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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대구 12월 09일 지옥의 하나님 146p강의[신학]

대구 12월 09일 지옥의 하나님 146p

이름 : 우리교회(IP:124.59.87.32)

081209 지옥의 하나님 146p
______관심사가 교회(법)냐? 복음이냐?

우리교회(IP:124.♡.87.32)

08-12-10 00:10

우리교회(IP:220.♡.176.150)

09-02-22 19:47

대구081209지옥의하나님p146

08 대구강의 17 - 지옥의 하나님 35 - 인간구원을 위한 신학5

08,12,09 강의 이근호, 정리 구득영

◈ 일단, 살고 보자 !!

오늘을 146페이지부터 하겠는데, 일단 교재를 보자.

** 목사의 유일한 희망은 사는 것이다. 하나님이든 예수님이든 나를 살려주시면 그분이 곧 '사랑의 하나님'이다. 그래 살자. 이왕이면 바르게 살자. 하지만 그것은 배부를 때나 해볼 생각이다. 만사가 내 마음대로 안 될 때는 어쩔 수가 없지 않은가.

사람이 자기 살기에 급급하게 되면 "바르게 살자" 라는 것이 우선이 아니라, "살고 보자" 라고 나온다는 것이다. 그러니 하나님이 멀리 계시면 바르게 살자는 것이 말이 되는데, 하지만 하나님이 가까이 계신다고 하면, 자기가 밥도 제대로 먹지 못하고 살아가는, 그런 괴로움을 놓치지 않겠다는 것이다.

◈ 하나님, 가까이 좀 와보소 ??

이것을 그림으로 그려보면 좋은데, 하나님이 저 멀리 계신다면 자기가 어떤 아픔과 괴로움을 가지고 있는지 하나님이 잘 모를텐데, 즉 성경책만 던져주시고는 말씀대로 살라고, 그렇게 순종하라고 하니 말이다. 물론 먹고사는 것이 괜찮으면 말씀대로 살겠다고 하겠지만, 하지만 그런 것이 여의치 않으면 성경책도 눈에 들어오지 않고, 또 하나님은 저 멀리 계시고 말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자기 사정을 좀 알아서 가까이 다가오기를 원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기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못하는 이유는, 자기가 성품이 나빠서가 아니라 지금 당장 살아가는 것이 너무 다급하기에, 그렇게 살아갈 여력이 없다는 말이다. 그러니 그런 사정을 하나님이 미리 좀 알아주었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하나님이 가까이 다가오면 어떻게 되는가? 자기가 왜 말씀대로 살지 못하고, 교회에도 잘 가지 않게 되는지를 알게 되는데, 즉 하나님이 멀리 있을 때는 몰랐는데 가까이 다가오니까 "아하, 그럴 만한 이유가 다 있었구나" 라고 말이다. 아무튼 그렇게 하나님이 이해해주실 것이라고 사람들은 이야기한다는 말이다.

◈ 하나님, 저는 정말 억울합니다 !!

인간의 행동은 어디서 나오는고 하니, 자기 자신의 억울함을 보상받는, 그렇게 정당화시키는 쪽으로 움직인다는 것이다. 그렇게 자기 존재나 행동이 정당화가 되려면, 자기를 피해자로 삼아서, 즉 "내가 이렇게 억울한 일을 당했기 때문에 어지간한 일들은 좀 봐주소" 라고 할 때, 그럴 때 비로소 인간의 행동이 정당화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자기는 정말이지 하나님의 말씀대로만 살고 싶은데, 그런데 갖가지 억울한 일 때문에, 즉 자기가 너무나도 분하고 원통한 일을 당하는데, 거기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책임을 져주고 보상을 해주어야만 당연하지 않느냐고, 그렇게 하면서 인간은 자기 행동을 정당화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야 자기 의가 세워지니 말이다.

◈ 하나님은 원통함을 일부러 유발시켜 !!

그런데 성경에서는 인간의 그런 원통함을 어떻게 이야기하는고 하니, 예를 들어서, 출애굽 때는 어떤 것이 원통한고 하니, 하나님께서 일부러 인간들의 원통함을 만든다는 것이다. 멀쩡한 인간의 자식을 죽여버리는데, 그것도 장자를 말이다. 그러니 평소에 제 아무리 성품이 좋은 사람이라고 해도, 자기 장남이 졸지에 죽어버리면, 거기에서 억울하고 분통함을 느낀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원통함인데, 하나님은 그것을 일부러 유발시킨다는 것이다.

이렇게 하나님에 의해서 원통함이 유발되어서, 인간들이 하나님에게 자기들의 원통함을 책임지라고 하면서 하나님에게 덤벼들게 되는데, 그래서 하나님은 바로 그러한 인간들에 의해서 자기 맏아들이 죽임을 당하게 되는데, 물론 그들은 거기에 앞서서 하나님께서 보내신 선지자를 죽이고 말이다.

◈ 두 개의 원통함이 서로 충돌하는데 !!

그렇게 되니 인간들의 맏아들이 죽은 원통함과 하나님의 맏아들의 죽은 원통함이 서로 대비가 되는데, 성경이 그러한 방향으로 진행이 된다는 것이다. 쉽게 말해서, "내가 하나님의 아들을 죽였구나" 라고 하는 원통함과(자기 아들이 죽은 하나님의 원통함이 아니고?) "하나님이 내 아들을 죽였구나" 라고 하는 원통함이 같이 만나게 하신다는 것이다. 출애굽을 할 때 말이다.

다시 말해서, 자기 아들이 죽은 것이 원통한지, 아니면 그런 자기의 원통함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이 죽었다고 하는 것이 더 원통한지, 그렇게 두 개의 원통함이 서로 만나서, 즉 "정말 너희들이 내 백성인가? 아닌가?" 라는 것을 골라내는 작업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구원의 전략에는 반드시 이것이 들어가게 되어있다는 말이다.

◈ 나도 깔깔거리고 싶어 !!

예를 들어서, 아파트의 어느 가정을 저녁 9시경에 들여다보면, 온 가족이 모여서 개콘이나 웃찾사를 보면서 깔깔거리면서 넘어가는데, 별로 재미도 없는데 말이다. 사람들은 이러한 것을 두고 행복, 다복, 기쁨, 여유 등이 충만하다고 한다는 것이다. 즉 행복한 가정이라는 말이다. 사람들은 이러한 행복한 가정을 보면서, 그렇게 행복하지 못하고 고부간의 갈등이나 부부싸움 등으로 인해서 웃음이 사라진 자기 가정과 비교해보면서 부러워한다는 것이다.

똑같이 이 땅에 태어나서, 어느 집은 저녁에 모여서 웃음소리가 피어나고, 별 일도 아닌 것을 가지고 서로 좋다고 박수를 치고 난리라는 것이다. 성적이 한 단계만 올라도 좋다고 피자를 한 판 돌리면서, 그렇게 다복하게 살아간다는 말이다.

그러니 이런 행복한 웃음소리를 유발할 수 없는 가정에서는 무엇을 호소하는고 하니, 뭔가 자기들은 억울하다고 하는 마음을 가지고 된다는 것이다. 즉 "나는 그렇게 하나님을 잘 믿는데, 우리 집에는 왜 저러한 웃음소리가 없는가?" 라고 말이다.

다시 말해서, "나는 그런 것을 기대하면서 결혼을 했는데, 내 결혼생활 10년 동안 몇 번이나 그렇게 마음껏 웃었는가?" 라고 하면서 피해자 의식을 가지게 되고, 거기에 대한 보상으로서 뭐라고 하는고 하니, "앞으로 제가 교회에 가지 않으면 전적으로 하나님의 책임입니다. 저의 행동은 정당했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너무 너무 억울하기 때문에 말입니다. 우리 집에는 깔깔거리는 웃음소리가 나지 않았습니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 깔깔거리다가 맏아들이 죽어버리면 !!

