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1205b 울산강의-창세기42장
20081205b 울산강의-창세기42장
이름 : 한윤범(IP:59.6.189.223)
20081205b 울산강의-창세기42장
(강의:이근호 목사)
창세기 42장 24절 누구 한번 읽어보세요. “요셉이 그들을 떠나가서 울고 다시 돌아와서 그들과 말하다가 그들 중에서 시므온을 취하여 그들의 목전에서 결박하고” 됐습니다. 지금 요셉이 장난삼아서 즐기듯이 하는 게 아니고, 요셉도 가슴 아파서 웁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할 때 예수님도 울었다는 사실을 우린 알아야 돼요.
그런데 예수님 울었다는 사실을 모르고 우리는 자꾸 무슨 이야기만 하느냐 하면, 42장 28절을 누가 읽어보세요. “그가 그 형제에 고하되 내 돈을 도로 넣었도다 보라 자루 속에 있도다 이에 그들이 혼이 나서떨며 서로 돌아보며 말하되 하나님이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 일을 행하셨는고” 하고 하나님 앞에 원망하고 탄식하고 있다. 지금 요셉은 울고 있고 형들은 너무 난처하고 난감한 상태에서 당황하고 이렇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극구 부인하죠. ‘우리는 정탐꾼이 아닙니다. 우리는 독실한 자요, 진실한 자요. 절대로 우리는 스파이가 아닙니다.’ 이렇게 하는데 그러면 그럴수록 더욱더 요셉은 그들을 궁지에 몰아넣지요. 궁지에 몰아넣으면서 요셉은 또 요셉대로 울고 있고. 사람을 구원한다는 것, 참 이게 하나님 보시기에도 중요시 되고, 참 소중한 일이라서 주님도 전심전력을 다하여 우리를 구원하려고 그렇게 합니다.
이렇게 해서 43장에 넘어가게 되면 거기에 보면 ‘죽는다’는 이야기가 숱하게 터져 나오지요. ‘만약에 우리가 안 가면 죽습니다.’ 아버지가 있다가 ‘내 애 데려가면 내가 죽는다. 걔와 내 생명은 하나로 연결돼있다. 걔의 죽음은 나의 죽음이다.’ ‘압니다. 하지만 우리가 또 가야 다같이 살 수 있습니다. 만약에 가지 않으면 지금 우리가 다 죽습니다.’
여기 43장 8절에 제가 읽어볼게요. “유다가 아비 이스라엘에게 이르되 저 아이를 나와 함께 보내시면 우리가 곧 가리니 그러면 우리와 아버지와 우리 어린 것들이 다 살고 죽지 아니하리이다 내가 그의 몸을 담보하오리니 아버지께서 내 손에 그를 물으소서 내가 만일 그를 아버지께 데려다가 아버지 앞에 두지 아니하면 내가 영원히 죄를 지리이다” ‘나중에 내 애를 죽여 버리소서.’ 또 14절에 보면, “베냐민을 돌려보내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내가 자식을 잃게 되면 잃으리로다” 뭐, 극단적으로 궁지에 몰아넣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될 것은 요셉의 형들이 여전히 관심사가 어디 있느냐 하면, 하나님의 뜻에 있는 게 아니고 역시 자기한테 있습니다. 자기 사는 것, 자기 역사죠. 지금까지 살아온 역사대로 어떻게 하면 내 운명이 우리의 운명이 평탄할까, 자기 운명에 관심 있어요.
그런데 요셉이 궁지에 몰아넣는 이유가, 형들이 아직도 자기한테 희망에 기대 거는 마지막 그것 내놓을 때까지 그것마저 작살날 때까지 계속해서 궁지로 몰아넣어요. 그래서 순서가 어떻게 되느냐 하면, 여러분 잘 아시다시피 일단 처음에 왔을 때 시므온을 볼모로 잡지요. ‘막내 동생 데려오지 않으면 너희들 하는 말이 전부다 거짓말로 간주하겠다. 데려와. 데려오면 내가 눈으로 보고 시므온도 살려주고 동생 살려 줄 테니까. 데려와.’
근데 그들이 가서 아버지를 설득하지요. ‘아버지 가야 합니다.’ ‘못 간다. 요셉 죽고 시므온도 없는데 마지막 아이 못한다.’ 그러다가 버티다 양식 다 떨어지고 나니까 유다가 나서서 ‘아버지, 정 안 돌아오거든 제 자식 죽여 버리소서.’ 베냐민도 그렇게 이야기하고. ‘내 애를 담보로 잡으소서. 가야 됩니다. 만약에 베냐민 안 돌아오거든 내 애를 죽이소서. 가야 됩니다.’
그래 베냐민을 보냈지요. 보내고 난 뒤에 사실은 우리가 이런 사람이 아니고 왔습니다. 이렇게 하고 나니까 요셉이 어지간하면 용납해주고 내가 그 옛날 요셉입니다. 이러면 될 텐데 아직까지 누가 안 왔느냐 하면 아버지가 오지 않은 거예요. 그래서 아버지마저 절망에 빠뜨려야 돼요. 아버지만의 자기 자리가 완전히 작살나야 됩니다.
