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대구강의13-인간구원을위한신학3
08대구강의13-인간구원을위한신학3
이름 : 구득영(IP:203.223.97.227)
08 대구강의 13 - 지옥의 하나님 32 - 인간구원을 위한 신학3
08,10,07 강의 이근호, 정리 구득영
◈ 신약과 구약에서의 人間像 !!
오늘은 우리 교재 '지옥의 하나님' 130페이지 '인간들의 교회 만들기' 라는 부분부터 시작을 하겠는데, 그것을 공부하기에 앞서 먼저 구약과 신약성경에 나오는 사람들을 살펴보면, 분명히 같은 사람인데, 그런데 전혀 다르다는 말이다. 구약에 나오는 사람과 신약에 나오는 사람이 말이다.
구약의 경우에는 아주 평범한 인간들이 나오는데, 그런데 그런 자기의 속성을 그대로 드러내는 보통 인간들을 여호와 하나님께서 어떻게 다루시는지가 말이다. 그렇게 자기 본성대로 하다가 하나님에게 깨지는 반면에, 신약에서는 사명감에 충실한 인간들이 나온다는 것이다. 사명감이 넘치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구약은 죄인이 그대로 생생하게 살아있는데, 그래서 그렇게 살아있는 인간을 하나님께서 추궁하고 닥달을 내신다는 것이다. "이것이 말씀인데, 왜 말씀대로 살지 않는가? 벌을 받을래, 복을 받을래" 라고 하면서 말이다. 그런데 신약시대에 오면 인간 속에 뭔가가 들어와 버렸는데, 즉 그렇게 사람 속에 들어와서 통째로 움직인다는 것이다.
이게 무슨 말인고 하니까, 하나님께서 "어이, 똑바로 안 하나? 제대로 해" 라고 하는 것과, 하나님께서 인간 속에 들어와서 우리 인간을 통째로 사용하시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는 말이다. 그것이 곧 구약과 신약의 인간의 차이점이라는 것이다.
◈ 구약과 신약의 인간 사이에는 '단절'이 !!
그러므로 구약과 신약의 인간들 사이에는 무엇이 있는고 하니까, '단절'이 존재한다는 말이다. 도저히 이어질 수 없는 단절이 말이다. 그러니 이러한 단절점을 찾아내어야 하는데, 만약에 그것을 찾아내지 못한다면, 즉 신약에 나오는 인간상에서 구약과의 단절점을 찾지를 못하면, 신약에서의 교회는 구약적 상태에서의 교회, 즉 메시야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그냥 인간들의 모임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이미 신약시대에 접어들었지 않는가? 그런데 아직도 구약에서처럼 인간을 하나의 대상으로 여기면서, 즉 하늘의 해나 달처럼 여기면서, 그렇게 하나님과 연결하려고 애를 쓴다는 것이다. 나름대로 노력을 하면 된다고 여기는, 그런 구약적인 인식의 틀을 가지고 있다는 말이다. 그렇게 되면 메시야가 온 보람이 없는데, 물론 우리나라에 메시야가 온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아무튼 신약에 나오는 사람들은 굉장히 특이한데, 정말로 특이하고 특이한데, 즉 구약과 신약사이는 그야말로 완벽하게 끊어져있는, 그러한 단절상태임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그런데 말로만 끊어졌다고 하지 말고, 그렇게 끊어진 단절점을 찾아내어야만 한다는 말이다. 즉 여기 이렇게 구약시대에서 신약시대로 넘어선 경계선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 4복음서에는 과도기적 변천사가 !!
그래서 신약성경의 4복음서인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그리고 요한복음에서는 예수님과 12제자들의 시대가 과도기로서 표현되고 있다는 것이다. 즉 예수님과 12제자 사이에서, 예수님의 12제자는 구약과 연결이 되어있는, 즉 구약에서 내려오는 구약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던 인간들인데, 그들이 예수님을 만나서, 즉 어떻게 구약적인 인간이 신약적인 인간으로 변모되는지, 그러한 과도기적 변천의 흐름이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에 그대로 나온다는 말이다.
◈ 예수님과 12제자들 사이도 역시 단절 !!