그런데 만약에 그런 깔깔거리는 웃음소리가 나는 집안에서 맏아들이 갑자기 죽어버린다고 하면, 마치 구약의 출애굽 당시의 상황처럼 말이다. 그러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때 애굽나라의 각 집에서는 애곡소리가 넘치고 넘쳐 났다는 것이다.

'눈 먼 자들의 도시 (Blindness)' 라는 영화에 보면, 한 도시의 사람들의 눈이 점점 멀어져 가는데, 그런데 그 영화의 마지막에서 그 도시에서 유일하게 웃는 자가 누구인고 하니, 소나기를 맞을 때 시원해서 그런지 몰라도, 바로 그 순간뿐이라는 것이다.

아무튼 애굽나라에서 애곡소리가 충만한데, 그 이유가 무엇인가? "내 사랑하는 맏아들이 왜 죽어야 합니까?" 라는 것이다. 아브라함의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바치는 것도 그렇고, 또한 요셉이 죽는 것도 그렇고(?) 말이다. 아무튼 그러한 자기의 사랑하는 독자의 원통한 죽음이 없다고 하면, 즉 원통함이 없다고 하면 인간은 하나님의 아들을 죽일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파트에서 흘러나오는 그 해맑은 웃음소리의 경우에도, 만약에 그 집의 장자를 죽여버리면 말할 수 없는 분노로 인하여 원통함이 흘러나오게 되는데, 그때는 개콘이나 그 어떤 드라마를 보아도 전혀 재미가 없다는 것이다.

◈ 장례식에서의 특이한 경험 !!

제가 20대 초반 젊었을 때 장례식에서 웃음소리가 만발하는 아주 특이한 경험을 했는데, 물론 지금도 이팔청춘이지만 말이다. 어느 집안에 아주 고집스러운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물론 연세도 들만큼 들었고 말이다. 그분이 금요일에 돌아가셔서 3일장을 하니 일요일에는 이제 손님들도 다 가시고 한적한데, 그때 MBC에서 그 당시 최고의 인기프로인 '웃으면 복이 와요'를 방영했다는 것이다.

그때 저는 아주 친한 친구의 할아버지라서 그 자리에 있게 되었는데, 그것을 시청하면서 얼마나 웃음이 만발을 하든지 말이다. 이제 고집쟁이 할아버지도 보내고, 장례식도 모두 마치고, 그야말로 홀가분하기 짝이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는 "아하, 장례식에서도 구봉서나 배삼룡 때문에 웃을 수가 있구나" 라고 하는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었는데, 아주 놀랍고 독특한 경험이었다는 것이다.

◈ 그런데 할배가 아닌 장자를 !!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집안에서 처리하기 곤란한 할아버지를 죽게 한 것이 아니라, 온 가정에 유일한 희망이고 대를 이어갈 집안의 미래인 장자를 그만 죽여버린다는 것이다. 그것도 한 두 집도 아니고, 전체 애굽나라에서 말이다.

하나님께서는 애굽나라의 장자도 물론 죽이지만, 이스라엘의 장자도 역시 죽여버린다는 것이다. 그런데 유독 이스라엘의 장자는 이 죽음에서 벗어났는데, 왜 죽지 않았는가? 그것은 바로 문설주에 발린 어린양의 피 때문에 그러한데, 그러니 그 피만 없으면 다 죽은목숨이라는 말이다.

◈ 세상이 애곡의 바다가 되었을 때 !!

그러므로 이 세상이 바로 이런 애곡의 바다가 되고 슬픔의 바다가 될 때, 그때 비로소 하나님의 어린양의 모습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것을 모르고 아파트의 웃음소리만 듣고, 자기도 그렇게 되고 싶어서 교회에 다니려고 하는 것이지, 정말이지 하나님의 원통함과 하나님이 죽었다고 하는 사실에 눈 뜬 사람은 거의 없다는 것이다.

지금 우리 교재인 '지옥의 하나님'에 나와있는 목사들의 모습은, 저는 감히 장담하기를, 현 한국교회의 모든 목사들의 공통점이라고 할 수 있다는 말이다. 이것이 우리 교재에 계속해서 나오고 있는데, 바로 그러한 점에 대해서 한번 살펴보자는 것이다.

여기 일단 교재 147페이지를 살펴보자.

** 목사의 유일한 희망은 사는 것이다. … 참으로 멀리 있는 신이 아니라 가까이 있는 신이라면, 작은 괴로움도 놓치지 않는 분이라면, 죽음보다 더 괴로운 것이 죽지 못해 사는 것임을 충분히 이해해 주시고, 모든 것을 용납해주시리라. 그 괴로움 속에서도 신의 존재를 부인하지 않는 한결같은 나의 이 신앙심을 설마 못 본 척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니 하나님은 그런 우리 인간들의 원통함의 보상으로 필요한 것을 채워주신다는 것이다.

** 신학보다 교리보다 더 다급한 것이 있어서 교회에 온 사람을 보고 무슨 난해한 성경해석을 늘어놓으리요. 이제는 나는 그들의 삶의 일부가 되어서 그들이 괴로워하는 것을 나도 같이 괴로워하고, 그들이 원하는 것, 곁에서 그것을 채워달라고 모호한 하늘에서 신에 빌어주는 것, 이것이 진정한 목회가 아니겠는가?

◈ 하나님이여, 저희들의 원통함을 !!

그들은 자기 원통함에 한이 맺혀서 온 사람들인데, 그들에게 무슨 성경해석이 의미 있느냐는 것이다. 신학교에서도 별로 그런 골치 아픈 것은 별로 인데 말이다. 하나님으로부터 위로를 받고 정을 나누고, 또한 자기들을 위한 신의 전능한 대책을 듣기 위해서 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목사는 교인들의 그러한 필요를 채워주어야만 하는데, 교인들을 대신해서 하나님께 빌든지 기도를 하든지 해서 말이다. 그것이 바로 참된 목회라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그런 판국에 도대체 삼위일체나 예정론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것이다.

이것은 시골에서 목회를 해도 아는데, 청년들은 다 떠나고 노인네들만 남아있는 곳에서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겠느냐는 것이다. 그래도 청년들이 있을 때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가 어떻고 했는데 말이다. 하지만 돌아서서 자기 신발도 제대로 찾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무슨 삼위일체를 이야기하고 또한 예정론을 이야기하겠느냐는 것이다. 다니엘서 다음에 무엇이 나오는지, 그런 것이 도대체 무슨 상관이 있느냐는 말이다.

◈ 우리는 '한미 FTA'를 반대한다 !!

그렇다면 그런 시골 노인네들이 목사에게 현실적으로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가? '한미 FTA'와 같은 것을 반대해서 자기들의 농촌을 좀 살려달라는 것인데, 즉 자기들 밥그릇을 챙겨달라는 말이다. 또한 시간이 되면 유기농 재배나 파프리카 지배와 같은, 그러한 특화된 작물들을 재배하는 방법을 배워서 자기들에게 좀 소개해주면 좋고 말이다.

하지만 시골의 젊은 목회자의 경우에, 그래도 자기는 꿈이 있고 생각이 있어서 시골에 왔는데, 자기는 너무 예리하고 똑똑해서 도시에서 견제가 심해서 시골로 왔다는 것이다. 그래서 처음에는 본회퍼나 판넨베르그도 이야기를 했는데, 하지만 교인들이 그런 것에 관심이 있을 리가 없다는 것이다. 아무리 준비해서 설교를 해도 듣지 않는다는 것이다. 새벽기도시간에 기도를 하라고 하면, 그때는 웅성웅성 거리면서 정신을 좀 차리든지 하지 말이다.

