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 63: 7-14 (모세의 날)
사 63: 7-14 (모세의 날)
이름 : 우리교회(IP:220.81.176.150)
본문 : 이사야 63장 7-14절
제목 : 모세의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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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교회
08-11-27 12:19
모세의 날
2008년 11월 26일 본문 말씀: 이사야 63:7-14
(사 63:7) 『내가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모든 자비와 그 찬송을 말하며 그 긍휼을 따라, 그 많은 자비를 따라 이스라엘 집에 베푸신 큰 은총을 말하리라』
(사 63:8)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그들은 실로 나의 백성이요 거짓을 행치 아니하는 자녀라 하시고 그들의 구원자가 되사』
(사 63:9) 『그들의 모든 환난에 동참하사 자기 앞의 사자로 그들을 구원하시며 그 사랑과 그 긍휼로 그들을 구속하시고 옛적 모든 날에 그들을 드시며 안으셨으나』
(사 63:10) 『그들이 반역하여 주의 성신을 근심케 하였으므로 그가 돌이켜 그들의 대적이 되사 친히 그들을 치셨더니』
(사 63:11) 『백성이 옛적 모세의 날을 추억하여 가로되 백성과 양 무리의 목자를 바다에서 올라오게 하신 자가 이제 어디 계시뇨 그들 중에 성신을 두신 자가 이제 어디 계시뇨』
(사 63:12) 『그 영광의 팔을 모세의 오른손과 함께 하시며 그 이름을 영영케 하려 하사 그들 앞에서 물로 갈라지게 하시고』
(사 63:13) 『그들을 깊음으로 인도하시되 말이 광야에 행함과 같이 넘어지지 않게 하신 자가 이제 어디 계시뇨』
(사 63:14) 『여호와의 신이 그들로 골짜기로 내려가는 가축 같이 편히 쉬게 하셨도다 주께서 이같이 주의 백성을 인도하사 이름을 영화롭게 하셨나이다 하였느니라』
구약 광야에서 이스라엘이 하나님에게 당했던 그 상황이 과연 오늘날 신약 성도에게도 그대로 적용되느냐 하는 문제가 등장될 수 있습니다. 즉 이 세상을 일단 광야로 봅니다. 그렇다면 지금 이 세상 위를 살아가는 사람과 옛날 광야 때를 살아갔던 그들과 같은 입장에 있다고 간주될 수 있다는 겁니다.
고린도전서 10:5-6에 보면, “그러나 저희의 다수를 하나님이 기뻐하지 아니하신 고로 저희가 광야에서 멸망을 받았느니라 그런 일은 우리의 거울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저희가 악을 즐겨한 것같이 즐겨하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 함이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히브리서 3장과 4장에 걸쳐서 보면, 안식의 때가 아직 남아 있음에도 불구하고 광야의 사람들이 순종하지 못하고 믿음에 화합되지 못해서 안식의 땅에 들어가지 못했던 것처럼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라는 겁니다.
즉 홍해를 건넸던 자들이 아직 약속의 땅에는 이르지 못하고 중도에서 멸망당한 것처럼, 오늘날 우리는 여전히 광야와 같이 안식의 세계에는 아직 들어서지 못한 것은 분명하니 순종하면서 믿음에 부합된 생활을 해야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문제는 광야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당했던 것과 과연 똑같은 경우를 오늘날 성도가 당하게 되느냐 하는 겁니다.
즉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당했던 어려움은 실제적으로 물이 없었고 먹을 양식이 없어 헤매고 다닌 겁니다. 뿐만 아닙니다. 오늘날 우리 동네 아파트 앞에 새벽마다 하늘에게 과자 같은 것이 뿌려져 있느냐 하는 겁니다. 그리고 실제로 오늘날 야영 생활을 하고 있으며 밤마다 불기둥과 낮에는 구름 기둥이 우리 성도들의 출퇴근 시간마다 지켜주느냐 하는 겁니다.
결국 우리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다른 방식으로 성도의 신앙을 돕고 있는 겁니다. 그것이 뭘까요?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약속 이외의 것을 다 버리게 만드는 상황을 두고 말합니다. 흔히들 어려운 역경을 자신들의 ‘십자가’라고 표현합니다. 십자가란 곧 자신을 부인하게 만드는 사건으로서 예수님에게 일어난 사건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 예수님에게 국한된 사건을 구원받아야 될 모든 성도에게 동일한 속성과 성질로 일어나게 하시는 겁니다. 예수님에게 있어 십자가란 몽땅 버리는 겁니다. 심지어 자신의 목숨까지도 말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예수님의 사건이 성도에게 덮친다면 성도는 이제 홀로 살아가는 자가 아니라 예수님과 더불어서 사는 자가 됩니다. 그렇다면 성도 안에서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성도가 나름대로 살고자 하는 의지와 노력과는 정반대로 그것을 구박하고 힘들게 하고 어렵게 만들고 결국은 포기하게 만드는 사태가 일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산다’라는 것이 뭔지를 먼저 알아야 합니다. 모세 당시 홍해를 건넸던 자들에게 있어 ‘산다’는 눈 앞에 보이는 바다에 빠져 죽지 않는 일입니다.
