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1114-(1) 서울강의녹취 : 에베소서 제 23강
20081114-(1) 서울강의녹취 : 에베소서 제 23강
이름 : 오용익(IP:59.3.201.241)
에베소서 제 23강 (이 근호목사, 2008년 11월 14일-a, 서울의존교회)
에베소서 4장 11절, 12절입니다.
에베소서 4:11,12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여기서 우리는 소위 사람들이 이야기 하는 ‘교회’라는 것이 얼마나 사기인가,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서 은혜를 주신 것은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기 위함이고 그것을 위해서 성령을 주셨는데 사람들의 관심사는 사람들이 모일 수 있는 교회, 예배당 여기에 관심이 있다는 이야기죠.
그렇게 되니 두 종류의 교회가 등장하고 말았습니다. 과연 그리스도의 몸이냐? 그렇지 않고 사람들이 예수 이름을 빙자한 일종의 종교단체로 세워놓은 그것이 교회냐? 이런 두 종류의 교회가 생겨나고 말았습니다. 그림으로 그려보면 이렇게 점선으로 되어 있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교회인가, 아니면 이렇게 뾰족한 모양의 예배당인가?
사람들이 어느 쪽을 좋아하겠습니까?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몸은 안 좋아합니다. 왜 안 좋아 하느냐? 사람들이 만들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은 사람들이 만들 수 없기에 사람들이 만들 수 있는 교회를 만들어 놓은 겁니다. 따라서 만들 수 없는 이것이 맞고 인간이 만들 수 있는 것은 그 무엇이 되었든지 이것이 틀린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두 가지만 있으면 ‘아하, 이런 식의 교회는 아니고 그리스도 몸이 교회구나.’ 라고 쉽게 알 수가 있는데 여기에 또 하나가 더 있습니다. 하늘에 계신 영광스런 예수님의 모습, 요한계시록에 보면 예수님께서 해같이 빛나는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요한이라는 제자에게 찾아 오셨습니다.
그 때에 요한이 너무나 놀라서 벌벌 떨면서 죽은 자처럼 되어서 납작 엎드렸습니다. 요한에게 찾아오신 예수님은 눈은 불꽃같은데 말소리는 왕왕 울리고 온천지를 진동하시면서 나타나셨습니다. 만일 어린이여러분이 책상위에 개미 지나가고 있다면 ‘어? 개미가 있네. 이 개미가 어디로 가고 있지?’ 하면서 개미를 보게 될 거예요.
개미를 보고 있는 그 자리에 갑자기 큰 탱크가 이 벽을 뚫고 쳐들어온다면 그 때에도 개미를 여유 있게 쳐다보고 있겠습니까? ‘어? 웬 탱크!’ 하면서 갑자기 개미를 잊어버립니다. 예수님께서 얼마나 영광스럽게 나타났는지…. 여러분은 태양을 만져본 적이 있습니까? 태양은 만질 수 없습니다. 그냥 보기만 해도 눈이 부십니다.
아무리 멀리 있어도 너무 크고 열이 많고 빛도 엄청나게 세기 때문입니다. 막상 그 태양이 여러분에게 다가와서 ‘만져봐라. 나는 태양이다.’ 이러면 겁이 나서 만질 엄두도 못 내지요. 만지기는커녕 뜨거워서 타죽을 겁니다.
그 이상으로 예수님이 쳐들어오자 사도요한은 지금 귀양을 왔는지, 밧모섬에 있는지, 땅에 있는지 바다에 있는지 그것은 상관도 없고, 아침을 먹었는지 점심을 먹었는지 그런 것은 상관도 없고 그냥 바짝 엎드려서 ‘오, 주여…!’ 하고는 얼굴도 못 들었습니다. 그 예수님의 몸, 그 예수님의 몸이 ‘원’ 이 있고 ‘투’가 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만든 교회가 있습니다.
세 군데가 되었어요. 세 군데가 되니까 대체 1번을 믿어야 될지, 2번을 믿어야 될지, 3번을 믿어야 될지…? 그런데 1번하고 2번하고 차이점이 있다는 거예요. 1번은 예수님의 영광스러움, 예수님의 몸 그것이 전부인데 2번은 예수님의 몸에 사람, 우리의 몸이 여기에 추가 됩니다. 사람의 몸으로 만들어진 예수님의 몸, 어렵지요?
1번은 순수하게 예수님 본인의 몸, 2번은 사람의 몸으로 만들어진 예수님의 몸, 3번은 벽돌로 지어진 예배당입니다. 여러분이 성냥갑으로 집을 만들어 놓으면 그것은 그냥 성냥갑입니까? 성냥집입니까? 그것을 만든 아이들은 ‘선생님, 제가 이렇게 성냥갑으로 집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하고 성냥집으로 소개하겠지만 그 옆에 지나가던 아저씨가 담뱃불이 마침 필요했는데 반갑게 ‘어, 여기 성냥이 있네.’ 할거예요.
(어린이) “어? 아저씨 그거 빼면 집이 허물어져요.”
(아저씨) “이건 그냥 성냥이야, 성냥!”
