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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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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신을 위하여 : 기독교 비판 및 유물론과 신학의 문제성경신학고린도후서

죽은 신을 위하여 : 기독교 비판 및 유물론과 신학의 문제

이름 : 이근호(IP:117.55.143.139)

죽은 신을 위하여 : 기독교 비판 및 유물론과 신학의 문제

이 근 호 목사

저 자 : 슬라보이 지젝(Slavoj Zizek)
번 역 : 김정아
출판사 : 도서출판 길 (2007)

죽음 안에서 신에 대해서만 말할 수 있다고 저자는 밝힌다. 사도 바울에 의해서 그렇게 주장할 수 있다고 한다. 죽음, 그것은 헛수고를 의미한다. 인간이 하는 모든 것을 헛수고로 만들어버리는 신이 바로 죽음으로 말하는 신이다.

그런데 인간들은 자신의 종교 행위로 더 살고자 한다. 그렇다면 종교 행위는 자신의 저주를 재촉하는 행위에 해당된다. 사도 바울에 의해서 제시된 신은 어떤 신인가? 저자는 기존의 기독교 신론의 허점을 지적하면서 이 점을 파헤친다.

신은 숨어있는 신이다. 따라서 아무도 신이 존재하는가에 대해서도 모른다. 아니, 신은 없다. 신에 대한 인간적인 인식을 발동시키기 전까지는 그러하다. 인간이 신에 대해서 궁금하고 찾고자 하는 가운데 신은 그것을 부정하는 방식으로 자신을 드러내신다. 인간들이 신에 대해서 언급하고 알고자 하면 할수록 인간은 사실 신으로부터 고립되고 동시에 신 자신도 신에 대해서 고립되어진다.

예수는 가룟 유다에게 지시하기를 자신을 배반하라고 했다.(마 26:25) 이 세상에 온갖 신이 있다 할지라도 자기를 배반할 것을 요구하는 신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뿐이다. 가룟 유다는 열두 제자로 이루어진 최초의 기독교 동아리와 보편 교회의 창시자인 사도 바울 사이를 연결하는 ‘소실되는 매개자’이다. 즉 사도 바울은 가룟 유다의 자리를 대신 차지하고 들어가서는 그 역시 스스로를 배반해야만 하는 신인 예수를 소개하게 된다.

진정한 예수에 대한 신뢰와 신앙은, 추종자로 하여금 예수에 대해서 배신케 함을 유발한다는 점을 이해하는 것이다. 숨어있는 X를 이해하는 것은, X로 인하여 주어지는 자신의 배신을 수긍하는 것이다.

이처럼 인간은 예수 앞에 서면 예수로 인하여 모든 것이 노출되어진다. 예수는 곧 ‘타인’으로서의 시선이며 그 타인으로 인해 ‘나’가 규정된다. (불교의 허점은 그 타인의 시선을 삭제하는데 있다. 즉 타인 없는 가운데 자아마저 없애려고 한다)

그런데 이 타자성은 고정된 것이 아니다. (여기에서 레비나스나 데리다의 타자성이 문제가 된다. 그들이 주장하는 타자성이란 지루한 동일성을 지닌 타자다)

예수라는 타자는 예수라는 존재의 일관성에서 주어지는 타자성이 아니라 그의 명령을 통해서 그 명령에 호출되는 인간의 태도와 반응 속에서 주어지는 것이다. 그의 명령을 접하게 되면 모든 인간의 자아가 분열을 일으키게 되고 그 분열과 벌어짐 속에서 비로소 비쳐 나오는 타자성이 예수로 인한 타자성이요 신성이다.

예를 들면, “살인하지 말라”라는 명령이 주어지게 되면, 이 명령을 받은 인간은 “하지말라!…살인하라!”로 받아들여지게 되어 있다는 것이 로마서 7장에서의 사도 바울이 전한 계시다. 즉 “살인해야만 해!”가 “하지 말라!”라는 명령의 본 내용에 해당되도록 인간 내부에서 유발된다는 것이다.

