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12월 26일 딤후1: 1-10 하나님의 뜻을 지키는 자와 누리는 자
광주 12월 26일 딤후1: 1-10 하나님의 뜻을 지키는 자와 누리는 자
이름 : 우리교회(IP:124.59.87.32)
081226 주님의 뜻을 지키는(행함) 자
______vs 주님의 뜻을 누리는(믿음) 자
우리교회(IP:124.♡.87.32)
08-12-27 06:22
우리교회(IP:220.♡.176.150)
09-01-18 15:35
광주081226a디모데후서1장1절
광주 강의(08. 12. 26) 1강 2009-01-16 20:40:46 녹취 : 서경수
광주강의(08. 12. 26) 44-1
오늘은 디모데후서를 공부하겠습니다. 신약성경 343페이지입니다.
1절에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약속대로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은” 이렇게 되어 있지요?
[피]라는 책을 읽고 문장이 어렵다고 하시는데, 방금 읽었던 디모데후서 이 문장이 얼마나 어려운지, ‘하나님의 뜻’도 어렵고, ‘그리스도 예수 안’은 더욱 어렵고, ‘생명의 약속대로’ 이 말은 더더욱 어렵습니다.
제가 첫째시간에 이것을 설명해 드리려고 합니다. 하나님의 뜻에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첫째는 사람이 신에게 요청하는 것이고, 둘째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전달하는 뜻이 있어요. 첫 번째 사람이 신에게 자기 뜻을 전달하는 것을 신의 뜻으로 보는 것. 이것을 성경에서는 ‘이방인’이라고 합니다. 두 번째,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자기 백성에게 이야기하는 이것을 ‘이스라엘’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확실하게 구분이 되지요?
이방인들은 자기의 신을 상상해서, 이 하나님은 어진 분이어서 땅에서 정성을 다해 부지런히 빌면 내 소원을 들어주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럴 때 하나님의 뜻은 뭐냐 하면, 사실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고 인간의 뜻이죠. 백지 수표에 금액 기록하듯이 자기의 욕망을 기록하고는 마지막에 예수 이름을 붙여서 마무리하면 주의 뜻이 이뤄진다는 거예요. 이것이 바로 이방인들이 하는 짓입니다.
두 번째 하나님이 찾아오시는 것은 어떤 모습인가 하면, 1번을 부수면서 2번이 와요. 이게 굉장히 어려워요. 1번을 안 건드리고 2번이 오는 것이 아니고, “1번 너 이렇게 원했지? 일체 안 들어줄 테니 알아서 해” 하고 1번은 완전히 부수고 그 부서진 현장에 2번이 찾아옵니다.
예를 들면 이런 거예요. 재난 영화 알지요? 화산이 폭발을 한다든지, 토네이도가 불어서 집이 날아간다든지 이런 내용을 소재로 한 것이지요. 이런 재난 영화의 특징이 뭐냐 하면, 재난 나기 전까지는 의사, 목사, 교사, 기술자 등 각자의 위치에서 자랑하며 큰소리치다가 막상 재난이 일어나니까 서로의 차이가 전혀 소용이 없어요. 재난이 오기 전까지는 목사, 장로, 집사로 으스대다가 막상 재난이 발생하면 목사, 장로 이런 것은 껍데기에 지나지 않습니다.
집에 양식이 풍족할 때는 아버지 먼저 드시고, 어머니 드시고, 형님 뭐 이렇게 순서를 따지지만 만약에 양식이 부족하면 순서고 뭐고 없이 서로 먼저 먹으려고 짐승이 됩니다.
그러니까 없을 때, 위기 때 모든 인간의 가식적인 껍데기는 무용지물이 되는 거예요. ‘나는 대학을 졸업했다. 나는 초등학교 나왔다.’ 이런 것도 막상 다급할 때는 별 소용이 없습니다. 차가 뒤집혔을 때 어떤 사람이 나를 구조하면서 “실례지만 학교 어디까지 다녔습니까?” 이런 것을 물을 필요 없잖아요. 박사는 구해주고 초등학교 나온 사람은 구출 안하고 이런 것이 없단 말이지요.
사람이 위기에 빠졌을 때는 사람들 간의 차이가 일체 소멸됩니다. 하나님이 직접 나타나면, 이방인들의 기도가 뭐냐 하면, “하나님, 저 사람보다 더 승진하고, 저 사람보다 더 부자 되게 --” 이런 차이를 두다가 막상 하나님이 나타나면 많이 모은 재산도 소용없고, 많이 배운 것도 소용없습니다.
다시 해 봅시다.
지금 디모데후서 1장을 하는데,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대해서 성경에서는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이렇게 하지 않고, 두 가지를 나눠서 설명합니다. 첫째는 이스라엘이 아닌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뜻을 구할 때는 이런 식으로 구한다. 그것이 나와 있습니다. 보통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을 이야기할 때는 자기의 소망이 있는데, 그것은 남보다 더 뛰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라캉이라는 철학자는 “내가 소망하는 것은 타인의 소망이다.”고 했습니다. “나는 타인의 욕망을 원한다.” 상당히 어렵지요? 사람이 갖고 싶은 것은 내가 지어내는 것이 아니고 남들이 지나가는데 보니까 나보다 더 좋은 옷을 입고 있으니까 “아, 맞아. 나는 저것을 원해.” 만약 그 사람이 그 옷을 입고 있지 않았더라면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몰랐는데 그 사람이 좋은 옷을 입고 갈 때 그 옷을 보는 순간 “맞아. 저것이 바로 내가 원했던 옷이야.” 라고 갑자기 생각이 나서 “나는 저 옷을 원해.” 이렇게 되는 겁니다.
식당에 가서 음식을 주문할 때 처음에는 ‘수제비 먹지 뭐’ 하다가 메뉴판을 보면 수제비도 있지만 그보다 더 맛있는 것이 나열되어 있으면 갑자기 욕망이 바뀌지요. 그래서 다른 것을 주문하게 된단 말이지요.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 10명쯤 모이면, 성경에 “두 세 사람도 주의 이름으로 모이면 교회라고 했다.” 하면서 기뻐했는데, 근처에 큰 예배당이 지어지고 500명 교인들이 이사를 오면 “하나님 이럴 수 있습니까?” 하면서 원망이 나온단 말이지요.
바로 인간들이 원하는 것은, 남보다 더 뛰어난 것을 원합니다. 그러나 더 뛰어나면 이제 만족할까요? 천만의 말씀. 그 지점에서 다시 점프를 해요. “하나님, 이것은 기본이고 나보다 더 뛰어난 사람보다 더 뛰어나게 해 주세요.” 그러면 그것으로 끝입니까? 천만의 말씀. 그 지점에 가면, 또 “하나님, 내 이름이 저 외국에까지 알려져야 --” 하면서 더 욕심을 내지요.
그래서 사람이 하나님께 원하는 것은 항상 누구를 의식하는가 하면, 타인이 가진 것, 타인의 소유가 내 욕망의 원인이 됩니다. 자극을 해요. 그래서 우리는 경쟁적으로 신을 동원해서 “나는 왜 저 사람보다 못나야 합니까?” 이런 것이 기도의 내용입니다. 이것을 저는 ‘자아 이미지’라고 합니다.
