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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20081202b 부산강의 : 조지래드 [신약신학]-교회자유게시판느헤미야

20081202b 부산강의 : 조지래드 [신약신학]-교회

이름 : 한윤범(IP:59.6.189.223)

20081202b 부산강의 : 조지래드 [신약신학]-교회

(강의:이근호 목사)

반대하죠, 반대.

-그럼 틀이라 하는 것은 어떤 정형화된 틀이 아니라 사건, 사건이 발생될 때마다 하나의 틀이 되는 겁니까?

사건 이전에 사람이 창조돼있다, 존재돼있다, 사람이 존재돼 있잖아요. 있음이 이 자체가 틀이라니까요. 이 틀을 뭐라고 하느냐? 아까 했잖아요. 유기체라 합니다.

다시 이야기할게요. 물은 하얀 게 맞잖아요. 물이 하얗다 해서 먹을 물이야 이야기할 수 없고, 먹을 물이라는 사건이 있을 때 먹을 수 있지, 물이 하얗다고 주장한다고 다 먹을 물이 아니잖아요. 강물을 먹을 수 있습니까? 못 먹잖아요. 마찬가지로 교회라 하는 것은 있는 그 자체가 유기체적으로 있는 거예요. 유기체로 있다 하는 것은, 교회가 무엇이냐 아무 소용이 없다니까. 세상은 유기체가 아니면, 있음 중에서 두 가지밖에 없어요. 하나는 유기체로 있든지 무기체로 있든지 둘 중에 하나밖에 없지. 무기체 아니면 유기체로, 유기체 아니면 무기체에요.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역사할 때 그때 내가 교회가 아니다. 교회는 결국 예수 그리스도 교회라고 고백되어진다.

할 때 그 사람이 교회지요. 그 사람이 교회인기라.

-그 사람은 믿지만 그 사람의 어떤 잘못된 교회관

바로 나에게 지목하는 그게 교회라 할 때 지목하는 사람이 누굴 지목합니까? 감독과 장로와 집사로 지목하잖아요. 그러면 이 직분은 뭡니까? 주님의 사건을 담고 있는 성경대로 감독 직분 맞잖아요. 그러니까 사도 바울 말이 맞다고. 감독과 장로를 세우고 집사를 세워서 교회를 봉사케 한다. 그것도 말씀을 전담케 한다. 이 말이 맞는 거예요. 그런데 ‘나는 목사다. 내 말 들어라.’ 이건 틀렸다 이 말이죠.

성경에 모든 감독이라든지 직분, 모든 말씀은 말씀을 말씀 되게 하는 주체자가 주님이십니다. 그럴 경우에만 교회가 되는 거예요. 왜냐하면 ‘예수님은 머리 되신다’는 이 말은 다른 말로 하면, ‘예수님은 그 교회의 주가 되신다’는 말입니다. 머리되신다는 말이 왜 주가 되시느냐 하면, 사람의 머리 같으면 머리에서 흘러나오는 게 없잖아요. 신경이나 흘러나오지 안 나오잖아요. 피는 어디서 나옵니까? 심장에서 나오죠.

그런데 교회에서 모든 은사는 어디서 나옵니까? 머리에서 나오는 거예요. 머리가 그냥 덜렁 머리가 아니라 계속 머리에서 나오는데 그 나오는 정도가 어느 정도로 나오느냐? 에베소서 1장에 보니까 이래 돼있어요. ‘충만’, [피]란 책에 보면 이걸 흐르고 넘친다고 했어요. 충만에서 나온다는 이 말은 뭔 뜻이냐 하면, 여기 지체 돼있는 사람이 구태여 자기 능력을 자기 자실과 능력을 발휘할 필요도 없고 그런 허락도 안 해요. 넘치는 것으로 인하여 지체에게 주어져서 이 지체는 그것을 어디다 영광 돌리느냐 하면, 머리되시는 주님께 영광 돌리게 돼있습니다.

만약에 자기 능력이 나와 버리면 이게 주님한테 올라가지 않고 이게 어디에 멈추느냐 하면, 자기 고유의 유기체, 나라는 유기체에 멈춰버려요. 나는 목사입네, 나는 장로입네 해서 스톱이 돼버린다고. 오늘도 목사 일을 하게 하신 주님, 이게 아니고 나는 목사이기 때문에 한다. 자기 자신에게 멈춰버려요.

그게 뭐냐? 그거는 하다보면 ‘야, 목사 일 힘들어서 못 하겠다.’ 충만한 게 아니고 자기 딴에 열심히 하려고 했는데 능력이 이것밖에 안 돼서 못 하겠다 해서 그 인식 자체가 어디서 흘러나오는 충만함이 아니고, ‘아이, 이것밖에 안 되네. 공부 좀더 해서해야겠다.’ 자꾸 자기에 대한 확인을 하게 된다 말이죠. 그러면 그 모습이 교인들에게 비춰버리면 교인들은 목사의 모습에서 주님이 보이는 게 아니고 목사 자신의 열심이 나와 버리죠. 그러면 그 순간 그 목사는 그리스도 몸을 제대로 봉사 못한 게 돼요. 항상 설교하면서도 자기 부인이 돼야 돼요.

