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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08대구강의14-실존주의철학(샤르트르와야스퍼스의사상)2자유게시판[철학]

08대구강의14-실존주의철학(샤르트르와야스퍼스의사상)2

이름 : 구득영(IP:203.223.97.227)

08 대구강의 14 - 실존주의 사상가 '사르트르와 야스퍼스'2

08,10,21 강의 이근호, 정리 구득영

◈ 인간은 던져진 존재 !!

지금 한 질문이 아주 중요한 내용을 담고 있는데, 그런데 녹음이 안 되어서 좀 아쉬운데, 아무튼 오늘 이 시간에는 샤르트르와 야스퍼스에 대해서 지난 23일에 이어서 약 한 달만에 두 번째로 하겠는데, 먼저 우리 교재 3페이지를 살펴보자.

** (인간은) 도달할 수 없는 신을 향하여 자아를 늘 던지는(기투, 企投) 모습을 띤다. 맨 처음 인간은 이 세계로부터 던져진(기투된) 존재이기는 하지만, 이제는 본인이 알아서 기투(던진다)한다. 이 메울 수 없는 간격이 살아있기에 인간은 늘 자유하다.

맨 처음의 인간을 하나님께서 던졌다는 것인데, 물론 여기에서 '던졌다' 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야, 더 이상 꼴 보기가 싫어. 저리 꺼져" 라고 해서 던진 것이 아니라, 인간이 있기 이전에 먼저 계신 분이 있었다는 말이다. 마치 부모가 먼저 있고 난 그 다음에 자식이 생기는 것처럼 말이다. 즉 자식이 부모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 어머님, 왜 저를 낳았습니까 ??

그런데 요즘 아이들은 부모에게 "어머님, 왜 저를 이렇게 낳았습니까?" 라고 하면서, 마치 자기들에게 결정권이 있는 것처럼 하는데, 물론 전혀 철이 없어서 하는 말지만 말이다. 그것을 철학적인 용어로 표현을 하자면 '기투'를 몰라서 그렇다는 말이다.

아무튼 인간은 그렇게 던져진 존재인데, 그러니 자기가 왜 그렇게 던져졌느냐고 주장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제는 본인이 알아서 기투하는데, 마치 어미 새가 알을 까놓으면 새끼들이 각자 다들 알아서 날아다니듯이 말이다. 바로 그러한 것이 인간이라고 샤르트르는 주장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자기가 모든 것을 결정하고 자기가 책임을 지고 하는데, 그것을 두고 "인간은 자유하다" 라고 하는 것이고 말이다. 이렇게 인간에게는 자유가 있는데, 하지만 인간은 자유가 있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사물과는 다르다는 것이다. 그것을 지난 시간에 했는데, 즉자존재인 사물과 인간은 다르다는 말이다.

◈ 인간은 사물, 즉 '즉자존재' 와는 달라 !!

무슨 말인고 하니, 돌맹이는 그냥 그대로 있지만, 그러나 인간은 자꾸만 뭔가 자기가 결정을 하려고 하고, 자기 변신을 시도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어떤 현상이 일어나는고 하니, 인간이 돌맹이와 식탁과 같은, 그런 사물만 만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그런데 인간은 즉자존재인 사물만 만나는 것이 아니라 같은 인간인 타인도 만나게 된다. 그 타인은 나름대로의 시선을 가지고 나를 바라본다. 따라서 사물과 타인이 다른 점은, 타인은 '나를 바라보는 자'라는 점이다.

◈ 인간은 타인도 만나게 되는데 !!

인간은 사물만 만나는 것이 아니라, 같은 인간인 타인을 만나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어떤 문제가 생기는고 하니, 처음에 엄마가 아이를 볼 때는 기투된, 즉 던져진 자식인데, 그런데 그 자식 때문에 귀찮다든지 부담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오히려 사랑스럽고 좋지 말이다. 집에 화초를 들여다놓았다고 해서, "화초야, 내가 너 때문에 못하겠다" 라고 할 필요가 없듯이 말이다.

◈ 그런데 점점 '내' 자유가 방해를 받아 !!

그렇게 아이가 어릴 때는 그냥 좋고 귀엽고 한데, 그런데 그 아이가 정체성이 성립되고 난 뒤부터는, 즉 미운 7살을 지나고 나서는 그때부터는 부모에게 말대답을 하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어마, 미워" 라고 말이다. 그렇게 되면 부모의 영역이 축소가 된다고 할까, 아무튼 그렇게 자기가 자유가 방해를 받는다는 말이다. 그렇지 않나요?

◈ 아가야, 이리 오너라 ??

예를 들어서, 시어머니가 며느리를 보고는 처음에는 딸처럼 키운다고 하는데, "아가야, 이리 오너라" 라고 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계속해서 그렇게 유지가 되는가? 시간이 지나면서 어떻게 되는가? 막상 며느리가 아이를 낳고 서로의 영역이 확고해지면, 그 다음부터는 어떻게 되는가?

* 시어머니 : 야야, 이제는 나 혼자 좀 살란다.
* 며 느 리 : 예, 뭐라구요?
* 시어머니 : 니하고 같이 살려고 하니 힘든다.
* 며 느 리 : 무슨 말씀인지?
* 시어머니 : 그러니 이제는 독립해라.
* 며 느 리 : 그러면 돈을 좀 더 모아서 독립을 할게요.
* 시어머니 : 그래도 지금 좀 나가주면 안 되겠나?
* 며 느 리 : 그러면 어머니는 아이를 좀 키워주세요.
* 시어머니 : ? ? ?
* 며 느 리 : 감사합니다.

그렇게 나중에는 서로가 타협하는 식으로 나간다는 것이다. 그런데 10년이 가든 100년이 가든 의자나 식탁이나 돌맹이는 자기에게 압박을 가하지 않는데, 그냥 그대로 있는데, 그런데 그러한 즉자존재가 아닌 대자존재인 타인을 만나게 되면, 그 사람이 은근히 자기에게 압박을 가한다는 말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처음에 서로 모르는 낯선 사람을 처음 만났을 때는 서로 고맙다고 하면서 잘 지내는데, 그런데 나중에 지나다보면 잔소리를 한다는 것이다. 역시 며느리와 시어머니의 경우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이 된다는 말이다.

◈ 우리 시어머니는 촌닭 ??

* 며 느 리 : 어머님, 영 어울리지 않은 옷을 입었네요.
* 시어머니 : 그래도 이게 비싼 옷인데.
* 며 느 리 : 아닙니다. 남들이 욕합니다. 다른 옷을 입으세요.
* 시어머니 : 아닌데? 내 옷도 내 마음대로 입으면 안 되나?
* 며 느 리 : 그래도 다른 옷으로 갈아입으세요. 며느리도 있는데 말입니다.
* 시어머니 : 그래도 나는 이게 좋은데.
* 며 느 리 :그렇게 입으면 촌닭이라고 합니다.
* 시어머니 : 뭐, 촌닭?
* 며 느 리 : 죄송해요. 그러니 다른 옷으로 갈아입으세요.
* 시어머니 : ? ? ?

그렇게 자꾸만 다툼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또한 자기 아이를 맡겨놓아도 처음에는 며느리가 엄청나게 고마워하겠지만, 그러나 역시 그것도 시간이 지나면서 문제가 되고 다툼이 일어나고 만다는 것이다. 다음과 같이 말이다.

* 며 느 리 : 어머님, 아이 좀 부탁합니다.
* 시어머니 : 알았다.
* (그리고 한 달 뒤에 와서는)
* 며 느 리 : 그런데 어머님, 아이가 왜 이리 살이 쪘어요?
* 시어머니 : 아이가 아이스크림을 좋아해서 매일같이 사주었지?
* 며 느 리 : 그래도, 이렇게 돼지를 만들어놓으면 어떻게 해요?
* 시어머니 : 알았다. 미안하다.