그러면서 성냥을 쓰기 위해 그냥 빼버릴 겁니다. 만약에 의존교회 어린이 여러분이 교회에 가는데 안 믿는 부모님이 이렇게 이야기할 수가 있어요.
(엄마) “철아! 내일이 시험인데 지금 어디 가?”
(철이) “엄마, 나 교회 가는데.”
(엄마) “교회? 가지 마.”
(철이) “엄마, 내가 교회야.”
(엄마) “무슨 이상한 소리를 하고 있어? 얘야, 교회는 이게 교회지. 정신 차려라.”
(철이) “엄마, 내가 지난번에 목사님에게 강의를 들었는데 이게 교회고 그리스도의 몸이래.”
(엄마) “네가 빠지면 안 된다고?”
(철이) “안 돼. 내가 교회고 그리스도 몸이야.”
이렇게 이야기 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어째서 분명히 예수님의 몸, 본인 몸이 계신데도 불구하고 어째서 그리스도의 몸을 또 따로 만들어야 되느냐, 그것을 우리가 알아야 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예배당을 지어놓고 그것을 교회라고 이야기 하는 이유가 뭔가? 그것도 알아야 됩니다.
나중에 1번과 3번이 2번으로 통합이 되어 버립니다. 1번 따로 있고 2번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기에 1번은 지워야 합니다. 그래서 오직 그리스도의 몸은 이것(2번) 밖에 없고 이것 하나만 남습니다. 어째서 그리스도 몸이 있어야 되는가? 그것을 설명하겠습니다. 여러분, 에덴동산에서 사람이 중요할까요, 나무가 중요할까요? 우리 상식으로는 사람을 위해서 에덴동산이 지어졌다고 생각할 거예요.
그런데 막상 에덴동산의 중앙에는 사람이 있는 것이 아니고 나무 두 그루가 있습니다. 하나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선악과나무이고 또 하나는 생명나무입니다. 이 두 나무 동산 중앙에 심겨져 있습니다. 만약에 아담과 하와가 여기 있다가 ‘하나님, 하나님 보시기에 나무가 중요합니까, 사람인 우리가 중요합니까?’ 라고 묻는다면 그 답이 궁금합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께서 따먹지 말라고 했는데 선악과를 한 번 따먹어 보지.’ 하고 따먹으니까 ‘나가라!’ 그렇게 되었습니다. 선악과의 열매를 먹고 난 뒤에 사람들은 에덴동산에서 쫓겨나왔습니다. 밖으로 쫓겨 나와서 보면 그 안에 뭐가 남았습니까? 생명나무는 남았겠지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휴, 큰일 날 뻔 했잖아. 그 인간들이 생명나무까지 훼손할 뻔 했는걸.’ 그렇게 말씀하십니다.
사람은 쫓겨나서 흙이 되었습니다. 생명나무는 생생하게 살아 있습니다. 선악과나무는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렇다면 에덴동산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뭡니까? 마지막 남아 있는 생명나무가 중요하다는 말이지요. 만약에 사람이 정말 중요하다면 선악과를 따먹었다고 해도 ‘다른 선악과로 바꿔 놓을 테니 걱정하지 마라. 나는 너희들이 중요하지 그깟 나무 한그루가 중요하지 않다. 앞으로는 또 따먹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그렇게 하겠지요.
그런데 선악과를 따먹고 나서 하나님이 염려한 것은 혹시 그 인간들이 생명나무까지 따먹을까 싶어서 얼른 에덴동산에서 내 보내는 겁니다. 이 생명나무가 누구냐? 이분이 바로 신약의 예수님입니다. 생명에 관한 것은 전부 다 예수님입니다. 요한복음 6장에서 “나는 생명의 떡이다. 나를 먹는 자는 산다.” 고 합니다.
요한복음 6:51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라 하시니라.”
생명수는 누구입니까? 생명수도 역시 예수님입니다.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 4:14) 하여튼 생명에 관한 것은 전부 다 예수님입니다. 그래서 선악과를 따먹고 난 뒤에 사람들이 다시 에덴으로 들어올 까 싶어서 에덴동산의 동쪽 편을 철조망보다 더 센 두루 도는 불길과 천사들로 하여금 지키게 한 겁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관심사가 어디 있습니까? 사람이야 만들었다가 죽이고 또 만들면 되는데 이 생명나무는 절대로 다치면 안 되는 겁니다. 결국 사람이라 하는 것은 생명나무의 가치를, 예수님을 드러내기 위해서 사람이 있는 겁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은 예수님을 드러내기 위해서, 예수님을 위하여 살라고 사람을 만든겁니다.
강의 초반에 제가 이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이 예배당을 교회라고 알고 있는 사람들이 믿는 하나님은 사람을 위해서 있는 하나님이라는 겁니다. 하나님이 여기 계시고 여기에 사람이 있고 하나님이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서 교회를 줬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서 교회를 줬는데 그 교회에 등록하고 그 교회의 말을 들으면 그 사람은 구원받는다고 이야기합니다.
