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1114-(2) 서울강의녹취 : 에베소서 제 24강
20081114-(2) 서울강의녹취 : 에베소서 제 24강
이름 : 오용익(IP:59.3.201.241)
에베소서 제 24강 (이 근호목사, 2008년 11월 14일-b, 서울의존교회)
칠판에 그려 놓은 그림을 봐 주시기 바랍니다. 제가 앞 시간 강의에서 매우 흥분했던 이유는 성경의 하나님과 ‘내가 여기 살아 있다’고 생각하고 나타난 하나님하고 다릅니다. ‘나는 살아 있다’고 여기고 나오는 하나님은 무슨 하나님이 나와도 다 가짜입니다. 진짜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통해서 나타났습니다.
그림에 보는 것 같은 외계인 같이 생긴 이 인간이 오른손에 칼을 들고 내리찍습니다. 이렇게 칼로 찍히는 대상이 누구냐 하면 아들입니다. 이 아들을 죽입니다. 이걸 누가 시켰습니까? 우리가 사랑하는 하나님이 이걸 시켰어요. ‘시키는 대로 하면 믿음이라고 해 주겠다.’ 그래 나왔습니다. 이렇게 죽이시는 하나님, 죽음을 이야기하는 하나님은 인간이 지어낸 하나님이 아닙니다.
인간의 하나님은 ‘날 살려주세요.’ 라고 하는 하나님입니다. ‘날 죽여주세요.’ 라는 하나님은 인간이 못 만들어 냅니다. ‘하나님, 저는 죽어야 마땅합니다.’ 그것을 외치려고 교회 옵니까? ‘살려주세요. 펀드가 반 토막 나서 망하게 되었습니다. 은행 이자 무섭게 불어나고 있습니다. 주식 값이 올라야 제가 삽니다. 어찌 되었든 살려만 주세요.’
사람들은 그런 하나님을 생각하지 그 외에 다른 하나님, ‘제 심장이 여기 있사오니 칼을 들고 정확하게 그 심장 한 가운데를 찔러 주세요. 그래야 참 하나님으로 믿습니다.’ 이런 사람은 없습니다. 진짜 찌르는 하나님은 계시지만 그렇게 요구하는 사람은 없다는 말입니다. 요구하는 사람이 없는데 아브라함은 시키는 대로 했기에 얼마나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냐, 그 말입니다.
인력으로 자기 아들을 죽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도 미운 자식이 아닙니다. 미운 자식 같으면 핑계를 대고 죽일 수도 있겠지요. 사랑하는 아들, ‘너 없이는 나 못산다.’ 라고 할 정도로 사랑하는 아들입니다. 그 아들을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죽이도록 합니다. 이걸 죽여줘야 아브라함은 살인자가 되고 그 아들은 죽음 속으로 사라지겠지요.
이렇게 죽음 속에 있어야, 그 때 ‘스톱! 멈춰라!’ 하시고 그 다음에 ‘여호와이레’라고 하는 준비된 수양으로 교체가 됩니다. 교체가 되면서 수양은 죽고 죽어야 될 이삭은 살고, 이러한 역전의 과정이 없는 하나님은 하나님이 아니고 사기입니다. 그렇게 되려면 우리가 교회를 만든다든지 교회에 들어간다든지 하는 것은 이미 우리 선에서는 끝난 문제입니다.
우리는 교회 만들 자격도 없고, 만들 필요도 없고, 안 만들어도 괜찮습니다. 우리는 그냥 죽어 계시면 준비된 수양이 우리위에 덮칩니다. 그 덮치는 것이 그리스도 몸이라고 하는 거예요. 교회를 이렇게 가르쳐야 하는데 그동안 한국교회는 캘빈주의라고 해서 ‘유형교회, 무형교회, 전투적 교회’ 이런 식으로 가르쳤어요.
그런 식으로 가르치다 보니 사람들이 만들 수 있는 교회를 만든 겁니다. 천주교하고 똑같아요. 천주교에서 교회가 나왔다고 해서 개신교회라고 했는데 제가 보면 천주교회나 개신교회나 그 밥에 그 나물입니다. 어떤 교회든 둘 다 하나님이 만든 교회 아닙니다. 전 시간에 이야기했듯이, 조용필의 노래의 가사처럼 제발 허공은 허공으로 남겨 두시기 바랍니다. ‘허공 속에 묻어야만 될 슬픈 옛 이야기…♬’
우리 것을 집어넣지 말고 그냥 ‘허공이 우리를 구원한다.’ 그렇게 생각하세요. 왜 제가 허공이라는 표현을 쓰느냐 하면 실제로 우리 자신이 허깨비, 허공이기 때문에 이쪽에 허공으로 보이는 거예요. 그러나 보이지 않는 것이 실제로 보이는 것이고 보이는 것이 실제로는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어린이들 앞에서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한다는 그 자체가 말도 안 되는 것 같습니다.
성경에 보면 ‘네가 본다고 하니 소경이요 못 본다고 하니 본다.’ 라고 요한복음 9장 끝에 나오지요?
요한복음 9:39-41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소경되게 하려 함이라 하시니 바리새인 중에 예수와 함께 있던 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 가로되 우리도 소경인가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소경 되었더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저 있느니라.”
어린이여러분,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아시겠습니까? ‘본다고 하니 소경이요 못 본다고 하면 본다.’ 하는 이 말이 무슨 뜻인지를 아시겠습니까?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이것은 또 무슨 뜻입니까? ‘십자가위에 너희들이 깨어질 것이고 너희들이 십자가로부터 얻어맞아서 완전히 깨어질 것이다.’(마 21:44, 눅 20:18) 이것은 또 무슨 말입니까?