요셉이 말하기를 돌려보내면서 베냐민 짐에다가 점치는 술잔을 숨겨놓고 ‘너희들이 과연 도둑놈 맞구나. 감히 하나님께 점치는 기구를 훔치다니.’ 신성과 관련돼있지요. ‘아닙니다. 우리 중에 그럴 사람 없는데요.’ ‘조사해 볼까?’ 조사해보니까 베냐민 자루에 나왔습니다. 이때 형들의 마음가짐이 어떻겠는가?
여기 44장 베냐민을 특별히 다 해주고 그 다음에 떠납니다. 보낼 때 양식을 줘야 먹고 사니까 가면서 16절에 보면, “유다가 가로되 우리가 내 주께 무슨 말을 하오리이까 무슨 설명을 하오리이까 어떻게 우리의 정직을 나타내리이까 하나님이 종들의 죄악을 적발하셨으니 우리와 이 잔이 발견된 자가 다 내 주의 종이 되겠나이다”
그건 뭐냐 하면, ‘이건 하나님 뜻입니다. 우리가 종 되는 게 마땅합니다. 하나님 뜻이 분명합니다’라고 하니까 요셉이 하는 말이, ‘모든 사람이 종될 필요 없이 베냐민만 종으로 삼겠다’라고 나오죠. 그럴 때 유다가 나서서 하는 말이 ‘그러며 고향에 있는 아버지가 죽습니다. 아버지가 우리한테 이런 말을 했습니다. 만약에 베냐민을 내 앞에 데려오지 않으면 죽겠다 했습니다.’
여기 30절에 보면, “아비의 생명과 아이의 생명이 서로 결탁되었거늘 이제 내가 주의 종 우리 아비에게 돌아갈 때에 아이가 우리와 함께 하지 아니하면 아비가 아이의 없음을 보고 죽으리니” 그렇게 돼있습니다.
여기서 신약성경 마태복음 6장입니까? 거기 보면 나와 있어요. 마태복음 5장에 있지요. “네 보물이 있는 곳에 네 마음이 있다” 하는 말씀이 나오지요. 네 보물이 어디 있느냐?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거든요. ‘네가 최종적으로 마음 가는 곳이 어디냐? 거기에 네 보물이 눈에 띨 것이다.’
지금 요셉 빼놓고 요셉의 형들과 아버지가 가장 중요시 하는 것이 무엇인가가 드디어 발각 되었지요. 사실 요셉이 그걸 알고 싶었고. 그게 뭐냐 하면, 베냐민이었습니다. 그런데 요셉이 누굴 가장 보고 싶어 하느냐 하면, 베냐민이 잘 있는가가 보고 싶어 하는 거예요. 왜냐하면 형들이 자기를 미워했으니까.
그러니까 묵시세계 말고 역사세계에서 확인하는 방법이 뭐냐 하면, 네 마음이 가는 곳에 네 보물이 가 있다. 그러니 현장에선 아버지나 요셉이나 요셉의 형들이나 보물이 누구였습니까? 베냐민지요. 베냐민이 보물이니까 요셉은 자기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뜻을 전하기 위해서 그들이 마지막 마음이 간 이 베냐민을 없애버리면 그들은 더 이상 그들이 믿을 것도 없고, 사랑할 것도 없고 그들은 뭘 느낍니까? 나오는 본문을 두 자로 줄이면 그들은 뭐하리라? 드디어 그렇데 도달 될 수 없었던 ‘죽음’에 도달되는 거예요.
다른 나라에서는 돈 받고 양식 팔면 그만이어요. 그런데 요셉은 다른 나라 말고 자기 가족에게는 돈 받고 양식 내 주고 그렇지 않습니다. ‘아버지 잘 계세요. 내 동생 잘 있지요. 형들 잘 계셨습니까? 제가 요셉입니다. 아이고, 놀랬죠. 내가 총리되니까 마음껏 양식사시고 편하게 사세요.’ 우리가 생각하는 이것이 영웅설화, 이게 보통 영웅인데 기어이 그들로 무엇에 이르게 합니까? ‘난 이거 없으면 죽는다.’ 말로만 했던 그 죽음에 드디어 도달되게 합니다.
그리고 이 죽음에 누가 동참합니까? 요셉이 통곡하면서 울면서 동참하지요. 죽음을 두고서 베냐민이 죽었다는 이 사실을 놓고서 아버지도 죽고, 형들의 자식도 죽고, 형들도 죽고, 베냐민 죽었으니까 요셉 본인도 죽고 그 죽음 안에서 전부다가 모였을 때 비로소 그들은 가까이 할 수 없었던 그들이 죽음이라는 매개를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접촉하는 계기를 마련한 겁니다.
여기 요셉 우는 장면 봅시다. 45장 1절. “요셉이 시종하는 자들 앞에서 자기 정을 억제하지 못하여 소리 질러 모든 사람을 자기에게서 물러가라 하고” 스텝진들이죠. 보내버리고 요셉이 방성대곡하지요. 크게 울잖아요. 지가 왜 웁니까? 실컷 약 올려놓고 울긴 왜 웁니까? 요셉이 왜 울어요?
요셉이 왜 우느냐 하면, 양식 먹어서 사는 게 아니고, 하나님께서 어떻게 자기 백성을 구원하는지를 어떻게 끊어져있던 역사적으로 해석하면, 서로 미워했던 형들이 하나님께서 조정에 나서서 아버지나 형이나 자기나 전부다 한 마음으로써 한 뜻이 된 그런 작업을 누가 했단 말입니까? 하나님께서 하신 것에 대해서 동조하면서 우는 겁니다.