다시 말해서, 12제자들은 철저하게 예수님을 따르고, 예수님에게 지시를 받고, 또한 예수님의 기적을 맛보면서 살았는데, 하지만 결국은 예수님과 그들 자신들 사이가 그만 단절이 되어있었다는 것이다. 즉 예수님과 제자들의 사이가 그렇게 끊어져 있었다는 말이다.
그 대표적인 것이 바늘구멍 이야기인데(?),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얼마나 힘이 드는지,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것보다 더 힘이 든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서 결국 그 바늘구멍조차도 막혀버린다는 것이다.
(마 19:23)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
(마 19:24)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신대
◈ 인간은 예수님의 세계와 완전히 단절 !!
또한 예수님께서, "너희들의 의가 바리새인들보다 낫지 않으면 천국에 가지를 못한다" 라고 했을 때, 이미 여기에는 무엇이 암시되어있는고 하니, 인간이 천국에 가지 못한다는 것이 분명해지는데, 거기에다가 바늘구멍 이야기로 말미암아서 인간이 천국에 가지 못한다는 것이 확실해졌다는 것이다.
그리고 요한복음 3장에서 "육으로 난 것은 육이고,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다" 라고 했을 때에, 결국에는 인간이 천국에 가지 못한다고 하는 것이 점점 더 분명해졌다는 말이다. 즉 인간은 예수님의 세계와 완전히 끊어져있는, 바로 그런 입장에 있다는 것이다.
(요 3:6)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 사도바울 - 인간은 완전히 갇혀있기에 !!
그런데 그것이 사도바울에게 오게 되면 어떻게 되는고 하니, 이렇게 끊어진 것이 그냥 끊어진 것이 아니라, 우리 인간들 전체가 어떤 세력 속에 완전히 갇혀있는 상태라는 말이다. 그렇게 사로잡혀 있는 입장이기 때문에, 거기에서 본인들이 아무리 노력해도 탈출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 구약은 그리스도가 없는 인간형 ??
다시 강조하지만, 구약에서의 인간형은 무엇인고 하니, 제가 왜 이 구약의 인간형을 자꾸 언급하는고 하니, 그리스도가 없는 인간형이 구약이기 때문에 그러한데, 교회를 욕하고 비판하려는 것이 아니라 말이다. 아니, 무엇을 하지도 못하는데 욕을 한다고 되는가? 그러니 비판하려는 것이 아니라, "지금 너는 이 정도밖에 안 돼" 라는 것을 보여주고자 한다는 것이다.
◈ 제도와 형식과 법 !!
사람들에게 아무리 그리스도를 이야기해도 그들에게는 그리스도가 없는데, 그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구약에서 그것이 제대로 드러나는데, 이 구약에서는 '제도'와 '형식'과 '법'이 없이는 신을 표현할 길이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인간이 이런 '제도'와 '형식'과 '법'을 만들게 되면 어떤 약점이 생기는고 하니, 인간 속에 있는 진짜 본질을 그것들이 흐릿하게 해서 없애고 감추려고 한다는 것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까, 남을 지적하다보면 자기의 약점이 보이지 않듯이, 그렇게 저기에서 여기로 건너가기 위해서 자꾸만 무엇인가를 설치하다보면, 그렇게 설치하고 있는 자기 자신의 문제점 같은 것은 노출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오히려 점점 더 멀어져간다는 것이다.
◈ 죄인임을 잊으려고 하는 인간들 !!
그러니 바로 이러한 제도와 형식과 법은 자기들이 보기에는 아주 거룩하고 의롭게 보이는데, 그것은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아주 명백하게 잘 이야기를 했는데, 그렇게 거룩하고 의롭게 보인다고 해서 자꾸만 끌어당기고 조립해서 만든다는 것은, 그것은 곧 그렇게 하면서 자기 자신이 죄인 중에서 괴수라는 사실을 점점 더 잊어간다는 말이다.