아무튼 그들이 요구하는 것은 '농촌 살리기' 인데, 그렇게 농촌이 살아야 시골교회에 헌금이 들어오고, 또한 헌금이 들어와야만 목사가 산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까 제가 말하기를, "목사의 유일한 희망은 사는 것이다" 라고 했다는 말이다. 하지만 그렇게 농촌 살리기를 하려고 하면, 기존의 모든 신학을 다 접고 자기는 민노당에 가입을 하든지 해야한다는 것이다.

◈ 제가 시골을 많이 다녀보았는데 !!

제가 본의 아니게(?) 그동안 시골을 많이 다녀보았는데, 물론 지금도 그렇지만 말이다. 그러한 시골 목사들이 주로 하는 일이 바로 그런 것이라는 말이다. 농협 앞에서 띠를 두르고 텐트를 치고 서명을 받는데, 비료값을 좀 내려달라고 말이다. 왜 목사가 앞장을 서는고 하니, 그래도 조금 배우고 젊다고 그렇게 하는데, 보통 시골 마을에는 목사부부만 젊지 나머지는 다 노인네들뿐이라는 말이다.

또한 그렇게 띠를 두르고 서명을 받는 일은 아니더라도, '내 고향 농산물 팔아주기' 라고 해서, 자기 지역에서 나는 마늘이나 고추나 양파 등을 팔아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려면 인터넷도 잘해야하고, 홈페이지도 만들 줄 알아야 하고 말이다. 또한 지역 유지들과 연결을 해서 연예인들을 불러서 지역을 홍보하는 일에도 앞장을 서야하고 말이다. 그러니 도시든 농촌이든 간에, 목사가 먹고살려고 하면 온갖 짓을 다 해야 한다는 것이다.

◈ 목사님, 그런 짓을 하면 되겠습니까?

그래서 제가 한번은 "목사님, 그런 짓을 하면 되겠습니까?" 라고 물으니, 그들은 오히려 뭐라고 반문하는고 하니, "그동안 신학교를 다닐 때는 몰랐는데, 이렇게 시골에서 목회를 해보니 추상적인 신이 아니라, 정말이지 가슴에 와 닿는 참된 신학을 합니다" 라고 한다는 말이다.

그러니 그 사람들 생각에는, 그러한 자기의 행동이 곧 하나님이 낮아지신 그런 표본이 아니겠느냐고 여긴다는 것이다. 빌립보서 2장에 나오는, 즉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졌다는 말씀을 그런 식으로 마구 가져다가 붙인다는 말이다.

그렇게 자기는 마음에 낮아졌다고 자랑 아닌 자랑을 하는데, 그러나 사실 모두가 다 먹고살려고 하는 짓에 불과하다는 말이다. 하지만 그런 인간이 만약 도시의 큰 교회에 나오면 어떻게 되는가? 만약에 말이다. 당연히 다시 원위치가 되는데, 즉 자기는 허리가 많이 아파서 좋은 차를 타야 한다고 하면서, 그랜저나 에쿠스를 몰고 다닌다는 것이다.

계속해서 교재 147페이지를 보자.

** [교회 내의 주도권 싸움] 이것은 수많은 목회자의 진심이다. 그러나 진심은 진리가 아니다. 진심은 진리와 전혀 다르다. 그들의 본심은 수단껏 사는 수를 찾아 나서는 것이며, 애를 공부시키고 아내와 더불어 짧은 인생을 보다 여유를 가지고 사는 것이다. 평범하고 소박하게 살고 싶을 뿐이다.

여기에 보면 "진심은 진리가 아니다" 라고 하는데, 즉 자기가 아무리 솔직하게 이야기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진리에 가까운 것도 아니고, 진리는 더더욱 아니라는 말이다. '취중진담' 이라는 말이 있는데, 그러나 그것은 결코 진리가 아니라는 것이다. 자기 나름대로는 진리일지 몰라도 말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따라서 목회자에게 교회는 생존의 터전일 뿐이다. 만약 자기보다 더 설교를 잘하고 인기가 있는 부교역자가 있다면, 이판사판의 정신으로 처신해야 한다. 어떻게 해서라도 당장에 내보려고 한다. 도대체 이 교회가 누구 밥그릇인데, 감히 날아온 돌이 ….

그러니 이것이 꼭 교회만 그런 것이 아니라, 미장원을 해도 마찬가지인데, 자기 앞 장소에 더 머리를 잘하는 미장원이 생기면 질투를 한다는 것이다. 사실은 모든 것들이 다 그렇다는 말이다. 그래서 제가 주장하고 싶은 것은 무엇인고 하니, 복음보다도 더 교회에 관심이 있다면 그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 복음을 아는 교회라고 하면 !!

보통 목사나 장로 임직식에 가게 되면, 보통 그런 곳에 가면 일단 그 교회의 성향을 살펴보게 되는데, 그 교회에서 설교하는 목사님이나 우리 노회의 다른 목사님들도 역시 그러한데, 그러한 과연 교회의 교인들이 관심을 복음에 두는지, 아니면 교회에 두는지 말이다.

그런데 만약에 교회에 관심을 둔다면 설교하기가 얼마나 힘이 드는지 모른다는 것이다. 아무튼 목사로서 설교를 하면, 일단은 교인들을 사랑으로 대해야 하는데, 그런데 교회를 우선시하는 교회는 복음으로 주어지는 사랑을 받지 않으려고 하니, 그야말로 무척 곤란하다는 것이다.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고 하니, 복음이 아닌 교회에 관심이 있으면 늘 법을 기초로 하지만, 그러나 복음에 관심이 있으면 법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자유에 기초로 하고 있다는 것이다.

◈ 그런데 '내 교회' 라는 의식이 생기게 되면 !!

그러나 복음이 아닌 교회에 관심이 있으면 어떻게 되는가? 이것이 무슨 의미인고 하니, 일단 "이것은 내 교회이다" 라는 의식이 강하다는 것인데, 그렇게 '내 교회' 라는 것이 있게 되어버리면, 지난번에 샤르트르를 공부하면서 뭐라고 했는고 하니까, 자기 것이 있다고 하는 것은 반드시 비교대상이 있게 된다고 말이다.

다시 말해서, 남의 교회와는 달리 자기교회가 된다는 것이다. 물론 다른 교회보다 못한 자기 교회가 아니라, 더욱 더 뛰어난 교회가 말이다. 즉 저쪽 교회보다는 더 행복하고, 더 하나님께 인정을 받는 교회가 말이다. 예배당도 더 멋있어야 하고, 교인들의 숫자도 더 많아야 하고, 그렇게 더욱 더 안정된 교회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내 교회' 라는 의식을 가지려고 하면, 남의 교회를 의식하지 않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교회가 '내 교회' 라는 의식을 가지고서 남의 교회를 비판한다는 것 자체가 수상한데, 그것은 바로 자기 교회가 더 뛰어나다는 의식을 가지는 것인데, 즉 그러한 것을 가지고 바로 자기 정당성을 찾으려고 한다는 것이다.

◈ 누가 왜 원통한가?

제가 이번에 임직식을 간 교회는 기존 교회의 목사가 썩어빠져서 뛰쳐나온 교회인데, 그런데 그것이 아까도 말했지만, 원통함에서 보상을 받는 식으로 자기 행동에 의로움을 주장한다면 곤란해진다는 것이다. 그 원통함이란 무엇인가? 자기가 그렇게 십일조도 바치고 봉사도 하고 최선을 다했는데, 그런데 어디서 엉터리 목사가 와서 독재를 하는 바람에 도저히 견디지 못해서 그만 나왔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 목사가 복음을 제대로 전하지 않아서 원통한 것이 아니고, 자기가 10년 이상을 그렇게 그 교회를 위해서 헌신을 했는데, 그런데 뛰쳐나오면서 그런 자기의 지분을 하나도 챙기지 못하고 나온 것이 원통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도 자기가 다니는 교회가 엉터리인 줄 알면서도 나오지 못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있는지 모른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저 목사는 틀렸다" 라고 자기들이 의로운(?) 행동을 했다고 하면, 하나님께서 뭔가 보상이 있을 것인데, 그것이 바로 저쪽보다는 더 멋있는 교회, 더 사랑이 넘치는 교회, 우리 지역에서 제일 소문이 잘난 교회 등등, 그런 것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것에 관심이 있다고 하면, 제 아무리 기존교회를 비판하고 뛰쳐나왔다고 해도 여전히 교회 중심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교회 중심이 되면 법을 만들어버리고 말이다.

