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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20081205a 울산강의-창세기42장자유게시판창세기

20081205a 울산강의-창세기42장

이름 : 한윤범(IP:59.6.189.223)

20081205a 울산강의-창세기42장

(강의:이근호 목사)

오늘은 창세기 42장 중간부터 하도록 하겠습니다.

지난 시간에 창세기 42장 21절에 보면, “그들이 서로 말하되 우리가 아우의 일로 인하여 범죄하였도다” 22절에 “그의 피 값을 내게 되었도다” 이렇게 해서 요셉의 형제들이 세상을 읽을 때 해석을 할 때 자기 주변에 나타난 상태, 어떤 사건을 해석하는데 어떻게 해석하느냐 하면, 자기의 과거에 있던 과오, 잘못된 것을 놓치지 않고 그것과 연계해서 현재 주어진 자기 사태를 이해를 하고 설명을 하고자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난해한 이야기인지 모르겠습니다만 늦게 오신 분들 있으니까 현재 전체 지난 시간 줄거리가 어떻게 됐는가를 잠시 설명해드릴게요. 하나님의 말씀이 계시가 있는데 누구에게 왔느냐 하면, 요셉에게 왔습니다. 그 증거가 요셉만 꿈꿨잖아요. 다른 형제들은 꿈 안 꿨잖아요. 그리고 그 꿈이 개꿈이 아니잖아요. 왜 개꿈이 아니냐? 그 꿈대로 되니까. 꿈대로 일이 진행되니까 요셉에게만 계시가 내려왔습니다.

여기서 어떤 점이 난해하냐 하면, 지금 요셉의 다른 형제들은 하나님의 계시를 안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계시는 요셉에게만 왔습니다. 요셉이 그들에게 어떻게 다가가느냐? (1)요셉에게 다가가는 방법을 알아야 되지만, (2)형제들이 또는 아버지가 요셉의 계시를 어떻게 이해하느냐? 이 두 가지가 지금 우리가 공부하고자 하는 창세기 42장부터 뒤에 계속 이어져 나옵니다.

요셉이 형제들에게 다가간다. 이것은 약간 쉬워 보이지만 사실은 쉬운 건 아닌데. 상당히 간단해 보이고, 쉬워 보이지만 어떤 것이 어려우냐 하면, 형제들이 요셉이 알고 있는 계시와 여기에 연합되는 그 과정이 어떻다는 걸 알게 되면, 일 번도 어렵고, 이 번도 어렵다는 걸 그때에야 둘 다를 알게 돼요.

그냥 요셉은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형제들을 용서하기 위해서 먼저 팔려갔습니다. 그래서 형들과 아버지를 살렸습니다. 굉장히 쉬워 보이는데 문제는 이들이 요셉을 어떻게 이해하느냐? 이 문제는 무척 어렵게 돼요.

하나님의 계시가 요셉을 봤을 땐 이거는 묵시적 계시인데 이 형들은 요셉을 이해할 때 절대로 묵시적으로 이해하지 않습니다. 다만 형들은 요셉을 이해할 때 역사적인 해석을 가지고 요셉에게 일어난 일을 해석을 하지요. 왜냐하면 본인들이 계시를 안 받았기 때문에 요셉을 이해할 때 자기의 인식의 틀 안에서만 기껏 요셉을 이해하는 거예요. 그 이야기가 42장, 43장, 44장까지 계속 이어지는 거예요.

그래서 42장, 43장, 44장, 45장을 이해하려면 요셉의 형제들이 요셉을 이해할 때 역사적 사고방식이 잘못된 인간의 제한된 자기 인식에 불과하다는 것을 끄집어내면서 42장부터 44장을 설명을 해줘야 됩니다.

그렇게 해줘야 요셉을 통해서 나타난 일 번, 형들이 요셉을 이해한 이 번을 어떻게 깨부수는가? 그 부셔지는 가운데서 비로소 형들은 요셉을 제대로 이해하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깨지는 것 가운데 완전히 박살나는 가운데서 아하, 내가 뭔가 잘못 생각한 것을 아는 방식으로 하나님께서는 묵시적으로 인간에게 다가오는 옵니다.

방금 제가 요셉과 형제들 이야기했지요. 사실 오늘날 우리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신 것 묵시적인 거예요.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셨습니다. 묵시적인 거예요. 묵시적인데 인간들은 십자가를 뭐로 보느냐 하면, 십자가를 이해할 때 자기 역사적인 지평이라 하는데, 역사적인 선에게 이해를 해요.

우리교회에 어떤 분이 오셨는데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목사님, 우리 애가 내 십자가입니다.’ ‘애가 어떤데요?’ ‘삼 년 동안 집밖에 나오질 않습니다.’ 우울증이에요. 그분은 지금 생활보호대상자에요. 뇌수술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애는 그렇게 돼있습니다. 정부의 보조금으로 살아가는 사람이에요. 그런 가운데서 얼마나 복음은 사랑하는지.

근데 그분이 하는 말이 ‘내 애가 나한테 십자가입니다’라는 표현을 했다 이 말이죠. 그만큼 자기 아들이 마음에 안 든다는 거죠. 아들이 몇 살이냐 하면, 아들 하나밖에 없는데 서른 살. 서른 살 먹은 애가 삼 년 동안 집밖을 안 나가니까. 군에 갔다 온 그 다음부터는 일체 집밖에 나오질 않았습니다.