자아 이미지를 뜯어보면 그 안에 뭐가 들어있냐 하면, 자기의 과거에 욕망했던 것들이 소복이 다 들어 있어요. 이런 것이 자아 이미지인데, 이것을 건드리면 다쳐요. ‘누가 되었건 내 자아 이미지를 건드리면 나는 용납하지 않겠다.’ 부모, 자식, 남편, 아내 심지어 하나님이라 할지라도 용납 못합니다. 하나님이라도 내 자아 이미지를 키워주면 좋은 하나님이고, 내 자아 이미지를 추락시키면 그런 하나님은 버립니다. 이것이 바로 이방인들이 믿는 하나님, 그들이 생각하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사실은 이스라엘이나 이방인이나 똑 같은데, 모두가 같은 인간인데, 이스라엘도 평소에 그렇게 기도해 왔는데 갑자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나타나니까 이들이 그만 할 말을 잊어버렸어요. 진짜로 하나님이 먼저 방문할 줄은 정말 몰랐어요. 여기서부터 하나님의 뜻이 비로소 나오는 겁니다.
하나님의 뜻이 등장하니까 기존의 사람들이 생각하는 하나님의 뜻은 물러가는 겁니다. 이것은 무가치해지고 진짜 하나님의 뜻이 내려오는데, 하나님의 뜻이 내려오면 모든 사람이 차이가 없고, 차별이 없고 모든 것의 속내가 다 드러나는 그 때의 마지막 하나님의 뜻이 뭐냐? ‘그리스도 안’이 나옵니다.
하나님의 뜻이 점점 구체화되고 분명해지면서 마지막 때, 종말에 아들로 이야기한다고 했으니까 그리스도 예수라는 분이 등장해서 전부터 있었던 모든 하나님의 뜻이 ‘예수 그리스도 안’이라는 곳에 모아지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신구약은 다 연결 됩니다.
디모데후서는 사도바울이 로마 옥에 갇혀서 디모데에게 보내는 나중 편지(후서)입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언제 디모데를 알아서 서로 편지를 주고받고 했는가? 그 내용은 사도행전에 나옵니다.
사도행전에서 하나님의 뜻이 인간에게 어떻게 이뤄지는가, 그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사도행전 18장 28절을 보겠습니다. “이는 성경으로써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증거하여 공중 앞에서 유력하게 유대인의 말을 이김일러라”
사도행전은 초대교회 때 일입니다. 사도행전에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이 뭐냐 하면, ‘예수는 그리스도다.’ 라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의 내용이, 이방인들에게 하나님의 성경을 풀어서 가르쳤더니만 그들이 이구동성으로 하는 이야기가 “예수는 그리스도다.”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그전에는 예수 따로 그리스도 따로 였는데, 성경을 가르치니까 예수와 그리스도가 일치되는 그런 일이 벌어졌단 말이지요. 이방인들은 자기 욕심, ‘신이시여, 나에게 복을 주옵소서. 남들보다 더 나은 인간 되게 하옵소서.’ 라고 빌던 인간이 어떻게 바뀌는가 하면, 하나님의 뜻 안으로 들어와 버렸어요. ‘예수가 곧 그리스도입니다.’ 라는 고백을 했단 말이지요. 이렇게 달라진 거예요.
그들에게 성경을 풀어줬더니만 ‘아, 그 예수가 바로 그리스도구나.’ 라고, 그리스도와 예수가 따로 노는 것이 아니고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것을 이야기하는 그것이 마지막 종착점으로 머물렀다 이 말이죠.
그렇다면 우리 입장에서 “그럼 당신 아이 잘 되고, 공부 잘하고, 돈 잘 벌고 그런 뜻은 어디로 갔나?” 이 말이죠. 사람은 의, 식, 주가 급선무거든요. 먹고 살만 해야 여력이 생겨서 취미삼아 교회 가서 빌고 한단 말이지요. 인생은 내가 살지 하나님이 살려주는 것이 아니니까. 다만 아쉬울 때는 빌면, 빈다고 예쁘게 봐서 혹시나 복을 주면, 이건 보너스 아닙니까. 덤으로 얻는 것이란 말이지요.
이렇게 살던 이방인들의 관심이 자아 이미지에서 뭐로 바뀌었어요? 그리스도 예수에게로 관심이 바뀌었으니까 그러면 과거 나를 위해 예수 믿고, 나를 위해 하나님 찾고 하던 그 ‘나’는 어디에서 찾느냔 말이지요. 그리스도 예수가 되어버리면 ‘나’는 어디에서 찾는가? 그 정답은 ‘나’는 허구가 되고, 그동안의 ‘나’는 내가 상상한 자아 이미지에 불과한 거예요.
그림으로 설명해 보겠습니다. 이게 구약이고 이건 신약입니다. 구약 사람들은 진짜 하나님을 만났지요. 그래서 하나님의 뜻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이방인들은 진짜 하나님을 모르고 자기 욕심대로 살다가 신약의 사도행전으로 왔단 말이지요. 이방인들이 어떻게 되는가 하면,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나’밖에 모르던 이 사람에게 진짜 하나님이 주신 영이 임하니까 이 사람이 뭐라고 하는가 하면 ‘예수는 그리스도시다.’ 라는 이야기를 했단 말이지요.
성령을 받으니까 ‘나’밖에 모르는 자들, ‘이것은 내 직장이고, 이것은 내 집이고, 이것은 내 물건이고 --’ 오직 나를 지키기 위해서 하나님도 믿고, 나를 위해서 예수 믿고 모든 것을 나를 위해서 했었는데, 사도행전에서 성경을 풀어서 가르쳐주니까 뭐라고 하는가 하면 ‘예수님은 그리스도시다.’ 라고 하는 거예요.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말은, 예수는 내가 아닌 남입니다. 그런데 왜 남에게 관심을 둬요? 예수 믿는 것이 기적인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가 사과를 하나 먹어도 내 입에 맛있고 배부르기 위해서 먹어요. 내가 사과 먹어서 남이 맛있는 것은 생각도 못합니다. 어린아이가 소변이 마려울 때 엄마가 화장실로 데려갈 수는 있어요. 그러나 소변은 본인이 봐야 될 것 아닙니까.
소변을 남이 못 누는 것을 뭐라고 합니까? 이것을 철학에서 실존주의라고 합니다. 누가 영어, 수학을 가르쳐도 이것은 누구한테 들어와요? 나에게 들어오지요. 예수가 어떻고 하나님이 어떻고 하는 것은 다 누구 좋으라고? 남 좋으라고 하는 것이 아니고 내 좋으라고 예수 믿고, 내 좋으라고 하나님 믿는 것. 이것이 하나님의 뜻입니까, 이방인의 뜻입니까? 이방인의 뜻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지, 예수 그리스도를 내가 믿어서 내가 구원 받겠다고 하는 것은 일종의 가짜 신앙이에요. 마치 절에 가서 부처한테 비는 것과 마찬가지란 말이지요. 교회 가서 내가 예수 덕분에 잘 되겠다는 것은, 말이 교회지 사실은 절입니다. 이것은 성령 안 받아도, 사람은 모든 행동을 자기 좋으라고 합니다. 고구마를 먹어도 내 배부르라고 먹고, 비타 500을 마셔도 내 속이 시원하라고 마시고 전부 다 내가 행동하는 것은 나에게 이익이 돌아올 경우에만 행동합니다.
그러면 내가 교회 가서 예배드리고 하는 것은 누구 좋으라고 하는 겁니까? 내 좋으라고 한다면 그 사람은 아직도 내 뜻을 위하여 교회 다니는 것이란 말이지요. 이것은 절대 안 바뀝니다. 우리교회도 마찬가지에요. 우리교회 교인들 와 앉아도 ‘목사님, 오늘도 좋은 말씀 주셔서 이 어려운 세상에서 천국 간다는 좋은 말씀 해주시고, 살아 있을 때도 주님이 함께 하신다고 하는 위로의 말씀 해주세요. 그런 말씀 들으려고 왔습니다.’ 라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이것은 성령과 관계없이 일반적인 상식, 습관이기 때문에 이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고 자기 뜻이고, 이런 사람은 신자가 아니고 교인입니다.
