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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광주강의(08. 11. 28) 2강자유게시판-

광주강의(08. 11. 28) 2강

이름 : 서경수(IP:116.37.101.23)

광주강의(08. 11. 28) 43-2

이제 둘째시간 시작하겠습니다.

사도바울이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5절에 보면 “마음이 부패하여지고 진리를 잃어버려 경건을 이익의 재료로 생각하는 자들의 다툼이 일어나느니라.”고 했는데, 교회에서 이미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마음이 부패해졌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관리하지 않는 대상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이런 사람은 자아가 주동이기 때문에 자기를 누구한테 보이려고 의식합니다. ‘남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라캉은 말하기를, 인간의 주체라는 것은 타인의 욕망이라고 했습니다. 타인이 원하는 것을 이루려고 해요. ‘당신은 무엇을 원하십니까? 내가 해 드리겠습니다.’ 항상 남들이 원하는 것을 채워주는 식으로 자기 마음이 다져져 있다고 보는 겁니다.

자식인 경우에는 ‘엄마, 아빠가 뭘 원하지?’ 교인들 같으면 ‘목사님이 뭘 원하지?’ 남들의 눈에 띄고 남들에게 부합될 때 자기 존재의 의미를 파악하는 것. 이런 식으로 인간의 주체는 형성된다고 보는 겁니다. 라캉은.

결국 이건 뭐냐 하면 ‘내 마음은 내가 관리한다.’는 식으로 움직이는데, 성도도 이런 마음을 가지고 있어요. 그러나 성도의 특징은 눈에 보이지 않는 다른 분이 이것이 죄라고 지적하고 친히 관리해 주신다는 측면에서 그 마음이 부패해 질 수가 없게 되어 있습니다.

부패한 마음인데 그걸 부패해지지 않도록 하나님께서 관리해 주십니다. 그렇게 되면 항상 그리스도의 교훈에 착념하고, 그것을 기준으로 생각하고, 자기는 하나님의 보호를 받고 있고, 용서를 받고 있다는 것을 늘 느끼게 됩니다.

이렇게 보면 6장은 의외로 쉽게 넘어갑니다. 만약 이 말씀을 지키려고 할 때는 무진장 어렵지요. 질문이 여러 가지가 나오지 않겠습니까?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고 할 때, ‘목사님, 그러면 한 달 수입은 어떻게 써야 되고, 사계절에 옷은 네 벌만 있으면 됩니까? 주택문제는 어떻게 하고 의료보험은 어떻게 됩니까?’ 이런 질문이 나올 수도 있겠지요?

이런 질문이 나온다는 것은 내가 할 수 있는 능력껏 이 말씀을 지켜보겠다는 의도가 있지요. 내가 할 수 있는 능력껏 해 보겠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은혜도 고맙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내 나름대로 해 보겠다는 겁니다. 이런 것이 경건을 이익의 재료로 삼는 것입니다.

태어날 때부터 우리가 하나님의 것이고, 인도하는 것도 하나님이 인도하신다고 그냥 맡겨보시면 주의 사랑이 얼마나 크다는 것을, 나 같은 인간도 구원 되었다는 그런 증거로 사용될 수 있습니다.

그 다음에 9절을 봅시다.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에 떨어지나니”

왜 부자가 이렇게 힘들게 살아갑니까? 그것은 자기 소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 소유가 있으면 왜 힘든가? 사람은 뭔가를 소유하게 되면 그 소유물이 자신을 대변하는 대변자가 됩니다. 50억의 재산을 갖고 있다면, 그 사람은 ‘자기’는 없고 50억 짜리 ‘나’가 있어요. 50억 뒤에 ‘나’가 붙어요. 자기가 박사라면 박사가 앞에 가고 뒤에 ‘나’가 붙어요. 박사로서의 나. ‘50억’, ‘박사’ 이런 것이 나를 이루는 형용사가 되는 겁니다. 단독적으로 나는 될 수 없습니다. 뭔가 소유가 있다면.

부하려 하는 자들은 자기 소유를 채우는 것이 나의 발전이라고 여기고, 소유가 줄어들면 내 인생이 실패했다고 여기고 심지어는 자살까지 합니다. 남에게 욕을 먹는다. 나는 욕먹고는 못 살겠다. 왜 죽는가? 라캉은 뭐라고 했습니까? ‘내 속에 타인의 목소리가 있다.’ 타인의 목소리가 나에게 나쁜 소리로 들려왔을 때는 나는 더 이상 못 살겠다고 생각하고 죽는 것입니다.