‘십자가입니다’라는 표현을 했지만 불신자 같으면 뭡니까? ‘우리 애가 나한테 골칫거리입니다. 짐입니다’ 이런 뜻이잖아요. 그걸 그분은 십자가로 표현했는데. 역사적 입장으로 볼 때 자기한테 어떤 사태가 일어나고 어떤 사건이 일어나는데 이 사태와 서건은 뭐냐 하면, 자기가 예상한 것과 항상 안 맞는 식으로 난데없이 어떤 일이 들이닥치는 겁니다.

근데 그걸 뭐로 이해하느냐 하면, 이걸 불행한 사태, 불행한 사건으로 이해하는 거예요. 지금 42장부터 44장 설명하는 거예요. 42장, 43장에 나오는 등장인물들이 요셉 빼놓고는 전부 역사적 존재에요. 여기 심지어 아버지 야곱까지. 이 사람들이 하나님을 이해하고 세상을 이해할 때 항상 누구 입장이냐 하면, 자기 입장이거든요. 자기 입장이라는 게 딴 이야기가 아니고, 역사적 사태와 역사적 사건으로만 기껏 해석하는 그 정도밖에 안 되는 사람들이 지금 감히 요셉을 만납니다.

그러면 요셉은 일 번, 요셉이 형제들에게 하나님의 계시를 전달하는데 있어서 요셉도 형들이 역사적 인식밖에 못하니까 어떻게 하느냐 하면, 분명히 묵시적인 말씀을 받았지만 이걸 뭐로 번역하느냐 하면, 역사적 사건을 가지고 이들에게 다가서지요. 아주 손쉬운 말로 쉽게 이야기하면 뭐냐? ‘약 올리기’입니다.

요셉은 42장, 44장까지 철저하게 형들은 약을 올립니다. 형들은 쪼그라들 대로 쪼그라들었어요. 아버지도 마찬가지에요. 형들도 마찬가지고. ‘우짜면 좋노, 우짜면 좋노. 큰 일 났다, 큰 일 났다.’ 쪼그라들지요. 그런데 성경은 말합니다. 그렇게 쪼그라든다는 자체가 바로 근원적으로 문제가 있다는 겁니다.

다시 이야기할게요. ‘우리 애가 삼 년째 집밖에 나오질 않습니다. 이건 나한테 십자가입니다.’ 그건 뭘 해석한다? 우리 애가 자폐증, 우울증 걸렸다는 자체를 뭐로 봅니까? 불행한 사태로 보잖아요. 이해하시겠습니까? 애가 지금 서른 살인데 취직해서 사법고시 합격했다. 그건 뭐로 봅니까? 행복한 사태로 보지요. 그 행복, 불행을 누가 결정합니까? 엄마가 결정하는 거예요.

엄마가 나는 우리 애가 사법고시 합격했으면 이건 행복이고, 우울증 걸려서 삼 년 동안 집밖에 안 나오면 이건 뭡니까? 돈 벌이도 못하고 삼 년 동안 집밖에 안 나오니까 보통 문제 아니죠. 바싹 말랐으니까. 니가 죽든 내가 죽든 둘 중에 같이 죽든 일어나야 된다 말이죠. 그걸 불행으로 보는 거예요.

그러니까 행복과 불행을 결정을 누가 하느냐 하면 내가 하고 있으니 요셉 보기에, 하나님 보기에 이것 자체가 기껏 어디에 묶여있습니까? 역사적 사태 속에 묶여있는 아직도 구원을 모르는, 아직도 사태파악을 못하는 그런 상태에 있는 거예요. 그런데 지금 하나님께서 요셉에게 계시를 주신 것은 바로 행복과 불행을 스스로 결정하는 이 자아를, 이 인간을 진짜 행복한 곳으로 끄집어 당기는 작업을 지금 요셉이 하고 있는 겁니다. 이걸 아셔야 42장, 44장까지가 해석이 돼요.

그러면 지금 초점이 뭐냐 하면, 이건 불행하고 이거는 행복하다고 결정한 역사적 존재 이 인간들을 전부다 그들이 다 지금 빠져나와야 될 잘못된 그런 자리에 있다는 걸 요셉이 일괄적으로 까발릴 필요가 있지요. 요셉 이야기도 되지만 곧 예수님 이야기하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실 때 예루살렘의 여자들이 예수님 보고 뭐라 했습니까? ‘아이고, 훌륭한 양반인데 안 됐다, 불쌍하다.’ 울었잖아요. 우니까 그거는 행복한 사태입니까, 불행한 사태입니까? 불행한 사태로 보는 거예요. 그럴 때 예수님께서 뒤돌아서서 뭐라 했습니까? ‘나를 위해 울지 말고 네 딸들 위해 울어라.’ 뭐가 행복인지, 뭐가 불행인지 사태파악을 못하고 있는 거예요. 사태파악을 못하고 있는 그들을 향하여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셔서 하나의 묵시적 계시를 주신 겁니다.

일방적으로 이거는 불행한 거야, 이거는 행복한 거야. 그러니 그 행복이 사실은 행복도 아니요, 그 불행은 사실은 불행이 아니에요. 그런데 사람이 자기가 쪼그라드는 기라. 자기 선입감에. 어쩔 줄 몰라서 ‘이젠 조졌다. 이젠 인생 끝장났구먼. 이젠 연탄불 피워놓고 자살이나 해야 되겠다.’ 빗이 40억인데 노숙자 하려니, 성경에 나오잖아요. 빌어먹자니 부끄럽고, 땅을 파자니 힘이 없구나. 이를테면 ‘죽는 게 낫지’라는 식으로.