그런데 뭐가 왔을 때만 바뀐다? 하나님의 영이 임하게 되면 이전까지 나만 생각하다가 ‘누가 날 만드셨지? 날 이 땅에 보내신 분의 뜻은 무엇일까?’ 이렇게 되지요. 갑자기 중심이 나에게서 나 외에 어떤 분, 나를 있게 하신 그분으로 관심이 바뀌는 겁니다.
질문 드리겠습니다. 조 집사님은 버스 탈 때 버스 기사를 믿습니까? 믿지요. 술 먹고 마약 안 하는 것을 믿잖아요. 맑은 정신으로 운전해서 목적지까지 잘 도착할 것을 믿잖아요. 그러나 이것은 믿는 것이 아니라 확률입니다. 버스 기사는 운전 실력도 있고, 핸들을 잡을 때는 술이나 마약을 안 한다는 것을 알고, 또 도로 사정이 괜찮으면 목적지까지 무사히 도착할 것이라는 확률이죠.
이것은 믿는 것이 아니고 지식입니다. 많은 지식이 점점 더 가능성을 높입니다. 이것은 개연성이라고 하는데, 신자는 그것이 아니고 자기가 믿는 대상이 있기 때문에 자기 생각 안하고 그 대상을 생각해서 모든 것을 바치는 것이 신자거든요.
그런데 인간을 날 때부터 자기밖에 모르는 자들입니다. 자기 자신이 제일 중요해요. 자기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어요. 하나님이고 예수님이고 자기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어요. 나를 위한 예수님이고 나를 위한 하나님입니다. 아무리 친한 친구도 나를 위한 친구입니다. 그래서 나에게 유리할 때만 친구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본성인데, 이런 인간이 갑자기 ‘나를 만드신 분, 나를 구원하신 분’에게 관심을 갖게 됩니다. 나 외에 다른 외부에 관심을 가지면 나와 그 사람 사이에 신앙이 형성됩니다. 의뢰하는 관계가 성립이 되지요. 이럴 경우 신자라고 합니다.
그전까지는 신자가 아니고 하나님은 내가 이용할 수 있는 대상이었지요. 그래서 교회에서 장로쯤 되면 그 감투로 인해 사회에서도 약간은 인정을 받기 때문에 장로 아닌 것보다는 장로 되는 것이 낫다고 여깁니다. 그래서 교회에 돈을 좀 내더라도(피아노도 사주고, 건축 헌금도 좀 내고 해도) 그만한 가치가 있다고 봅니다. 그러다가 장로 투표에 떨어지면 교회 안 나오고 삐치고 하지요.
그런데 그것이 아니고 마지막 종말에는 장로고 집사고 목사고 이런 것은 주께서 묻지도 않고 따지지도 않고 ‘너는 지금 신자냐? 네가 믿는 자가 있느냐?’ 그것을 보는 겁니다. ‘너를 있게 했고, 너로 하여금 천국 가게 했던 그분을 믿느냐?’는 것이지요.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너 성령 받았어?’ 라는 것과 같은 말입니다.
왜 성경에서 ‘너 성령 받았어?’ 라고 묻느냐 하면, 인간의 힘으로는 절대 자기를 못 벗어나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열심히 하나님을 믿어도 그것은 내 좋으라고 믿지, 절대로 나를 벗어나서(내 이익을 떠나서) ‘손해를 봐도 주를 위해서’ 라는 마음은 갖지 못합니다. 예수 믿고 손해날 것 같으면 미쳤다고 예수 믿습니까? 이익 보려고 예수 믿지.
그런데 손해를 봐도 예수 믿는다는 것은, 이것은 이익과 손해를 떠나서 ‘나는 나만 있는 줄 알았는데 나 있기 전에 먼저 계신 분이 계시더라. 그분이 바로 하나님이고 그분의 뜻이 이뤄진 것이 바로 예수다.’ 이것을 믿게 되는데, 이런 믿음은 인력으로는 안 되고 기적(성령)을 받아야 됩니다.
성령을 받으려고 그동안 유대인들이 나름대로 성경도 많이 공부하고 시편도 외우고 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성령을 받기 위해서 두 가지를 기본으로 했습니다. 첫째는 십일조를 했고 둘째는 안식일을 지켰습니다. 셋째는 할례를 행했습니다. 할례를 행한 이유는 창세기 17장에 보면 나오지요. 할례를 행하지 아니하면 내 백성이 아니라고 해서 남자들은 다 할례를 받았고, 안식일을 지키는 것은 에스겔에 나옵니다. 모든 법은 다 폐하여도 안식일은 영원하다는 말씀을 근거로 해서 안식일을 죽자고 지켰습니다. 말라기에 보면 십일조를 안 해서 복을 못 받는다고 했고, 십일조를 하면 창고에 복이 넘친다고 하니까 십일조를 했습니다.
이 세 가지를 지키면 마지막 때에 에스겔에 의하면 하나님의 영을 받는다고 했습니다. 이 세 가지를 지키는 조건 하에. ‘이것 잘 지키면 영을 받아서 천국 직행한다.’ 이렇게 되거든요. 유대인들은 이것을 믿었어요. 그런데 이방인들은 날 때부터 자기 욕심밖에 모르는 사람들이에요. 예수든 부처든 가리지 않고 나에게 복만 주면 뭐든지 충성 봉사할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이방인들에게 갑자기 영이 임했습니다. 십일조 한 적도 없고, 안식일 지킨 적도 없고, 할례를 행하지도 않았는데. 요즘 같으면 교회 나간 적도 없고 예수님께 기도한 적도 없는 이런 인간인데 갑자기 성경을 보면서 성령을 받아버리니까 졸지에 이 사람은 오늘 죽어도 천국 가게 됩니다.
사도바울은 이것에 놀랐습니다. 구원은 인간들의 행위로 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했습니다. 선물은 원인 없는 결과에요. 원인이 없어요. 내가 뭔가 착한 일을 한다든지 애를 썼다든지 한 것이 아니고 아무 조건도 없고 이유도 묻지 않고 따지지도 않고 아무것도 없이 그냥 받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니까 선물 받은 사람은 오늘 밤 죽어도 천국에 간단 말이지요.
왜 그렇게 됩니다. 하나님을 위해 아무것도 한 것이 없고 자기 욕심만 채우던 개 같은 인간, 짐승과 같은 이방인에게, 우리가 그토록 바라던 천국을, ‘우리는 열심을 다하여 충성했는데 우리에게는 안 주고, 개 같은 이방인에게 천국을 주는 이유가 뭐냐?’ 그 이유를 사도바울이 계시를 받아서 설명을 합니다.
로마서 9장에 나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우리가 뭔가 열심히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거저 주는 사랑(긍휼)이 인간들이 신에게 갖다 바치는 정성과 열심과 충성과는 게임이 안 돼요. 하나님이 원하는 것은 ‘내가 공짜로 준 사랑이 고이 담겨 있는 것’을 원하지, 인간이 신을 위해 한 노력은 하나님이 일체 받지를 않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드린 것을 더럽다고 안 받아요.
20년 전에 극동방송에서 제가 이런 주장을 해서 난리가 났습니다. 시골 박사교회에 전화통이 불이 났습니다. 제가 방송에서 얘기 했습니다. ‘헌금 하려거든 여러분 집에 헌금 하세요.’ 라고. 성경에, 두 세 사람이라도 주의 이름으로 모이면 그것이 교회인데, 왜 인위적으로 교회를 꾸미고 만들려고 하느냐? 그것은 뭔가 받은 것이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진짜로 받은 것이 없으니까 껍데기라도 그럴싸하게 있어야 남들 보기에 있는 것처럼, 성령 받은 것처럼, 죽으면 구원 받는 것처럼 위장을 하는 위장술에 지나지 않습니다.