이것은 전부 다 딜레마이고 뭔가 장애요소 아닙니까?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자꾸 걸림돌을 앞장세워서 옵니다. 사람은 과거에서 미래로 나아가면서 삽니다. 그런데 그 걸림돌이 미래에서 닥치기 때문에 과거에서 밀어붙이는 나 자신과 그런 나 자신을 향하여 달려드는 미래가 부딪히면서 발생된 것이 십자가라는 허공입니다.
주님은 허공 속에서 사라졌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수는 죽었다.’ 고 이야기 하고 주님은 ‘나는 부활했다.’ 고 이야기합니다. 지난 11월2일에 교회설립 7년 만에 세례식을 했습니다. 시험을 치는데 ‘사도신경을 써보라.’ 고 했습니다. “전능하사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 죽 나오지요. ‘죽은 지 사흘 …’ 만에 뭐하시고? ‘부활하시고….’
제가 묻고 싶었어요. ‘부활했다면 지금 어디에 계십니까?’ ‘우리와 함께 있습니다.’ 라고 할 거예요. ‘정말 함께 있다면 함께 있는 것을 보여주세요.’ 부활하신 주님께서 허공 속으로 가버리셨는데 미래에 나타나실 주님이 미리 요한계시록 1장에서는 사도요한에게 이미 나타났지요? 그때 사도요한에게 미래의 주님이 덮치니까 사도요한이 어떻게 되었다?
그냥 죽은 자 같이 되었어요. 죽은 자 같이 된 그 미래상이 우리에게 덮쳐버리면 우리가 ‘교회를 세웠다. 나는 목사다.’ 라는 이런 것이 아무 의미가 없어요. 그래서 주님 계신 그 허공이 실제고 우리가 실제로 여기는 바로 이것이 허공인데 허공이라는 말 대신에 성경의 용어를 쓰겠습니다. 야고보서 4장 끝부분에 가면 이것을 뭐라고 합니까? ‘안개’라고 합니다.
야고보서 4:13-14
“들으라 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아무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 년을 유하며 장사하여 이를 보리라 하는 자들아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간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안개를 분석하면 물방울이 수증기가 된 것이 안개지요. 안개니까 물방울이잖아요. 물방울에서 물을 떼어버리면 우리는 잠시 나타났다가 없어지는 방울이 되지요. 여러분, 비누방울이 몇 시간씩 갑니까? 길어봐야 보통 1, 2초 정도면 없어지죠. 성경이 우리에게 이야기합니다. ‘너희들은 있다가도 없어지는 안개니라.’
사람들이 야고보서를 보면서 어떻게 합니까? 버팁니다. ‘신이시여, 내가 왜 안개입니까? 내 나이가 50이 넘었습니다. 내가 왜 안개입니까?’ 우리는 ‘내가 50년 동안 살아온 나입니다.’ 라고 하면 주님께서는 ‘네가 살아온 50년은 어디 있지?’라고 합니다. ‘없습니다.’ ‘그러니까 너는 50년의 세월을 지낸 물방울에 지나지 않는다.’
내년이 되면 또 하나의 물방울입니다. 사람들이 ‘내가 60년을 살았다.’ 이래 나오는데 제가 ‘60년을 산 세월을 몽땅 내놓으라.’ 고 합니다. 그런데 내놓을 것이 없잖아요. 없고 제가 인정하는 것은 ‘현재 내가 이렇게 살아 있습니다.’ 라는 그것만 인정하고 그 외에는 다 인정 못하겠어요. 60을 살았지만 살아온 그것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고 없어졌잖아요. 없어진 이야기를 왜 하느냐 말입니다.
‘70년 세월이 날아갔다.’ 날아간 이야기를 왜 합니까? 그냥 ‘내가 여기 있습니다.’ 하면 끝나는 겁니다. 그러면 내가 왜 여기 있습니까? 미래의 일을 위하여 살려 두시는 겁니다. 살리면서 인도하시는 거죠. 과거의 내 힘으로 사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 미래의 힘으로 살려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 미래는 어디서 쏟아져 나오는가? 이 허공에서 십자가와 부활에서 그 힘이 나옵니다.
앞으로 언제까지 살지는 모르지만 지금 우리가 사는 것은 십자가와 부활의 힘으로 살아가고 있는 거예요.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그런 소리 하는 사람이 있어요. ‘이 근호 목사님은 너무나 성경을 과도하게 해석하십니다. 물론 그런 의미가 있지만 분명히 우리가 살아 있는 것을 살아 있는 것으로 인정해야지 너무 과도하게 과잉해석을 해 버리면 교인들이 혼동을 일으켜서 역효과가 날것 아닙니까?’
저는 그런 사람에게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참새가 공중에서 떨어지는 것이 누구 뜻입니까?’(마 10:29, 눅 12:6) 묻고 싶어요. 참새가 공중에서 떨어지는 것은 고사하고 참새가 시장에서 천원에 두 마리 팔릴 때 그것은 누구의 뜻입니까? 백이면 백 물어보세요. 두 마리에 천원 씩 파는 그것이 누구의 뜻입니까? 그걸 세상 사람들에게 물으면 그게 누구 뜻이라고 합니까?
그것은 장사꾼 마음대로 아닙니까? 파는 사람은 파는 사람 맘대로 팔았고 사는 사람은 사는 사람 맘대로 샀다고 하겠지요. 누구에게 물어봐도 그것은 사람의 뜻입니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뭐라고 합니까? 참새가 그렇게 시장에서 팔리는 그것이 누구의 뜻이라고요? 하나님의 뜻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그 해석이 과도한 해석입니까?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내가 죽어야 한다.’ 라고 하니까 베드로가 ‘그러시면 안 됩니다.’ 하고 말렸어요. 그때 예수님께서 ‘사탄아.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하십니다. 자기가 허상인 줄을 모르고 자꾸 자기는 실상이고 ‘내가 알아먹는 진리를 이야기해야 당신은 진리답습니다.’ 라고 막무가내로 우기는 겁니다.