이것은 완전히 거짓말입니다. 이런 생각은 사람들이 지어낸 생각이고 하나님도 사람들이 지어낸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관심사가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에게 관심이 있는 거예요. ‘사람은 어떻게 구원받을까? 하나님은 어떻게 생겼을까? 하늘나라에는 어떻게 갈 수 있을까?’ 그런 생각조차 사람은 먹지 말아야 되고 그런 생각을 해서도 안 되는 존재입니다.
(사람) “하나님은 어떤 분입니까?”
(하나님) “입 다물라!”
(사람) “하나님, 어떻게 하면 구원받습니까?”
(하나님) “입 다물라!”
인간은 그런 것을 말할 입장과 자격이 못됩니다. 사람은 에덴동산 가운데 있는 생명나무 있는 곳은 들어가 보지 못했습니다. 인간이 들어가 보지 못했다는 뜻으로 제가 이 공간을 지워놓겠습니다. 지워놓으면 그 안이 텅텅 비어 있겠지요. 이 장소를 저는 ‘허공’이라고 하겠습니다. 유명한 가수가 부른 노래도 그런 제목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허공’ 안에 뭐가 들어 있는지도 모르는 주제에 허공을 비켜가서 신을 이야기하고 인간, 자신은 여기 있다고 합니다. 허공은 비어져 있으니까 이 허공을 인간 자신이 할 수 있는 것들로 채워요. ‘하나님, 헌금해 드릴까요? 하나님 교회를 세울까요? 전도해 드릴까요? 제가 봉사를 할 까요? 제가 정성을 다 바치겠습니다. 기도를 드리겠습니다. 성경공부를 하겠습니다.’
자꾸 허공을 채우고 그 채워진 것을 가지고 ‘교회’라고 사기를 치고 있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이것은 교회가 아니고 정치적 용어로 ‘연대’(連帶)라고 합니다. ‘○○연대’라고 많이 들어보셨지요? ‘○○환경연대, 직불금○○연대, ○○화물연대….’ 동일한 목적 하에 서로 결속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렇게 ‘연대’를 만들어 놓으니까 ‘교회 없다’, 이것을 제일 겁을 내요.
그래서 엉터리, 사기성기독교를 믿는 사람들을 제일 당황스럽게 만드는 것은 ‘교회 없거든!’ 이라는 말이고 그 말을 들으면 그들은 속이 밑바닥부터 뒤집어 집니다. ‘교회 없이 한 번 구원 받아봐라.’ 는 것이 제 이야기입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이 뭔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조치를 취했다.’ 고 되어 있잖아요. 그 자리는 교회가 채울 것이 아니라 허공으로 그냥 남겨두라는 말이죠.
만약에 그걸 교회로 만들어 버리면 인간들은 뭘 생각하느냐 하면, ‘교회가 잘된다. 교회가 못된다. 교회가 그저 그렇다. 교회가 부실하다. 교회가 부흥 되었구나.’ 하는 이런 판단들을 본인들이 판단하게 됩니다. ‘아하, 헌금이 많이 들어온 것을 보니 교회가 좀 되겠는걸….’ 혹은 ‘헌금이 이렇게 부실하게 들어오는 것을 보니 교회가 안 되겠다. 문 닫자. 교인들 숫자대로 교회 지분 갈라 먹고 각자 갈 길로 가자.’
교회가 운영이 좀 된다 싶으면 하나님의 복을 받은 것이고, 반대로 운영이 안 되면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것으로 여기는 겁니다. 결국 그 말은 인간이 교회를 세워놓으면 교회가 되고 안 되고, 의 그 책임을 누가 져야 된다는 말입니까? 그 책임을 본인들이 져야 된다고 여기는 겁니다. 그것처럼 악마의 꼬임에 홀딱 속아 넘어간 더 큰 경우가 또 없어요.
마귀에게 속아 넘어간 경우란 내가 한 행동에 내가 책임져야 된다는 사고방식입니다. 어린이 여러분, 유치원 때 한 행동들 다 책임질래요? 진짜 살아계신 예수님은 일체 여러분에게 일곱 살 때든지, 아홉 살 때든지, 60이 되었든, 90이 되었든 일체 여러분에게 책임을 묻지 않습니다. 교회를 불 질러 보세요. 그 책임을 묻는가?
네 인생 왜 그 모양이냐 책임을 묻지 않습니다. 책임을 묻는 것은 누가 묻느냐? 마귀가 옆에서 물어요. ‘너, 인생 그렇게 살면 안 된다.’ 마귀가 그렇게 합니다. 왜 주님께서는 일체 책임을 묻지 않느냐 하면 익히 우리가 생명나무와 무관한 처지에서 사는 우리 입장을 뻔히 아시기 때문에 새삼스럽게 책임추궁을 하지 않는 겁니다.
여러분이 평생 살면서 실수를 몇 번이나 했습니까? 만일 실수를 백 번 했다면 백번으로 끝나겠습니까? 내일 되면 백 한가지로 늘어나면서 추가됩니다. 모레 되면 계속해서 또 늘어납니다. 그러면 지난 날 실수한 것은 오늘 회개했다고 치고, 오늘, 내일 계속 실수하고 책임질 일은 그 다음날 또 회개하면 되겠네요. 일회용으로.