그래서 그 교회에서는 몇 년 전에 여자집사를 세우면서 안수를 했다는 것이다. 즉 "우리교회는 여자집사라도 안수를 해서 세운다. 그러니 서리집사는 인정하지 않는다" 라는 것인데, 그것을 아예 교회의 정관에다가 못을 박아놓았다는 말이다.

그래서 그 당시에는 모두가 의아해했는데, 여자집사를 세우면서 안수를 하니 말이다.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고 하니까, 나중에 장로도 될 수가 있다는 말이 되는데, 물론 목사도 될 수가 있고 말이다. 그러한 길을 모두 열어놓았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기존의 자기들이 속했던 고신교단의 교회보다 뭔가 새롭다고 하는 것을 주장하는 모습이고 말이다.

◈ 과연, 복음과 법이 연결되는가?

그렇다고 하면, 과연 "이 복음과 법이 연결이 되는가?" 라는 것이 문제인데, 복음은 못난 자에게 주는 주님의 용서이고 자비라는 것이다. 얼마나 못났는고 하니, 자기의 원통함으로 인해서 신에게 덤벼들던, 그렇게 해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게 한 인간들의 노골적인 반발을 가질 정도로 말이다. 사실 못났다기보다는 못된 인간들이라는 것이다.

그러한 못된 인간들에게 용서가 주어지는데, 그런데 이 교회에 복음이 매치가 되려면, 이 교회가 어떤 상태가 되어야 하는고 하니, 자기들이 바른교회를 해서 원통함을 받으려고 하는, 그러한 자기 의로움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히게 했다고 하는 것은 스스로 인정해야만, 그렇게 해야만 주님의 사랑과 용서가 서로 매치가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만약에 법이 있다고 하면 두 종류가 생기게 되는데, 법을 지키는 사람들과 그렇지 않는 사람들이 말이다. 물론 중간부류도 생길 것이고 말이다. 그런데 그렇게 되면, 가장 교회의 법을 잘 지키는 사람들이 누가 되는고 하니, 당연히 교회의 직분자들이 되는데, 즉 목사와 장로와 집사가 되어버리고 만다는 것이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은 법의 내막을 몰라서도 지키지 못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고 말이다.

◈ 할머니, 3만원 되겠습니다 ??

예를 들어서, 산골에 살던 할머니가 도시와 와서 길을 가는데, 가다가 보니 노란색 선이 있는데 그냥 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때 저쪽에서 경찰이 나타나서 하는 말이, 도로교통법을 위반했다고 벌금을 내라고 한다는 것이다. 물론 그 할머니는 법을 전혀 모르고 있는데, 예를 들어서 말이다.

또한 가끔 어떤 경우가 있는고 하니, 버스를 타면 절에서 오랜만에 내려온 중이 꼭 차비는 얼마인지, 어디로 가는지 기사에게 물으면서 버스를 자꾸만 지연을 시킨다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에게 민폐를 끼치면서 말이다. 미리 좀 알고 타면 좋을 텐데 말이다.

아무튼 그렇게 법이 중심이 되면, 그 교회는 당직자들 중심으로 되도록 되어있는데, 왜냐하면 그들이 법을 더 많이 알고 지킨다고 하니, 교인들이 그들에게 복종하도록 되어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교회는 당연히 이러한 법이 중심이 되면 안 된다는 말이다.

이제 교재 148페이지를 계속해서 살펴보겠는데, 지금 우리가 공부하고 있는 부분이 '교회 내의 주도권 싸움' 임을 기억하고서 말이다.

** 그러면서도 교회 장로들이 목사에게 짜증을 내는 일은 단 하나뿐이다. 번잡스러운 교리나 조직신학을 가지고 시비를 거는 것이 아니다. 그런 것을 다 걷어내고라도, 도무지 존경을 받을 구석이 전혀 없는데도 불구하고 막무가내 자신을 존경해달라고 하니 사람이 환장할 노릇이다.

이렇게 읽어보면 이상하게도 전혀 어려운 말이 없는데, 계속해서 살펴보자.

** 교회에 처음 나온 교인들이야 목사의 번지르르한 허우대를 보고서 존경과 인품에 감탄을 하지만, 조그만 상대해보면 그 안에 쓰레기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을 뻔히 아는 바인데, 거기에 대고서 나이를 초월해서 존경과 합당한 예를 강요하니, 도대체 민주주의 세계 안에 군주주의가 태동한 셈이다.

◈ 어이 김 장로님, 반갑소 ??

목사들 가운데 더러운 버릇을 가진 자들이 가끔 있는데, 자기보다 훨씬 나이가 많은데도 반말 비슷한 것을 쓴다는 것이다. 말끝이 모호하다는 것이다. 마음 같으면 한 대 쥐어박고 싶은데, 법이 있어서(?) 참아야 하고 말이다.

그렇다면 목사가 왜 그렇게 하는가? 거기에 대해서 목사는 뭐라고 하는가? 그것은 바로 목사 개인이 존경받고 싶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나이가 많은 장로가 목사를 존경하지 않으면 교회에 질서가 서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니 목사가 먼저 그렇게 존경을 받아야, 장로도 교인들로부터 존경을 받는 그런 제대로 된 교회가 된다는 말이다.

그러니 목사 자기는 그런 존경이 굳이 필요 없는데, 교회를 위해서 그렇게 한다는 것이다. 교인들로 하여금 "아하, 교회직분이 참으로 중요하구나" 라는 것을 깨닫도록 말이다. 바로 그렇게 해야 영적인 권위가 서고 말이다. 물론 핑계에 지나지 않는 개소리(?)이지만 말이다. 그러니 일종의 휴전제의인데, 그러면 장로는 "다음에 한번 두고보자" 라고 하면서 지나간다는 것이다.

계속해서 교재 148페이지를 보자.

** ['목회'라는 알리바이] 그런데 반대로 십자가를 앞세우는 설교를 하는 목회자가 있다고 한다면, 그는 낯선 존재인 것처럼 느껴져서 장로들은 그것도 마뜩치 않다.

◈ 목회도 일종의 알리바이 !!

여기서 '알리바이' 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것은, 목회도 하나의 권력이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이다. 아무튼 십자가를 설교하는 목사가 있다고 하면, 장로들이 하는 말이 무엇인가? "사람은 바르고 참 좋은데, 하지만 세상을 너무 몰라. 이렇게 해서는 교회가 안 되는데"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마뜩치(?), 즉 마땅치 않다는 말이다.

이렇게 목사가 십자가를 앞세우게 되면 교인들이 좋아할 줄 알지만, 전혀 그것이 아니라 오히려 부담스러워하는데, 특히 장로들이 말이다. 왜냐하면, 목사는 목회가 자기 직업이기 때문에 그렇다고 치더라도, 장로들은 이 세상에서 직업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즉 교회도 생각하고 또한 자기 직장도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게 무슨 말인고 하니, 장로의 경우에는 그래도 밥이라도 먹고살려고 하면 세금도 좀 포탈해야 하고, 그렇게 남도 조금은 속이고 해야 장사가 되고, 다문 얼마라도 남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래도 장로니까 남에게 들키면 안 되고 말이다.

