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12월 23일 복음으로 본 사주팔자
대구 12월 23일 복음으로 본 사주팔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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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1223 복음으로 본 사주팔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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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으로 본 사주팔자(四柱八字)
2008-08-27 16:36:59 이름 : 이근호
참고서적: [역과 점의 과학] 나가다 하사시 저 심우성 역 동문선(서울: 1991)
[변화를 이용하는 지혜 주역] 서우선 저 문학아카데미(서울:1999)
Ⅰ 서론
왜 요즘 교인들이 점차 교회를 떠나고 신앙생활을 포기하는가? 그것은 자신들의 몸이 요구하는 본성이 전보다 더 강렬해졌기 때문이다. 몸은 외부 세계에 적응하게끔 되어 있다. 외부 세계란 모든 변화를 두고 말한다. 변화를 읽어내고 그 변화에 대처하는 것이 몸이 뿜어내는 본성이다. 쉽게 말해서 “요즈음 내가 힘들다”라는 말은 그만큼 변화가 요란해져서 안정성 찾기가 쉽지 않다는 말이다. 그동안 교회 다닌 것은 어느 정도 안정적이 다고 자신의 몸이 판단했기 때문인데 경제가 어려워지고 인심이 흉흉하고 각박해지면서 다른 안정적인 대처방안을 찾아보도록 몸이 요구하는 있는 실정이다.
그렇다면 수천 년 인류 역사를 통해서 인간들이 나름대로 자신의 몸에 안정성을 부여하는 방식이 무엇이었는가? 안정성을 찾는다는 것은 변화를 제대로 읽어서 그 변화를 ‘나를 위한 변화’로 전환하는 시도를 뜻한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인간들은 자신의 몸을 중심으로 하여 눈에 뜨이는 대로, 보이는 대로 들어오는 모든 변화를 일정한 형식으로 구획 정리 해보려고 무진 애를 썼다. 그렇게 정리하지 아니하면 자신의 머리가 복잡해서 견딜 수가 없는 노릇이다. 눈에 들어오는 변화들을 정리하는데 있어 제일 수월한 것이 바로 ‘반복성’을 이용하는 것이다.
옛날 사람들은 이 우주가 신으로 만들어졌다고 감안했다. 이는 곧 신적 요소가 모든 구석에 다 파급되어 있다는 말이다. 이것을 확실히 하는 인식이 바로 신의 몸체가 산산조각 나서 그것들이 위치하기만 하면 곧 대우주의 사물들이 된다. 별이 그러하고 해가 그러하고 달이 그러하고 심지어 인간도 그러하다. 신은 자신이 만든 것을 방치하는 법이 없다. 우주가 돌아가는 전체가 곧 신 몸체 덩어리가 돌아가는 것으로 이해했다. 물론 여기에는 하나의 신만 있다는 것이 아니라 성질을 달리하는 온갖 신들이 다 동원된다. 존재하는 사물의 수만큼이나 신의 숫자도 많다.
옛날 사람들이 이런 허황된 신화를 허황되다고 여기지 않았던 이유는, 알 수 없는 원인에 의해서 대 자연은 반복적인 질서를 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이 ‘반복성’만은 그 어떤 이론이나 논리로도 부정할 수 없는 명백한 진리로 보였던 것이다. 이 ‘반복성’이 인간의 눈에 보였던 것이다. 이 ‘반복성’이라는 확실함을 기초로 해서 신이 작업하는 원리 안으로 모든 변화를 묶어내려고 한 것이다. 신 따라 같이 움직이면 자기 신상에 좋다는 것은 말할 나위가 없다. 어차피 인간은 대자연이 주는 것으로만 생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동서양을 막론하고 큰 질서를 얻어낼 수 있는 반복성은 무엇을 근거로 하고 있는가? 별의 움직임이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하늘의 궁창에 광명이 있어 주야를 나뉘게 하라 또 그 광명으로 하여 징조와 사시와 일자와 연한이 이루라 또 그 광명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에 비취라 하시고 (그대로 되니라) 하나님이 두 큰 광명을 만드사 큰 광명으로 낮을 주관하게 하시고 작은 광명으로 밤을 주관하게 하시며 또 별들을 만드시고”(창 1:14-16)
Ⅱ 본론
1. 별의 움직임
고대인들은 대형을 흩으려지지 않는 별자리 말고 따로 제멋대로 돌아다니는 별에 주목했다. 그것이 바로 토성과 목성과 화성과 금성과 수성과 해와 달이다. 이것들이 돌아다니므로서 모든 우주의 변화가 일어난다고 보았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그러하다. 인간이 태어난 순간에 이들 별들이 어느 위치에 있느냐를 놓고 따지게 되면 그 사람에게 평생 부여되는 대자연적 질서가 된다.
특히 이들 별과는 달리 유독 눈에 들어오는 천체가 있다. 그것은 바로 해와 달이다. 이들 7개의 별들이 이 지상을 하늘에게 지배한다고 본 것이다. 이렇게 되면 하나의 별이 하루씩 지구를 지배한다. 오늘은 수성이 지배한다면 내일은 목성이 지배한다. 이렇게 해서 일곱 개의 혹성이 한 번씩 지배받아 되풀이되는 기간이 7일이다. 특히 태양에 비해서 달은 주기성이 강하다. 달은 7일을 간격으로 변화의 윤곽이 뚜렷하다. 달 자체가 점점 커지기도 하고 점점 작아지기도 한다는 것이 참으로 심오하다. 신의 의지가 이것보다 더 명백하게 창공ㅇ[ 나타날 것은 따로 없다. 그래서 사람들은 생활의 변화를 붙잡는 기준으로 달을 택한 것이다. “여호와께서 달로 절기를 정하심이여 해는 그 지는 것을 알도다”(시 104:19)
2. 음양오행설
대자연의 변화는 서로 상충되면서 움직인다는 사실에 고대 중국인들은 주목했다. 두 대립되는 성질을 놓고서 한 쪽을 ‘양’이라고 한다면 당연히 다른 한 쪽은 ‘음’이 된다. 예를 들면 해는 달과 대립된다. 해가 양이라면 달은 음이 된다. 음이 가만있지 않고 양을 공격하고, 공격받은 양이 가만있지 않고 음을 상대로 나아간다면 자연스럽게 여기서 ‘운동’이 일어나게 마련이라는 것이 고대 중국인들의 생각이었다. 모든 대자연의 움직임을 이 음양으로 설명하고자 했다. 다섯 가지의 별의 움직임에서 모든 변화의 성질을 얻어내는 것과 연계하기 위해서는 실생활에서 눈에 띄는 성질들을 거기에다 부여해보는 것이다. 즉 하늘의 별과 지상에 있는 인간들의 세계에서 파악되는 사실을 연결시키는 것이다. 만약에 하늘의 별과 연결되지 않는다면 지상에서의 미래 일을 예측할 수가 없게 되어버린다. 왜냐하면 지상의 인생 생활이란 하늘의 변화에 종속된 위치에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남자는 양이요 여자는 음이라서 서로 자주 싸운다’라는 사실만으로 미래를 열어갈 수가 없다. 어떻게 하면 앞으로 궁합이 잘 맞겠느냐 하는 것은 우주의 대변화가 앞으로 어떻게 달라질 것이냐에 순종해야 한다. 그래야 개선의 여지가 있고 몸은 그 희망으로 행복해진다. 지상의 음양 성질과 하늘의 다섯 천체를 결합시켜서 미래를 대비하는 원리가 바로 ‘음양오행설’이다.
