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12월 2일 조지래드24 교회론 (유기체 냐 vs 사건 이냐)
부산 12월 2일 조지래드24 교회론 (유기체 냐 vs 사건 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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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1202 교회론 (유기체 vs 사건)
우리교회(IP:124.♡.86.24)
08-12-02 1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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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12-14 10:15
부산081202a조지래드24신약신학-교회a
20081202a 부산강의 : 조지래드 [신약신학]-교회
(강의:이근호 목사)
시작하겠습니다. 오늘은 37과, [교회]에 대해서 하겠습니다.
래드가 교회에 대해서 래드란 사람이 신학자잖아요. 신학자가 어떤 자기주장을 할 때는 전에 있던 다른 사람들의 신학자들의 하는 주장과 동일한 주장 같으면 그렇게 주장을 안 해요. 왜냐하면 학자라 하는 것은 새로운 플러스알파를 제시해놔야 돼요. 남이 틀렸다는 게 아니고 남들이 모르는 것 더 하나 이야기하고 싶고 또 틀린 것도 이야기하고. 그게 학자의 본분인데.
이 교회란 항목을 통해서 만약이 래드란 사람이 기존의 교회에 동의할 것 같으면 누구누구 이야기해서 ‘이 주장이 옳습니다. 그거 참 훌륭한 제안이고 성경에 맞습니다. 진리 맞습니다’라고 이렇게 쭉쭉 나가겠는데 래드가 기존의 교회론에 마음에 안 드는 구석이 많았던 모양입니다.
래드의 교회론을 통해서 기존의 교회론이 어떤 점에서 마음에 안 들고, 그렇다면 당신이 새롭게 주장하고 싶은 교회론, 그러면서도 당신 입장에 볼 때 참 성경에 더 가깝다, 성경에 합하다고 주장할 수 있는 그 내용들이 우리들이 뭐냐를 찾아봐야 돼요.
왜냐하면 래드도 우리 이상으로 공부를 많이 했기 때문에 기존의 교회론 가지고도 아, 이거는 미처 놓친 것, 중요한 것, 오해한 것 그런 것들을 찾아내는 수고를 했잖아요. 우리는 돈 몇 만원 주고 이 책 사서 그 수고한 것을 그냥 봉사한 덕분으로 쉽게 안 것, 이것이 래드라는 학자에 대한 보답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면 래드의 첫 번째부터 끝까지 강조한 것이 있는데 불만이 가득했죠. 그게 뭐냐 하면, [사도 바울은 어떤 식으로도 교회 형태에 대해서 형식적인 법적 행위를 취하지 않았다.] 그게 일 페이지 반 쯤 들어가면 그래 돼있어요. 사도 바울은 어떤 경우라도 교회는 이렇게 해야 교회라고 주장한 적이 없다는 거예요. 이런 형식적인 법적인 제도를 갖추어야 교회라고 한 게 없다는 겁니다.
이 사람이 이런 이야기를 하면서도 그 뒤에 토를 안 달았지만 내가 만약 토를 단다면 이렇게 달겠지요. ‘그런데 왜 사람들은 사도 바울이 성경을 볼 때에 왜 교회에 우리 교회 법적으로 하자가 없지요’ 하는 식으로 어떤 교회를 법적, 형식적인 틀을 갖추는데 거기에 전력하면서 사도 바울의 성경책을 인용하느냐 이 말입니다.
특히 성경신학자니까 조직신학자들에 불만이 많지요. 루터나 칼빈 이런 조직신학자들이 천주교와 다른 색다른 어떤 제도와 형식을 갖춤으로 말미암아 좋은 이미지를 외부에 알려서 ‘우리는 보다 더 건전하고 보다 더 확실한 교회 맞습니다’ 하는 것을 선전효과로써 성경 구절을 자기 마음대로 해석해서 사용했다. 거기에 대한 불만일 수 있죠.
교회론을 이렇게 공부하고 교회론이 뭘까? ‘목사님, 어떤 게 교회론입니까?’라고 묻는 질문 안에 뭐가 들어 있느냐 하면, ‘어떤 형식과 틀을 갖추면 제대로 갖추었다고 할 수 있습니까?’라고 묻는 의도가 포함돼있다 말이죠.
성경에 나오는 여러 가지 직분들이 있잖아요. 저자 래드는 두 가지를 크게 중요시했는데 하나는 장로하는 것과 또 하나는 감독이라는 것. 장로와 감독이란 용어가 나오고 거기 대한 역할들이 나오니까 사람들은 그게 중심이고 나머지는 중심이 아니니까. 목자와 교사 이런 건 중심 아니고, 집사도 중심이 아니니까.
하여튼 장로와 감독 용어가 나오니까 이런 용어, 명칭을 ‘이런 명칭이 붙은 사람은 이런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합니다’라고 사도 바울의 디모데전후서, 에베소서에 나오니까 그렇다면 우리 교회도 장로를 세우고, 감독을 세우면 교회될 수 있지 않느냐 어떤 기대를 갖게 하죠.
‘교회는 장로, 감독이 세워져 있다’라고 사도 바울이 그 당시 상황을 이야기하니까 사람들은 뭐로 보느냐 하면, 장로, 감독이 뭐냐 보다도 ‘우리 교회도 장로와 감독 이걸 세우게 되면 성경에 합치된 참된 교회 맞다’라고 누가 이야기해도 성경적으로 들이댈 수 있으니까 이런 것 하는 거예요.
특히 여기 장로, 감독에다가 디모데 같은 경우에는 장로회, 장로의 모임에서 뒤에 또 무슨 말이 나옵니까? ‘안수’라는 말이 나오니까 이것 그대로 하게 되면 누가 뭐래도 교회 맞다. 그것도 하나님이 세우신 교회 맞다. 특히 평신도는 이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성경적 교회 맞다’ 이래 주장한다 말이죠.
오늘 강의를 통해서 이런 아이디어가 어디서 나왔는가를 살펴볼 거예요. 그런데 전에 우리교회 장로님 안수식 할 때 왼 손으로 안수하신 분이 있는 모양이에요. 사진판독에 의하면. 여럿이 모여서 비좁을 때는 오른 손 하면 자세가 안 나오니까 왼 손으로 할 수 있는 문제에요.
바로 왜 사람들은 거기에 예민해져있는가? 그것이 문제가 되게 할 수밖에 없는 요소가 이미 성경, 바울의 안수라는 용어가 나왔다는 자체가 이런, 이 안수에 대해서 안수만 나오는 게 아니죠. 안수를 오른 손으로 할 거냐, 왼 손으로 할 거냐? 이런 부차적인 말이 나오게 마련이란 말이죠.
그러니까 말씀 하나가 쑥 들어가 버리면 온갖 더러운 구더기, 찌꺼기 다 튀어나오는 거예요. 인간 속에 있는 다 튀어나오는 거예요. 다 튀어나오는 것이 어떻게 나오는가를 오늘 강의를 보자 이 말이죠. 지금 래드의 교회론은 한 마디로 말해서 엉터리입니다. 쭉 읽어봤는데. 래드의 교회론은 처음부터 끝까지 성경으로만 갖고 이야기했어요. 엉터리입니다.
래드가 사도 바울이 장로, 감독 세우신 그 의미를 지금 래드는 파악 못하고 있습니다. 뜸 들일 게 아니고 직접적으로 결론적으로 이야기할게요. 뭐냐 하면, ‘유기체’ 있잖아요. 유기체라는 것이 어디서 나왔느냐를 현재 신학자들이 교회는 유기체라 하는데, 유기체라는 느낌, 이미지가 이게 성경에서 나온 것이 아니고, 인간의 내부적인 욕망에서 나왔다는 것을 아무도 이야기한 신학자들은 저는 못 봤어요. 본 적이 없어요.
텔만의 교회관을 봐서 그렇고, 바르트도 마찬가지고, 불트만도, 어떤 신학자도 이 유기체란 용어자체가 이거는 성령에 의해서 나온 용어가 아니고, 인간의 기본적인 뭘 봐야 믿는, 본다는 것은 이미지화시키는 거거든요. 사람이 본다는 것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이런 것도 어려운데 본다는 게 두 가지 있어요. [피]라는 책에 약간 나와 있습니다.