지난 날 죄 지은 것을 예수 믿음으로 책임졌다는 그 사고방식도 글러먹었고, 여러분에게 주께서 여러분의 과거 혹은 미래에 대해서 새삼스럽게 책임추궁을 하지 않습니다. 그런 것을 추궁하는 경우는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되어있지 않고 행위 책에 그 이름이 기록되어 있는 사람에게는 묻지요. 마귀를 통해서든지, 말씀을 통해서든지 물어요.
하지만 자기 백성에게는 일체 모든 책임이 면제되어 있습니다. 불문에 붙여요. ‘네가 교회를 잘 세웠나, 안 세웠나?’ 그런 것을 묻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이 만드시는 교회 말고 인간이 만드는 교회를 생각하다 보니까, ‘교회가 지금 영업이 잘 되는지 안 되는지, 시원찮은 업주인지 아닌지’ 그런 것을 자꾸 생각하는 거예요.
‘교회가 저렇게 망하면 하나님이 싫어하는데….’ 세상에, 교회를 망하게 했다고 하나님이 싫어한다는 그 아이디어가 도대체 어디서 나온 아이디어인지를 모르겠습니다. 교회 책임자가 왜 본인입니까? 참 희한해요. ‘실례지만 교회하고 어떻게 되십니까?’ 이렇게 묻고 싶은 심정입니다.
(당회장) “저는 당회장이기에 교회를 책임집니다.”
(묻고 싶은 이) “그러면 교회 없는데 당회장이 있습니까?”
(당회장) “교회 없으면 당회장도 없습니다.”
(묻고 싶은 이) “그러면 교회 없습니다. 이제 당신은 당회장도 아니지요?”
(당회장) “그러네요.”
(묻고 싶은 이) “그러면 집에 그냥 계세요.”
쓸데없이 일만 저질러 놓았지요. 인간의 문제가 뭔가 일을 저지르는 그것이 문제입니다. 그냥 가만있으면 되는데 꼭 일을 저질러요. 일 저질러 놓고 그 다음에 잘했니, 못 했니, 하면서 혼자 끙끙 앓으면서 ‘내가 이래 놓고도 그리스도의 사람이라고 할 수가 있겠나?’ 혼자 고민에 빠져 있고 마귀는 봉창을 두드리면서 ‘더 울어라. 울면 봐줄 수도 있다.’ 하면서 마귀는 놀리고 있습니다.
크리스마스 다가오면 교사들이 애들 연극, 율동, 노래시키잖아요. 그럴 때 교사들 스트레스 엄청 받습니다. 학교 교사들은 월급 받으면서 일하잖아요. 교회 교사들은 월급도 없고 초고파이 두 개씩 주는 간식밖에 없는데 애들은 말도 잘 안 듣습니다. 서너 명이 연극을 준비 하면 꼭 한 명은 빠지고 웅변학원 갔다고 하고, 그 애가 나오면 또 다른 애가 영어 학원 간다고 빠지고 이래저래 연습이 안 됩니다.
막상 크리스마스가 되면 연습도 채 안된 연극을 한다고 무대에 올려놓으니 얼마나 부실한지…. 그럴 때 그 교사는 큰 책임감을 느끼면서 ‘내가 이렇게 애들 몇 명도 제대로 다루지 못하면서 내가 어떻게 하나님의 종이라고 할 수 있느냐?’ 하고 탄식을 하지요. 그 때 주님이 종용히 다가와서 말은 건네십니다.
(주님) “소녀야, 왜 울고 있느냐?”
(교사) “제가 주일학교 교사인데 애들 연극준비를 제대로 못시켰습니다.
(주님) “그거 왜 하는데?”
(교사) “크리스마스라고 이렇게 합니다.”
(주님) “크리스마스는 누가 정했니?”
(교사) “교회에서 이렇게 정했습니다.”
(주님) “그런데 교회 없거든?”
(교회) “아니, 교회도 없이 어떻게 구원받습니까?”
(주님) “교회 없이 어떻게 구원 받느냐, 하는 그런 생각에 머물러 있으니 너는 불교신자야.”
제가 이런 소리를 하면 ‘잘 가르친다. 그러면 교회 때려치우고 집에 가면 되겠네.’ 할 거예요. 죄송합니다. 집이 없거든요. ‘집도 없으면 기도원에 가면 되겠네요?’ 죄송합니다. 기도원이 없습니다. ‘안 그러면 회사로 가면 되지요.’ 죄송합니다. 회사도 없습니다. 이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전 세계의 말소현상’이라고 합니다.
없습니다. 하나님한테는 없는 거예요. 그러면 하나님에게는 뭐밖에 없습니까? 한글자입니다. ‘흙’입니다. 에덴동산 밖에는 전부 다 흙입니다. 회사도 없고 직장도 없고 자식도 없고 부모도 없고…, 왜? 자식이나 부모나 늙어 죽으면 다 흙이 되니까. 목사 죽으면 흙 되고 장로도 죽으면 흙 돼요. 여러분, 흙은 교회가 아닙니다.
