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 9:24-29 (산 밑의 상황)
막 9:24-29 (산 밑의 상황)
이름 : 우리교회(IP:220.81.176.150)
본문 : 마가복음 9장 24-29절
제목 : 산 밑의 상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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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교회
08-12-07 17: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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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08-12-08 08:25
산 밑의 상황
2008년 12월 14일 본문 말씀: 마가복음 9:24-29
(막 9:24) 『곧 그 아이의 아비가 소리를 질러 가로되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 하더라』
(막 9:25) 『예수께서 무리의 달려 모이는 것을 보시고 그 더러운 귀신을 꾸짖어 가라사대 벙어리 되고 귀먹은 귀신아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 아이에게서 나오고 다시 들어가지 말라 하시매』
(막 9:26) 『귀신이 소리지르며 아이로 심히 경련을 일으키게 하고 나가니 그 아이가 죽은 것 같이 되어 많은 사람이 말하기를 죽었다 하나』
(막 9:27) 『예수께서 그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이에 일어서니라』
(막 9:28) 『집에 들어가시매 제자들이 종용히 묻자오되 우리는 어찌하여 능히 그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
(막 9:29) 『이르시되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 하시니라』
귀신이 등장하고 나중에 ‘기도’이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귀신과 ‘기도’가 무슨 상관이 있는 것입니까? 그것은 평소에 사람들이 예수님이 원하시는 기도와 믿음과는 정반대 정신으로 살아가고 있음을 말해주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 세 종류의 주체가 나옵니다. 하나는 예수님이요 다른 하나는 귀신이요 다른 하나는 인간입니다. 이로서 여기에 세 관계가 형성될 수 있습니다. 사람과 귀신의 관계가 그 하나요, 예수님과 귀신의 관계가 그 하나요 예수님과 사람과의 관계가 그 하나입니다.
사람들은 보통 하나의 질서만 인정합니다. 즉 사람과 사람 대하듯이 예수님과 관련지으면 된다고 여깁니다. 이렇게 되면 예수님은 참된 예수님이 아니라 인간들이 조작해 낸 엉터리 예수관이 되는데 그 이유가 바로 귀신을 빼놓고서 자신과 예수님을 생각하는 바가 되기 때문입니다. 이 지상에서는 예수님과 인간과 그리고 귀신이라는 3자가 만나서 성립됩니다.
하지만 인간들은 자신만 주체로 간주하고 예수님과 귀신은 배척해버립니다. 과연 귀신이나 예수님 쪽에서 곱게 물러갈 상 싶습니까? 인간이 자신을 주체를 갖고 주도권을 쥐려는 태도 자체가 이미 인간이 악마의 종이 된 상황을 두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평화롭다고 여긴 인간 세계에 틈을 내어버립니다. 마치 쥐포를 찢듯이 인생을 찢어버리는 사건을 일으킵니다. 그럴 경우에만 인간은 새로운 사태에 대해서 관심을 갖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아이에게 귀신이 임한 사건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이는 물론이요 아버지마저 속수무책입니다. 귀신이 이러한 돌발적인 출현은 인간 세계에 틈을 내어버렸습니다. 마치 곱게 벽지발린 벽의 일부를 뜯어내면 그 안에 밋밋한 시멘트 벽이 드러납니다. 그동안 인간들은 벽지에 불과하는 그 포장지에 혼신을 힘을 다하여 꾸며왔었습니다.
이것은 빌립보서 2:5-11에 나오는 예수님의 정신과 차이납니다. 거기에 보면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라도 하나님과 동등되기를 포기하시고 사람이 되시고, 보통 사람이기 보다는 십자가에 죽어버리시는 무능한 인간 중에서 무능한 인간으로 자처했습니다. 바로 그것을 제자들이나 성도에게 요구하신 것입니다. 누구의 벽지가 화려하냐가 아니라 우리 쓴 잔을 마실 수 있느냐를 물으시는 겁니다.
인간의 세계는 뜯겨야 하고 그 속살이 드러나야 합니다. 자신의 세계관이 갈라져야 합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자신의 속살이 뭔지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있는 곳이 보물이 있건만 사람들은 그 나라와 의를 최종 보물로 여기지 않고 있습니다.