-목사님 가르치는 내용이 전달이 안 되는 것이, 말씀이 임할 때 틀, 유기체, 자기 자신을 부인하는 그것이 교회 아닙니까. 예수님만이 교회라고 할 때 그러니까 그 틀이 결국 부인하는 유기체가 있다 할지라도 교회는 확인 안 되는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지금 틀이 있다고 하니까 틀 있는 우린 지금 교회가 아니라고

틀 없는 경우가 없습니다. 모든 게 눈에 보이는 형체가 있다. 만약 욥처럼 입을 가리고 재를 뒤집어쓰면 다른 사람이 뭐라 하겠습니까? 자기도 욥처럼 입을 가리고 재를 뒤집어쓰니까 그게 하나의 형식이 되고 틀이 되죠. 사람이 살아있으면 어떤 틀이 없다 하면 심지어 ‘우리는 장로 없다’ 하는 그것도 하나 틀일 수 있죠.

-말씀이 누굴 증거하느냐? 내 증거냐 아니면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냐?

그렇지요.

-그때 자기 살아있을 때에 그럴 때 틀이라고 할 수 있느냐?

할 수 있습니다.

-자기 부인하는 그것도 하나의

틀입니다. 그게 아까 해봅시다. 에스라, 느헤미야에서 에스라는 율법이라는 정신, 이걸 해서 포로 전의 상태로 회복해보겠다. 그리고 느헤미야는 성전을 지었지요. 이거 에스라, 느헤미야가 했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이것 누가 했느냐 하면, 하나님께서 일부러 시켰어요. 시켜서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성전 존재에 대해서는 비록 너희들이 제대로 간수 못했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이 뜻을 포기할 마음은 없다 이래 보는 거예요.

말라기에 나오죠. 레위 언약의 영원성. 하나님의 율법 정신과 성전 고수를 비록 사람이 그걸 달성 못한다 할지라도 절대로 나는 포기할 의사가 없다는 식으로 하나님께서 에스라, 느헤미야를 보내서 간소하나마 일부러 만들죠. 이것도 시간이 지나면 다시 뭡니까? 율법도 시들해지고 다 시들해져요. 왜냐하면 그 당시는 선지자가 없으면 잔소리 하는 사람 없어서 다시 원래대로 항상 돌아가게 돼있어요.

여러분, 구약의 선지가가 없게 되면(있어도 마찬가지지만) 과거 가지고 들먹이면 인위적인 방법의 반복이 돼요. 그럼 뭐로 바뀌느냐 하면, 과거의 것이 형식화돼요. 그 대표적인 것이 뭐냐 하면, 사울 왕이 전쟁을 해야 되는데 분명히 약속 시간 10시인데 오질 않는 거예요. 그런데 민수기에 보면 전쟁할 때 반드시 제사를 드려서 해야 돼요. 언약궤 앞장서서 언약궤에서 말씀을 받습니다. ‘이길 수 있을까요, 없을까요?’ 제사를 드려서 말씀을 받는데 사무엘이 오질 않는 거예요. 자기 먼저 한 거예요. 그동안 해 왔던 걸 했다 이 말이죠.

사무엘이 지가 뒤늦게 와서 뭐라 합니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잖아요. 그렇다면 제사를 제사답게 지내려고 했던 이 정신은 이미 한물 간 정신이다. 이거는 사무엘 선지가가 오기 전까지 알았던 정보지요. 선지가가 오면 너희들이 알던 이 제사정신 말고 플러스알파, 순종할 새로운 지침서가 마련되죠. 이런 게 어려운데 새로운 지침서가 마련되면 그 뒤에 일어날 사건들은 뭐냐? ‘이 지침서가 과연 진리 맞습니다’ 하는 사건이 터지게 돼있다고요.

그런데 만약에 질서를 무시해버리면 사람들은 새로 닥친 일어난 상태, 전쟁 상태지요. 상태에 대해서 과거 동안 집착된 자기 안 것 가지고 이 사태를 해결하려고 할 때 반드시 실패에 이룰 수밖에 없는 겁니다. 이런 과거의 인간의 누적된 정보량, 하나님의 계시 모아서 해봐도 실패인데 새로운 지침에 의하면 이거는 젖먹이와 어린아이라도 이겨요. 이건 어제 이태현 목사님 이야기했잖아요. 젖먹이라도 이긴다고. 시편 8편에 나오듯이. 젖먹이라도 승리할 수 있는 왜 승리 못하는가? 그거는 새로운 계시에 대한 복종이 없기 때문에.

이태현 목사님의 주제가 뭐였습니까? 오늘날 한국교회는 복종이 없다고 했거든요. 2시간 20분 동안 들어보세요. 늘푸른교회 들어가서. 저는 그걸 들으면서 흐름이 어떻게 되는가를 조사해 봐요. 이분이 어떤 주제를 가지고 그 내용을 채우기 위해서 어떤 본문들을 해서 다윗이 복종하는 그 하나님만 진짜 하나님이고, 복종하지 않는 하나님은 하나님이 아니라는 걸 그 주장을 하기 위해서 어떤 본문을 했는가를 살펴보는 겁니다.