45장 8절에 보면,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자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나로 바로의 아비를 삼으시며 그 온 집의 주를 삼으시며” 그렇게 한 이유가 뭡니까? 5절에 보면,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으므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이다” 생명을 구원하기 위해서 앞서 보냈다.
하나님은 생명을 구원하기 위해서 무슨 것을 경과하고 무슨 절차를 밟게 했습니까? 몽땅 죽음에 이르게 ‘죽음’이라는 테마, 죽음이라는 주제 안에서 모두다 여기 모여 있을 때 비로소 사람이 스스로 자기 힘으로 사는 생명 말고, 그런 생존 말고 진정 하나님이 주신 생명이 이 죽음마저 능가한다는 것을 깨닫게 하시는 그러한 일을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셔서 약속대로 우리를 구원하신다 이 말입니다.
결국 그들에게 알게 하신 건 뭐냐? 베냐민도 알게 한 것도 아니고, 베냐민은 이 상태로 멀줌하게 있어요. 베냐민은 사람들이 왜 울지, 안 가만있는데. 베냐민도 아무것도 아니고, 요셉도 아무것도 아니고, 야곱도 아무것도 아니에요. 하나님이 하는 말씀 속에서 말씀의 생명이 뭔가 보여주기 위해서 자기는 하나님의 말씀의 노리개 되었다는 것, 사용 매개체가 되었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움직이는 그러한 기능을 하는 기능자가 되었다는 거예요. 그게 바로 생명의 관계에요. 자립적으로 독립적으로 사는 것이 사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전파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뜻을 담아 보여주기 위해서 하나님과 맺어진 관계가 우리에게 생명이 된다 그런 이야기죠.
그러면 다시 해봅시다. 다시 해야 돼요. 중요해요. 하나님의 뜻, 미지, 모릅니다. 모르는데 시작은 누가 했습니까? 여호와께서 시작했지요. 무엇으로 시작했습니까? 꿈으로 했지요. 내려옵니다. 그 많은 형제들 가운데 누구한테 옵니까? 요셉에게 내려왔지요. 시편에 보니까 요셉이 하나님의 꿈을 꾼 것은 말씀을 이루기 위한 하나의 수단이었다. 요셉이 꿈대로 내려갑니다. 형들은 요셉을 버리지요. 다 지금 우리 이야기에요. 예수님과 우리 이야기하는 겁니다.
형들은 요셉을 버립니다. 왜 요셉을 버렸습니까? 역사적 자기 기준이 있지요. 요셉은 쓸데없는 미워 죽겠어. 요셉이 꿈을 꾸기 전에는 형들과 아버지는 뭐냐? 극히 인간적이에요. 우리하고 똑같아요. 형식이야 믿지. 과거에 아버지 계시 받는 것, 요셉이 어떻게 그거 다 알지요. 하나님 뜻에 의해서 우리 아버지가 변장해서 복 받은 것, 다 아는데 그건 성경지식이고, 그건 옛날에 알고 있는 동화책 이야기고. 지금 현실은 뭐냐? 미워 죽겠어. 이게 현실이에요.
자, 이 사람들이 형들과 아버지 현실은 뭐냐 하면, 현실은 외부에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고 내부에서 끄집어내는 거예요. 우리가 만든 현실은 뭐냐? 다 내부에 있는 나의 욕망이 떡칠을 한 거예요. 나의 환상과 상상이 떡칠을 해서 현실이 되는 겁니다.
제가 아까 이야기했잖아요. 이천에 불 난 것 남의 이야기라니까. 그런데 MBC 티비에 장보던 아내가 인터뷰한 그것은 현실이라니까. 그게 중요하죠. 이천에 여섯 명 죽던, 일곱 명 죽던 남의 이야기에요. 우리는 골라잡아요. 골라잡아서 나의 현실로 따로 꾸미는 거예요. 마치 소꿉놀이 같아. 영원한 소꿉놀이. 평생토록. 이게 우리 기준이에요. 계시, 꿈 다 이거는 나하고 관계없는 나한테 경험되지 않고 체험되지 않은 겁니다.
그래서 미워죽겠어. 그래서 팔아먹었어요. 어떤 사람이 나를 팔아먹었다. 요셉은 그걸 소급해서 해석합니다. 오늘 좀 어렵습니다. 형들이 나를 팔아먹었다는 것을 요셉은 감옥소 가서 뭐라 합니까? 하나님의 꿈이 나를 팔리게 했다. 해석이 다르잖아요.
이 사람은 뭡니까? 우리가 요셉을 팔아먹었구나. 맞습니까, 틀렸습니까? 자기 기준엔 맞지요. 뭐가 문제냐 하면, 하나님이 요셉 꿈에 의해서 소급해서 해석되는 그런 부분이 없다는 거예요. 이건 자기가 아는 것, 미워죽겠어. 내가 총으로 쏴버렸어. 내가 팔아먹었어. 이거는 자기 기준만 남아있는 거예요. 요셉도 억울해했지요. 하지만 꿈속에서 자기 간 것은 만사형통 하니까 하나님의 뜻이었구나. 소급해서 보니까.
제가 지난 오후예배 때 그런 이야기했지요. 강도가 강도짓 했어도 예수님이 소급해서 해석해버리니까 그게 전부다 뭡니까? 내가 나 된 것은 은혜가 돼버려요. 소급해서 한 해석이 있어야 돼요. 자, 거꾸로 소급해서 해석을 해보니까 하나님 은혜였단 말이죠.