이 “네 속에서 넘쳐나는 것을 거세하라”는 곧 불가능한 명령이 되고 만다. 만약 제 때 거세 못하면 처벌이 따른다. 하지만 인간은 그 처벌을 감수할 수밖에 없는데 그 이유는, 인간의 욕망이란 넘쳐 남을 향유하는 그것이 곧 처벌이기 때문이다. 처벌의 저주스러움이란 인간이 끊임없이 쾌락 너머의 것을 계속 집착하는데 있다. 현 쾌락으로 만족하는 법이 없는 것이다. 즉 얻어진 행복이 곧 저주스러운 상태가 된다. 결코 채워지지 않기 때문이다.

법이 욕망을 자극하고 그 욕망으로 쾌락을 얻게 되지만 그것이 저주스러운 처벌이요 대가가 된다. 그래서 인간은 법을 제공한 타인을 속이려든다. 이것이 바로 희생이다. 예수를 위해 희생하는 것은 예수에게서 뭔가 얻으려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속이기 위함이다.

이로서 예수는 인간과 멀찍이 떨어지게 된다. 법을 제공하므로서 신은 최고의 위반을 저지르고 만다. 범죄자는 자신이 저지른 범죄에 대해서 응당한 처벌을 원한다. 하지만 신은 이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범죄자로 유발시킨 법 자체가 곧 정의라는 이름의 질서를 전복시키는 위반이기 때문이다. 신은 이로서 모든 원인을 제거한다. 신 자신의 죽었다는 그 죽음이라는 ‘결과’로서 모든 원인되게 하는 ‘원인’들을 삭제시켜 버린다.

신이 죽음으로서 신은 내부적으로 균열이 일어났다. 신과 신 사이에 간격이 생겨버린 것이다. 이러한 간격은 더 이상 신이 인간의 신 인식에 의해서 포착되지 않기 위함이다. 인간들이 신을 포착하고자 한다면 예수는 가룟 유다처럼 ‘사라지는 매개자’가 되어 우리들의 신앙을 ‘배신한 신앙’으로 만들어버리는 위치로 만들어버린다.

사도 바울에 의하면 기독교의 구원은 타락을 이전의 상태로 되돌리는 것이 아니라 타락을 반복시키는데 있다.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의 선택은 실은 강요된 죄의 선택이었다. 따라서 아담의 죄성을 눈여겨 볼 것이 아니라 ‘아담에게 강요함’ 자체가 구원임을 알아야 한다. 달리 말해서, 타락이 자체로 타락이 아니라 타락이 자체로 구원이 된다. ‘타락으로 오인하는 구원’이 바로 이것이다.

인간이 보는 악이란 ‘악이 악을 보는 시선’에 불과하다. 타락조차도 구원으로 이해하는데서 비로소 ‘사랑으로 인한 자유’가 발생한다. 악은 실질적으로 선과 동일하다. 악은 생성 중인 선이다. 고린도후서 11장에서 사도 바울은 자처해서 악인으로 행세한다. “그래, 거짓 사도들아, 내가 어리석은 자다. 하지만 나의 어리석음이 곧 그리스도의 능력이다”

진정한 그리스도 닮기란 그리스도의 회의와 불신에 동참하는 것이다. 죄를 부인하는 것 자체가 죄의 궁극적 증거가 된다. 신을 법을 주면서도 항상 그 법에 대해서 창조적으로 해석하며 법을 곡해한다. 이로서 인간들이 주어진 법해석으로 신을 장악하려는 시도를 뿌리친다.

사도 바울은 모든 법에 대해서 집행을 보류시킬 것을 요구한다. ‘마치-아닌-듯’의 원칙을 적용한다. “우리는 자들은 마치 울지 않는 자 같이 하며 매매하는 자들은 마치 없는 자같이 하며”(고전 7:20) 이것은 곧 신의 사랑 앞에서 법의 지켜야하는 인간 존재는 ‘아무 것도 아님’(nothing)이 되기 때문이다. 즉 사랑이란 인간이 행하는 내용이 아니라 사랑이 곧 신이다.

사랑은 단순히 법 너머에 있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법 안에 푹 빠져 있는 태도로 표현된다. 충분히 법리적으로 법을 해석하면 사랑이 나오지 완전한 법이 나오는 것이 아니다. (유대교의 문제는 ‘지나치게 법리적’이라는 것이 아니라 충분히 ‘법리적’이지 못하는데 있다.)

법에는 사랑이 너무 많다. 법과 신의 사랑은 대립되는 것이 아니다. 루터파 신학자들은 대립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법이 발생할 때 숨겨진 사랑도 같이 발생하므로 서 비로소 법을 주신 신도 같이 나타난다. 이것이 곧 구원이다.