사물에 대해서 볼 때 더 어렵게 이야기해볼까요? 내가 보는 것이 아니고 눈이 봐요. 눈이 보는 것을 해석이 누가 하느냐? 내가 한다고. 이래돼있어요. 인간은. 눈이 본 것은, 다른 말로 하면 눈에 대한 두뇌에 있는 시각세포, 하여튼 눈이 본 것을 내가 해석해요. 그래서 눈은 정직하지만 본 것은 정직하지만 무엇이 정직하지 않기 때문에 보는 것이 문제 되느냐 하면, 그 해석하는 내가 문제가 있기 때문에 똑같이 보고도 엉터리 나오는 거예요. ‘너는 보고도 믿지 못하는구나.’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하는 것처럼.
자기가 귀가 듣지만 들은 것을 해석하는 것은 누굽니까? 내가 문제에요. 예수님께서 자기 눈을 탓하지 않고 나를 탓하면서 나에게 붙어있는 귀를 탓하고 눈을 탓하는 거예요. 보지 못하는 소경이 보고, 본다 하니까 네가 소경이구나. 예수님의 말씀은 항상 뭘 치느냐 하면, 나, 자아를 칩니다. 그 성경적 근거는 뭐냐 하면, 십자가 자체가 뭘 부인하는 겁니까? ‘나’를 부인하라는 거예요. 근데 사람은 ‘나’라는 것은 어떤 경우에만 나가 형성되느냐 하면, 보고, 듣고 후차적으로 형성된 게 ‘나’에요.
[눈 먼 도시]라는 책이 있어요. 노벨문학상 받은. 눈 먼 도시에서 눈이 멎었을 때에 사람은 뭘 봅니까? 눈이 멎었는데 볼 게 없지요. 볼 게 없지만 인간은 본다고. 뭘 봐요, 비로소? 자기 내부를 보는 거예요. 눈이 멀었으니까. ‘동안거’라 하는 절에서 하는 것이 그 짓 아닙니까. 모든 걸 차단시켜버리면 비로소 나를 본다는 거예요.
[눈 먼 도시]라는 책에서 나를 본다는 것은 뭐냐? 내 속에서 내가 눈이 있을 때 볼 때 미처 안 보였던 것들이 시커먼 것들이, 그러니까 죄죠. 짐승이에요. 그야말로 무질서와 탐욕과 성경에 나오죠. 우리 속에 들어오는 게 더러운 게 아니고, 나오는 게 더럽다고. 그 나오는 그것들이 나온다는 사실을 모르는 거예요.
그런데 불교에서 자기를 본다는 것은 뭐냐 하면, 자기 자신을 보는 게 아니고, 그걸 조절해내고 위선화시키는 자기 자신을 곱게 다듬는 짓을 하는 기라. 한 겨울 내내. 이게 불교에만 그렇겠습니까? 기독교 마찬가지에요. 기도할 때 눈 감고 있지요. 눈 감고 하는 짓이 뭡니까? 속에 더러운 걸 그대로 보는 게 아니고, 그걸 정리정돈하고 정치적인 해결을 하죠. 타협을 하고. 착한 일 해서 뭐 나쁜 일 하겠다고.
이게 인간의 욕망입니다. 프로이드는 인간의 욕망을 두 가지로 봤지요. 하나는 ‘살자는 욕망’과 그 다음에 ‘죽고자 하는 욕망’ 이걸 제 [피]라는 책에서는 살자는 욕망은, 인간의 형성은, 하나님 형상은, 아담의 형상은 두 가지입니다. ‘생식’과 ‘죽음’이에요. 인간이 제일 즐거운 게 뭔지 압니까? 역시 육체적인 사랑 나누는 게 제일 즐겁고. 그러면서도 인간은 뭘 하는 줄 알아요? 어쩔 수 없이 죽어가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사는 것은 곧 죽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산다는 것은 죽어가고 있고, 사실 죽는 거예요. 죽는 일을 하면서 사는 거예요.
따라서 이 사람도 유기체 주장하는데, 유기체라는 말은 다른 말로 하면, 나의 욕망의 이미지에요. 나의 욕망이니까 다른 말로 하면 뭡니까? 나의 욕망 떼어버리면 뭐의 이미지입니까? 나의 이미지가 유기체란 용어에요. 왜냐하면 사람들이 유기체란 말을 알아듣는 최초의 증거, 시발점이 뭐냐 하면, 내가 내 육체를 주물럭거리면서 뭐로 봅니까? 유기체로 보잖아요. ‘어이, 집사님.’ ‘예.’ ‘당신하고 당신 몸하고 어떤 관계에요?’ ‘내 몸은 나의 유기체입니다.’ 유기체란 고상한 용어를 표현 못하더라도 하여튼 대충 그런 식으로 이야기하잖아요.
교회로 유기체로 봤다는 말은 자신도 의식하지 못한 체 나는 이런 식으로 이해합니다. 이런 식으로 사물을 봅니다. 내가 눈과 코와 이런 게 있지만 결국 종합적으로 이것을 판단하고 해석하는 기준은 바로 나 자신을 하나의 유기체로 뭉치기 위한 방편으로 봅니다. 하는 게 들통 난 거예요. 아, 내가 어렵게 하면 안 된다.
지금 손, 발 다 흩어져 있잖아요. 그런데 나는 뭐냐 하면, 흩어진 것을 보지 않고 어쨌든 간에 이걸 한 덩어리로 뭉쳐지게 볼 때 그걸 결과적으로 표현할 때 뭐로 표현되느냐? 유기체라. 내가 실존하는 그 방식이, 우리가 생각을 안 해서 한번 생각해 보세요.
현재 팔이 30센티 이상 떨어져 있어요. 여기에 가시가 박혔는데 여기가 아픈 것이 아니고 내가 아프다니까요. 결국 왜 아프냐 하면, 저쪽과 나는 하나로 연결돼있다 이 말이죠. 연결돼있다 해도 문제가 돼요. 왜냐? 연결돼있으면 왜 발이 움직일 때 팔은 같이 안 움직이느냐? 이래 나온다고. 왜냐? 팔하고 발하고 따로 노느냐?
쉽게 이야기해서 어떤 사람 볼 때 귀를 막아도 보이죠. 왜 그러냐 하면 귀는 보는 역할을 한다, 안 한다? 안 하잖아요. 따로 따로 놀잖아요. 제 말이 뭔 뜻인지 아십니까? 귀 따로, 눈 따로 놀잖아요. 따로 노는 것이 어떻게 하나라는 내 속에 결합이 되느냐 이 말이죠. 그때 나오는 정답이 뭡니까? 유기체거든.
유기체가 뭔데? ‘떨어져 있는 것을 한 덩어리로 보는 게 유기체다’라고 하잖아요. 그 다음에 나오는 질문이 뭐예요? 어떻게 그렇게 떨어져 있는 게 한 덩어리 되느냐? 답변 못하죠. ‘딱 보니 모르나.’ 이런 식으로. ‘그거 당연한 거 아냐.’ 이런 식으로.
팔, 다리가 자기와 거리상 떨어져 있어도 나와 한 덩어리이면서 발이 활동할 때 발이 걸을 때 귀는 발까지 와서 도와주지 않고 귀는 그냥 달려서 가죠. 그러면서도 나라는 하나가 움직이는 것은 귀 따로, 눈 따로가 아니라 전부다 한 덩어리 되어서 움직일 때 이걸, 그러니까 떨어져 있으면 유기체란 말 할 필요 없잖아요. 그냥 한 덩어리 하면 되잖아요. 떨어져있으면서 하나로 움직이니까 이거는 유기체라 하는 거예요.
‘유기체’ 말 자체는 뭐냐 하면, 탄소라는 원소가 들어가 있는 것 아닙니까. C, 기가 뭐예요? 탄소 아닙니까. 유기. 탄소 없는 걸 무기체, 탄소가 있는 게 유기체. 탄소로 구성돼있는 걸 가지고 생물에서 생물들이 모두 탄소로 구성돼있지요. 탄산가스와 산소로 되어있으니까. 이거는 과학적으로 보면 그렇고. 실제로는 살아있는 것. 그런데 그냥 살아있다 하지 말고 같이 살아 있는 것, 함께 살아있는 것. 움직일 때 동원돼서 같이 움직이는 것, 이걸 유기체로 한다. ‘같이 움직인다, 같이 살아있다’라는 말은 꼭 구태여 유기체로 해야 될 이유가 따로 떨어져있는 것처럼 보인다가 전제로 돼있습니다.