우리가 주님을 한 수 가르치려 드는 거예요. 우리가 뭐라고요? ‘안개’, ‘우리는 안개입니다.’ 그러면 될 문제입니다.
(주님) “너는 풀의 꽃과 같다.”(사 40:6-8)
(우리) “예, 저는 풀의 꽃 같습니다.”
(주님) “말씀은 영영히 서리라.”
(우리) “예, 우리는 죽어도 말씀은 영원합니다.”
이렇게 받아들이면 될 텐데, 꼭 ‘나는 결혼을 했고 자식이 몇 명이고, 재산이 얼마이고 교회를 몇 개 세웠고, 집사로서 몇 년을 봉사했으며 ….’ 자꾸 이런 성경에도 없는 것들을 동원해서 이 허공을 채워보려고 합니다. 제가 앞으로 쓰려고 준비하고 있는 책의 제목은 ‘소금’입니다. 출판사에 들어가서 곧 나올 책은 ‘피’고 앞으로 쓸 책은 ‘소금’입니다.
‘소금은 맛을 잃으면 짓밟힌다.’(마 5:13) 그 내용입니다. 지금 한국교회는 양적으로 크게 부흥되었다고 하지만 하나님은 ‘너 소금의 짠맛이 있어? 너 소금 맞아?’ 라고 묻습니다. 맛이 가면 소금이 아닙니다. 몇 년을 살았다는 것은 중요하지 않아요. 맛을 잃어버리면 그것은 소금이 아니거든요. 제가 쓸 내용의 방향은 ‘유혹이 어디서 오는가?’ 입니다.
어떤 분이 저에게 ‘목사님, 유혹이 어디서 오는지 그것을 글로 한 번 써보시면 어떠하겠습니까?’ 라고 했어요. 유혹은 비어있는데서 옵니다. 인간의 자아 속은 구멍이 뚫려 있어요. 그 빈 공백, 구멍을 메우려고 자기가 할 수 있는 온갖 것을 다 합니다. ‘나는 키는 작지만 이번 수능시험은 잘 쳤다.’ 이런 식으로 합니다.
무엇을 무엇으로 메우려고 하는 겁니까? 키가 커야 한다는 그 공백을 머리가 좋다는 그것으로 메우려고 하는 거예요. ‘나는 교인 수는 몇 명 안 되어도 성경은 잘 가르쳤다.’ 이것은 또 뭡니까? 이게 무슨 도발입니까? 사람의 유혹은 자기안의 빈터, 공백, 공간을 자꾸 뭔가로 채워야 된다는 그 점에 있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처럼 잔을 채우듯이 자꾸 채워야 합니다.
목마르고 채우고 또 목마르고 채우고 끝도 없이 목마르고. 주님의 뜻은 뭡니까? ‘안 채워도 된다. 덜 채웠다고 해서 책임 안 묻는다. 안 채워도 된다. 너는 실제라고 여기지만 사실은 내가 보기에는 허공이야. 너는 허상이고 아무것도 아니야. 네가 지금까지 살아온 모든 신체부위와 모든 것은 다 내 것이지 네 것이 아니야.’
이러한 인식의 변화. ‘왜 나는 저 사람처럼 안 됩니까? 왜 저 사람처럼 나는 살수가 없습니까?’ 만 날 이러한 자아가 나오는데 거기에 십자가가 다가와서 구멍을 뚫어버립니다. 그게 꼭 뭐와 같은지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어묵을 팔 때 어묵에 꼬챙이를 꽂으면 그 꼬챙이가 어묵을 관통해서 끝이 튀어나옵니다. 그런 식으로 관통해 놓은 음식가운데 바비큐라는 게 있죠.
돼지나 닭을 통째로 꼬챙이로 꿰어서 불 위에 놓고 돌려서 구워내는 요리를 바비큐라고 합니다. 옛날 아프리카 식인종들은 서양선교사들을 꽁꽁 묶어서 바비큐를 해 먹었다는 말도 안 되는 이야기가 많이 떠돌았어요. 어쨌든 하나님의 십자가는 우리를 관통해서 뚫어버려요. 그런데 우리는 우리 몸을 내 것도 아닌 남의 것, 이물질이 통과한다는 것을 참을 수가 없어요.
보통 사람들은 그것이 도저히 용납이 안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묵에 꽂힌 꼬챙이처럼 십자가를 생각하는 것이 아니고, ‘나는 여기 있고 주님이 여기 계셔서 주님이 시켜만 주시면 내가 순종하겠나이다.’ 이렇게 나가는 거예요. 그래서 주님께서 말씀하시면 자꾸 변명이 나옵니다. ‘주님, 바빠서 못 왔습니다.’ 또 뭐라고 하면 ‘그래도 다른 사람보다는 좀 낫지 않습니까?’ 또 다그치면 ‘그래도 나는 노력, 또 노력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그대로 더욱 ‘너는 죄인이야.’ 라고 밀어붙이면 ‘그래도 다른 사람은 모르는데 나는 죄인인 것을 아니까 얼마나 내가 훌륭합니까?’ 이렇게 강력한 자기방어가 나옵니다. ‘이런 환경에서 내가 교회 나가는 것은 나로서는 할 도리를 다 한 겁니다.’ 자꾸 방어에 방어를 또 합니다. 교도소 가보면 자기가 죄인이라고 주장하는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당신은 왜 강도짓을 했습니까?’ ‘사회가 그렇게 만들었소.’ ‘당신은 왜 도둑질을 했습니까?’ ‘우리 엄마가 어릴 때 나를 놔두고 도망가서 살기 힘들어서 했소.’ 뭔가 자기를 뚫어서 앞뒤로 튀어나온 것, 그것도 내가 튀어나온 것이 아니라 나를 쑤셨던 그것이 내 등짝 위로 쑥 튀어나온 것을 우리가 용납 안 해요. 왜? 그렇게 되면 ‘나’라는 존재가 무가치하니까.