그것은 교회도 마찬가지인데, 처음에 교회에 나오면 아주 잘해주는데, 그런데 나중에는 굴러온 돌이 너무 설쳐서 박힌 돌을 뺀다고 하면서 시비를 걸면서, 그렇게 텃세를 부린다는 것이다. 물론 상대방에서는 교회는 주님의 몸인데 무슨 그런 소리를 하느냐고 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그것이 자존심의 문제이니 쉽게 해결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 샤르트르가 말하는(?) 공원 예화 1,2 !!

그래서 샤르트르는 이것을 어떻게 설명을 하는고, 예를 들어서, 어떤 사람이 혼자 공원에 있을 때는 벤치와 나무와 그 모든 것들이 자기를 위해서 있는 것 같다는 것이다. 그런데 막상 다른 사람이 오게 되면, "과연 저 사람은 나를 어떻게 볼까?" 라고 생각을 하게 되는데, 아침 9시에 나왔다면 노숙자로 취급을 당할 수도 있고 말이다.

그러므로 그 사람이 새로이 공원에 있음으로 말미암아서, 자기의 중심세계가 흔들리고 그만 방해를 받는다는 것이다. 그러게 되면 그때부터는 어떻게 되는가? 서로가 이 공원에서 누가 주도권을 가지게 되는지, 거기에 대해서 다툼과 싸움에 들어간다는 말이다.

◈ 여기가 너희들 집이냐 !!

또 예를 들어서, 아침에 노인네가 맑은 공기를 마시려고 나갔는데, 그런데 벤치에서 젊은 연인이 서로 뽀뽀를 하고 난리가 났다는 것이다. 그러면 대번에 뭐라고 하는가? "이게 너거 집이가?" 라고 하는데, 즉 왜 집구석에서 하는 행세를 여기서 하느냐는 것이다. 그러니 다른 말로 하면, "이 공원에서는 중심점이 너희들이 아니다" 라는 말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자기가 거기에 여기 이 공원에 엄연히 있는데, 그런데 자기를 무시하고서 그렇게 줄기차게 빨면서 난리를 피우면서, 즉 자기들이 중심점이라고 착각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러면 그들이 뭐라고 하겠는가? "할배, 세대차이가 너무 나네요" 라고 하는데, 즉 자기들 입장을 모른다는 말이다. 지금 샤르트르의 주장이 그렇다는 말이다.

그러니 이러한 대화자체가 공원에 대한 주도권 싸움이란 것이다. 즉 그러한 젊은 아이들이 없을 때 이 공원에서 보았던 그 아름다움과 낙엽이 떨어지고 하는 추억들이 방해를 받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와 반대로 젊은 남녀의 입장에서는, 웬 노인네의 등장으로 인해서 자기들이 열정과 사랑을 나누는 달콤한 자기들의 세계가 그만 방해를 받는다는 것이다. 여러분도 그런 추억이 있지요?

◈ 왜 노인네와 젊은이가 싸우는가?

이것이 바로 자연인에서 문화인으로 변모하는 과정인데, 자기가 혼자 살면 옷을 벗고 살아도 아무런 문제가 없는데, 그런데 이 도시에는 자기 말고 다른 사람들도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등산을 하다가 산에 다른 사람이 없다 싶으면 오줌을 함부로 누는데, 남녀노소가 없이 말이다. 그것을 욕한 문제가 아니라 자연인이기 때문에 그러한데, 사람들이 왜 산을 찾는가? 그것은 문화인, 즉 도시인에서 자연인으로 다시 회귀하고 싶어서 그렇다는 말이다.

그런데 그런 자연인에서 문화인이 되면, 반드시 '법'이 동원되는데, 즉 문화인이 살고 있는 사회라는 것은 법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문화인에서 자연인으로 돌아가려고 하면 무엇을 제거하면 되는가? 의외로 간단한데, 법만 무시하면 된다는 말이다.

◈ 군대에 갔다오면 인간이 된다 ??

어제 서울 강남의 논현동 고시원에서 6명이나 무차별적으로 죽은 방화 및 살인 사건이 일어났는데, 그런데 그 살인범이 예비군 훈련에 불참해서 150만원의 벌금을 냈다는 것이다. 그 이야기를 듣고는 제 머리 속을 스치고 지나가는 생각이 "군대에 갔다오면 인간이 된다" 라는 유명한(?) 말이 있는데, 그런데 이 사람은 예비군 훈련을 나가야 하니, 군대는 갔다온 것이 분명한데, 그런데도 인간이 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혹시 방위출신인가?

◈ 하나님께서는 선인과 악인에게 골고루 햇빛을 !!

지금 현대인들이 스포츠나 오락 등에 열광을 하는데, 그런데 충청이남지방에서는 농부들이 비가 오지 않아서 난리라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마태복음 5장에 보면, 선인과 악인에게 골고루 햇빛을 주시는데, 그런데 사람들은 그런 것이 하나님의 은혜인 줄 모른다는 것이다. 또한 평소에도 비가 있고 공기가 있으니, 그런 것은 당연히 있는 것으로 여긴다는 말이다.

(마 5:45)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

◈ 하지만, 현대인들에게는 기본적인 감사가 없어 !!

그러므로 현대인들의 문제가 무엇인고 하니, 기본적인 감사가 없다는 것이다. 논현동 고시원에서 6명이나 죽인 31살을 먹은 이 인간에게는 뭐가 없는가? 감사가 없고, 이 세상에 대한 원한만 쌓여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교회에 다니는 성도의 티를 내려고 하면, 교회에 다녀서 사업에 성공했다는, 그 따위 소리는 하지 말고, 무엇보다도 범사에 감사하는 인간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지금 중요한 것은, 북핵 문제가 아니고, 야구나 축구도 아니고, 지금 시골에서 농사를 짓는 사람들은 무엇이 아쉬운가? 비 한 방울이 그립다는 것이다. 그것이 대통령이 바뀐다고 해결이 되는가? 물론 옛날의 왕들은 비가 오지 않으면 자기들이 책임을 져야하는데, 심지어 왕권을 내놓는 경우도 있었다는 말이다. 즉 왕이 제대로 하지 못해서 하늘이 진노해서 비가 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 만약에 비가 오면 하나님께로 돌아오는가?

그렇다면 만약에 비가 내리면 그 농부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오는가? 전혀 그렇지 않는데, 하나님께서 그렇게 비를 주어도, 결국은 자기가 열심히 농사를 잘 지어서 풍년을 맞이하게 되었다고 주장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곧 인간이라는 말이다. 그러니 전혀 '감사' 라는 것이 없는데, 물론 아쉬울 때는 신을 찾지만, 그러나 그 아쉬움이 해결이 되면 결국은 모든 것을 다 자기 공로로 여긴다는 것이다.

샤르트르의 문제점은 이러한 점을 모른다는 것인데, 샤르트르은 자연인을 원하는데, 거기에는 자유가 있다는 말이다. 하지만 그 자유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는데, 그러나 샤르트르는 그런 것을 전혀 모른다는 것이다. 샤르트르는 처음에는 "신이 던졌다" 라고, 즉 기투했다고 해놓고는, 그 다음부터는 전체적으로 인간들이 알아서 던진다고 한다는 말이다.

◈ 예수님의 자유란,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 !!

하지만 그것이 아니라,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왔으면, 그 다음부터 자기가 알아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다시금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자유'가 무엇인고 하니, 우리 인간이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을 두고서 '자유' 라고 했다는 말이다. 자기 마음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돌아가는 것을 말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왜 이것을 자유라고 했는고 하니까, 인간은 하나님께서 돌아가고 싶어도 돌아갈 수가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샤르트르와 같이 죄에 묶여있기 때문에 말이다. 그래서 하나님께로 돌아갈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 교회란 무엇인가? 다시금 우리 인간을 창조하신 그 창조주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하는 모임이고, 그러한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 바로 '교회' 라는 말이다.

