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강의 11월 25일 불교의우주론과구원론(관-구선)
대구강의 11월 25일 불교의우주론과구원론(관-구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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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1125 불교의우주론과구원론(관-구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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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의 우주론과 구원론
2008-08-16 이근호 목사
참고서적: 觀(관) 구선 지음 봉성기획(서울:1999)
A 서론
흔히 불교를 ‘도 닦는 종교’로 알고 있다. 맞다. 하지만 무턱대고 도를 닦는 것이 아니다. 돈을 닦는다는 것은 우주의 대원리에 부합되고 융합하기 위해서 도를 닦는 것이다. 따라서 ‘우주의 대원리’가 어떤 것인가를 설정 작업이 전제 된다. 우주의 모델을 수립해놓고서 그 수립해놓은 모델에 일치되는 자기 존재가 되려 하려는 것이다. 그 우주 모델에 부합되지 못하면 자기만 손해니까.
따라서 ‘도를 닦는 것’은 자신이 예상한 우주와 하나가 되기 위한 수련 작업이다. 그렇다면 불교에서 말한 우주관은 어떤 모습인가? 여기에 물리학과 천문학과 화학과 의학과 생물학과 주역과 심리학과 윤리 같은 것이 총 투입이 되어서 세워진다. 큰 틀을 짜는 것이다. 우주의 생성원리가 우선되어야 하며 그 생성원리에 준해서 우주의 역사나 개인의 인생사가 진척될 것이다. 여기서 비켜나면 윤리적으로 나쁜 짓이 된다.
B 우주와 인간의 창조와 죽음
이 눈에 보이는 우주는 처음 어떻게 생겼을까? 우주라는 존재가 어떻게 생겼느냐를 따지면 그것은 물리학이지 결코 불교가 아니다. 불교란 우주라는 존재 이전에 생명이 먼저 있었다고 본다. 그래야 인간이 도를 닦아 이 존재라는 굴레마저 벗겨버려서 탈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존재론보다 생명론이 우선이다 는 말은, 대상을 존재론적으로 잡아놓고서 탐구하려는 모든 인간들의 학문(신학, 철학, 과학, 심리학)의 범주 밖에서 논의된다는 말이다.
이는 곧 불교의 생명론에 대해서 신학이나 철학이나 과학의 안목으로서 감히 평가하려 들지 말라는 말이다. 영적 직관에 의해서만 우주의 내막과 교류된다. 이 선(禪)의 경지에서만 밝혀진 사실을 세속의 세계를 알려주려 한다.
원래 에너지 밖에 없었다. 그 에너지는 정숙하고 고요하다. 이것이 생명의 세계다. 이 에너지는 처음에너지(선천 先天 에너지). 하지만 나중에너지(후천 後天 에너지)가 들이닥친다. 나중에너지는 먼저 에너지에 부딪치고 흡수되기도 하고 튕겨지기도 하였다. 이 부딪힘에서 나중에너지(후천에너지)를 대신하여 색다른 에너지 두 종류가 생겼는데 그것이 바로 양기와 음기다. 서로 대립되는 성질을 나타내는데 양기는 안으로 당기는 성질이 있고 음기는 밀어내는 성질이 있다.
어쨌든 이로서 ‘처음 고요’를 유지하려는 에너지와 이쪽으로 당기려는 양기와 밀어내려는 음기로서 세상의 모든 우주 만물을 다 설명할 수 있다. 물질이란 양기와 음기의 스파크에서 발생한다. 이로서 물은 양기적 물질과 음기적 물질로 나뉘어졌다. 생겨난 물질이 생명의 중심부로 쏠리면 생명은 거부반응을 보인다. 이 거부반응으로 물질들이 처음 에너지에 틀로 밀리고 이 밀려버린 물질이 다시 생명의 중심부로 왔다 갔다 하는 방향을 갖게 되는데 이 방향성으로 인해 파장이 발생한다. 이로서 이 물질의 대우주는 물질이 뿜어내는 ‘파장’의 세계가 된다. 이 파장들이 고유 파장이다. 이제부터 벌어지는 모든 물질의 결합과 해리는 파장이 던지는 진동수의 일치여부와 관련 있다.
물질이 속도가 가해지고 파장이 강해지면 이 ‘혼돈’의 생태에서 빠져나오는 물질과 파장이 있다. 먼저 에너지 틀을 빠져나오는 것이다. 이것이 양자 물리학에 말하는 ‘특이점’이고 이 특이점에서 시간과 공간이 창조되기 시작한다.
공간이란 물질 입자가 전에 있었던 먼저 에너지 틀에서 가졌던 관성적 진동에 의해서 차원대가 형성된 것이다. 즉 공간이란 파장의 폭이 만들어내는 것이다. 서로 다른 진동수를 가진 생명들이 각자 갖고 있는 고유 진동수에 따라 살아갈 수 있는 삶의 터전이 되는 것이다.
이제 물질은 안정상태를 유지하면 분별의식을 갖추게 된다. 여기에 6개의 분별의식이 나온다. (여섯 개의 분별의식이란 나중에 인간의 신체로 발현하게 되면 안이비설신의, 즉 눈과 귀와 코와 혀와 신체와 의지:두뇌의 의식이 되는 것이다) 6개의 분별의식이란 원래 생명에는 없었던 것이 혼돈을 거쳐서 나온 것이다. 이것이 존재다. 이 존재화된 생명을 ‘원초신(原初神)’이라고 지칭해두자. 이 원초신을 앞으로 유지시켜 주는 에너지는 어디서 공급되는가? 그것은 나중에너지(후천 에너지)에서 주어진다. 이 후천에너지가 주입되면서 원래 생명과 기질이 달라졌다. 좋다 나쁘다 라는 분별을 일으키는 의식활동을 하게 된 것이다. (선과 악을 분별하는 의식의 발생)
의식과 의식이 교류가 일어나면서 원래 있던 각각의 의식은 주체 의식이 되고 다른 의식과의 교류로 인하여 형성된 파장은 객체 의식이 된다. 주체 의식의 파장과 가까운 파장은 ‘좋은 것’이 되고 주체 의식과 멀어지는 파장은 ‘나쁜 것’이 된다. 이러다보니 점점 주체로 삼은 고유 진동수 중심의 체계가 갖추어지는데 이러한 생명이 원신(原神) 혹은 ‘영(靈)’이다. 원신과 원초신이 다른데, 원초신은 일곱 가지의 의식(6개의 의식에다가 고요의 식을 첨가해서 7개다)의 면모로서 정립되었던 것과는 달리 일곱 가지 의식의 면모 중에 하나의 면모가 중심이 되어 나머지 여섯 가지 면모가 적절하게 결합되어 있는 상태로 하고 있다는 점이 다르다. 따라서 원신의 종류에는 천인(天人) 곧 신, 인간, 식물, 동물, 무정물, 원생물, 그리고 틀 지워진 활동적 에너지 등이 있다.
인간 원신이 물질공간이 가지는 고유 진동수와 일치되면서 인간은 외롭고, 슬프고, 기쁘고, 사랑하고, 미워하는 등등의 감정의식이 발생하는데 여기서 생겨난 물질 입자를 혼이라고 한다. 혼이 생기면 영이 생길 때와는 달리 외부의식계가 만들어진다. 물질 입자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기서 눈, 귀, 코, 혀, 신체, 두뇌 같은 것이 생겨난다. 영이 만들어낸 것은 내부의식계라면 혼이 만든 것은 외부의식계이기에 이로 인해 생명은 두 개의 주체의식이 생겨나게 된 것이다. 이 둘의 주체의식이 결합하는 것을 ‘사랑’이라고 한다. 나중에 물질화되면(원신체가 되면) 서로의 원신을 배양하고자 하여 성적인 접촉을 하게 된다.