여러분은 십자가를 아십니까? 여러분이나 저나 우리가 십자가를 안다고 할 때 십자가를 하나의 대상으로 봅니다. 백설 공주를 쫒아냈던 그 계모가 누구보고 이야기를 했습니까? 거울보고 했잖아요.
(왕비) “거울아! 거울아! 이 왕궁에서 누가 제일 예쁘니?”
(거울) “그야 당연히 왕비님이죠.”
(왕비) “그렇지. 그러면 이 나라에서 누가 제일 예쁘지?”
(거울) “그건 왕궁밖에 있는 백설 공주가 제일 예쁩니다.”
(왕비) “아니, 백설 공주가 아직도 살아 있구나!”
할머니로 변장하고 사과에 독을 발라서(요새 사과 값이 헐잖아요) 일곱 난장이가 과수원 돌보러 간 사이에 몰래 와서 백설 공주에게 먹입니다. 백설 공주가 사과를 좋아한다는 것을 미리 알았던 모양입니다. ‘거울아, 거울아!’ 할 때 그 거울이 와장창 깨지면서 그 왕비를 다치게 했다면 그 왕비가 거울을 찾겠습니까? ‘이놈의 거울!’ 할 거예요.
그처럼 사람은 아무리 예수 찾고 하나님을 찾아도 자기를 쳐서 뚫고 부수는 그런 하나님을, 사랑하는 아들을 죽이라고 명하시는 그런 하나님, 사랑하는 아들을 죽이는 것은 곧 자기를 죽이는 것인데 자기 집안 전체를 망쳐놓는 그런 하나님을 어떻게 우리가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나는 건전하다. 나는 훌륭하다. 하나님이 조금만 도와주시면 나는 훌륭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신에게 가까이 가겠습니다.’
이런 하나님을 원하지 ‘하나님, 저를 밟아주세요.’ 이런 하나님을 찾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아버지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이런 아버지 하나님을 찾는 분은 예수님 외에 달리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최초였습니다. 나를 버릴 수도 있는 하나님인 것을 처음 알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창세기 3장으로 돌아가야 되는 거예요.
‘아하, 쫓겨나야 마땅했구나.’ 쫓겨난 주제에 쫓겨났다는 생각은 안하고 자기가 중심이 되고 자기가 중심이 되고, 저 멀리 에덴동산을 보면서 ‘저거 뭐, 조금 있다 내가 가면 되겠네.’ 그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에덴동산에서 볼 때는 추방된 존재에 불과하고 흙에 불과합니다. 이름이 흙, 아담 아닙니까? 그래서 제가 보기에는 사람들이 성경의 한마디 한마디를 믿지를 않아요.
그저 자기 살기 위한 해석만 추가적으로 계속 퍼붓는 것 외에는 성경이 말하는 대로 우리가 보지를 않습니다. ‘목사님처럼 성경을 그렇게 해석해 버리면 우리의 영혼은 피폐되어 버리지 않습니까?’ ‘피폐’라는 말이 작년에 아주 유명해진 말입니다. (유머를 이해 못하시네). 십자가만 이야기 하면 영혼이 피폐해지고 엉터리 신앙이 된다고 그렇게 이야기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나를 때리고 치고 관통하고 그렇게 십자가가 올 때, 그 십자가가 꽂힐 때 비로소 우리는 십자가 안에 우리가 놓여 있는 영생을 얻는 사람 되는 겁니다. 십자가가 날아와서 살짝 건드리고 도망가는 것이 아니고 완전히 내 배를 뚫어서 내 등 뒤로 튀어 나오도록 만들 때 갈라디아서 6장 14절의 말씀처럼 이미 십자가안에 놓인 사람입니다.
갈라디아서 6:14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외에 결코 자랑 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나는 십자가로 인하여 죽었고 십자가 안에 있는 나를 향하여 세상은 죽었고, 세상이 보기에 나는 십자가 안에서 죽은 자로 보인다.’ 라는 이야기가 비로소 해결이 됩니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갈 2:20),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고 내 안에 누가 살아 있다?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살아 있다.’
이걸 이해하려면 내가 허상이었으며 부활하신 주님이 진짜 실상이었다는 것을, 그와 같이 우리가 인식을 반대로 가져갈 때 비로소 갈라디아서 2장 20절이 해석이 됩니다. ‘아하, 허상이기에 실상이 와서 나를 꽂았구나.’ 그럴 때 비로소 나는 죽어도 그만인 허상에 불과했음을 깨닫게 됩니다. 허상인 주제에 얼마나 실상 행세를 해 왔었습니까?
‘이것 내놔라. 저것 내놔라. 하나님이 이렇게 하면 안 됩니다. 저렇게 하면 안 됩니다.’ 운전할 때 조수가 간섭하면 운전하는 사람 미칩니다. 제가 아내와 함께 먼 길을 운전해서 갈라치면 아내가 잠들어 있는 동안에는 운전이 참 즐거운데 아내가 잘 주무시다가 깨어나면 저의 즐거운 운전은 그만 종말을 고하게 됩니다.