남을 의식하면서 살아갑니다. 정말 불쌍해요. 제가 지난 주간에 KTX를 타고 가는데 기차 안에서 어떤 덩치 큰 사람이 큰 목소리로 전화통화를 하기에 제가 “밖에 나가서 전화 하세요.” 라고 했습니다. 그분은 자기에게 시비를 거는 줄 알지만 시비 건 게 아닙니다. 제가 그런 소리를 하니까 그 사람이 “좀 있다 전화하자.” 하고 전화를 끊었어요. 그러면 끝난 거예요. 누가 잘났느냐 경쟁을 한 게 아니고 조용하면 되는 거예요. 다른 주위 사람들에게나 나에게나.

사람은 자신이 현재 지키고 있는 것에 대해서 시비를 걸면 그것을 더 지켜내기 위해서 공격하게 되어 있어요. “네가 감히 나에게 흠집을 내?” ‘흠을 냈으니까 너도 한 번 당해 봐라.’는 식으로 공격을 하는데, 이 자체가 자아 중심입니다. 만약 자기 속에 자아가 없다면 자아가 없으니까 남의 자아와 싸울 필요가 없잖아요.

‘내가 지금 존재하는 것도 주께서 존재케 하시니까 존재하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자아가 없어지는데, ‘주께서 존재케 하셔서 내가 있으니까 내가 나를 유지해야 돼.’ 이렇게 되면 또 자아를 자기가 소유하고 있는 것이지요. 이렇게 되면 이 자아를 관리한다고 얼마나 힘이 드는지 몰라요.

남을 의식해서 ‘이건 어때요?’ 날마다 거울 앞에서 자신의 모습을 들여다보면서 때로는 만족하고, 때로는 실망하고. ‘선풍기 아줌마’ 알지요? 성형수술을 너무 여러 번 해서 그 부작용으로 얼굴이 선풍기처럼 커진 사람. 일종의 정신병입니다. 만족을 못하는 거예요.

책 교정 볼 때 너무 완벽하게 보려고 하지 마세요. 대충 넘어가면 돼요. 뜻 통하면 됐지 한 자도 오자 없이 완벽하게 하려고 하면 자칫하면 그 책의 완벽함 뒤에 ‘자아’가 붙어요. 완벽하게 책을 낸 ‘자아’가 됩니다.

그러니까 오늘 이 말씀은 우리에게, 너에게 근심될만한 수고하고 무거운 짐은 네가 상상하고 지어낸 것이니까 쓸데없는 것이고, 하나님이 만들어주신 이 몸이 있는데 ‘이 몸 따로, 내가 생각한 몸 따로.’ 2중으로 있으니까 이것이 얼마나 힘이 듭니까? 심하면 정신분열증이 일어납니다.

내가 여기 있는데 ‘또 다른 상상한 나’를 만들어서, 현재의 나를 자꾸 상상의 나로 가려고 하니까 힘만 들고 되지도 않고 주위 사람도 힘들고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부하려 하는 사람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에 떨어지고, 침륜과 멸망에 빠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 10절에 보면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돈을 사랑하는 것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는 이유를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보통 ‘사람이 돈을 사랑한다.’ 이렇게 생각하지요. 아닙니다. 사람은 돈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고, 돈 속에 있는 인간이 자기 주위의 것을 무시할 수 없어서 그렇습니다. 다시 이야기합니다. 돈 속에 놓여 있는, 경제나 생존 속에 놓여 있는 인간이 자기 주위를 둘러보면 전부 돈으로 움직입니다. 그러니까 돈을 무시할 수가 없지요. 마치 엄마의 양수 속에 있는 태아 같아요. 인간은 돈(경제)속에 잠겨 있어요.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을 때 항상 돈으로 연결돼요. 저 사람을 만나서 얼마나 이득을 얻을 것인가? 전부 이렇게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돈을 사랑하지 말라.”는 것은, ‘네 주위는 돈 말고 다른 것으로 바뀌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이게 누구냐 하면 하나님입니다.