하지만 인간은 왜 하나님께로 돌아가지 못하는가? 그것은 죄가 자꾸만 발목을 잡기 때문인데, 그러니 그 죄가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죄에 대해서 친절하게도 샤르트르와 같은 인간들이 분석해준다는 말이다. 물론 자기는 그것이 죄인 줄도 모르고 그런 일을 하겠지만 말이다.

◈ 인간은, 자기 욕망대로 살고 싶어해 !!

샤르트르가 그렇게 인간을 분석해보니, 그 인간이 노리는 노림수가 무엇이었는가?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물론 면류관을 반납하는 것도 아니고 말이다. 그러므로 모든 것이 주로부터 말미암아서 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인간이 노리는 것은 자유롭게 살고 싶다는 것인데, 즉 성질대로 살고 싶다는 것이다. 누구에게 얽매이는 것이 아니라, 자기 욕망대로 살고 싶다는 말이다.

그래서 "미호씨, 교회에 나와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시다" 라고 하면, "아닙니다. 저는 오늘 등산을 해서 저의 자유를 마음껏 누리고 싶습니다" 라고 하는 것이 인간이라는 것이다. 자기가 굳이 교회에 가지 않아도 하나님이 영광을 받지 않느냐는 것이다. 물론 말은 맞는데(?), 그런 사람은 전혀 하나님께 대해서 관심이 없고, 오직 자기에게만 관심을 집중한다는 것이다.

* 질문 - 높은 산에 가면 하나님과 더 가깝다고 하는 사람도 있는데요?

물론 그런 주장을 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러나 거기 산에는 계시가 없다는 것이다. 물론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 라는 계시는 있을지 몰라도 말이다.

◈ 또 다시 자유를 찾아서 !!

다시 농부 이야기를 좀 하면, 농부들이 자기들이 아쉬울 때는 "신이시여, 비를 주소서" 라고 하지만, 그러나 일단 저수지에 물이 넉넉하게 되면 어떻게 하는가? 노래방에 가서 도우미나 불러서 만지작거리고, 또 다방에 모여서 노름이나 하고 말이다. 결코 하나님을 찾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다시 자기 자유를 찾아서 떠난다는 것이다.

그것이 신명기에 나오는데, "너희들이 약속의 땅에 가서 살만하다 싶으면, 여호와 하나님과의 언약을 버리고 이방신을 쫓는다" 라는 것이다. 그러면 왜 이방신을 쫓는가? 그것은 바로 자기들에게 자유를 주기 때문에 말이다. 여호와는 언약이 있는데, 그러나 이방신은 아무런 계시가 없다는 것이다. 마치 사람들이 등산을 하는 것처럼, 그렇게 이방신은 인간들이 원하는 것을 채워준다는 말이다.

(신 31:16)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열조와 함께 자려니와 이 백성은 들어가 거할 그 땅에서 일어나서 이방신들을 음란히 좇아 나를 버리며 내가 그들과 세운 언약을 어길 것이라

그러면 계시는 어떻게 되는가? 인간들이 자기들 필요에 따라서 만들어서 신에게 결재를 올리면, 신이 그대로 결재를 해준다는 것이다. 그러니 하나님 고유의 약속이나 계시가 전혀 없다는 말이다. 하나님만의 잔소리가 없다는 말이다. 그러니 인간의 자유는, 더 이상 하나님의 잔소리는 듣기 싫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제는 자기가 신이니 말이다.

◈ 샤르트르씨, 고마워요 ??

우리가 지금 샤르트르를 공부하면서 이미 결론이 나왔는데, 이 샤르트르는 자꾸만 자유를 주장한다는 것이다. 물론 이런 샤르트르가 밉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고마운 것은 이 샤르트르는 우리 자신도 미처 모르는 인간에 대해서 너무나 잘 파헤쳐 주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무엇인고 하니, 바로 자연인에서 문화인으로 갈 때 무엇이 동원되는고 하니, '법'이 동원된다는 것이다. 아까 공원에서 'A' 라는 사람이 공원의 경치를 즐기고 있는데 'B' 라는 사람이 벤치에 앉아서 방해를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서로 다투고 있는데, 그런데 'C' 라는 사람이 다시 나오게 되면, 이러한 A B C 사이에는 서로 협정이 맺어지게 된다는 말이다.

◈ 왕과 귀족은 그 시대의 깡패 !!

옛날에는 협정을 맺지 않고 왕의 가문과 그 똘마니인 귀족들이 서로 힘을 합쳐서, 그렇게 왕과 귀족들에 의해서 국가를 다 장악했다는 것이다. 그들이 바로 엘리트들이고 말이다. 물론 다른 사람들은 "그 인간들이 무엇이기에 나라를 장악하는가?" 라고 하겠지만 말이다.

그러나 그들이, 특히 왕이 무슨 일을 했는고 하니, 물론 자기가 왕이 되고 싶은 것도 있었지만, 민중들이 자기들의 왕이 좀 되어달라고 요구를 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가 싸움을 잘하고 남의 땅도 잘 빼앗으니 말이다. 물론 굳이 요즘 말로 하자면 깡패라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자기들의 땅을 좀 넓혀 달라는 것인데, 그런데 일단 왕이 되면, 그것이 세습제가 되어서 대대로 물려지게 된다는 말이다. 귀족도 역시 그런 세습제이고 말이다. 그러니 귀족들도 그냥 귀족이 아니라 전쟁터에 나가서 다 한 건수를 올린 사람들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기사 칭호를 받고 말이다. 우리나라처럼 전쟁이 나면 땅을 파고 숨는다든지, 비행기를 타고 하늘로 튀는 것이 아니고 말이다.

이것이 세습이 되고 시간이 지나면서 그만 독점화가 되어버리고 말았는데, 그렇게 되면서 땅 장사를 해서 토지를 다 자기들에게로 귀속을 시키고 말았다는 것이다. 땅 장사라고 하니, 토지공사가 생각이 나는데 말이다. 그야말로 도둑놈 심보라는 것이다.

◈ 요셉이 바로 왕을 부동산 재벌로 ??

그런 형태가 창세기 47장에 있는데, 보통 사람들이 성경을 읽어도 이 부분은 잘 모르는데, 즉 요셉과 애굽의 바로왕이 합작을 해서 애굽의 그 넓은 땅을 모두 바로왕의 소유로 만들고 말았다는 것이다. 즉 '바로왕' 이라는 회장 밑에 모든 토지재산을 다 귀속시키고, 물론 실권은 사장 요셉이 쥐고 말이다.

(창 47:20) 그러므로 요셉이 애굽 전지를 다사서 바로에게 드리니 애굽 사람이 기근에 몰려서 각기 전지를 팖이라 땅이 바로의 소유가 되니라

그래서 모든 것을 바로왕의 소유로 만들어버리고 말았는데, 그런데 그런 은혜를 모두 다 잊어버리고 바로왕의 후손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그만 핍박했다는 것이다. 그것이 출애굽기 1장의 내용이라는 말이다. 아무튼 온 나라를 모두 다 왕의 소유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 왕의 종교가 곧 백성의 종교 !!