불교에서는 우주를 인간 중심으로 창조된 것으로 보고 있다, 원래 고요한 에너지에서 빠져나오는 인간의 원신이 진동수가 높은 물질 세계로 들어오면서 인간 원신과 비슷한 진동수를 가진 것들끼리 모여들었는데 이로서 우주는 인간 중심으로 서열화가 매겨진다. 즉 인간 원신과 가까운 것은 원신체 공간이 되고 그 밖으로는 물질체 공간이 된다. 원신체 공간은 원신에서 생성되는 에너지가 있는 반면에 물질체의 공간은 그러한 에너지가 없어 수동적 변화를 겪을 뿐이다.
이로서 인간 원신들은 물질의 결합과 분열에 영향을 주게 된다. 인간 원신의 힘이 미치는 장(場) 안에서 물질은 드디어 입자가 된다. 원신체의 공간은 물질 입자가 분열과 융합을 하면서 방출해 놓은 열과 압력 때문에 ‘고(高) 에너지’ 상태가 된다. 이 때에 나타난 변화가 공간의 팽창과 빛의 생성이다. 공간에서의 밝은 부분은 인간 원신의 혼이 이루는 부분이고, 공간에서의 어두운 부분은 그 밖의 공간이다.
이렇게 해서 공간은 원신체와 물질체와 궁창, 이 세 부분으로 나뉘어진다. 이 원신체 중에서 인간 원신이 일반적 원신과 분리된 것이 형상화된 인간이며 나머지 일반적인 원신체는 혼의 상태로서 일정한 공간에 거주하게 된다. 물질체들은 무정(無情)으로서 흙과 물, 불과 공기가 되는 것들이 있는가 하면 하나의 별이 되는 것도 있다.
별들이 물질 공간에 생겨나면서 물질공간 자체는 지금까지 없었던 새로운 힘의 영향권 안에 들게 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인력(引力)’이다. 이 인력으로 인해 모든 생명들은 인력의 영향을 받게 되는데 여기서 생긴 것이 바로 자기 보호 본능이다. 외부인력에 저항하고자 하는 노력으로 인해 분리체의 형상이 고체화되는데 이 저항성이 뼈와 살, 피와 골수, 힘줄과 신경조직, 경락과 오장육부가 만들어지는데 영향을 입힌다.
하지만 이 육체는 원신 인간의 육체이지 결코 지금의 인간 육체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인간 원신은 물질을 양분으로 섭취하는 것이 아니라 고요에서 생성된 에너지만으로 충분하게 활동하게 된다.
인력이 증가하면서 원신들은 높아진 공간 진동을 견디지 못해서 각자 적절한 장소로 나뉘어게 된다. 이 원신들이 자기 고유 진동수에 맞는 별들을 찾아 살게 된다. (즉 지구 이외에도 원신 인간들이 있다는 뜻) 그 중의 한 종류가 바로 지구로 이주해온 원신이다. 지구로 온 원신은 지구의 중력과 기업에 맞는 신체구조를 지니게 된다.
대기 중의 산소는 인간 원신들로 하여금 육체적 틀을 보존시키는데 있어 결정적인 장애가 된다. 그래서 이 때부터 지구에 온 인간 원신들은 물질체에 있는 양분을 섭취함으로써 산소가 가지는 산화성을 극복하고 그 스스로의 육체를 생장시켰다. 위장에 있는 소화액도 산소와 결합하기 위한 조건을 갖추기 위함이다.
오장(심장, 간, 신장, 폐, 비장) 육부(대장, 소장, 위장, 방광, 담, 삼초)에서 오부는 물질 양분을 섭취하는 기관이라면 오장은 의식 활동에 필요한 에너지를 공급하기 위한 내분비 활동을 제공한다. 오장에 저장되지 못하는 양분들은 뼈로 향하여 뼛속에 저장되는데, 이때의 인간 원신을 이루는 인체 내에서 유일하게 비어있는 공간이 뼈 속이기 때문이다. 이 뼈 속의 양분이 생명력을 만나게 되면 정(精)이 생긴다. 이 정 속에는 인간 원신이 물질을 양분으로 섭취하기 시작한 이후의 습성이 그대로 기록된다. 이 정이 나타나는 고유 진동수는 본래의 고유 진동수와 달라서 한 몸을 이루고 있으면서도 육신과는 서로 이질화된 상태가 된다. 그래서 인간 원신은 스스로 이질화되는 있는 ‘정’을 분리시키고자 한다.
이것은 오욕칠정(五慾七情)이다. 이 정을 물질체와의 접촉에서 그 욕구를 채우려 한다. 그 대상이 바로 물질체의 여자다. 물질체와 원신체는 서로 다른 극성으로 인해 정과 정이 합쳐지는데 이것이 포태를 이룬다. 음정과 양정이 합쳐져서 포태로 수정되면 외부에서 영혼이 들어와서 수정란에 깃든다. 물질체의 정은 정 자체가 고요함을 함유하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외부로부터 영혼을 받아들여야만 생명성을 갖게 되고, 원신체의 정은 자체 내에 고요함(적정성 寂靜性)을 갖고 있기 때문에 외부에서 영혼을 받아들이지 않고도 생명성을 가질 수 있다.
포태를 통해 태어난 인간 원신의 자손들은 이 때부터 생로병사의 네 가지 고통을 받게 된다. 원신체와 물질체의 결합으로 태어난 인간 자손은 아버지의 원신에서 분리된 양정 자체가 영혼이 되고 어머니의 음정(陰精)은 육체를 이루는 바탕이 된다. 이것인 신인류다.(창세기 6:3) 어머니의 자궁 속에서 아기는 자신만의 고유 진동수와 거의 일치된 진동수를 갖는 날에 태어나게 된다. 따라서 음양오행의 역학에서 보면 사람이 태어나는 날과 달, 년과 시를 알면 그 사람의 성품을 알게 된다. 인간이 살면서 정기적으로 육체와 영혼과 진동수를 일치시켜 주는 것이 필요한데 이 일을 위하여 물질체에 생긴 습성이 바로 잠이다.
사람이 죽게 되면 영혼과 육체는 분리된다. 일단 죽게 되면 중음(中陰)의 기간을 맞이하게 된다. 49일 동안이다. 중음 기간을 원만하게 보내는 것은 망자의 몸에 의해 좌우된다. 영이란 두뇌에 있으면서 6가지 신체의 의식을 통제하는 근원적 의식이었다. 그러다가 죽음이 임하면 머리에서 심장 쪽으로 이동한다. 혼이란 살아 생전에 오장에 흩어져 거하면서 생명이 가지는 의식 중 감정이 발현되는 근본이었다. 에너지를 저장해서 공급하여 안, 이, 비, 설, 신, 의가 활동할 수 있게 해주었다. 그러다가 죽음이 임박해서는 각각의 장기가 갖고 있는 혼이 거두어져서 심장에 합쳐졌다가 머리 쪽으로 이동하여 정수리를 통해서 빠져나간다.
병으로 죽을 때와 사고로 죽을 때와 수명을 다 해서 죽을 때가 중음 기간을 통과하는 절차가 다 다르다. 즉 영과 혼이 원만하게 전이되지 못하고 사고사일 경우에는 사고 난 상처부위를 통해서 급하게 빠져나가기에 정상적으로 정수리를 통해서 빠져 나가지 못하게 된다. 뿐만 아니라 성품이 원만하지 못하고 악업이 많은 사람의 영혼의 전이도 원만히 이루어지지 못한다. 죽을 때 큰 고통을 느끼게 된다. 그렇게 되면 중음기간 동안 다른 영혼의 침해를 받을 수 있다.