그래서 뭐라고 하는가 하면 ‘뭔가를 섬긴다.’고 했어요. 하나님을 섬기지 않으면 돈을 섬기게 되어 있지요. 돈을 안 섬기면 하나님을 섬기게 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우리 주변에 하나님 아니면 생존(이건 마귀죠). ‘스스로 살아갈 것인가, 하나님이 길러 주시는가?’ 하는 그 문제입니다.

마태복음 6장 24절에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라고 해서, 여기에 ‘섬김’이 나오지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그러면 어떻게 하란 말인가? 26절에 보면 “공중의 새를 보라.” 새는 하나님을 섬깁니까, 돈을 섬깁니까? 새를 보고 ‘하나님 섬겨라.’ 이런 소리 안 하지요. 오히려 새를 누가 기르시는가? 하나님이 친히 기르시잖아요. 마태복음 10장 31절에 나오지요. ‘참새보다 더 귀한 것이 너희들이다.’

하나님이 친히 기르신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성도 주위에 누가 계십니까? 하나님이 계신데, 그러면 돈을 사랑하지만 결국은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돈을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 ‘이런 나 같은 인간을 구원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라고 하면서 하나님을 섬기게 되어 있지요.

태아가 어머니 뱃속 양수 안에 있는 것처럼, 금붕어가 물속에 들어 있는 것처럼, 나를 바꾸려고 하지 말고 내가 예수 안에 있다는 사실을 깨달으면 직장이나 가정이나 어디 가서라도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습니다.

자꾸 내 영역을 넓히려 하지 마시고, 안 넓혀도 돼요. 금붕어 헤엄 잘 친다고 주인이 더 좋은 어항 안 사 줍니다. 그냥 물속에 있으면 된 것이지, 우리가 하나님 안에 있으면 됐지 뭘 이 세상에서 빛나야 되고, 공부 잘해야 되고, 돈 잘 벌어야 되고 그럴 필요 없습니다. 그래봐야 하나님이 훌륭하다고 칭찬 안 합니다.

저는 주머니 속에 있는 먼지가 행복하다고 봅니다. 주머니 속의 먼지는 나갈 일이 없잖아요. 항상 주인이 가면 같이 따라가니까. 우리가 주머니 속의 먼지처럼 그렇게 살아가면 됩니다.

“돈을 사랑하는 것이 일만 악의 뿌리다.”는 말씀을 보고, ‘그러면 목사님, 우리는 돈을 사랑하지 말아야 합니까?’ 라고 묻는데, 궁극적으로 성도는 돈을 사랑해요. 하지만 그것보다 더 높게 근본적으로 하나님을 돈보다 더 우선적으로 사랑하게 되어 있습니다.

돈만 사랑한다는 것은 결국 돈과 관련된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세계가 아니라는 점에서 돈을 사랑하는 겁니다. 그래서 돈을 사랑하는 것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된다는 것입니다.

‘믿음에서 떠난다.’는 것은, 그 당시 교회 상황에서 하나님을 믿는 척했는데 하나님께서 기어이 자기 백성 아닌 사람을 골라내신다는 것입니다. 이런 말씀을 전하면 삐쳐서 교회 안 나옵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은 성공하신 거예요. “어디 감히 네가 천국을 와!” 하면서 추방을 시키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이 말씀에 대해서 신자는 ‘감사합니다. 돈을 사랑하는 것이 일만 악의 뿌리가 맞군요.’ 라고 고백하게 되는 거예요. ‘뭐가 나쁩니까?’ 하고 대들다가는 믿음 없다는 소리 들을 것이 뻔하지요.

이 뒷부분은 어떤 의미에서 상당히 쉬워요. 원리만 알면 쉽습니다. 이것을 지키려고 하니까 힘든 거예요. 돈을 사랑하지 말라고 하니까 ‘돈을 몽땅 교회 헌금해야 합니까? 돈벌이 나가지 말고 기도만 할까요?’ 등등 온갖 되도 않은 생각을 다 하고 있어요. 자기 주인만 바꾸면 됩니다. 마음껏 돈 사랑하세요. 그리고 그것이 죄인 줄 아시기 바랍니다.

다음 11절에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 이 대목을 설명하기 위해서 디모데후서 2장 26절을 보겠습니다. “저희로 깨어 마귀의 올무에서 벗어나 하나님께 사로잡힌바 되어” 여기 ‘하나님께 사로잡힌바 되어’라고 했는데, 하나님의 구원 기준이 바로 이것입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너 하나님의 사람아!’ 아, 멋있잖아요? 엄청난 이야기 아닙니까?