그런데 이 바다라는 상황을 결코 이스라엘이 의도한 상황도 아니요 그리고 뒷따라 오는 애굽 군대의 추격도 결코 이스라엘 사람들이 유도한 것도 아닙니다. 진퇴양난의 상황은 전부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마련한 장치들입니다. 즉 인간들로 하여금 무엇이 어쩔 수 없는 일이며 무엇이 인간으로서는 헤어나올 수 없는 상황인가를 보여줍니다.
사람들이 기본적으로 무지하고 모르는 일은, 자신이 어디에 갇혀서 못 빠져나오는 신세인지를 본인들이 감을 잡지 못하고 있다는 겁니다. 성도에게 있어 다행한 점은 자신이 갇혀 있는 상황이 어떤 것인지를 안다는데 있습니다. 불신자들에게 사실 절망이라는 것이 없습니다. 단지 절망 속에서도 기어이 희망을 억지라도 만들고 합니다.
그러니까 항상 극복하고 도전하고 정복하고 일어나고 희망을 갖게 됩니다. 하지만 성도에게는 이런 극복과 희망이 성립되지 못하고 만드는 희한한 상황이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다는 점이 유일한 소망이요 희망입니다. 즉 절망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그림자처럼 떠나지 않고 늘 붙어다닌다는 것이 성도에게 있어 구원의 감각입니다.
스스로 해결할 가능성을 하나님쪽에서 철저하게 삭제해 나가는 대상으로서 이 광야같은 세상을 살아가는 겁니다. 그래서 이 광야 해석과 적용에 있어 크게 잘못된 비복음적 해석은 다음과 같습니다. “광야에서 생활이 비록 힘들지만 참고 견디면 언젠가는 약속의 땅에 도달될 것이다”라는 식의 해석말입니다.
이런 식이라면 사실 성도가 아닌 불신자에게 납득이 되는 해석입니다. 광야에서 벌어지는 일에 대한 해석은 반드시 난감하고 절망적인 상황에서 성도로 하여금 그 사태에서 자력으로 살아남을 수 있는 가능성을 전부 빼앗겨 버리는 그것입니다. 예를 들면, 열왕기상 3장에 보면, 솔로몬이 재판하는 한 사례가 나옵니다.
거기서 솔로몬에게 지혜의 본질을 보게 한 것은 어떤 여인의 발언 때문입니다. 죽은 갓난 아이의 친 어미는 이렇게 말을 합니다. “그 산 아들의 어미 되는 계집이 그 아들을 위하여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서 왕께 아뢰어 가로되 청컨대 내 주여 산 아들을 저에게 주시고 아무쪼록 죽이지 마옵소서”
즉 아이가 죽는 사태를 앞에 두고 솔로몬은 어느 어미가 그 절망적 사태 속에다 자신을 집어넣어서 자신을 그 절망의 맛을 보는 자인지를 살피는 겁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사건은 늘 성도에게는 스스로 절망케 하는 사건으로 주어집니다. 스스로 힘으로 살아가려는 모든 시도를 포기하게 만듭니다.
절망에서 희망으로 바뀌는 것이 아닙니다. 희망에서 절망으로 바뀌게 하는 겁니다. 오늘날 성도가 절망에서 절망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가지 않는 것은 제대로 신앙 생활이 안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자력으로 주어진 사태에 맞서 싸우려고 합니다. 이렇게 되면 우리 마음 내부에 하나님에 대한 적개심이 쌓이게 됩니다.
겉으로는 찬양과 감사를 말하지만 점점 더 하나님과의 관계를 끝내려는 마음의 준비를 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성도가 어떻게 그 절망 상황을 넘어서게 됩니까? 그것은, “내 힘으로 넘어섰다”라는 말을 못하게 하는 상황으로 이해하는 것을 통해서 넘어서게 하십니다. 즉 하나님께서 성도에게 맞도록 ‘맞춤 상황’을 내려주었으면 그것은 소기를 목적을 이루지 않고서는 철수하지 않는 법입니다.
그 소기의 목적이란 오직 ‘하나님의 오른손의 힘’의 나타남입니다. 백성들이 절망에 빠졌을 때만 모세의 오른팔은 하나님의 오른팔이 됩니다. 이로서 말씀이란, 신앙이란 오직 하나님만이 이루어지게 하시는 겁니다. 즉 우리 믿음이 아니라 하나님의 오른팔인 주님의 믿음으로 구원받습니다. 이를 위해 우리의 신앙은 매일같이 말씀에 불순종하는 절망 가운데서도 주님이 주시는 신앙으로 바뀌게 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단 한시도 주님께서 우리를 떠나지 않는 이유를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