중음의 기간이 49일부터 길어져 연장되면 중음신(中陰神)이 된다. 죽음의 세계는 유계(幽界)와 영계(靈界)와 신계(神界)로 이루어져 있다. 유계는 죽음에 적응 못한 생명들이 사는 세계이고, 영계는 죽음에는 적응했으나 임의로운 활동성을 갖지 못한 생명들이 사는 세계며, 신계는 죽음에 완전히 적응해 그 활동이 자유로운 생명들이 사는 세계다.
일반적으로 망자가 유계에 들어가면 거기서 30년을 보내게 되고, 영계에 들어가면 120년을 보내게 되면 신계에 들어가면 600년 내지는 800년을 보내게 된다.
영혼이 세분화된 인간 원신의 아들들은 하나의 영혼이 수많은 사람들의 물질체가 되어 태어나기도 하고 하나의 영혼이 수많은 동물이나 식물이 되어 태어나기도 한다. 이것이 윤회다. 그런데 윤회가 주는 죽음에 대한 공포가 그들의 자각을 일깨우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즉 윤회를 거듭하면서 새로운 삶의 방식을 터득하는데 이는 곧 처음의 고요(寂靜)을 다시 찾게 만들어주는 것이다.
육체를 갖고 살던 생명이 자기 내면에 적정(고요)을 갖추지 못하면 6도(六度)에 해당되는 범주 안에 놓이게 되는데 그 육도란 바로 천상계, 인간계, 지옥계, 축생계, 아귀계, 아수라계의 여섯 세계를 말한다. 이 여섯 세계의 활동은 곧 지구의 물리적 환경을 변화시키게 된다. 육도윤회계 중 영혼이 스스로 활동할 수 있는 에너지를 얻을 수 없는 아귀계나 아수라계나 축생계에 있는 생명들은 다른 외부 세계의 진동수를 급격하게 높여주어서 결국 지구는 대환란을 맞이하게 된다. 이런 상황 속에서 별의 표면에서 이주해왔던 원신체들은 다시 지구를 떠나 버리고 지구에는 인간 원신의 아들들과 물질체만이 남게 되는데 이것들은 거의 다 죽게 된다.
생명이 물질적 한계를 벗어나 새로운 생명으로 진화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윤회의 과정을 통과해야 한다. 이것은 생명 자체가 갖고 있는 고유 진동수로 인한 육체의 한계성 때문이다. 육체를 갖고 있는 상태에서 진보된 의식을 갖게 된 생명은 다시 영혼으로 돌아가서 그와 같은 원신적 구조를 갖고 있는 생명을 만나 새로운 육체를 갖게 됨으로써 물질적 진화의 한계를 극복하고 끝없는 진화의 길을 가게 된다.
C. 우주론에 입각한 구원론
불교의 핵심은 마하반야바라밀다에 있다. ‘마하’라는 것은 절대적 존재를 말하고, ‘반야’라는 것은 지혜를 말하고, ‘바라밀다’라는 것은 극락의 세계로 건너감을 말한다. 바로 이것을 실행하는 종교이다.
불교의 지혜인 반야를 요약한 경전이 반야경이다. 이 반야경의 첫머리에 ‘관자재’가 나온다. 그 다음에 나오는 단어가 ‘보살’이다. ‘관’이란 본다는 말이고 ‘자재’는 ‘스스로 있는 신’이라는 말한다. 그 뒤에 ‘보살’이라는 말을 붙이면 이렇게 된다. 즉 스스로 있는 신이 세상을 나타난 것이 보살인데, 그 보살은 깊은 반야바라밀다를 수행하는 것이 바로 불교의 진수이다.
즉 절대적인 신적 세계가 인간을 통해서, 그리고 인간 안에서 구현되는 것이 극락의 세계라는 말이다. 여기에서 신과 인간은 하나가 된다.
부처는 이 보살의 원형이며 부처를 뒤따르는 제자들이나 중생들도 깨달음을 통해 다 부처처럼 보살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부처는 깨달음을 추구하되 자신의 해탈이나 유익만을 구하지 않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이웃을 이롭게 하는 이른바 자리이타(自利利他)의 삶을 추구하는 자가 보살이다. 보살은 만인을 하나같이 여기며 사랑하는 동체대비심(同體大悲心)을 가지고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며 사는 사람이다.
불교에서는 누구든지 마음을 일으켜 작심을 하면 곧 보살이 될 수 있다고 가르친다. 순수한 마음을 먹고 곧바로 수행 정진에 힘쓸 때 누구든지 보살이 된다는 것이다. 다만 자리이타(自利利他)의 삶을 살되, 이타적 삶을 산다고 주장하거나 자랑하지 않을 때 진정 보살이 되는 것이다. 석가는 최초로 깨달은 부처가 되어, 바로 이러한 보살의 삶을 살았던 것이다.
보살이 바라밀다를 가능케 하는 수행에는 6가지가 있다.
1. 보시(布施)
보시는 베푸는 것이다. 베풀되 보상이나 성과를 바라지 않는 것이다.
2. 지계(持戒)
계명을 유지하는 것, 계명을 지킨다는 것이다. ‘계’라고 하며는 경계를 뜻한다. 넘지 말아야 될 선을 뜻한다. 삶에는 경계를 소홀히 하지 말아야 될 부분이 많이 있다. 말과 뜻과 행동에 있어서 언제 어디서는 경계를 게을리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불교에서는 탐, 진 ,치 즉, 욕심과 분노와 어리석의 세 가지 독성으로 인하여 몸과 입과 의지의 행위로 죄를 지어 윤회의 속박에서 벗어나지 못한다고 한다. 바로 이렇게 되지 않기를 경계하라는 말이다.
3. 인욕(忍辱)
인내를 말한다. 욕을 먹어도 참아야 한다는 것이다. 총애를 받거나 욕을 먹거나 해도 시종 그럴 수도 있겠지 하는 태도를 취하라는 것이다.
4. 정진(精進)
게으르지 말고 꾸준히 수행을 계속해 나가라는 뜻이다. 죽는 날까지 계속하라는 것이다. 작심삼일이 되어서는 안 된다. 목표를 향하여 나아가되 유혹에 굴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5. 선정(禪定)
마을 고요히 하여 수행하는 것을 말한다. 번뇌와 염려, 그리고 산란한 마음을 떠나 고요한 마음을 유지하여 참된 이치를 구하라는 말이다. 여기에는 묵상과 명상과 기도의 방법이 있다.
6. 지혜(知慧)
일체 모든 것의 실상을 통찰하는 것을 말한다. 상대적 세계의 분별지(分別智)를 넘어서 평등하고 무분별한 지식에 이르는 것이다. 이것은 무분별한 생각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차별을 두지 않는 평등으로 바라보는 지식이다. 무집착의 지혜이니 비움의 완성이다. 이 비움에 극락의 세계가 가득 차게 된다는 것이다.