선지자가 만약 안 온다? 안 오면 그들은 뭐 할 겁니까? 기껏 지난 선지자들이 했던 것을 주워 모아서 그걸 형식화하고 법제화할 수밖에 없는 겁니다. 그래서 말라기 이후에 세례 요한까지 누가 없습니까? 선지자가 없는 거예요. 이것은 곧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버렸다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말라기 4장 끝에 여운을 남겼어요. “내가 엘리야를 다시 보내리니 아비의 마음을 자식에 자식의 마음을 아비에게로 만약에 돌이키지 아니하면 저주를 받을 것이라”

그러면 그 당시 말라기 이후에 비록 선지가가 없더라도 이제는 누굴 기다리느냐 하면, 이제 선지자 필요 없어요. 마지막에 엘리야를 기다려요. 엘리야 특징은 구름 타고 온다고. 그때 그 엘리야가 다시 오면 되는 거예요.

자, 여기에서 에스라, 느헤미야가 성전과 율법 중심으로 돌아가서 거기서 선지자의 새로운 이야기에 의하면 이 역사의 계속 이어짐은 인간의 역사, 인간이 앞으로 선지자 받아서 뭐하고, 선지자 받아서 뭐하고 이런 역사는 이게 다시 뒤돌아감으로 말미암아 이 선은 이미 여기서 절벽이고 끊어졌어. 단종 되었어. 단절돼버렸어요.

‘인간이 할 수 있는 게 단절되었다’ 이 말은 결국 성전을 세워도 누가 세우고? 여호와 신이 세우고, 그 다음에 새로운 율법을 해도 예레미야나 에스겔처럼 누가 옵니까? 여호와 신이 아예 우리 마음 바깥이 아니라 마음속에 하나님의 새 언약을 세우는, 그건 누가 하느냐 하면, 에스겔 끝에 보면 다윗이에요. 여기 선지자 쪽에서는 누가 오고? 엘리야가 오고. 결국 이거는 쌍으로 오죠. 다윗 같은 왕이 와야 되고, 그 왕 앞에 누가 와야 되고? 엘리야 같은 선지자 하고 완전히 짝을 이루죠. 짝을 이루어서 언젠가는 와야 된다 이 말이죠.

올 때 사람들은 엘리야를 기다렸고 다윗 왕을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뭘 모르느냐 하면, 왜 인간에게 선지자가 끊어지고 왜 이것이 후퇴해버렸는가? 왜 이만큼 쌓아왔던 것을 앞으로 전진 할 수 없는 이유가 뭐냐? 그 이유에 대해서 그들은 몰랐던 거예요. 그것은 바로 인간 자체에 대한 저주입니다.

이제부터 교회 안에 어떤 사건이 터지는가 봅시다. 사도 바울이 교회라고 했을 때 에베소서 1장에 나오잖아요. 그리고 고린도전서도 나오고 여러 가지 나오는데, 사도 바울이 교회라고 하는 것은 그 앞에 반드시 성도가 우선됩니다. 성도가 모여서 교회 되는 게 아닙니다. 지상에는 성도, 그 성도의 나타나게 된 것은 결과적으로 교회이기 때문이다 이래 보는 겁니다.

여기서 우리는 기적의 두 가지를 선언하는데 ‘만남’과 ‘나타남’, 이것은 오후 설교 때 했어요. 우리가 만남은 기적이 아니에요. 나타남을 이해할 때만 이게 기적이 되는 겁니다. 누가복음 끝에 보면 제자 두 명이 엠마오로 내려가다가 누굴 만나지요. 계속 그들은 만남으로 이어져요. 선지자를 만나야 돼, 누굴 만나야 돼, 메시아를 만나야 돼. 만나야 되는데 그들은 결국 만남이 아니었고 주님께서 자기에게 일부러 나타나주신 거예요.

결국은 여기 구약 성도들이 메시아를 만날 생각 하지 말고 결국은 이걸 그들에게 구약의 모든 말씀이라 하는 것은 신약에 대해서 마지막 때 나타날 때가 있는 거예요. 그들이 기다리든, 고대하든 이건 깡그리 무시당하고 그냥 나타나면 되는 거예요. 그래서 ‘재림’의 원 뜻이 뭡니까? 커튼 뒤에 있다가 커튼 젖혀 보니까 거기 있는 거예요. 이게 계시가 열리는 거예요. 요한계시록에서. 계시가 열리면서 커튼이 벗겨지면서 그분이 거기 있는 거예요. 밧모 섬에서 누굴 만났습니까? 예수님의 영광스런 모습을 봤잖아요. 사도 요한은 너무 놀라서 엎어졌지만. 지금 주님이 계신 거예요.

교회라는 것은 이미 있었습니다. 어디 있었느냐 하면 예수님이 십자가 지고 부활할 때 교회는 이미 있었습니다. 교회가 교회 되어간다는 말은 없습니다. 교회는 예수님 십자가 지고 부활하셨을 때 이미 교회는 있었고, 이제는 그 교회가 어떤 교회냐 하는 것은, 성도의 나타남으로 교회가 있음이 확인되죠.

