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 65: 1- 3 (이방인의 구원)
사 65: 1- 3 (이방인의 구원)
이름 : 우리교회(IP:220.81.176.150)
본문 : 이사야 65장 1- 3절
제목 : 이방인의 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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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08-12-31 20:40
이방인의 구원
2008년 12월 31일 본문 말씀: 이사야 65:1-3
(사 65:1, 개역) 『나는 나를 구하지 아니하던 자에게 물음을 받았으며 나를 찾지 아니하던 자에게 찾아냄이 되었으며 내 이름을 부르지 아니하던 나라에게 내가 여기 있노라 내가 여기 있노라 하였노라』
(사 65:2, 개역) 『내가 종일 손을 펴서 자기 생각을 좇아 불선한 길을 행하는 패역한 백성들을 불렀나니』
(사 65:3, 개역) 『곧 동산에서 제사하며 벽돌 위에서 분향하여 내 앞에서 항상 내 노를 일으키는 백성이라』
성경에 보면 영적인 사람과 육적인 사람을 나누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외의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십니다. 고린도전서 2장에서 말씀하시기를, 신령한 것은 영적인 사람이라야 알아 듣는다고 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비롯해서 이 성경 전체가 오직 영적인 사라만 알아듣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알아들었다는 증거가 무엇입니까? 바로 오늘 본문 1절입니다.
즉 내가 하나님을 찾지도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먼저 하나님께서 날 찾아왔다는 겁니다. 이것은 자기 자랑에 대한 형식이나 정보가 아니라 고백으로 나와야 합니다. 이 고백이 되려면 여기에 엄청난 기적이 발생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 말씀 자체가 인간에 대한 전적인 무시와 모욕과 모독으로 일관되어서 전달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육적인 사람들은 이 성경 말씀을 거부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의 사람들의 삶이란 어디까지나 자신을 무시하지 않는다는 조건 하에서 타인과의 대화에 나서게 됩니다. 그래서 무엇이 옳은가, 무엇이 진리인가가 관심 두는 것이 아니라 날 무시하느냐 아니하느냐가 우선 전제되어야 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인간의 본성에 대해서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나를 구하지 아니하던 자에게 물음을 받았으며 나를 찾지 아니하던 자에게 찾아냄이 되었으며 내 이름을 부르지 아니하던 나라에게 내가 여기 있노라 내가 여기 있노라 하였노라” 이 말씀은 두 가지를 겨냥하는 말씀입니다.
하나는, 소위 자칭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여기는 유다 나라 백성에 대한 모욕이요 노골적인 무시입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만 여호와를 안다는 점에 자부심을 갖고 있었습니다. 즉 “나는 저 세리보다 낫다는 점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감사합니다”는 식입니다. 누가복음 18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런 인간의 본성에 동조하시지 않습니다. 인간은 타인을 통해서 자신의 가치를 정립하려고 합니다. 자기 보다 못한 자를 딛고 앞서는데서 자기 가치를 잡을려고 합니다. 따라서 구원받은 것도 나름대로 자기쪽에서 뭔가 시도를 해야 한다고 여깁니다. 이것은 평소에 하나님께서 지정해 놓으신 인간 기준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는데서 비롯됩니다.
사람들은 기분 좋을 때는 말씀이 귀 기울리기 됩니다. 즉 이만하면 하나님을 향하여 마음을 열어놓을 여유를 가질만 하다는 겁니다. 그런데 기분 나쁜 일이 생기면 마음의 문을 닫아버립니다. 그리고 화를 외부를 향하여 방출합니다. 즉 “왜 내가 원하는 나의 나됨을 충족시켜 주지 않느냐”는 겁니다. 먼저 내가 원하는 것을 채워진다면 그때사 하나님의 말씀을 귀 기울릴 용의가 있다는 겁니다.