구약에 복음이라는 기쁜 소식이 딱 한 마디, 한 단어가 나옵니다. 그 나온 단어가 어디 나오느냐 하면 바로 엘리사 시대 때 성 안에 있던 문둥병자들이 이래 이야기합니다. ‘성에 갇혀 굶어죽으나 밖에 나가 적들에게 잡혀죽으나 에라 이판사판이다.’ 그래서 나가 보니까 온 천지 건빵이고, 군용식량, 먹을 게 천지 있었다 이 말이죠. 그때 돌아와서 기쁜 소식을 전해요. 구약에서 기쁜 소식 처음 나옵니다. 그때 다른 사람들이 와~ 달려들 때 그걸 안 믿던 한 사람, 군 장성 급이 밟혀죽잖아요.

사람들은 자기가 살아온, 역사적으로 살아온, 과거에 살아온 그것에 굴레에 갇혀서 그 안에서 불행과 행복을 지 마음대로 판단해요. 그래서 이것 되면 행복하고, 이것 안 되면 나는 불행하고. 이것 안 되면 나는 자살까지 할 각오돼있고. 항상 자기가 자기 안에 갇혀 사는 정말 불쌍하기 짝이 없는 인간들입니다. 역사적 속에 인간들은.

요셉은 느긋하죠. 나중에 가면 형들이 다 끝나고 난 뒤에 요셉 만나고 나서 이런 이야기했을 거예요. ‘요셉아, 형들 가지고 노니 재밌디?’ 왜냐하면 요셉은 다 알잖아요. 알고 일부러 잡았다 당겼다 지 마음대로 하고 있다고. 요셉은 뻔히 혼자. 뭐 재미로 했겠어요. ‘아니야. 마음 독하게 먹어야 돼. 여기서 풀어주면 안돼.’ 왜냐하면 형들은 인간이 힘으로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극한 상황까지 들어가 줘야 비로소 자기의 역사적 행복과 불행의 기준을 포기할 수 있거든요. 그걸 포기해야 된다고. 그야말로 스스로 절망해야 돼.

좋은 말이니까 적어볼게요. [자발적으로 절망해야 된다.] 이게 하늘나라에 유일한 행복한 사태입니다. 예수님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아버지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말씀 한번 보세요. 십자가에서 하신 말씀, 재미있잖아요. ‘신이시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이거 인간들이 흔히 해요.

얼마 전에 제가 쓴 글이 있죠. [죽은 신을 위하여]란 책을 논평했죠. 거기 보면 지젝이 하는 이야기가 바로 이 이야기에요. 신은 인간을 버린다는 거예요. 그런데 내가 보기에 지젝이란 학자가 뭘 모르느냐 하면, 예수는 ‘신이여, 어찌 나를 버리시나이까?’ 이런 말 안 했어요. 앞에 신 전에 뭐가 나왔습니까? ‘아버지’에요. 이걸 지젝은 이해를 못하는 거예요. 버릴 것 같으면 아버지란 말을 하지 말아야 돼요. ‘아버지여, 어찌 나를 버리시나이까?’ 예수님도 아버지께 버림 받는 절망적인 사태를 경험했어야 했습니다.

예수님의 이러한 일은, 오늘 강의 내용입니다만 미리 이야기할게요. 아브라함이 이삭을 죽일 때 누가 더 가슴 아팠습니까? 아브라함이 더 가슴 아팠고, 이삭은 멀뚱멀뚱 있었지요. ‘아버지가 왜 이라노. 나를 묶고. 아버지여, 왜 이러십니까?’ 아마 이랬을 거예요. 그래도 반항 안 한 것 보니까 아버지 뜻을 따랐을 수 있지요.

아브라함이 이삭을 잡은 이것이 뭐냐 하면, 아브라함 언약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버리는 것이 새 언약이죠. 그럼 아브라함, 새 언약 하는 와중에서 아브라함이 갖고 있던 아픔을 반향이 이삭 쪽에서 이삭이 아브라함을 자기 자신을 버려야 될 아브라함을 이해하는 쪽으로 나아갈 때 비로소 이삭은 아브라함이 갖고 있던 아픔과 그 언약의 의미를 아는 거예요.

그렇다면 지난 시간에 요셉이 형들이 버렸던 간에 요셉은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버림받았지요. 그렇다면 형들은 어디까지 가야 돼요? 요셉이 경험했던 버림받았음의 절망까지 형들은 어쨌든 간에 끌려가야 돼요. 끌려가지 아니하면 그들은 하나님이고 뭐고 역사적 산물로 남아요. 역사적 산물로 남아버리면 불행과 행복을 누가 결정하느냐? 여전히 자기가 결정한다고. 이러면 요셉하고 상관없고, 요셉하고 상관없으면 누구하고 상관없느냐 하면, 하나님하고 상관없어요.

울산컨트리클럽까지 왔으면 진짜 딱 20분 걸려요. 여기까지. 아주 정확하다. 어서 오세요. 추운데.

다시 이야기할게요. 요셉이 누가 버림받았든 요셉이 버림받을 때는 ‘형들이 죽일 놈이다. 나를 버리다니.’ 아마 요셉도 원망했을 겁니다. 하지만 계속해서 요셉은 꿈 때문에 감옥소까지 내려오면서도 결국 국무총리된 상태가 뭐 때문에 됩니까? 꿈 때문에 총리가 되지요.