이것은 바로 ‘죽은 것’과 ‘산 것’을 할 때 죽은 것을 무기체, 살아있는 것을 유기체라고 둘로만 나눌 수밖에 없는 인간의 언어의 한계가 여기 있어요. 그렇지요. 이 세상의 모든 것이 무기체 아니면 유기체고, 유기체 아니면 무기체잖아요.
도마뱀 꼬리를 잘라도 도마뱀 도망가잖아요. 그러면 도마뱀 꼬리는 몸체에 대해서 유기체면서도 마치(유기체라는 건 갈 때 같이 따라가니까) 끊어져도 아무렇지도 않고 가는 것 보니까 그 순간만큼은 뭐로 보입니까? 유기체면서도 무기체로 느껴지죠.
그러니까 ‘도마뱀은 유기체면서도 꼬리가 잘렸을 때 무기체가 된다’란 문장 속에 결국 단어가 몇 개 들어갑니까? 무기체 아니면 유기체, 유기체 아니면 무기체 둘밖에 사용 못하죠. 이런 둘밖에 사용 못하는 이것 가지고 교회라는 진리를 설명을 하겠다? 그거는 어불성설입니다. 말 안 됩니다.
교회라는 설명할 때 오늘 강의의 결론이기도 합니다만 오직 이 단어 외에는 설명이 안 돼요. 뭐냐 하면, ‘사건’입니다. 여러분, 사건과 유기체 차이점이 뭘까요? 사건이라 하는 것은 항상 우발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런 게 어려운데.
물이 있잖아요. 물은 먹는 용도잖아요. 그래서 학생들이 있고 선생님이 있는데 어떤 선생님이 학교에 물 가져왔어요. 학생들이 뭐라 합니까? 학생들이 아는 것은 뭐냐 하면, ‘아, 선생님께서 강의하시다가 목마를 때 물 드시겠구나’라고 봤지요. ‘숙제 안 한 놈, 나와.’ 나오고 난 뒤에 이것 가지고 때려버렸다고.
그러니까 분명히 물이라 하는 것은 먹는 용도인데 때리는 용도로 바뀌었을 때 애들은 깜짝 놀라는 거예요. 그게 뭡니까? 사건이 되는 거예요. 그 사건이 뭐냐? 지금 이 시간은 숙제검사니까 그 다음에 뭐가 있겠어요? 숙제 안 했을 때 심판이죠. 비로소 사도 바울이 썼던 용어 개념이 나오는 거예요. 어디에서? 사건이라 함은 나 바깥에서 일어나잖아요. 학생들 바깥에 선생님이 이래 쥘 줄 알았지, 거꾸로 쥘 줄 몰랐단 말이죠.
학생들이란 유기체가 물 마심으로써 시원하게 하는 유기체인데 거꾸로 쥐고 때리니까 뭡니까? 학생들은 자기 유기체가 알고 있던 그 바깥에 그 외래적으로 돌발적으로 뭐가 있었습니까? 유기체도 아니고 무기체도 아니고 난데없이 사건이 터졌죠. 하나님의 유기체, 무기체 창조했습니다. 하나님이 손 털었습니까? 창세기 3장 15절에 하나님의 약속이 나오지요. 약속은 유기체입니까, 무기체입니까? 물어봅시다.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교회 됨이라 하는 게 뭐예요? 무기체나 유기체가 아니죠. 뭡니까? 하나님이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과 싸우는 그 사건이 어디에 터져야 그래야 그게 뭐가 돼요? 교회 되는 거잖아요. 그럼 교회의 본질이, ‘교회는 유기체다’에 있습니까, ‘사건’에 있습니까? ‘복음적인 사건’에 있단 말이죠. 이 사건을 누가 주목해요? 어떤 신학자도 주목한 사람 없어요. 주목 안 해요.
교회라는 것을 어떻게 표현하느냐? 유기체다. 그 말 하나마나입니다. 왜냐하면 교회라 하는 것이 유기체의 집합이거든요. 사람들 집합이죠. 교회가 무기체의 집합입니까? 돌멩이들의 집합이 아니잖아요. 그 말은 동어반복이에요. 같은 말을 반복한 것에 불과해요. 그건 하나마나에요. 계모임도 유기체입니다. 국가도 행정기관도 마찬가지고. 유기체 아닌 게 어디 있어요. 다 유기체인데. 친목단체하고 교회하고 차이점이 뭔데? 둘 다 유기체인데. 같습니까?
교회라는 것을 이야기하기 전에 이것부터 생각해요. 과연 신자가 있는가? 이것부터 생각해 봐야 돼요. 과연 신자가 있느냐? 교회라는 건 많은데 교회는 만들 수 있어요. 아까 했잖아요. 성경적 용어, 감독, 장로, 집사 교회 세우면 되는데 문제는 신자가 있는가?
그런데 사도 바울의 복음에 의하면 신자는 뭐가 일어나야 됩니까? 사건이 일어나야 되고, 그것도 지나간 사건의 특징이 뭐냐? 한 번 사건이 일어나고 그 사건이 유지되지 않는다는 것, 이게 사건의 멋있는 거예요. 사건은 한 번 터졌고 난 뒤에 그 사건이 두 번 다시 반복이 안 된다는 것, 동일한 사건이.
홍해 지금 가 보세요. 배타고 건너야 돼요. 두 번 다시 일어나지 않아요. 여리고 성 두 번 다시 안 일어났지요. 두 번 다시 일어날 수 없는 것을 두 번 다시 일어나게 하는 사건이 또 있어야 됩니다. 이런 게 참 어려워요. 십자가는 두 번 다시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필리핀에서 축제하면서 십자가 져봐야 십자가 아니에요. 그런데 일어날 수 없는 사건을 반복하겠다는 것이 바로 교회를 만드는 하나님의 진리입니다.
그러니까 신자라 하는 것은, ‘신자가 있고 어떻게 신자가 구원받느냐’라고 시작하는 교회는 뭐가 돼요? 이거는 사건이 빠졌기 때문에 무슨 사건? 하나님이 일으키는 사건이 빠졌기 때문에 하나의 이미 친목단체로 변했고 동호회로 변했지 교회는 이다, 아니다? 교회는 아니에요. 그 증거가 요한계시록 2장, 3장에 나오는 내용들입니다. 이거 교회 아닙니다. 일곱 교회가 있어도 반짝하다가 반짝 없어졌어요. 이백 년 간다고 반짝 아닌 게 아닙니다. 이백 년 가도 이백 년 지나면 그 다음날에 보면 반짝이에요. 뭐든지 지나가면 다 반짝이에요. 지나가면 다 순간이에요.
사건이 길다고 해서 사건 아닌 게 아닙니다. 긴 사건이 있더라도 짧은 사건 있더라도 천년이 하루 같이 하루가 천년 같이 보면 전부다 뭡니까? 한 순간에 지나지 않아요. 따라서 교회를 영원한 교회가 되려면 계속해서 그 안에서 되풀이되고 반복되는 사건이 계속 일어나는 교회만이 영원한 교회고, 그렇지 않으면 다 영원한 교회가 아니죠. 그렇죠. 진짜 목마르다. 고함질렀더니. 하여튼 저는 교회론만 나오면 흥분이야.
사람들이 래드가 자꾸 걱정하는 것처럼 ‘교회가 어떻습니까?’ 물어보는 그 의도 자체가 지금 있는 교회가 건전한가, 아닌가 다시 확인하기 위해서 묻는데 거기다 유기체란 말해도 그거는 실없는 농담밖에 안 돼요. ‘모르겠습니다’하고 똑같은 소리라고. 사건에 의해서 교회가 세워진다면 직분도 사건에 의해서만 교회 직분이 반짝반짝 나오지요. 은사도 마찬가지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신약성경에 나오는 사건으로서의 교회가 볼 때 몇 가지, 하여튼 기존의 유기체로서의 교회는 교회가 아닙니다. ‘발생론적’ 해서 손무성 씨가 이거 붙잡고 얼마나 시비를 걸고, 이근호 목사는 발생론적 해서 유기체 교회 아니란다. 아까 이야기했어요. 유기체란 말 하나마나라 했죠.