내 것을 채워주지 않는다면 나는 설사 하나님이라 할지라도 대화할 마음이 싹 가신다는 겁니다. 즉 사람들은 자기를 부정하기 위해서 말씀을 보지를 않습니다. 하지만 자기 긍정 하에서 일어나는 모든 성경 해석은 모두 악마적이고 이단적입니다. 하나님의 기준은 자기 부정인데 혼자서 ‘자기 긍정성’에 몰입하고 있다면 이것은 바로 끊임없이 자기를 속이는 사태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을 보라고 하라는 것은 그것에서 한 수 배워라는 말이 아니라 제발 자기 부정을 하라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오늘 본문에서 언급하시는 이방인이란 곧 ‘끊임없이 자기를 속여대는 그러한 인간 본성’에 기초를 두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즉 “저는 쉬지않고 본심을 속이면서 남과 하나님 앞에 나서는 존재입니다”를 고백해야 합니다. 이러한 고백은 무엇을 중지해야 하느냐 하면 이성(理性), 즉 냉철한 판단과 따짐을 포기해야만 합니다. 마태복음 3:16에 보면, 세례 요한이 사람들에게 물 세례를 주고 있는데 예수님이 나타나셨습니다.
세례요한은 당연히 자신이 메시야에게 세례를 받아야 한다고 여겼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세례 요한을 당황스럽게 만드는 사태가 일어났습니다. 예수님께서 도리어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아버리는 겁니다. 이것은 곧 그 당시 신학자들이나 유대교 율법사들이 예상한 메시야의 구원방법과는 정반대되는 방식입니다.
유대 학자들의 생각은 이러합니다. 하늘 나라의 정보를 받아서 그대로 받고 실천에 옮기면 그것으로 구원이 된다고 여긴 겁니다. 설마 그것이 극히 육적인 방식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한 겁니다. 하지만 영적인 방식은 그것이 아닙니다. 오늘 나오는 본문 이사야 65:1의 방식대로 진행됨을 고백하는 자만이 영적 사람입니다.
세례 요한도 그 당시 유대교 구원방식을 익히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도리어 죄인이 자기에게 세례 받음으로 말미암아 더 이상 유대교가 원하는 메시야는 순식간에 눈 앞에서 사라져버렸습니다. 단지 12명의 제자들을 데리고 다니는 이단스러운 일단의 무리만 있을 뿐입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육적인 사람들 눈에 예수님의 태도는 미친짓이었습니다. 로
오늘 새벽에 저는 운동하면서 길에서 치매 걸린 할머니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 분은 저에게 다가와서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육소간에 문 열어놓았습니까?” 여기에 ‘육소간’이란 정육점의 옛말입니다. 저 뿐만 아니라 아침 일찍 출근하는 사람들을 붙들다 다 물어봅니다. “육소간에 문 열어놓았습니까?”
미쳤다고 할 수 있는 분입니다. 하지만 ‘미쳤다’는 것이 뭘까요? 이성적 판단이 중지된 것을 의미합니다. 이성적 판단이 중지되었다는 말은 더 이상 자기를 구성할 능력이 상실되었다는 뜻입니다. 이 때 주어지는 것은 하나님의 일방적인 능력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이방인들이 여호와를 찾게 된다는 것은 결코 그들의 능력이 아닙니다. 미쳐야 가능합니다. 어느 정도 미쳐야 할까요? 더 이상 자신을 긍정할 그 어떤 시도도 다 무의미할 정도에 예수님 사랑할 때 터져 나오는 것이 바로 미친 것입니다. 이 때 비로소 다음과 같은 고백을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저 같은 이방인도 불러주었습니다. 맞습니다. 예수님, 저는 죄인입니다”고 말입니다. 이방인의 구원은 결코 이방인의 공로가 들어있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내어주신 그 사랑으로 인하여 미쳐 버릴 때, 사랑에 마비될 때, 진정 자기 부정에 근거한 사랑을 고백할 수 있습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제발 우리 자신이 이정도로 훌륭하다는 맛으로 살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