‘천천히 가세요. … 차선 바꾸셔야 됩니다. … 뒤차 보내주세요. … 카메라 있습니다. ….’ 앞으로 이래야 됩니다. ‘조수에게 모든 선택을 다 맡기겠습니다.’ 그게 편한데 명령을 다 들어가면서 책임은 내가 지려니 내 자아의 분열이 일어나 버립니다. 실컷 시키는 대로 해 놓고는 만일 사고 나면 결국 제 책임이 되잖아요(???).
그래서 서○○ 목사님은 운전도 안 배우잖아요. 우리교회 김○○ 성도도 운전할 줄 모릅니다. 운전을 배우라고 하니까 ‘내 취향이 아니다.’ 합니다. 세상에! 취향으로 운전배우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이 닦는 것이 취향입니까? 관통되는 것은 우리 취향이 아닙니다. 우리 취향은 뭔지 알아요? 내 교회 세워서 내가 얼마나 훌륭한 인간인지를 보여주는 것이 내 취향입니다.
그것은 유대인들이 이미 시험해 봤습니다. 그래서 천당 갈 줄 알았지요. 주께서 뭐라고 했습니까? ‘이 사탄의 새끼야!’ 라고 했습니다. 책임지려고 오신 메시아가 있는데 메시아를 놔두고 그게 무슨 짓입니까? ‘내가 곧 성전’(요 2:21)인데 성전을 앞에 두고 ‘성전을 지었다고 자랑’(요 2:20)하고 있습니다. 그게 무슨 짓입니까?
그 모든 것은 다 ‘나는 살아 있고 내가 실상이다.’ 라고 우기는 것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십자가로 관통을 해버리면 그 십자가에서 양념이 떨어집니다. 그 양념을 읽어 봅시다. 에베소서 4장 8절입니다.
에베소서 4:8
“그러므로 이르기를 그가 위로 올라가실 때에 사로잡힌 자를 사로잡고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셨다 하였도다.”
‘그러므로 이르기를 그가 위로 올라가실 때에 사로잡힌 자를 사로잡고 사람들에게…’, 뭘 주셨다? ‘선물을 주셨다.’ 선물을 주지요. 이 선물을 줘서 교회가 생기고 선물 줘서 그리스도 몸이 되는 겁니다. 선물이라는 게 뭐냐 하면, 내 존재 자체가 흙인데 이걸 선물로 보자는 말입니다. ‘아니, 목사님, 어떻게 해서 그런 인식이 생깁니까?’
자꾸 과거에서 보지 말고 미래에서 보자는 말입니다. ‘나는 초등학교 어디 나왔고 중학교 어디 나왔고 고등학교 어디 나왔고 ….’ 자꾸 과거에서 보지 말고 미래에서 보면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직장생활 전부 다 하나님의 무엇이다? 두 자로 뭡니까?
‘선물’ 선물인데 그것을 뜯어보면 그 안에 ‘내가 너로 하여금 목사 되게 했다.’ 하는 선물이 아니라, 목사라는 것은 하나의 도구일 뿐이고 ‘내가 너를 그리스도 몸 되게 했다.’ 라는 겁니다. 다른 말로 하면 ‘너는 내 몸이다.’ 이게 선물입니다. 편입되고 통합되었습니다.
성경이 얼마나 어려운지 예를 들겠습니다. 아담이 잠들었을 때 그의 갈빗대로 만든 사람이 있었습니다. 누구입니까? 하와, 여자입니다. 남자와 여자가 한사람씩 있습니다. 그러면 몇 사람 되었습니까? 수학적으로는 두 사람입니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뭐라고 합니까? ‘두 사람이 둘이 아니고 한 몸이다.’ 라고 했지요.
어떻게 두 사람이 한 몸이 될 수 있습니까? 이렇게 어렵습니다. 화장실에 갈 때 같이 갑니까? 어떻게 두 몸이 한 몸이 됩니까? 우리가 생각하는 그 몸이 그 몸이 아니라는 거예요. 우리가 생각하는 몸은 붙어 있어야 한 몸입니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떨어져도 한 몸이 되듯이 의존교회 교인들은 서울에 있고 저는 대구에 있더라도 우리는 뭐가 된다? 한 몸 될 수 있다는 겁니다.
‘목사님, 될 수 있다고만 하지 말고 어떤 논리로 그것이 되는지를 설명해 주셔야죠.’ 바로 그것을 설명하려고 하니 지금 너무 어려워서 난감한 지경에 있지만 어쨌든 설명할 참입니다. 어떻게 몸이 따로 떨어져 있어도 한 몸인지를. 그걸 설명하기 전에 좀 더 쉬운 이야기를 계속해 봅시다.
아담이 여자보고 ‘내 살 중의 살이요 내 뼈 중의 뼈’라고 이야기 했습니다. 그것을 예수님이 의존교회 여러분 보고 이야기 했다고 합시다. 예수님이 김 목사님에게 ‘너는 내 살 중의 살이요 뼈 중의 뼈’라고 했다면 김 목사님이 미국에 놀러갔을 경우라도 그리스도 몸입니까, 몸 아닙니까? 몸이죠. 왜 그렇습니까?
예수님께서 한국에 있는 김 목사님보고 ‘너는 내 살 중의 살이요 뼈 중의 뼈요’라고 했는데 미국에 있는 김 목사님 보고 ‘너는 내 살 중의 살이요 뼈 중의 뼈’라고 했기에 한 몸이 맞죠? 그러면 한국에 있든지 미국에 있든지 상관없지요? 교회 출석해서 예배당에 앉아 있든지 못 나와서 다른 장소에 있든지 관계없이 그리스도 몸 맞지요?