무슨 말이냐 하면, ‘이 물 먹을 수 있어요’ 했는데 ‘물이 하얗습니다.’ ‘아니, 이 물을 먹을 수 있습니까 물었습니다.’ ‘아니 이 물은 색깔은 하얗습니다.’ 이 물은 먹을 수 있습니까 물었다고 해서 이근호 목사는, 물이 하얗지 않고 까맣다고 했다는 것과 똑같은 거예요.
교회가 뭐냐고 질문하는 포인트가, ‘교회가 무엇입니까’ 물을 때에 ‘교회에서 무슨 사건이 터집니까’ 물어야 되는데 ‘교회가 어떻게 세워집니까’라고 ‘교회가 유기체입니까, 무기체입니까’ 하는 식으로 질문하는 자체가 이미 교회에 대해서 이해를 잘못하고 있는 거예요. 물음 자체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 바울의 복음적 사건은 방금 잘못하고 있다는 그러니까 잘못된 교회론 이것을 놓치지 않아요. 잘못된 교회를 지적하는 그 사건과 우발성을 통해서 잘못된 교회를 지적하는 비판하는 가운데서 여기서 사건으로서의 참된 복음으로서의 교회를 그런 면모를 보이는 겁니다. 지금 이해 안 가는 눈을 하고 있는데
그러면 이 유기체 교회가 잘못됐다면 ‘진짜 교회는 무엇입니까’라고 묻고 싶잖아요. 사도 바울은 이 교회는 틀렸고, 이 교회는 맞다 식이 아니라 기존의 교회라고 만드는 것을 공격하는 그 주체 세력이 바로 교회다 이 말입니다. 이거는 무기체, 유기체가 아니라 하나의 사건이라니까요. 기존의 잘못된 교회를 지적하게 만드는 어떤 동기 유발된 사건, 그게 뭐냐? 복음적 사건이고, 십자가 사건이란 말이죠. 그런 식으로 십자가 사건은 반복되는 거예요.
여러분, 십자가가 누굴 의식한 겁니까? 사람 의식하고 십자가 죽었잖아요. 그죠? 예수님께서 짐승보고 낙타보고 죽은 게 아니잖아요. 십자가라는 것은 누구 보고? 사람이 뭐라고? 저주받을 죄인이라고 공격하잖아요. 십자가 사건 자체가 공격할 대상이 있잖아요. 저주받을 죄인 아닙니까. 그렇다면 교회도 십자가 사건화 된 교회가 되려면 공격할 대상이 있다, 없다? 있는 거예요.
있는데 그들이 마치 사도 바울이 전한 여러 가지 용어들과 그런 것들을 뭉쳐서 마치 교회인 것처럼 우기는 그러니까 그걸 공격하는 것, 이게 대표적인 것이 바로 사도 요한이 이야기한 요한 일서, 이서, 삼서 아닙니까. 거기는 마치 교회가 없는 것처럼 이야기하면서 실제는 기존의 교회를 의식하고 그 교회에서 으뜸 되고자 한 것을 조져라. 거기 또 적그리스도 있어서 예수의 그리스도 됨을 거부하는 인간들이 있다. 이단이다. 적그리스도다. 이런 식으로.
교회가 있기 때문에 기존 교회 잘못을 이야기할 수 있는 거예요. 이걸 히브리서나 에베소서에 보면 그리스도의 몸이기 때문에 기존 교회에 대해서 참된 기준으로 잘못된 기준을 늘 공박하고 늘 권면하고 늘 명령하고 그렇습니다. 고린도전서의 특징이 뭐냐? 기존 교회의 잘못된 걸 이야기하는 게 아니고, 진짜 교회가 기존 교회를 이야기하는 거예요. 고린도에 있는 교회를 이야기한다고.
여기 래드의 교회론을 보면 아까 첫 번째 강조한 것은, 교회 형태, 제도를 사도 바울이 이야기한 적이 없다. 두 번째는 뭐냐 하면, 큰 교회 하나 있고, 지점 있는 것처럼 지역 교회가 있는 게 아니고, 어떤 교회가 있던지 간에 작은 교회도 아니고, 교회 분점도 아니고 그 자체가 교회라는 것을 강조하는 거예요. 그 두 가지 점을 되게 강조하고 있어요.
이건 뭐냐 하면, 기존의 노회나 총회 문제점, 그 논리상의 문제점을 자기는 성경신학자로서 무지무지하게 마음 아팠던 모양이죠. 세 명 있는 교회와 오천 명 있는 교회 중에서 작은 교회, 큰 교회 이런 게 없다는 거예요. 사도 바울은 큰 교회, 작은 교회를 이야기한 것이 아니고 교회냐, 교회 아니냐를 이야기한 거예요.
두세 명도 나와 함께 있으면 주와 함께 있으면 그게 교회다 말이죠. 두세 명이 교회도 머리는 누구십니까? 주님이고, 오천 명 있는 교회도 머리가 주님이잖아요. 이미 주인님이 예수님인데 주인님 안 쳐다보고 세 명 있는 것 딱 보고, ‘교회 아니네’ 나가버린다고. 앞에 주님이 함께 있다는 걸 모르고.
그런데 이 신학자들이 문제점이 뭐냐 하면, 교회에 ‘주님이 머리 되신다’ 또는 ‘주님이 함께 있다’는 걸 그게 무슨 상태를 말하는지, 도대체 어떤 상황을 두고 이야기하는지 거기에 대해서 이야기가 없어요. 몰라요.
그러니까 여기서 다룰 게 한두 가지가 아닌데 그래서 먼저 교회론을 할 때 사람들이 흔히 쉽게 잊어버리는 게 있어요. 뭐냐 하면, 창세기고 요한계시록이라 하면 창세기부터 십자가까지는 구약이잖아요. 신약에 와서만 교회라는 게 생겨요. 그런데 왜 구약에는 교회가 없는지를 모르겠지요. 이 사이에 뭐가 있느냐 하면, 에스라, 느헤미야가 있습니다. 에스라, 느헤미야가 무슨 일을 했는지를 자꾸 빠뜨리고 바로 교회로 넘어가는 그런 성급함을 많이 보입니다.
유다나라가 바벨론에 포로 잡혀 멸망당했잖아요. 멸망시킨 나라가 페르시아라는 바사라는 나라에요. 바사라는 나라가 되고 난 뒤에 에스라라는 이 사람이 다시 고향으로 오게 됩니다. 고향 오면서 1장부터 6장까지 이야기에 뭐냐 하면, 자기보다 먼저 전에 오만 명의 포로가 귀환했었어요. 첫 번째 오고 난 뒤에 육십 년 뒤에 자기가 오고, 십삼 년 뒤에 누가 오냐 하면, 느헤미야가 옵니다.
느헤미야 이 사람은 행정가고, 에스라 이 사람은 율법 선생이에요. 성전을 세워야 되겠다고 생각한 사람은 에스라고, 실제로 세웠던 사람은 느헤미야입니다. 에스라는 성전을 세워야 되겠다고 하면서도 먼저 한 게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정치라든지 제사제도 없이 무엇에 우선권을 두느냐 하면, 율법 정신, 율법에 의한 통치를 우선으로 둬서 율법을 알리게 하는데 이 사람이 주력해요.
그러니까 여기서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 건 이거에요. 율법에 의한 공동체가 등장합니다. 지금 제가 무슨 이야기하려고 하느냐 하면, 율법이라는 공동체와 신약에 나오는 교회가 어떤 연속성을 갖고 있는지 그걸 살펴보자 말이에요. 그걸 빼뜨리면 안 된다고요. 율법이라는 공동체가 정말 하나님의 마지막 최종 거처라면 이 식으로 나갔을 거예요. 이것도 아니에요. 율법이란 공동체도 아니라니까요. 느헤미야 때 성전 세우지요. 이 성전 공동체도 아니에요. 신약 오기 전에 율법 공동체, 성전 공동체 다 마지막 교회하고는 아닙니다. 왜? 이 둘 다는 공동체, 다시 말하면 유기체기 때문에.
에스라가 그 당시 백성들에게 가르쳤던 율법의 주 내용이 뭐냐 하면, 일단 가정 중심은 아니에요. 왜? 이방 여자와 결혼한 사람은 다 나가라. 그 당시 이방 여자가 아니면 여자가 없어요. 생각해 보세요. 전부 혼혈아인데. 이방 여자하고 한 사람들, 원인무효하고 친정으로 다 돌려보내라. 이거는 뭡니까? 가정이 우선이 아니고, 가정보다 위에 있는 어떤 질서를 세우겠다 거예요.