이러한 왕이 지배하던 시대를 '전제군주시대' 라고 하는데, 이러한 전제군주시대에 있어서 종교라고 하는 것은, 왕의 종교가 곧 백성의 종교가 되어야 하는데, 그러니 만약 어떤 백성이 왕이 믿던 종교를 믿지 않으면 그것은 바로 사형감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왕은 자기 밑에 두 가지의 노선을 깔아놓았는데, 행정을 하는 전문관료체제와 백성들의 정신상태를 하나로 묶어주는 제사장, 그렇게 두 계열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것이 창세기 끝과 출애굽기에 나오는데, 바로의 나라가 말이다. 그리고 앗수르와 같은 나라도 있고, 그 역대기를 십자가마을의 이번 겨울 수련회에 공부하지 싶은데 말이다.

거기에 보면 국가에는 두 가지의 노선이 있는데, 물론 제사장도 있고 말이다. 그것이 다니엘서도 나오는데, 복술자들과 제사장들이 바로 그들이라는 말이다. 그들이 느부갓네살 왕의 꿈을 알지 못해서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말이다. 그들이 왜 필요한고 하니, 왕은 그런 사람들을 통해서 왕권체제를 보다 공고히 하려고 하는데, 즉 나라전체를 하나가 되게 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 통일국가의 등장 !!

바로 그것을 두고서 '통일국가' 라고 하는데, 그렇게 국가가 마치 한 몸같이 움직여야 하는데, 그렇게 해야 어떻게 되는가? 전쟁을 할 때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면 당연히 승리할 수가 있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백성들이 곧 군대이고, 군대가 곧 백성들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군주체제가 16세기 종교개혁 이후에 그만 뒤집어지는데, 그래서 나오는 것이 "법대로 하자" 라는 것인데, 물론 백성들은 아무런 힘도 없고 말이다. 그러니 일반백성이 아닌 귀족들이 들고일어나서 하는 말이, "왕이면 다가? 정말 니 혼자서 다 묵을 꺼야" 라고 하면서 왕권을 그만 엎어버렸다는 것이다. 귀족들이 말이다.

◈ 명예 대헌장, 마그나카르타 !!

그런데 왕의 입장에서는 자기는 혼자인데, 그런데 귀족들의 족수가 너무 많아서 할 수 없이 타협을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새로운 법에 의하면, 물론 백성들은 전혀 고려의 대상이 아니고, 그래도 문자 깨나 안다고 하는 왕과 귀족사이에 맺어진 법이 곧 '명예 대헌장' 이라는 것이다. 여전히 백성들은 무식한, 즉 노예인지 백성인지도 구별이 되지 않았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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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그나카르타 (Magna Carta) 1215년 영국왕 존이 귀족들의 강압에 따라 승인한 칙허장. '대헌장(大憲章)'으로 번역된다. 존의 실정(失政)에 견디지 못한 귀족들이 런던 시민의 지지를 얻어 왕과 대결, 템스 강변의 러니미드에서 왕에게 승인하도록 한 귀족조항을 기초로 작성되었다. 원문에는 개조번호(個條番號)가 없으나 18세기이래 63개조로 정리되어있다. 새로운 요구를 내놓은 것은 없고 구래(舊來)의 관습적인 모든 권리를 확인한 문서로서 교회의 자유, 봉건적 부담의 제한, 재판 및 법률, 도시특권의 확인, 지방관리의 직권남용 방지, 사냥, 당면한 애로사항의 처리 등 여러 규정을 포함하고 있다. 본래는 귀족의 권리를 재확인한 봉건적 문서였으나, 17세기에 이르러 왕권과 의회의 대립에서 왕의 전제(專制)에 대항하여 국민의 권리를 옹호하기 위한 최대의 전거(典據)로서 이용되었다. 특히 일반 평의회의 승인 없이 군역대납금(軍役代納金) ·공과금을 부과하지 못한다고 정한 제12조는 의회의 승인 없이 과세할 수 없다는 주장의 근거로서, 또 자유인은 같은 신분을 가진 사람에 의한 재판이나 국법에 의하지 않으면 체포 ·감금할 수 없다고 정한 제39조는 보통법재판소에서의 재판요구의 근거로서 크게 이용되어 금과옥조(金科玉條)가 되었다. 이와 같이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지키는 투쟁의 역사 속에서 항상 생각하게 되고 인용되는 가장 중요하고 기본적인 문서로서 영국의 헌정뿐만 아니라, 국민의 자유를 옹호하는 근대 헌법의 토대가 되었다. - 두산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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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하, 대한민국 !! 아하, 직불금 !!

이번에 벌어진 '직불금' 사태를 바라보면서 느끼는 점이 무엇인고 하니, 인간들이 하는 짓은 그야말로 옛날이나 지금이나 전혀 변함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차라리 그냥 벼룩의 간을 빼먹지 말이다. 그러니 소위 법을 조금이라도 알고 있는 놈들끼리, 그렇게 그냥 모두 다 해먹는다는 것이다. 눈먼돈으로 여기고 말이다.

그때는 왜 그랬는고 하니, 문자라는 것이 아주 제한된 귀족들에게만 해당이 되었고, 또 인쇄술이 발달하지 않아서 말을 해도 협박이나 과장되기 일 수이고 말이다. 그래서 그 당시에 문자를 사용할 수가 있는 곳은 교회밖에 없었는데, 그런데 교회에 있는 신부나 주교들이 누구의 똘마니인고 하니까, 바로 귀족이고 왕의 하수인들이라는 말이다.

◈ 귀족들의 '사설교회' 등장 !!

물론 왕의 직속 신부들도 있었지만, 하지만 귀족들도 자기 영지에다가 교회를 짓게 되는데, 거기에는 자기가 잘 아는 친인척을 신부로서 세우게 된다는 것이다. 자기의 뜻대로 움직여줄 수 있는 말이다. 바로 그런 교회를 두고 '사설교회(?)' 라고 한다는 것이다.

만약에 여기 지묘동에 모든 땅을 다 가진 대지주가 있다고 하면, 여기 살고 있는 주민들은 모두가 다 지주 밑에서 농사를 짓는 하청업자(?)들이라는 것이다. 그러한 지주가 자기 땅인 이 지묘동에 교회를 세웠다고 하면 어떤 사람을 목사로 청빙을 하겠는가? "노동을 착취하는 지주는 각성하라" 라고 하는 목사가 올 수 있느냐는 것이다. 그것이 아니라, 당연히 "부자가 된 것은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라고 하는 목사가 온다는 말이다.

그것이 바로 전문용어로서 '사설교회' 라고 하는데, 그러한 교회는 성가대장을 비롯해서 모든 중요한 요직들은 귀족의 친인척들이 모두 다 차지한다는 것이다. 물론 그들은 믿음이라고는 전혀 없고, 그냥 자기들끼리 모여서 그렇게 해쳐먹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강제적으로 농민들에게 십일조를 거두었는데, 물론 임대차 계약은 따로 맺고 말이다. 십일조는 신부를 통해서 귀족에게 들어가고, 물론 임대차 계약에 의한 세금도 귀족에게 들어간다는 말이다. 그러니 귀족은 여기서 받고, 저기서 받고 한다는 것이다.

◈ 왕은 왜 귀족의 눈치를?

물론 귀족들 위에 왕이 있기는 하지만, 그러나 실상은 왕이 귀족들의 눈치를 보기 바빴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다른 나라와 전쟁이 일어나면 군사들이 필요한데, 그 군사들을 용병으로 뽑게 되는데, 여기서 용병을 돈을 주고 데리고 오는데, 각지에 있는 떠돌이들을 말이다.

그런데 그 많은 돈이 어디에서 나오느냐는 것이다. 바로 귀족들이 그런 돈을 다 가지고 있으니, 왕은 귀족들에게 돈을 내라고 할 수밖에 없는데, 그런데 귀족들은 왕에게 그냥 대주는 것이 아니라, 이자를 받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금융업이 발달했고 말이다.