본인이 얼마나 허(虛)하면 보약을 먹겠어요? 건강에 자신이 없으면. 얼마나 자신이 없었으면 그런 종교적인 품세를 온통 뒤집어 쓰냔 말이지요. 성경에는 그냥 성령 받으면 오늘 밤에 죽어도 천당 가는데, 성령을 안 받았기 때문에 안 받은 티를 안 내려고, 열심히 헌금하고, 기도하고, 이웃 사랑한다고 바자회를 열고 난리를 칩니다.
이런 너절한 것들을 한다는 자체가 속이 텅 비었다는 것이 들킬까 싶어서 위장술을 쓰는 겁니다. 이웃 사랑해서 구원 받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사랑할 줄 몰라요. 우리는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사랑 못합니다. 날 사랑하는 것뿐입니다.
지난주일 그런 이야기했습니다. 아내가 남편을 사랑한다고요? 세상에 어디 그런 거짓말이 있습니까. 아내는 남편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고 아내가 만들어낸 남편 이미지를 사랑해요. 그래서 진짜 아내가 남편 사랑하면 남편이 무슨 짓을 해도, 심지어 외도를 해도 사랑해야 합니다. 그런데 잔소리를 해대는 이유가 자기가 생각한 이미지가 따로 있기 때문에 거기에서 자꾸 빗나가거든요. 그래서 잔소리를 쏘아대서 빨리 자기 이미지와 일치시키려고 합니다. 자기 이미지와 같아질 때, ‘잘 했어!’ 하고 좋아하지만, 그것에서 빗나가면 화를 내고 잔소리를 한단 말이지요.
남자들은 그것도 모르고 ‘총각 시절에는 잘 해주더니만 결혼하니까 왜 이렇게 잔소리가 많고 고달프지?’ 아내가 날 사랑한다는 생각 자체가 잘못된 생각입니다. 아내는 자기밖에 사랑할 줄 몰라요. 아내는 자기가 원하는 남편 상(像)을 사랑하지 남편 자체를 사랑하지 않습니다.
이 말은 역시 남편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가 원하는 아내 상(이미지)이 있어요. 그것과 일치하지 않을 때는 여자처럼 바가지를 긁는 것이 아니라 술로 달래지요. ‘더러운 인생, 우리 집구석은 왜 이래?’ 이런 식으로 풀지요.
진짜 예수 믿는 근거는 바로 사도바울의 편지에 있어요. 그 편지에 보면 ‘예수가 그리스도고, 그리스도가 예수다.’ 라고 할 때, 이미 나 위주의 관심사가 떨어져나가고 주께 관심이 쏠리게 되지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나 같은 죄인을 왜 구원 하셨습니까?’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주신 선물을 받았기 때문에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나는 선물 받을 자격이 없는데요?’ ‘선물은 그냥 주는 것이다. 선물은 받을 자격이 있어서 주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그냥 줬어.’ 라고 긍휼을 이야기합니다. 로마서 11장에서는 이것을 상세히 이야기합니다. 32절을 보겠습니다.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
어떤 분의 설교를 비평하면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그 사람 주장은 선한 일을 해야 신자라고 하는데, 제가 반박을 하면서, 그러면 야고보서 4장에 “내가 어느 도시에 가서 장사해서 이득을 보리라.” 이것이 선한 일이라고 되어 있습니까, 악한 일이라고 되어 있습니까? 악한 일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장사해서 이득을 보리라는 것은 인간 세상에서는 일반적인 상식인데 이것마저 악한 일로 취급해 버리면 이 세상에 악한 일 아닌 것이 없지요. 이것은 꼭 장사뿐만 아닙니다. ‘오늘은 어느 미장원에 가서 머리를 손질하지?’ 이것도 악한 일이 되는 거예요.
산다는 것이 의욕이고, 의욕이 있어야 행동하는 것이 인간 본성인데 그것마저 악한 일로 간주하면 선한 일은 뭡니까? 없지요. 성경은 그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내가 어느 도시에 가서 장사해서 이득을 보리라.’ 하는 것조차 악한 일이라면, 세상에서 악한 일 아닌 것이 없지요.
그러면 우리는 화가 나서 “그러면 무엇이 선한 일이요?” 하고 따지니까, 뒤에 뭐라고 되어 있습니까? “주의 뜻이면 내가 죽기도 하고 살기도 하리니”
우리가 강의 처음부터 지금까지 열심히 한 것이 뭡니까? 뭘 안다? 하나님의 뜻. 주의 뜻이 뭐냐 그것을 파악해 왔잖아요. 그런데 주의 뜻이 뭐냐 하면 ‘너보다 더 어른 있다.’ 이거거든요. 나는 내가 원해서 뭔가를 하는 것 같지만, 우리보다 더 어른 되시는 분이 자기 뜻대로 우리를 이끄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사는 것도, 죽는 것도 주의 뜻에서 벗어난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점을 생각하고 도시에 가서 장사를 하든지 뭘 하든지 하란 말이지요. 하나님의 뜻이 내 뜻보다 앞장선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 이것이 선물입니다. 이것은 성령을 받아야 아는 거예요. 궁극적으로 나에게 오는 것이 아니라 나를 거쳐서 주님께 돌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인간이 평소에는 타인과의 차이(나는 너보다 나아야 해, 저 사람 보다 못하는 난 살기 싫어)를 의식하며 살지만, 위기 상황에 처하게 되면 너와 나의 차이는 없습니다. 차가 달리다가 사람을 칠 때, 뭐라고 이야기합니까? ‘아이고, 사람 죽는 것 한 순간이네.’ 이렇게 이야기하지요. 사실은 사람이 90평생을 살아도 죽을 때는 한 순간입니다.
10살, 20살 때는 90살까지 살면 지루할 것이라고 생각되지만, 90살 된 노인한테 물어보세요. ‘오래 사셨는데 돌아가시면 어떻겠습니까?’ 라고 한다면 그 노인 화냅니다. 놀라운 사실은 우리의 꼬리가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90년 살았으면 89년의 꼬리가 있을 것 아닙니까. 꼬리가 있는가 싶어 뒤돌아보면, 89년을 살아도 병든 육신 외에는 아무것도 남는 게 없어요.
자꾸 뭔가 잘라지고 끊어지는 거예요. 그래서 저는 이것을 ‘꼬리에 불붙었다.’고 해요. 폭탄 심지에 불붙으면 어떻게 됩니까? 타들어 가지요. 90년 살았으면 90년 동안 불붙어 온 거예요. 그 사람은. 죽을 때가 되면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어요. 왜? 그동안 꼬리가 다 타버렸기 때문에.
지난 세월은 다 타서 남는 것이 없습니다. 남는 것은 기억과 추억과 낭만밖에 안 남아요. 그래서 7080세대들이 그 당시의 노래를 듣고 눈물을 흘리고 하잖아요. 과거가 다 사라져 버렸으니까 그런 것으로라도 보충하려고 하는 거예요. 이것은 30대, 40대도 마찬가지입니다. 서태지의 [난 알아요]를 추억합니다. 지금은 그런 노래 안 나와요.
꼬리에 불붙은 채 마지막에는 폭탄처럼 터져서 날아가 버리면 한 순간에 죽는 겁니다. 그래서 결국 ‘나’라는 것은 이미지였다. 이미지를 다른 말로 하면 허상입니다. 나는 결국 내가 조장한 허상에 불과한 거예요.
하나님은 내가 없어져도 안 없어지는 분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안 없어진다는 말이 무슨 뜻이냐? 세 번째.
첫 번째는 하나님의 뜻, 두 번째는 예수 그리스도, 세 번째는 생명의 약속.
나는 없어져도, ‘세상의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이 사라져도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하다.’ 하나님의 약속은 내 열심이 아니고 하나님의 열심에 의해서 누적이 되어, 우리가 죽어서 가면 우리가 기대한 것 이상으로 거기에 준비되어 있습니다.