그 질서는 무슨 질서입니까? 포로 전의 상태로. 포로로 잡힌 동기를 제공했던 것이 이방 여인과 결혼해서 이방 종교가 투입됐던 것과 십일조를 안 해서 제사제도 이게 돈이 없어 할 수 없어. 십일조를 안 드렸어. 어제 ( ) 그 생각, 에스라 생각나요. 왜 십일조가 필요하냐 하면 공동체가 있거든요. 공동체가 있으니 공동체를 유지를 해줘야 돼요. 재정적으로. 재정하면 십일조가 필요해요.
에스라, 느헤미야가 한 작업을 빠뜨리니까 신약 용어를 다 동원하면서도 그 형태는 무슨 형태? 에스라, 느헤미야 말씀의 공동체처럼 되는 거예요. 이미 이것이 성신에 의해서 무용지물 된 걸 알아야 되는데 그걸 모르는 거예요.
여기서 사람이 공동체라 하는데 이게 또 이미지입니다. 어떤 이미지? 자아 유기체의 확대에요. 이 자세한 강의는 제가 대구강의 사르트르 할 때 했어요. 거기서 제가 ‘집합’과 ‘집단’의 차이점 이야기했죠. 버스정류소에 모이는 사람들 집합과 등산동우회로 모이는 그게 의미가 다르다고. 실존주의철학 할 때 했어요.
이방 여자하고 전부다 헤어지고 그 다음에 십일조하고 그 다음에 절기, 절기 주안점은 말씀세미나. 울고불고 난리 났어요. 회개하고 난리 났다고. 그리고 난 뒤에 느헤미야가 와서 성전을 수축해요. 성전을 개축하죠. 물론 에스라도 했지만 반대가 심해서 못하고 재정적인 것이 없어서. 느헤미야도 마찬가지고 재정적인 문제와 하다가 너무 힘들어서 포기하는데. 그때 세금을 너무 많이 냈다고. 성전세. 반대가 많아서 중단하다가 다시 하고 하다가 어쨌든 간에 느헤미야가 성전을 세웠습니다.
성전을 세웠다는 말은 결국은 에스라, 느헤미야는 어떤 위치에 있느냐 하면 이걸 그림으로 그려야 되는데. 유다의 성전이 바벨론 포로로 잡혀가면서 이게 다 불타 없어졌지요. 심지어 언약궤도 분실되고. 메데스 보면 딴 데서 샀지만. 그전에 이미 지팡이 다 불타버리고 기구는 시편에 보면 불타버렸어요.
깨진 성전을 다시 성전이 회복했던 시절로 다시 돌아왔죠. 학개와 스가랴에 보면 놀랍게도 성전 왔다가 에스라, 느헤미야로 가는 게 아니고, 성전이 회복된 그 순간부터는 이게 펑하고 영적으로 묵시로 가버려요. 묵시로 가면서 이 성전은 하나의 모체, 실체에 대한 그림자로 남아요. 히브리서에 나오죠. 성전은 그림자죠.
그림자에 해당되는 실체는 요한계시록 1장, 사도 요한이 밧모 섬에서 성전을 보았는데 그 성전은 누구냐 하면, 그 성전은 무엇이 아니라 바로 예수님이었어요. 다르게 하면 사도 바울 신학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란 말이죠. 어떤 몸? 영광스런 몸이란 말이죠. 아까 했잖아요. 언어로 표현 안 된다고.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된 몸을 인간 언어로 표현 못합니다. 변화산에서 예수님의 해같이 빛난 몸을 어떻게 언어로 표현합니까? 욥이 봤던 하나님은 욥이 표현 못하고 재를 뒤집어쓰고 입을 가리죠. 참 재미있는 말이거든요. 지금 많은 관찰자들은 욥에 관심이 있는 게 아니고, 욥이 만났던 하나님이 어떤 모습이냐 궁금한 거예요.
이건 어렵지만 설명 좀 합시다. 보세요. 제삼의 관찰자들이 하나님의 모습이, 하나님의 형상이 보고 싶다는 이 말은, 그 사람에게 뭐가 달렸습니까? 눈 달렸지요. 그 눈으로 본 것을 해석은 누가 합니까? 자아지요. 그러니까 하나님을 믿겠다는 것이 아니고, 결국 ‘나는 나의 본 것을 내가 믿겠다’를 포기 못하겠다 이 말 아닙니까. 봐야 믿지. 눈이 있으면 봐야 믿어지고, 귀가 있으면 들려야 믿어지고, 만지는 게 있으면 만져야 믿어지죠.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를 수많은 사람이 밀고 당기고 만졌지만 거기서 구원의 능력이 나간 사람은 누구밖에 없어요? 바로 자기가 개 같은 개입니다. 또는 자기가 개 같다고 하는 다른 마음, 자기 자신에게 문제가 있음을 아는 사람만이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이 나갔잖아요. 하나님은 인간에게 놀아나지 않아요. 인간이 자기 부인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신자로 보지 않아요.
자기 부인이 안 된 상태에서 욥보다도 욥이 본 하나님이 궁금해서 ‘우에 생겼는데?’ ‘번쩍번쩍 빛났다.’ ‘야야 좋겠다.’ 빛나고 어떻든 간에 어디에 차곡차곡 쌓이느냐 하면, 자아에 쌓이기 때문에 이 자아가 나중에 하나님을 본 자아를 증거하게 만들어요. 이게 안 깨진다니까. 자아가 안 깨져요. 하나님의 영광성을 봐도 자아는 안 깨지게 돼있다니까.
해를 보면, 칸트에 보면 숭고, 경이로움. 칸트를 말하기를 미를 넘어선 단계가 숭고의 단계에요. 아름다움조차도 진선미 전부를 넘어선 단계를 숭고 또는 경이의 단계라 했습니다. 여기에 대해서 하이데거는 동의했고, 그 뒤에 라캉이라든지 이 사람은 반대했어요. 왜냐하면 경이로움을 봤으면 경이로움을 느낄 뿐이지, 자기의 나약함을 느낄 뿐이지 자기의 죄를 느끼지 않는다. 큰 복 받았다 보면 자기가 나약하고 미약한 건 알지만 자기의 죄를 압니까?
태양이 가까우면 뜨겁지요. 유사 태양이 마그마잖아요. 화산. 인간은 아무것도 아니죠. 불 앞에서는 의사, 판사, 변호사, 목사 불은 안 봐주잖아요. 단백질은 다 녹아버리니까. 그 앞에 자기 죄를 압니까? 자기 약한 건 아는데 자기의 보잘것없는 건 알지만 자기 죄를 알아요? 죄는 항상 미제로 남지요. 제 죄를 모르죠.
경이로움은 종교를 유발하고 신비를 유발하지만 절대로 구원에 이르게 하지는 못합니다. 천국에는 못 가요. 그래서 변화산에서 베드로는 뭐라 합니까? ‘여기가 좋사오니’ 했잖아요. 경이로움을 봤잖아요. 하지만 베드로는 세 번씩 부인했습니다. 예수님이 뭐라 했는지 알아요? ‘내가 십자가에 죽기까지 죽고 살아날 때까지 아무것도 이야기하지 마라.’ 이거는 바로 그 본 세계에 봤다고 해서 들어갈 수 있는 세계가 아닙니다. 지난 주일 날 그런 이야기했죠.
이 관찰자가 하나님 모습을 보고 싶어 하지만 막상 봤던 욥은 뭡니까? 입을 막고 재를 뒤집어썼지요. 그러면 이 관찰자가 누굴 봐야 돼요? 하나님 궁금한 게 아니고 누굴 봐야 됩니까? 하나님 봤던 욥이 어떤 태도를 갖는가? 이걸 봐야 될 거 아닙니까.
[죽은 신을 위하여]란 책이 있어요. 지젝이 쓴 책인데. 그 책에 보면 욥에 대해서 나름대로 해석을 했어요. 잘못 되게 해석했어요. “욥에 나타난 하나님은 자기가 아무것도 아닌 하나님이다”라고 정의했다 이래했는데 제 생각은 다르죠.