특히 독일 이전의 보헤미안 지역 등지에서는 귀족들이 돌아가면서 왕이 되곤 했는데, 그야말로 왕이 왕다운 것은 나폴레옹 같은 경우인데, 그런 왕은 그야말로 전쟁의 영웅인데, 사실상 그런 경우는 좀 특수하고 말이다. 이러한 왕보다 위에 있는 것을 황제라고 하는데, 그래서 나폴레옹을 황제라고 한다는 것이다. 중국도 그러했고 말이다.

◈ 드디어 '부르조아' 계급의 출현 !!

아무튼 이런 일방적인 법이 있었는데, 나중에는 이런 것이 뒤집어지게 되는데, 왜냐하면 과학이 발달하면서 농사를 짓는 것보다는 장사를 한다든지 제조업이 돈이 되니까 말이다. 일반귀족은 아니지만, 귀족은 전쟁이 있어서 공을 세워야 되는 것이고 말이다. 그러한 귀족은 아니지만, 그렇게 해서 돈을 많은 축적한 일반인들이 행세께나 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 사람들을 두고서 '부르조아' 라고 하는데, 도시시민들이라고 할까? 그런데 그들이 돈이 많으니, 왕이나 귀족들이 이들의 눈치를 보게 되는데, 그래서 그들이 요구하는 것이, 돈을 대주는 대신에 법적으로 정치에 관여할 수 있는 권리를 달라는 것이다.

◈ 결국은 '민주주의'의 등장으로 !!

이렇게 해서 법이 점점 더 그 범위가 늘어나는데, 처음에는 왕을 위한 법에서, 그 다음에는 귀족으로, 또 도시시민들에게로, 그 다음에는 일반 노동자들에게까지 영향력을 미친다는 것이다. 그래서 19세기 이후에는 여성들에게도 투표를 할 수 있는 참정권이 부여되고 말이다. 그렇게 해서 마침내 사람 위에 사람이 없고, 사람 밑에 사람이 없는 '민주주의'가 태동하게 된다는 것이다.

◈ 有錢無罪, 無錢有罪 !!

그러므로 민주주의라는 것도 정말 인간을 사랑하고 평등하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살펴본 대로 "누가 누가 돈을 더 많이 가지고 있는가?" 라는 것이 그 밑바탕에 깔려있다는 것이다. 결국 돈의 있고 없음의 여부에 따라서 정치의 성향도 달라진다는 것이다. 그놈의 돈 때문에 말이다. 그러니 법도 누구를 위한 법인고 하니, 돈을 가진 자를 위한 법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1988년 올림픽이 끝나고 온 나라를 시끄럽게 한 지강헌이 말한 '무전유죄(有錢無罪), 유전무죄(無錢有罪)가 틀린 말이 아니라는 것이다. 즉 돈이 있는 놈에게는 있는 죄도 없어지고, 돈이 없으면 없는 죄도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 다시 샤르트르 이야기를 !!

다시 교재로 돌아와서, 그래서 샤르트르는 어떻게 하든지 문화인에서 자연인으로, 즉 자유를 되찾는 모습이 있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이 자연인이 되어서 자유를 발휘하는 것이 곧 인간의 근본이기에 말이다. 그러나 구차하게 문화인이 되면 그만 법에 얽매이고 마는데, 그러니 그런 사회는 사람이 살 곳이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그런 사회는 사람이 살 곳이 못되는가?

그것을 알기 위해서 교재를 한번 살펴보자.

** 그래야만 그 타자로 인해 평가받는 그 타자의 눈동자 속의 나의 모습을 파괴시켜 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동시에 내 허락도 없이 나를 평가하는 그 타인의 자유를 그리워 그 자유마저 내 것으로 삼아버리려고 한다. 이것이 바로 그 타인과 사랑하는 관계다.

무슨 말인고 하니까, 노인네가 공원을 가다가 벤치에 앉아서 쭉쭉 빠는 젊은이들을 보았는데, 그래서 하는 말이, "왜 너거들이 내 눈동자에 비추어져야 하는가?" 라고 한다는 것이다. 즉 완전한 자유인의 자유를 왜 그들이 방해를 놓느냐는 것이다. 그래서 그것을 파괴시켜야만 하는데, 그렇지 않으면 그때 자기가 누렸던 그 자유로움을 찾을 수가 없다는 말이다.

그렇게 되려면 그 상대를 자기편으로 만들어야 하는데, "아이쿠 어르신, 우리가 나이가 너무 어려서 잘 몰랐습니다. 여기서 그런 사랑을 하는 것이 아니데, 그러니 앞으로 잘 지도해주세요" 라고 굽신거린다면, 만약에 그런 젊은이들이라면 그들이 벤치에 앉아있어도 자기 자유에 방해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물론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지만 말이다. 그렇게 일단은 깔아뭉개 버렸으니 방해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 사람에게 '언어' 라는 것은?

그렇다면 찾아가서 "니가 나에게 꺽일래, 말래" 라고 말을 건네게 되는데, 그렇게 말을 건네게 되는 것을 두고서 샤르트르는 '언어' 라고 보았다는 것이다. 이런 것이 샤르트르가 참으로 예리한데 말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사람에게 이 언어라는 것이 무엇인가?

예를 들어서, 부부싸움을 할 때 남자들이 여자들에게 제일 겁내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까, 말을 하지 않는 것인데, 시선을 맞추지 않고 말이다. 얼마나 겁이 나는지, 물론 저는 겁이 나서 부부싸움 자체를 못하지만 말이다. 이때 성질이 급한 남자들에 의해서 가정폭력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깨지지 않는 물건을 던지는데, 주로 화장지를 말이다. 그 다음에는 깨어져도 비교적 값이 싼 것을 던지다가, 결국은 비싼 TV도 박살이 나기는 하지만 말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예를 들면,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라는 말은 곧 '참으로 당신의 자유성을 내가 확실히 가졌는지 알 길이 없이 대충 말로 표현하려 합니다'라는 뜻이다.

◈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

그러니 샤르트르에 있어서 언어라고 하는 것은, 즉 "나는 너를 사랑한다" 라고 했을 때, 그것을 뭐라고 말하는고 하니까, '대충' 말로 표현한다고 하는데,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자슥아, 내 사랑을 받아. 받지 않으면 너는 죽어" 라는 의미라는 것이다. 그러니 상대방에게 언어를 던진다는 것은 마치 낚시바늘을 던지는 것과도 같은 것인데, 즉 자기가 던진 언어에 동감하면 그 낚시바늘에 걸리는 것이고, 그렇게 되면 상대방은 자기 밑에 옴으로 인해서, 여전히 자기 자유는 유지가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냥 막무가내 식으로 "야, 다 죽었어" 라고 하면 안 되는데, 모두들 도망을 가고 마니 말이다. 그래서 좋은 말로 해야 하는데, "나는 당신을 사랑해" 라고 말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거짓말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상대방에서는 이것을 간파하고는 뭐라고 하는고 하니까, "니가 나를 사랑한다면 점심을 사줄래" 라고 나오는데,

◈ 결국은 '돈'이 모든 것을 다 바꿔 !!

아까 제가 말하기를, 인류의 모든 법적인 조치에 있어서 그 밑바닥에는 무엇이 있다고 이야기했는가? 정치는 법으로 되어있는데, 그렇다면 그 무엇이 법의 밑바닥에 있어서 정치의 구조를 바꾸어버린다는 말인가? 그것을 한 글자로 말하면, 바로 '돈' 이라는 것이다. 돈이 그렇게 정치의 구조를 다 바꾸어버린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사람이 "나는 당신을 사랑해" 라고 했을 때, 정말로 사랑하는지 사랑하지 않는지 무엇으로 확인하면 되는가? 그렇게 아끼고 소중히 여기는 돈을 과연 그 사람을 위해서 쓸 것이지, 아니면 말 것인지, 바로 그것으로 판단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남자들은 처음 만난 여자들을 꼬시기 위해서 푼돈을 쓰는데, 즉 돈까스나 짜장면은 얼마든지(?) 사주는데, 하지만 자기의 신용카드를 상대방에게 맡기지는 않는다는 말이다. 그러니 여자의 경우에, 남자가 경제권을 넘기지 않으면 여자는 결혼을 했더라도 결혼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데, 즉 남자의 모든 수입이 여자에게 다 넘어왔을 때, 여자는 비로소 "저 남자가 나를 사랑하는구나"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냥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닌, 그렇게 실속이 있는 것으로 말이다.