그렇다면 요셉의 자기 해석은 뭐냐 하면, 과거로부터 현재, 미래 이렇게 흘러가는 게 아니고 현재로부터 거꾸로 과거로 소급해서 해석하니까 과거에 일어난 모든 일이 다 누구 뜻이었습니까? 아버지가 주신 아버지의 선한 뜻이었다.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내가 팔렸다는 걸 안다 이 말이지요.

지만 알면 됩니까? 요셉 자기만 알면 안 되지요. 요셉 자기만 알면 안 되지요. 어떻게 돼요? 형들이 요셉이 알고 있는 하나님 방식으로 세상을 보는 관점에 요셉 형들도 거기에 참여해줘야 요셉 형들과 아버지도 아브라함의 아픔을 알듯이 하나님의 그 마음을 아는 거예요. 그것 때문에 요셉을 앞서 보낸 겁니다.

그러면 여기까지는 여러분들이 아신다 치고, 약간 쉬운 거지만 어렵게 이야기할게요.

여기 A라는 사람이 있고, 여기 B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현대철학이고 고대철학이고 어떤 동양철학이고 간에 아무리 그들이 연구해 봐도 A에 대해서 B가 알 수 없고, B에 대해서 A가 알 수 없습니다. 같이 붙어살아도 A는 A고, B는 B에요. A 세계 따로 있고, B 세계 따로 있습니다. 절대로 융합되지 않습니다. 그런 겁니다. 아무리 부모자식이라도 상대방의 마음을 몰라요. 왜냐하면 인간은 자기 나름대로의 역사적 이해를 갖고 있고, B도 역사적 이해를 갖고 있기 때문에 둘이 동일하지 않아요.

[피]라는 책에 나오죠. [피]라는 책에 나온다 하면 한두 마디가 나오는 게 아니고 여러 마디 다 외우지 못하지만, 그 책에 보면 나옵니다. 왜 저 사람을 사랑하지 못하는가? 그는 그고, 나는 나기 때문에. 왜 우리는 이웃을 사랑하지 못하는가? 이웃은 이웃이고, 나는 나기 때문에. 내가 이웃이 아니기 때문에 그래요.

왜 아내를 사랑하지 못하는가? 내가 아내가 아니잖아요. 왜 남편을 사랑하지 못해요? 내가 남편이 아니잖아요. 나는 나일뿐이다 이 말이죠. 사람이 자기 해석을 해도 자기 바깥으로 벗어나서 상대방 세계에 들어갈 재주가 없어요. 아무리 애를 써도 안 됩니다. 이게 딜레마에요.

제가 처음에 강의할 했잖아요. 요셉이 있고, 요셉 형제들이 있다. 요셉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하나님과 가까이 있다. 그렇다 치고. 사실이 그렇지만. 문제는 형들이 또는 아버지가 어떻게 요셉이 갖고 있던 그 경험을, 요셉 나름대로의 경험을, 자기만의 경험을 어떻게 형들이 여기 참여해서 그 요셉에게 있는 하나님의 뜻을 알아차리는가? 인간 이름으로써 도저히 이거는 불가능합니다.

왜 그러냐 하면, 너는 너고, 나는 나고. 다른 말로 하면 요셉, 너는 너 나름대로의 과거의 역사적 것이 누적돼있고, 나는 나 나름대로의 역사적 것이 누적돼있어서 요셉, 네가 생각하는 행복과 불행, 내가 생각하는 행복과 불행은 다 다르기 때문에 아무리 이해한다 해도 이게 언더스탠드가 안 돼요. 이해가 안 됩니다.

목사가 교인 마음 알아줘라. 못 알아줍니다. 그래서 저는 포기했잖아요. 그리고 교인들도 마찬가지에요. 목사도 교인 이해 못하고, 교인들도 이해 못하고, 교인과 교인들끼리도 서로 이해 못해요. 각자 자기 주먹 흔들어요. 안 됩니다. 이 안 되는 것을 어떻게 하나님께서 되게 하시느냐? 이게 오늘 강의의 핵심입니다.

예수를 믿어요? 안 됩니다. 왜? 예수는 내가 아니기 때문에, 나는 예수가 아니기 때문에. 한 30년 믿은 목사한테 물어보세요. ‘당신은 예수를 압니까?’ 몰라요. 왜? 자기가 예수가 아니니까. 여러분 집에 키우는 강아지 마음을 압니까? 모르지요. 왜? 자기가 강아지 돼 본 적이 없기 때문에. 설사 강아지 되도 두 강아지 서로서로도 모르게 돼있어요.

그래서 이런 게 있어요. 자아라 하는 것은 원래 없는 건데 과거의 기억들이 쌓여서 자아라고 하는 거예요. 제가 부산 강의할 때 그런 이야기했잖아요. 여러분, 사람이 눈으로 본다고 하는데 사실은 눈으로 보는 게 아니고, 사실은 눈이 보고 자아가 해석하는 거죠. 눈으로 보고 해석은 나라는 게 있어서 따로 해석하는 겁니다. 그래서 똑같은 걸 봐도 어떤 사람은 달리 보고, 어떤 사람은 달리 보고 하는 거예요.