우리 할머니가 거짓말을 잘 했어요. ‘할머니, 땅콩강정 주세요.’ ‘없다.’ ‘그러면 곶감주세요.’ ‘없다.’ 정말 없는가 싶어서 할머니 외출하실 때 다락에 올라가 보면 거기에 곶감과 강정이 바구니에 가득하게 담겨 있어요. 나중에 주려고 숨겨 둔 것이지요.
이 세상에서 우리는 꼬리에 불이 붙어서, 내가 원하는 내 뜻(남보다 더 뛰어나기, 남보다 더 돈 많이 벌기)은 꼬리에 불이 탐으로 남는 것이 없습니다. 요즘은 요양병원이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요. 늙고 병들어 자식에게 누가 되는 부모를 요양병원이 책임집니다. 현대판 고려장과 같아요.
사람이 늙으면 천덕꾸러기가 됩니다. 70세까지는 사람으로 간주해 줄 수 있어요. 80넘으면 좀비입니다. 좀비가 뭔지 아세요? 시체인데 살아있는 시체를 좀비라고 합니다. 얼마 전에 배삼룡이 병원 침대에 누운 모습이 TV에 잠시 나왔어요. 못 알아보겠더라고요. 죽음 직전에 온 것 같았어요. 사람이 늙으면 미남, 미녀, 남자, 여자 구분이 없어요. 왕년의 화려한 배우들이 나이 들면 방송에 못 나옵니다. 젊은 시절 아름다웠던 이미지 때문에. 그 이미지를 가지고 늙은 배우를 보면 추해서 못 봐줍니다.
결국 남는 것은 뭐냐? 시편 말씀 그대로입니다. 우리는 자꾸 닳아 없어지고 주님의 것은 계속 있다는 것이 점점 더 크게 보입니다. 내 것이 없어지는 것이 아쉬운 것이 아니고, ‘내 것 아닌 것이 내 것 되는 것’ 이것이 크게 보일 때, 이것을 주님의 사랑의 높이와 넓이가 점점 커진다고 하는 겁니다.
영원한 생명의 약속. 에덴동산에서는 맛도 못 보고 쫓겨났어요. 지난 성탄절 전날에 우리교회에서 연극을 했어요. 연출에 이근호, 극본도 이근호, 감독도 이근호인데, 그 내용이 뭐냐 하면, 재벌, 깡패, 학생, 의사가 나오는데, 재벌이 돈 있다고 천사를 유혹해서 천국에 넣어 달라고 합니다. 천사의 대사는 간단합니다. NO. 이것뿐입니다. 천사는 모든 대사에서 NO만 하면 됩니다. ‘나 깡패인데 천국 안 넣어주면 죽는다.’ ‘NO’ ‘그러면 착한 일 하면 되나?’ ‘NO’ ‘나는 의사인데 많은 사람을 공짜로 치료해 줬는데 천국 갈 수 있지?’ ‘NO’ 전부 NO입니다.
천국에 못 들어가는데 마지막으로 들어갈 수 있는 것이 뭐냐? 예수님의 살과 피를 같이 먹는 장면이 나옵니다. 카스테라 6개 샀고, 포도 쥬스 6개 사서 먹고, 마신 후에 마지막 대사에서 천사가 ‘YES’ 라고 합니다. 이 연극 제목이 [NO, YES]입니다.
못 들어가는 깡패, 학생, 재벌, 의사를 데려와서 살과 피를 먹고 난 뒤에 “천사야, 문 열어라.” 하니까, 그 때 천사가 ‘YES’ 하고 문 열어 줍니다. 왜 문을 열어주는 줄 압니까? 하나님의 약속이 우리 행함으로 구원 받는 것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의 피와 살로 구원 받도록 하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생명의 약속입니다.
이 세 가지, 하나님의 뜻이 예수님, 그 예수님의 뜻을 구체화 시켜 보니까 예수님이 흘리신 피가 아무리 못난 인간도 그 피로 말미암아 천국에서 영원히 산다는 그 내용을 디모데후서 첫 부분에 꽉 박아놓고, ‘이제부터 디모데야, 네가 조금도 굴하지 말고 용감하게 전해라.’ 는 내용입니다.
10분 쉽시다.
(2009. 1. 16. 15:04 녹취 마침)
우리교회(IP:220.♡.176.150)
09-02-08 17:02
광주081226b디모데후서1장3절
광주 강의(08. 12. 26) 2강 2009-01-25 22:40:37 녹취 : 서경수
광주 강의(08. 12. 26) 44-2
첫째 시간을 요약해 보면, ‘하나님의 뜻’과 ‘예수 안’ 그리고 ‘생명의 약속’ 이것은 아무리 애써도 이방인들은 모른다고 했습니다. 왜? 그들은 자기밖에 모르기 때문에. 그런데 이방인들에게 공짜로(영생도 공짜로, 천국도 공짜로, 에덴동산도 공짜로) 준 이유가 하나님의 사랑만이 최고라는 것을 알리기 위한 작전으로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행함은 누가 하는가? 행함의 도사들은 유대인들입니다. 세계 최고의 종교인들입니다. 그런데 아침부터 저녁까지 신을 섬기는 그 종교가 무용지물이 되어버렸어요. 금식하고 기도하고 십일조하고 구제하고 열심히 했는데,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놀고 있네. 그게 무슨 소용이 있냐? 구원은 내가 그냥 주는 것이다.”
인간들의 열심과 행위가 소용없으면 교회 영업이 안 돼요. 교회 영업은 희망 팔아먹고 돈 받는 것이잖아요. 이 세상에서 희망을 말하지 않으면 교회 영업이 안 됩니다. ‘일곱 번 넘어져도 여덟 번 일어나면 됩니다. 시작은 미약하나 나중은 창대하리라.’ 이런 이야기를 하면,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교회 와서 이런 말씀 들으면 “야, 돈 낼만 하다.” 하고 헌금을 내는 거예요.
돈 내는 이유는 희망을 받아서 좋아서 내고, 또 혹시 돈 낸다고 귀여움 받아서 더 많은 돈을 복으로 받을 수도 있다는 생각으로 내는 거예요. 돈 놓고 돈 먹기지요.
그런데 희망을 가져봐야 희망은 누구의 희망이냐 하면, 나의 뜻의 연장이에요. 하나님의 뜻이 아니고 평소에 내가 음흉하게 노렸던 그 뜻이 엿가락처럼 늘어난 것뿐이기에 그 희망 가져도 허무가 찾아옵니다. 말할 수 없는 허무가 찾아와요.
사람이 선과 악을 초월해야지 자꾸 ‘선하면 복 줍니까?’ 이렇게 나오는데, 이렇게 되면 선한 그 자리에서 악이 들끓게 됩니다. 아무리 착해도 그 자리에서 악이 피어납니다. 만약에 내가 노인들 간병인 노릇을 한다고 하면, ‘하나님, 저에게 이런 어려운 사람들을 돌볼 수 있도록 은혜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런 마음으로 시작을 해도, 얼마 안 가서 ‘하나님, 하필이면 왜 나에게 이런 힘든 일을 시킵니까? 하나님께서 이 사람들 건강하게 해 주시면 내가 이런 수고 안 해도 되는데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왜 환자들 치료해 주지 않습니까?’ 이런 식으로 화를 내지요.
제 책에 보면 이런 것이 있어요. “‘비운의 왕비’라는 말이 있는데, 이것은 말이 안 된다.” 명성황후를 비운의 방비라고 흔히들 말하잖아요. 제가 보기에는 그 사람은 어릴 때부터 죽을 때까지 하나님 은혜를 안 받고 산 적이 단 한 순간도 없어요. 그런데 자기 마음에 안 차니까 ‘나는 조선의 국모지만 비운의 왕비다.’ 라고 합니다. 이런 말 대신 ‘나는 죄인 중의 괴수다.’ 이렇게 이야기를 해야지요.