◈ 마누라, 여기 있다. 받아라 지갑 !!

그렇게 여자에게 경제권이 주어지면 일단 부부로 인정이 되는데, 그렇게 경제권을 넘겨주지 않는다면 남자가 그 여자를 사랑하지 않거나, 아니면 여자에게 '지름신(?)' 이라는 병이 있어서 돈을 주어봐야 백화점 등에 가서 다 날리고, 그렇게 집안을 거들을 내는 경우라는 것이다.

특히 여자들 중에서 가끔 셈이 안 되는 분들이 있는데, 그야말로 대책이 없다는 것이다. 그것을 좋은 말로 손이 크다고 하고 말이다. 둘이 먹는데도 음식을 한 다라이(?)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옛날에는 돈을 시어머니가 관리를 했는데, 그런데 지금은 단 둘이서만 살기 때문에 그런 브레이크 장치가 전혀 없다는 것이다.

◈ 말을 끊는 마누라의 행동은 과연 옳은가?

그러므로 "사랑합니다" 라는 말은, "당신이 내 언어에 얽매이겠느냐?" 라는 것을 탐색하는 것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더 이상 그런 사랑이 오지 않는다 싶으면 그만 말을 끊어버린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말을 끊는다는 것은 잘한 것인가? 아니면 잘못한 것인가?

만약에 아내가 남편에게 "당신을 사랑합니다" 라고 했는데, 그런데 남자가 아내의 말을 듣지 않을 때 여자의 무기는 무엇인가? 처음에는 눈물이고, 그 다음에는 말을 하지 않는 것이란 말이다. 그렇다면 과연 그 여자의 행동은 옳은 것인가? 당연히 잘못된 것인데, 왜냐하면 자기밖에 모르니 말이다. "니가 무조건 나에게 무릎을 꿇지 않으면, 나는 너에게 관여하지 않겠다" 라는 말이다.

하지만 남편의 입장에서 아내의 그런 태도를 보면 제일 답답한 것이 무엇인고 하니, 남편은 그래도 남자라고 가정의 행복을 생각하는데, 하지만 여자는 삐치면 가정이고 뭐고 자기밖에 모른다는 것이다. 그러니 남자 쪽에서 속이 터진다는 말이다.

그래서 마누라를 달래기 위해서 목걸이라도 하나 사주어야 하는데, 결국에는 돈이 들어가야 해결이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바로 인간이 이 사회에서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힘이 드는지, 그것을 보여준다는 말이다. 부부사이가 이 정도이니 다른 것은 오죽하겠느냐는 말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사르트르에 이 이론에 따르면 '나는 예수를 믿습니다' 라는 말도, 진정 믿음이 뭔지를 몰라서 언어적 고백으로서 대충 때우려는 시도이다. 즉 내가 사랑하는 자나 예수님이나 타인이 나의 이 말을 듣고 진정 어떻게 생각하는지 내가 알 길이 없다.

샤르트르의 이론에 의하면, "나는 예수님을 믿습니다" 라는 말은 무슨 뜻인가? "내가 당신하고 거래를 트려고 하는데, 그래서 이렇게 내가 먼저 마음을 열었는데, 그것을 당신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라는 의미라는 것이다. 즉 "예수여, 내가 원하는 대로 나의 요구를 다 들어주고, 또 보상을 해주겠습니까?" 라는 뜻이라는 말이다. 자기가 먼저 마음의 문을 열었으니 그만한 보상은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 나는 예수님을 믿습니다 ??

이러한 샤르트르의 분석이 참으로 기가 막히는데, 왜냐하면 그 다음에 예수님이 뭐라고 했는가? 무슨 말인고 하니, 한 부자청년이 와서 예수님을 따르고자 할 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너 자신을 부인하고 나를 따르라"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그것도 자기 십자가를 지고 말이다. 즉 "자슥아, 나를 속일 생각은 마라. 정 그렇다면 나는 죽을 죄인이 맞습니다" 라고 하고 나서 자기를 따르라는 것이다.

* 부자청년 : 예수님, 제가 예수님을 믿고 싶습니다.
* 예 수 님 : 너를 부인하고 나를 따라야 하는데, 그리고 니 십자가도 니가 져야 한다.
* 부자청년 : 예? 나를 부인하라고요?
* 예 수 님 : 그리고 계명들은 좀 지켰나?
* 부자청년 : 예. 십일조도 하고, 십계명도 지키고, 제 이웃도 좀 사랑했습니다.
* 예 수 님 : 그래? 그렇다면 니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다 팔고 나를 따라오너라.
* 부자청년 : 예? 제 재산을 모두 다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라고요?
* 예 수 님 : 그래. 아니면 말고.

(마 19:16) 어떤 사람이 주께 와서 가로되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마 19:17) 예수께서 가라사대 어찌하여 선한 일을 내게 묻느냐 선한 이는 오직 한 분이시니라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
(마 19:18) 가로되 어느 계명이오니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거짓증거하지 말라,
(마 19:19) 네 부모를 공경하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니라
(마 19:20) 그 청년이 가로되 이 모든 것을 내가 지키었사오니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니이까
(마 19:21)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하시니
(마 19:22) 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니라

◈ 샤르트르 - 인간은 예수를 이용할 뿐 !!

이러한 샤르트르의 이론에 의하면 그 어떤 사람도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없는데, 단지 예수를 이용할 사람만 올챙이처럼 우글우글 거리지 말이다. 즉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인간에게는 해당사항이 없다는 것이다. 사실은 그의 말이 맞는데, 왜냐하면 예수님을 믿는 것은 선물이지 인간이 어떻게 할 문제가 전혀 아니니 말이다. 눈만 뜨면 예수님을 이용해먹으려고 하는데 말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타인의 모습에 비친 나의 모습을 내가 알 수 없는 것처럼 내가 한 말에 대해 타인이 어떤 의미를 부여했는지에 대해서 나는 아무런 권리를 가지고 있기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쨌든 언어를 사용한다는 것은 일시적으로나마 '내 뜻이 곧 당신의 의미하는 바이다' 라고 동일시하겠노라고 하는 자기 선언이다. 이 동일시에 대해 타인이 배반한다면 나로부터 사정없이 상대방을 향해 증오가 날아간다.

여기에 '자기 선언' 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제가 어느 글에서 이것을 '자기 선언' 정도가 아니라, '나의 명령' 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러니 다른 사람이 이러한 자기의 명령을 듣지 않는다면, 그를 향하여 사정없이 '증오' 라는 무기가 날아간다는 것이다. 감히 자기 명령을 듣지 않으니 말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이로서 사랑이란 곧 '숨어있는 증오' 이다. 타인은 단지 나의 존재근거를 위해서 잠시 내 질서 안으로 들어왔다가 사라져간 것이다. 이처럼 타인과의 관계란 타인을 소유하려 하면서도 자신은 결국 소유되지 않으려는 대자(對自)간의 끊임없는 투쟁의 관계다.

◈ 사랑은 숨어있는 증오이다 !!