그럼 요셉이 교도소에 있다가 다시 국무총리가 되는 것도 마찬가지로 뭡니까? 하나님의 은혜요, 하나님 뜻이다 이 말이죠. 뜻인데 자기가 국무총리 되는 것만 알았죠. 하지만 아직까지 뭘 몰랐습니까? 내가 앞서 보내진 것은 형들과 아버지를 살리기 위해서 한 것을 몰랐습니다. 몰랐는데 어느 날 보니까 형들이 자기 앞에 나타났거든요. 형들은 자기를 몰라봤다니까요.
몰라보니까 요셉은 내가 국무총리 되는 것은 영화 끝이 아니고 영화 아직 안 끝났어요. 영화 끝은 뭐냐? 내 뜻이 아니고 내게 주어진 아버지 뜻이 어디까지 뻗쳐나가느냐 하면, 나를 경유해서 아버지와 형들 구원하는 데까지, 형들은 소급한 뜻을 모르니까 내게 주어진 하나님의 뜻 해석이 형과 아버지 해석까지 이것이 확산되는데 나를 사용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아직도 형과 아버지는 자기 마음이 있는 곳에 뭐가 있다 했습니까? 전도사님? 마음이 있는 곳에 보물이 있다. 그러면 그 사람이 어떤 게 보물이라 하는 것은 제일 마음 씀씀이가 어디에 쏠리는가 그것만 찾아보면 될 것 아닙니까? 그게 뭐냐 하면, 베냐민이었어요.
그런데 형들은 베냐민을 별로 여기죠. 왜? 요셉처럼 미우니까. 아버지의 보물은 베냐민이고, 형들은 베냐민이 아니고 밥 먹고 사는 거니까. 형들로 하여금 어디에 합류하게 하느냐 하면, 아버지의 보물을 그들의 보물로 일치시키기 위해서 어떤 조작을 해서 ‘베냐민 잃어버리면 내 자식 죽이소’ 할 정도로 이젠 자기 자식보다 아버지 아픔과 아버지 사랑과 그 사랑 속에 뭐가 포함돼있습니까? 요셉을 잃어버렸다는 사랑. 형들은 요셉이 미워죽겠는데 철없이 행동했는데, 그 철없이 한 행동이 아버지를 그야말로 죽음에 몰아넣었다 하는 것을 그때 처음 알았어요. 아버지가 베냐민과 요셉을 그렇게 사랑했는지 몰랐어요. 저거들은 시원하다 그랬지요.
형들로 하여금 자기 자식도 담보로 낸 정도로 사태를 심각하게 만들어서 아버지가 좋아하는 베냐민을 기어이 내 아들 담보로 잡혀서 ‘아버지 걱정하지 마세요. 베냐민 지켜드리겠습니다. 베냐민 죽거든 내 아들 죽이소’ 할 정도로 베냐민에 합류해서 이것이 베냐민을 앞장세워서 한 가족 덩어리가 오니까 요셉은 베냐민을 어떻게 합니까? 제거해버리죠. 없애버리죠.
베냐민을 뭐로 만듭니까? 죽을 죄인인데 옛날에 죄인 중에서 제일 큰 죄인이 뭐냐 하면, 그 사람의 신을 모독하는 게 제일 큰 죄인이잖아요. 베냐민 자루 속에 뭐가 들어 있느냐 하면, 요셉이라는 국무총리가 점을 칠 때 그것 없으면 요셉이 행정을 못할 정도로 지혜가 없을 정도로 지혜 덩어리는 그 점치는 것에서 왔는데, 조작된 거예요. 요셉이 꾸며낸 거지만 옛날 그 당시 사람들이 다 그렇게 이해하니까 그걸 이용하는 거예요.
지금 하나님께서 이렇게 생각해요. 우리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 우리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 그걸 다 이용해요, 하나님께서. 지금 형들이 제일 두려워하는 것이 뭐냐 하면, 만일 들키고 난 뒤 가상한다면, ‘베냐민아, 제발 해주게. 국무총리의 볼펜이라든지, 국무총리의 슬리퍼라든지 그런 것 좀 나왔으면 좋겠다.’ 왜? 그러면 ‘아이고, 돈 좀 있는 사람이 슬리퍼 잃어버렸다고 그러겠습니까?’
‘제발 국무총리의 믿고 있는 성모 마리아상, 그것만은 손대지 마라. 그것 하면 죽이려고 할 것이다’라는 것을 염두에 둘 것이라고 예상해서 요셉은 뭘 집어넣어버립니까? 자기보다 더 높다고 생각하는 세상에 점치는 물건을 거기다 집어넣었습니다. 이거는 빼도 박도 못해. 빼도 박도 못하니까 결국 뭡니까? 죽음을 초래하지요. 이거는 죽어도 할 말 없습니다. 베냐민 죽으면 형들 자식 죽지요, 형 죽지요, 베냐민 죽었으니까 누구 죽습니까? 아버지 야곱 죽지요. 결국은 뭐냐? 몽땅 다 죽여 버리지요. 마음이 있는 곳에 보물이 있으니까 그 보물을 차단시키니까 다 죽여 버린 거예요.