D 결론
죽음이 없는 하나님의 일은 없다. 모든 일을 반드시 죽음을 통해서 일하신다. 그것은 하나님마저 죽으셨기 때문이다. 하나님마저 죽은 그 현실 바탕 위에서 당연히 인간도 죽음 안에서 논의된다. 죽어야 될 이유, 죽어야 될 목적, 죽는 방법, 죽는 환경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죽음’이라는 근거 위에서 밝혀진다. 그런데 성령을 받지 못한 자들은 이런 사정을 모른다. 그들이 신봉하는 하나님은 ‘죽으신 하나님’이 아니라 ‘죽은 적이 없는 하나님’이다. 즉 죽음을 피해서 신과 교류하고 싶어 한다. 그것은 신을 찾지만 실은 본인들이 신임을 확인하는 절차일 뿐이다. 숨을 내 쉴 때마다 들리는 소리는 “내가 곧 하나님이다, 내가 곧 하나님이다”이며 인간들이 힘차게 공기를 가르며 활기차게 온몸을 움직일 때 나오는 소리도 “내가 곧 하나님이다, 내가 곧 하나님이다” 사람의 잠꼬대의 소리도 해석하면 “내가 곧 하나님이다”로 모아진다. 인간의 맨 살을 콕 쑤시면 튀어나오는 짧은 비명소리 속에도 “내가 곧 하나님이다”가 섞여 나온다. 하늘이 신이 허락한 여분의 신의 자리를 지상에서 자신들이 차지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과학, 가정, 종교 등 각종 문명의 영토마다 우렁찬 주장들이 들려온다. “지상에서는 우리가 하나님이다! 진리란 우리의 행복을 말한다.”
출애굽 당시, 양의 피로 인하여 살 자와 죽을 자가 갈라졌다. 유월절은 단순한 종교 축제가 아니었다. 실제로 전쟁이었다. 살아남은 자는 하나님과 인간과의 전쟁에 동원된 실제 군대였다. “사백삼십 년이 마치는 그 날에 여호와의 군대가 다 애굽 땅에서 나왔은즉”(출 7:4/12:41) 성도는 싸움꾼이다. 도나 닦고 있는 자가 아니다. 군인이다. 싸울 명분이 엄연히 있다. ‘피의 전쟁’이다. 거룩한 피의 효력이 실제냐 아니면 더러운 피의 효력이 실제냐를 놓고 벌리는 전쟁이다. 이 싸움판에 끼지 못한 자는 불행한 자다. 그들 눈에는 자아의 적수 이외에는 ‘하나님의 원수’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적수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세상 중심과의 관계가 끊어진 상태임을 나타낸다. 즉 사느냐 죽느냐 라는 결정은 인간 본인이 내리는 것이 아니다. 피의 전쟁의 참전하면서 예수님과의 관련성을 가질 때만 ‘산 자’라고 할 수 있다. 이 ‘산 자’만이 자신이 치른 전쟁에 대해서 이야기할 수 있다. 전쟁에서는 죽느냐 사느냐만 관권이다. 직업이나 재산이나 직위 같은 것은 소용없다. 출애굽에서 하나님의 군대의 특징인 집마다 피를 발랐다. 그리고 그 피에 사활을 걸었다. 자신들의 피가 아니다. 하나님의 적을 의식해서 바른 흠없는 어린양의 피다. 피를 바른 자들만 살았고, 피가 없는 자는 예외 없이 죽었다. 심지어 바로 궁 감옥에 있던 죄수들의 맏아들도 난데없이 죽어야 했다.(출 12:29) 그들은 진정한 죽음이 무엇인지를 알려주기 위해 이스라엘 앞에서 죽어야만 했던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다른 전쟁, 다른 현실은 없다. 모든 게 피 중심의 전쟁 때문이다. “언약의 피로 죽은 자 가운데서 이끌어 내신 평강의 하나님이”(히 13:20)
언약의 피를 아는가? 유일한 현실이다.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눅 21:33)
우리교회(IP:220.♡.176.150)
08-12-28 17:30
강의 녹취록 a
대구081125불교의우주론과구원론
08 대구강의 16 - 불교의 우주론과 구원론
* 참고서적 : 觀(관), 구선 지음, 봉성기획(서울:1999)
08,11,25 강의 이근호, 정리 구득영
◈ '觀' - 이것은 어디에 쓰는 물건인고 ??
오늘은 구선 스님이 지은 '觀(관)' 이라는 책을 중심으로 '불교의 우주론과 구원론'에 대해서 살펴보겠는데, 그 책에는 불교에 나오는 모든 경전은 물론이고, 거기에 첨부해서 '천부경(天符經)' 이라는 것이 있는데, 소위 단군의 후손이라는 자들이 우주에 대해서 설명한 책인데, 즉 '천(天)'에 대한 부경(符經)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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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부경 [天符經] - 대종교(大倧敎)의 기본경전. 그들의 설명에 의하면 한배하느님께서 환웅을 통해 백두천산에 내려와 천하만민에게 직접 가르친 것으로서, 환웅이 사람을 널리 이롭게 하려고 천부인 세 개를 가지고 와서 교화할 때, 우주창조의 이치를 풀이한 81자로 된 참결(환웅이 직접 내린 말)이다. 현재 것은 묘향산에서 10년간 수도한 계연수(桂延壽)가 1916년에 암벽에 새겨진 내용을 발견하여 대종교에 전하였다고 하는데, 위작여부에 대한 논란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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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종교 [大倧敎] - 단군숭배 사상을 기초로 하여, 민속 신앙으로서 조화신(造化神)인 환인(桓因), 교화신(敎化神)인 환웅(桓雄), 치화신(治化神)인 환검(桓儉)의 삼위일체인 '한얼님'을 신앙적 대상으로 삼는 우리나라 고유의 민족 종교. 1909년에 대종사(大倧師) 나철이 처음으로 열었는데, 성(性)·명(命)·정(精)의 삼진귀일과 지(止)·조(調)·금(禁)의 삼법(三法)을 근본 교리로 하며, 삼일신고·천부경 따위를 경전으로 한다. ≒한검교·환검교 - 두산백과, 네이버 국어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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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이 책에는 성경내용도 나오는데, 창세기 6장 4절의 내용이 말이다.
(창 6:4) 당시에 땅에 네피림이 있었고 그 후에도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을 취하여 자식을 낳았으니 그들이 용사라 고대에 유명한 사람이었더라
여기에 대비되는 개념이 나오는데, '하나님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이 나온다는 것이다. 그들이 낳은 자식이 '네피림' 인데, 그들이 당대의 용사이고, 유명한 사람이라는 말이다. 알다시피 그들은 자이언츠, 즉 '거인족' 인데, 물론 우리가 보기에는 그들이 거인이니 정상이 아니지만, 그러나 네피림의 입장에서는 우리가 작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거인족의 시조가 수상하다는 말이다. 기존의 아담의 계보가 아닌, 뭔가 난데없이 불쑥 침투했다는 것이다. 즉 사람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이 이어지다가 갑자기 사람들의 아들들과 상반되는 개념인 하나님의 아들들이 개입했다는 말이다.
◈ 아니, 웬 자이언츠 ??
아무튼 그렇게 하나님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이 결혼을 해서, 표현이 조금 그렇기는 하지만, 일종의 불량품이라고 할까, 아니면 괴상하다고 할까, 그런 거인족이 생겨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거인족이 태어난 뒤에 이 세상이 어떻게 되었는가? 죄악이 그만 관영하게 되었다는 말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여기에 그릇이 이렇게 있다면, 죄가 부글부글 끓어서 그 그릇을 그만 철철 넘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아담의 후손 가운데 약속에 준해서 '노아' 라는 사람을 출생시키고, 노아와 7식구를 빼놓고 나머지는 다 몰살시키기로 하셨다는 말이다.