구약 욥기의 주제는, ‘고통에도 의미가 있다’가 아니다. 도리어 욥은 고백하기를 ‘나의 고통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한다. 욥이 알게 된 신은 무능한 신이었다. 신은 정의롭지도 않았고 불의하지도 않았다. 단지 무능할 뿐이다. 욥이 깨달은 것은 이것이다. 욥에게 재앙이 닥쳤을 때 시험대에 오른 것은 욥이 아니라 신 자신이다 는 사실이다. 그리고 신은 보기 좋게 실패했다.

자신을 정당화 하는데 실패한 신, 이 신이 바로 참된 신이다. 덜미 잡히고서는 난처한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허풍을 늘어놓는 신이 바로 신의 무능함이다. 욥이 처음에 당혹감을 가진 것은 신을 불가해한 ‘사물’로 경험했기 때문이다. 즉 법 너머에 존재하는 선한 신인 것처럼 여겼던 것이다.

아버지가 강하다고 믿었었는데 그 아버지가 자기를 도와줄 수 없는 무능한 존재인 것을 알고 경악하는 아이와도 비슷하다. 이 경악이 예수에게 이어진다. “아버지에 왜 나를 버렸어요?”

신이 허풍을 떨면서 등장한 후부터 욥은 줄곧 침묵을 지켰다. 왜일까? 그것은 신의 우스꽝스러운 허풍이 바로 신의 무능함이 드러나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무지한 말로/이치를 어둡게 하는 자가 누구냐?/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네가 어디 있었느냐? 네가 깨달아 알았거든 말할지니라”(욥 38:2-5)

이로서 신이 도움을 요청할 것이 아니라 우리 인간이 도리어 신을 도와야 한다는 것이다. “나에게 점점 분명해지는 것은 오직 하나뿐입니다. 그것은 당신이 우리를 도울 수 없다는 것, 우리가 당신을 도와야 한다는 것, 우리는 당신을 도우면서 결국 우리 자신을 돕는다는 것입니다.”(1942년 유대인 수용소에서 한스 요나스가 한 말)

신은 왜 자진해서 무능한가? 그것은 무(無)를 창조하기 위해서다. 이 무로부터 세상이 창조되었다. 그래서 세상은 타락할 수밖에 없어야 한다. 이런 타락의 세상에서 진정으로 기도하는 자는 무신론자 밖에 없다. 실증적 존재자로서의 신을 거부하고 메시야적인 타자에게 기도하기 때문이다.

평 가

지젝이 주장이 과연 사도 바울이 말한 (“다른 복음 전하면 저주받는다” 갈 1:8) 십자가 복음에 부합되는 내용인가를 살펴봐야 한다. 지젝의 지적은 오늘날 기독교에 자리 잡은 신론의 허점을 잡고 시작한 내용이다. 즉 신에 대한 변증과 변호를 통해 신을 믿는 그들의 자기 긍정을 도모하는 논리에 대해 공격한 것이다.

하지만 사도 바울의 십자가 복음은 ‘예수님 살해’를 출발점으로 삼고 있다. 이 예수님 살해에 사도 바울 자신도 가담하게 되어 있고 온 인류가 다 가담될 수밖에 입장에 놓여 있음을 없는 언약적으로 설명한다.

“기록된 바 아브라함이 두 아들이 있으니 하나는 계집종에게서 하나는 자유하는 여자에게서 났다 하였으나 계집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자유하는 여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 (갈 4:22-23)

즉 인간 배후에 악마가 실제로 있었고 그 악마는 필히 ‘여자의 후손’이신 예수님을 살해해야만 한다는 약속에 준해서 정리된 복음이다. 이 논리는 인간의 실존적 의미로 채워지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을 예수님의 실존적 의미로 해명할 수는 없다. 예수님은 십자가 이전부터 자신이 사람들에게 고난 받고 사흘에만 살아나실 것을 예고하셨다. 그리고 인간들은 결국 사단의 세력에 이끌리어 움직인 것이다.