중국에서의 오행설은 목성(木星)으로부터 출발해서 나무가 불(화성)을 낳고 불이 흙(토성)을 낳고 흙이 금속(금성)을 낳고 금속에 물(수성)을 낳고 물이 나무를 낳는 식으로 진행된다. l이런 진행의 관계라면 서로 평화롭게 잘 사는 모양새이지만 세상의 관계라는 것이 순조롭게 진행되지 않는다. 서로 상극을 이루게 된다. 나무는 금속과 흙과 상극이요, 불은 금속과 물과 상극이요, 흙은 나무나 물과 상극이요, 금속은 나무와 불과 상극이요, 물은 불과 흙과 상극이다. 서로 살면(상생) 좋은 것이요 상극이 되면 나쁜 일이 곧 벌어지게 된다. 따라서 신이 무심히 진행하는 질서 체제 안에서 본인들이 각자 알아서 상생관계는 머물러 있으면 되고 상극 관계는 피하면 그만이다.
세상에 있는 모든 눈에 보이는 사물이나 인식의 체제까지 이 오행으로 배당하면 된다. 숫자도 그러하고, 방위도 그러하고,(수는 북쪽이요, 목은 동쪽이요, 화는 남쪽이요, 금은 서쪽이요 토는 중앙을 차지한다.) 1년 계절도 오행으로 각지 배당한다. 인간의 신체를 말할 것도 없다. 심지어 인간의 입맛까지 오행으로 잘라서 각기 배치 시켜놓았다. 이렇게 배당시켜 놓아야 그 다음에 배당시켜 놓은 성격끼리 대비해서 재수 좋은지 나쁜지를 헤아려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제 미래의 변화를 예측하는 반찬거리를 다 준비되었다. 음양과 오행의 인식으로 요리만 하면 된다. 요리를 처음 어떻게 시작할 것인가? 그것은 임의로 사태를 만드는 것부터 시작한다. 음과 양 두 개의 상반되는 성질이 있다고 간주하고서는 무조건 나누기만 하면 된다. 그 나누어진 것들을 마치 신이 개입해서 생긴 흔적이라 여겨서 그 흔적을 ‘점괘’로 활용하는 것이다. 그 다음의 해석은 오행에 따라서 살펴보면 된다.
대젓가락 50개를 쥔다. 이제 아무렇게나 양쪽으로 나누기만 하면 된다. 왜 50개냐? 50이 우주 전체를 의미한단다. 근거 있는가? 없다. 이 50개에서 우선 하나를 뺀다. 이 1개는 태극이라고 부른다. 그렇다면 49개 남는다. 왼손에 49개를 쥐고서 염불을 외우면서 우연을 가장해서 양편으로 나눈다. 왼손에 있는 것을 천책(天策)이라고 한다. 하늘의 책략이라는 말이다. 오른쪽에 있는 분량을 지책(地策)이라고 한다. 하늘의 뜻이 드디어 땅에서도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그 지책 가운데 하나를 따로 떼어 낸다. 이것을 인책이라고 한다. 인간도 미래 책략에 대해서 긍정적으로 참여했다는 표를 내겠다는 것이다.
왼쪽에 그대로 쥐고 있는 천책을 8로 계속 나눈다. 그러면 그 나머지가 8이 못되게 된다. 그 남은 나머지에다 인책 가지 하나를 첨부해서 최종 나온 숫자가 최종 괘가 된다. 가령 오른손 지책이 26개라면 계산이 다음과 같다.
(50-1)-26=23 23÷8=2...7 7+1=8 여기서 나온 8은 곤(坤)괘에 해당된다. 곤괘란 무엇인가? 세상을 8가지 성질로 나눌 때 제 여덟 번째 해당되는 성질을 갖는다는 말이다. 즉ㄹ 태극이 둘로 나누어지면 음양이 되고 음과 양이 다시 각각 나누어지면 노음(老陰)과 소양(少陽)과 소음(少陰)과 노양(老陽)으로 나누어지고 이들 네 개의 성질은 최종 8개의 더욱 세분화된 성질로 정착된다. 곤(坤), 간(艮), 감(坎), 손(巽), 진(震), 이(離), 태(兌), 건(乾)이 바로 이것이다. 이 건에서 곤까지 담긴 의미는, 건조한 하늘로부터 대지에 이르기까지의 순차를 표시한 것이다. 그래야 전체 우주를 다 표현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이 8괘는 그냥 있지만 오행과 합류된다. 그러면 8괘는 방향을 차지하게 되어서 상생과 상극의 관계로 해석 가능한 현상으로 자리 잡는다.
인간의 사주란, 시간마저 음양오행설에 잠식당해 각기 개성적 성질을 지니고 오행설 안에 배치 받게 되는데 그 출생된 시간을 따져서 그 시간이 품고 있던 그 때의 우주의 변화와 관계성 속에 그 인간이 평생 놓이게 된다는 이론이다. 즉 사람으로 태어나 인간생명체가 시작이 될 때, 바로 그 순간 태양과 달과 지구의 위치관계에서 어떠한 작용관계가 있었는가를 예측하는 도구를 구비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시간은 음양오행설에 의해서 잘라내는 작업이 선행된다.
크게는 우주 속에서 ‘해’라는 시간이 자리 잡게 되고, 그 다음에는 ‘달’이라는 시간이 자리 잡고, 그 다음에는 ‘일’이라는 시간이 자리 잡고 있고, 그 다음에는 그 하루의 어느 ‘시점’이라는 시간이 자리 잡는다. 시간을 무엇으로 자르는가? 전체 우주는 인간의 수 헤아림의 대상이 된다. 인간의 수 헤아림에 동원되는 것은 사람 손가락 열 개다. 그래서 손가락 열개를 이용하여 시간을 구획한다.(갑甲,을乙 병丙 정丁 무戊 기己 경庚 신辛 임壬) 하지만 단순히 열 개로 나누게 되면 변화를 야기 시키는 관계성이 수립될 수 없다. 따라서 열개로 나누어진 시간은 음양오행설 틀에다 집어넣어야 한다.
그러면 다음과 같이 된다. 갑을은 목(木)이요 병정은 화(火)요, 무기는 토(土)요, 경신은 금(金)이 되고, 임계는 수(水)가 된다. 상생이나 상극이나 하는 것으로 치달을 것이냐를 따지기만 하면 될 일만 남은 것이다. 그리고 이 10(십)간干의 전반부 5개를 양이라고 정하고 (갑을병정무) 후반부 5개를 음이라고 정했다(기경신임계). 이렇게 배당을 해놓아야 변화를 그럴싸하게 설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1년은 12달로 정해버리고 각 달에는 시간적 숫자를 매겼다. 이것이 ‘12지支’다. 음력으로 1년을 정했는데, 양력으로 따지면 11월부터 시작해서, 자子, 축丑, 인寅, 묘卯, 진辰, 사巳, 오午, 미未, 신申, 유酉, 술戌, 해亥가 그것이다. 10개의 간과 12가지의 지가 합하여 간지(干支)라고 한다. 역시 이 12지도 오행구조에 배당되고 방위적으로도 배당된다. 북쪽은 자가 되고 동쪽은 묘가 되고 남쪽은 오가 되고 서쪽은 유가 된다.