제 생각은 뭐냐 하면, 바로 욥의 하나님이 중요한 게 아니고, 욥의 하나님 말고 욥을 봐라. 욥이 바로 예수님이 십자가 진 모습을 보여주는. 그러면 이 관찰자들이 하나님 궁금한 게 아니고 누굴 봐야 됩니까? 예수님이 십자가 진 걸 보면서 왜 저분은 자기가 믿던 하나님께 버림을 받는가? 그걸 봐야 돼요.
그걸 봐야 이것은 단순히 보고 싶다는 차원을 떠나서 ‘아, 저주받을 자가 바로 나구나’라는 것을 압니다. 이거는 이유가 없지요. 왜냐하면 이유를 하려면 내 자아에서 끄집어내야 하는데, 이유를 끄집어내고 구차하게 이유를 다는 그 자아가 문제기 때문에 그게 고장 났거든요.
자아 위에서 죄를 찾으려 하면 안 돼요. 부흥사의 잘못이 뭐냐? ‘회개하시오, 회개하시오’ 하니까 만날 전에 회개했던 것 또 끄집어내서 할 게 죄 지은 게 없어 그런데. 사람 자체가 약속에 의하면 그게 죄가 되는데 그것도 모르고 구태여 자기 잘못한 것 끄집어내려고 하니까 그것은 회개하는 자아는 잘난 자아가 돼요. 멋있는 자아가 돼요.
바로 방금 이야기한 이 모든 것이 교회라는 것을 사람이 생각하면서 이런 잘못된 자아상에서 전부다 교회에 성경적 용어를 빙자해서 다 몰려서 교회라는 것을 만들어놓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 사도 바울의 교회론이고, 그 교회를 가만두지 않고 계속해서 말씀으로 치는 주체가 바로 진짜 그리스도 몸이고 교회라는 겁니다.
우리교회(IP:220.♡.176.150)
08-12-14 10:17
부산081202b조지래드24신약신학-교회b
20081202b 부산강의 : 조지래드 [신약신학]-교회
(강의:이근호 목사)
반대하죠, 반대.
-그럼 틀이라 하는 것은 어떤 정형화된 틀이 아니라 사건, 사건이 발생될 때마다 하나의 틀이 되는 겁니까?
사건 이전에 사람이 창조돼있다, 존재돼있다, 사람이 존재돼 있잖아요. 있음이 이 자체가 틀이라니까요. 이 틀을 뭐라고 하느냐? 아까 했잖아요. 유기체라 합니다.
다시 이야기할게요. 물은 하얀 게 맞잖아요. 물이 하얗다 해서 먹을 물이야 이야기할 수 없고, 먹을 물이라는 사건이 있을 때 먹을 수 있지, 물이 하얗다고 주장한다고 다 먹을 물이 아니잖아요. 강물을 먹을 수 있습니까? 못 먹잖아요. 마찬가지로 교회라 하는 것은 있는 그 자체가 유기체적으로 있는 거예요. 유기체로 있다 하는 것은, 교회가 무엇이냐 아무 소용이 없다니까. 세상은 유기체가 아니면, 있음 중에서 두 가지밖에 없어요. 하나는 유기체로 있든지 무기체로 있든지 둘 중에 하나밖에 없지. 무기체 아니면 유기체로, 유기체 아니면 무기체에요.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역사할 때 그때 내가 교회가 아니다. 교회는 결국 예수 그리스도 교회라고 고백되어진다.
할 때 그 사람이 교회지요. 그 사람이 교회인기라.
-그 사람은 믿지만 그 사람의 어떤 잘못된 교회관
바로 나에게 지목하는 그게 교회라 할 때 지목하는 사람이 누굴 지목합니까? 감독과 장로와 집사로 지목하잖아요. 그러면 이 직분은 뭡니까? 주님의 사건을 담고 있는 성경대로 감독 직분 맞잖아요. 그러니까 사도 바울 말이 맞다고. 감독과 장로를 세우고 집사를 세워서 교회를 봉사케 한다. 그것도 말씀을 전담케 한다. 이 말이 맞는 거예요. 그런데 ‘나는 목사다. 내 말 들어라.’ 이건 틀렸다 이 말이죠.
성경에 모든 감독이라든지 직분, 모든 말씀은 말씀을 말씀 되게 하는 주체자가 주님이십니다. 그럴 경우에만 교회가 되는 거예요. 왜냐하면 ‘예수님은 머리 되신다’는 이 말은 다른 말로 하면, ‘예수님은 그 교회의 주가 되신다’는 말입니다. 머리되신다는 말이 왜 주가 되시느냐 하면, 사람의 머리 같으면 머리에서 흘러나오는 게 없잖아요. 신경이나 흘러나오지 안 나오잖아요. 피는 어디서 나옵니까? 심장에서 나오죠.
그런데 교회에서 모든 은사는 어디서 나옵니까? 머리에서 나오는 거예요. 머리가 그냥 덜렁 머리가 아니라 계속 머리에서 나오는데 그 나오는 정도가 어느 정도로 나오느냐? 에베소서 1장에 보니까 이래 돼있어요. ‘충만’, [피]란 책에 보면 이걸 흐르고 넘친다고 했어요. 충만에서 나온다는 이 말은 뭔 뜻이냐 하면, 여기 지체 돼있는 사람이 구태여 자기 능력을 자기 자실과 능력을 발휘할 필요도 없고 그런 허락도 안 해요. 넘치는 것으로 인하여 지체에게 주어져서 이 지체는 그것을 어디다 영광 돌리느냐 하면, 머리되시는 주님께 영광 돌리게 돼있습니다.
만약에 자기 능력이 나와 버리면 이게 주님한테 올라가지 않고 이게 어디에 멈추느냐 하면, 자기 고유의 유기체, 나라는 유기체에 멈춰버려요. 나는 목사입네, 나는 장로입네 해서 스톱이 돼버린다고. 오늘도 목사 일을 하게 하신 주님, 이게 아니고 나는 목사이기 때문에 한다. 자기 자신에게 멈춰버려요.
그게 뭐냐? 그거는 하다보면 ‘야, 목사 일 힘들어서 못 하겠다.’ 충만한 게 아니고 자기 딴에 열심히 하려고 했는데 능력이 이것밖에 안 돼서 못 하겠다 해서 그 인식 자체가 어디서 흘러나오는 충만함이 아니고, ‘아이, 이것밖에 안 되네. 공부 좀더 해서해야겠다.’ 자꾸 자기에 대한 확인을 하게 된다 말이죠. 그러면 그 모습이 교인들에게 비춰버리면 교인들은 목사의 모습에서 주님이 보이는 게 아니고 목사 자신의 열심이 나와 버리죠. 그러면 그 순간 그 목사는 그리스도 몸을 제대로 봉사 못한 게 돼요. 항상 설교하면서도 자기 부인이 돼야 돼요.
-목사님 가르치는 내용이 전달이 안 되는 것이, 말씀이 임할 때 틀, 유기체, 자기 자신을 부인하는 그것이 교회 아닙니까. 예수님만이 교회라고 할 때 그러니까 그 틀이 결국 부인하는 유기체가 있다 할지라도 교회는 확인 안 되는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지금 틀이 있다고 하니까 틀 있는 우린 지금 교회가 아니라고
틀 없는 경우가 없습니다. 모든 게 눈에 보이는 형체가 있다. 만약 욥처럼 입을 가리고 재를 뒤집어쓰면 다른 사람이 뭐라 하겠습니까? 자기도 욥처럼 입을 가리고 재를 뒤집어쓰니까 그게 하나의 형식이 되고 틀이 되죠. 사람이 살아있으면 어떤 틀이 없다 하면 심지어 ‘우리는 장로 없다’ 하는 그것도 하나 틀일 수 있죠.
-말씀이 누굴 증거하느냐? 내 증거냐 아니면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냐?
그렇지요.
-그때 자기 살아있을 때에 그럴 때 틀이라고 할 수 있느냐?
할 수 있습니다.
-자기 부인하는 그것도 하나의
틀입니다. 그게 아까 해봅시다. 에스라, 느헤미야에서 에스라는 율법이라는 정신, 이걸 해서 포로 전의 상태로 회복해보겠다. 그리고 느헤미야는 성전을 지었지요. 이거 에스라, 느헤미야가 했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이것 누가 했느냐 하면, 하나님께서 일부러 시켰어요. 시켜서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성전 존재에 대해서는 비록 너희들이 제대로 간수 못했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이 뜻을 포기할 마음은 없다 이래 보는 거예요.
