 않습니다. 하지만 저의 집에 자동차가 만 대가 있다고 한다면 이것은 과잉이라고 할 것입니다. 쓸데없는 자동을 많이 갖고 있는 겁니다. 이것은 결코 자랑거리가 아닙니다.
만약에 이 자동차를 무상으로 한 대씩 나누어준다고 한다면 어느새 저의 집에는 자동차가 1대 밖에 남지 않을 것입니다. 과잉은 사라져버린 것입니다. 이렇게 되어도 그 어떤 사람도 우리 집보고 불행하게 되었다고 여기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도리어 그동안 쓸데없는 쓰레기를 그동안 많이 혼자 갖고 있었다고 여겼는데 이제는 잘 되었다고 말할 것입니다.
이것은 자동차 뿐만 아니고 물고기도 그러하고 농사도 그러합니다. 그 어떤 경우도 과잉이 칭찬이나 인격의 훌륭한 증거로 사용되지를 않고 도리어 어리석음의 대명사가 되는 겁니다. 그런데 만약에 새로운 시대가 찾아와서 과잉이 축복으로 해석된다면, 쉽게 말해서 자동차가 한 집에 만 대가 있어야 하고 집에 물고기가 차고 넘쳐야 하고, 곡간에 곡식이 넘쳐야 사람 대우 받는 시절이 온다면 그 사람은 그 시대의 모범적인 승자의 사례가 될 것입니다.
출애굽기 7장부터 10장까지 엄청난 과잉이 나옵니다. 강에 피가 넘쳐나고, 개구리가 밥상 위에 넘쳐나고, 파리 떼가 온 나라에 넘쳐나고, 메뚜기가 넘쳐납니다. 이게 축복입니까 아니면 저주입니까? 당연히 저주입니다. 곧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축복과 저주의 기준은 이 세상이 인간이 관리할 그런 세상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앞으로 다가올 새 하늘과 새 땅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들은 어떤 의미에서 자기 동네가 아닌 남의 동네에 들어와 사는 겁니다. 저주가 넘쳐나는 동네에 살고 있습니다. 저주가 퍼붓고 있는 지옥같은 세상에서 살고 있는 겁니다. 그속에서 사람들은 모든 과잉의 질을 따지지 않고 삽니다.
넘쳐나는 것이 마냥 좋은 것이 아닙니다. 더 좋은 것은 영생입니다. 무엇이 질적으로 좋고 나쁘고를 구분하지 못한다면 그 사람은 영생 자체에 대해서도 모르고 있는 사람입니다. 영생이란 이 땅에 사는 인간들의 안목으로 측정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서 측정될 성질의 것입니다. 실은 낯설기 짝이 없는 상태가 곧 영생입니다.
이 부자는 무엇이 영생인가도 모르면서 무조건적으로 영생은 좋다는 인식을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 ‘좋다는 것’이 어디서 도출된 사고방식인가를 알게 하기 위해, 그 부자의 재물을 거론하신 것입니다. 즉 돈이라는 과잉에 대해서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가를 알아보시겠다는 말입니다.
과연 돈을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주어도 계속 자신이 가치에 손상이 가지 않는다는 사실을 아는가 아니면 돈이 여전히 많이 있어야지만 자신의 가치를 지킬 수 있다고 보느냐를 물어보시는 겁니다. 이 부자는 어릴 때부터 영생을 얻기 위한 태도로 살아왔다고 주장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서 얻어낸 선의 과잉입니다.
땅에서 공덕을 많은 쌓으면 그것이 영생으로 이어지라고 여긴 것입니다. 하지만 이 부자는 인간에게 있어 만들어지는 것은 이 저주받을 땅에서 일어나는 저주의 과잉인 것을 모릅니다. 하나님께서 축복주시는 것은 질적으로 땅의 원리를 존중하는 것이 아닙니다. 도리어 땅의 원리를 저주하면서 주어지는 겁니다.
곧 영생은 하나님의 목표이지 인간의 목표가 아닙니다. 만약에 어떤 자에게는 “영생을 줄터이니 지금 너의 목숨 내놓아라”고 한다면 선뜻 내놓을 자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들이 생각하는 영생이란 그냥 오래 사는 정도가 아니라 자신의 가치와 자존심이 훼손되지 않는 상태로 계속 이어져 가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주시고자 하는 영생에는 인간의 가치나 자존심이 섞여 들어있지를 않고 그 대신 예수님의 가치와 공로만 담겨 있는 겁니다. 그래서 인간의 가치나 흔적은 제거하면서 영생을 주시게 됩니다. 이 점을 오늘 부자는 알지 못했습니다. 즉 자기 소유용으로 들어올 수 있는 영생을 생각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부자가 스스로 생각하는 가치를 뽑아내려고 하십니다. 그 부자는 하나님을 대할 때, 존경심을 취하면 그것으로 사랑받을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하지만 정작 인간이 자기 부정을 인정하지 아니한 상태에서 신에게 존경의 예를 보이는 것은 일종의 흥정입니다. 줄 것 주고 받을 것 받겠다는 장사 심보입니다. 부자는 영생을 얻고자 하기 전에 소위 ‘나의 것’이라고 하는 것은 송두리째 다 뽑혀야 합니다.
돈 뿐만 아닙니다. 그동안 자아를 구축하기 위해 수집해 놓은 모든 장점들은 다 뽑혀야 합니다. 이처럼 하나님에게 모든 것이 빼앗기고 있다는 마음을 가졌다면 그 사람은 지금 한참 하나님께서 그 사람 속에 영생을 집어넣는 작업을 하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 자신의 것은 다 뽑아내고 예수님 자신의 것을 몽땅 우리 속에 집어넣고 계십니다. 그래서 진정한 영생이란 예수님에게 목숨 빼앗기는 그 자체가 도리어 큰 영광이요 축복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양보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명예와 관련되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