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마을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말도 안되는 소리
십자가마을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말도 안되는 소리
이름 : 김대식(IP:124.59.87.32)
십자가마을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말도 안되는 소리
081219
(요 1:45, 개역) 『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 이르되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
(요 1:46, 개역) 『나다나엘이 가로되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빌립이 가로되 와 보라 하니라』
(요 1:47, 개역) 『예수께서 나다나엘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시고 그를 가리켜 가라사대 보라 이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요 1:48, 개역) 『나다나엘이 가로되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 있을 때에 보았노라』
(요 1:49, 개역) 『나다나엘이 대답하되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
나다나엘이 말했다.
뭐 선한 것이 난다고? 이 땅에서?
해아래 새것이 없는데?
그렇다
거룩 단절 이다.
선함과 의로움의 단절이다.
예수님이 구약 이스라엘을 통해서 전쟁을 벌리신 이유는
바로 거룩 단절을 규정하시는 것이다.
여러분 이 땅에는 선한 것이 없데요
거룩한 것이 없데요
만약 있다고 주장하는 곳이 있다면 그거 가짜이니까 속지 마세요 우상이요 악마입니다.
이것을 외치라고 이스라엘로 삼았다.
그런데 웬걸
(실지로 거룩하다는 거짓 그림자 거룩성을 이스라엘이 더 많이 짖고 그 거룩성 중심으로 악마짖만 골라한다. 이것이 인간 역사다. 마치 이마표 받고 가인의 본격적인 악마성을 유감없이 그 성전 속에 가득 채우듯이)
인간들은 그래도 거룩을 수집하고 모으기 시작하고
건립하고 유지 보수 사수 하기 시작한다.
도리어 그런 모든 것들을 허물어 버리는 전쟁꾼으로 삼았던 이스라엘이
몇백배나 더 앞장서서 자기 따나 거룩이다 라고 여기는 것들을 수집하듯이
거룩 쇼핑 중독에 빠져 있다.
(항상 거룩과 선함을 앞장세워 그 뒤에 모든 자기 악마성을 가리우는 거룩한성 쌓기에 미쳐있다.)
십자가 마을 아무리 봐도 선한 것이 없다.
그런데 이 속에서 선한 것을 찾겠다고 나서는 인간들이
몇십년을 버티고 버텨도
결국은 자기의 유익이 되지 않기에
자기 취사선택에 자기가 속아서
나중에 자기가 자기 꾀에 속은 줄도 모르고
그제서야 누워서 침뱉기 하듯이
다시는 여기 오나 봐라 라고
뒤돌아서 가버린다.
그리고 늦게마나 주변인의 도움으로 그동안 못했던 억지로 참았던
욕망들을 마음껏 하기 시작한다.
얼마나 억눌러 왔든지 폭발하듯이 미친 듯이 그 즐거움에 빠져 산다.
교회 세우기, 십일조 거두기, 어거지라도 학위 따서 명분 갖추기 그래야 아무도 건드리지 못할테니까
자 이런 모습으로 인해 말씀이 무섭게 어르신으로 자리잡은게 아니라
도리어 진작 드러났어야 할 자아가 권위적으로 돌변을 해야 안심이 됨으로서
숨겨왔던 악마성을 마음껏 쏟아내면서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를 차버리고 성경으로 사기치는 수단으로 협박 공갈친다.
명령법 외치는 그 위치에 올라서서 말이다,.
바로 말씀을 무시하면서 말씀을 이용함으로써 연약해 빠진 한 아기의 순한 모습의 말씀으로 취급함으로
이제 본격적인 젖먹이 전쟁이 벌어지게 되는 것이다.
(육의 소욕과 영의 소욕의 충돌)
설마 전쟁이 벌어질 줄을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적군은 외부 바깥이 아닌 내부에 있음으로 인해 전쟁분리작업으로 전쟁의 진가를 드러낸다)
그렇다
아무것도 아닌 무가치한 건축자들의 버린돌, 연약하고 어리석고 미련한 모습으로 보였을 때에
비로소 본격적인 전쟁의 양상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일부러 이스라엘을 반대의 길로써
약하게 만들었건만
그래야 전쟁에 돌입할 수 있건만
이스라엘은 반대로 강하게 되어야만 전쟁에 들어가겠다고 한다.