말라기에 나오죠. 레위 언약의 영원성. 하나님의 율법 정신과 성전 고수를 비록 사람이 그걸 달성 못한다 할지라도 절대로 나는 포기할 의사가 없다는 식으로 하나님께서 에스라, 느헤미야를 보내서 간소하나마 일부러 만들죠. 이것도 시간이 지나면 다시 뭡니까? 율법도 시들해지고 다 시들해져요. 왜냐하면 그 당시는 선지자가 없으면 잔소리 하는 사람 없어서 다시 원래대로 항상 돌아가게 돼있어요.
여러분, 구약의 선지가가 없게 되면(있어도 마찬가지지만) 과거 가지고 들먹이면 인위적인 방법의 반복이 돼요. 그럼 뭐로 바뀌느냐 하면, 과거의 것이 형식화돼요. 그 대표적인 것이 뭐냐 하면, 사울 왕이 전쟁을 해야 되는데 분명히 약속 시간 10시인데 오질 않는 거예요. 그런데 민수기에 보면 전쟁할 때 반드시 제사를 드려서 해야 돼요. 언약궤 앞장서서 언약궤에서 말씀을 받습니다. ‘이길 수 있을까요, 없을까요?’ 제사를 드려서 말씀을 받는데 사무엘이 오질 않는 거예요. 자기 먼저 한 거예요. 그동안 해 왔던 걸 했다 이 말이죠.
사무엘이 지가 뒤늦게 와서 뭐라 합니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잖아요. 그렇다면 제사를 제사답게 지내려고 했던 이 정신은 이미 한물 간 정신이다. 이거는 사무엘 선지가가 오기 전까지 알았던 정보지요. 선지가가 오면 너희들이 알던 이 제사정신 말고 플러스알파, 순종할 새로운 지침서가 마련되죠. 이런 게 어려운데 새로운 지침서가 마련되면 그 뒤에 일어날 사건들은 뭐냐? ‘이 지침서가 과연 진리 맞습니다’ 하는 사건이 터지게 돼있다고요.
그런데 만약에 질서를 무시해버리면 사람들은 새로 닥친 일어난 상태, 전쟁 상태지요. 상태에 대해서 과거 동안 집착된 자기 안 것 가지고 이 사태를 해결하려고 할 때 반드시 실패에 이룰 수밖에 없는 겁니다. 이런 과거의 인간의 누적된 정보량, 하나님의 계시 모아서 해봐도 실패인데 새로운 지침에 의하면 이거는 젖먹이와 어린아이라도 이겨요. 이건 어제 이태현 목사님 이야기했잖아요. 젖먹이라도 이긴다고. 시편 8편에 나오듯이. 젖먹이라도 승리할 수 있는 왜 승리 못하는가? 그거는 새로운 계시에 대한 복종이 없기 때문에.
이태현 목사님의 주제가 뭐였습니까? 오늘날 한국교회는 복종이 없다고 했거든요. 2시간 20분 동안 들어보세요. 늘푸른교회 들어가서. 저는 그걸 들으면서 흐름이 어떻게 되는가를 조사해 봐요. 이분이 어떤 주제를 가지고 그 내용을 채우기 위해서 어떤 본문들을 해서 다윗이 복종하는 그 하나님만 진짜 하나님이고, 복종하지 않는 하나님은 하나님이 아니라는 걸 그 주장을 하기 위해서 어떤 본문을 했는가를 살펴보는 겁니다.
선지자가 만약 안 온다? 안 오면 그들은 뭐 할 겁니까? 기껏 지난 선지자들이 했던 것을 주워 모아서 그걸 형식화하고 법제화할 수밖에 없는 겁니다. 그래서 말라기 이후에 세례 요한까지 누가 없습니까? 선지자가 없는 거예요. 이것은 곧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버렸다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말라기 4장 끝에 여운을 남겼어요. “내가 엘리야를 다시 보내리니 아비의 마음을 자식에 자식의 마음을 아비에게로 만약에 돌이키지 아니하면 저주를 받을 것이라”
그러면 그 당시 말라기 이후에 비록 선지가가 없더라도 이제는 누굴 기다리느냐 하면, 이제 선지자 필요 없어요. 마지막에 엘리야를 기다려요. 엘리야 특징은 구름 타고 온다고. 그때 그 엘리야가 다시 오면 되는 거예요.
자, 여기에서 에스라, 느헤미야가 성전과 율법 중심으로 돌아가서 거기서 선지자의 새로운 이야기에 의하면 이 역사의 계속 이어짐은 인간의 역사, 인간이 앞으로 선지자 받아서 뭐하고, 선지자 받아서 뭐하고 이런 역사는 이게 다시 뒤돌아감으로 말미암아 이 선은 이미 여기서 절벽이고 끊어졌어. 단종 되었어. 단절돼버렸어요.
‘인간이 할 수 있는 게 단절되었다’ 이 말은 결국 성전을 세워도 누가 세우고? 여호와 신이 세우고, 그 다음에 새로운 율법을 해도 예레미야나 에스겔처럼 누가 옵니까? 여호와 신이 아예 우리 마음 바깥이 아니라 마음속에 하나님의 새 언약을 세우는, 그건 누가 하느냐 하면, 에스겔 끝에 보면 다윗이에요. 여기 선지자 쪽에서는 누가 오고? 엘리야가 오고. 결국 이거는 쌍으로 오죠. 다윗 같은 왕이 와야 되고, 그 왕 앞에 누가 와야 되고? 엘리야 같은 선지자 하고 완전히 짝을 이루죠. 짝을 이루어서 언젠가는 와야 된다 이 말이죠.
올 때 사람들은 엘리야를 기다렸고 다윗 왕을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뭘 모르느냐 하면, 왜 인간에게 선지자가 끊어지고 왜 이것이 후퇴해버렸는가? 왜 이만큼 쌓아왔던 것을 앞으로 전진 할 수 없는 이유가 뭐냐? 그 이유에 대해서 그들은 몰랐던 거예요. 그것은 바로 인간 자체에 대한 저주입니다.
이제부터 교회 안에 어떤 사건이 터지는가 봅시다. 사도 바울이 교회라고 했을 때 에베소서 1장에 나오잖아요. 그리고 고린도전서도 나오고 여러 가지 나오는데, 사도 바울이 교회라고 하는 것은 그 앞에 반드시 성도가 우선됩니다. 성도가 모여서 교회 되는 게 아닙니다. 지상에는 성도, 그 성도의 나타나게 된 것은 결과적으로 교회이기 때문이다 이래 보는 겁니다.
여기서 우리는 기적의 두 가지를 선언하는데 ‘만남’과 ‘나타남’, 이것은 오후 설교 때 했어요. 우리가 만남은 기적이 아니에요. 나타남을 이해할 때만 이게 기적이 되는 겁니다. 누가복음 끝에 보면 제자 두 명이 엠마오로 내려가다가 누굴 만나지요. 계속 그들은 만남으로 이어져요. 선지자를 만나야 돼, 누굴 만나야 돼, 메시아를 만나야 돼. 만나야 되는데 그들은 결국 만남이 아니었고 주님께서 자기에게 일부러 나타나주신 거예요.
결국은 여기 구약 성도들이 메시아를 만날 생각 하지 말고 결국은 이걸 그들에게 구약의 모든 말씀이라 하는 것은 신약에 대해서 마지막 때 나타날 때가 있는 거예요. 그들이 기다리든, 고대하든 이건 깡그리 무시당하고 그냥 나타나면 되는 거예요. 그래서 ‘재림’의 원 뜻이 뭡니까? 커튼 뒤에 있다가 커튼 젖혀 보니까 거기 있는 거예요. 이게 계시가 열리는 거예요. 요한계시록에서. 계시가 열리면서 커튼이 벗겨지면서 그분이 거기 있는 거예요. 밧모 섬에서 누굴 만났습니까? 예수님의 영광스런 모습을 봤잖아요. 사도 요한은 너무 놀라서 엎어졌지만. 지금 주님이 계신 거예요.
교회라는 것은 이미 있었습니다. 어디 있었느냐 하면 예수님이 십자가 지고 부활할 때 교회는 이미 있었습니다. 교회가 교회 되어간다는 말은 없습니다. 교회는 예수님 십자가 지고 부활하셨을 때 이미 교회는 있었고, 이제는 그 교회가 어떤 교회냐 하는 것은, 성도의 나타남으로 교회가 있음이 확인되죠.