오늘날 기독교가 문제가 아니라 실은 인간 자체가 문제다. 왜냐하면 자신이 근원적으로 죄인 됨은 인간의 이성과 종교인 열심히 알아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직 성령이 임한 자라야지만 십자가로만 나타나는 하나님의 깊은 지혜를 안다.(고전 2:9-14)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과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고전 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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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IP:124.♡.84.82)

09-03-07 21:20

죽은 신을 위하여 : 기독교 비판 및 유물론과 신학의 문제

이 근 호 목사

저 자 : 슬라보이 지젝(Slavoj Zizek)
번 역 : 김정아
출판사 : 도서출판 길 (2007)

죽음 안에서 신에 대해서만 말할 수 있다고 저자는 밝힌다. 사도 바울에 의해서 그렇게 주장할 수 있다고 한다. 죽음, 그것은 헛수고를 의미한다. 인간이 하는 모든 것을 헛수고로 만들어버리는 신이 바로 죽음으로 말하는 신이다.

그런데 인간들은 자신의 종교 행위로 더 살고자 한다. 그렇다면 종교 행위는 자신의 저주를 재촉하는 행위에 해당된다. 사도 바울에 의해서 제시된 신은 어떤 신인가? 저자는 기존의 기독교 신론의 허점을 지적하면서 이 점을 파헤친다.

신은 숨어있는 신이다. 따라서 아무도 신이 존재하는가에 대해서도 모른다. 아니, 신은 없다. 신에 대한 인간적인 인식을 발동시키기 전까지는 그러하다. 인간이 신에 대해서 궁금하고 찾고자 하는 가운데 신은 그것을 부정하는 방식으로 자신을 드러내신다. 인간들이 신에 대해서 언급하고 알고자 하면 할수록 인간은 사실 신으로부터 고립되고 동시에 신 자신도 신에 대해서 고립되어진다.

예수는 가룟 유다에게 지시하기를 자신을 배반하라고 했다.(마 26:25) 이 세상에 온갖 신이 있다 할지라도 자기를 배반할 것을 요구하는 신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뿐이다. 가룟 유다는 열두 제자로 이루어진 최초의 기독교 동아리와 보편 교회의 창시자인 사도 바울 사이를 연결하는 ‘소실되는 매개자’이다. 즉 사도 바울은 가룟 유다의 자리를 대신 차지하고 들어가서는 그 역시 스스로를 배반해야만 하는 신인 예수를 소개하게 된다.

진정한 예수에 대한 신뢰와 신앙은, 추종자로 하여금 예수에 대해서 배신케 함을 유발한다는 점을 이해하는 것이다. 숨어있는 X를 이해하는 것은, X로 인하여 주어지는 자신의 배신을 수긍하는 것이다.

이처럼 인간은 예수 앞에 서면 예수로 인하여 모든 것이 노출되어진다. 예수는 곧 ‘타인’으로서의 시선이며 그 타인으로 인해 ‘나’가 규정된다. (불교의 허점은 그 타인의 시선을 삭제하는데 있다. 즉 타인 없는 가운데 자아마저 없애려고 한다)

그런데 이 타자성은 고정된 것이 아니다. (여기에서 레비나스나 데리다의 타자성이 문제가 된다. 그들이 주장하는 타자성이란 지루한 동일성을 지닌 타자다)

예수라는 타자는 예수라는 존재의 일관성에서 주어지는 타자성이 아니라 그의 명령을 통해서 그 명령에 호출되는 인간의 태도와 반응 속에서 주어지는 것이다. 그의 명령을 접하게 되면 모든 인간의 자아가 분열을 일으키게 되고 그 분열과 벌어짐 속에서 비로소 비쳐 나오는 타자성이 예수로 인한 타자성이요 신성이다.

예를 들면, “살인하지 말라”라는 명령이 주어지게 되면, 이 명령을 받은 인간은 “하지말라!…살인하라!”로 받아들여지게 되어 있다는 것이 로마서 7장에서의 사도 바울이 전한 계시다. 즉 “살인해야만 해!”가 “하지 말라!”라는 명령의 본 내용에 해당되도록 인간 내부에서 유발된다는 것이다.

이 “네 속에서 넘쳐나는 것을 거세하라”는 곧 불가능한 명령이 되고 만다. 만약 제 때 거세 못하면 처벌이 따른다. 하지만 인간은 그 처벌을 감수할 수밖에 없는데 그 이유는, 인간의 욕망이란 넘쳐 남을 향유하는 그것이 곧 처벌이기 때문이다. 처벌의 저주스러움이란 인간이 끊임없이 쾌락 너머의 것을 계속 집착하는데 있다. 현 쾌락으로 만족하는 법이 없는 것이다. 즉 얻어진 행복이 곧 저주스러운 상태가 된다. 결코 채워지지 않기 때문이다.