이 12지는 달 뿐만 아니라 하루 시간에도 배당되어 12조각난다. 오후 11시부터 다음날 오전 1시 사이가 자시(子時)가 된다. 10과 12의 최소공배수가 60이 되므로 십간과 12지를 맞추어보면 갑자, 을축, 병인과 같이 60가지로 짜 맞출 수 있다. 사주(四柱)란 시간의 네 기둥을 뜻하는 것으로 연주, 월주, 일주, 시주를 두고 말하는데 글자 수가 총 8자로 있다.
10간은 하늘의 시간을 측정한다고 해서 천간(天干)이라고 하고 12지는 땅의 변화를 나타낸다고 해서 지지(地支)라고 한다. 사주팔자에서 8자(팔자)는 이렇게 천간과 지지로 나누어지는데 천간에는 할아버지궁(宮)과 아버지궁, 자기 궁, 아들 궁이라는 위치 관계를 가진다. 즉 연주는 할아버지 관계, 월주는 아버지관계, 일주는 자기와의 관계, 시주는 아들과의 관계다. 마찬가지로 지지에는 할머니궁과 어머니궁과 배우자궁과 딸의 궁이 있는데 연주는 할머니와의 관계요 월주는 어머니와의 관계요 일주는 배우자와의 관계요 시주는 딸과의 관계다.
10천간과 12지간과 음양과 오행의 관계가 서로 맞물려 있다. 갑을 양인 반면에 을은 음이다. 하지만 갑과 을은 모두 목(木)에 해당된다. 인은 양이요 묘는 음이지만 5행으로 보면 둘 다 목(木)에 해당된다.
이와 같이 하여 병은 양이요 정은 음이지만 둘 다 오행적으로 봐서 화(火)에 해당된다. 오는 양이요 사는 음이지만 둘 다 화에 속한다. 무는 양이요 기는 음이지만 둘 다 토에 해당되고, 진술은 양이요 축미는 음이지만 둘 다 토에 해당된다. 경은 양이요 신은 음이지만 둘 다 금에 해당되고, 신은 양이요 유는 음이지만 둘 다 금에 해당된다. 임은 양이요 계는 음이지만 둘 다 수에 해당되고, 자는 양이요 해는 음이지만 둘 다 수에 해당된다.
이제 인간이 출생한 시간에다 이런 관계를 집어넣으면 된다. 가령 1994년 12월 19일 오후 2시에 누가 태어났다고 보자. 60갑자로 만든 표를 보게 되면 이 사람은 갑술년 병자월 기묘일 신미시에 태어난 것이 된다. 이 60갑자를 가지고 약육강쇠를 따져서 미래를 점친다. 부조화냐 아니면 조화로우냐를 미리 따져볼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자연과 및 타인과의 관계에서 자신이 어떤 변화를 유발할 수 있느냐를 결정케 하는 것이다.
Ⅲ. 결론
사람이 사주팔자를 보는 것은 지금의 자리가 위태롭게 흔들리고 미래가 깜깜해서 사태 파악을 위해 큰 운명을 훔쳐보려는 의도가 있었다. 우선 사람이 큰 운명이나 신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이 무척 겸손해 보이고 공손해 보일 것이다. 실은 정반대다. 사람은 큰 거목마저 넘어뜨릴 때 존재의 희열을 느낀다. 큰 운명을 미리 알고 신에 대해서 미리 안다는 것은 그것조차 박차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힘을 자력으로 만들어낼 수 있음을 확인하기 위함이다. 선한 신은 하나다. 역시 내가 되어야 한다. 따라서 사주팔자를 보는 것은 자기 자신 빼놓고 나머지 모두를 못난 신으로, 덜떨어진 신으로, 질 나쁜 신으로 정리하기 위함이다. 따라서 점을 친다든지 사주를 보는 것은, 운명의 신을 자기보다 더 나쁜 악마적 존재로 분류하기 위한 조치다.
오늘날 교인들은 교회 와서 사주를 본다. 60갑자라는 복잡한 수 계산을 하는 것 대신, 다른 요인들을 동원한다. 예를 들면, “나는 지난 주 새벽기도회부터 시작해서 교회 출석을 여러 번했다. 이것은 아마 긍정적 요인(+)으로 작용할 것이다. 그러나 성경을 건성으로 몇 번 보았다. 이것은 부정적 요인(-)으로 작용할 것이다. 그리고 나는 이웃 사람 몇 명을 전도했고, 큰마음 먹고 목돈을 헌금했다. 나는 누구를 위해 중보 기도했으며, 직장에서 뇌물을 거절했다. 따라서 이런 나의 행위가 답답하기 짝이 없는 침침한 운명을 사라지게 할 것이다.”
그러나 십자가의 피는 이런 인간들을 가려내게 된다. 십자가 안에 놓여 있는 인간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자신의 구원한 피의 사랑을 증거 할 위치로 새롭게 창조된 자다. 재수가 있느니 없느니 것을 따질 수 있는 그런 영역에서 밖으로 튕겨져 나와 버렸다.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다.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롬 14:7-8)
성도는 진리를 새삼 찾는 자가 아니라 늘 진리라는 덩치와 부딪치면서 사는 자다. 즉 미완성적인 상상력과 추리력과 예측력이 완성을 만나면서 끊임없이 약속의 완성 속에서 허무하게 녹아져가는 것이다. 미래? 세상 사람들이 고대하는 미래가 성도에게는 이미 현재가 되었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롬 14:17)
우리교회(IP:220.♡.176.150)
09-03-04 18:57
대구081223복음으로본사주팔자08 대구강의 18 - 복음으로 본 사주팔자(四柱八字)
* 참고서적 : [역과 점의 과학] 나가다 하사시 저, 심우성 역, 동문선(서울: 1991)
[변화를 이용하는 지혜 주역] 서우선 저, 문학아카데미(서울:1999)
08,12,23 강의 이근호, 정리 구득영
◈ 복음이냐? 사주팔자냐?
이제 시작하겠습니다. 오늘은 '복음으로 본 사주팔자' 라는 것을 살펴보겠는데, 복음과 사주팔자, 이렇게 두 가지로 나누어진다는 말이다. 여기서 먼저 복음은 무엇인고 하니, 로마서 3장 1절처럼 다윗의 자손에 대해서, 즉 "예수님이 하나님의 의가 된다" 라는 말이다. 그렇게 예수님에게서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고, 그런 하나님의 의를 믿음으로 영생을 얻는다는 것이다.
(롬 1:3) 이 아들로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롬 1:4)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그렇게 복음은 철저하게 예수님에 관한 것이라면, 그렇다면 뒤에 나오는 '사주팔자'는 도대체 무엇이겠는가? 인간에 관한, 즉 인간의 운명에 관한 것인데, 인간운명의 미래학이라고 할까? 아무튼 그렇다는 말이다. 옛날 사람들이 인간의 운명이 궁금해서 미래를 점칠 때, 과연 어떤 식으로 미래를 파악하는 것이 맞는지, 그렇게 애를 쓴 것이 바로 '사주팔자' 라는 말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인간이 존재하는 이상은, 운명학이나 미래학이 언제나 있을 수밖에는 없고, 인간은 거기에 대해서 궁금해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과학시대가 아닌가? 하지만 이러한 과학시대도 역시 운명학이나 미래학에 포함이 된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세상 사람들의 관심은 그렇게 자기의 사주팔자에 가있고, 그런데 하나님의 관심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게 가있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은 "예수님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가?" 라는 것인데 반해서, 그런데 인간의 관심은 "내가 나의 미래를 어떻게 할 것인가?" 라는 것에 있다는 말이다. 자기 자신에게 말이다.