이런 현상이 지금 한국교회 전체와 목사들이 다 그러한데, 즉 제도와 형식과 법을 자꾸만 앞장세워서, "목사님, 이렇게 하면 됩니까? 이렇게 살면 맞습니까?" 라고 하면서 매일같이 질문을 하는데, 그것은 바로 자기 죄를 놓치고 잊어버리기 때문에 그렇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있는 자기 모습 그대로를, 그렇게 자기 자신을 솔직하게 드러내지 못하고, 무엇을 하나 걸치고 난 다음에 하나님께 자기를 보여주려고 한다는 것이다. 즉 "제가 교회에 40년을 다녔습니다. 십일조를 십이조(?)로 바쳤습니다. 그리고 목사로서 20년을 봉사하고 있습니다" 라고 하면서 말이다.
◈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누구인가?'
그래서 "예수님은 당신에게 어떤 분입니까?" 라고 물으면, 하나같이 "우리 교회는 어떻습니다" 라고 하면서 자기 교회 이야기만 한다는 말이다. 그래서 자기는 헌금을 얼마 했고, 또 새벽기도는 일주일에 몇 번을 나가고, 자기 자식놈은 서울대학교에 들어갔고, 그렇게 자꾸만 눈에 보이는 방식으로 걸쳐서 이야기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성경을 이야기해도, 십자가만이 전부가 아니라, 부활의 영광과 능력도 있어야 한다고 하는데, 물론 거기서 말하는 부활의 능력은 눈에 보이는 실적을 의미하는 것인데, 그래서 온유와 화평과 자비 등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정작 자기 자신은 숨겨놓고는 엉뚱한 것만을 내놓는다는 말이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나중에는 어떻게 되는가? 그야말로 구멍 같지도 바늘구멍조차도 그만 없어져버리는데, 즉 완전히 갇혀버리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디에 갇히는가?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저주 아래에 놓이게 된다는 말이다.
◈ 구약 사람들이 믿음이 없는 게 아니라 !!
그러니 우리가 신약을 이해하기 전에 구약부터 제대로 알아야만 하는데, 흔히 교회에서 이야기하는 것처럼 구약의 사람들이 믿음이 없는 자들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들은 결코 하나님을 무시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울기도 잘하고, 회개도 잘하고 말이다.
물론 구약성경은 그들이 하나님을 버렸다고 말하지만, 그러나 그들은 결코 하나님을 버린 적이 없다는 것이다. 그들은 제도와 형식과 법적으로, 그렇게 정기적으로 금식을 하고 기도를 했다는 말이다. 그러니 이웃을 돌보지 않는다고 지적을 받으면, 당장에 고쳐서 이웃을 돌아보고도 남을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구약의 예레미야 선지자가 "고아와 과부를 돌보지 않기에 지금 이것은 성전이 아니다" 라고 했기 때문에, 신약의 바리새인들은 고아와 과부를 돌보는데 헌신적이었다는 것이다. 자기들은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서 말이다. 즉 제도와 형식과 법을 지키지 않으면 하늘나라의 백성이 되지 않는다고 여겼기 때문에 말이다.
◈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입장은?
그러니 예수님께서 그러한 법과 제도와 형식을 모두 치우라고 했을 때, 그렇게 되면 그들은 어떻게 되는가? 그동안 기대고 있던 것들이 모두 사라지고 마니 어찌할 바를 모르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그러한 말씀을 하시는 것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당황스럽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직접 다 알아서 하겠다는 의미인데 말이다.
그러므로 그들에게서 제도와 형식과 법을 모두 다 걷어 치워버린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것은 바로 자기들이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있는 모든 방법들을 다 걷어치우는 것이 되기 때문에, 자기들로서는 도저히 그런 요구를 받아드릴 수가 없다는 말이다. 그것이 곧 예수님 당시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입장이라는 것이다.
제가 강의를 하고 나면 나오는 질문 가운데 18번이 무엇인고 하니, "그렇다면 목사님, 어떻게 하라는 말인가요?" 라는 것인데, 죄인인 주제에 어떻게 하기는 무엇을 어떻게 하느냐는 말이다. 그냥 그렇게 살아있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인 줄로 알면 되지 말이다. 아니, 죄인인 주제에 구원을 받으려고 하는 것이 말이 되느냐는 것이다.