법이 욕망을 자극하고 그 욕망으로 쾌락을 얻게 되지만 그것이 저주스러운 처벌이요 대가가 된다. 그래서 인간은 법을 제공한 타인을 속이려든다. 이것이 바로 희생이다. 예수를 위해 희생하는 것은 예수에게서 뭔가 얻으려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속이기 위함이다.

이로서 예수는 인간과 멀찍이 떨어지게 된다. 법을 제공하므로서 신은 최고의 위반을 저지르고 만다. 범죄자는 자신이 저지른 범죄에 대해서 응당한 처벌을 원한다. 하지만 신은 이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범죄자로 유발시킨 법 자체가 곧 정의라는 이름의 질서를 전복시키는 위반이기 때문이다. 신은 이로서 모든 원인을 제거한다. 신 자신의 죽었다는 그 죽음이라는 ‘결과’로서 모든 원인되게 하는 ‘원인’들을 삭제시켜 버린다.

신이 죽음으로서 신은 내부적으로 균열이 일어났다. 신과 신 사이에 간격이 생겨버린 것이다. 이러한 간격은 더 이상 신이 인간의 신 인식에 의해서 포착되지 않기 위함이다. 인간들이 신을 포착하고자 한다면 예수는 가룟 유다처럼 ‘사라지는 매개자’가 되어 우리들의 신앙을 ‘배신한 신앙’으로 만들어버리는 위치로 만들어버린다.

사도 바울에 의하면 기독교의 구원은 타락을 이전의 상태로 되돌리는 것이 아니라 타락을 반복시키는데 있다.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의 선택은 실은 강요된 죄의 선택이었다. 따라서 아담의 죄성을 눈여겨 볼 것이 아니라 ‘아담에게 강요함’ 자체가 구원임을 알아야 한다. 달리 말해서, 타락이 자체로 타락이 아니라 타락이 자체로 구원이 된다. ‘타락으로 오인하는 구원’이 바로 이것이다.

인간이 보는 악이란 ‘악이 악을 보는 시선’에 불과하다. 타락조차도 구원으로 이해하는데서 비로소 ‘사랑으로 인한 자유’가 발생한다. 악은 실질적으로 선과 동일하다. 악은 생성 중인 선이다. 고린도후서 11장에서 사도 바울은 자처해서 악인으로 행세한다. “그래, 거짓 사도들아, 내가 어리석은 자다. 하지만 나의 어리석음이 곧 그리스도의 능력이다”

진정한 그리스도 닮기란 그리스도의 회의와 불신에 동참하는 것이다. 죄를 부인하는 것 자체가 죄의 궁극적 증거가 된다. 신을 법을 주면서도 항상 그 법에 대해서 창조적으로 해석하며 법을 곡해한다. 이로서 인간들이 주어진 법해석으로 신을 장악하려는 시도를 뿌리친다.

사도 바울은 모든 법에 대해서 집행을 보류시킬 것을 요구한다. ‘마치-아닌-듯’의 원칙을 적용한다. “우리는 자들은 마치 울지 않는 자 같이 하며 매매하는 자들은 마치 없는 자같이 하며”(고전 7:20) 이것은 곧 신의 사랑 앞에서 법의 지켜야하는 인간 존재는 ‘아무 것도 아님’(nothing)이 되기 때문이다. 즉 사랑이란 인간이 행하는 내용이 아니라 사랑이 곧 신이다.

사랑은 단순히 법 너머에 있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법 안에 푹 빠져 있는 태도로 표현된다. 충분히 법리적으로 법을 해석하면 사랑이 나오지 완전한 법이 나오는 것이 아니다. (유대교의 문제는 ‘지나치게 법리적’이라는 것이 아니라 충분히 ‘법리적’이지 못하는데 있다.)

법에는 사랑이 너무 많다. 법과 신의 사랑은 대립되는 것이 아니다. 루터파 신학자들은 대립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법이 발생할 때 숨겨진 사랑도 같이 발생하므로 서 비로소 법을 주신 신도 같이 나타난다. 이것이 곧 구원이다.