그러면 뭐가 그리스도 몸 되게 하는 주안점입니까? 예수님 입에서 뭐가 나온다? ‘내 살 중의 살이요 뼈 중의 뼈’라고 했지요. 그게 예수님의 말씀이죠. 오늘 본문 11절을 봅시다.
에베소서 4:11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사도, 선지자, 복음 전하는 자, 목사, 교사 이 다섯 가지의 공통점이 뭐예요? 무엇을 다루는 사람들입니까? 말씀이죠. 십자가 복음 가지고 통하면 한 사람은 알라스카에 있고 한 사람은 나이지리아에 있더라도 그 사람은 복음 안에서 뭐가 된다? 한 몸 되는 거예요. 왜냐하면 아담이 하와가 화장실에 갔는데,
(아담) “내 살 중의 살 뼈 중의 뼈! 뭐하니?”
(하와) “오줌 눈다!”
(아담) “알았어. 집에 가 있을게.”
한 몸입니다. 그 한 몸이 두 사람이 합해서 한 몸이 아니고, 이게 남자 쪽으로 흡수 통합되어버립니다. 동등한 입장에서 한 몸이 아니라 여자는 원래 남자에게 복속이 됩니다. 그래서 남자는 머리가 되고 여자는 그 머리에 달린 몸통이 되지요. 예수님이 우리의 무엇이 된다고 했습니까? 머리가 되지요.
이것은 아담이 하와에 대해서 머리가 되는 원리를 그대로 적용시킨 겁니다. 이 말은 몸통은 깨져도 머리만 있으면 몸통은 머리로 인하여 살아 있는 거예요. 이 말은 해 놓고 나니 더 어려운 말입니다. 머리에서 모든 것이 출발하고 그 모든 것이 다 머리로 귀속되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발가락이 머리로부터 피를 받지만 ‘발가락아, 너는 어디 소속이냐?’ 라고 할 때 ‘나는 발가락 소속이다.’ 라는 그것은 아니고 ‘나는 머리에 소속되어 있습니다.’라는 말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만약에 의존교회에 계시다가 영국에 유학을 갔다.
(질문) “의존교회 계시다가 영국에 유학가신 분 어디 소속입니까?”
(답) “저는 그리스도 소속입니다.”
그러면 의존교회 있을 때도 그리스도 소속이고 영국유학 가서도 그리스도 소속이고, 그러면 그 사람은 거기 있어도 여기 있는 사람들과 한 몸이 됩니다. 우리끼리 한 몸이 아니라 우리를 연결시키는 머리를 통해서 한 몸이 됩니다.
마치 미국에서 전화하면 한국에서 통화가 가능한 것은 직접 선을 이어서가 아니라, 상공에 떠 있는 통신위성을 통해서 통화가 가능한 것처럼 머리 되시는 주님으로 말미암아 선물이 주어지는데 그 선물이 말씀 곧 복음인데 그 복음이 주어지게 되면 복음 안에서 사도, 선지자, 복음 전하는 자, 목사, 교사가 된다는 말입니다.
이 복음이 뭡니까? 복음은 한마디로 말해서 선물입니다. 자선, 베푸심, 은혜. 흙에서 몸, 몸에서 한 몸 되는 원리를 빠르게 이야기했습니다. 흙에서 몸 되는 원리는 창세기 2장에서 아담을 통해서 이미 보여줬습니다. 아담이 흙에서 출발해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 다음 몸에서 한 몸 될 때 아담이 하와에게 ‘내 살 중의 살 뼈 중의 뼈’라고 하는데 이것은 형식으로서는 말씀이고 그 내용은 뭐냐?
그 내용은 사랑입니다. 사랑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그동안 율법을 준 거예요. 법으로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거예요. 법으로 했다가 나중에 사랑으로 바뀝니다. 로마서 7장 1절에 나옵니다.
로마서 7:1-3
“형제들아 내가 법 아는 자들에게 말하노니 너희는 율법이 사람의 살 동안만 그를 주관 하는 줄 알지 못하느냐 남편 있는 여인이 그 남편 생전에는 법으로 그에게 매인 바 되나 만일 그 남편이 죽으면 남편의 법에서 벗어났느니라.”
전에 유대인들은 법과 결혼했습니다. 남편이 법입니다. 여러분의 남편을 법이라는 망토와 두건을 씌워놓고 남편 몸에다가 법, 법, 법이라고 수를 놓아 보세요. ‘당신은 법대로 하는 남편입니다.’ 그런 남편 같으면 답답해서 못삽니다. 예를 들어 아내가 아침에 컵을 꺼내 놓으면,
(법 남편) “법대로 놔.”
(아내) “법이 어떤 건데요?”
(법 남편) “전에는 내가 여기서부터 3센티미터, 또 여기서 3센티미터 정 위치에 놓았는데 왜 법을 어기고 3.5센티에 놓았어? 법대로 해.”
(아내) (시키는 대로 컵을 놓는다.) “법대로 놓았습니다.”
(법 남편) “왜 그림자가 생기지? 전에는 그림자가 안 생겼는데.”
이것은 따지고 들어가면 한도 끝도 없습니다. ‘탐내지 마. 살인하지 마, 간음하지 마. 도적질 하지 마.’ 매일 끝도 없이 잔소리를 합니다. 그래서 아내가 밤에 칼을 들고 들어가서 남편을 죽이려고 해도 그 법이 죽지를 않습니다. ‘간지럽다. 뭐가 왔다 갔다 하는데 칼인가? 너 지금 무슨 짓이냐? 나는 안 죽어.’