그러면 성도의 역할은 뭘까요? 교회가 어떠냐를 보여주는 하나의 도구, 하나의 증거물로써 있다 이 말이죠. 이것은 성도가 모여서 교회 만들기는 없는 겁니다. 떡을 떼며 서로 제 것이라 하지 않고 서로 나눠주며 그래서 뭐 됐습니까? 그래서 교회 됐습니까? 아닙니다. 교회가 있기에 그들은 나눠줘야 했었고, 떡을 떼어야 했었고, 주님을 오실 때까지 기다려야 했던 거예요. 그리고 은사가 주어지면 설교자는 설교를 해야 했고, 봉사자는 봉사를 해야 하는 겁니다.

믿음, 소망, 사랑은 항상 있고 몸을 불사르더라도 사랑이 아니고, 사랑은 진리와 함께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견디는 거예요. 기뻐하는 거예요.

제가 광주강의 때 한 여기서 예를 들어볼게요. 전에 사우디아라비아와 축구할 때 2:0으로 이겼잖아요. 2:0으로 이겨놓고 그걸 감독하고 코치하고 앉아서 다시 한번 보는 거예요. 박주영을 전반전부터 뛰었으면 어떻겠어? 3:0 안 되겠어? 박주영 늦게 와서 피곤하다고 해서 후반전 해서 한 골 넣었는데 박주영을 전반 초반에 뛰면 어떻겠어? 3:0 됐을 걸. 이래 이야기할 수 있단 말이죠.

그때 그 말할 때 초조함입니까, 느긋함입니까? 이미 2:0으로 이겼잖아요. 느긋하지요. 오늘 부산에다 최 집사를 성도로 만들어버릴까, 아예 김 집사를 전반전 뛰게 할까? 대구에 이 장로를 대구에다 성도하게 해버릴까, 서울로 이사하게 만들까? 전부 다 뭡니까? 이미 교회의 머리되신 분이 이번에 저 인간을 성도 만들어버릴까?

이것은 머리되신 주님께서 사로잡힌 자를 사로잡는 식으로 은사를 내려줘서 그래서 성도되게 할 때 이 성도는 뭐냐? 그리스도 몸이 있음을 보여주는 은사적인 기능과 역할을 해야 되는 거예요. 그래서 저는 말합니다. 그리스도 몸을 보이지 않는 은사로 기능이 없는 것은 저는 성도가 아니라고 봐요. 지가 구원받으려고 환장한 인간이지, 절대로 거듭나게 하신 사람이 아니에요.

요한복음 3장에서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늘나라를 볼 자가 없다. 이 자체가 인간의 힘을 능가하잖아요. 이건 사람의 힘이 아니잖아요. 마찬가지로 신자가 없는데 교회 있을 리 없잖아요. 그러니까 이런 신자가 나타났다는 것은 신자, 자기가 한 게 아니고 이미 교회가 있고, 교회됨에서 뭔가 삐져나온 긴 팔이 바로 성도라고 하는 겁니다. 성도는 구원받았다는 걸 증거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 있다, 그 교회 머리되시는 분은 주님이다’ 증거하기 위해서 성도는 나온다 이 말이죠.

이걸 이쪽에서 인간 쪽에서 볼 때 유기체라고 말할 게 아니라 하나의 ‘사건’이다. 하나님이 일으킨 발생한 하나의 사건이 됩니다. 이렇게 될 때 고린도 교회 있고, 에베소 교회 있다면 어느 것이 더 교회냐 하는 말이 안 되죠. 래드 말대로. 고린도도 교회고, 에베소도 교회고. 둘이 합쳐서 교회 두 개 아니라 둘이 합쳐도 교회는 하나밖에 없고, 여기 열 개 있어도 열 교회가 아니고 한 교회밖에 없고. 일곱 교회 있어도 요한계시록에 전부다 예수님의 오른 손에 잡혀있는 한 교회밖에 없다.

그럼 좀 더 들어가 봅시다. 교회라는 것이 어디서 나왔는가? 그건 조금 있다 이야기할 거예요. 교회에서 성도될 때 여기 사건이 있어야 되죠. 지금부터 어려운데 이 교회에서 성도되는 사건이 무슨 사건이냐 하면, 바로 십자가 사건의 반복입니다. 여기서 대단히 어렵지요. ‘십자가 사건이 반복됐다.’ 이 지상에서는 반복 되는 건 없습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안경을 쓰고 또 쓰고 똑같은 경우는 없어요. 한 쪽으로 쭉 흘러가버리기 때문에. 파르메니데스입니까? 철학자가 이야기했잖아요. 한 번 지나간 똑같은 물에 두 번 목욕할 수 없다. 얼마나 당연한 이야기입니까? 강물은 흘러가니까. 여기서 인간은 변화성이 있다는 거죠.

모든 게 변화되는데 십자가 복음만 변화 안 된다. 이게 있을 수 없지요. 따라서 십자가 사건을 뭐로 번역해야 되느냐 하면, 변화 안 되는 요소로 번역을 해야 돼요. 그냥 십자가 사건 같으면 또 형틀 지고 또 올라가고, 여자들 울어야 되고. 연출해야 되니까. 그래 안 되니까.