11절을 계속 보겠습니다. “이것을 피하고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좇으며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이것은 결국 하나님께서 우리를 싸움꾼으로 만들어 내신다는 겁니다. “영생을 취하라.” 취하게 만들어 내십니다. ‘취하라’는 이 명령이 반갑게 다가오는 사람이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아니면 하나님의 말씀을 밀어내지요. 말씀 자체를 영 마음에 안 든다고 하고 밀어내겠지요.

그러나 말씀이 우리에게 꽂히면 말씀과 더불어 그 말씀의 능력이 우리한테 폭발해 버립니다. 벌써 우리는 싸움에 돌입한 것이지요.

“이를 위하서 네가 부르심을 입었고 많은 증인 앞에서 선한 증거를 증거하였도다. 만물을 살게 하신 하나님 앞과 본디오 빌라도를 항하여 선한 증거로 증거하신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내가 너희를 명하노니”

왜 사도바울이 그냥 명하지 않고 하나님과 예수님을 거론합니까? 그것은 바울이 만들어낸 사람이 아니고 예수님의 용서와 하나님의 창조에 의해 만들어진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이들이 바로 ‘하나님의 사람’이지요.

그러니까 이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의 뜻이 말씀을 통해서 꽂히게 되어 있습니다. 진짜 하나님의 사람은 이것이 그대로 꽂히지요. 꽂혀서 이 말씀대로 이루어지게 하지요. “아하, 이것은 내가 할 일이 아니구나.” 하는 고백과 함께. ‘하나님께서 나를 이렇게 인도하시는 구나’ 하는 것을 수용하고 믿게 되어 있지요.

‘돈을 사랑하지 않고, 침륜에 빠지지 않고, 영생을 위해 선한 싸움을 하게 하시는 구나.’ 이렇게 고백하란 말이지요.

만약 불신자 남편과 한바탕 싸울 때 ‘아하, 이 싸움도 하나님께서 하게 하셨구나.’ 라고 이해하면 되지요. 그렇지 않고 “하나님이여, 저는 나름대로 열심히 하려고 했는데 도저히 신앙생활 더 이상은 못하겠습니다.” 자아가 이 말씀 지키려 하다가 실패를 하지요. 그래서 나중에는 하나님 욕하고 ‘내 신앙생활 못하게 한 것은 하나님이지 내가 아니다.’ 이런 식으로 핑계를 대겠지요.

14절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나타나실 때까지 점도 없고 책망 받을 것도 없이 이 명령을 지키라.”

느긋하게 이 말씀을 봐야 돼요. 느긋하게 이 말씀을 보기까지 얼마나 많은 이단들에 의해서 이 말씀이 여러분에게 무거운 짐이 되었습니까? 목사라는 이단들에 의해서, 목사 자신도 못 지키면서 교인들에게 지키라고 강요하지요. 자기도 돈을 사랑해서 월급 올려달라고 난리를 칩니다. 자기도 지키지 못하는 것을 교인들에게 압박을 가해서 ‘하나님의 사람’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사람’을 만들어요.

“이 명령을 지키라.” 고 했는데, 이 말씀을 간수합니다. ‘나는 이 말씀 못 들었어. 이런 말씀은 아는바 없어.’ 이러지 말자는 거지요. “나는 그 말씀 늘 듣는다. ‘돈을 사랑하는 것이 일만 악의 뿌리다.’는 말씀이 늘 내 속에 상주해.” 그게 바로 지키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 믿는 사람은 어떤 사태가 오게 되면 제일먼저 성경 구절이 생각나요. 어떤 일을 처리할 때. 그 말씀을 지키지는 못하지만 생각이 나요. 이처럼 성경 말씀이 생각난다는 자체가 이미 하나님의 사람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자기 힘으로 말씀을 지키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 스스로가 이 말씀대로 지켜질 때 모든 공로를 주께 돌리는 겁니다. 베드로전서 4장 11절에 나오지요? ‘네가 무슨 일을 하던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같이 하라.’

‘마지막 심판 받을 때 책망 받을 것이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키우셨기 때문이지요. 깨끗하잖아요. 나에게 ‘돈을 사랑하는 것이 일만 악의 뿌리’라고 알려주신 주님의 사랑이, 돈 사랑하는 그 순간에 그것이 덮쳐오니까 주님의 사랑에 압도당합니다. 그렇게 되면 흠도 티도 있을 수 없습니다.