이게 뭐냐? 아브라함이 가장 사랑하는 누굴 바칩니까? 이삭 죽을 때 누가 죽는다? 아브라함 죽어요. 그러면 이삭이 살아날 때 누가 살아난 거다? 아브라함이 진정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것을 깨닫게 되죠. 바로 이 방식을 하나님께서 사용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누굴 보냅니까? 하나님이 사랑하는 아들을 보내서 하나님이 사랑한다는 예수를 보지만 우리는 그 예수를 부담스러워 하잖아요. 예수를 믿기는 믿지만 부담스러워한다고요. 하지만 하나님한테는 그지없는 독생자 아들이에요. 하나님께서는 아들 없으면 영광을 안 받아요. 아들 이름을 통해서만 영광 받게 돼있어요. 하나님 마음 가는 곳에 보물이 있어. 그 보물이 누굽니까? 주 예수 그리스도. 모든 세상을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통일하려 하심이라. 이게 처음부터 계획이에요.
제가 이런 소리하니까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이근호 목사는 기독교 중심주의다, 예수 중심주의 신학이다. 이러고 있는데 하나님이 예수 중심주의 신학자에요. 하나님이 예수밖에 몰라요. 마치 아브라함이 이삭밖에 모르고, 야곱이 베냐민밖에 모르듯이. 이미 요셉은 죽었으니까.
이걸 통해서 하나님이 진정 사랑하는 아들은 ‘내 사랑하는 자요, 내 기뻐하는 자’ 누구밖에 없습니까? 예수님밖에 없지요. 변화산에서 그런 음성 들렸지. 요단강에서 세례 받을 때 내 사랑하는 기뻐하는 자,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주님께서는 예수밖에 모르는 그 예수를 자기 백성 살리기 위해서 죽음이라는 공통적인 공통분모, 죽음이라는 공통성을 죽음이라는 역사 속에 놔버렸어.
죽음이라는 역사 속에 내줘야 천국이 무한한 역사성을 가지게 돼있습니다. 말 표현이 어렵지요. 지금 역사 속에 있는 인간이 묵시로 못 가잖아요. 그러니까 묵시에 있는 것이 뭐로 변역돼야 됩니까? 묵시가 역사 속에 들어와야 되잖아요. 묵시가 역사 속에 들어오면 이거는 죽음으로만 들어온다 이 말이죠. 우리가 살았으니까 우리를 살게 해 달라. 그런 방식은 그런 묵시는 없어요. 그런 하나님 뜻은, 계시는 없습니다. 살아있는 인간은 자체로 살게 하는 그런 방법은 없고, 너희가 죽어서, 그냥 죽기만 해선 안 됩니다. 베드로가 뭐라 했습니까? 죽기까지 주를 쫓겠습니다 해도 소용없어요.
베드로 설교 가운데 제일 중요한 게 몰트만의 책에 나오는데 몰트만이 그거 하나 참 잘 봤어요. 예수님의 부활을 소생으로 보지 않습니다. 소생, 죽었다가 살아난 것으로 보지 않고 뭐냐 하면, 예수님의 부활을 이래 표현해 놨어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부활을 설명할 때는 반드시 테두리에 환경에 뭐가 있어야 돼요? ‘죽은 자들밖에 없나이다’가 확정돼야 비로소 예수만 부활 값을 하고 부활 될 수 있는 분이고, 다른 사람은 계속 죽은 채로 있어도 마땅하다.
왜? 하나님의 사랑하는 예수님만 부활하는 뜻이 하나님 뜻이기 때문에.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이에요. 예수님 혼자 죽었다 혼자 부활되는 게 아니고,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함으로 말미암아 첫 번째 뭐냐 하면, 부활을 설명하기 위해서 모든 사람은 죽어줘야 된다고.
영화에 그런 게 있잖아요. 주인공 하나 살기 위해서 나머지는 다 죽어야 돼요. 칼 이래도 죽고, 총 이래 쏴도 죽고, 엑스트라 다 죽어야 돼. 죽고 난 뒤에 부활 되신 분은 예수님밖에 없다. 그래야 사랑하는 아들이니까. 하나님은 예수 중심이니까.
두 번째는 뭐냐 하면 죽은 자들 가운데 부활이기 때문에 죽은 자들 가운데 누구를 건지고, 누구를 버리느냐 하는 권한은 누구한테 갔습니까? 부활하신 분의 권한으로 바뀌게 되었어요. 이게 요한복음 3장에서 5장에 나옵니다. 내가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 자를 내가 임의로 뽑을 수 있는 권한이 나한테 있다. 왜? 아버지께서 모든 심판을 누구한테 일임했다? 나에게 일임했다.
그래서 산 자는 뭐라 합니까? 자기 힘으로 산 것이 아니고 누구 이름으로? 자기 죽은 이름은 필요 없어요. 이근호는 죽은 이름이니까. 산 자의 이름은 뭡니까? 주 예수 이름 때문에 내가 살았습니다. 그래서 예수 이름을 믿습니다. 예수 이름에서 능력 나옵니다. ‘주님의 부활하신 능력 때문에 나는 살았습니다’라는 고백을 할 때 예수님과 이들은 한 통속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신자는 산 사람이 아닙니다.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산 사람이죠.