◈ 장로가 왜 목사를 괄시하는가?

그러니 자칫 잘못하면 교회 안에서 윤리와 도덕적인 면에서 목사에게 밀리는 수가 있는데, 그런 새파란 젊은 목사에게 밀린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자기가 교회를 세우는데 거금을 투자했는데, 그렇게 밀리면, 아까 말한 대로 그렇게 교회에서 밀려나게 되면 자기의 원통함을 보상받을 길이 없어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목사를 그만 괄시하고 천대를 하게 되는데, "목사님, 그렇게 해서 교인들을 몇 명이나 불렸습니까?" 라고 말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이러한 일이 실제로 생긴다고 하면, 이 '목회자' 라는 이름의 직업인은 깊은 패배감을 느낀다. '졌다' 라는 것, '나' 라는 존재가 갖는 소중함과 귀중함을 상대방에게 제대로 알리지 못했다고 후퇴했다고 하는 것은, 한 사람으로서 치유될 수 없는 좌절감을 안게 된다.

◈ 이제 목회자는 깊은 패배감으로 !!

아무튼 그렇게 되면, 목사의 경우에는 자기는 신학교에서 배운 대로 최선을 다했는데, 그것이 교회에 먹혀들지를 않으니, 바로 거기에서 복수심이 형성된다는 것이다. 즉 직업인인 목회자로서의 깊은 패배감을 느낀다는 말이다. 치유할 수 없는 좌절감으로 말이다.

그런데 이런 목회자의 패배감은 곧 목회자 사모의 패배감으로 연결되는데, 즉 "우리 남편이 무엇이 부족해서 저런 인간 같지도 않은 장로와 교인들에게 무시를 당하는가? 우리 남편처럼 올바르게 말씀대로 하는 목사가 어디 있는가? 그렇다고 사례를 많이 달라는 것도 아니고, 얼마나 자기들을 위해서 기도도 열심히 하는데, 그런데 왜 이렇게 힘들게 만드는가?" 라고 하면서 말이다.

◈ 신앙은 오기가 아니라 낯설음이다 !!

그렇게 목사와 목사의 사모가 서로 한 통속이 되어서 복수심을 발휘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목회자는 목회자로서 목회가 아니라 오기로 하게 되는데, 그래서 제가 "신앙은 오기가 아니라 낯설음이다" 라고 어느 글에서 썼는데 말이다. 그러니 신앙이라는 것은, 전혀 우리가 예상치 못한 것이 되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 목사의 얼굴이 일그러지는 이유는?

하지만 그렇게 목회가 오기가 되고 복수가 되어버리면, 그 다음부터는 어떤 현상이 일어나는고 하니, 그만 복수심을 강단에 서게 되는데, 그러면 목사의 얼굴이 설교를 하면서 일그러지는데, 물론 자기는 웃는다고 웃고 있지만 그러나 그것은 결코 웃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비웃음이라고 하면 몰라도 말이다. 목사들이 자기가 한 설교의 동영상을 싫어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데, 그리고 "이 귀한 복음을 듣고도, 목사를 무시하고 돈을 안 내기만 해봐라"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심방을 10번을 가면 그래도 예의상이라도 1번쯤은 나와야 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즉 "설마 오늘은 오겠지" 라고 기대를 했는데, 그런데 오지 않으면 그 화풀이를 온 다른 교인들에게 한다는 말이다. "아니, 심방을 10번을 갔으면 차비만 하더라도 도대체 얼마인데" 라고 하면서, 꼭 그렇게 돈으로 계산을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번에는 전화로 심방을 하게 되는데, 그러면 이번에는 자기 아이가 아파서 나오지 못했다고 하고, 또 그 다음에는 아이가 아플려고 해서 그만 나오지 못했다는 것이다. 아마 그 다음 번에는 옆집 아이가 아파서 못나온다고 하지 싶은데 말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그래서 목사는 강렬한 복수심으로 다음과 같이 말하는데, "하나님은 나를 주의 종으로 인정하는데, 저 인간들이 뭔데 날 알아주지 않는 거야. 내가 얼마나 대단하고 위대한 인물인지 한번 본 때를 보여줘?" 라고 말이다.

◈ 그들의 발바닥이라도 핥아주자 ??

이것이 주로 부흥사 스타일의 목사들이 내뱉는 말인데, 이런 것도 물론 나쁘지만 이것보다 더 악질적인 것들이 있는데, 소위 말하는 '개혁주의자들' 이라는 것이다. 그들은 뭐라고 하는가? "그렇다. 그들의 발바닥이라도 핥아주는 자가 되자. 목회성공의 첫걸음은 겸손함에 있다" 라고 하는데, 그러나 그것이 더욱 더 나쁘다는 것이다.

그것이 교재에 나오는데, 149페이지를 보자.

** 그렇다. 그들의 그들의 발바닥이라도 핥아주는 자가 되자. 목회성공의 첫걸음은 겸손함에 있다. 이제는 신학생의 티는 벗어버리자. 먼 장래를 위해서라도 잠시 고개를 숙여주자. 속으로 구역질나고 생리에 맞지 않지만, 아무도 날 쓸모 있게 알아주지 않는데서 오는 그 공포심보다 더 하겠는가!

이렇게 목회자라는 기능인의 공포는 사실 모든 무직자가 겪는 공포와도 동일하다는 것이다. 목회자도 비정규직이라면 비정규직이고 말이다. 그래서 장로들이 모여서 의논을 하게 되면, 목회자는 어쩔 수가 없이 보따리를 싸야 한다는 것이다. 저 같은 경우에도 별을 4개나 달았는데, 그때 대부분의 목사들은 아내의 눈치를 살피는데, "미안하다. 여보야" 라고 하면서 말이다.

이렇게 "목사님, 이제 다른 교회를 좀 알아보시죠" 라는 통보를 받아서 실직을 당할 때, 그것이 바로 비정규직의 겪는 그러한 아픔이라는 것이다. 오히려 그것보다 더 심하다는 것이다. 목사는 교회에서 쫓겨나면 직장도 잃고, 또한 집도 다 잃어버리니 말이다.

계속해서 교재 150페이지를 보자.

** 이 사회는 각자 인정받기를 원한다. 그렇다면 인정받기를 원하는 자들을 마음껏 인정해주는 목회자로 거듭 태어나는 것이다. 교인들이 목회자를 원하는 경우는, 오직 각자의 종사하고 있는 사업이 성공할 수 있도록 신의 힘이 동원되도록 요청하는 경우뿐이다.

이것은 바로 헤겔이 주장한 '상호인정' 이라는 것인데, 제가 여러 번 강의를 했는데 말이다. 인간들은 그렇게 서로가 인정해주고 인정받기를 원한다는 것이다. 제가 아픈 곳을 좀 찔렀는데, 그렇다고 하면 도대체 성경에서는 뭐라고 하는지, 성경이야기를 좀 해보자는 것이다.

◈ 언약궤는 하나님이 주신 발등상 !!

(삼상 5:1) 블레셋 사람이 하나님의 궤를 빼앗아 가지고 에벤에셀에서부터 아스돗에 이르니라
(삼상 5:2) 블레셋 사람이 하나님의 궤를 가지고 다곤의 당에 들어가서 다곤의 곁에 두었더니
(삼상 5:3) 아스돗 사람이 이튿날 일찌기 일어나 본즉 다곤이 여호와의 궤 앞에서 엎드러져 그 얼굴이 땅에 닿았는지라 그들이 다곤을 일으켜 다시 그 자리에 세웠더니
(삼상 5:4) 그 이튿날 아침에 그들이 일찌기 일어나 본즉 다곤이 여호와의 궤 앞에서 엎드러져 얼굴이 땅에 닿았고 그 머리와 두 손목은 끊어져 문지방에 있고 다곤의 몸둥이만 남았더라

구약 사무엘상 4장에서 6장을 보면, 언약궤가 스스로 움직이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런데 이 언약궤는 하나님이 주신 발등상이라는 것이다. 이게 무슨 말인고 하니까, 이렇게 하나님의 발을 점선으로 그려보면, 이렇게 하나님의 발은 보이지 않는데, 하지만 그 발을 내딛는 발판은 보인다는 것이다. 그렇게 보이는 것이 바로 언약궤인데, 그러니 언약궤는 하나님의 발이 내딛는 상자라는 말이다.