항상 우리로 하여금 죄인의 자리에, 주님 없이는 못산다는 그 자리를 유지케 하시는 것이 바로 하나님 말씀으로 유지케 하시는 겁니다. 만약 이런 말씀이 없으면 우리는 자꾸 자기 위주로 나설 수밖에 없어요.

부자 되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데 그럴 때마다 ‘아하, 그것이 잘못이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하시는 주님의 사랑을 증거하지요. 그 대표적인 사람이 사도바울 아닙니까. “나는 죄인 중의 괴수다(딤전1:15).” 그래서 “사도라 칭함을 받기에 감당치 못할 자다.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다(고전15:10).” 이 모습이 흠도 없고 티도 없는, 그야말로 하나님께서 명하신 것이 살아있는 사람이 되겠지요.

15절에 “기약이 이르면 하나님이 그의 나타나심을 보이시리니 하나님은 복되시고 홀로 한 분이신 능하신 자이며 만왕의 왕이시며 만주의 주시오”

여기서 ‘나타나심’이란 대목을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나타나신다는 것은 세상의 모든 끊어진 것들, 부분적으로 다 흩어진 것들, 앞뒤가 정리 안 된 것들이 합쳐져서 되는 것이 아니라 ‘나타나심’으로 이런 것들이 의미가 없어져 버립니다.

만약에 “오늘 이근호 목사님과 성경공부 하는 날인데 옷은 뭘 입고, 구두는 뭘 신고, 머리 모양은 어떻게 하고 --” 하면서 온갖 생각을 다 했는데, 막상 나타나니까 그 모든 생각이 사라져 버립니다. 그런 것이 관심사가 아니지요.

나타나기 전까지는 부분 부분을 통해서 조합해서 구체화 시킵니다. 마치 코끼리를 부분부분 만져서 그것을 조립해서 그것으로 그림을 그리다가 진짜 코끼리가 나타나면 ‘어머나!’ 하고 바라보지, 그동안 자기가 부분적으로 알았던 것을 조립하고 이런 것들은 다 잊게 되지요.

그래서 ‘나타나심’은 모든 것을 몽땅 잊어버리게 되는 순간입니다. 이 땅에서 내가 뭘 하며, 어떻게 살고-- 등등의 것을 심각하게 생각하고 의미를 부여하고 죽니 사니 했는데, 막상 그분이 나타나니까 이런 문제는 문젯거리도 안 돼요. 속상하고 힘들고 어렵고 이런 것들이 막상 주님이 나타나니까 ‘그런 일이 있었나?’ 할 정도로 꿈에 본 듯 잊어버립니다. 시편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와요. 하룻밤 꿈처럼.

여러분, 꿈에서 깨어나면 어떻습니까? 깨고 나면 그 꿈을 다시 기억하고 싶지 않아요. 왜? 현실이 있는데 쓸데없이 다시 꿈으로 돌아갈 일이 없지요. 이처럼 예수님께서 나타나시면, ‘우리가 예수를 잘 믿어야 할 텐데’ 하면서 조마조마하고 걱정했던 모든 일들이 일순간에 다 헛된 생각이었던 거지요.

그러나 예수님이 나타나지 않은 사람은 지금도 돈 때문에 근심에 잠기고 불평과 원망으로 살아가는데, 막상 예수님이 나타나면 그런 것은 문젯거리도 되지 않습니다. ‘내가 몇 년 더 사는가? 내가 목사 일을 얼마나 더 오래 할 것인가? 아직 내 몸이 병들면 안 되는데’ 하는 걱정조차도 다 쓸데없는 것이 돼요.

연애 시절에는 ‘내 옷차림을 보고 그분이 어떻게 반응할까? 내가 화장을 너무 진하게 했나? 혹시 점심 때 마늘을 먹었는데 입 냄새는 안 날까?’ 등등 온갖 것들을 다 염려했는데, 막상 그분이 오시면 그분이 왔다는 그 현존의 환희와 감격 때문에 이전의 생각들을 다 잊게 되지요. 그런데 만약에 그분 앞에서도 자기 옷차림을 생각한다면 이것은 아직도 자아에 얽매인 사람입니다.