마음이 있는 곳에 보물이 있다 했습니다. 야곱의 마음이 베냐민인데 베냐민을 죽임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이 죽었어요. 요셉도 대성통곡 울었습니다. 자, 그런데 모든 사람이 죽었는데 잠시 티비 드라마 보다가 ‘아이고, 베냐민 자루 속에서 세상에 귀중한 것이, 이제 베냐민 죽었다.’ 그때 라면 타려고 해. 불 끄러 간 사이에 요셉하고 좋아서 웃고 있다고. 분명히 앞에 내용을 모르고 좋아하고 있단 말이죠.
요셉이 뭐라고 이야기하느냐 하면, ‘내가 앞선 것은 여러분의 생명을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앞서 보냈습니다’라고 한 거예요. 요셉을 예수님으로 바꿔봅시다. 예수님이 오신 것은 예수 믿는 자를 살리기 위해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거다. 그래서 예수님 말씀하기를 “내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한 것이 아니고 오히려 너희를 살리기 위해서 내가 대속물로 주려 하심이라.” 그래서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너라. 그러면 너희가 살 것이다. 부자는 그걸 반대해서 도망쳤어요. 돈이 아까워서 도망쳐버렸는데 그 사람은 마음이 돈에 가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마음이 어디 가 있습니까?
좀더 자세히 이야기하면 하나님은 얼마나 짓궂진 지 지금 여기까지 한 것 응용해봅시다. 요셉 형들에게 기근이 임했잖아요. 강의 처음에 사람들은 행복과 불행을 누가 판단한다? 행복한 상태와 불행한 상태를 자기가 하죠. 기근이 일어나니까 요셉 형들은 이걸 뭐로 봅니까? 불행한 상태로 봤죠. 불행한 상태가 되면 자기 기준에 의해서 불행한 상태니까 자기 기준에 의해서 이걸 무슨 상태로 바꾸어야 합니까? 행복한 기준으로 바꿔야 자기들이 여전히 살게 되겠죠. 불행한 상태를 행복한 기준으로 바꾸려고 할 때 이 시도하게 한 기근을 누가 주셨습니까? 하나님이 유발한 거죠.
지금 오늘날 저와 여러분에게 하나님이 어떻게 인도하느냐 하면, 우리가 평소에 ‘안 일어났으면 좋겠네’라는 그런 우리가 일방적으로 생각한 불행한 사태를 하나님 쪽에서 일으키면 우리는 본성상 이 불행한 사태를 행복한 사태로 바뀌기 위해서 온갖 노력을 다하죠. 그야말로 베스트 두 잇. 최선의 노력을 다합니다. 기도를 하고 안 하던 헌금도 하고 온갖 노력을 다해요.
그런데 그게 뭐냐 하면, 불행하다고 여기는 것을 내 스스로의 힘으로 행복한 상태로 바꾸는 거예요. 하지만 이것이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소급해서 적용해보면 불행도 행복 자체가 나중에 뒤돌아보면 다 하나님의 은혜인 것을 모르고 그냥 혼자서 불안했고, 초조했고, 근심했고, 조마조마했고 한 거에요.
그래서 불행한 상태로 하나님이 할 때 요셉은 앞서서 불행을 행복으로 하기 위해서 요셉의 형들이 무슨 일을 했습니까? 우리는 뭐하는 사람이다? 독실한 사람이다. 이거 뭐예요? 자기 의. ‘우리가 얼마나 정직하다고요.’ 요셉이 웃으면서 얼마나 정직한가 보자. 짐에다 잔을 채워서 ‘우리는 양심이 있습니다’ 양심이 있다 했는데 어떻게 합니까? 받은 것 도로 줘서 짐을 풀어보니까 분명히 식량 값을 줬는데 집에 와보니까 그냥 있으니까 어떻게 돼요? 나중에 이것이 빌미거리가 된다고. ‘너희들 말이야. 양식 줬는데 돈 줬어, 안 줬어?’ ‘줬는데 집에 왔는데 도로 있데요.’ 이게 말이 안 되잖아.
그래서 요셉은 자꾸 뭐로 만들어요? 독실한 자, 신실한 자를 뭐로 만들어 버려요? 천하에 죄인 만들지요. 제가 이런 소리 한다고 욕 많이 얻어먹었습니다. 이근호 목사는 하여튼 사람을 멀쩡한 놈도 죄인 만든다고. 자꾸 죄인, 죄인한다고. 왜 그러냐? 하나님 뜻이 그래요. 멀쩡한 인간을 죄인 만들어요.
죄인 만들면 사람은 최선을 다해서 죄인으로서 뭘 합니까? 공짜로 양식 줬는데 아버지하고 형들이 연구해서 온 돈 도로 다 담고 그것도 모자라서 특별 선물 드리지요. 특별 선물 봅시다. 43장 11절 보면, “유향 조금과 꿀 조금과 향품과 몰약과 비자와 파단행” 이런 특산품 가지고 본의 아니게 돈도 지불 안 한 것처럼 됐는데 사실은 우리가 주려고 했는데 일이 잘못 꼬여서 그랬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성실하고 정직한 사람 본을 보인다고 돈도 그대로 가져오고 행여 오해할까 싶어서 여기 선물까지 안겨주니까 ‘우리는 도둑놈이 아닌 것을 알아주시옵소서’라고 하지요.
그런데 그 방식이 무슨 방식입니까? 자기 힘으로 죄인을 의인되게 하는 방식이잖아요. 하나님께서는 보도 안 해요. 그래서 제가 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헌금을 보지도 않는다. 너 그거 왜 바치느냐? 그러면 의인되는 줄 아느냐? 그 소리해서 우리교회는 아예 헌금도 안 하지만. 요셉이 형들에게 하는 방식 그대로 하나님이 지금 우리에게 하고 있어요. 그래서 성도도 하는 거예요. 그대로 하고 있다고요.