흙은 흙입니다. ‘흙은 흙일뿐 오해하지 말자.’ ‘흙에서 어떻게 그리스도 몸이 되는가?’ 이 솜씨는 예수님만 할 수 있어요. 다른 사람은 못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뭐가 되어 있어야 합니까? 흙이 되어 있어야 합니다. 흙은 없는 겁니다. 흙은 모아봐야 흙덩어리에 불과한 겁니다.
세상에! 흙을 뭉쳐서 연대를 이루어서 기독교 교회라고 세워놓고, 그 교회 부실하다고 혼자 좌절하고 좀 잘 된다고 복 받았다고 우쭐대면서 우기고 있고 이게 무슨 웃기는 짓들입니까? 울산에서 그런 내용의 강의를 했습니다. 사람이 40을 살면, 40년을 산 것이 아니고 40년을 그냥 보낸 거예요. 시간을 그냥 보낸 거예요. 남는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마치 밑 빠진 독에 물 붓는 것 같아요. 여러분, 밑 빠진 독에 물 한 번 부어보세요. 어린이 여러분, 밑 빠진 독에 물 부으면 물이 얼마나 남지요? 정답) 없습니다. 40년 산 것 어디에 들어 있습니까? 여러분의 호주머니에 들어 있습니까? 어디 있습니까? 없습니다. 50년 살아 보세요. 없습니다. 한 90년 살아 보세요. 없습니다.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냥 흙으로 변모되어 가는 흙덩어리 외에 아무것도 없습니다. 흙덩어리가 상상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흙덩어리가 국가를 상상하고, 흙덩어리가 군대를 상상하고, 흙덩어리가 교회를 상상하고, 흙덩어리가 신을 상상하고, 예수를 상상하고, 목사를 상상합니다. 그 상상의 주체가 그냥 흙덩어리뿐 입니다. 이거 완전히 말소되지 아니하면 오늘 진도 못나갑니다.
오늘 본문 전혀 해석이 안 됩니다. 요즘 배추 값이 폭락했습니다. 전북 어디선가 농민들이 애써 키운 배추밭을 배추 채 그냥 갈아엎습니다. 얼마 전에는 배가 너무 많이 생산되니까 판로가 막히니까 과수원주인이 트랙터로 배를 다 뭉개버렸습니다. 그러면 그 사람 집에 배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뭘 잊으면 안 됩니까?
서울강의가 몇 년 째 진행되고 있습니다만 그동안 강의한 내용 중에서 제일 중요한 것을 지금 이야기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뭉갠다.’ 이 뭉개는 작업을 잊어버렸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뭉갠다는 사실을 잊어버려요. 배 과수원 주인이 배를 뭉개듯이, 배추밭 주인이 배추밭을 갈아엎듯이 다 뭉개고 갈아 엎어버립니다.
‘나는 가수다.’ 흔들면서 노래 부르고 ‘나는 배우다.’ 꾸미고 연기하고 ‘나는 의사다.’ 청진기 대면서 진찰하고 ‘나는 판사다.’ 법복입고 재판하고 있고, 그럴 때 ‘어이 배추! 어이 배!’ 하나님이 다 뭉개버립니다. ‘그(사람)의 호흡(목숨)은 코에 있나니….’ 코 막아 버리면 죽는다는 거예요.
이사야 2:22
“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그의 호흡은 코에 있나니 수에 칠 가치가 어디 있느뇨.”
이 말은 아무리 자기 자신을 꾸며도 주님께서 이렇게 손가락으로 코 막아 버리면 산소공급이 안되어서 2분도 채 못 견디고 죽어버려요. 우리 집에 개미가 많은데 개미 어른 있고 개미 새끼 있습니다. 제가 개미 약 뿌릴 때 어른개미만 골라서 뿌립니까? 개미라는 종류는 다 뿌려 버립니다. 어른이라고 더 뭉개고 애들이라고 봐주고 덜 뭉개고 그런 하나님은 없습니다. 뭉개야 하나님의 일이 됩니다.
그 ‘뭉갠다’는 세 글자를 다른 세 글자로 고치겠습니다. ‘십자가.’ 이렇게 생각하십시오. 교회? 꿈도 꾸지 마세요. 그리스도 몸? 꿈도 꾸지 마세요. 그것은 누구의 솜씨이고 누구의 몫인가? 예수님 자신의 몫이고 예수님 자신이 하실 일입니다. 제발 사람이 교회 만들려고 하지 마세요.
사람이 교회 만들고자 하는 것이 나쁜 것이 아니라, 사람이 교회 만들고자 할 그 때 그 상상하는 교회가 근본적으로 잘못된 교회이기 때문에, 그것은 인간이 ‘잘되었다, 혹은 잘 못되었다.’ 하는 인간의 평가대상으로서의 교회이기 때문에 그 자체가 인간의 허구, 환영(幻影), 환상(幻像)이기 때문입니다.
얼마 전에 아내와 함께 경북 의성에 ‘단촌’이라는 곳에 갔습니다. 제 아내의 고향마을입니다. 아내가 이야기합니다. ‘여기가 내가 다니던 초등학교이고 여기는 고동 잡던 냇가이고, 이 나무가 어린 시절부터 있었던 나무였고, 이게 바로 그 시절에 다니던 교회이고 ….’ 거기 아무리 유심히 살펴봐도 어릴 적 소녀는 보이지 않았어요.