그래서 설교 할 때 제일 좋은 설교는 교인들이 설교시간에 자아를 못 느낄 정도가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되려면 주님의 현존, ‘말씀 속에서 역사하시는 주님이 여기 계십니다.’ 라고 알려주고 그것을 분명히 해 줄 수 있는 그런 설교가 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되려면 목사 본인이 남을 가르치려 하지 말고 주님을 소개하는 식으로 하면 최고입니다. ‘주님 여기 계십니다. 그분이 해같이 빛나고 있지 않습니까.’ 이런 식으로 해야 되지, ‘오늘 오랜만에 교회 나온 분이 있는데 저분을 잘 설득해서 교회 잘 출석하도록 해야지. 저분은 내 설교에 은혜를 못 받는데 오늘은 꼭 은혜 받도록 해야지’ 이런데 신경을 쓰면, 목사 자아가 너무 강해지고 교인들은 예수님 만나려고 나왔다가 목사의 자기변명과 자기 정당성만 잔뜩 듣고 가면서 “그래 너 잘났다.” 이렇게 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자기를 부인하라.”고 하셨지요. 그렇기 때문에 부모가 자식 앞에서 신앙의 모범을 보인다는 것이 참 힘들어요. 잘못하면 자식의 눈에 엄마, 아빠가 자기의 존재를 부각시키는 것으로 비쳐지고, 예수님은 뒷전으로 밀려나고 그런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살아 계시다는 자체를 기뻐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피]라는 책에 보면, 몇 가지 예가 나와 있지요. ‘어떤 사람이 졸음 운전해서 사람을 죽여 교도소에 갔다. 그래도 주님 계시기에 감사했다. 어떤 사람은 나무를 자르다가 다쳐서 반신불수가 되었는데 그래도 주님 살아 계시기에 기뻐했다.’ 주님이 계시기 때문에 나에게서 일어나는 일은 아무 문젯거리도 아니다. 그 이야기를 지금 사도바울이 하고 있는 거예요.

때가 이르면 누가 나타난다? “그의 나타나심을 보이시리니” 그런데 있는지 없는지, 진짜 예수님이 부활했는지 안 했는지, 뭔가 근심되고 불안정하고 우왕좌왕하든 것이 막상 나타나니까 “아이고, 주님은 복되시고 능하신 분입니다.” 라고 예수님이 흠뻑 빠져버릴 때에 “만왕의 왕이시며 만주의 주십니다.”

정말 이런 고백을 하려면 집구석에 시시한 일들은 다 문젯거리도 안 되고, 쉽게 말해서 문제 자체가 없어요. 성경말씀은 우리가 실패했다는 것 자체가 용납이 안 됩니다. 문젯거리가 없어요.

어떤 드라마를 보니까, 아가씨가 유럽에 공부하러 간다고 사랑하는 남자를 버리고 공항으로 떠나요. 공항에서 출국 수속을 하고 있는데 남자가 뒤따라 와서 만나는데, 만나서 하는 이야기가 ‘나랑 다시 결합하자.’ 그런데 여자의 대답은 ‘나는 과거는 다 잊고 싶다.’고 해요.

자아는 과거가 누적되어 형성된 것이기 때문에 자아가 남아 있으면 절대 과거를 잊을 수 없어요. 그런데 그 여자가 과거를 잊을 수 있는 경우는 한 경우 뿐입니다. 옛날 남자보다 더 멋있고 마음에 드는 남자가 있어서 자아를 잊을 정도로 푹 빠지면 자동적으로 과거에 있었던 시시한 남자는 다 잊어버립니다.

그런데 그 여자는 그것도 아니고 공부하러 떠나면서 ‘나는 이제 과거는 다 잊겠다.’고 하는데 안 됩니다. 어딘가에 완전히 빠지지 않는 한 과거는 자기를 괴롭히게 되어 있습니다.

15-16절에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시요 오직 그에게만 죽지 아니함이 있고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시고 아무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도 없는 자시니 그에게 존귀와 영원한 능력을 돌릴지어다. 아멘.”

완전히 사도바울은 지금 도취에 빠졌습니다. 주님이 좋아서 어쩔 줄 몰라요. 그러니까 이런 분위기에, 앞에서 이야기한 ‘먹는 것, 입는 것으로 족한 줄 알고. 돈을 사랑할 필요도 없고’ 이것이 가능하단 말입니다.