그러면 성도의 역할은 뭘까요? 교회가 어떠냐를 보여주는 하나의 도구, 하나의 증거물로써 있다 이 말이죠. 이것은 성도가 모여서 교회 만들기는 없는 겁니다. 떡을 떼며 서로 제 것이라 하지 않고 서로 나눠주며 그래서 뭐 됐습니까? 그래서 교회 됐습니까? 아닙니다. 교회가 있기에 그들은 나눠줘야 했었고, 떡을 떼어야 했었고, 주님을 오실 때까지 기다려야 했던 거예요. 그리고 은사가 주어지면 설교자는 설교를 해야 했고, 봉사자는 봉사를 해야 하는 겁니다.
믿음, 소망, 사랑은 항상 있고 몸을 불사르더라도 사랑이 아니고, 사랑은 진리와 함께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견디는 거예요. 기뻐하는 거예요.
제가 광주강의 때 한 여기서 예를 들어볼게요. 전에 사우디아라비아와 축구할 때 2:0으로 이겼잖아요. 2:0으로 이겨놓고 그걸 감독하고 코치하고 앉아서 다시 한번 보는 거예요. 박주영을 전반전부터 뛰었으면 어떻겠어? 3:0 안 되겠어? 박주영 늦게 와서 피곤하다고 해서 후반전 해서 한 골 넣었는데 박주영을 전반 초반에 뛰면 어떻겠어? 3:0 됐을 걸. 이래 이야기할 수 있단 말이죠.
그때 그 말할 때 초조함입니까, 느긋함입니까? 이미 2:0으로 이겼잖아요. 느긋하지요. 오늘 부산에다 최 집사를 성도로 만들어버릴까, 아예 김 집사를 전반전 뛰게 할까? 대구에 이 장로를 대구에다 성도하게 해버릴까, 서울로 이사하게 만들까? 전부 다 뭡니까? 이미 교회의 머리되신 분이 이번에 저 인간을 성도 만들어버릴까?
이것은 머리되신 주님께서 사로잡힌 자를 사로잡는 식으로 은사를 내려줘서 그래서 성도되게 할 때 이 성도는 뭐냐? 그리스도 몸이 있음을 보여주는 은사적인 기능과 역할을 해야 되는 거예요. 그래서 저는 말합니다. 그리스도 몸을 보이지 않는 은사로 기능이 없는 것은 저는 성도가 아니라고 봐요. 지가 구원받으려고 환장한 인간이지, 절대로 거듭나게 하신 사람이 아니에요.
요한복음 3장에서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늘나라를 볼 자가 없다. 이 자체가 인간의 힘을 능가하잖아요. 이건 사람의 힘이 아니잖아요. 마찬가지로 신자가 없는데 교회 있을 리 없잖아요. 그러니까 이런 신자가 나타났다는 것은 신자, 자기가 한 게 아니고 이미 교회가 있고, 교회됨에서 뭔가 삐져나온 긴 팔이 바로 성도라고 하는 겁니다. 성도는 구원받았다는 걸 증거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 있다, 그 교회 머리되시는 분은 주님이다’ 증거하기 위해서 성도는 나온다 이 말이죠.
이걸 이쪽에서 인간 쪽에서 볼 때 유기체라고 말할 게 아니라 하나의 ‘사건’이다. 하나님이 일으킨 발생한 하나의 사건이 됩니다. 이렇게 될 때 고린도 교회 있고, 에베소 교회 있다면 어느 것이 더 교회냐 하는 말이 안 되죠. 래드 말대로. 고린도도 교회고, 에베소도 교회고. 둘이 합쳐서 교회 두 개 아니라 둘이 합쳐도 교회는 하나밖에 없고, 여기 열 개 있어도 열 교회가 아니고 한 교회밖에 없고. 일곱 교회 있어도 요한계시록에 전부다 예수님의 오른 손에 잡혀있는 한 교회밖에 없다.
그럼 좀 더 들어가 봅시다. 교회라는 것이 어디서 나왔는가? 그건 조금 있다 이야기할 거예요. 교회에서 성도될 때 여기 사건이 있어야 되죠. 지금부터 어려운데 이 교회에서 성도되는 사건이 무슨 사건이냐 하면, 바로 십자가 사건의 반복입니다. 여기서 대단히 어렵지요. ‘십자가 사건이 반복됐다.’ 이 지상에서는 반복 되는 건 없습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안경을 쓰고 또 쓰고 똑같은 경우는 없어요. 한 쪽으로 쭉 흘러가버리기 때문에. 파르메니데스입니까? 철학자가 이야기했잖아요. 한 번 지나간 똑같은 물에 두 번 목욕할 수 없다. 얼마나 당연한 이야기입니까? 강물은 흘러가니까. 여기서 인간은 변화성이 있다는 거죠.
모든 게 변화되는데 십자가 복음만 변화 안 된다. 이게 있을 수 없지요. 따라서 십자가 사건을 뭐로 번역해야 되느냐 하면, 변화 안 되는 요소로 번역을 해야 돼요. 그냥 십자가 사건 같으면 또 형틀 지고 또 올라가고, 여자들 울어야 되고. 연출해야 되니까. 그래 안 되니까.
예를 들어서 내가 물을 마신다. 어려운데 해봅시다. 어려워도 해야 돼요. 물 마시려면 팔 동원돼야 되죠. 손으로 뚜껑 열어야 되죠. 여러 가지 변화가 동원된다고요. 하지만 십자가 사건 일으키려 하면 십자가 형틀 있어야 되고, 여기 강도 두 명 있어야 되고 동원되잖아요. 그런 것이 없는데 십자가 사건 되게 하잖아요. 어떤 장치가 없는데 배치도 없으면서도 십자가 사건은 되풀이 될 수 있는 요소, 구성요소가 변하지 않는 그게 어떤 거냐?
그때는 어떻게 하느냐 하면, 이 변화되는 모든 것은 ‘한 묶음’으로 묶어버려요. 한 아담. 모든 변화를 한 묶음으로 묶어버리면 여기서 어떤 변화가 일어나도 이거는 뭐냐? 두더지 빠진 하나의 단지 속에 있는 변화지만 이 변화의 질은 오직 하나의 요소에 다 통합돼있죠. 또 하나의 단지를 둡니다. 그럼 이거는 아담 안이라면, 이건 뭐가 되겠어요? 예수 그리스도가 되겠지요. 그리스도가 수많은 변화가 있더라도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내일이나 그리스도가 뭘 해야 돼요? 동일해야 되죠. 동일함.
이 그리스도의 동일함에 우리 보통 인간이 여기에 도착되면 우리 인간은 자기를 해석할 때 뭐로 해석해야 되느냐 하면, 예수님의 동일함으로 자기를 다시 해석을 해줘야 되는 겁니다. 오늘 강의에서 제일 중요한 대목이 이 대목이에요. 나를 해석할 때 동일함으로 해석을 해줘야 돼요.
그 한 예를 지난 오후예배 때 했는데 십자가 질 때 강도 있었지요. 강도가 예를 들어서 전과 20범 합시다. 전과 20범이지만 그가 십자가 예수님 보고 ‘오늘밤에 하늘나라 임할 때 저를 생각해달라’라고 했을 때 ‘네가 오늘밤에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그때 강도가 20범 이상 왔다갔다해도 예수님의 해석이 자기 기나긴 과거를 덮쳐버리니까 자기는 뭘 해석하느냐 하면, 낙원에 갈 수 있는 지난 과거가 돼버린 겁니다. 천국에 갈 수 있는 과거가 돼버려요.
이건 환장할 거야. 내가 여자 밝히고, 강간하고, 도둑질 하고, 사람 때려죽이고, 아파트 가스관 타고 왔다갔다하고, 차사고 내고, 주차위반하고 무슨 짓을 해도 이 전부가 예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된 것이라는 걸 해석을 할 수 있는 그 동일한 해석이 주어지게 되면 전에 유기체적 자아로부터 해석한 자아가 여기에 뭐가 덮칩니까? 주님의 자아가 덮쳐버리면 나의 자아는 주님의 자아한테 숨 막혀서 끽 소리 못하고 깔리죠.
끽하고 뭐가 덮치노? 주님의 자아가 나의 자아를 덮쳐버리면 여기서는 변화의 여지가 없습니다. 변화라는 것이 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