바로 그것을 최초의 언약이라고 하는데, 즉 '노아언약' 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언약의 구조가 무엇인고 하니, 빼돌릴 사람은 미리 정해놓고 나머지는 모두 다 작살이라는 말이다. 즉 하나님께서는 일을 아주 깔끔하게 빈틈이 없이 처리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니 언약이라는 것은 도저히 믿고 싶어도 믿지 못할 내용을 담고 있다는 것이다. 노아의 경우처럼, 사람들이 어떻게 그런 엄청난 홍수를 사람들이 상상이라도 했겠느냐는 말이다. 그래서 아무도 노아가 만든 방주에 들어가지 않았다는 것이다. 오히려 노아를 실성한 영감으로 생각했지 말이다.
(창 6:5)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창 6:6)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창 6:7) 가라사대 나의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사람으로부터 육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 하시니라
(창 6:8)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 '내가 믿는다' 라는 의미는?
지난 시간에 이런 이야기를 했는데, 사람이 믿는다는 것은 과거에 축적된 자기의 지식에 부합될 때 믿어지는데, 과거의 자기 경험과 체험에 의해서 말이다. "아하, 내가 과거에 그런 것을 여러 번 경험을 했지. 그렇다면 믿어야지"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것도 일종의 과학인데, 인간은 그렇게 자기가 동일하게 반복해서 경험한 것만 골라서 믿는다는 말이다.
예를 들어서, 우리가 택시를 하나 타게 되더라도, 시간이 촉박해서 목적지까지 빠르게 갈려고 하면 좀 낡았어도 젊은 기사가 모는 택시가 있으면 타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빠른 신속성보다는 보다 안전하고 편안하게 가고 싶으면 어떻게 하는가? 나이가 느긋한 기사가 모는 개인택시나, 또한 돈이 많다고 하면 모범택시를 타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택시를 골라서 타는 것은, "나는 저 기사를 믿습니다" 라는 것인데, 그것은 그냥 믿는 것이 아니라, 과거에 자기의 경험에 의해서 형성되고 축적된 것이 있기에 그렇게 된다는 것이다. 또한 그렇게 해야 사회의 질서가 유지가 되고 말이다.
◈ 헤겔 - 질서는, 신뢰와 신뢰의 만남 !!
헤겔에 의하면, '질서' 라는 것은 신뢰와 신뢰의 만남인데, 만나는 상대방마다 과거를 일일이 추적을 할 수는 없으니 말이다. 그것은 결혼을 해도 마찬가지인데, 물론 결혼을 하기 전에 미리 알아볼 것은 다 알아보는데, 그 사람의 집안이나 사람됨됨이, 건강상태, 또한 직장은 어떠한지 말이다. 또 집안에 어떤 특이사항은 없는지 말이다.
◈ 왜 부부들이 이혼을 하는가?
그렇게 자기 나름대로 다 살펴보는데, 그런데 왜 그렇게 이혼을 하는 부부들이 많은가? 그들은 그런 것을 전혀 살펴보지 않고 그냥 서로 좋아하고 사랑하는 감정만으로 결혼했는가?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면 왜 헤어지는가? 물론 말은 서로 성격이 맞지 않아서 헤어진다고 하는데, 그 내부에는 돈 문제가 자리잡고 있다는 것이다. 자본주의사회에서는 말이다.
아무튼 가정에서도 신뢰가 있어야 하는데, 이것이 헤겔의 유명한 '상호인정' 이라는 것인데. 전에 다 공부를 한 것인데, 기억이 좀 납니까? 그렇게 서로서로 인정을 해준다는 것이다. 만약 서로가 인정을 해주지 못하면 결국 이혼을 할 수밖에 없고 말이다.
교인과 목사 사이에도 어느 정도 신뢰가 있어야 하는데, 여기서 '신뢰' 라고 하는 것은 물론 철저히 알아보고 믿을 만해서 하는 것도 있지만, 사실은 어느 정도 첫 인상이 좌우한다는 것이다. "교인들이 좋다고 하는데, 어떻게 하겠노?" 라고 하면서 말이다. 그러니 아무리 한다고 해도 자기가 만나는 상대방을 철저히 추적하지 못하는데, 설령 했다고 해도 불완전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 구선 스님, 인간 전체를 추적하다 ??
그런데 오늘 우리가 살펴볼 이 책의 내용은 어떠한고 하니, 인간 전체를 모두 한번 추적을 해보자는 말이다. 그러니 보통 어려운 책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추적을 해도 '언약'은 인간은 전혀 보지도 듣지도 못한 것인데, 사람들의 상호인정 가운데도 전혀 포함되지 않는 내용이라는 말이다.
◈ 그야말로 생뚱맞은 복음 !!
그러므로 지금 우리가 믿는 기독교의 복음이라는 것이 그 얼마나 생뚱맞은 것인지, "인간이 어떻게 구원을 받습니까?" 라고 질문을 한다면, "십자가의 혜택으로서 구원을 받습니다" 라고 하는데, 하지만 이것을 책상 앞에 앉아서 밤새도록 한번 생각을 해보라는 것이다. 도저히 편안하게 잠이나 잘 문제가 아니라는 말이다.
왜냐하면, "내가 어떻게 구원을 받는가?" 라는 것은 "내가 어떤 행동을 일으켜서 나에게 구원을 따내는가?" 라는 의미인데, 그것이 보통 우리의 상식이라는 말이다. 그러나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복음은 무엇인가? 전혀 그런 것이 아니라, 오직 십자가의 능력으로, 즉 십자가의 혜택을 입어서 구원을 받는다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니가 니 자신에게 무엇을 하려고 하지 말라" 라는 것인데, 즉 "니가 니 자신을 정리정돈하지 말라" 라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오직 십자가의 혜택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말이다. 어떻게 정신이 '뿅' 하고 들지 않나요? 신학교에 간다고 알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물론 목회를 30년을 한다고 알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말이다.
이것이 너무나도 엉뚱해서, 그래서 사도바울은 이것을 뭐라고 했는가? '비밀' 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제가 그러한 비밀의 예를 하나 들어보겠는데, 이것이 어느 정도로 비밀스럽고 엉뚱한 것인지 한번 살펴보자는 말이다.
◈ 저는 휴지(?) 덕분에 삽니다 !!
누군가가 "목사님은 하루에 몇 끼를 먹나요?" 라고 질문을 했다면, 그런데 제가 뭐라고 답변을 했는고 하니, "저는 휴지 덕분에 삽니다" 라고 했다면, 그게 얼마나 말도 안 되는 대답이냐는 말이다. 자기는 그 목사가 하루에 숟가락과 젓가락을 들고 얼마나 먹는지, 고기는 얼마나 먹고, 밥은 얼마나 먹는지, 그것이 그것이 궁금해서 질문을 했는데, 그런데 그 목사는 턱도 아니게 휴지를 들먹인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되면 그 사람이 흥분을 하게 되는데, 왜 그런고 하니, 자기는 먹고살기 위해서 그렇게 설치고 돌아다녔는데, 그렇게 해서 겨우 하루에 세끼를 먹으면서 사는데 말이다. 그런데 이 목사라는 인간은 전혀 말도 안 되는 엉뚱한 소리만 한다는 것이다. "저는 휴지 혜택으로 삽니다" 라고 말이다.
다시 말해서, 자기가 그동안 먹고살기 위해서, 또한 구원을 받기 위해서 밤낮을 가리지 않고 열심히 노력하고 살았던 그 모든 것들이 어떻게 되는가? 그런 것이 모두가 다 헛된 짓이 될 가능성이 있다는 것에 대해서 엄청난 충격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목사의 그러한 황당한 대답으로 인해서 말이다. 지금 제가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겠지요?