여기에 오랜만에 좋은(?) 말이 나오는데, "사랑은 숨어있는 증오이다" 라고 말이다. 인간이 예수님을 사랑해도 그러한데, 그래서 예수님을 사랑하다가 안 되면 그만 증오해버린다는 것이다. 그리고 타인도 자기의 존재근거를 위해서 잠시동안 필요한 것이지, 자기가 미쳤다고 자기가 아닌 다른 사람을 위해서 살아가느냐는 것이다.

이 말은 타인이 필요 없다는 것이 아니라, 타인은 자기가 누구인지를 알아 가는 일시적인 '즉자대상' 이라는 것이다. 즉 의자와 같은 물건에 불과하다는 말이다. 이 세상에 자기만 살아있으면 되지, 타인까지는 필요가 없는데, 다만 타인은 자기를 위한 비료이고, 거름만 되면 그만이라는 것이다. 이것을 주례사에서 해야 하는데, 물론 욕을 듣겠지만 말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이러한 방식으로 항상 욕구하는 존재인 인간은 언제나 부지런히 주위를 살피면서 실천에 나선다. 이런 피곤한 투쟁과 갈등을 해소하는 방식으로서 인간은 제 3의 매개를 찾게 된다. 그것이 바로 집합체요, 집단이다.

이렇게 인간은 서로서로가 타인을 차지하려고 투쟁에 나서는데, 이것을 두고 샤르트르는 자연인에서 문화인으로 변화가 되면서, 여기에 '집합'과 '집단'을 동원시킨다는 것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누구나 다 이런 경향이 있기 때문에, 이런 서로 투쟁하는 것을 해소시키는 방식으로서 '집합'과 '집단'이 등장한다는 것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사르트르는 '집합'과 '집단'을 구분한다. 집합의 예를 들면, 오는 버스를 기다리고 서 있는 사람들의 집합이다. 이 집합 속에서 인간들은 사물과도 같이 산재해 있다. 버스를 기다리는 집합 속에는 개인이 불특정의 어떤 사람으로서만 존재하기에 다른 누구하고라도 바꿔치기가 될 수 있다. 즉 내가 한 눈을 파는 사이에 내가 가다리는 버스가 왔다가 그냥 가버려도 내가 그 버스를 탓할 수가 없다. 단지 나는 내 존재의 무력감만 느낄 뿐이다.

◈ '집합'과 '집단'에 대해서 !!

예를 들어서, 어떤 사람이 회사에 출근을 하기 위해서 시내버스를 탔다고 한다면, 회사버스가 아니고 말이다. 그렇게 버스를 탄 사람들은 집단이 아닌 집합인데, 그러니 집합은 같이 모여있더라도 그렇게 같이 있는 다른 사람들과는 전혀 이해관계라든지 하는 것이 없다는 것이다. 즉 그냥 불특정 다수에 불과하다는 말이다.

◈ 우리교회는 집합인가? 집단인가?

사실 우리교회가 이런 문제 때문에 사람들에게 욕을 많이 듣는데, 무슨 말인고 하니, 누군가 새로운 사람이 교회에 오게 되면 그래도 좀 반겨주고 챙겨주는 맛이 있어야 하는데, 그런데 마치 시내버스를 탄 것처럼 냉냉(?)하다는 것이다. 그러니 처음 온 사람이 얼마나 민망하겠는가?

아무튼 버스가 오면 자기가 알아서 올라타야 하는 것이지, 그냥 떠났다고 해서 섭섭해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 버스는 집합을 위한 것이지, 집단을 위한 버스는 아니라는 말이다. 그리고 자기가 버스를 일단 타면, 만원이 되어서 그 버스에 다른 사람이 못 탔다고 해서 양보를 해줄 필요도 없다는 것이다. 그 버스는 어떤 특정인을 위한 것이 아니니 말이다.

◈ 집합은, 불특정 다수이기에 갈등해소가 안돼 !!

다시 말해서, 집합은 자기와 옆에 있는 사람과 어떤 공통점으로 엮을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 사회가 집합이 되면 갈등이 해소가 되겠는가? 결코 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사람이 그냥 모였다고 해서 한 마음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냥 웅성웅성 거릴 뿐이지 말이다. 전혀 갈등이 해소가 되지 않고 다툼만 일어난다는 것이다.

만약에 지금 온 버스에 한 사람만이 탈 수 있다면, 누가 타야 하겠는가? 모두가 다 버스를 타야하는 이유가 있는데, 그래서 버스를 기다렸고 말이다. 그래서 다툼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나는 지금 아버지가 병원에 입원해서 가야만 돼" 라고 하는 사람, 또한 "나는 오늘 회사에 입사시험을 친단 말이야" 라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말이다.

◈ 천국은 집합이 아닌 집단으로 !!

그러므로 천국도 이런 집합적인 관계에서 가게 된다면, 그야말로 대가리가 하나도 남아돌지를 않지 싶은데, 서로 먼저 들이민다고 다 깨어지고 박살이 날 것이라는 말이다. 그렇지 않고 천국에 가게 된 것을 얼마나 감사해야 하는지 모른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인가? 집합이 아니고 집단인데, 정말이지 감사할 것은 주님이 우리를 구원할 때 집합이 아닌 집단으로 했다는 것이다. 이 집단은 바로 언약에 의해서, 즉 12지파에 의해서, 이것이 신약에 오면 12제자인데, 그렇게 하나님께서 12지파가 되게 하신 그 언약을 우리에게 적용을 시키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 이라는 집단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집합이 아니고 말이다.

이렇게 집단이 될 때 좋은 점은 '집단' 이라는 이름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고, 그렇다고 나쁜 점은 아니지만, 우리의 욕망과 충돌이 되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 개인적인 욕망은 이러한 집단에서 철저히 무시당한다는 것이다. 오직 그리스도를 위해서 '나'를 양보해야만 되고, 더 나아가서 '나'를 죽여야만 한다는 것이다.

◈ 주님의 자유함에 자기의 자유함을 빼앗겨야 !!

그러므로 오직 그리스도를 위하여 그렇게 소중하게 여기는 '자기 의' 까지도 모두 다 포기하고 버려야 한다는 말이다. 그러니 예수님을 믿으면서 자기 의까지도 챙기려고 하면 안 되는데, 주님의 자유함에 자기 자신의 자유함을 모두 빼앗겨야 한다는 말이다.

그래서 인간은 예수님을 믿고 난 뒤에 예수님 때문에 손해보는 것이 있어야 하는데, 그래서 마태복음 5장 11절과 12절에서 예수님은 뭐라고 하셨는가? "나를 인하여 욕을 듣고 핍박을 당하고 모든 악한 말을 들을 때에는 복이 있으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라고 말이다. 그러니 예수님을 믿고 난 뒤에 자기 자유를 챙긴다면, 그것은 그리스도인이 아닌 자연인이 되고자 하는 것인데, "내 자유 돌리도" 라고 말이다.

(마 5:11)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마 5:12)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

◈ 목사님, 그러면 저는 다음에 교회에 못나와요 !!

주일오후 예배 때 기도순서에 그 사람이 예배에 참석해 있으면 목사가 편안하게 설교를 할 수 있는데, 그런데 빵구를 내면 기도제목을 또 끄집어내어야 하고, 목사가 설교를 두 번, 세 번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왜 설교를 세 번을 하는고 하니, 처음에 성경을 읽으면서 의미를 주어야 하니 한 번, 그리고 기도제목을 가지고서 또 인도해야 하니 두 번, 왜냐하면 그때도 성경말씀을 인용해야 하니 말이다.