예를 들어서 내가 물을 마신다. 어려운데 해봅시다. 어려워도 해야 돼요. 물 마시려면 팔 동원돼야 되죠. 손으로 뚜껑 열어야 되죠. 여러 가지 변화가 동원된다고요. 하지만 십자가 사건 일으키려 하면 십자가 형틀 있어야 되고, 여기 강도 두 명 있어야 되고 동원되잖아요. 그런 것이 없는데 십자가 사건 되게 하잖아요. 어떤 장치가 없는데 배치도 없으면서도 십자가 사건은 되풀이 될 수 있는 요소, 구성요소가 변하지 않는 그게 어떤 거냐?

그때는 어떻게 하느냐 하면, 이 변화되는 모든 것은 ‘한 묶음’으로 묶어버려요. 한 아담. 모든 변화를 한 묶음으로 묶어버리면 여기서 어떤 변화가 일어나도 이거는 뭐냐? 두더지 빠진 하나의 단지 속에 있는 변화지만 이 변화의 질은 오직 하나의 요소에 다 통합돼있죠. 또 하나의 단지를 둡니다. 그럼 이거는 아담 안이라면, 이건 뭐가 되겠어요? 예수 그리스도가 되겠지요. 그리스도가 수많은 변화가 있더라도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내일이나 그리스도가 뭘 해야 돼요? 동일해야 되죠. 동일함.

이 그리스도의 동일함에 우리 보통 인간이 여기에 도착되면 우리 인간은 자기를 해석할 때 뭐로 해석해야 되느냐 하면, 예수님의 동일함으로 자기를 다시 해석을 해줘야 되는 겁니다. 오늘 강의에서 제일 중요한 대목이 이 대목이에요. 나를 해석할 때 동일함으로 해석을 해줘야 돼요.

그 한 예를 지난 오후예배 때 했는데 십자가 질 때 강도 있었지요. 강도가 예를 들어서 전과 20범 합시다. 전과 20범이지만 그가 십자가 예수님 보고 ‘오늘밤에 하늘나라 임할 때 저를 생각해달라’라고 했을 때 ‘네가 오늘밤에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그때 강도가 20범 이상 왔다갔다해도 예수님의 해석이 자기 기나긴 과거를 덮쳐버리니까 자기는 뭘 해석하느냐 하면, 낙원에 갈 수 있는 지난 과거가 돼버린 겁니다. 천국에 갈 수 있는 과거가 돼버려요.

이건 환장할 거야. 내가 여자 밝히고, 강간하고, 도둑질 하고, 사람 때려죽이고, 아파트 가스관 타고 왔다갔다하고, 차사고 내고, 주차위반하고 무슨 짓을 해도 이 전부가 예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된 것이라는 걸 해석을 할 수 있는 그 동일한 해석이 주어지게 되면 전에 유기체적 자아로부터 해석한 자아가 여기에 뭐가 덮칩니까? 주님의 자아가 덮쳐버리면 나의 자아는 주님의 자아한테 숨 막혀서 끽 소리 못하고 깔리죠.

끽하고 뭐가 덮치노? 주님의 자아가 나의 자아를 덮쳐버리면 여기서는 변화의 여지가 없습니다. 변화라는 것이 우스워.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에요. 그 변화도 질적으로 그리스도를 향하여 모이게 되는 겁니다.

그렇게 되려면 옛날 자아가 생각했던 메시아관, 원인결과론, 성화론, 신론, 성령론 어디에 끽하고 숨 막히듯이 멈춰버려요? 예수님의 자아관으로 압박을 당해야 되죠. 그 예수님의 자아관을 가지고 고린도전서에선 십자가 중심.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전2:2) 십자가는 예수님의 자아에요. 그때 예수님 혼자 지셨잖아요.

홀로가 나를 덮쳐버리면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못 박혀 죽었나니 이젠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산다’라는 여기에 대해서는 어떤 변화도 의미가 없어요. 새로운 주님의 해석이 나를 완전히 콘크리트로 타설 해버렸어요. 딱딱하게 굳게 만들었어요. 연예인들 손바닥 찍는 것 있잖아요. 한 번 찍어놓고 나중에 굳어버리면 딱딱해지잖아요. 요지부동 아닙니까.

우리 성도됨이 그렇게 요지부동 된 것을 믿는 사람이 성도에요. ‘아이고, 죄졌다. 아이씨, 헌금 적게 했더니 벌 받네.’ 이게 아니라 요지부동이라. 완전히 금속으로 찍어버렸어, 나를. 예수님의 그 동일함이 우리에게 쳐들어오는 거예요.

사도 바울이 왜 교회 감독된 자들은 돈에 인박히지 아니하고, 나그네를 대접하고 왜 이런 이야기를 길게 할 수도 있으면서도 왜 나는 그리스도가 십자가 못 박힌 것 외에는 알지 않기로 하겠다고 왜 했느냐 하면, 바로 어디에 있느냐 하면 변화의 단절, 다시 말해서 구약 선지자와 백성들과 맺었던 그 관계의 단절성이에요.