결국 우리를 자꾸 의인되게 만드는 이유가 뭐냐 하면, 내가 생각하는 기준에 의해서 행복을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세요. 좀 봐주세요. 이게 창세기에 나옵니다. 이렇게 하면 그들이 우리를 뭐로 본다? 불쌍히 봐서 우리를 도와주겠지. 이게 아까 이야기했잖아요. 교회 올 때 뭐 합니까? 자기 운명론, 자기 운명에 관심 있는 거예요.
지금 요셉은 통곡하고 있는데 예수님은 울고 있는데 우리는 예수님 우는 것 관계없고, ‘나는 이렇게 신실하고 나름대로 최선의 노력을 다하고 있습니다’ 이것 좀 알아주세요. 만날 이거 알아달라고 교회 다니는 거예요. 그래야 자기 미래가 훤히 필까 싶어서.
다시 이야기할게요. 우리의 미래 요셉의 눈으로 보세요. 형들이 자기 딴에 최선을 다하는 것, 눈에 보면 뭐라 합니까? 웃기는 거예요. 왜냐하면 칠 년 흉년, 이거는 의인이라고 끝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이게 어디 나오느냐 하면, 45장 6절에 봅시다. 누가 읽어보세요. “이 땅에 이 년 동안 흉년이 들었으나 아직 오 년은 기경도 못하고 추수도 못할지라” 지금 칠 년 기근 중에 몇 년 지났습니까? 이 년 지났지요. 오 년 남아 있습니다. 형들이 누구한테 최선을 다하고 착하고 성실하고 독실하고 신뢰성 있는 사람이라고 해서 하나님이 만든 칠 년 기근을 벗어날 수 있습니까? 안 되잖아요.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울산 바닥을, 대구 바닥을 저주하게 돼있어요. 유황불 던지게 돼있습니다. 이 판에 우리가 교회 와 충성, 봉사한다고 그 힘으로 유황불 벗어날 수 있습니까? 하나님 보기에 웃습니다. 웃깁니다, 정말. [피]라는 책에 나옵니다. 두 사람이 밭을 갈 때 한 사람은 데려감을 당하고 한 사람은 버려둡니다. 하나님은 누가 밭을 똑바로 제대로 갈았는가 그걸 보는 게 아니에요. 누가 생산물을 많이 남겼나 그걸 보는 게 아닙니다. 그냥 한 사람 데려가고 남겨둬요.
지금 형들이 요셉에게 최선의 노력을 다하는 것, 요셉 보면 웃기는 이야기에요. 요셉이 에라이, 형들아. 형들은 세상을 몰라. 내가 당신을 살려주니 사는 거지 당신들 입장에서 자신은 최선을 다하고 우리는 독실한 사람입니다. 우린 양심껏 삽니다. 그런 소리 한다고 그것 때문에 칠 년 기근이 물러가는 게 아닌 걸 이 바보들은 모르는 거예요. 요셉은 알아요. 우리 주님만 아신다고. 주님만 세상을 알기 때문에 십자가 피 가지고 구원받으라고 하는 겁니다. 딴 짓 하지 말고. 우리는 형들처럼 ‘주여, 이 정도 정성 같으면 이쁨 받겠죠.’ 만날 우리는 우리 식으로 이야기해요. 우리의 불행이 떠날까 싶어서. 우리는 이미 불행하지 않습니다. 느긋합니다.
그런데 느긋한 것 보려면 요셉의 시선으로 다시 소급해서 우리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재해석해줘야 우리가 느긋한 거예요. 요셉은 형들 사랑하기로 작정했고, 또 아버지께서 그런 뜻이 있어서 형들 보냈어요. 요셉도 자기 마음대로 못해요. 아버지 뜻대로 해야 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입장도 예수님이 우리에게 찾아온 것도 예수님이 우릴 구원하신 것도 영원히 구원하시기 위해서 찾아온 거지 우리하고 새삼스럽게 거래하고 계약서 맺고 이거 하려고 온 게 아닙니다. 주님의 계약은 우리하고 맺은 게 아니에요. 아버지하고 맺은 계약이에요. 예수님의 살과 예수님의 피. 우리는 아예 들어가지도 못합니다.
G7 정상 회의하는데 소사가 왜 나갑니까? 동 서기가 왜 나가요. 하늘나라 회의에서 구원받았는데 우리가 왜 낍니까? 창세전부터 야곱은 사랑하기로 작정했으면 밀어붙여요. 에서는 미워하기로 작정했으면 에서는 미움 받아야 돼요. 이미 결정 난 사항이에요. 결정 난 사항을 주님께서 통보해줄 뿐입니다. 천사가 와서 주의 종들은 통보하고 그 근거가 되는 것은, 십자가 용서가 예수님께서 자기가 우리 대신 죽으심으로써 이미 종료된 거예요. 컴퓨터 끌 때 어떤 소리 납니까? 띠리리리~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게임 아웃, 종료 아닙니까. 게임 끝났어요.