그런데 사무엘상 4장에서 6장을 보면 이 발판이 스스로 움직인다는 것이다. 그렇게 언약궤가 알아서 스스로 돌아다니면서 블레셋을 그만 쑥대밭으로 만들어버린다는 말이다. 그래서 그들은 할 수 없이 이 언약궤를 다시 돌려보낸다는 것이다.

그런데 나중에 사무엘하 6장에 보면, 다윗이 언약궤를 아비나답의 집에서 왕국으로 모셔오는데, 사실 다윗이 언약궤를 모셔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다윗의 마음을 움직여서 이 언약궤가 앞장을 선다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서 먼저 앞장을 서신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나님께서는 자기 뒤에는 다윗이든지 누구든지 뒤따르게 해서, 자기 나라를 몸소 세우신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것이 비복음적인 사람이 볼 때는 무엇인고 하니, 다윗이 강제로 언약궤를 옮기는 것으로 보여진다는 것이다. 즉 언약궤를 사람이 옮기려고 하면 옮길 수 있는 대상으로 본다는 말이다. 그러니 하나님도 자기가 믿으려고 하면 믿을 수가 있는 대상으로 보는 것이고 말이다.

바로 사울의 딸이자 다윗의 부인인 황후 '미갈'이 이런 생각을 했는데, 즉 "아이쿠, 저 언약궤가 뭐가 그렇게 좋다고 왕으로서 체통도 지키지 못하고서 저렇게 춤을 추고 난리를 피우는가" 라고 말이다. 그러자 미갈이 하나님께 저주를 받아서 아기를 낳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 하나님의 보좌에 4개의 발통이 !!

그러므로 이 언약궤가 움직인다고 하는 것은, 나중에 에스겔 1장부터 보면, 거기에 에스겔이 환상을 보는데, 바로 거기에 하나님의 보좌가 나오는데 발통(바퀴?)이 달려있다는 것이다. 그러한 4개의 바퀴역할을 하는 것이 곧 천사이고 말이다.

(겔 1:15) 내가 그 생물을 본즉 그 생물 곁 땅위에 바퀴가 있는데 그 네 얼굴을 따라 하나씩 있고
(겔 1:16) 그 바퀴의 형상과 그 구조는 넷이 한결 같은데 황옥 같고 그 형상과 구조는 바퀴 안에 바퀴가 있는 것 같으며
(겔 1:17) 행할 때에는 사방으로 향한 대로 돌이키지 않고 행하며
(겔 1:18) 그 둘레는 높고 무서우며 그 네 둘레로 돌아가면서 눈이 가득하며
(겔 1:19) 생물이 행할 때에 바퀴도 그 곁에서 행하고 생물이 땅에서 들릴 때에 바퀴도 들려서
(겔 1:20) 어디든지 신이 가려하면 생물도 신의 가려하는 곳으로 가고 바퀴도 그 곁에서 들리니 이는 생물의 신이 그 바퀴 가운데 있음이라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천사가 하나님의 언약궤를 움직이는 바퀴역할을 하는데, 그러니 하나님이 움직이라고 하면 움직이고 멈추라고 하면 멈추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스라엘의 주도권은 하나님이 모두 다 쥐고 계신다고 하는 것을 보여준다는 말이다.

그렇게 그 보좌가 4개의 바퀴가 있어서 천사들에 의해서 움직이는데, 그런데 그것이 움직일 때마다 그 주위에 등장된 인물이 모두 다르다는 것이다. 어떤 때는 소, 또 어떤 때는 사자, 사람, 그리고 천사, 그렇게 돌아가면서 다르다는 말이다. 그리고 그렇게 보좌가 움직일 때마다 심판과 저주가 나온다는 것이다.

◈ 엘리야가 갈멜산에서 !!

이것이 참으로 어려운 내용인데, 성경에 보면 '갈멜산' 이라고 나오는데, 이 산이 무슨 산인고 하니, 바알을 섬기던 제단이 있는 산이라는 것이다. 물론 다른 산들에도, 소위 명산에는 다 있었다는 말이다. 즉 과거에 하나님을 섬겼던 그런 제단에는 다 바알을 섬기는 신당들이 들어서 있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에도 보면 명산에는 다 절들이 들어서 있는데 말이다.

그런데 이 갈멜산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가? 선지자 엘리야 한 사람과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던 선지자 850명이 붙었는데, 그런데 그때 쌓은 그 제단이 바로 바알의 제단이라는 것이다. 이 바알종교는 일단 사람이 모시고 나면 뒤에 신이 도착하는 종교라는 것이다. 즉 바알은 일단 제단이 만들어지면 차후에 찾아온다는 말이다. 그래서 갈멜산에서 그들은 평소에 하던 대로 열심히 제사를 드렸는데, 즉 여호와 하나님이 이곳까지 찾아올 리가 없다는 것이다.

◈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

하지만 엘리야는 무엇을 믿었는고 하니까, 하나님의 언약궤는 스스로 알아서 하나님의 뜻대로 움직인다고 하는 것을, 바로 그것을 믿었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바알의 신전이 있는 그런 산에서 감히 하나님을 찾고 부르는데, 즉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이라고 말이다.

(왕상 18:36) 저녁 소제 드릴 때에 이르러 선지자 엘리야가 나아가서 말하되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이스라엘 중에서 하나님이 되심과 내가 주의 종이 됨과 내가 주의 말씀대로 이 모든 일을 행하는 것을 오늘날 알게 하옵소서
(왕상 18:37) 여호와여 내게 응답하옵소서 내게 응답하옵소서 이 백성으로 주 여호와는 하나님이신 것과 주는 저희의 마음으로 돌이키게 하시는 것을 알게 하옵소서 하매
(왕상 18:38) 이에 여호와의 불이 내려서 번제물과 나무와 돌과 흙을 태우고 또 도랑의 물을 핥은지라

그렇게 하니 그곳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그곳에 불이 떨어졌는데,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고 하니, 여호와 하나님은 붙잡는다고 잡히는 그런 하나님이 아니고, 언약적인 성취는 항상 하나님이 성취하고 싶은 데로 먼저 인도를 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렇게 먼저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대로 따라가기만 하면, 그렇게 따라가는 그곳이 곧 하나님이 임하시고 일하시는 곳이란 말이다.

◈ 하나님을 원망하는 바로 그 자리에 !!

이것이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다시 말씀을 드리겠는데, 인간은 자기의 원통함을 보상받으려고 하는 차원에서 신에게 덤벼들고, 거기에 대한 결과로서 자기의 의로움을 회복해달라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그렇게 덤비지 않으면 되지 않겠는가?" 라고 하는 아니라, 바로 그렇게 하나님을 해치려고 했다는 그러한 자리에 누가 등장하는고 하니, 하나님의 하나님 됨이 등장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출애굽의 원리이고 성경의 기본이라는 것이다. 즉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을 할 때에 난데없이 집집마다 있는 장자를 다 죽여서, 그야말로 온 나라전체를 통곡의 나라로 만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는 것이다. 애곡과 슬픔의 나라로 말이다.