관상(觀相)이라고 하는 게 있는 여기서 관상이라 하는 것은 총 가짓수가 32가지에요. 왜냐하면 ‘관’ 하는 게 ‘본다’인데 ‘본다’의 한자의 뜻이 여덟 가지가 있습니다. 여덟 가지에다 동서남북 하나씩 하니까 4*8=32, 32가지 보는 거예요. 그냥 자세히 보는 걸, 경찰 할 때 ‘찰’(察)자죠. 자세히 보는 것 따로 있고, 첫 인상 보는 것 있고, 그 다음에 그냥 멀찍이 전체 윤곽을 보는 것 있고. 그래서 관상이라 하는 것은 돋보기 대고 보는 것 있고, 돋보기 버리고 보는 것 있고 이래서 32가지라는 거예요.

이거는 뭐냐 하면, 사람마다 자기 입장을 포기 못한 체 자기 부인이 안 된 상태에서 남을 보기 때문에 요셉을 이해하려해도 요셉을 이해하는 자기 해석밖에 안 나오지 결코 요셉이 알고 있는 하나님을 알 수 없다 이 말입니다.

그러면 요셉아, 너는 하나님에 대해서 어떻게 알았는데? 요셉은 할 말이 있지요. 자기가 하나님을 알고자 한 게 아닙니다. 이게 오늘 강의에 첫 번째 중요한 건데 제가 너무 중요하니까 적어볼게요. [요셉(또는 형들)이 하나님을 알고자 한 것이 아니다.] 이 말이죠. 우리가 예수님을 알고자 한 것이 아니에요. 예수 믿고 천국 간 사람이 절대로 자기가 예수를 연구해서 구원받은 사람 없습니다.

우리는 무엇에 대해서 아느냐 하면 나의 역사, 나의 미래에 관심이 있어요. 사람은 신자나 불신자나 불교신자나 천주교신자나 관계없이 인간에게 관심 있는 것은, 교회 올 때 관심 있는 것은 자기의 운명론밖에 관심 없어요. ‘목사님, 네가 우에 되겠습니까? 하나님 제가 우에 되겠습니까? 예수님 앞으로 제 인생이 우에 되겠습니까?’ 그게 운명학이라 하고 또는 운명론이라 하는데 언제 대구 강의에서 사주팔자 강의할 때 있을 겁니다.

온갖 것 다 하는데 얼마 전에 동양철학 했지요. 동양철학은 뭐냐? 진화론이 아니고 육체는 진화론이지만 마음은 퇴화론입니다. 타락하는 것, 떨어지는 것 그걸 주장해요.

사주팔자를 사람들이 교회 올 때 말을 안 해서 그렇지 교회 올 때 관심사가 뭐냐 하면, 점집에 찾아가는 그런 마음으로 ‘하나님, 교회 찾아 왔습니다. 이번 주에는 우에 되겠습니까?’ ‘누가?’ ‘제가요. 저 점 좀 쳐주이소. 오늘도 목사님 말씀을 통해서 제 미래를 알기를 원합니다.’ 항상 자기 운명론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거예요. 인간은. 30년 예수 믿고 교회 목사, 권사, 집사 되도 마찬가지에요. 자기 운명론에 대해서 못 벗어나는 거예요. 자기 운명에 관심 있어요. 남의 운명 관심 하나도 없어요.

차두리가 우에 됐든지, 차범근이 우에 됐든지, 박지성이 우에 되던 그거는 귀동냥의 취미고. 이천에서 한 명 실종되고, 여섯 명 죽었다. ‘안 됐네.’ 이러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에요. 만약에 여러분의 아내가 우연히 여기 마트에 갔다가 울산MBC 카메라에 잡혀서 ‘요즘 물가가 어떻습니까?’ 그 인터뷰한 것 뉴스 시간에 나오면 뉴스 시간 할 때마다 그것 본다고. 전화 다 걸어서 ‘우리 마누라 나온다. 옷 잘 입었지. 침착하게 말하지.’ 자막에 보면 울산의 무슨 동에 사는 아무 아줌마, 나이 오십.

이천에 사람 죽은 것 안 중요해요. 물가 막 올라간 것 모르는 사람 누가 있습니까? 하지만 그게 누굽니까? 내 아내고 우리 집안 식구기 때문에 그렇게 자기한테 중요한 거예요. 세상에 모든 사태와 사건이 그렇게 많아도 사람은 그중에서 뭘 뽑아내느냐 하면, 자기에게 직접 관련된 것만 뽑아서 그걸 고이 담아서 자신의 운명으로 삼습니다. 이게 인간이에요.

그 인간이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요? 아닙니다. 절대로. 인간은 자기의 미래와 운명론밖에 몰라요. 불가능합니다. 인간의 불가능한 것을 하나님께서는 지금 그게 어떻게 바뀌게 되었는가를 십자가 오기 전에 요셉을 통해서 먼저 보여줍니다.

요셉이 하나님을 알고자 한 것이 아니고, 요셉에게 뭐가 작용했습니까? 답변해보세요. 강의 힘드니까. 주고받고 합시다. 요셉에게 뭐가 오니까 요셉이 하나님을 알게 되었습니까? 꿈이 왔지요. 그렇다면 형들에게 있어서는 요셉 자체가 뭐가 돼요? 형들의 꿈이 돼야 돼요. 그런데 요셉은 지가 꾼 꿈 때문에 얼마나 힘들었습니까? 그리고 요셉은 꿈에 의해서 국무총리가 되었기 때문에 꿈이 없었더라면 계속 내리막길이죠. 꿈이 살렸죠. 마찬가지로 형들을 누가 살립니까? 요셉이 살리죠.