◈ 예수님, '내' 살과 피가 아니면 영생은 없다 !!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새언약의 복음은 무엇인고 하니까, 요한복음 6장에서 예수님은 "내 살과 피를 먹고 마시지 않으면 영생은 없다" 라는 했다는 것이다. 물론 상호인정이 있어서 그 동안 앉아있는데, 그런데 예수님의 이러한 말씀에 대해서 사람들은 그냥 떠나버렸다는 것이다. "예수님, 안녕히 계셔요" 라고 하고는 말이다. 얼마나 신뢰가 없었으면 그렇게 했겠느냐는 말이다.
(요 6:5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요 6:54)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요 6:55)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그런데 이것이 사도바울에게는 어떻게 표현이 되는고 하니, "십자가에게서 나오는 능력으로 구원을 받는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십자가에서 스믈스믈(?) 나오는 그러한 능력으로 말이다. 이것을 예수님께서는 "내 살과 피를 먹고 마시지 않으면 영생은 없다" 라고 하고 말이다.
◈ 신학이여, 철학이여, 안녕 !!
이렇게 되면 예수님과 사도바울에게 공통점이 있는데, 그것은 "내가 어떻게 다가서는가?" 라는 것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인간 쪽에서 그 무슨 짓을 해도 말이다. 교회당을 12개를 짓고, 아무리 전도를 고구마로(?) 하고, 또 목사가 되어서 자기 한 평생을 바쳐도, 그런 것은 구원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신학이여, 철학이여 안녕!" 이라고 할 수도 있고 말이다.
그런데 이러한 "십자가에게서 나오는 혜택으로 구원을 받습니다" 라는 것을 믿지 못할 경우에 어떤 질문들이 쏟아지겠는가? 마치 스팸메일처럼 말이다. "목사님, 그러면 교회에 다니지 말까요", "전도를 하지 말까요?", "봉사도 이제 하지 말까요" 등등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나는 당신의 말을 믿지 못하겠습니다" 라고 할 수 있다는 말이다.
◈ 야, 아무 것도 안 해도 되네 !!
그런데 그렇지 않고 만약에 십자가에게서 나오는 혜택으로 구원받는 것이 믿어지게 되면, 그야말로 감격과 기쁨이 쏟아지는데, 그래서 정신을 차리지 못한다는 것이다. 즉 "야, 기분이 째지네" 라고 하게 되는데, 정말로 기분이 좋다는 것이다. 자기가 무엇을 하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는 이 세상에서, 전혀 아무 것도 안 해도 되니 말이다.
그러므로 아까 이야기한 "저는 휴지 덕분으로 살아갑니다" 라고 했을 때에, 그것은 "밥을 먹을까요? 먹지 말까요?" 라는 차원이 아니라, "아하, 이미 나는 살았구나" 라는 고백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성도에게는 당연히 그러한 고백이 나와야 한다는 것이다.
◈ 그러면 네피림의 출현을 어떻게?
다시 창세기로 돌아가서, 네피림 시대 이후에 하나님께서는 노아식구만을 건지기 위해서 노아만 알아듣는 언약을 주셨는데, 그것이 곧 '방주언약(?)' 이고 말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이런 괴상한 거인족, 즉 하나님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이 결혼해서 낳은 네피림의 출현을 도대체 어떻게 이해해야 하겠는가? 그것은 바로 노아방주, 즉 노아 식구들만 구원을 받았다는 것에 대해서 거꾸로 소급해서 해석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 세상에 제 아무리 거인족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이 아무리 설쳐도 하나님께서 보는 관점은 오직 언약의 관점으로 본다는 말이다. "너희들이 얼마나 힘이 세고, 얼마나 영웅들인가?" 라는 것이 아니고 말이다. 즉 짧은 시간에 얼마나 실적을 많이 남기는지, 하나님께서는 그런 것으로는 일체 보지를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보는 관점은 언약 관점인데, 즉 방주언약의 "구원은 방주에 있다" 라는 것은, "오직 십자가의 혜택이다" 라는 말이고, 그리고 "예수님의 살과 피가 아니면 안 된다" 라는 것인데, 이것들이 모두가 같은 의미라는 말이다. 왜냐하면, 모두가 다 언약이니 말이다. 즉 하나님의 언약은, 인간들이 자기 체험이나 경험을 모으고 상호인정을 해서 얻어지고 믿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 언약과 믿음이 한 세트로 !!
그렇게 되려면 언약과 더불어서 무엇이 와야만 하는고 하니까, 그 언약을 믿을 수 있는 믿음도 함께 세팅이 되어서 들어와야 한다는 말이다. 그러면 구원이 자기 밖에서 일어난다는 사실을 깨닫고 믿어지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비로소 자기가 스스로 살아가야만 한다는 부담감과 무거운 짐에서 해방이 되는데, 그야말로 만세를 부른다는 말이다. '비바' 라고 말이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공부하려고 하는 것은 어떤 내용인고 하니, 사실 창세기에 그런 네피림이 분명히 기록이 되어있으니 무시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우리가 그들에 대해서 해석을 그렇게 하자는 말이지, 결코 그들이 없다고 해버리면 안 된다는 말이다.
◈ 그러면, 그들은 무엇을 믿는가?
이게 무슨 말인고 하니, 이 세상 사람들은 왜 복음을 믿지 않는고 하니, 사실은 모두들 믿는 구석이 따로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들이 믿는 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오늘 우리가 공부하게 될 이런 구선스님의 글과 같은 것들을 이 세상 사람들은 믿는다는 말이다. 그래서 '불교의 우주론과 구원론'을 어려워도 한번 공부해보려고 한다는 것이다.
물론 세상 사람들은 이러한 복음을 전혀 모르지만, 그러나 복음을 아는 사람들은 복음도 알고 또한 이 세상도 안다는 것이다. 장기에서 '양수겸장(兩手兼將)' 이라고(?), 그렇게 양쪽을 모두 다 안다는 말이다. 복음을 아는 사람들이 그게 유리하다면 유리한 점인데, 즉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전백승이다" 라고 하듯이 말이다.
그런데 그냥 몰라도 된다고 해버리면,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그들이 주장한 것을 따라가면서도, 그것을 마치 복음적이라고 주장할 수가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것들을 공부하게 되면, "아하, 그래서 정말로 십자가뿐이구나" 라고 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것을 무시하고 등한시하다가 막상 자기가 가지고 있는 십자가를 깨어보면, 그 안에 이러한 불교정신이 가득히 들어있음을 발견하고는 기겁을 하게 된다는 말이다.
◈ 기존교회의 십자가는, 불교정신의 발현 !!
기존교회에서 아무리 십자가를 외쳐도 그것은 불교정신의 발현 외에는 아무 것도 아닌데, 물론 그들은 말하기를 "우리는 불교를 모른다" 라고 하지만 말이다. 하지만 그것이 말이 안 되는 것이, 몰라서 될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마치 병이 들었으면 무슨 병인지 알아야 하듯이 말이다. 즉 복음이 아닌데도 자꾸만 복음이라고 우긴다는 것이다.
그래서 복음이 무엇인지, 그 십자가의 혜택을 이야기하면 그들이 뭐라고 하는가? 자기들은 이미 그런 십자가는 다 안다는 것이다. 그래서 문제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라는 것이라고 하면서, 자꾸만 엉뚱한 이야기를 한다는 말이다. 즉 "숟가락을 어떻게 하고, 또 젓가락은 어떻게 사용하는지 알아야 밥을 먹지" 라고 하면서 말아다.
◈ 오늘 결론은, 자기 방어, 자기 옹호 !!