구약 욥기의 주제는, ‘고통에도 의미가 있다’가 아니다. 도리어 욥은 고백하기를 ‘나의 고통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한다. 욥이 알게 된 신은 무능한 신이었다. 신은 정의롭지도 않았고 불의하지도 않았다. 단지 무능할 뿐이다. 욥이 깨달은 것은 이것이다. 욥에게 재앙이 닥쳤을 때 시험대에 오른 것은 욥이 아니라 신 자신이다 는 사실이다. 그리고 신은 보기 좋게 실패했다.

자신을 정당화 하는데 실패한 신, 이 신이 바로 참된 신이다. 덜미 잡히고서는 난처한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허풍을 늘어놓는 신이 바로 신의 무능함이다. 욥이 처음에 당혹감을 가진 것은 신을 불가해한 ‘사물’로 경험했기 때문이다. 즉 법 너머에 존재하는 선한 신인 것처럼 여겼던 것이다.

아버지가 강하다고 믿었었는데 그 아버지가 자기를 도와줄 수 없는 무능한 존재인 것을 알고 경악하는 아이와도 비슷하다. 이 경악이 예수에게 이어진다. “아버지에 왜 나를 버렸어요?”

신이 허풍을 떨면서 등장한 후부터 욥은 줄곧 침묵을 지켰다. 왜일까? 그것은 신의 우스꽝스러운 허풍이 바로 신의 무능함이 드러나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무지한 말로/이치를 어둡게 하는 자가 누구냐?/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네가 어디 있었느냐? 네가 깨달아 알았거든 말할지니라”(욥 38:2-5)

이로서 신이 도움을 요청할 것이 아니라 우리 인간이 도리어 신을 도와야 한다는 것이다. “나에게 점점 분명해지는 것은 오직 하나뿐입니다. 그것은 당신이 우리를 도울 수 없다는 것, 우리가 당신을 도와야 한다는 것, 우리는 당신을 도우면서 결국 우리 자신을 돕는다는 것입니다.”(1942년 유대인 수용소에서 한스 요나스가 한 말)

신은 왜 자진해서 무능한가? 그것은 무(無)를 창조하기 위해서다. 이 무로부터 세상이 창조되었다. 그래서 세상은 타락할 수밖에 없어야 한다. 이런 타락의 세상에서 진정으로 기도하는 자는 무신론자 밖에 없다. 실증적 존재자로서의 신을 거부하고 메시야적인 타자에게 기도하기 때문이다.

평 가

지젝이 주장이 과연 사도 바울이 말한 (“다른 복음 전하면 저주받는다” 갈 1:8) 십자가 복음에 부합되는 내용인가를 살펴봐야 한다. 지젝의 지적은 오늘날 기독교에 자리 잡은 신론의 허점을 잡고 시작한 내용이다. 즉 신에 대한 변증과 변호를 통해 신을 믿는 그들의 자기 긍정을 도모하는 논리에 대해 공격한 것이다.

하지만 사도 바울의 십자가 복음은 ‘예수님 살해’를 출발점으로 삼고 있다. 이 예수님 살해에 사도 바울 자신도 가담하게 되어 있고 온 인류가 다 가담될 수밖에 입장에 놓여 있음을 없는 언약적으로 설명한다.

“기록된 바 아브라함이 두 아들이 있으니 하나는 계집종에게서 하나는 자유하는 여자에게서 났다 하였으나 계집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자유하는 여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 (갈 4:22-23)

즉 인간 배후에 악마가 실제로 있었고 그 악마는 필히 ‘여자의 후손’이신 예수님을 살해해야만 한다는 약속에 준해서 정리된 복음이다. 이 논리는 인간의 실존적 의미로 채워지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을 예수님의 실존적 의미로 해명할 수는 없다. 예수님은 십자가 이전부터 자신이 사람들에게 고난 받고 사흘에만 살아나실 것을 예고하셨다. 그리고 인간들은 결국 사단의 세력에 이끌리어 움직인 것이다.

오늘날 기독교가 문제가 아니라 실은 인간 자체가 문제다. 왜냐하면 자신이 근원적으로 죄인 됨은 인간의 이성과 종교인 열심히 알아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직 성령이 임한 자라야지만 십자가로만 나타나는 하나님의 깊은 지혜를 안다.(고전 2:9-14)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과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고전 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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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