이번에 귀신을 주체를 생각해봅시다. 귀신은 사람의 몸을 좋아합니다. 미가복음 5장에서 귀신 떼가 인간 속에 들어가지를 원했지 처음부터 돼지 떼 속에 들어가기를 원한 것이 아닙니다. 인간들은 귀신을 좋아하지 않지만 귀신은 처음부터 인간을 가지고 노는 것을 무척이나 좋아합니다. 귀신은 인간을 자기 집 가구처럼 정복해 있다고 했습니다.(마태복음 12:28)
사도행전 19:13-16에 보면, “이에 돌아다니며 마술하는 어떤 유대인들이 시험적으로 악귀 들린 자들에게 대하여 주 예수의 이름을 불러 말하되 내가 바울의 전파하는 예수를 빙자하여 너희를 명하노라 하더라 유대의 한 제사장 스게와의 일곱 아들도 이 일을 행하더니 악귀가 대답하여 가로되 예수도 내가 알고 바울도 내가 알거니와 너희는 누구냐 하며 악귀 들린 사람이 그 두 사람에게 뛰어올라 억제하여 이기니 저희가 상하여 벗은 몸으로 그 집에서 도망하는지라”고 되어 있습니다.
인간은 스스로 자기 주체의식을 포기해야 합니다. 믿음이란 자기와 귀신 사이에 예수님을 집어넣고서는 자신을 부인하는 관계를 말합니다. 즉 예수님과 귀신의 관계 여하에 따라 자신은 그 결과에 승복하겠다는 마음이 믿음입니다. 귀신을 빼놓고서 자신을 규정하는 것은 무지한 짓입니다.
창세기 3장에서부터 이미 인간은 귀신의 밥이요 악마의 밥입니다. 하지만 이 귀신도 예수님에게는 꼼짝못합니다. 마태복음 8장 29절에 보면, 귀신의 자신의 운명이 자기에게 달린 것이 아님을 고백합니다.
예수님께서 귀신들린 그 현상에 오시기 전에 예수님의 제자들이나 그 귀신들린 아이의 아버지나 모두 주체자들입니다. 자신이 구멍 뚫어야 함을 모릅니다. 당연히 그들의 기도와 금식도 무용지물입니다. 귀신이 나갈 리가 없습니다. 신약에서의 기도와 금식은 모두 구약에서 흘러들어온 개념입니다.
구약에서 두 종류의 상이한 신들 끼리 줄기차게 전쟁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가 신이냐 바알이 신이냐를 두고 싸웁니다. 이것은 곧 인간들이 벌리는 기도와 금식도 두 종류가 있음을 뜻합니다. 사람들은 소위 옛적부터 효험있다고 소문난 명당 자리를 모두 자신들의 한풀이하기 위해 빌고 금식하는 제단으로 만들어 놓았습니다. 아모스 5:4-5에 보면,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족속에게 이르시기를 너희는 나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 벧엘을 찾지 말며 길갈로 들어가지 말며 브엘세바로도 나아가지 말라 길갈은 정녕 사로잡히겠고 벧엘은 허무하게 될 것임이라 하셨나니”고 되어 있습니다. 』
구약의 아모스, 미가 선지자는 외칩니다. 이 땅의 정화 차원의 안목에서 선포합니다. 인간이 세운 모든 것이 그들이 세워놓은 것들과 더불어 폐허로 변한다고 말입니다. 인간의 자율성을 허무하게 만들겠다는 겁니다.
이제 현실적으로 모든 사람은 귀신에게 악마에게 주체가 강탈 당한채 쓰려질 뿐입니다. 바로 여기에 예수님께서 주체자로 등장되면 성도는 자신을 위해서 말씀이 있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위하여 자신이 새롭게 창조됨을 압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모든 권한을 예수님에게 넘겨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즉 자기 것으로의 기도가 아니요 자기 것으로서의 금식이 아닙니다. 주님의 것으로서의 기도와 주님의 것으로서의 금식만이 하나님의 일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자존심이 형편없이 갈기갈기 찢어지게 하옵소서. 그래서 예수님의 사랑이 어떻게 새로운 피조물을 자아내는지 알고 믿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