근육을 갖추어야만 이길수 있다고 착각했다. 그래서 아이성에서 다 박살이 난다.
그 뒤로는 더욱더 이 모습들을 더욱 구체화 시키는 역사다. (거짓선지자시대)
그래서 이스라엘이 본격적으로 본심이 드러난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적으로 선두로써 앞장서게 되고
거룩한 전쟁으로써 박살이 나야할 깨어질 이방나라들을
도리어 이스라엘이 우상나라를 대변하고 혼합화 함으로써 거룩에 대한 정면 도전을 하게 된다.
거룩의 단절을 외쳐야 할 이스라엘이
도리어 마귀 세상을 변호하면서 그들의 대변인 노릇으로 자기들의 거룩인 의를 누룩처럼 퍼트리고 있다.
예수님이 오지 않으면 막을 길이 없을 정도로
그 바이러스는 심각하다
어느 정도로 심각한고 하니
나다나엘이 보기에 아무리 봐도 이미 다 바이러스에 전멸 될 정도로 여겼으니
더 이상의 선함이란 없다 라는
단절, 차단, 어두움화, 갇혔고, 포로되었고, 눌려버린
소망 없음 이다.
그런 말을 한 나다나엘이 참 신기하다.
왜냐하면 그 당시의 메시야 운동, 그리고 하나님 나라 묵시 운동, 하나님 형상 회복 운동,
이스라엘 회개 운동, 유대나라 회복운동, 온갖 거룩한 운동 등등등
그리고 예루살렘 거룩한 성 중심으로 한 온갖 거룩이라는 이름의 명분으로 행해지는 종교행사들
그 모든 것들을 깡끄리 다 거짓으로 취급할 정도로 선한 것이 없다 라고
눈에 보이는 모든 거룩한 종교 행사와 사상과 교리와 신학과 행함과 실천과 근육들
그 모든 것들을 일체 어두움에 갇혀버린 상태로 더 이상 희망이 없다고 선언할 정도이니
그런 행사에 안 속아 넘어 간 것도 기적이지만
그런 것들이 아예 어두운 소돔과 고모라 속에서의 음행으로 본다는 시각 자체가
도대체 어디서 온 것인가 ?
그래서 빌립이 와 보라는 그 소리에
비로소 섬기는 임금 없는 세상 속에
섬기는 임금을 만났다.
단절속에 누가 뛰어들었다.
요나의 큰물고기 뱃속의 단절과 죽음과 지옥과 사망과 음부의 권세 속에 누가 뛰어들었다. 누군가?
마치 실로암 소경이 비로소 빛되신 예수님을 처음 주로 보았고
그 동네의 눈뜬 자들은 아무도 예수님을 주로 볼 수 없는 눈뜬 소경의 상황처럼 말이다.
그 정도로 심각한 단절이다.
그리고 그 섬기는 임금만이 참 임금이라고
마치 미래의 완료된 일이 덮쳐버린냥
대화 자체가 시공간을 초월하는 미래완료적이다.
그렇다
십자가 마을은 선하지 않고
섬기는 왕도 아니요 그런 왕도 없다.
섬겼다면 더 두 세배의 댓가를 오늘날 교회처럼 요구할 것이다.
십자가마을은 나를 위해 죄를 대신 담당한 적도 없고
십자가를 진 적 조차도 없다.
사랑의 대상도 아니다. 할 짓이 없는가? 우상을 사랑하게? 미쳤나? 십자가마을을 사랑하게?
그건 아직도 우상에게 안 당해봐서 트릭(처세정치술)을 펼치는 것이다.
미쳤나? 십자가마을을 믿게? 믿을게 따로 있지? 교회를 왜 믿나?
그저 이용만 하고 단물 빨아먹고 더 이상 새것이 나올 것이 없으면 뱉어버리는
소모품으로만 이용하면 될 것을
이런 단체 사라질까봐 전전긍긍하고
걱정하고 불안해 한다면
도리어 평생을 코 끼이게 될 것이다.
이용해 먹으라고 주어진 것을 도리어 이용 당하게 되면
그것보다 바보 멍청이가 또 어디 있으랴?
소모품은 소모품일 뿐 따라하지 말자.
십자가마을을 의식하고 눈치 보는 자는 마귀새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