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상 9:21-24 (사울과 사무엘)
삼상 9:21-24 (사울과 사무엘)
이름 : 우리교회(IP:220.81.176.150)
본문 : 사무엘상 9장 21-24절
제목 : 사울과 사무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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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08-12-08 08:26
사울과 사무엘
2008년 12월 14일 본문 말씀: 사무엘상 9:21-24
(삼상 9:21) 『사울이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이스라엘 지파의 가장 작은 지파 베냐민 사람이 아니오며 나의 가족은 베냐민 지파 모든 가족 중에 가장 미약하지 아니하니이까 당신이 어찌하여 내게 이같이 말씀하시나이까』
(삼상 9:22) 『사무엘이 사울과 그 사환을 인도하여 객실로 들어가서 청한 자 중 수석에 앉게 하였는데 객은 삼십 명 가량이었더라』
(삼상 9:23) 『사무엘이 요리인에게 이르되 내가 네게 주며 네게 두라고 말한 그 부분을 가져오라』
(삼상 9:24) 『요리인이 넓적다리와 그것에 붙은 것을 가져다가 사울 앞에 놓는지라 사무엘이 가로되 보라 이는 두었던 것이니 네 앞에 놓고 먹으라 내가 백성을 청할 때부터 너를 위하여 이것을 두어서 이때를 기다리게 하였느니라 그 날에 사울이 사무엘과 함께 먹으니라』
사무엘은 사울에게 수석의 자리를 주고, 제일 좋은 고기 넓적다리 부위를 여러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보란듯이 제공합니다. 이로서 사울로 하여금 자신의 왕됨을 스스로 각인케 하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이 자리가 사울이 평소에 되고 싶은 자리가 아니라는 겁니다.
사울의 개인적인 여망에 소원 성취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마련해주신 자리입니다. 그런데 사람의 마음이라는 것이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자리를 마련해주면 곧장 그것을 자기 소유화, 자기 영역화 시켜버리는 경향을 보이게 됩니다.
즉 자신이 그 자리를 차지할 만 자격이 되어서 차지했다고 우기고 나섭니다. 마치 간호사에게 맞아야 될 주사를 자신이 쥐고 자기가 자기에게 주사 놓은 식입니다. 바로 사울이라는 인물이 자리잡고 있는 역할이 이 역할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이 얼마나 인간의 것으로 속히 전환되는 지를 확실하게 보여주는 역할을 하게 됩니다.
이 사울의 역할은 동시에 전에 왕을 구했던 이스라엘 전체의 숨겨진 비언약적인 사고방식을 대변해주게 됩니다. 이 일이 성사되려면 비록 사울이 왕이라고 할지라도 사무엘의 선지자직과 결합되어야 합니다. 선지자와 왕의 결합에서 우리네 상식으로서는 선지자보다 왕이 더 우위에 있고 높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하지만 사울왕에 있어서는 여전히 선지자인 사무엘에게 종속된 처지에 놓이게 됩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하나님 계시의 흐름 전체를 보아야 합니다.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계시의 흐름은 ‘가족 중심 신앙→12지파 중심의 신앙→ 왕 중심→와해된 왕체제’가 됩니다.
즉 가족 중심의 신앙에서 12지파 중심의 신앙으로 바뀌는데 이것이 인간의 힘으로 불가능합니다. 왜냐하면 인간이란 혈육적 자기 가족 중심을 포기할 줄 모르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즉 아무리 많은 숫자가 들끊는 나라라고 할지라도 각자 자기 가족 중심으로 돌아가면 결코 거룩한 하나님의 나라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가족 중심을 해체시키고 언약 중심으로 조성되는 나라를 만들었는데 그 나라가 바로 12지파 중심의 나라입니다. 이 나라가 바로 홍해를 건너가게 됩니다. 홍해의 건너감에 대해서 그동안 가족 중심은 전혀 힘이나 보탬이 되지를 못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가족 중의 장남을 하나님의 군대에 속한 군사로서 차출시켜 버리십니다. 즉 가족 중의 장자는 혈육적인 혈통 잇기 책임보다 우선해서 하나님의 거룩한 소유로 신분이 달라져 버립니다.