아까 김00 집사님이 시간론이 어렵다고 하셨는데, 항상 미래의 것이 미리 와서(엄청난 숭고함과 위대함이 오게 되면), 과거로부터 누적된 나를 잊어버리고 미래에 납치되어 끌려가듯이 간단 말입니다. 예전이 이런 이야기했지요?

그 다음 17절에 “네가 이 세대에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부한 자들의 마음이 높아지는 이유가 뭡니까? 본인 스스로 높아지는 겁니까, 남들이 높입니까? 남들이 좋아해서 높아지는 거예요. 정용섭씨에 대해 올린 글에 제가 리플 단것 봤지요?

‘남이 똥 좋아한다고 더 큰 똥 얻으려 한다.’고 했어요. 그것이 더러운 것인지 좋은 것인지도 모르고 무조건 많으면 좋은 줄 알고, 그것이 독약인지 극약인지도 모르고 퍼마시는 거예요. 남들이 마시니까 그것이 좋은 줄 알고.

고등학생이나 젊은 사람들이 왜 술을 배우는지 압니까? 본인이 객관적으로 무인도에 와서 술을 먹어보세요. 쓰고 맛없어요. 3살, 7살 아이가 술 좋아하는 것 봤습니까? 안 좋아하지요. 그것이 정직한 거예요. 이 아이들은 사이다, 콜라 맛을 좋아해요. 나는 아직도 사이다 좋아하는데 앤가? 그 아이들 소주 줘 보세요. 싫어합니다.

그런데 청소년들은 소주를 왜 마십니까? 남들이 먹고 좋아들 하니까 뭔가 내가 못하는 것이 남아 있다는 것이 용서가 안 돼요. 그래서 뭐든지 다 해보고 싶어요. 그래서 술을 마시고, 약간 취하면 일시적으로 기분이 좋지요. 하지만 술을 마셔서 기분 좋은 것보다 술 마신 이후 두통과 토하는 것과 술 취해서 말을 함부로 한 것과 부끄럼도 모르고 길에서 소변 본 것과 --- 술 마신 후에 트림을 해 보세요. 자기 입 냄새 자기가 역겨워 못 맡을 지경입니다.

자아를 잊기 위해 술을 마시는데, 술 깨고 나면 술 마신 과거가 그대로 남아있어서 머리가 띵하게 아파요. 그래서 ‘컨디션’을 마시는데 그래도 머리 아파요. 남들이 부러워하니까 남들의 욕망이 내 속에 들어와서 나도 남들처럼 되고 싶어서 한 거예요.

부자가 왜 마음을 높이느냐 하면, 부자가 가는 곳마다 주위 사람들이 굽실거리니까 그것을 다 부러워하는 거예요.

“이 세대에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생각해 보세요. 재물에 소망이 없는 인간이 부자 될 리가 있습니까? 그리고 진짜 재물에 소망이 없는데 돈이 많은 사람은, 돈이 많은 사람이지 부자가 아닙니다. 돈이 많지만 옛날 돈 없을 때의 생활을 그대로 유지하는 사람은, 돈이 많은 사람이지 부자가 아닙니다.

부자는 돈이 많은 것만이 아니라, 돈도 많지만 돈 많은 사람의 티를 내는 사람이 부자입니다. 이런 부자가 스스로 마음을 낮춘다? 미쳤습니까. 마음을 낮추게. 나는 아무리 봐도 프라이드와 벤츠의 차이점을 모르겠어요. 차이는 있어요. 하지만 돈 값만큼 차이가 나는가에 대해서는 저는 아직 의심을 갖고 있습니다. 오디오 잘 나오고, 승차감 좋고 그런 것은 다 좋은데, 그만큼 돈 값을 합니까?

명품 옷은 좋아요. 하지만 그것이 값만큼 좋습니까? 아무리 명품이라도 그 옷 원가 얼마나 합니까? 과연 그 값만큼 되냔 말이지요. 나는 도저히 그것을 못 믿겠어요. 이것이 부르디외(프랑스 사회학자)의 ‘상징 가치’라고 하는데, 사람들이 명품을 소비하기 원하니까 그 원하는 것이 경쟁이 붙어서, 터무니없는 프리미엄이 붙어서 상징 가격으로 5만 원 짜리를 50만원 받는 거예요. ‘나는 이런 것을 소유할 만한 인간이다.’ 라는 그 값이 명품에 매겨져 있는 것입니다.