그런데 법을 죽인 분이 계십니다. 그 죽는 법이 로마서 7장 1절에 보니 죽었습니다. 남편이 죽어서 새로 시집을 갔어요. 새로운 남편은 전의법과 정 반대라, 책임을 묻지 않아요. 그 법은 ‘사랑의 성령’입니다. ‘사랑의 성령’이기에 그 남편이라는 것은 오직 아내를 사랑하기 위해서 존재하는 그런 남편입니다.
‘내 살 중의 살 뼈 중의 뼈, 너는 나와 한 몸이야.’ 법은 없어요. 지난 주일아침설교에 좀 어려운 말을 했습니다. ‘성도는 법을 무시해도 되는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성도 안에서 법은 무시못할 지경으로 활동을 벌이고 있다.’ 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원래 성도는 법을 무시해도 괜찮아요. 무시해도 괜찮은데 내 몸이 무시를 안 합니다. 왜?
내 몸 안에서 법이 활동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현실을 무시할 수 없어요. 예를 들어서 이렇습니다. 내가 나를 보면 ‘내 키가 173센티미터고 몸무게가 74킬로그램이고 머리카락은 위부터 조금씩 빠지고 있고 …’ 죽 나오는데 이걸 모아서 ‘나’라고 보잖아요. 성경에서는 이렇게 보는 것이 아니고 ‘너는 법에 매였다가 이제는 사랑에 매였다.’ 라는 관점으로 봅니다.
몸무게, 나이, 키가 얼마인지 그런 것은 안 묻고 ‘너는 어디에 매였다가 지금은 어디에 매였느냐?’ 그것만 묻습니다. ‘네 남편이 누구야?’ ‘주님이십니다.’ 그것만 묻습니다. 그게 마지막 시험문제입니다. 천국 문을 노크해 보세요. 천사가 문을 빠끔히 열고,
(천사) “어디서 왔나?”
(성도) “세상에서 왔습니다.”
(천사) “네 남편 누구인데?”
(성도) “제 남편 예수님이십니다.”
(천사) “어이, 문열어줘라.”
‘문들아 들릴찌어다.’(시 24:7) 문이 열리고 들어갑니다. 그런데 문 앞에 와서 ‘저는 혼자 왔습니다.’ 하면 ‘너는 저리 가거라. 너는 법에 의해서 처단 받아야 한다.’ 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원할 때 무척이나 간단하게 구원했습니다. 그런데 법 감정이 있는 인간들이 법으로 전부 바꾸어 놓아서 이걸 다시 사랑으로 돌리는데 복잡하게 이렇게 설명을 해야 됩니다.
하나님이 그 하나님이 아니고 예수가 그 예수가 아니고 교회가 그 교회가 아닌데 전부 다 잘못 알고 있으니 그걸 다 사랑으로 바꾸려고 하니 복잡한 겁니다. ‘내 속에 내가 책임을 묻겠다고 이렇게 난리를 치는데 그 현실을 무시하고 책임을 묻지 않겠다니 그게 말이 되느냐?’ 그렇습니다. 성도는 하나님이 법으로 묻지도 않고 따지지도 않습니다.
아무것도 묻지도 않고 책임을 지라고 하지도 않아요. 하지만 성도 안에 아직도 무엇이 남아 있다? 책임을 묻고 법을 따지는 괴물이 들어 있습니다. 우리는 만 날 누구에게 부르짖습니까? ‘오호라, 나는 곤고하다.’ 따라서 누구만 의지합니까? 예수 믿고 자립할 수 없지요. 예수 믿고 난 뒤에 누구를 의지해요? 예수 믿고 난 뒤에 더욱 더 의지하지요. 누구를? 주님만 의지하죠.
왜? 내 속에 있는 법이 나를 가만두지 않으니까. ‘그것도 신앙이냐? 인간아!’ 만 날 지적합니다. 만 날 묻는 것이 법으로 묻습니다. 어린이 여러분이 나중에 어른이 되어서 남녀가 연애관계로 서로 사귈 때 데이트 약속시간이 12시인데 11시 59분 55초에 왔을 때 ‘당신은 왜 시간관념이 그리도 없어? 왜 5초 빨리 온 거야?’ 그런 식으로 따진다면 그런 남자, 혹은 여자와 결혼해서 살고 싶겠습니까?
그래서 보통 남자들이 데이트할 때 여자가 한 30분 늦어도 봐줍니다. ‘까짓 거 30분 늦었는데 남자가 그것도 못 기다리나. 기다려주지.’ 그 다음에 두 시간이 늦었어요. ‘두 시간이 뭐가 그리 대수야. 당신이 중요하지 두 시간은 안 중요한 거야. 당신이 와 준 것만으로 고마워.’ 이렇게 사랑으로 모든 것을 덮어주고 보듬어 줄 때, 비로소 여자는 ‘아하, 내가 이 남자를 믿고 결혼 할 수 있겠구나.’ 하고 결혼을 하지요.
결혼 한 지 3개월도 안 지나서 밤늦게 퇴근했다고 돌변합니다. 좋은 시절, 사랑의 시절은 끝나 버렸어요. 법으로 돌아가 버렸어요. 처음에 예수 믿을 때 부르는 찬송이 뭡니까? ‘천부여 의지 없어 손들고 옵니다.’ 손들고 온다고 했으면 손들고 그냥 오세요. 죽을 때까지. 자꾸 손을 내려버려요. 내가 뭘 하려고 하는 그것이 문제 아닙니까?