◈ 사주팔자 - 나는 나를 위해서 산다 !!
그런데 여기서 조금 더 나가보면, 복음에 의하면 "인간은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산다" 라고 하는데, 사도바울도 골로새서에서 그런 이야기를 했다는 말이다. 그런데 인간의 운명에 관한 것을 이야기하는, 즉 인간의 미래학이라고 할 수 있는 사주팔자에 의하면 인간은 무엇인가? 인간이 그리스도를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나는 나를 위해서 산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즉 더 적나라하게 표현을 하자면 "나는 나에게 바쳐진 존재이다" 라는 말이다.
◈ 복음 - 인간은 예수님을 위해서 산다 !!
하지만 복음은 뭐라고 하는가? 이 세상의 모든 만물은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창조되었다고 한다는 것이다. 골로새서 1장 16절에서, 아주 유명한 구절인데 말이다. 그러니 인간은 예수님을 위해서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인간들은 자기를 위해서 살아가는데 말이다.
(골 1:16)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그러므로 복음의 입장에서 사주팔자를 보게 되면 당연하게 쳐부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나' 라고 하는 것은 신비투성이인데, 즉 자기의 미래를 모른다는 것은 자기를 모르기 때문에 그렇다는 말이다. 그러니 자기가 장래에 어떻게 되는지는 신비로 남겨져 있다는 것이다.
◈ 인간은 신비가 아니라, 육이고, 곧 죄 덩어리 !!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의하면 인간은 결코 신비로 남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한 마디로 '육' 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구약에 의하면 여기에서 죄가 나오고, 그 죄는 하나님과 예수님을 모욕하는데, 배후에서 악마가 그러한 작용을 한다는 것이다. 즉 인간은 죽는 것이 무서워서 악마에게 복종하면서 예수님을 욕하면서 살아간다고, 그렇게 요한계시록에 나온다는 말이다.
◈ 감추어진 교회 !!
지금 여기 이렇게 교회가 있다고 하면, 교회는 그냥 우리 눈으로 보면 인간의 모임인데, 그래서 인간들이 이렇게 소복 소복이 모여있는데, 하지만 성경은 이런 교회 말고 달리 뭐라고 하는가? 오직 예수 그리스도가 머리가 되는 교회를 이야기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골치가 아파지는데, 왜냐하면 교회에 가보면 사람들밖에 보이지 않으니 말이다. 그러한 사람들 각자 각자 모두가 다 "나는 나를 위해서 바쳐진 존재이다" 라고 하는데 해당이 되는데,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가 머리가 되는 교회가 되어버리면 어떻게 되는가? 사람들만 보이는 이 교회가 아니라 숨어있고 손에 잡히지 않는 교회가 되어버린다는 것이다. 즉 감추어진 교회가 되고 만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교회를 보고 나오기 때문에 "나의 미래는? 내년 운수는?" 라고 하면서 나오는데, 그것이 교재의 결론부분에 나오는데 말이다. 동약학에서는 사주팔자를 이야기할지 몰라도, 그런데 사람들은 요즘 사주팔자를 보려고 철학관보다는 교회에 많이 간다는 것이다.
◈ 누가 뭐라고 해도, 나는 나에게 바쳐진 존재 !!
아무튼 사람들이 사주팔자를 보려고 동약학을 전공한 사람에게 가든지, 교회에 가든지 간에 공통점이 무엇인가? 모두가 다 자기가 잘 되기 위해서 간다는 것이다. 즉 "나는 나에게 바쳐진 존재이다" 라는 것인데, 인간들은 이것을 도저히 포기할 수가 없다는 말이다.
물론 그들이 하나님 이야기도 하고, 예수님 이야기도 하고, 또한 성경 이야기도 하지만, 그러나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은 다 자기 자신을 위해서 예수님도 있고 하나님도 있다고 여긴다는 것이다. 성경에서는 이것을 '자기 의' 라고 하는데, 자기 존재에서 나오는 말이다.
◈ 죄란, 자기 존재에 대한 정당성 !!
그러므로 성경에서 말하는 죄는 무엇인고 하니, 인간 개인이 착하고 말고 하는 차원이 아니라, 자기 존재에 대한 정당성, 그것이 바로 죄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십자가에 의하면 하나님의 의는 오직 예수님만이 하나님의 의가 되고, 또한 오직 그 예수님만이 약속에 의해서 다윗의 자손으로 오신 분이라는 것이다. 다른 모든 사람들은 이 예수님 앞에서 육이 되고, 곧 죄가 된다는 것이다. 그 배후에는 악마가 있으니 말이다.
◈ 교회를 죄라고 규정하는 가운데, 숨어있는 교회가 !!
그러니 인간전체를 다 죄라고 규정을 해야 하는데, 그러니 진짜 교회라고 하면 그 교회가 그냥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들이 모이는 이 교회를 죄라고 규정하는 가운데 비로소 숨어있는 교회가 튀어나온다는 것이다. 이것을 간단하게, "복음을 외치면 교회이고, 그렇지 않으면 교회가 아닙니다" 라고 할 수 있는데, 그러니 기존의 교회가 있는데 복음을 전해서 어떻게 해보자는 말이 전혀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복음이 인간을 위한 복음이 되는데,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무엇인고 하니, 인간은 자기 자신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태어났고 존재한다는 것이다. 정(?) 목사님의 표현에 의하면 인간은 없고 죄인밖에 없다고 하는데, 사실 그 말이 맞고 말이다.
그렇게 인간이 아니라 죄인이라고 하면, 그 뒤에 예수 그리스도의 의가 나오게 되는데, 즉 왜 인간이 죄인인고 하니까,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의를 높이기 위해서 죄인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사실은 우리 인간이 죄인이 되는 것이 제일 어려운데, 어떻게 보면 전혀 불가능한데 말이다.
◈ 죄인의 사주팔자는?
만약에 우리 인간이 죄인이라고 하면, 우리의 미래는 어떠한가? 두말할 필요도 없이 저주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사주팔자고 뭐고 간에, 그렇게 미리 내다보고 말고 할 필요조차도 없어진다는 말이다. 정답은 이미 나와있는데, 저주를 받아서 지옥으로 가면 그만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지옥에 가서 볶음 소금(?)의 신세로 살아가야 한다는 말이다.
요즘 사람들이 교회에 나와서 목사에게 사주팔자를 보여달라고 하는데, 저도 얼마든지 보여줄 수가 있다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은 토정비결을 통해서 보는데, 우리는 마가복음 9장의 말씀을 통해서 얼마든지 알 수가 있다는 말이다.
(막 9:43) 만일 네 손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버리라 불구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을 가지고 지옥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나으니라
여기서 뭐라고 하는가? 손이 범죄하면 어떻게 하라고 하는가? 그냥 찍어버리라는 것이다. 이 얼마나 멋진 사주팔자인가? 그렇지 않으면 꺼지지 않는 불어 들어간다는 말이다. 물론 불이 좋아서 스스로 뛰어드는 사람들도 있지만 말이다. 그야말로 확실한 사주팔자라는 것이다.
◈ 의(義)는, 예수님이 죄인을 부르는 관계성 !!