어떤 인간도 ‘비운’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슬픈 운명이란 없어요. 받은 은혜를 돈으로 환산해 보세요. 공기와 물, 햇볕을 받았는데 이런 것들을 돈으로 환산해 보세요. 단 하루라도 하나님의 공짜 은혜를 안 받고 산 적이 있습니까? “해로 낮을 주관케 하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시136:8)
제가 얼마 전 설교시간에 이야기했지요. 정지훈이라는 가수가 노래 부르면서 ‘태양이 싫다.’고 해요. 10일만 장마가 계속되어 보세요. 태양이 싫은지. 비가 계속 내리면 빨래가 안 말라서 짜증납니다. 빨래 안 해본 사람은 잘 몰라요. 태양이 싫다니.
사람이 여유가 있을 때는 하찮게 여기던 것이 여유가 없을 때는 작은 것 하나도 정말 소중하게 느껴져요. 지극히 작은 것 하나하나가 다 귀한 것들인데, 좀 살만하고 여유가 생기면 교만해서 다 버리는 거예요. 그러니까 인간이 얼마나 자기 욕망 위주입니까?
하나님은 교만한 인간들에게 마음을 낮추라고 하시는데, 자기 마음을 낮출 재주 있는 인간은 없습니다. 한 번 맛을 보면 그 맛을 잊을 수가 없어요. 안 됩니다. 남자들이 결혼 적령기를 놓쳐 40쯤 되면 이상하게 젊은 여자를 찾아요. 비슷한 나이의 상대를 찾으면 되는데. 젊은 여자 아니면 돈 많은 여자를 찾고.
이게 뭐냐 하면, 한번 눈이 높아지니까 자기 힘으로 낮출 수가 없어요. 그러니까 마음을 낮춰서 구원 받는다는 것은 안 됩니다. 애초에 포기하세요. 인간은 한 번 맛본 것을 계속 기억하면서 그것을 원하고, 길들여진 맛을 포기 못합니다. 그냥 그대로 사세요.
그냥 사는 것은 그대로 사시고, 구원은 예수님이 거저 주시는 생명의 약속으로 구원 받습니다. 문지방에 어린양의 피가 묻어 있으면 그 방안에 무엇이 있는가를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앞에 있는 피를 보고 그 집안을 용서했다는 것이 유월절입니다. 그 유월절 피가 세례요한이 예수님 보고 ‘아, 바로 저분이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을 보라.’ 얼마나 반가웠겠어요? 유월절 그림자의 실체가 마지막 때에 예수님으로 나타난 것이지요.
이런 실체를 만나니까 세례요한은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요3:30) 자기의 관심, 자기로부터 벗어난 모습입니다. 오 목사님 사모님이 아픈 것이 가슴 아프지만, 강의를 하다보니까 사모님이 쇠해도 상관없고, 감기가 심해 폐렴에 걸려 입원을 해도 주님만 흥하면 됩니다. 이런 소리 하니까 사모님께 미안하긴 하지만, 건강하다고 구원 받는 것도 아니고, 아프다고 해서 지옥 가는 것도 아니고.
1장 3절을 봅시다. “나의 밤낮 간구하는 가운데 쉬지 않고 너를 생각하여 청결한 양심으로 조상적부터 섬겨 오는 하나님께 감사하고”
성도가 되면 자기 생각에서 벗어나 모든 일에 하나님께 감사하게 됩니다. 4절에 바울은 “너 보기를 원함은 내 기쁨이 가득하게 하려 함이라.”고 했고, 5절에 보면 “네 속에 거짓이 없는 믿음을 생각함이라.” 거짓 없는 믿음은 선물로 받은 것입니다. 자기가 집에서 조립한 것이 아니고 택배로 받은 것입니다.
교회에서 목사들이 설교를 하면서 믿음을 자꾸 집에서 조립하라고 가르쳐요. “여러분, 믿음이란 것은 지. 정. 의 세 가진데 먼저 지식이 있어야 되니까 성경을 읽으세요. 다음에 감정이 있어야 돼요. 성경 읽기 전에 항상 회개해서 깨끗한 마음으로 읽어야 하고, 그 다음 의지니까 열심히 전도하고 헌금해야 됩니다. 이렇게 해야 이것이 참된 믿음입니다.” 라고 설교를 합니다.
이런 설교를 듣고는 집에 가서 자기가 믿음을 만드는 거예요. 만들 때 어떻게 만드느냐 하면, 표를 작성해서 믿음인 것은 동그라미(0), 믿음 아닌 것은 가위표(X) 그래서 1번 성경읽기. 하루 성경 3장 읽어야 되는데 1장 밖에 못 읽었으니까 가위표. 2번 기도. 하루 10분을 해야 되는데 15분 했다. 그러면 동구라미(0). 이런 식으로 혼자 사단과 싸워요.
그러니 이 사람은 믿음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자기 의를 만드니까, 이 자기 의를 가지고 교회 가면 다른 사람의 의와 경쟁이 돼요. ‘나는 믿음이 좋은데 저 사람은 왜 믿음이 없을까?’ 이런 식으로 경쟁을 하게 되지요. 이렇게 되면 감사가 나오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화를 유발합니다. 이런 것을 우리는 조심해야 됩니다.
그 다음 5절부터 보면, “이는 네 속에 거짓이 없는 믿음을 생각함이라. 이 믿음은 먼저 네 외조모 로이스와 네 어머니 유니게 속에 있더니 네 속에도 있는 줄을 확신하노라. 그러므로 내가 나의 안수함으로 네 속에 있는 하나님의 은사를 다시 불 일 듯하게 하기 위하여 너로 생각하게 하노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마음이니 그러므로 네가 우리 주의 증거와 또는 주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나를 부끄러워 말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좇아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
이 긴 말씀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너 신자 맞지?’ 이겁니다. 이 말을 왜 하는가 하면, 그 뒤의 말. ‘이제 당신을 신앙이라고 간주하고 내가 이야기할게.’ 그렇게 되는 겁니다. 준비 과정이에요.
‘네 외조모에게 그런 믿음이 있고’ 이런 것은, ‘디모데야, 너 신자 맞지?’ 만약에 신자가 아니라면 뒤에 연이어 하는 말을 못 알아듣게 되어 있어요.
뒤에 나오는 말이 뭔가 하면, 9절에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부르심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 뜻과 영원한 때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
우리의 행위로 구원 받은 것이 아니고, 영원 전부터 우리는 구원 받기로 작정되어 있었고, 시나리오가 그렇게 짜여서 오늘날 내가 구원 받았다. ‘디모데야, 넌 신자니까 내 말에 동의하지?’ 라고 나온 거예요.
그러면 불신자는 ‘저는 신자 아닌데요.’ 라는 말을 하는 것이 아니고, ‘창세전에 예정해서 구원 받으면 그러면 나는 아무것도 안 해도 구원 받네요. 그건 안 믿어지는데요.’ 라는 반응을 할 것이란 말이지요.
제가 지금 무슨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 이것은 아니란 말이지요. ‘신자 되세요.’ 이것은 성경에 없습니다. 뭐가 있느냐? ‘신자 맞지?’ 라고 하는 거예요. ‘오 목사님 신자 맞지요?’ 이렇게 나와야지, ‘오 목사님, 열심히 하면 신자 됩니다.’ 이건 아닙니다.