그런데 그 나무에 올라가며 놀았던 그 어릴 적 소녀였던 제 아내는 어릴 때 나무에 올라간 것은 환상도 아니고 환영도 아니고 분명히 손에 잡히는 분명한 현실이라고 생각했지요. 하지만 사십 여년 뒤에 보니 일곱 살 소녀는 거기에 없었습니다. 따라서 본인은 모르지만 나중에 시간이 와서 덮쳐버리니까 실제라는 그것도 한순간의 환영이고 꿈이었습니다.
지금 여러분이 이렇게 앉아 있지요. 내일 되어 보세요. ‘어제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없습니다. 사람은 자꾸 지금 현재 손에 잡혀 있는 이것을 실제라고 여기니까 뭐가 문제일까요? 예수님께서 문 열고 들어올 때 제자들이 그 상황을 어떻게 봤습니까? 예수님을 귀신으로 봤습니다. ‘보지 않고는 못 믿겠다.’ 했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부활이 뭡니까? 예수님의 부활이란 간단해요. ‘문 닫았는데 들어오는 것.’ 지금 실험해 볼까요? 지금 문 다 닫혀 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여기에 못 계십니까? 문 안 열어 드려서 못 들어오시는 겁니까? 아니지요? 문 다 닫혀 있어도 예수님은 여기 계실 수 있지 않습니까? 그렇지요? 그러면 이것을 어떻게 설명합니까?
사람들이 이런 식으로 설명할 수도 있어요. ‘예수님은 영이기에 문틈으로 들어 올 것이다.’ 그렇게 설명하면 안 되죠. “‘문 닫혔는데도 들어온다면 유령이다.’ 가 아니라 ‘그렇게 문이 닫혀 있기에 주님이 못 온다.’ 라고 생각을 하는 네 자신이 유령이라는 생각을 왜 못해?” 입장 바꿔서 생각해 보란 말입니다. 우리가 상상 속에 환상 속에 살았다는 것을 왜 몰라요?
도마는 ‘자신의 눈으로 봐야 믿겠다고 여긴 그 자신은 진실 되다’고 생각했어요. 그 생각에는 변함이 없어요. ‘나는 눈으로 봐야 믿겠다.’ 예수님보고 자기에게 맞추라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맞춰줬지요. ‘이 못자국과 창 자국을 보아라.’ 라고 하시면서 십자가 사건을 보여주셨지요. 그 때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 이십니다”(요 20:28) 라고 했습니다.
그 순간 뭘 잊었는가 하면 ‘내가 어떠냐?’를 생각 할 입장도 못되고 그럴 자격도 없는 겁니다. 요한계시록 1장에서 사도요한이 누구를 만났습니까? 예수님을 만난 뒤에 사도요한이 뭐라고 했습니까? ‘지금 주님을 만나는데 내 옷매무새가 제대로 되었는지, 혹시 단추가 떨어지지나 않았는지, 구두에 광은 나는지 ….’ 그런 것을 생각하겠어요, 안하겠어요?
못하지요. 할 수가 없습니다. 그냥 죽은 자가 됩니다. 아까 한 이야기 다시 할까요? 어린이 여러분이 덮쳐온 태양 앞에서 지퍼 내려왔다고 올리고 말고 할 여력이 있겠어요, 없겠어요? 태양이 바로 앞에 있으면 곧 타죽고 말지요. 그 정도로 진짜 현실이 와 버리면 내가 따로 현실이라고 보는 이것이 수증기처럼 흩어지고 파편처럼 날아가 버리고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어요.
남는 것이 없다는 그것이 바로 흙이 되고 재가 되는 겁니다. ‘목사님, 저는 재가 아니고 인간인데요?’ 한 80년만 버텨보면 재가 됩니다. (발끈해서) ‘80년 후에는 재가 될 지 모르지만 지금은 아직 재 아니잖아요.’ 흙이 되고 재가 되기 위한 과정을 밟아가고 있습니다.
제가 지금 마시고 있는 이 차가 유자차인데 이 차를 마시면서 ‘나는 지금 유자차를 마시고 있습니다. 이것은 죄가 아니고 그냥 인간으로서 마시는 겁니다.’ 라고 하는데 저쪽에서 해석이 오기를 ‘너는 흙으로서 유자차를 마신다.’ 라고 하는 새로운 해석이 들어오는 겁니다. 오늘 강의가 너무 어려워서 어린이여러분이 애를 많이 먹습니다.
미래가 다가오는 차단막입니다. 장차 내가 될 것이 하나님의 해석으로서 덮쳐 버립니다.
(하나님) “어이, 흙! 방금 뭐 먹었지?”
(인간) “유자차를 먹었습니다.”
(하나님) “맛있더냐?”
(인간) “맛있습니다.”
(하나님) “알았다. 또 먹고 흙이 되어야 한다.”
(인간) “예, 알겠습니다.”