그러니 오늘 우리가 공부해야 할 것은 무엇인고 하니, 예수님께서 죄인을 부르려고 왔다고 하셨는데, 즉 죄인이라고 해서 무조건 나쁜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왜냐하면, 그렇게 죄인이 되어야 의가 나오니 말이다. 즉 예수님이 죄인을 부르는 그 관계를 두고서 '의(義)'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관계는 우리가 소유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니라는 말이다. 이렇게 예수님이 계시고, 우리는 죄인이 되는데, 그런 죄인을 예수님이 불러내는 것이 의가 되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그것이 바로 구약에 나오는 율법과 선지자의 완성으로서, 즉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이란 말이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이 죄인을 불러내는 것인데, 아버지가 탕자에게 가락지를 끼우는 것이고 말이다. 그렇게 목자가 잃어버린 양을 찾는 행위자체가 하나님께서 기뻐하는 것인데,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하는가? "하나님, 제가 무엇을 할까요? 착한 일을 할까요?"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자꾸만 자기의 행위를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려고 한다는 말이다.
◈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서 영광이 !!
하지만 성경은 그런 것을 일체 거부하는데,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서 영광이 된다는 것이다. 빌립보서 2장 11절에서 뭐라고 하는가? 오직 주의 이름을 부름으로서, 즉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신다는 말이다.
(빌 2:11)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제가 이것을 수천 수만 번을 이야기해도, 하지만 사람들은 돌아서면 다시 뭐라고 생각하는가? "나는 나를 위해서 바쳐진 존재이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야말로 에프킬라처럼 처음에 뿌릴 때는 효과가 있는 것 같은데, 그런데 돌아서면 흔적도 없이 그만 사라지고 만다는 것이다. 모기 소리만 '윙' 하고 다시 나고 말이다.
그러니 교회에 와서 말씀을 들을 때는 "나는 나를 위해서 바쳐진 존재가 아니다" 라고 하다가, 돌아서면 어떻게 되는가? 예배를 마치고 그냥 1분도 채 지나지 않아서 모기소리만 '윙' 하고 나듯이, 그렇게 자기의 손익을 챙기기에 급급하다는 것이다.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인간의 자아는 결코 신비가 아닌데, 그냥 육이고, 안개이고, 거기서 죄만 나온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내가 누구인지 모르겠다" 라고 하면서, 그렇게 신비롭게 남으려고 하면 안 되고, 그것은 자기를 속이는 것이니 말이다. 아무튼 인간은 신비로운 존재가 전혀 아니니, 당연히 인간의 미래도 전혀 신비가 아니라는 것이다.
◈ 내 나이 마흔 살이 되면?
제가 20살 때 무슨 생각을 했는고 하니, "내 나이가 40살이 되면 어떻게 될까? 야, 신비롭겠다" 라고 했는데, 그런데 40살이 되어보니 어떠한가? 신비고 개뿔이고 20살과 똑같다는 것이다. 그러면 60살이 되면 어떻게 되겠는가? 역시 마찬가지라는 말이다. 자기만 생각하는 인간이란 것이다. 그러니 인간은 전혀 신비롭지 않다는 말이다.
◈ 인간을 신비롭게 만드는 방법은 무엇인가?
그렇다면 여기 사주팔자와 관련해서, 인간은 전혀 신비롭지 않은데, 그런데 신비롭게 만드는 방법이 무엇인가? 벌레를 잡아먹는 식충식물이 있는데, 벌레가 들어오면 입구를 닫아 가지고 먹어버린다는 것이다. 인간의 자아도 분석해보면, 역시 같다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친구가 있고, 형제가 있고, 재산이 있고, 그리고 교회도 있는데, 그런 것들을 다 뭉쳐서 '자아' 라고 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그 자아의 특징이 무엇인고 하니, 만약 그런 자아의 영역을 누가 건드리게 되면 즉각 반응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즉 "여기까지는 내 영역이니까 건드리지마. 당신은 당신의 영역이 따로 있잖아" 라고 말이다. 왜냐하면, 그것을 건드리게 되면 자아가 깨어지니 안 된다는 것이다.
◈ 자아가 확대된 것이 곧 교회 ??
그것은 교회도 역시 마찬가지인데, 즉 "내 교회를 건드리지마. 니 교회는 따로 있잖아"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아가 확대된 것이 교회이고, 그런 교회는 자아를 만드는 하나의 추억으로서 계속해서 유지가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사람들이 사주팔자를 통해서 "제가 내년에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라고 하는 것은, 그런 신비로운 자아를 더욱 더 확장을 시켜서 크게 해보려는 시도라는 것이다.
◈ 그러나 성경은 자아를 해체시키는데 !!
그러니 성경에서는 이 전체를 두고서 '죄' 라고 하는데, 왜냐하면 이 하나 하나가 자기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이니 말이다. 그래서 그냥 주님의 것이기에 감사하면서 살면 되는데, 그런데 인간들을 그런 것을 끌어 모아서 자기의 '자아' 라는 것을 따로 만들었기 때문에, 성경의 말씀 하나 하나는 이러한 모든 것들을 해체를 시킨다는 것이다. 즉 '해체신학(?)' 이라고 할 수 있는데 말이다.
다시 말해서, "이것도 니 것이 아니야. 저것도 니것이 아니야" 라고 하는데, 그러니 성경은 결국 무엇인고 하니, "내 것이다" 라는 것에서부터 "그것이 내 것이 아니구나" 라고, 그렇게 자기를 부인하기 위한, 즉 십자가 앞에서 자기를 부인하고 모든 것이 주님의 것이라고 전환시키기 위한 작업을 성령을 통해서 하신다는 것이다.
여기서 조금 더 진도를 나가보면, 그렇다면 "나는 나에게 바쳐진 존재이다" 라고 하는데, 그렇게 인간은 자기를 위해서 살아간다는 것이다. 그러니 인간은 자기 미래가 궁금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최종적인 목적이 오직 '나' 밖에 없기에 말이다. 그렇게 하나의 신비로 남으니 말이다.
◈ 약속이 밀고 밀어서 !!
그래서 옛날 사람들은, 즉 여호와를 모르는 이방인들의 경우에 어떠한고 하니, 물론 그들이 여호와를 안다고 하면 간단한데 말이다. 여호와는 앞에다 자기 약속을 던져놓았기 때문에, 그 약속을 통해서, 즉 인간으로 하여금 그 약속에 끌려가도록 한다는 것이다. 인간이 약속을 미는 것이 아니고 말이다. 그렇게 해서 사람들이 이 미래의 약속에 흡수가 되도록 하는데, 그렇게 약속이 인간을 밀어서 최종 약속에 도착하도록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히브리서 11장의 내용인데, 앞에 있는 에녹이 승천한 것, 노아가 방주를 만든 것, 그리고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친 것이 모두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하나의 파편들이고 조작들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히브리서 12장에 들어가면, 허다한 증인들이 쫓아왔는데, 그런데 도착 지점이 어디인가?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는 것이다.
그래서 모세의 경우에 바로의 아들 됨을 거부하고 하늘나라의 상을 바라보았는데, 그 상이 무엇인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준비한 것인데, 어떤 사람은 톱에 켜이고, 또 어떤 사람은 광야에서 유리방황하고 말이다. 그러니 각자의 개성에 따라서 여러 가지 사건들이 있었지만, 그것은 다 이렇게 약속이 밀어서 그렇게 도착하게 된다는 것이다.
◈ 하지만, 인간은 약속이 없어 !!