고급식당은 음식 값이 굉장히 비쌉니다. 대신 서비스가 정말 좋습니다. ‘서비스’는 추상적인 것이지요. 허름한 식당에서 서비스 없습니까? 서비스가 별것입니까. 음식 갖다 주는 것이 서비스지. 바이올린 키고, 피아노 연주하는 그 값을 아무리 넉넉히 계산해도 그런 터무니없는 음식 값이 나옵니까? 이것이 상징 가격입니다.

마르크스는 교환가치, 사용가치를 말했는데, 자본주의는 이것에다 명품 값, 상징 가치를 붙인 거예요. 아파트고, 차고, 물건이고 다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 마음을 낮출 수가 없어요. 마음을 낮추면 명품을 사지를 않지요.

17절에, 재물 앞에 뭐가 붙어 있지요? ‘정함이 없는’ 이 구절 사업 실패한 사람은 절실히 느낄 거예요. 돈이 항상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배용준이 연예인 중 제일 재산이 많았는데 이번 금융위기 때문에 2등으로 밀렸어요. 가진 주식이 반값이 되어서. 박진영한테 밀렸다고. 주식이 잘못하면 깡통이 된다고.

제 고등학교 동기 중 한 친구가 한때 엄청난 부자였습니다. ‘야후’ 한국회장이라. 재산이 몇 천억이라고 했어요. 지금은 다 날아가고 얼마 안 남았어요. 주식이나 펀드는 돈이 아니에요. 그것을 팔아야 돈이 되지. 정함이 없는 거예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며, 선한 일을 행하고 선한 사업에 부하고, 나눠주기를 좋아하며 동정하는 자가 되게 하라. 이것이 장래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아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이니라.”

여기에서 ‘자기’는 누구 자기입니까? 홀로 있는 ‘자기’가 아니고, 만왕의 왕이요 만유의 주님이 함께 있는 그 성도에게는 참된 생명이 깔려 있다는 것입니다.

이제 마지막 부분입니다.

20절에 “디모데야 네게 부탁한 것을 지키고 거짓되이 일컫는 지식의 망령되고 허한 말과 변론을 피하라.”

제가 이런 소리하면 ‘이 목사는 강의하면서 꼭 부정적인 소리를 한다.’고 하는데, 원래 성경은 부정적인 것을 썩을 수밖에 없어요. 왜냐? 선한 싸움을 해야 되니까.

21절에 “이것을 좇는 사람들이 있어 믿음에서 벗어났느니라. 은혜가 너희와 함께 있을 지어다.”

그러니까 여기에서 “은혜가 너희와 함께 있을 지어다.”라는 것은, 사도바울은 누구인지 모르지요. 바울은 그냥 편지만 전할 뿐이고 여기에 대해서 ‘이것은 나에게 하는 소리네.’ 하고 받아들이면 그 사람은 신자고, 자아가 이것을 극구 거부한다면 그 사람은 이 편지 받고도 불신자가 되는 거지요.

그런 의미에서 목사나 성도는 남 구원할 책임은 없어요. 그게 참 좋아요. 또 책임진다고 구원 받는 것도 아니고.

이제 정리를 해 봅시다. 오늘 본문을 보게 되면, 복음이라는 것은 이 말씀 자체가 우리 속에 침투해서 푹푹 수십니다. 그러면 성도는 어떤 반응을 보이는가 하면, 말씀을 들어도 잊어버려요. 잊었다가 뭔가 계기가 되면 ‘아하, 만왕의 왕이 계시는데 내가 쓸데없는 걱정 했구나. 돈을 사랑하는 것은 일만 악의 뿌리지. 맞아. 돈에 울고 웃는 이것은 아니야.’ 이런 것이 불쑥불쑥 생겨나는데, 이것은 내가 생각해서 생겨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이렇게 생겨나게 하는 대상이 되는 것.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람(6:11 “하나님의 사람아!”)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성도가 어떤 사람인지를 이제 알았습니다. 이것을 하고, 저것을 안 하고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특별 관리 대상이 되어서 말씀이 우리 속에서 폭발하면서 말씀이 이런 뜻이라는 것을 남들에게 증거하기 위해서 태어난 자가 저희들인 줄 압니다. 이제 이 말씀을 우리의 생명보다 더 귀하게 여기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다음 시간에는 디모데후서 하겠습니다.

(2008. 12. 19. 11:28 녹취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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