그냥 손들고 있으면 되는데, 그냥 손들고 가면 되는데 자꾸 그걸 내려서 뭘 하려고 하니까 문제가 되는 거예요. 정리를 해 봅시다. 여러 몸, 여러 지체가 있습니다. 목사, 교사 등 여러 지체가 있더라도 그것이 머리되시는 주님으로부터 나오는 선물인 믿음 소망 사랑, 통틀어 사랑이라 하고, 그 사랑으로 인하여 어디 있더라도 무엇을 하든지 관계없이 책임을 묻지 않고 포섭을 해 버렸습니다.
이미 한 몸 되어 버렸어요. 한 몸이 되었는데 한 몸이 되려고 하는 이것은 또 무슨 짓이고 무슨 횡포입니까? 여자가 임신해서 이미 자기 배가 두둑하게 불렀는데 임신을 안했다고 ‘주여, 임신케 하옵소서.’ 하는 이것은 무슨 횡포이며 그 뱃속에 들어 있는 아이는 누구의 아이란 말입니까? 답답하죠. 정말 답답합니다.
얼마나 믿음이 없었으면 이미 십자가를 통해서 고막이 터지라고 고함을 질러요.
(고함소리) “용서해 줄게!!”
(답답이) “뭐라고요?”
(고함소리) “다 용서해 줄게!!!”
(답답이) “뭐라고…요?”
(고함소리) “책임 안 물을게!!!!”
이렇게 고함을 질러도 ‘이게 무슨 소리야?’ 라고 하면서 저는 저 나름대로 ‘주여, 받으소서. 정성 받으시고 복을 주시옵소서.’ 이러고 있습니다. 축복 안 해주면 삐지면서 ‘나 교회 안 나올 거야.’ 합니다. 그래서 교회는 목사와 교사가 있습니다. 가르치는 겁니다. ‘여러분, 그리스도께서 주신 선물이 있을 거예요. 그 선물은 여러분이 생각한 것 이상으로 큰 선물입니다.
어느 정도냐? 여러분이 사람을 죽여도 그것이 용서되는 큰 선물입니다. 심지어 자살일지라도…, 그것이 주께서 시키는 자살일수도 있거든요. 그것을 순교라 합니다. 그런 것을 일깨워줌으로 말미암아 이 바깥의 세상 사람들, ‘나 여기 있다. 그 나가 열심을 내야 내가 산다.’라는 그 사고방식에 완전히 포위되어 있는 여러분들에게 목사와 교사와 선지자와 그리고 복음전하는 사람들이 가르치는 겁니다.
‘당신은 어디서 무엇을 하든지 어떻게 바뀌든지 간에 그 속에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선물이 법을 이기면서 책임을 묻지 않으면서 용서와 자비와 사랑과 긍휼로서 여러분이 있는 그 현장에 주께서 머리로부터 작용하십니다.’ 라고 증거 하는 것, 그것이 목사와 교사의 할 도리입니다.
그게 바로 교회입니다. 주께서 선물을 줘서 세워집니다. 끝으로 고린도후서 11장을 보겠습니다. 이것은 안산에서 한 강의내용입니다. 오늘 에베소서 본문과 잘 연결이 되므로 짧은 시간에 전하고자 합니다. 고린도후서 11장 2절입니다.
고린도후서 11:2
“내가 하나님의 열심으로 너희를 위하여 열심 내노니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함이로다.”
‘내가 하나님의 열심으로 너희를 위하여 열심 내노니 … .’ 보세요. 사도바울의 열심이 누구의 열심입니까? 자기의 열심입니까? 하나님의 열심이잖아요. 그런데 왜 우리는 자기열심이라고 우깁니까? 사도바울은 분명히 하나님의 열심으로 하는 거예요. 그 다음에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열심으로 ‘누구를 위하여’ 라고 되어 있습니까? ‘너희를 위하여’
‘자기를 위하여’ 안잖아요. 세상에 나가보세요. ‘자기열심’으로 누구를 위하여? ‘자기를 위하여’ 그게 바로 그리스도 몸 밖에 있는 사람의 특징입니다. 자기 열심으로 해 놓고 맘에 안 드니까 만 날 법으로 따지고 ‘똑바로 하란 말이야. 그러니까 복을 안주지.’ 하면서 자기가 자기에게 징계를 해요. 만날 자기에게 따지고 나무라고 책임을 묻습니다.
주님은 책임도 안 묻는다는데 자기가 자기에게 책임을 지겠다고 발악을 해요. 우리 의존교회 여러분들은 예수님이 하신 일이 사랑으로 온다는 것을 잊지 마시고 모든 것을 이미 용납한 채로, 이미 용서한 채로 여러분에게 오십니다.
따라서 그 무서운 분이 용서까지 해 주셨으니 두 번 다시 세상에서 실패했다든지 혹은 ‘나는 세상에서 인간 값도 못한다.’ 라고 그렇게 스스로 자기를 평가하지 마시고 비록 흙임에도 불구하고 미래에서 오는 주님의 부활하신 능력으로 말미암아 내가 그리스도의 한 몸이 되었다는 사실을 감사히 여기시기 바랍니다. 결론은 하나밖에 없지요? 벌써, 이미 구원해주신 주님께 감사하는 일만 평생 남아 있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상상 때문에 스스로 속아 넘어갔습니다. 남들이 토해놓은 상상 때문에 저희들이 속아 넘어 갔습니다. 성경에 보면 밧모섬에서 죽었던 사도요한도, 돌에 맞아 죽었던 스데반 집사님도 다 한 몸이거늘 우리는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큰 교회에 사람 많이 모이면 그것이 교회인줄 알았습니다. 이미 그리스도 몸이 되어서 사랑의 대상이 되었사오니 십자가가 우리 머리부터 발끝까지 관통하여서 이제는 십자가의 사람이 되어서 믿음과 사랑과 소망을 듬뿍 듬뿍 받아 누리는 감사의 사람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