그런데 그 기도제목과 설교본문은 달라야 하는데, 만약에 그렇지 못하면 설교가 새롭지를 않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설교를 해도 교인들은 아까 기도시간에 한 것이 되니 말이다. 그렇게 해서 세 번을 준비해야 하는데, 그렇게 설교준비를 곱빼기로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기도는 교인들에게 넘겨야 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문제는 교인들은 기도를 해도 집단을 생각하지 않고 집합을 생각하기 때문에, "목사님, 제가 기도를 하면 교인들이 놀려서 안 됩니다. 다음부터는 교회에 못나옵니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심지어 그런 기도를 하다가 말문이 막혀서 도망가고 없는 경우도 있고 말이다.

아무튼 그런 기도를 하면 자기 수준이 다 들통이 난다는 것이다. 그래서 보통 교인들의 집에 가보면 '대표 기도하는 법' 이라는 책은 한 권씩 다 있고 말이다. 아무튼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그런 기도를 반드시 하라는 말이 아니라, 그렇게 해주면 목사가 설교하기가 편하다는 것이다. 그러니 목사를 고생시키려면 자기 기도순서가 있으면 안 나오면 된다는 것이다.

그 다음에는 '집단'이 있는데,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하지만 같이 버스를 타고 등산하기 위해 계약된 전세 버스를 기다리는 경우는 다르다. 이 경우는 집합이 아니고 집단이다. 그 전세 버스를 나를 반드시 태워야 한다. 나는 그 집단 안에서 바꿔치는 대상이 아니다. 나대신 다른 사람이 등산할 수 없다. 나는 내가 등산하기 위해 '산악회' 라는 집단에 자진해서 등록했다. 만약이 전세 버스가 제 때에 안 오면 산악회의 다른 회원들과 더불어 공통 투쟁에 나설 수밖에 없다.

◈ 기사양반, 저 사람도 태우게나 !!

그렇게 등산을 하기 위해서 전세버스를 예약했다면, 그 버스는 반드시 '나'를 태워야만 하는데, 왜냐하면 '나'를 위한 버스이기 때문에 말이다. 그러므로 만약에 '나'를 태워주지 않으면 다른 사람이 '나'를 위해서 항의를 한다는 것이다. "어이 기사양반, 저 사람은 왜 안 태우지" 라고 말이다. 그러므로 아까 집합을 위한 시내버스와는 분위기가 전혀 다르다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인간은 정치적 동물이다" 라고 했는데, 즉 인간이 왜 사회를 떠나서 살지를 못하느냐는 말이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이것을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라고 바꾸어서 주장하기도 하고 말이다. 아무튼 사람들은 왜 정치적으로 보호를 받기 원하느냐는 것이다.

아까 샤르트르가 뭐라고 했는가? '나만의 자유'를 주장했는데, 그런데 이것이 제3의 인물 때문에 그만 방해를 받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방해꾼을 없애려고 하니까 자기 힘이 모자란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기와 동일한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는, 즉 자기 팬을 많이 보다 확보하게 되면, 방해꾼인 B와 C는 소수가 되고 만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자기의 권익과 욕망을 누가 들어주는가? 자기와 똑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는 다른 사람들이 자기편이 되어주는데, 그렇게 되면 그 사람은 비로소 안정감과 포근함을 느끼게 된다는 것이다. 바로 여기에 대해서 '마아슬루' 라는 사람은 주장하기를, 인간은 자기의 생존을 위해서 안정감을 원한다고 했다는 것이다.

◈ 인간은 자기 자신을 제일 무서워해 !!

사람들이 왜 귀신을 무서워하는가? 그것은 자기의 안정감이 깨어질까 봐서, 즉 자기 자신이 해체될까 싶어서 귀신을 두려워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은 자기가 모여있을 때 안정감을 느끼는데, 그래서 수많은 사람들에게 둘러 쌓여서 보호를 받는 꿈을 꾸곤 한다는 것이다. 만약 자기 팔은 저기에 있고 몸은 여기에 있다면, 그것보다도 더 무서운 것이 어디 있느냐는 말이다. 그러니 귀신이 무서운 것이 아니라, 인간은 자기가 자기를 무서워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인간은 자기 안정성이 깨어지게 되면, 그 안정성을 다시 찾으려고 하는데, 그래서 어디를 향해서 호소를 하는고 하니, 이 사회를 향해서 발악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요즘도 심심찮게 터지고 있는 '묻지마 범죄' 라는 것이다. 이번 고시원 방화사건도 그렇고 말이다.

그러니 이런 묻지마 범죄가 어떤 사람에게 많이 일어나는고 하니, 어릴 때부터 부모가 없이 자라난 고아라든지, 아니면 집에서 매일같이 부모가 싸움만 하는 것을 보고서 자란 아이라든지, 그런 아이는 원래 부모는 자식을 보호해주어야 하는데, 그런데 그렇게 보호해줄 사람이 없으니 불안하기가 그지없다는 것이다.

◈ 누구 '나'를 사랑해줄 사람 없소 !!

인간은 그렇기 때문에 아빠와 엄마의 역할을 대신해줄 사람을 찾는데, 즉 아무런 이유도 없이 무조건 자기를 예쁘다고 해주고, 착하다, 사랑스럽다고 해주는 말이다. 즉 자기가 무슨 짓거리를 해도 자기를 위해줄 수 있는 보호자를 말이다. 그런데 인간은 그러한 보호자를 어디에서 찾는고 하니까, 바로 사회에서 찾는다는 것이다. 그것이 곧 '동호회' 이고 말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틈만 나면 이런 모임에 마구 쫓아다니곤 하는데, 동창회나 친목계 모임 등에 말이다. 특히 점심특선을 하는 식당에 가보면 이러한 아줌마들이 떼를 지어 앉아있다는 것이다. 5000원짜리 밥을 한 그릇 시켜놓고는 12시에 들어와서는 3시에 나간다는 것이다. 커피는 서너 잔 식이나 마셔가면서 말이다. 나가서는 또 찜질방에 가고 말이다.

왜 그렇게 하는가? 그것이 바로 안정성 때문에 그러한데, 모여서는 시부모나 남편 이야기를 줄줄이 하다가, 물론 주로 험담을 많이 하는데, 그런데 공통점은 모두가 자식자랑으로 끝을 맺는다는 것이다. 즉 "그놈은 내가 아무리 그만하라고 해도 공부만 해서 죽겠다" 라고 하면서 말이다.

그것이 바로 안정성인데, 특히 편모슬하에서 자란 아이는 지난 시간이 이야기한 '결핍' 이란 것인데, 즉 뭔가가 모자란다는 것이다. 그렇게 모자라기 때문에 메우지 않으면 뭔가 텅 비어있는 느낌이 들고 말이다. 그런데 그것이 그냥 메워지는 것이 아니라, 어디에 호소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나 여기에 있으니, 나를 제발 이불과 같은 것으로 좀 덮어주세요" 라고 말이다. 그러한 호소가 바로 지금 이야기하고 있는 "나를 사랑해주세요" 라는 것인데, 물론 그렇게 자기를 해준다면 자기도 역시 상대방을 사랑해주겠다는 말이다.

◈ 샤르트르의 결론 - 인간은 자유를 얻기 위해서 사회에 호소하는 존재 !!

샤르트르는 인간을 이야기하기를, 인간은 자기 보호본능과 안정성 때문에, 이것이 유명한 '앙가주망', 즉 '사회 참여' 라는 것이다. 그러니 샤르트르의 결론은 무엇인가? 인간은 자유를 얻기 위해서 사회에 호소하는 존재인데, 그것이 샤르트르가 주장하는 실존주의 철학이라는 말이다.

◈ 하지만, 샤르트르에게는 '감사'가 없어 !!

그런데 이것을 복음적으로 평가해보면 무엇이 문제라고 했는가? 이러한 샤르트르의 주장에는 그만 '감사' 라는 것이 없다는 말이다. 즉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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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 8,422건 중 304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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