창세전에 하나님이 예정한 자에게만 복음이 이해되도록 되어 있어요. 성령을 받은 사람만 이 말씀이 이해되고 성령 받지 아니하면 이런 말씀을 전하는 사도에게 대들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뒤에 나오는 모든 말씀에 대해서 ‘아, 정확하네. 딱 내게 해당되네.’ 이렇게 되면 그 사람은 신자고, ‘저는 신자 맞습니다.’ 라고 아무리 큰소리 쳐도, 그 뒤에 나오는 사도 바울의 말에 대해서 ‘아닌데, 이상하다. 내가 알고 있는 것하고 다르네.’ 이런 사람은 ‘창세전에’라는 말씀을 이해 못하는 자입니다.
‘창세전’이라고 하면, “맞습니다. 내가 신자된 것은 선물입니다.” 하고 박자가 서로 맞아야지요. 말씀하면 그 말씀이 수용되고 깨닫게 되고, 사도가 “나는 죄인 중의 괴수다.” 라고 하면, “맞습니다. 제가 바로 그런 사람입니다.” 하고 서로 아귀가 맞아야 됩니다.
‘신자 되세요. 열심히 하면 가능합니다.’ 이런 것은 없어요. 교회에서나 이런 소리 하지 성경에는 이런 말 없습니다. 성경에는 창세전에 예정된 사람만 남고 나머지는 다 떨어져 나간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말씀대로 전하면 교회는 장사가 안 될 겁니다. ‘창세전에 예정된 사람만 남고 나머지는 다 교회에서 나가세요.’ 라고 하면 교회에 사람 모이겠습니까? 그러나 이것을 말하는 것이 진정한 전도입니다. 전도는 하나님의 예정된 뜻을 전하는 것이잖아요. 사람 꼬시는 것이 전도가 아니잖아요. 교회 좌석 채우는 것이 전도가 아닙니다. “창세전에 예정된 자이기 때문에 왔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남고, 내가 열심히 한 번 믿어보려고 온 사람은 나가주세요.” 라고 하면 이것이 바로 전도입니다.
다시 이야기합니다. 신자란 뭐냐? 나보다 더 중요한 분이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 신자입니다. 나보다 더 우선되는 분, 내가 있기 전에 계신 분을 인정하는 것이 신자입니다. 이게 하나님의 뜻이고, 내 뜻보다 하나님 뜻이 우선이고, 그 뜻에 의해서 예수 그리스도가 오셨고, 그분이 주신 것이 영원한 생명의 약속입니다.
이 세 가지가 내 속에 파고들어오면 나에게는 감사와 기쁨밖에 나올 것이 없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행함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은혜로 됩니다. 9절에 나오지요.
행위로 구원 받은 것인지 은혜로 구원 받은 것인지 확실히 해야 합니다. 행위로 구원 받았다고 한다면 그것은 은혜가 아니고, 은혜로 구원 받았으면 행위 자랑하면 안 됩니다. 둘 다는 안 됩니다.
[부모]라는 노래 가사를 보면 ‘왜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났는가? 나중에 내가 자식을 낳고 부모가 되어서 알아보리라.’ 이런 내용이 있어요. 그런데 자식을 낳고 부모가 되면 그때 실상을 알아요. 뭐냐 하면, 부모의 은덕으로 내가 태어난 게 아니고 부모는 내 생각하지 않고 자기들끼리 좋아했는데 내가 태어난 거예요.
부모는 부모 값 한다고 사랑을 말하지만 사실은 부모는 자기밖에 몰라요. 여기에 자식들도 있지만 제가 솔직하게 이야기합니다. 너무 자녀를 학대하면 부모노릇 못한다고 욕먹을까 싶어 사랑하는 흉내 내는 것입니다. 인간은 자기 편한 것이 최고입니다.
세상에서 진리는 뭡니까? 진리를 다른 말로 하면 편함입니다. 사람은 어떻게 사느냐? 기분대로 살아요. 사람들이 제일 싫어하는 것이 뭔가? 기분 더러운 것을 싫어해요. 진리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기분대로 삽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뜻이 이거예요. 기분대로 사는 되먹지 못한 인간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자기 기쁘신 뜻대로 인도하시는데, 그 힘이 어디에서 나오는가? 인간한테 물어보지 않아요. 자기 기분대로 사는 인간에게 물어도 소용없어요.
‘너 왜 교회 안 나오나?’ ‘기분 나빠서 안 나간다.’ 그러면 끝나는 거예요. 자식이 부모한테 물어보고 행동 합니까? 안 물어봅니다. 자식은 자기 기분대로 살고, 부모는 부모 기분대로 삽니다. 식구가 5명 있으면 전부 다 자기 기분대로 삽니다. 부모가 자식을 위해서 때린다. 아닙니다. 기분 나빠서 때립니다.
이처럼 인간들은 자기 기분대로 살아가는데, 창세전의 시나리오가 없으면 일이 안 됩니다. “여러분, 알아서 하세요.” 사람들이 알아서 하면 기분대로 살기 때문에 이들이 넓은 길로 가겠습니까, 좁은 길로 가겠습니까? 자동적으로 넓은 길로 갑니다. 그러면 그 길은 멸망의 길입니다. 좁은 길로 가야 생명이 있는데 그러나 좁은 길을 찾는 사람은 적어요. 그만큼 인기가 없다는 말입니다. 인기가 없다는 것은 진리가 아니라고 보는 겁니다.
이 세상은 진리에 관심이 없고 자기 편한 것을 원합니다. 그러니까 9절에 뭐라고 합니까? “영원한 때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고 하지요. 우리의 행함이 아니고 예수님의 은혜로 됩니다. 여기에서 은혜는 원인 없는 결과입니다. 은혜는 나에게 원인이 없어요. 그냥 주십니다. 왜? 창세전에 계획된 것이니까.
내가 지금까지 살아온 것도 원인 없는 결과입니다. 이유도 없이 그냥 주신 것입니다. 여러분이 시험해 보세요. 나쁜 짓 한다고 벌 받는지. 그렇지 않습니다. 왜 그런 줄 아세요? 나쁜 짓 안 할 때도 나쁜 짓이었기 때문에. 죄인이 구태여 나쁜 짓 안 해도 나쁜 짓입니다. 이런 인간에게 원인 없는 결과로, 우리를 불쌍히 여기셔서 긍휼을 베풀어 주심으로 구원 받는데, 이것이 영원한 약속입니다.
우리는 죽을 때까지 내 기분 따라 돈 좋아하고, 이런 인간을 긍휼히 여겨 약속에 따라 구원하고 이 두 가지가 늘 같이 있습니다. 그런데 ‘나는 죄 안 짓는다.’ 라고 하면 그 사람은 기독교 신자가 아니라 불교 신자입니다. 이런 사람은 도 닦는 사람입니다.
사람은 자기 죄를 충분히 알아야 됩니다. 그냥 짓는 죄 말고. 교도소 간 죄 말고, 숨어있는 데서 터져 나오는 욕망 이런 것을 아주 만끽해야 돼요. 이것을 기피하지 말고 즐겨야 돼요. 내 욕망이 남 못지않다는 것을 즐거워해야 된다니까요. 왜? 이미 용서 되었으니까. 그 죄를 내가 처리하려고 한다면 감당할 수 없습니다. 내가 돈 좋아하는 것을 성경 몇 장 읽는다고 해소가 됩니까?
만날 자기만 사랑하고 하나님 미워하는 그 죄를 어떻게 씻겠습니까? 전도 천명 한다고 해결 되겠습니까? 안 됩니다. 그러니까 나라는 인간은 나밖에 모른다는 것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 같은 죄인을 구원하신 것을 볼 때, 하나님의 약속이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고 죄인을 불러서 의인되게 했다.” 주님의 피로 말미암아 의인 되게 하시는 겁니다. 이게 복음입니다.