이 겁니다. 먹었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뭐가 되기 위해서 어떤 절차를 거쳐서 먹게 되었나, 그것이 중요합니다. 흙이 되기 위한 절차 중에 하나가 2008년도에 유자차를 한 잔 마신 이것이 포함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 이론도 있을 수 있다.’ 그 말이 아닙니다. 다시 전체적으로 봅시다. 여기가 창세기이고 여기가 요한계시록입니다.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것은 에베소서입니다. 에베소서 이전에 구약이 있습니다.
이 구약에 있는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이냐 하면, 자기들이 살아 있다고 주장했고 살아 있는 그 상태에서 살아 있는 하나님을 대한다고 생각했는데, 결론은 ‘너희는 죽어있었고 너희를 약속으로 죽이게 하신 그 하나님, 너희들이 상상 속에서 지어낸 하나님이 아니라, 너희들을 포로 잡혀가게 하고 멸망케 하고 뭉개버리고 죽여 버리는 그 하나님이 진짜 하나님이다.’ 라는 것을 보여준 거예요.
구약에 보면 당나귀가 이야기 하는 것도 나오지요. 당나귀가 어떻게 이야기를 합니까? ‘하나님, 어떻게 당나귀가 이야기를 합니까?’ 라고 발람이 하나님께 묻던가요?
(발람) “당나귀야, 이리와 봐라. 나 좀 보자.”
(당나귀) “왜요, 주인님!”
(발람) “너는 언제부터 사람 말 배웠지?”
이렇게 물었습니까? ‘당나귀가 왜 말을 하지?’ 라고 해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를 책망하는구나.’ 이렇게 해석했습니다. 당나귀가 말하기 전까지는 ‘너는 당나귀, 나는 주인(사람), 너는 내가 시키는 대로 때리는 대로 가라.’ 그것을 실제현실로 봤는데, ‘당나귀가 말을 다 하네? 어째서 당나귀가 말을 하는지 좀 보자.’ 그렇게 본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날 치는 구나.’ 그렇게 봤다는 말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을 다른 사람들이 언뜻 보기에는 ‘종교적이다.’ 하는데 그것이 아니고, 그들은 다른 이방민족이 예상도 못할 하나님을 직접 체험했습니다. 그 체험이 뭐냐? 뭉개지는 체험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자기들을 치고 책망하는 체험이었습니다. ‘이스라엘아, 너희들은 포로 잡혀 갈 것이다. 너희들은 망하게 될 것이다.’ 이런 책망의 체험을 했습니다.
알아듣는 자들은 신앙인, 못 알아듣는 체 ‘어이, 당나귀 같은 이사야 이리 좀 와봐. 이사야, 네가 뭔데 감히 우리를 책망하느냐? 예레미야, 이리 와봐, (뺨을 때리면서) 어디서 감히 우리 임금님을 모독하느냐? 뭐? 70년 동안 우리가 망한다고? 너 같은 인간은 죽어야 되고 밟아야 돼. 에스겔 이리와, 너도 죽어야 돼.’
그 당시 이스라엘인들은 자기들 나름대로 상상하는 엉터리 같은 하나님이 따로 있었어요. 실제 하나님이 나타날 때 선지자의 책망 속에 나타나시는 것을 모르고 ‘내가 믿는 하나님이 맞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는 성전 섬기면 되고, 헌금하면 되고요, 양으로 제사 드리면 되고 절기를 지키고 유월절을 지키면 된다.’ 이렇게 자기들이 할 수 있는 것 가지고 하나님과 연결된다고 본 겁니다.
그런데 그런 시험을 다 해 봤어요. 성전이면 성전, 예배당이면 예배당, 법이면 법, 십계명이면 십계명, 모든 것을 다 해봤습니다. 다 해 봤지만 결국 남는 것은 뭐냐? “참, 너희들 정말 꿈이나 꾸고 있구나. 정작 오시는 메시야 하나님은 네가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한다. 왜? 너 자체가 바로 허상이기 때문이다. 얼마나 허상덩어리이면 진짜 메시야를 보고 허상이라고,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야?’ 라고 빈정댈까?”
로마 군병이 뭐라고 했습니까? 주님의 뺨을 때리면서 장난을 쳤습니다. 바리새인들, 서기관들이 ‘네가 하나님의 아들 같으면 너부터 구원하라.’ 하면서 모욕을 줬습니다. 우리는 마치 로마군병보다 더 뛰어난 생각, 마치 바리새인보다 더 뛰어난 이성을 가진 것으로 착각들을 하시는데 막상 의존교회 목사님, 장로님 죽 들 오셔서 보세요.
보면 거기에 큰 소리 치다가 맥없이 사라지는 한 남자가 있을 뿐, 어떤 믿음도 생기지 않습니다. ‘꼴좋다. 왜 죽을 것을 알면서도 까불어대고 설치는가? 왜 거룩한 성전을 뒤집었느냐고? 안 그러면 살려줄 것인데….’ 여러분이 국회의사당 가서 난동 부리고 뒤집어엎어 보세요. 가만 놔두겠습니까?