그렇다면 요셉은 꿈 때문에 저 밑바닥까지 내려갔다면 형들은 누구 때문에 밑바닥까지 내려가야 돼요? 요셉 때문에 밑바닥까지 내려가 줘야 되는 겁니다. 왜 그리 되는가? 형들의 밑바닥에서 대기하는 사람이 있어요. 은행가면 대기표 있지요. 형들의 밑바닥에 대기하고 있는 사람이 누구냐 하면, 그게 바로 야곱이 대기하고 있습니다. 야곱은 뭘 겸해야 되느냐? 아브라함이 누굴 바쳤습니까? 이삭을 바쳤을 때 이삭은 아브라함에게 어떤 아들이었어요? 미운 아들이었습니까, 사랑하는 아들이었습니까? 지독하게 사랑한 아들이었지요.

그렇다면 아브라함 언약의 속성을 갖고 있는 내려온 야곱 언약에 있어서 야곱은 누구한테? 아들에게. 야곱 아들 몇 명입니까? 열두 명이라도 그중에서 뒤에 42장, 43장, 44장 보면 참 다른 형들 화낼 만 해요. 야곱은 아들을 딱 두 명으로 봅니다. 그게 베냐민과 요셉, 딱 두 명 봐요. 왜? 사랑하는 아내의 자식이 둘밖에 없어요.

그리고 여러분들이 창세기 볼 때 이상한 게 있지요. 창세기 42장 지나고 43장에 보면 시므온이 볼모로 잡히잖아요. 요셉이 시므온이란 형을 볼모로 잡은 이유가, 베냐민 동생이 무사히 있는가를 확인하고 또 동생 데리고 다시 오게 하기 위해서 시므온을 볼모로 잡았는데 43장에 보면 형들이 그런 이야기 해줘도 양식 다 떨어질 때까지 형들은 절대로 애굽으로 안 내려옵니다.

그렇다면 시므온 입장에서 생각해 보세요. 시므온은 뭐가 됩니까? 낙동강 오리알 신세죠. 걱정도 안 해요. ‘잘 있겠지, 뭐.’ 남의 자식 같아. 시므온이 얼마나 기분 나쁘겠습니까? ‘형들, 나만 놔두고 가느냐?’ ‘미안하다. 너 찾으러 올게.’ 분명히 그런 이야기했었고, 시므온 볼모로 잡아놨는데 가자마자 입 싹 닦아버리고. 아버지는 시므온이 잡혀 있는 걸 걱정도 안 하고. 형들 말 가운데서 시므온 말이 한 마디도 안 나옵니다. 참 이상하죠.

아버지 야곱이 화를 내는 것은 어떤 경우냐 하면, 베냐민을 데려간다고 하니까 어림 반 푼 어치도 없어. 굶어 죽으면 죽었지 어림 반 푼 어치 없어요. 요셉도 죽었고, 시므온도 우에 됐는지 모르고 거기에다가 내 막내아들 베냐민까지 죽으란 말인가? 용납을 안 합니다. 계속 버티는 거예요.

오직 아버지 생각은 뭐냐 하면, 그 죽었던 요셉과 그리고 아직 안 죽고 있는 동생 베냐민밖에 없어요. 바로 요셉은 아버지가, 자기가 동생을 사랑한 게 아니고, 아버지가 내 동생 베냐민을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눈으로 확인을 해야 했던 겁니다. 지독하게 사랑하고 있다면 그때야 요셉은 베냐민을 뺏어갈 가치가 있습니다. 참 요셉 못됐지요.

마치 밤중에 도둑놈 들어와서 자식 열 명 있는데 다 세워놓고 부모 금고열쇠 내라고 협박하면서 ‘만약에 금고열쇠 안 내면 큰 애를 죽입니다.’ ‘어림없다.’ ‘둘째 죽입니다.’ ‘어림도 없어 안 가르쳐줘.’ ‘셋째 죽입니다.’ ‘마음대로 죽여. 그래도 안 가르쳐줘.’ ‘넷째 죽입니다.’ ‘그러면 안 되지.’ 하고 열쇠 내놨다면 누구 아들 제일 사랑한 겁니까? 네 번째 아들 사랑하죠. 독하다, 독해. 진짜 간도 독하지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는 방식이 그 방식입니다. 우리가 역사적으로 행복과 불행을 가름하는 이것 없으면 불행이고, 이것 있으면 행복이라고 결정타를 날리는 그것, 하나님께서 뺏어버립니다.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이제는 절망할 기력도 없지요.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돼요. 뭐냐 하면, 왜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원할 때 힘으로 구원하지 않고 사랑으로 구원하는가? 그게 아브라함과 아들 사이인데. 여기 아브라함과 아들, 이삭 사이에 사랑이 형성돼있어요.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바치라 했으니까 사랑이 형성돼있어요. 제가 아까 했지요. 어떤 사람이 아무리 이해해도 이해가 안 된다 했지요. A와 B사이에 너는 너고, 나는 나기 때문에 이해 안 되는데, 그 이해 안 되는 것을 하나님께서 능히 그걸 성공하게 하시죠.

그게 뭐냐 하면, 바로 먼저 사랑을 해버려요. 사랑을 하게 되면 아브라함이 이삭을 사랑할 때 사실은 이삭이 죽을 때 이삭이 죽은 게 아니고 아브라함도 함께 죽었어요. 왜? 이삭이 없으면 아브라함은 살 이유가 없어요.