오늘 우리가 공부하려는 '불교의 우주론과 구원론'은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사람의 모든 행동은 '자기 방어' 인데, 혹은 '자기 옹호' 라는 것이다. 그러니 자기를 둘러싼 우주론, 구원론, 혹은 생명론, 이런 모든 것들이 어떤 식으로 논리가 전개되는고 하니, "나는 영원히 나이어야 한다" 라는 것을 정당화시키기 위해서 펼쳐지는 논리들이라는 말이다.
제가 이렇게 미리 결론을 말씀드렸으니, 오늘 이 어려운 공부를 같이 하면서 무엇을 알아야 하는고 하니까, "아하, 인간은 저런 식으로도 자기의 가치와 자기의 존재 의미를 방어하려고 애를 쓰는구나. 그것 참 인간들이 유별나네. 나는 십자가의 혜택으로 구원받는 것을 믿는데, 저 인간들은 자기 방어책을 믿고, 자기 옹호책을 믿는구나" 라고 말이다.
◈ 나는 나다 ??
그래서 그들은 죽으라고 그것만 붙들고 있는데, 즉 "나는 나다" 라고 말이다. 그런데 이 "나는 나다" 라는 것이 어디서 많이 듣던 말이 아닌가? 출애굽기 3장에 나오는데, 하나님께서 자기를 소개할(?) 때 그렇게 하셨는데, 즉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다" 라고 말이다. 그러니 그것은 하나님께서 하실 이야기이지, 인간의 입에 오르내릴 내용이 전혀 아니라는 것이다.
(출 3:14)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 바로 당신이 신인데, 누구를 믿는단 말인가?
그런데 인간은 선악과를 따먹고 나서, 그때부터는 신처럼 행동을 하도록 악마가 계속해서 부추긴다는 말이다. 즉 "너는 신이야. 니가 신인데 누구를 믿는단 말인가? 예수가 진리라는 것이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 니가 곧 길이고, 생명이고, 진리이야" 라는 것인데, 그런데 그것이 악마의 음성일 뿐만 아니라, 구선 스님이 쓴 책의 핵심이라는 말이다.
소위 신학에 나름대로 일가견이 있다는 신학자들의 책을 읽고 결론을 내어보면, 자기가 길이고 진리이고 생명이라는 것이다. 즉 자기가 바로 신이란 말이다. "성경에도 예수님이 자기를 신이라고 했는데, 그러니 내가 내를 보고 신이라고 하는데 뭐가 문제인가?"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들에게는 끝이 있는데, 물론 그들은 끝은 하나님만이 아신다고 하면서 겉으로는 겸손을 떨지만 말이다.
◈ 인간은, 무한의 자기 노선에서 벗어나지를 않아 !!
그것이 수학에서 나오는데, 수학에서는 무한이 무엇이냐는 것은 몰라도, 왜 'π'가 3.14 어쩌구 하면서 계속해서 나가는데, 그렇게 무한대로 나가는데 그러니 끝이 없다는 것이다. 마치 평행선이 끝이 없듯이 말이다. 하지만 숫자 하나하나가 쌓여서 무한으로 가고 있는데, 절대로 무한의 자기 노선에서 벗어나지를 않는다는 말이다.
◈ 신학자들에게 예수는 일종의 위장술 !!
그것이 바로 신학자들, 즉 불신자들의 특징인데, 무슨 말인고 하니, 반드시 자기로부터 출발을 해서 자기로 말미암아서 신께로 간다는 것인데, 그러나 그렇게 자기로부터 출발해서 자기로 말미암아 가게 되면, 계속해서 그 자리에 서 있다는 것이다. 10년이 지나든지, 100년이 지나든지 말이다. 그러니 결국은 자기에게로 돌아온다는 것이다.
물론 예수는 구색을 갖추는 것에 불과하고, 일종의 위장술인데, 그러므로 신학자들은 예수에 관해서 이야기는 하지만, 결코 예수를 믿지는 않는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믿는 것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은 예수님이다" 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은 바로 나다" 라는 것을 믿어서 의심치 않기에 말이다.
바로 그것을 구선 스님은 불교의 거대한 경전과 양자역학을 비롯한 첨단 물리학과, 성경과 천부경과 음양오행설을 비롯한 동양철학을 종합해서, 그렇게 해서 길과 진리와 생명에 대해서 나름대로 펼쳐놓았는데, 그것이 바로 '관(觀)' 이란 책이라는 것이다. 그것을 우리가 지금 감히 1시간만에 조지려고(?) 하는데, 그 양반이 평생을 해놓은 것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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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i(π) = 3.14 1592 6535 8979 3238 4626 4338 3279 5028 8419 7169 3993 7510 5820 9749 4459 2307 8164 0628 6208 9986 2803 4825 3421 1706 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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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교재를 살펴보자.
** 흔히 불교를 '도 닦는 종교'로 알고 있다. 맞다. 하지만 무턱대고 도를 닦는 것이 아니다. 도를 닦는다는 것은 우주의 대원리에 부합되고 융합하기 위해서 도를 닦는 것이다.
◈ 불교가, 도를 닦는 종교 ??
지금부터 그들이 뭐라고 하는지 살펴보겠는데, 지금부터 들으면 마치 이 시간을 동양철학을 강의하는 시간으로 오해하지 싶은데, 그래서 제가 서론격으로 먼저 "성도는 오로지 십자가의 혜택으로 구원을 받는다" 라고 이야기했다는 것이다.
◈ 동양철학 - 인간은 우주의 일부 !!
서양철학은 '나'를 주체로 삼아서 전개가 되는데, 그러므로 이 자연세계도 자기를 위한 자연세계라는 것이다. 하지만 불교를 포함한 중국과 인도 등의 동양철학은, '나'를 그런 자연세계, 즉 나를 둘러싼 우주에 합치시킨다는 말이다. 즉 인간과 우주가 하나가 되게 한다는 것이다. 우주가 흘러가면 '나'도 흘러가고, 우주가 돌아가면 '나'도 역시 돌아간다는 말이다. 그러니 우주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 된다는 것이다.
◈ 돌고 도는 물레방아 인생 ??
물론 서양철학에서는 과학이 발달해서 인간이 인간을 분석하고 쪼개고 해부해서 "인간은 이러하다" 라고 내어놓지만 말이다. 그러나 동양철학 자기가 자기를 해부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속에 있는 원리가 이미 우주원리의 일부로서 함께 휘둘려가고 있다는 것이다. 마치 세탁기 안에 있는 둥근 원통처럼 말이다. 그렇게 세탁물이 물의 흐름을 따라서 돌아가듯이 인간도 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동양철학에서는, 인간의 경우에도 서양철학처럼 독자적인 자기의 개인적 원리를 생각하지 말고, 우주의 원리를 제대로 알아서 접근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결국 인간은 무엇인가? 바로 그러한 우주에서 파생되어서 나왔음을 알게 된다는 말이다. 즉 우주에서 파생된 것이 곧 인간이라는 말이다.
◈ 인간의 생로병사가 곧 타락 !!
그런데 인간에게는 '생로병사' 라는 우울한(?) 것이 있는데, 동양철학은 그 생로병사의 해결책을 서양철학처럼 마구 자르고 붙이고 해서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생로병사가 오게 된 원천을 찾아가 보면, 그것은 거대한 우주의 원리에서 파생되어서 떨어져 나온 찌꺼기가 바로 생로병사라는 말이다. 그것을 두고 그들은 '타락(墮落)' 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마치 창세기 3장의 말씀을 보는 것 같은데, 인간은 그렇게 우주에서 뚝 떨어져 있는데, 타락할 때 그 글자들이 두 개가 더 떨어진다는 의미라는 것이다(떨어질 墮, 떨어질 落). 그렇게 위쪽은 버리고 아래쪽으로 자꾸만 떨어지게 되는데, 그렇게 인간은 중력에 의한 관성에 의해서 자꾸만 아래쪽으로 떨어지려고 하는 습관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 아래쪽이 아닌 위쪽을 쳐다 보라 !!