전에 제가 있었던 교단의 어떤 목사는 장로・목사들 모여서 노회가 성찬식을 하고 있는 자리였는데 하도 목사들 하는 꼬라지가 더러워서 ‘에라, 치워라! 이 더러운 인간들아! 당신들이 이걸 먹을 자격이 되나!’ 하면서 성찬대를 뒤집어 버렸습니다.
예례미야가 그랬습니다. ‘제사 드리지 마! 이것은 성전이 아니다.’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한 인간이 열불이 나서 설치는 것으로만 보였습니다. 하나님이 그런 모습으로 온다는 것을 모르는 거예요. 왜? 자기 자체가 환상인 것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돌발 사태를 벌이고 있는 저 인간이 무슨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 거예요. 자기가 무슨 문제가 있는 줄도 모르는 채.
제가 지금 이 어려운 이야기를 길게 하는 이유는 하나밖에 없습니다. ‘어떻게 흙에서 몸이 되느냐?’ 하는 이 어려운 과제를 이야기하기 위해서 우선 ‘왜 우리가 흙일 수밖에 없는가?’를 이야기해야 되겠고, 그 다음에 현재 흙인 주제에 기껏 사람들이 끄집어내는 상상, ‘예수가 어떻고, 교회가 어떻고, 메시야가 어떻고…’ 하는 것은 다 엉터리라는 거예요.
진짜 교회는 우리 힘으로 안 되는 것, 즉 환상과 공상과 망상과 환영으로 가득 차 있는 우리를 어떻게 흙이라고 규정하고, 그 다음에 ‘흙이지만 나로 인하여 그리스도 몸이 되었느니라.’ 하는 것이 어떻게 납득이 되느냐는 것입니다. 그게 납득이 안 되니까 ‘주여, 교회 세웠습니다. 받으소서.’ 기껏 인간들이 하는 짓이 그 짓이잖아요.
그런데 그것은 제가 이미 엉터리이며 인간의 상상력이 조작해 낸 것일 뿐이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구약의 유대인들이 다 시험해서 엉터리임을 거친 것들입니다. 진짜 중요한 것은 뭐냐? ‘제가 흙이 맞는데 어째서 이렇게 그리스도의 몸이 되었습니까?’ 라고 감격스러운 고백을 하게 된 그 과정, 그 동기, 힘이 어디서 나왔겠습니까?
교회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가 생겨버렸습니다. 순전히 누구의 힘입니까? 우리 인간의 힘입니까? 아니지요? 누구의 힘입니까? 오직 예수님의 힘입니다. 오늘 약간 분위기가 이상스럽습니다. 영 반응도 없는 듯하고 저 혼자 고함지르는 것 같습니다. 조용하게 다시 이야기하겠습니다.
인간이 흙이 되어가면서 온갖 상상을 다 하거든요. 그 중에 하나가 ‘교회 만들어서 섬기기’가 있거든요. 그런데 그거 아니거든요. 진짜 교회는 우리가 손대고, 책임지고, ‘잘되었으니, 못 되었니’ 라고 따질 수 있는 대상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내가 따질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 아예 나를 포함시켜 버리는 그리스도의 몸 덩어리이기 때문입니다.
나를 삼키는 분을 어떻게 내가 대상으로 삼겠습니까? ‘어어? 이거 못 놔? 어어? 막 덮치네. 덮친다.’ 주님께서는 나를 삼켜서 자기 몸의 일부로 만들어져 버린 주제인데 내가 어떻게 나를 삼킨 것을 향하여 ‘당신은 이렇고 저렇고를 말할 수 있느냐?’ 그 말이죠. ‘ 저 나는 삼킴을 당했습니다. 삼킴을 당하고 보니까 삼킴 당한 그 자체로 그리스도 몸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라고 된 거예요.
‘그러면 목사님, 지금 목사님의 그 설명이 에베소서 4장의 이야기라고 하는 것인데 그러면 예수님이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 즉 예수님의 공생애동안 이것을 미리 예언한 적이 있습니까?’ 라고 물으신다면 저는 ‘있습니다’ 라고 답변하지요. ‘어디 있습니까?’ 라고 물으신다면 ‘예수님의 겟세마네기도 가운데 있습니다.’ 라고 답변합니다.
거기 보면 ‘네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거한다.’(요 17:21,26) 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세상에 살아 있는 이상은 실패입니다. 우리가 흙처럼 우리가 어떤 식이든 힘을 쓰는 것이 없어야 주님이 나를 삼켰다는 것이 긍정이 되지 만약에 내가 살아 있으면 ‘주님이여, 우리 악수 먹읍시다.’ 이런 식으로 협조, 동업, 타협, 흥정하려고 덤벼들지 일방적으로 주님 안에 들어가지를 못해요.
왜? 우리는 나름대로 자기 것이 있고 자기 자존심이 있기 때문에 주님에게 흡수 통합되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그런데 주님이 ‘네가 내 안에 내가 네 안에 있다.’ 라고 하신 것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셔서 우리를 허상의 덩어리로 만들어 버리시고 그 허상을 어떻게 실상으로 바꾸어서 나오는 결과물을 가지고 ‘네가 내 안에 내가 네 안에 있다.’ 라고 하신 겁니다.
10분 쉬고 다음 시간에 계속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