그런데 이러한 동일한 원리가 성경에서 계속해서 하나님이 전쟁을 일으키는 곳곳마다 모두가 삽입이 되는데, 그래서 자기 죄를 자복하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순종을 하게 되면 반드시 전쟁에서 승리를 하게 되어있다는 것이다. 반드시 승리를 말이다. 즉 젖먹이와 어린아이의 이름으로 사람의 이름을 이긴다는 것이다.

◈ 이스라엘과 아람나라 !!

잠시 그 당시 모습을 지도로 그려보면, 여기 시내산이 있고 또 애굽이 있고, 터키와 아라비아가 있고 말이다. 이스라엘은 이렇게 갈릴리 바다가 있고 요단강이 흐르고 그 밑에 사해바다가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요단강 건너편에는 아람 나라가 있는데, 그 밑에는 암몬과 모압 나라가 있고, 또한 에돔이 자리를 잡고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무슨 나라와 연계해서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는고 하니, '아람' 이라는 나라와 관련해서 왕이 세워지고 폐위가 된다는 것이다. 열왕기를 살펴보면 말이다. 그런데 이 아람나라와 전쟁을 할 때 재미있는 현상은 무엇인고 하니, 그때 북쪽 이스라엘의 수도가 바로 사마리아였는데, 그때 아람나라 벤하닷 왕의 군대가 이 사마리아를 포위했다는 것이다. 물론 하나님이 부추겨서 말이다.

◈ 열왕기하 6장 이하를 잠시 살펴보면 !!

이것이 열왕기하 6장에 이하에 나오는 내용인데, 그 당시에 북쪽은 아합의 아들인 '여호람' 이란 왕이 이스라엘을 다스릴 때인데, 그때 아람나라가 쳐들어와서 사마리아 성밖에 포위를 해서 그만 성안으로 들어가는 보급로를 모두 차단해버렸다는 것이다. 그래서 시간이 점점 지나가니 성안에서는 먹을 것이 없어서 난리가 났다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여인이 왕을 찾아와서 뭐라고 하소연을 하는고 하니, 먹을 것이 없어서 지난번에는 우리 집 아이를 삶아 먹었는데, 그래서 이번에는 자기 집 차례인데 아이를 숨기고 내놓지 않는다고 말이다. 그래서 너무나 원통해서 재판을 해달라는 것인데, 이 말을 듣고 왕이 얼마나 기가 찼든지 자기 옷을 찢어버렸다는 것이다. 무슨 솔로몬의 재판도 아니고 말이다.

(왕하 6:28) 또 가로되 무슨 일이냐 여인이 대답하되 이 여인이 내게 이르기를 네 아들을 내라 우리가 오늘날 먹고 내일은 내 아들을 먹자 하매
(왕하 6:29) 우리가 드디어 내 아들을 삶아 먹었더니 이튿날에 내가 이르되 네 아들을 내라 우리가 먹으리라 하나 저가 그 아들을 숨겼나이다
(왕하 6:30) 왕이 그 여인의 말을 듣고 자기 옷을 찢으니라 저가 성 위로 지나갈 때에 백성이 본즉 그 속살에 굵은 베를 입었더라

그래서 왕이 그만 환장을 해서 누구를 찾았는고 하니, 엘리사를 찾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엘리사는 여호와 하나님의 종인데, 그 놈의 인간을 죽여버린다고 말이다. 하지만 이렇게 엘리사는 공격한다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루 말로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처참하게 된 것이 엘리사가 믿는 여호와 하나님 때문에 그렇다는 말이다. 그래서 그 하나님에 대한 원통함이 생긴다는 것이다.

◈ 원통함이 그때 그때마다 새롭게 바뀌는데 !!

이렇게 원통함이 그때 그때마다 새롭게 바뀌는데 말이다. 아무튼 그렇게 해서 이스라엘 왕이 선지자 엘리사를 찾았는데, 그런데 이 엘리사가 하는 말이 무엇인고 하니, 이제는 걱정하지 말라는 것이다. 즉 "왕이여, 내일이 되면 양식이 넉넉해질 것인데, 그래서 밀가루 값이 1봉지에 그냥 200원 정도 밖에 안 될 것입니다" 라고 했다는 말이다.

그러자 한 군대장관이 이 소리를 듣고 뭐라고 하는고 하니, "아니 하늘에 창문이 생겨서 곡식이 내려온들 어떻게 그러한 일이 생기겠는가?" 라고 말한다는 것이다. 즉 도저히 믿을 수가 없다는 말이다. 그러자 엘리사가 하는 말이, "당신은 그것을 눈으로 보기는 하겠지만 먹지는 못할 것이다" 라고 했다는 것이다.

(왕하 7:1) 엘리사가 가로되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일 이맘때에 사마리아 성문에서 고운 가루 한 스아에 한 세겔을 하고 보리 두 스아에 한 세겔을 하리라 하셨느니라
(왕하 7:2) 그 때에 한 장관 곧 왕이 그 손에 의지하는 자가 하나님의 사람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여호와께서 하늘에 창을 내신들 어찌 이런 일이 있으리요 엘리사가 가로되 네가 네 눈으로 보리라 그러나 그것을 먹지는 못하리라 하니라

◈ 사마리아 성안에 있던 4명의 문둥이들이 !!

그런데 그 다음날이 되어도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사마리아 성안에 문둥이들이 4명 있었는데, 이들이 뭐라고 하는고 하니, 자기들이 성안에 있어도 죽는 것은 마찬가지이니 밖으로 나가서 항복이라도 해서 먹을 것이나 얻어먹고 죽자고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성밖으로 나가게 되었는데, 그런데 막상 아람나라가 진을 쳤던 곳에 가보니 아무도 없었다는 것이다. 그들이 뭔가에 아주 급하게 쫓기듯이 먹을 것과 입을 것과 모든 것을 그대로 남겨두고 가버렸다는 말이다.

그런데 알고 보니, 아람나라가 군대가 전부가 환청을 들었는지, 그 전날 밤에 엄청난 군대의 말발굽 소리를 듣게 되었는데, 그래서 그들은 이스라엘 왕이 애굽과 헷 사람들에게 도와달라고 해서 쳐들어오는 줄 알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너무나도 급한 나머지 자기들의 물건도 제대로 챙기지 않고 급하게 도망을 가고 말았다는 것이다. 물론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 것인데 말이다.

그래서 이 문둥이들은 자기들의 물건은 나름대로 좀 챙겨놓고, 왜냐하면 나중에는 모두 빼앗겨 버릴 것이 뻔하니 말이다. 그리고 나서 왕에게 가서 이 사실을 알리게 되었는데, 물론 왕도 처음에는 믿지 않았지만 적들의 작전으로 여기고 말이다. 하지만 정탐군을 보내서 알아보니 그것이 아니라 정말로 그들이 도망갔음을 알게 되었고, 그래서 적들의 물건을 모두 다 전리품으로 거두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정말이지 이제 먹을 것이 넉넉해져서 밀가루 한 봉지에 200원밖에 하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다. 엘리사의 말대로, 아니 하나님의 말씀대로 말이다. 그리고 엘리사의 말을 믿지 않고 조롱했던 그 군대장관은 성문을 지키고 있다가, 백성들이 먹을 것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서 한꺼번에 몰려드는 바람에 그만 밟혀서 죽고 말았다는 것이다.