더 쉽게 이야기해서 ‘우리에게 말씀 주시면 우리가 성전을 잘 보관하겠나이다. 우리가 율법대로 살겠나이다’라는 그런 시절은 깨끗하게 끝났단 말이죠. 그런 변화들은 전부다 한 묶음으로 묶으면 ‘아담 안’이다. 백날 애써도 그 말씀은 지킨다, 못 지킨다? 절대로 못 지킨다. 못 지키는 정도가 아니고, 우리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을 수밖에 없는 자기의 죄성이 마지막 종말 때 우리는 하나님의 저주받을 짓을 해대고 있었던 겁니다. 그것도 말씀이란 이름으로.

이 뱀의 새끼들아! 예수님께서. 네가 말씀 지키는 게 더러운 게 아니고 나오는 게 다 더러워요. 탐욕과 욕정과 이런 게 더럽단 말이죠. 그것 가지고 무슨 말씀을 지키느냐 말이죠.

사도 바울은 교회가 우주론적이란 말을 했는데 [십자가를 아십니까] 책에 보면 나와요. ‘우주론적’이란 말은 모든 것이 종료된 상태에요.

이래 놓고서 에베소서 1장을 생각해 봅시다. 여러분 목사니까 다 아시니까 1장에 뭐부터 나와요? ‘창세전부터’ 나오죠. 그 다음에 ‘예수 피’ 나오지요. 예수님의 동일성 또는 단일성 계속 나옵니다. 창세전에 인간은 없었잖아요. 그러니까 단일성은 여지도 없지요. 그 다음에 동일성, 단일성 다 같은 이야기입니다. 어떤 죄를 지어도 피로 말미암아 뭘 씻어준다? 죄를 씻어주지요.

그 다음에 나오는 이야기, 단일성이 뭡니까? 교회 아닙니까. 지금 여기 교회 되고자, 우리 인간이 여기 낄 수가 없어요. 우리 변화 가지고 쑤셔대지 말란 말이죠. 우리 행동의 변화 이런 것 가지고 여기 끼어들려하면 안 돼요. 교회는 사람으로 만들어지는 게 아닙니다. 진짜 오랜만에 좋은 소리 했어요. 교회는 절대로 사람으로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만들어진 것이 내려오잖아요.

여러분 안개 낀 날, 구름 낀 날 산 위에 올라가면 우리가 뭘 느끼느냐? 가야산 가서 느꼈는데 구름이 분명히 밑에서 보면 저 위에 있어요. 마지막에 돌밖에 없잖아요. 마지막 돌계단 올라갈 때는 뭔가 머리부터 축축해서 온 몸이 젖어있지요. 이게 뭐냐 하면, 변화가 어디 속에 들어간다? 변화가 단일성 속에 합류하는 대목입니다.

성도가 그리스도 몸으로 뭐 한다? ‘자라난다’ 이 말이 뭐냐 하면, 이미 있는 그리스도 몸에 드디어 합류해가는 거예요. 그걸 우리가 온 몸으로 푹 젖듯이 젖어지지요. ‘아, 내가 뭘 새삼스럽게 할 게 없구나.’ 이 지체라는 것이 눈하고 코하고 입, 발 전부다 다 떨어져 있다 이 말이죠. 그런데 몸이란 자체가 이게 유기체죠. 제가 몸이란 유기체라고 새삼스럽게 말하는 게 아니고 몸이 무기체는 아니다. 유기체라고 해서 문제 해결되는 게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냥 유기체는 대장이 없습니다. 이게 유기체 주장하는 사람의 제일 약점입니다. 그들은 유기체라고만 했지 대장이 없어요.

여러분, 축구공 굴러가지요. 축구공의 대가리가 누굽니까? 없잖아요. 그런데 교회는 뭐가 있어요? 머리가 있어요. 그러니까 유기체란 말이 잘못된 거죠. 그것 가지고 미흡하기 짝이 없지요. 뭔가 계속 굴러가도록 뭔가 발휘시키는 주동자가 있어야지. 그러니까 그 유기체란 말은 우리끼리 잘하고 우리끼리 돌아가자. 우리끼리 돌아가면 머리가 없어요. 기껏 해내야 사울처럼 과거에 알던 그것, 계속해서 계시에 푹 젖는 안개 같은 주님의 십자가의 복음에 젖는 게 아니고, 계속 우리 아는 감독, 목사, 장로 세워놨으니 우리끼리 돌아가자. 이것밖에 안 된다고요.

다시 이야기할게요. 무수한 변화, 아침, 저녁마다 다른 내 성질, 내 욕망 늘 변하는 내 욕심을 축축하게 완전히 무시해버리고 완전히 적셔버리는 그 무엇, 그게 바로 십자가의 능력이 전해져야 그게 교회입니다.

제가 [피]란 책에 나옵니다. 하나님 일의 컨셉은 뭐라 했습니까? ‘인간 무시’입니다. 완전히 무시하고 시작해요. 그 예가 [피] 책에 보면 무화과나무 비유에 나오죠. 아직 열매 맺을 때도 안 됐는데 저주해버릴 때 얼마나 제자들이 황당했겠습니까? 꼭 자기 저주한 것 같이 느낀단 말이죠. 그러면서도 자기 입장은 해명이 안 되고.