컴퓨터 다시 켜면 우리의 철딱서니 없는 그것만 보입니다. 우리가 아직 팔십 안 됐지만 팔십 두 살 때 이근호 목사 철딱서니 행동, 거기 나와 있다고. 그럼 저는 어떻게 봅니까? 느긋하게 봅니다. ‘아이고, 내가 내년에 저런 철없는 짓 하겠구먼. 그 다음에 저런 철없는 짓 하고 있고. 아이고.’ 나중에 나이 구십, 구십까지 살 가능성 없지만. 한 오십칠이면 ‘내년 일월 달에는 저 짓 하겠구먼. 아이고, 철없는 것.’ 내년 일월 달에 설교한다면 그래서 설교하는 죄를 짓고 있는 거예요. 구원은 설교한다고 구원되는 게 아니잖아요. 내일 포항에 심방 있습니다. 내일 또 심방하는 죄를 짓고 있어요.
모든 계시를 아는 예수님 보기에 우리는 철딱서니 없는 짓을 하는데 그것을 소급한 의미로써 우리에게 해석을 하기를 원합니다. 그게 바로 십자가를 통해서 다 이루었습니다. 오십 되도 다 이루었느라. 육십 되도 이루었느니라. 내일 심방 갈 때도 다 이루었느니라. 내년 일월 달 도 다 이루었느니라. 내년 일월 달에 주식 오백 떨어지면 오백 떨어지든 펀드가 다 깨지든 모기지고 모가지고 다 날아가든, 운명론 삐리리리~ 게임 종료됐어. 운명학, 우리의 미래학 게임 끝났어요. 한번 아신 자를 부르시고 의롭다 하시느니라. 이미 게임 끝난 겁니다.
고린도전서 1장에 녹취록에 나오지요. “하나님께서 끝까지 자기 성도를 흠도 티도 없이 은혜 아래 거룩하게 세우시느니라.” 이미 게임 끝난 거예요. 그 말씀 그대로 우리에게 적용한다고 불행한 것처럼 보이는데. 야, 이 말이 좋네. 사실 불행이 아닌데. 되게 불행한 것처럼 보이는 일이 우리 해석하기에 보이더라도 그거는 불행이 아니요, 우리의 보물이 엉뚱한데 가 있다고 경고를 보내는 겁니다. 까불면 맞는데이. 삐삐삐, 경고 보내는 거예요.
징계가 없으면 사생아거든요. 징계라 하는 것은 이미 영의 아버지가 징계하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아버지가 있는 사람이 징계하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했지만 예수님이 그전에 뭐라 했습니까? “내가 고난 받고 사흘 만에 살아나리라.” 이미 알고 계셨어요. 지젝은 그걸 모르지만.
자, 마지막 해보고 마치겠습니다. 45장 9절. “당신들은 속히 아버지께로 올라가서 고하기를 아버지의 아들 요셉의 말에 하나님이 나를 애굽 전국의 주로 세우셨으니 내게로 지체 말고 내려오사 아버지의 아들들과 아버지의 손자들과 아버지의 양과 소와 모든 소유가 고센 땅에 있어서 나와 가깝게 하소서”
그렇게 아시고 17장 보세요. 17장 13절 누가 읽어보세요. 죄송합니다. 15장 13절.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정녕히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 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게 하리니” 됐습니다. 나중에 어떻게 됩니까? “네 자손이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오리라”
이게 누구한테 이야기합니까? 야곱에게 한 것도 아니고, 이삭이 들은 적도 없어요. 아버지의 아버지, 할아버지한테 이미 이 말을 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의 운명 궁금하십니까? 우리를 대표해서 예수님한테 하나님께서 이미 이야기한 적이 있어요. “누구든지 주를 믿는 자는 구원받으리라.” 이미 약속이 돼있단 말이죠. 우리는 그 약속을 믿지요.
믿는데 어떻게 믿느냐 하면, 바로 이 세상 속에서 깨지면서 내가 스스로 생각하기를 ‘이건 불행이야, 이건 행복이야’라는 엉터리 같은 잣대가 하나님의 새로운 사태에 의해서 밀리면서 깨지면서 ‘하하, 내 운명은 내 인생이라 하는 것은 내가 알아서 하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 알아서 손대고 있구나’라는 것을 깨닫는 가운데 하나님의 새 언약, 내 살과 내 피를 영생을 얻으리라 날마나 그것이 믿어지는 거예요.
그게 바로 요셉의 운명이요, 요셉의 형의 운명이요, 모든 성도의 동일한 팔자입니다. 여기서 예외 있는 성도는 없어요. 전부다 예외 없이 하나님 아버지가 진짜 보물인 것을 예수님이 진정한 우리의 마음속의 보물인 것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성경에 보면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 우리 하라는 말 아니라 반드시 성령이 오게 되면 재물도 좋지만 재물보다 중요한 것은 역시 하나님이 우릴 구원하지 돈이 구원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진노의 날에 재물은 무익합니다. 잠언서에 나오지요.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세상 사람들 우리가 사랑할 수 없고, 심지어 하나님도 우리가 사랑할 수 없고, 예수님도 우리가 사랑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나밖에 모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 나에게 난데없이 새로운 사건, 사태가 자꾸 일어나면서 내가 나를 해석하는 것과 달리 십자가를 가지고 나를 해석하라고 주님이 주신 사랑으로 돌아보라고 요구하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내가 나 된 것을 하나님 은혜인 것을 이제 알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사랑을 평생 잊지 말고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는 것을 늘 기억하며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