제가 연속극 거의 안 보는 것 여러분 다 아시잖아요. [바람의 화원] 제일 마지막에 이런 장면 나와요. 혜원 신윤복이 이래 이야기합니다. ‘선생님, 나 때문에 여러 사람 다쳤는데 그냥 나 혼자 떠나렵니다’라고 할 때 박신양, 단원 김홍도가 뭐라 합니까? ‘너 없이 내 사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느냐?’ 그때 신윤복이 제자가 이야기하죠. ‘스승님에게 내가 뭡니까?’ ‘너는 나의 연인이다’ 이러지요. 내 절친한 친구의 딸이자 내 연인이라 이렇게 이야기하죠.

사랑이라 하는 것은 대상 때문에 본인이 사랑한 걸 사랑이라고 합니다. 나 때문에 내가 사랑한 사랑이 아니라 내가 사랑한 분이 계시기에 비로소 소급해서 나의 의미를 찾는 거예요. 내 쪽에서 저 쪽으로 해석하는 것이 아니고, 내 사랑하는 분에 의해서 내가 다시 재탕해서 해석 당하는 것, 수동적으로 내가 그분에 의해서 다시 해석 당하는 것, 이게 사랑입니다. 그게 십자가에요. 십자가 안에서 너를 보라!

십자가는 뭡니까? 하나님이 우릴 사랑하심 아닙니까. 우리가 사랑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사랑 앞에서 우리는 오늘 밤에 어디 간다? 낙원에 갈 것이다. 지금 우리가 강도입니다. 지금 내가 강도냐, 창녀냐 이게 문제가 안 되는 이유는, 내가 사랑한 그분이 나를 어떤 관점에서 보느냐가 중요하지 ‘내가 볼 때 나는 강도다, 내가 볼 때 나는 창녀다’ 따질 문제가 된다, 안 된다? 안 되는 거예요.

왜 사람들이 하나님을 안 믿는가? 내 관점을 못 버렸어. 내가 보는 관점을 가지고 계속 신까지 밀어붙이니까 튕기는 겁니다. 내가 나를 위해서 해석하면서 행동은 내가 하고 해석 내가 하고, 동일인물 아닙니까. 내가 행동하면서 그것 가지고 자꾸 ‘이 정성 받으소서’ 이래 밀어붙이니까 나의 해석이 있는 한 이건 뭐가 아닙니까? 사랑이 아닌 거예요.

그래서 고린도전서 13장에 나오잖아요. 네가 목숨을 다해 불사를지라도 뭐가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고?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고. 네가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고, 네가 구제를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라 했거든요. 이 말은 뭐냐? 뭐가 너에게 덮치느냐가 중요하지 네가 주섬주섬 뭘 끄집어내느냐가 중요하지 않다는 말입니다.

사랑이란 내가 그분을 해석한 것이 아니고, ‘그분이 나를 어떻게 해석하고 이해하고 있느냐’라는 것을 수용하면 그게 구원이고, 그게 생명이고, 영생입니다. 주님께서 말합니다. ‘야, 널 위해서 죽었다. 널 위해 십자가에서 죽을게. 그래서 너는 저주에서 풀렸고 너에게 영생이야’라는 사랑의 메시지, 사랑이 없음을 그 없음에 준해서 나 자신을 다시 해석하는 거예요. 내가 나를 해석하는 것이 아니고, ‘이만하면 구원받을까’ 이래 해석하는 게 아니고.

‘야, 너를 위해서 내가 대신 모든 죄를 해결했거든’라는 음성이 나를 덮쳐서 그 음성 안에서, 십자가 안에서, 예수 안에서 다시 ‘나는 예수에게 뭡니까’ ‘너는 나의 연인이다. 내 신부다. 환란, 곤고, 핍박이 온다 할지라도 겁내지 마라. 너 그거 전에는 불행이라 했지. 전혀 불행 아니다. 그런 환란과 핍박이 올지라도 사랑에서 안 끊어지면 그게 행복이다. 도대체 누가 널 보고 정죄하더냐? 마귀가 정죄해? 웃기지 마라 해. 마귀가 정죄해도 괜찮아. 너는. 마귀가 고소해도 괜찮아. 오히려 마귀는 고소가 주특기야. 검사야. 대중검찰청 검사라니까.’ 만 날 하는 것이 노건평이 4억 먹었지 한단 말이죠. 하더라도 다른 해석이 와야 돼요.

지금 요셉의 형들, 야곱은 요셉이 알고 있는 해석이 안 왔어요. 무슨 해석만 남느냐 하면, 우리가 뭘 잘못됐는데 이런 수모를 당하느냐? 만 날 자기가 자기한테 퍼붓던 해석만 남아있으니까 요셉한테 가기만 하면 갈수록 난처해버려요. ‘아이고, 도대체 우리가 뭘 잘못되었을까? 아, 과거에 우리가 요셉을 팔아먹었구먼. 우리가 그 피 값을 하는구먼.’ 해석이 괜찮습니다만 아직도 멀었어요. 이 정도 해서 안 되는 게 아니에요. 아직도 더 당해야 돼. 양심 고운 것도 안 돼. 양심 고운 것도 벗어나야 돼요.