(왕하 7:3) 성문 어귀에 문둥이 네 사람이 있더니 서로 말하되 우리가 어찌하여 여기 앉아서 죽기를 기다리랴
(왕하 7:4) 우리가 성에 들어가자고 할지라도 성중은 주리니 우리가 거기서 죽을 것이요 여기 앉아 있어도 죽을지라 그런즉 우리가 가서 아람 군대에게 항복하자 저희가 우리를 살려 두면 살려니와 우리를 죽이면 죽을 따름이라 하고
(왕하 7:5) 아람 진으로 가려 하여 황혼에 일어나서 아람 진 가에 이르러 본즉 그곳에 한 사람도 없으니
(왕하 7:6) 이는 주께서 아람군대로 병거 소리와 말 소리와 큰 군대의 소리를 듣게 하셨으므로 아람 사람이 서로 말하기를 이스라엘 왕이 우리를 치려하여 헷 사람의 왕들과 애굽 왕들에게 값을 주고 저희로 우리에게 오게 하였다 하고
(왕하 7:7) 황혼에 일어나서 도망하되 그 장막과 말과 나귀를 버리고 진을 그대로 두고 목숨을 위하여 도망하였음이라

◈ 엘리사는 미래소년 '코난' ??

여기서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사실은, 하나님께서는 어떤 것을 준비하셨는고 하니까, 그렇게 난데없이 진을 치고 있는 아람나라를 엄청난 군대가 침략하는 것처럼 환청을 듣게 하신 것도 하나님께서 유발하셨는데, 그리고 엘리아에게 그 정보를 미리 알려주고 말이다. 그러니 이 엘리사는 미래에서 온 사람인데, 미래소년 '코난' 이라고 할까? 아무튼 그렇다는 말이다.

그렇게 엘리사는 미래에 준해서 살고 있기 때문에 지금 현재상태가 제 아무리 어렵다고 해도, 그러한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깊은 뜻이 있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이다. 바로 그 깊은 뜻이 무엇인고 하니까,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이 자기들이 알아서 스스로 살아가는 것을 기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그런 것은 결코 하나님의 백성다운 모습이 아니라는 말이다.

◈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

왜냐하면, 하나님의 백성은 살아간다는 것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바로 그것을 드러내는 것이 하나님 백성의 존재가치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결코 자기들이 어떻게 제대로 사는지, 그것이 결코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바로 그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이러한 사건들을 일으킨다는 말이다.

바로 이렇게 아까 살펴본 것처럼, 갈멜산의 엘리야처럼 하나님이 먼저 앞장서고 백성들은 그의 뒤를 따르는 것, 그것이 바로 교회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하면, 목회자의 경우에 자기가 목사가 되었는데, 그런데 교인들이 알아주지 않는다고 해서 전혀 섭섭해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뜻이 있기에 말이다.

◈ 교회는, 정박된 게 아니라 십자가 사건이 항상 !!

그런 의미에서 정박된 교회는 교회가 아닌데, 마치 배가 항구에 정박하듯이 그렇게 묶여있는 말이다. 제가 지난 화요일에 부산에서 강의한 것처럼, 교회는 유기체 교회가 교회가 아니라, 교회는 그 안에서 사건이 터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무슨 사건인고 하니 곧 십자가 사건인데, 그러한 십자가 사건이 항상 발생이 되어질 때, 그것이 바로 교회라는 말이다.

그런데 그런 십자가 사건이 터지려고 하면 뭔가 나름대로의 원통함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한 원통함 때문에 잘 믿던 하나님을 원망해야만 하는데, 그러한 원망 가운데 말씀을 보게 되고, 또 그런 원망함을 통해서 자기가 얼마나 죄인임을 깨닫게 되는데, 그렇게 해서 자기에게 일어나는 조그마한 일들일지라도, 거기에는 하나님의 엄청난 사랑과 용서함이 담겨있음을 알게 하신다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서 "나는 이렇게 못났는데, 잘나신 주님께서 나를 앞장서서 인도하시는구나" 라고 하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 그것이 바로 교회라는 것이다. 그러니 교회는 없는 것이 아닌데, 교회는 분명히 있는데, 그런데 그 교회는 마치 하나님의 보좌에 발통이 달려서 그 발통이 우리가 미처 모르는 우리들의 죄를, 즉 우리의 교만함과 우리의 욕심을 파헤친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바로 그러한 하나님의 언약궤의 활동으로 인해서 "아하, 나 같은 죄인도 용서함을 받았구나" 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 교회라는 것이다. 그래서 교회의 역사는 의미가 없다는 말이다. 그것이 100년이 되던지 1000년이 되던지 말이다.

◈ '순수함'에서 '숭고함'으로 전환시켜서 !!

구약을 보면 이렇게 참된 교회의 모습이 드러나는데, 그런데 목회자들은 이런 교회의 모습을 어떻게 바꾸는고 하니, 자기들의 '순수함'에서 '숭고함'으로 전환시켜서 그만 교회를 세우려고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교회는 언제나 정박된 교회의 모습에 불과하다는 말이다.

이것이 교재 150페이지에 나오는데, 한번 살펴보자.

** 그래서 목회자들은 다음과 같은 묘안을 짜낸다. 자신의 순수함을 자신의 숭고함으로 끌어다 올려놓는, 즉 '순수함→숭고함'으로 전환하는 것이다. 그리고 난 뒤에 그 숭고함에 도달한 자에게만 나오는 놀라운 신의 축복의 능력을 교인들에게 필요한 대로 팔아먹는 식으로 교회를 운영하는 것이다.

이렇게 되니 교인들은 숭고함에 도달해서 나오는 그 이익을, 즉 상품을 얻고 싶은 욕망이 생겨나게 되는데, 목회자들이 바로 그렇게 교회를 운영하는데, 그렇게 이런 숭고함이 나름대로 교회에 매진하게 만드는 미끼로서 작용하게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사실은 이런 순수함이나 숭고함은 모두가 다 인간의 오기에 불과한데, 그러나 신앙은 오기가 아니라 '낯섬' 이라는 것이다. 즉 "우리 인간이 구원을 받는다니, 참으로 낯설구나. 정말 신기하구나" 라는 것으로 다가와야 한다는 말이다. 당연한 것이 아니고 말이다.

◈ 반드시 먹고 말거야. 치도스 ??

그런데 "반드시 따내고 말거야. 먹고 말거야. 치도스(?)" 라고 한다면, 그렇게 자기의 욕망을 정당화한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자기 원통함을 하소연하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러니 십자가 앞에서는 그런 원통함도 사라지고 마는데, 즉 원통함이 자기 교만임을 느낀다는 말이다.

제가 쓴 '피' 라는 책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오는데, 물론 마태복음 21장에 나오는 말씀인데 말이다. 아직 무화과나무가 때가 되지 않아서 열매를 맺지 못하니 예수님이 그것을 보고서 어떻게 하셨는가? 저주를 하고 말았는데, 다시는 열매를 맺지 못하도록 말이다. 아직 제 철이 아니라서 열매가 없는데 말이다. 그러한 예수님의 소리를 듣고 무화과나무가 놀란 것이 아니라 같이 있던 제자들이 놀랐는데, 왜냐하면 자기들에게 하는 소리이니 말이다.

그렇게 되니까 지금 옆에 있는 예수님이 그만 자기들이 예상하지 못한 낯선 예수님이 되고 마는데, 왜냐하면 이유도 전혀 묻지 않고 따지지도 않고 바로 저주를 해버리니 말이다. 그러므로 모든 것이 다 주님의 소관인데, 그분이 축복을 하던 저주를 하던 말이다. 성도라면 그런 낯설음에 대한 평안함이 있어야 하는데, "아하, 우리가 믿는 주님은 그런 분이구나" 라고 말이다.

이제 교재 150페이지의 '교인들의 미신구조'를 살펴보자.

* [교인들의 미신구조] 교인들은 사업성공에 나서려는 자기가 생각해도 하나님 앞에 지은 죄가 너무 많다. 사업상 먹어야 될 술과 담배, 골프내기, 룸살롱 가기, 뇌물 바치기, 세금 횡령하기, 장부조작하기, 종업원 월급삭감하기, 경쟁업체 모함하기 등등 헤아릴 수가 없다. 그러나 사업은 성공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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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