그런데 우리 인간의 경우에는, '내'가 여기에 있고, '내'가 전부인데, 그래서 '내'가 보이지 않는 미래에 '나'를 끌고 가야 한다는 것이다. 즉 약속이 없다는 말이다. 그렇게 이방민족들은 약속이 없기 때문에 이 약속을 대체할 만한 것이 무엇인고 하니, 그것은 바로 자연현상을 통해서 약속을, 즉 자기 미래를 구성해야 될 입장에 놓여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 반해서 여호와의 백성들은 이렇게 약속이 있는데, 물론 이들도 약속이 가는 길을 모르지만 말이다. 그래서 그 약속을 위해서 약속된 선지자들을 보내어서, 그들도 하여금 선한 길로 인도하는데, 그런 과정에서 여러 가지 사건들이 벌어진다는 것이다. 마치 목자가 양을 몰고 가듯이, 그렇게 약속이 인도해간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성도의 궁극적인 목적인 자기 자신이 아니라, 약속이 최종적인 목적지가 되는데, 그 약속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의' 라는 말이다. 그것을 두고 복음, 즉 기쁜 소식이라고 하고 말이다. 그런데 그 약속이 드디어 구체화가 되었는데, 결코 희미한 약속이 아니라 말이다.
◈ 사도바울은 왜 감격을 했는가?
그것이 무엇인고 하니, 예수님의 십자가이고, 그것이 하나님의 의인데, 바로 그것을 사도바울이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에게 기뻐서 어쩔 줄을 몰라하면서 감격에 젖어서 전했다는 것이다. 자기 조상들이 그렇게 애타게 기다리고 찾던 것이 바로, 그것이 우리의 의가 아니라, 하나님이 그냥 공짜로 주시는 의라는 것이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그것도 모르고 어떻게 했는가? 열심히 자기 의를 세우려고 하는데, 그러나 그런 것들은 자기 열심에 불과한 것이고, 모두가 다 헛짓이란 말이다. 그렇게 해서 결코 하늘나라에 갈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약속이 아니기에 말이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로마서 10장에서 뭐라고 하는고 하니, "너희들이 천국을 보려고 올라가지도 말고, 또 지옥을 보려고 내려가지도 말고, 그런 곳에 가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지금 눈앞에 있는 복음을 믿기만 하면 구원을 얻는다" 라고 했다는 것이다.
◈ 흔히 선교단체에서 !!
흔히 선교단체에서 학생들에게 성경을 가르칠 때 몇 가지 중요한 것을 가르치는데, 그 중에 하나가 로마서 10장 10절에 보면 나온다는 것이다. 즉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라고 말이다.
(롬 10:9)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롬 10:10)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그런데 성경을 그렇게 보면 안 되는 것이, 사도바울이 이러한 말씀을 하기 전에 뭐라고 했는고 하니,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다" 라는 것이 먼저 나온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의도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는데 불과한, 그런 인간의 열심은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이상하게도(?) 선교단체에서 이것은 또 가르치지 않는데 말이다.
(롬 10:2)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
(롬 10:3)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
◈ 오직 약속의 능력으로 전파자가 !!
그러므로 방금 말했지만, 자기가 천국을 구경하려고 하지 말고, 또 지옥에도 기웃거리지 말고, 지금 눈앞에서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그 부활을 믿으면 영생을 얻는다는 것이다. 바로 이것을 위해서 우리 모두가 다 전파자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고 하니, 우리가 구원을 받는 것은 그냥 하나 얻어 걸친 것이지, '내'가 잘나서, 즉 '내'가 하나님에 대한 열심히 있어서 구원을 받은 것이 결코 아니라는 말이다. 오직 '나'보다 더 센 하나님의 약속이, 즉 말씀의 능력이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구원했다는 것이다.
그러니 반드시 '내'가 나서서 무엇을 해야 한다는 생각은 버리라는 말이다. '내'가 그렇게 구원을 받았듯이, 또한 그렇게 구원을 받은 다른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다. 바로 그러한 능력으로 인해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복음의 전파자가 되어야 하는데, 왜냐하면, 사람은 자기 기분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진리대로 살아야 하니 말이다.
◈ 그러면 복음이 없는 이방인들은?
이것이 바로 복음의 세계라고 한다면, 그러면 복음이 없는 이방인들은 어떻게 되는가? 여기서부터는 제가 교재를 좀 보면서 앉아서 강의를 해야 하는데, 이것이 너무나도 어렵고 복잡하기에 말이다. 먼저 1페이지를 중간을 살펴보자.
** 그렇다면 수천 년 인류 역사를 통해서 인간들이 나름대로 자신의 몸에 안정성을 부여하는 방식이 무엇이었는가?
여기 '몸의 안정성' 이란 무엇인고 하니, 모든 것이 다 불안하니 멀미가 난다는 것이다. 그러니 인간은 뭔가 안정이 되어있는 것을 원한다는 말이다. 이것이 하기에 앞서서 좀 어려운 것이 있는데, 그것은 그림으로 설명해보겠는데 말이다.
◈ '기분이 더럽다' 라는 의미는?
먼저 "기분이 더럽다" 라는 말이 있는데, 이것은 바로 자기 신체의 반응이 더럽다는 것이다. 즉 신체의 반응을 기분이라고 한다면, 그것이 더럽다는 말이다. 그렇게 기분이 더러울 때는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기분을 산뜻하게 바꾸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이렇게 기분이 더럽다는 것이 온도나 습도와 관련이 있지만, 하지만 경제가 좋지 않다는 소리를 들어도 기분이 더럽다는 것이다. 그리고 자기는 아프지 않아도 아이가 아프다고 하면 기분이 더럽고, 또 자기는 시험을 치지 않았는데, 아이가 시험에 떨어졌다고 해도 기분이 더럽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왜 그런가? 동양에서는 이것을 아주 순진하게 이야기했는데, 즉 자식과 '나' 사이에는 '기(氣)'가 있다는 것이다. 아주 신비에 속하는 것인데, 김용옥 교수가 이 신비를 풀려고 하다가 얼마나 욕을 많이 들었는지 모른다는 것이다. 소위 '기(氣) 철학'으로 말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자식과 자기는 엄연히 다른 몸인데, 그래서 미장원이나 화장실에도 가도 분명하게 따로 가는데 말이다. 그런데 자식이 아픈데 왜 자기 몸도 그렇게 아프냐는 말이다. 그것을 동양에서는 '기' 라고 했는데, 그런데 그것이 그러한 '기'가 아니라는 것이다.
서양에서 무엇이라고 밝혀내었는고 하니, 지난 시간에 했는데 말이다. 즉 자기가 만든 이미지 속에, 즉 자기를 구성하는 요소 가운데 무엇이 있는고 하니, "내 자식이 잘되어야 하는 기분이 좋아" 라고 하는 것이 포함이 되어서, 그것이 바로 '나' 라는 것이 된다는 말이다.
이것은 굳이 철학으로 따지지 않아도, 구역 역대기 등에도 보면 나오지만, 옛날 유대인들도 마찬가지였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생각은 이성으로 해도, 행동은 항상 자기 기분에 좌우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기분이 좋으면 마구 퍼주고 하다가도, 기분이 나쁘면 원수처럼 여긴다는 말이다. 그것을 현대에서는 무엇이라고 하는고 하니, 자기 이미지가 언제나 형성이 되어있다고 한다는 것이다. 물론 자기를 위한 이미지이고 말이다.