다시 봅시다. 지금 사랑이 어느 정도냐 하면, 이 정도입니다. 내가 사람의 지갑에서 돈을 훔쳤다. 내가 돈을 훔쳤습니다. 돈 훔쳤다 하면 노골적이지만. 예를 들어서 신문을 보고 싶은데 마침 술집, 술집은 아침 일찍 문 안 열잖아요. 조선일보가 있단 말이죠. 우유 하나하고. 조선일보가 한 부 얼마입니까? 몇 천 원하지요. 빼갔다 할 때 ‘내가 조선일보를 빼가는 나쁜 짓을 했구나. 따라서 나는 나쁜 죄인이다’라는 해석이 나쁜 해석입니다. 그럼 ‘나는 남의 집의 조선일보를 빼서 읽었다. 그래도 나는 복음 알기 때문에 잘한 짓이야’라는 해석이 무슨 해석이냐? 나쁜 해석이에요. 나쁜 죄가 되는 겁니다.

왜냐하면 이 순간, 짧은 순간이지만 그 사람은 자기가 자기를 그만 해석하고 말았어요. 자기가 해석하는 것은 누구를 섭섭하게 하는 것이냐 하면, 일방적으로 주신, 그 사랑을 주신 사랑의 해석을 밀친 게 된다고. 그걸 잠시 보류한 게 돼버려요. ‘주여, 주님 사랑한 건 알지만 잠시 보류하고요. 조선일보 허락 없이 빼낸 건 나쁜 짓 맞지요?’라고 자기 해석을 그 순간만큼 다시 유지하려고 붙잡으려는 그것이 결과적으로 뭐냐? 주님의 사랑이 오는 것을 밀친 결과가 돼요.

그래서 이 사람은 회개해야 돼요. 사랑에서 눈 돌렸으니까 그게 회개감이에요. 사랑에 눈 돌리면 안 돼요. 주님께서 뭐랍니까? ‘누가 뭐랬어? 내가 뭐라는데? 십자가 눈앞에 보이는데 누가 너를 꾀더냐?’ 마귀는 자꾸 잘난 너의 해석 너한테 가해봐라 이러거든요. 네가 너에 대해서 어떻게 해석하는가? 만날 마귀한테 깨지는데. 십자가 눈앞에 있는데 누가 꾀더냐?

그러면 목사님, 신문 집어가란 말입니까? 남의 신문, 남의 우유 다 빼갈까요? 그거 잘한 겁니까? 여기서 하나님 뜻은 뭐냐 하면, 신문 빼가라, 우유 빼먹으라가 아니라 지난 모든 행동에 대해서 사랑의 입장에서 소급해서 해석하라. 이래 됩니다.

그럼 해석은 어떻게 됩니까? 내가 평소에 욕심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남의 집에 조선일보 있어서 갑자기 그걸 보고 싶은 욕심이 생겼지요. 사랑의 입장에서 소급해서 생각하니까 그 물건을 훔치기 전까지라도 조선일보를 보고 싶다는 탐심을 냈다는 이미 그 자체가 사랑 입장에서 보니까 사랑하고 안 맞는 죄가 되죠.

그런데 그 탐심이란 게 왜 생겼느냐 하면, 조선일보가 있었고, 이게 지젝이란 사람이 어렵게 이야기한 거예요. 조선일보가 없었으면 되는데 있음으로 말미암아 잠자던 탐심이 자극을 받아서 ‘아차, 저거 보니 생각나네. 오늘 신문 안 봤지’ 마침 조선일보 보니까 신문이 생각나고 그걸 보고 싶은 생각이 나는 거예요.

다시 합니다. 목 다 쉰다. 탐심이라 하는 것은 우리가 주변의 모든 것이 다 탐심의 대상인데 그 탐심의 대상이 올 때 우리가 탐심해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가 탐심거리를 통해서 타고 우리에게 같이 덮쳐 와요. 아주 못 생긴 여자를 두고 ‘네가 마음으로 음란하지 마라. 마음속으로 음란하면 간음이다.’ 우리는 뭐라 합니까? ‘걔는 하라 해도 안 합니다.’

개콘에 보면 그런 게 있어요. [독한 놈]보면 있어요. 고만고만 생긴 여학생들, 나이트 가서 너희들 이런 소리 하지. 우리는 부팅하러 온 게 아니고 춤추러 왔어요. 이런 소리 하지. 우리도 춤추러 왔거든. 너거들 상대 안 하거든.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못 생긴 여자들은 남자들이 아예 안 보고, 남자 중에서 못 생긴 다른 사람이 그걸 상대하기 바쁘다 이 말입니다.

그러니까 뭐냐 하면, 탐심이라 하는 것은 지나개나 탐내는 게 아닙니다. 우리가. 선악과 어떻게 생겼어요? 모개입니까? 보기 싫은 거예요?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탐스럽게 해놓고 뭐라 합니까? 따먹지 말라 하니까 이게 얼마나 사람을 못 살게 구는 거예요. 그게 바로 요셉을 통해서 자기 형제를 구원하는 방식이 그 방식이에요. 다른 방식이 없어요. 하나님 방식이 이것밖에 없어요.

약 살살 올립니다. 약 올리고 그 모든 것을 소급해서 해석하고. 어떻게 해석하고? 사랑으로. 네가 나한테 다가와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일방적인 사랑으로 모든 걸 소급해서 콘크리트타설 하듯이 덮어버리죠. 덮으면 우리의 모든 것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된 하나님의 사랑의 흔적인 것을 네가 아느냐고 묻는 겁니다. “주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을지어다.”

10분간 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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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 8,422건 중 304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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