이 복음을 디모데에게 “너도 믿지?” 라고 하는 겁니다. “남들이 이해할 수 없는 이 말을 너는 믿지?” 라고 하는 겁니다. 이것이 디모데후서의 시작입니다. “너도 행했지?”가 아닙니다. “너도 믿지?” “믿고말고요.”
12절을 봅시다. “이를 인하여 내가 또 이 고난을 받되 부끄러워하지 아니함은” 사도바울이 이 복음에 대해서 부끄러워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우리교회 장로님이 자기가 떠나온 교회를 너무 사랑하고 안타까워서 이전 교회 교인들을 만나서 [피]라는 책과 [고린도전후서 녹취록]을 줬어요. 왜냐하면 그 교회가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믿는다고 하고, 예수 믿는 사람은 다 한 형제라고 고백하기 때문에. 그렇다면 네 교회 내 교회 없이 예수 안에서 한 형제니까 복음을 나누고 복음 안에서 같이 기쁨을 누리자는 취지에서 책을 전했는데, 죽을죄를 지은 사람처럼 심하게 당했어요.
그럴 때 장로님이 속이 상했습니다. 그런데 장로님이 이걸 아셔야 돼요. 뭐냐 하면, 베드로전서 4장 14절에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욕을 받으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고 했어요. 그리고 마태복음 5장 10절에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고 하셨고, 11절 이하에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라는 말씀이 있어요.
그러니까 제가 하는 말은, 본인이 구원 받은 기쁨이 없으면 고난을 못 이겨요. 하지만 고난을 여유 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 ‘나 같은 인간이 구원을 받았다니’ 하는 구원의 기쁨이 있으면, 남들 보기에 고난이라고 하지만 자기한테는 고난도 하나의 절차요 과정이고 은혜 자체란 말입니다.
현재 장로님이 생활은 어렵지만 밥은 먹고 살잖아요. 그러기에 ‘하나님, 나는 복음 전하려고 하는데 왜 이렇게 힘들게 합니까?’ 이것이 아니고, ‘나 같은 죄인도 구원하시다니’ 이런 기쁨이 있으면 어지간한 고난은 고난 축에도 안 들어갑니다.
구원에 대한 감격과 기쁨이 없을 때는 갑자기 고난에 대해서 예민해지면서 하나님께 항의를 퍼붓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 제가 뭘 잘못했습니까? 나는 복음 전한 죄밖에 없는데 왜 나에게 이런 고난을 주십니까? 그러면 더 이상 복음 못 전하겠습니다.” 이런 식으로 삐치게 됩니다.
교회에서 장로, 권사 투표해서 떨어졌을 경우에 이런 현상이 자주 발생하는데, “하나님, 내가 이 교회에 헌금한 것이 얼마인데, 이럴 수가 있습니까? 투자한 것이 얼마인데, 교인들은 내 돈만 빼먹고 나를 헌신짝처럼 버리고, 하나님 왜 이렇게 나를 비참하게 합니까?” 이렇게 원망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뭐라고 하시는가 하면, “너 지금도 감사하고 기쁘냐?” 이렇게 물어요. “불쾌합니다.” 그러면 “너는 너 기분대로 사는구나.”
내 기분 좋고 나쁘고 그것과 상관없이 구원 받았습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고난을 이야기하면 ‘나는 고난은 싫다.’ 이러지 마시고, 고난보다 너끈하게 기쁨이 더 클 경우에 고난은 고난도 아니란 말이지요.
해인이 아빠가 아프다고 하시니까 딸로서 얼마나 마음이 고난스럽습니까? 그러나 그동안 건강하게 지낸 것, 사실은 늘 아파야 되는데 그동안 안 아프게 한 것이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안 아프게 하신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면 아프게 하신 것도 은혜의 한 출처로 포함을 시켜버리잔 말이지요.
제가 화요일 그런 강의 했습니다. “해(태양)가 똑똑합니까, 사람이 똑똑합니까?” 정답은 해가 더 똑똑합니다. 왜? 해는 근심 걱정을 안 하니까. 그런데 인간은 쓸데없이 걱정합니다. 거저 주셔서 구원 받았다고 백날 이야기해도 아침에 눈만 뜨면 걱정을 시작합니다. 그러니까 해가 보면 인간이 얼마나 한심스럽겠습니까? 그래서 오뉴월에 개가 인간보다 낫습니다. 내일 죽더라도 오늘 다리 펴고 잡니다. 국회에서 데모를 하든지, 집값이 내리든지, 현대자동차가 파업을 하든지 상관없이 편안하게 자고 있어요.
‘제발 좀 편안히 주무세요.’ 바로 그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즉 ‘너 신자 맞지?’ 그런 뜻이에요.
12절에 아까 제가 이야기한 것이 나오네요. “고난을 받되 부끄럽지 않은 것은 나의 의뢰한 자를 내가 알고 또한 나의 의탁한 것을 그 날까지 저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함이라. 너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으로써 내게 들은바 바른 말을 본받아 지키고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네게 부탁한 아름다운 것을 지키라.”
이 말을 다른 말로 하면, ‘너 신자 맞지?’ 그런 이야기입니다. 신자가 아니라면 이 말을 못 알아들어요. ‘선생님, 제 마음을 어떻게 아셨습니까?’ 이렇게 서로 교류가 되어야지요.
원래 사도바울이 터키 남부지방에서 전도하고 있을 때 디모데를 알았어요. 그래서 데살로니가, 그리고 베뢰아, 고린도 등지로 데리고 다니고 했어요. 그렇게 하다가 바울이 로마 옥에 갇히게 되고 그 때 편지를 디모데에게 쓴 것입니다.
그런데 골로새서 1장이나 이런 곳을 보면 바울과 함께 디모데도 로마 감옥에 같이 갇혀서 ‘사도된 바울과 형제 디모데는 골로새에 있는 성도들에게 편지한다.’ 이런 대목이 나와요.
그걸 보면 디모데는 바울의 수제자 또는 믿을만한 바울의 비서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디모데가 제대로 배운 거예요. 제대로 배울 때 제일 먼저 한 것이 하나님의 예정하심을 전한 겁니다.
자, 지금까지 한 것을 요약해 보겠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거저 주는 것이고, 인간의 뜻은 비는 것입니다. 간단하지요? ‘많이 빌면 복 많이 받고 태만하면 복 적게 온다.’ 이것은 이방인들의 뜻이고. 진짜 하나님의 뜻은 ‘인간은 다 똑같다. 꼬리에 불타는 것은 마찬가지니까, 내가 인간에게 받지도 않고 따지지도 않는다. 다만 창세전에 예정된 자에게는 공짜로 줄게.’ 이게 바로 성령 받은 자에 한해서 개 같은 이방인들도 믿을 수 있습니다. 그 성령이 너에게 있느냐는 것입니다. 성령을 받았다면 이 말을 듣는데 하등 지장이 없단 말입니다.
그 다음 15절 이하에는 자기 사정을 이야기하는데, 17절을 보면 “로마에 있을 때에 나를 부지런히 찾아 만났느니라. 원컨대 주께서 저로 하여금 그 날에 주의 긍휼을 얻게 하여 주옵소서. 또 저가 에베소에서 얼마큼 나를 섬긴 것을 네가 잘 아느니라.”
정락원 목사님이 쓰신 글을 보면 이런 것이 있어요. 참 중요한 글을 썼어요. ‘초대교회 때는 예수 믿는 것 발각되기만 해도 잡혀 죽었다. 그래서 지하 땅굴에 숨어서 예배를 드리고 했는데, 그런 시절에 어떻게 헌금 거둬서 예배당 짓고, 그 건물을 교회라고 말하고 그럴 수 있느냐?’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정목사님은 주장은, 교회의 표준, 교회의 모델을 예배당 있고 사람 모이고 이것으로 하지 말고, 초대교회 때 그들이 지하 동굴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