그것은 서양의 문제이고, 아무튼 동양에서는 '기'의 문제로 풀어야 하는데, 그런데 몸이 안정이 되어있으면 좋을 텐데 그렇지 못하니, 기분이 더럽고 불안정하니, 그것을 어떻게 안정이 되게 할 수 있는지, 거기에 대해서 골몰하게 된다는 것이다.
교재를 다시 살펴보자.
** 그렇다면 수천 년 인류 역사를 통해서 인간들이 나름대로 자신의 몸에 안정성을 부여하는 방식이 무엇이었는가? 안정성을 찾는다는 것은, 변화를 제대로 읽어서 그 변화를 '나를 위한 변화'로 전환하는 시도를 뜻한다.
◈ 어떻게 변화를 읽는가?
여기서 보면, 안정성을 찾는다는 것은 변화를 제대로 읽는 것이라고 하는데, 그렇다면 변화를 제대로 읽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파도가 칠 때 같이 타는 식으로 하면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산 가지나 풀뿌리를 묶어서 이렇게 하는 것도 있고, 또 이렇게 이렇게(?) 하는 것도 있는데 말이다.
그렇게 하는 하나 하나가 다 주역에 보면 나오는데, 소위 점을 치는 것인데 말이다. 그런 하나 하나가 어떻게 만들어지는고 하니, 그냥 이야기하니 너무 어려워서, 이것이 교재 뒤에 보면 나오는데, 어떻게 제대로 변화를 읽는지 살펴보자는 말이다.
일단 교재 4페이지를 한번 보자.
** 대젓가락 50개를 쥔다. 이제 아무렇게나 양쪽으로 나누기만 하면 된다. 왜 50개인가? 50이 우주 전체를 의미한단다. 근거 있는가? 없다. 이 50개에서 우선 하나를 뺀다.
여기에 보면 대젓가락 50개를 쥔다고 하는데,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고, 그냥 손으로 쥐다가 보니 50개가 적당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50개에서 하나를 빼는데, 왜 하나를 빼는가? 그렇게 50개를 다 하게 되면, 그 50개를 우주라고 생각하는 그 자체가 문제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우주에 신이 있다고 하면, "신이시여, 이 50개가 전체지요?" 라고 하면 신은 뭐라고 하는가? "니는 그렇다고 여기고 싶지? 아니다" 라고 하는데, 그래서 "아하, 아니구나. 그러니 하나를 빼야지"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것을 겸손하게 미리 하나를 뺀다는 말이다.
예를 들어서, 예수님이 40일을 금식기도를 했는데, 그래서 그런 금식기도를 하는 사람이 자기도 40일을 하게 되면 너무 교만할까 싶어서 하루를 줄여서 39일을 한다는 것이다. 사실 얼마든지 그럴 수가 있다는 말이다. 바로 이것과도 같은데, 그렇게 자체적으로 신에게 아부를 한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자기가 그렇게 전부를 다 안다고 건방지게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아주 겸손하게 먼저 스스로 하나를 뺀다는 것이다. 그러니 인간들이 하는 짓이 얼마나 웃기는지, 전부가 다 그렇게 자기 자신을 위해서 한다는 말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이 1개는 태극이라고 부른다. 그렇다면 49개 남는다. 왼손에 49개를 쥐고서 염불을 외우면서 우연을 가장해서 양편으로 나눈다. 왼손에 있는 것을 천책(天策)이라고 한다. 하늘의 책략이라는 말이다. 오른쪽에 있는 분량을 지책(地策)이라고 한다. 하늘의 뜻이 드디어 땅에서도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 염불은 내용이 없어야 !!
그러면 염불은 왜 외우는가? 염불의 문장 자체는 사실상 의미가 없는데, 왜 의미가 없는가? 그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인간은 연약해서 안다고 하지만, 사실은 모른다는 것이다. 이 대자연은 너무나도 방대해서 모르는 것이 많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자연의 가지를 존중하는 의미에서 자기가 아는 것은 일부러 접고서 모르는 소리만 함으로 말미암아 대자연에 아부를 할 수가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수리수리마수리(?)' 라고 하는데, 그러니 문장자체에는 아무런 내용을 담고 있지 않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그런 의미가 없는 것을 통해서, 인간은 자기가 아무런 자랑도 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그래서 염불을 할 때, '3+5=8' 이라는 식으로 하면 안 되는데, 왜냐하면 자기 자랑을 하는 것이니 말이다. 그래서 그런 염불이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의 자기 똑똑함을 드러내는 염불이니 말이다. 즉 인간도 뭔가를 알고 있다는 의미이기 때문에 말이다.
◈ 천책(天策)과 지책(地策) !!
그리고 우연을 가장해서 양편으로 나누는데, 왼손에 있는 것을 천책(天策)이라고, 즉 하늘의 책략이라는 것이다. 또 오른쪽에 있는 분량을 지책(地策)이라고, 즉 하늘의 뜻이 드디어 땅에서도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어디서 많이 듣던 말인데, 아닌가? (ㅋㅋ)
◈ '내' 이미지를 건드리는 놈은 용서 못해 !!
왜 이렇게 하는고 하니, 인간은 연약해서 미래를 모르는데, 하나님이 아닌 이상 미래를 어떻게 알겠느냐는 말이다. 그렇게 모르는 것은 인정하겠는데, 그런데 자기가 손해보는 것은 용납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모르는 것은 인정을 하지만, 그러나 그것 때문에 액운이 닥치는 것은 참을 수 없다는 말이다.
하지만 이것이 모순인데, 정말로 모른다고 하면 "그냥 죽여주세요. 얻어맞겠습니다" 라고 하면 오히려 괜찮은데, 그런데 그것이 아니라 "제가 모른다고 했잖아요" 라고 하면서 개긴다는(덤빈다?) 것이다. 왜 그렇게 개기는가? 자기 모른다고 했는데 왜 때리느냐는 말이다.
그러니 인간이 모든 것을 다 모른다고 해도 아는 것이 하나 있는데, 그것이 바로 무엇인고 하니까, 즉 "내 자아의 이미지를 건드리는 놈은 가만히 두지 않겠다" 라는 것이다. 심지어는 그 대상이 하나님이라고 할지라도 조져놓겠다는 것이다. 그러니 누가 감히 자기의 영역을 침범하느냐는 것이다.
◈ 그런데 예수님은?
인간이 아무리 모른다고 해도, 이것만큼은 결코 부인할 수 없는데, 그런데 예수님은 뭐라고 하는가? 바로 이것을 부인하라고 한다는 것이다. 분위기 파악도 하지 못하고 말이다. 그러니 우리 인간에게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란 것이다.
제가 언제나 강조하는 것이지만, 성경에서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를 보고 결코 죄를 짓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죄인임을 알라고 한다는 말이다. 죄인이니 죄를 어떻게 짓지 않을 수가 있는가? 하지만 그런 죄인임을 깨달으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어떠한가? 자꾸만 죄를 짓지 않고, 착한 일을 하는 쪽으로 나아가려고 한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위해서 우리는 당연히 죄인이 되어야 하는데, 물론 새삼스럽게 다시 죄인이 될 필요는 없는데, 이미 죄인이니 말이다.
◈ 왜 기분이 더러운가?
그런데 막상 우리 인간은 무엇인고 하니, 자기 자신이 나쁜 일을 당하면 죄를 지어서 당하는 것으로 여긴다는 것이다. 즉 나쁜 일이 싫은 것이 아니라, 자기가 그렇게 신에게 벌을 받아서 당한다는 것, 그것에 대해서 기분이 더럽다는 것이다. 도대체 "내가 무엇을 잘못했기에 신에 벌을 받아야 하는가?" 라는 말이다.