여담입니다만 사람이 자아가 있으면 반드시 변화를 추구하게 돼있어요. 지금 모습은 성에 안 차. 교인 오십 명, 성에 안 차요. 백 명? 성에 찰리가 있습니까? 오천 명, 성에 안 찹니다. 대구에 반야월 교회, ‘만 명을 주소서.’ 나중에 십만 명 주소서. 성에 안 찹니다. 왜 자꾸 우리가 기존 있는 교회에 대해서 이게 교회라고 우기느냐 하면, 기존 제도 같은 교회가 있어야 무슨 가능성? 발전 가능성, 희망 가능성을 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만약에 사건으로써의 교회, 발생된 교회로 봐버리면 자기가 뭐가 제거되느냐 하면, 내가 ‘지금보다 교인수가 늘어났으면 좋겠다’라고 발전하는 이 자체가 ‘엉터리 교회관 갖고 있습니다’라는 자기도 모르게 불쑥 엉터리 교회관을 폭로한 셈이 돼요.

목사가 교인 몇 명이 되는 간에 오늘도 저분을 위해 봉사해야겠구나. 아이고, 다행입니다. 만약에 교인 백 명 됐으면 백 명 봉사한다고 내가 얼마나 애를 쓰겠느냐. 마침 세 명밖에 안 되니까 세 명만 신경 쓰면 되네. 아이고, 감사합니다. 구원받았는데 교인 백 명 되어서 뭐 하려고? 그 뒤처리 어이 하려고? 사람은 자기 편한대로 살거든요. 이런 변명할 수 있다 이 말이죠. 나중에 보면 그런 편한 것도 문제가 되지만.

다시 한번 정리해 봅시다. 피곤에 하시기 때문에 많이 하지는 않겠습니다. 에베소서 1장에 단일성에서 변화가 일어나면 안 돼요. 단일성은 어디로 가야 됩니까? 그냥 단일성 가야 돼요. 정말 중요합니다. 변화는 이거는 탈선입니다. 변화를 추구하면 타락이에요, 일종에. 변화를 통해서 단일성을 바라볼 수 있어야 돼요.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엡5:22,25) 이게 뭐냐 하면, 둘이 계 모여 가정 만들라는 말이 아닙니다. 단일성을 잊지 말자 이 말입니다. 이런 내 남편, 내 여자 이렇게 말고 지금 우리는 단일성에 소속해 있다 이 말입니다. 이것은 가정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게 아니고 교회, 그리스도 몸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교회 신비라 했어요.

로이드 존스 목사님은 단일성으로 잘 나가다가 여기서부터 변화성으로 난리라. 노조 가입하지 마라 이런 소리 하고. 세상에. [영적 생활] 보면 나와요. 예수 믿는 사람은 노조 가해선 안 된다. 노조가입 안 하는 게 성령의 열매로 보는 거예요. 여러분 영적 생활은 딴 게 아니고 십자가 단일성 속에 놓여 있으면 그게 영적 생활이고, 성령의 역사에요. 그리고 나의 변화, 다른 사람의 차이를 논하면 그거는 잠시 성령 말고 딴 데 관심 둔 거예요.

교회 단일성인데 문제는 단일성에서 뭐가 나왔습니까? 십자가가 나오죠. 그럼 단일성에서 변화 준 것은 뭐냐 하면, 변화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고, 십자가의 은혜의 단일성을 보여주기 위한 변화가 되겠지요. 십자가 단일성에서 나온 변화기 때문에 이 변화를 통해서 어디로 자꾸 모아져야 됩니까? 속죄죠. 변화를 통해서 십자가로 모아져야 되는 겁니다. 여러 가지 권면이라든지, 여러 가지 명령이라든지. 부한 자들아 너희들은 돈 너무 사랑하지 말고 선한 일 열심히 해서 생명의 터를 닦아라.

이 변화가 뭐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그 일이 모든 시간적, 공간적 변화를 종식시키고 지금은 선지자 시대가 아니고 바로 메시아가 실제로 일하시는 시대인 것을 보여주는 그러한 시대다 이 말입니다.

마지막으로 하고 마치겠습니다.

은사 대목 나오지요. 그거 한번 보면, 은사가 래드는 열여덟 가지죠. 일, 사도, 이, 선지자 은사, 영분별 은사, 교사 은사, 지혜와 지식의 말씀, 복음 전하는 자들, 권위 있는 자들, 믿음, 이적, 병 고침, 방언, 통역, 목회, 다스림, 지도자들, 도움 권하는 이들, 자비, 주는 자. 전부다 다양성이고 이건 여러 가지 변화가 있지요. 그래서 부흥사들 이것만 해도 한 나절 강의할 수 있게 돼요.