할례가 바로 그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애굽의 장자는 다 죽여도 오로지 어린 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른 이스라엘 가정의 장자는 살려둔 것입니다. 그 장자는 전체 언약 나라의 각가정의 대표자로 등록이 되는 겁니다. 이 장자 중의 장자가 12지파 가운데 한 지파의 특별나게 부각이 됩니다. 그 나라가 바로 레위지파입니다.
레위지파의 역할은 일반인이 하나님이 계신 곳으로 접근 못하게 막는 역할을 더불어 그들만이 특권적으로 하나님을 보시는 일을 하게 하셨습니다. 이방나라의 신들은 형상 머리부터 발끝까지 전체를 다 보이는 반면에 여호와 하나님의 형상은 단지 하나님의 발이 놓이시는 발판만이 보이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언약궤입니다. 언약궤는 하나님의 두 발이 놓이는 ‘발등상’이 됩니다. 따라서 언약궤가 이스라엘을 끌고 움직이게 되면 그 움직임 중앙에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몸체도 같이 움직이게 되는 것입니다. 마치 미국 휴스턴에 있는 발사대까지 우주선을 조립해서 옮기는 것처럼 언약궤가 하나님을 이동하는 발판 역할을 합니다.
이렇게 볼 때 하나님은 참으로 위험한 분입니다. 이 위험한 분을 모시는 이 레위지파를 통해서 모든 지파한 각가정이라는 경계를 헐어버리고 하나의 언약 집단이 되게 하는 겁니다. 사무엘이 바로 이 레위지파입니다.
이 레위지파는 항상 죽음에 관한 직무를 수행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벌리는 ‘죽음에 관한 직무’가 없이는 12지파로 뭉쳐진 이스라엘에게 있어 삶이란 보장되지 못합니다. 그 당시 장로들의 사고방식이 그 정도입니다. 12지파 공동체를 평등의 공동체로 오해한 겁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언약궤가 무엇하는 용도며 존재 취지가 무엇인지에 관심없습니다. 단지 자신네들 가정을 지켜주기 위해 지파들이 서로 협력하며 사는 것이 자기네 나라의 본질인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다른 나라로 달라야 했습니다. 다른 나라들은 국가 중심이 되었던, 종교 중심이 되었던, 가정 중심이 되었던 자기네 가정이 사는 것이 우선이었고 관권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삼킬 수 없는 것을 삼킨 셈이 됩니다. 거룩은 그들이 삼킬 대상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들이 존재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법에 의해서 인간들이 어떻게 살 수 있느냐를 전 우주에 보여주는데 있었던 것입니다.
즉 자체적인 노력으로 자신들이 어떻게 살아가느냐가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서 그들이 어떻게 살아가느냐를 보여주어야 합니다. 이렇게 되면 이스라엘 나라는 다른 나라와는 다른 생명이 나타나야 합니다. 즉 인간의 능력으로는 분명 절망이요 살지 못하게 설정된 상황 속에서 그들은 살아나야 했습니다. 이 와중에서 하나님의 말씀의 위력이 솟아 터지게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각 지파의 대표자 되는 장로들은 더 이상 레위지파 중심으로 이루어진 공동체를 버리고 이방 나라처럼 되기를 원했습니다. 이방나라의 특징은 왕 중심으로 독자적인 힘을 발휘하는데 있습니다.
즉 과연 이스라엘에는 왕이 필요치 않는 이유가 실제 왕노릇하는 자를 통해서 부정적으로 전달되게 됩니다. 사람들이 레위지파의 제사 업무를 무시하는 것은 자신을 죽음의 상대자로 해석당하기 싫어서 그런 것입니다. 자신을 너끈하게 살 자격자로 간주하기를 원하지 결코 자신이 곧장 죽어 마땅한 자로 이해하기 싫다는 겁니다. 하지만 하나님 앞에서 인간의 모습은 인간 앞에서 인간의 모습과 확연히 다른 법입니다. 우리는 늘 새언약되는 십자가 앞에서 살아야 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미래를 점치는 식으로 교회 나오지 말고, 무섭고 위험한 분을 모시는 자부심으로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