물론 기분은 자아의 이미지에서 나오는데, 즉 "나는 적어도 이 정도는 되어야만 해" 라고 하는, 자기 이미지에서 말이다. 자기의 이미지를 결코 포기하지 못하니, 신이라고 해도 자기 이미지를 건드리면 가만히 있지 않겠다는 것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그 지책(地策) 가운데 하나를 따로 떼어 낸다. 이것을 '인책(人策)' 이라고 한다. 인간도 미래 책략에 대해서 긍정적으로 참여했다는 표를 내겠다는 것이다.
◈ 더러운 팔자도 바뀔 수 있다 !!
이것이 무슨 의미인고 하니, 하늘의 뜻이 땅에서 이루어지지만, 그런데 그냥 이루어져버리면 자기는 그만 있으나 마나한 존재가 되고 만다는 것이다. 그래서 산 가지 중에서 하나를 따로 떼어 내어서, "나도 내 하기 나름이다" 라고 하면서, 즉 자기 팔자가 아무리 더러운 팔자라고 해도 얼마든지 바뀔 수가 있다는 것이다.
그것을 두 글자로, 절망 가운데서의 '희망' 이라고 하는데, 이러한 희망에 대해서 현대철학과 신학은 아주 잘 밝혀내고 있는데, 희망의 원천에 대해서 말이다. 그것을 보면 철학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님이 분명한데, 이 희망의 원천이 미래에 있는 것이 아니라, 현재 자기가 미흡하니 희망을 갖는다는 것이다.
◈ 배가 고프면 식당간판이 !!
예를 들어서, 우리가 언제 식당간판이 눈에 들어오는고 하니, 자기가 너무 배가 고파서 환장을 할 때, 그때는 식당간판이 너무나 크게 보인다는 것이다. 바로 옆에 있는 그 휘황찬란한 노래방 간판이 그만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혹시 목사의 눈에는 뭐만 보이는 줄 아는지 모르겠는데, 교회밖에 보이지를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유명한 속담이 있는데, "개 눈에는 뭐만 보인다(?)" 라고 말이다. 교인들도 돈이 궁해서 교회에 오게 되면, 돈 버는 설교만 듣기를 원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몸이 아파서 오면 어떻게 되겠는가? 건강하게 해달라는 소리만 들린다는 말이다. 물론 자기 죄 때문에 교회에 오면 주님의 의가 보이겠지만, 그것은 기적이 일어나야만 가능하고 말이다. 아무튼 인간은 자기의 아쉬움을 가지고 오면 그 아쉬움을 채우기에 급급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의 목사들은 어떻게 설교를 하겠는가? 당연히 교인들에게 희망을 주게 되는데, 그러나 그것을 한 마디로 묶으면 '돈' 이라는 것이다. 주님의 의가 아니고 말이다. 그러니 '돈 놓고 돈 먹기'에 불과한 것이 오늘 현대교회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 현대 철학자들이 말하는 희망의 원천은?
그래서 현대 철학자들에 의하면, 희망이라는 것은 그 원천이 무엇인고 하니까, 현재 자기를 분석해서 모자라는 것을 채워주는, 그것마저도 제공이 되는 미래의 그 어떤 것, 바로 그것을 희망이라고 한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점쟁이를 찾아가도 반 정도는 이미 자기가 자기에게 점을 쳤다고 볼 수 있는데, 즉 "지금 제가 아쉬운 것이 이것인데, 이것대로 해주세요" 라는 것이다.
저는 미장원에 거의 가지 않지만, 거기 미용사가 어떻게 머리를 하는고 하니, 머리모양에 맞게 하는 것이 아니라, 손님이 원하는 대로 해준다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결코 어울리지 않고 예쁘지 않아도, 오드리 헵번(전지현?) 처럼 해달라고 하면 해주어야 한다는 말이다.
◈ 수녀들도 미장원에 가는가?
혹시나 수녀들의 헤어스타일은 어떠한지 아세요? 물론 저도 들은 이야기이지만, 수녀원에 가본 적이 없으니 말이다. 수녀들은 이렇게 보면 머리카락이 밖으로 나오지 않는데, 항상 두건으로(?) 덮어버린다는 것이다. 그렇게 덮고 있으면 안에 어떻게 되어있는지 궁금하기 마련인데 말이다.
그래서 제 아내가 학교를 다니면서 옆에 수녀가 있어서 여러 번 물어보았다는 것이다. 물론 그렇게 해도 잘 가르쳐 주지 않는데, 그래도 집요하게 달라붙어서 그 비밀을 알아내었는데, 의외로 간단하게, 머리카락이 수건 밖으로 나오면 안 되니, 조금 길다 싶으면 자기가 그냥 그 길이 이상이 되는 것을 자른다는 것이다. 특별히 정해진 미장원이 있는 것이 아니고 말이다. 이렇게 알고 보면 아무 것도 아닌데, 들어보니 썰렁하다는 것이다. 아마 여러분도 좀 기대를 했지 싶은데 말이다.
그러니 천주교도 그렇지만, 구세군과 같은 곳에서 유니폼을 입고 폼을 잡는 것이 나쁘다는 것이 바로 이런 것인데, 그냥 육이고 아무 것도 아닌데, 그것을 거룩한 것처럼 포장을 하니 사람들의 궁금증을 야기시킨다는 말이다. 그야말로 '폼생폼사' 인데, 그러니 해골에다 제 아무리 근사한 옷을 입혀도 역시 해골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왼쪽에 그대로 쥐고 있는 천책을 8로 계속 나눈다. 그러면 그 나머지가 8이 못되게 된다. 그 남은 나머지에다 인책 가지 하나를 첨부해서 최종적으로 나온 숫자가 최종 괘가 된다. 가령 오른손 지책이 26개라면 계산이 다음과 같다. - (50-1)-26=23 23÷8=2...7 7+1=8 - 여기서 나온 8은 곤(坤)괘에 해당된다.
그렇다면 이 곤괘가 무엇인가? 교재에 보면 있는데, 어디에 있는고 하니(바로 다음에 나오는데, ㅋㅋ),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녹취자 - 원래 강의 때는 못 찾았는데, 첨가함)
** 곤괘란 무엇인가? 세상을 8가지 성질로 나눌 때 제 여덟 번째 해당되는 성질을 갖는다는 말이다. 즉 태극이 둘로 나누어지면 음양이 되고 음과 양이 다시 각각 나누어지면 노음(老陰)과 소양(少陽)과 소음(少陰)과 노양(老陽)으로 나누어지고 이들 네 개의 성질은 최종 8개의 더욱 세분화된 성질로 정착된다. 곤(坤), 간(艮), 감(坎), 손(巽), 진(震), 이(離), 태(兌), 건(乾)이 바로 이것이다.
여기에 보면 '괘'가 이렇게 8개가 나오는데, 또한 이 8개를 서로 비교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냥 "곤이 이런 팔자다" 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이 곤의 옆자리에 무엇이 오면 어떻게 된다" 라는 식으로 곤이 좋게 될 수도 있고, 나쁘게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즉 상극이 될 수도 있고, 조화가 될 수도 있다는 말이다.
◈ 그래서 부적을 사야 액운을 !!
그런 것이 결혼할 때 궁합을 보는 것과도 다같은 이치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