이러한 인간의 아래쪽은 바로 짐승인데, 그런데 자기의 괴로움을 짐승과 같은 생활로서 해소하려고 하면 오히려 더 떨어진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결국은 짐승과 일치가 된다는 말이다. 거기에서 더 내려가면 식물이 되고, 또한 잡초가 되고 말이다. 그리고 그 잡초에서 더욱 밑으로 떨어지면 돌맹이가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구선스님은 뭐라고 하는고 하니, "불자들아, 아래쪽을 보지 말고, 위쪽을 쳐다보아라" 라고 한다는 말이다. 그렇게 자기를 상승시키게 되면, 짐승으로 떨어지던 관성의 습성이 위쪽으로 올라가게 되는데, 그렇게 되면 '묘각(妙覺)'의 세계에 이른다는 것이다.
◈ 이근호 주지가 바라보는 묘각의 세계 ??
이 묘각의 세계는 쉽게 말하면 빛의 세계인데, 즉 너무나도 환한 세계라는 말이다. 사실 이런 내용은 '동화사'에서 불자들을 앞에다 놓고 강의해야 하는데 말이다. "이근호 주지가 바라보는 묘각의 세계" 라고 타이틀을 걸든지 하고서 말이다. (ㅋㅋ)
흔히 불교는 "마음을 비워라" 라는 줄로 알지만, 하지만 그 마음은 이미 타락한 마음이기에 헛방이란 것이다. 즉 "모든 것이 마음에 달려있다" 라는 것은 일반 아마추어들이 불교를 그렇게 이야기한다는 말이다. 하지만 진짜 불교에서는, 그러한 마음도 타락한 마음이니, 또한 그 마음은 인간 속에 포함이 되어있다는 것이다. 즉 '안', '이, ''비', '설', '신', '의' 이라고 해서 말이다.
◈ 묘각의 세계에서는 죽음조차도 !!
그런데 그런 마음조차도 상승기류를 타야 하는데, 그러면 올라가게 되는데, 그렇게 올라가면 묘각의 세계가 나온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묘각의 세계에는 인간을 그렇게 괴롭히는 생로병사가 없다는 말이다. 이 생로병사의 굴레로 인해서 그렇게 고민하는 것을, 이 묘각의 세계에서는 그런 생로병사가, 즉 죽음조차도 고민거리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죽음은 과학적으로 의학적으로 아무리 손을 대봐야, 그것은 서양철학에서는 자기가 자기를 쳐다보는 것밖에 되지 않으니 해결책이 없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것이 상승을 해서 묘각의 세계에 들어가면 죽음조차도 흩어져버린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무리 들여다봐도 투명한데, 즉 아무 것도 없다는 말이다.
◈ '관(觀)'을 통해서 묘각의 세계로 !!
불교에서는 인간을 '영'과 '혼'과 '육'으로 보는데, 그런데 묘각의 세계에 들어가면 그 경계가 없어지고, 바로 그 묘각의 세계에 올라가는 방법이 이 책의 제목처럼 '관(觀)' 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이 양반은 자기 책을 다 '관' 이란 제목을 붙여놓았는데, 그렇게 '관(觀)'을 통해서 올라갈 수 있다는 것이다.
◈ 결국, 하나님은 누가 만들었습니까?
아무튼 불교에서는 이것에 대해서 사람이 계속해서 질문하는데, "그러면 그 묘각의 세계에 올라가게 되면 또 뭐가 있습니까?" 라고 말이다. 그러면 결국은 "창세기 1장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고 하는데, 그러면 그 하나님은 누가 만들었습니까?" 라고 할 수밖에는 없는데, 그렇게 계속해서 질문을 해댄다는 말이다.
그렇게 "하나님은 누가 만들었습니까?" 라고 질문하는 것에 대해서 칼빈이라는 사람은 약이 올라서 하는 말이, 그렇게 하나님이 누구인지 질문하는 사람을 위해서 질문을 만들어놓았다고 했다는 것이다. 그것을 다시 칼바르트가 인용을 했는데, 그것을 또 지금 제가 써먹고 말이다. (ㅋㅋ)
◈ 만물 하나 하나를 제대로 풀어야 !!
지금 구선스님이 주장하는 것은, "인간이 어떻게 해탈을 하는가?" 라는 것은 흔히 스님들이 하는 질문인데, 그러나 그것은 사물을 완전히 무시하고, 그냥 자기가 묘각에 세계로 들어가서 도를 닦으면 그만이라는 자기 일변도의 생각이기 때문에,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모든 자연만물 하나 하나를, 심지어 인간의 위장이나 척추뼈 하나라도 제대로 모두 다 풀이를 할 수 있어야, 그렇게 해야 진리가 진리답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자기가 도를 닦고 자기가 해탈을 해서 자기가 부처가 되었다고 하는 것은, 그러한 수많은 것들 중에서 하나이고, 거기에서 만족하고 머물러서는 결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제는 불교가 과학이나 철학이나 또 기독교의 신학에 기가 죽지 않을 만큼, 이 우주전체를 모두 다 완전히 꿰뚫어보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이 불교를 접하고는 "야, 우리보다도 수가 더 높네" 라고 하면서 감격을 하도록, 그렇게 우주전체를 속 시원하게 해명을 다해야 한다는 말이다. 바로 그런 우주론과 구원론을 제대로 펼쳐야 비로소 불교가 불교답다는 것이다.
◈ 석가모니의 가르침은?
석가모니가 가르친 것은, 도만 닦으라고 한 것이 아니라, 하나 하나 모든 사물에 대해서 그 원리를, 즉 시작과 중간과 끝의 원리를 다 해결을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저자는 그렇게 석가모니가 해결한 것을 두고서, 사람들이 절에 와서 도만 닦고 자기 병을 정신적으로 이겨낸다고 하는 것에 대해서는 불만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보다 더 근원적으로 통 채로 알아보고자 욕심을 낸 책이 바로 이 '관(觀)' 이라는 말이다.
◈ 우주는 어디에서 생겼는가?
물론 2부에서 그런 이야기를 하는데, 그렇다면 1부에서는 무슨 이야기를 하는고 하니 '우주론' 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계속해서 상승을 해서 올라가면 결국 우주가 남게 되는데, 그러면 도대체 이 우주는 어떻게 어디에서 생기느냐는 말이다.
하지만 이런 "우주는 어디에서 생겼는가?" 라는 질문자체는 어디에서 떠나는고 하니까, "생로병사는 어떻게 해결하지?" 라고 하는, 즉 "아이가 아픈데 어떻게 하지?", 또 "취직이 안 되는데 어떻게 하지?" 라고 하는, 그런 시시한 것들에게서는 일단 떨어졌다는 것이다. 그런 것은 수준이 낮은 타락에 해당이 되기 때문에 말이다. 즉 그렇게 타락했기 때문에 시시콜콜한 생각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우주는 어디에서 생겼는가?" 라는 질문자체를 하는 사람은 이미 경지에 올랐는데, 바둑으로 하면 9단 정도는 된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불교에서는 서양철학이나 과학처럼 인간을 분석하는 것은 아마추어라고 보는데, 물리학이든 무슨 학문이든 간에, 그런 과학적 사고, 즉 분석을 하는 학문자체를 그렇게 본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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