그런데 눈에 보이는 이 모든 것이 은사가 눈에 보이지 않는 질서한테 매입니다. 그게 뭐냐 하면, ‘사랑’이죠. 사랑하니까 이것은 뭐냐 하면, 이런 여러 가지 열여덟 가지 은사가 있더라도 사랑이 돼버리면 내가 어느 은사다, 어느 은사다 하는 것이 완전히 무색케 돼버려요. 사랑은 내놔야 되지 은사만 내 놓으면 안 돼요. 은사는 발휘하는 것이고, 내가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뭐가 없으면 뭐 없다? 사랑이 없으면.

설교라 하는 것은 하나의 기능이고, 그걸 통해서 뭐가 나와야 된다? 사랑이 나와야 되는데 사랑은 뭡니까? 사랑은 이미 창세전부터 단일성. 피 흘림이 사랑이잖아요. 단일성이잖아요. 제 말이 맞잖아요. 여러 가지 은사, 다양성이 있더라도 항상 단일성을 보이지 못하면 그거는 은사가 아니다. 은사는 어떤 과정, 어떤 변화를 갖든 하나로 모여야 돼요. 십자가 증거 돼야 돼요.

그 다음에 [하나님의 전] 하나님의 전이라 하는 여기 모아놓은 것은 몸과 전, 모아놓은 것과 마찬가지로 제가 아까 이야기했습니다. 그림자에요. 구약 때는 그림자였거든요. 그림자인데 그림자가 아니라 너희들이 이미 실체가 되었다. 네가 그리스도 몸이란 실체다.

이렇게 제가 이 강의를 끝내면서 찝찝한 게 있을 거예요. 뭐가 찝찝하냐 하면, 그리스도 머리하고 지체하고 지체를 우리가 성전이라 하는데, 성전이 따로 있고, 우리 몸 따로 있고, 그리스도 몸 따로 있고, 밧모 섬에 변화된 몸 따로 있고, 교회 따로 있고 이 모든 것이 어떻게 다 설명될 수 있느냐?

우리 몸이 성전입니까, 아니면 우리 신자들이 모인 그걸 성전이라 하는 겁니까, 아니면 교회를 가지고 성전이라 하는 겁니까, 아니면 하늘에 있는 성전이 성전입니까? 이래 이야기할 수 있다 이 말이죠. 그 점을 마지막 설명하고 강의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찝찝할 것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 몸에 누가 몸이 덮친다? 예수님 몸이 덮쳐버리면 이 사이에서 파닥파닥 튀어나오는 것들이 뭐냐 하면, 구약 때 예언된 것들이 성취되었다. 성취된 개념, 성취된 단어를 가지고 여기서 튀어나오는 거예요. 우리 몸이 ‘성전’이란 말은 누가 우릴 눌러버렸다 이 말이에요. 단일성으로 우리 변화를 눌러버렸는데 눌리면서 툭하고 튀어나오는 게 뭐냐? 옛날에 구약 때 성전 개념이 우리 몸을 통해서 튀어나온 거예요.

그러니까 뭐만 주의하면 되느냐 하면, 이 성전이 죽은 나라고라고만 이야기 안 하면 돼요. 이 성전은 주님과 나와 함께 있음으로 나온 게 성전이지, 내가 성전이라 하면 큰 일 납니다. 그러면 이 성전에다 담배 피우면 안 돼. 왜? 성전의 공기가 탁해지니까. 성전에 술 먹으면 안 돼. 왜? 비틀거리면 안 되니까.

나를 따로 떼어내서 ‘내가 성전이다. 조심하자.’ 안 됩니다. 내 속에 누가 덮치면 여기는 이렇게 하면 제일 좋은데, 뭐라 하노? 방금 잊어버렸다. 철썩? 털퍼덕? 뭔가 누가 덮치면 뭡니까? 털썩, 털퍼덕하는 소리 나잖아요. 그 소리에서 나오면서 나오는 게 뭐냐? 구약에 성신이 함께 있던 구약에 예언 되었거든요. 사람이 성령이 있는 곳이 성전이다. 그 돌로 죽인 곳 말고. 그러니까 나만 성전이 아니고 뭔가 털썩하고 함께 있기 때문에 나온 게 성전 되는 겁니다. 함께 있으면 십자가 반복이죠.

모든 자아를 죽이고 시간과 공간을 다 죽여 버리고, 오직 이제는 묵시 세계, 묵시의 십자가 반복이에요. 오직 그리스도의 단일성이, 십자가의 단일함이 모든 변화를 무색케 버리는 덮쳐버리는 우리가 마치 찍힌 것처럼, 영화배우가 자기 손바닥을 찍은 것처럼 예언대로 교회가 만들어지면 그리스도 되는 교회 머리가 덮쳐버리면 우리는 성전도 돼야 되고, 그리스도 몸도 돼야 되고, 내 것이 아니고 주의 것이 돼야 되고 온갖 신약성경 용어들이 여기서 다 나오지요. 그 용어들을 통해서 십자가의 능력으로 우리가 피로 말미암아 거룩하게 되었다는 것을 확인만 하면 되는 겁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내가 따로 챙겨서 교회라고 주장하지 말고 주와 부활하신 주님으로 인하여 이미 만들어지고 쓰여지고 거듭나게 된 자체를 주님의 능력, 십자가 능력 자체를 증거하는데서 우리가 교회됨을 감사할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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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 8,422건 중 304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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