◈ 결국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주님을 공격 !!
바로 이러한 점을 보여주는 것이 구약인데, 그런데 주님께서는 이것을 합쳐서 인간으로 하여금 모두 걷어치우라고 하니까,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이기가 불가능한 요구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불가능하니, "주님, 어떻게 합니까?" 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렇게 걷어치우라고 한 그분을 공격하게 된다는 것이다. 자기 자신을 유지하고 지키기 위해서 말이다.
◈ 인간은 자기 영광성을 결코 포기하지 못해 !!
그래서 구약에서 법과 제도와 형식을 총동원해볼 때, 주님께서 내린 결론이 무엇인고 하니까, "결코 인간은 자기 영광성을 포기하지 못한다" 라는 것이다. 이것이 요한복음 12장에 나오는데, 그러니 사람이란 그 무슨 짓을 해도, 어떻게 하면 자기를 보다 더 상품가치가 있는 인간으로 발전시킬 것인가를 떨치지 못하고 일을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인간은 신에게 기도를 하고 열심히 봉사를 하는 행동 등으로 말미암아서, 자기 자신의 가치를 보다 더 부풀리고 팽창시키는데 도움이 되면 되었지, 결단코 손해를 볼 리가 없다는 의식을 가지고 모든 행동을 하는데, 그것이 이미 구약에서 드러났다는 것이다. 교회에 다니던 않던 간에, 그 어떤 인간이라도 말이다. 심지어 치매에 걸린 할머니라도 행동할 때는 자기 영광을 위해서, 즉 정신이 나가도 자기 영광 위주로 한다는 말이다.
여기에 대해서 주님은 뭐라고 하는가? 그것이 요한복음 12장 43절에 나오는데, "저희는 사람의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보다 더 사랑하였더라" 라고 말씀하셨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우리 인간들의 솔직하고 적나라한 모습이라는 말이다.
(요 12:43) 저희는 사람의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보다 더 사랑하였더라
그런데 이런 인간들이 구약에서는 하나님의 영광을 줄기차게 외쳤는데, 자기들의 모든 희생을 사랑을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내부를 살펴보니까, 자기 영광을 포기하지 않은 채로 그렇게 했는데, 즉 자기 영광을 위한 하나님의 영광이었다는 말이다.
◈ 신약의 성도들의 특징은?
지금 제가 왜 이렇게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을 이야기하는고 하니, 바로 다음과 같은 점을 이야기하고 싶어서인데, 즉 구약이 아닌 신약에 나오는 신앙인들의 특징이 그야말로 보통(?)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이다. 인간들끼리 어떻게 노력을 하든지 해서 만들어질 수 있는, 그러한 유형의 인간들이 아니라는 말이다.
세례요한이 분명히 여자가 낳은 인물 중에서 정말이지 위대하기는 하지만, 그러나 신약의 성도들에 비하면 어린아이보다도 못하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들은 도저히 통과할 수 없는 바늘구멍을 통과한 사람들인데, 그야말로 기적의 인물들인데, 바로 그런 무리들이 바로 신약의 성도들이란 말이다.
◈ 신약의 성도들은 마술사 ??
유명한 '카퍼필드' 라는 마술사가 있는데, 그 양반이 중국에서 한 마술을 보면, 순간적으로 만리장성을 이쪽에 있는 것을 저쪽으로 옮겨버렸다는 것이다. 미국의 자유의 여신상도 순식간에 날려버렸고, 또한 비행기와 탱크도 모두 다 사라지게 했고 말이다. 정말이지 대단한 마술사라는 것이다.
신약시대의 성도의 특징은, 이와 같이 꼭 마술사 같은데, 마치 만리장성의 벽을 몇 초만에 통과해서 반대쪽에 가는 것과도 같다는 것이다. 그 벽은 도저히 통과할 수 없고, 그 위쪽을 넘어가도 몇 분은 걸리는데 말이다. 물론 그렇게 높지는 않지만 말이다.
'사운드 트랙' 이라는 공상과학영화를 보면, 거기에 무슨 장면이 나오는고 하니, 지구에 남아있던 우주인들이 갑자기 다른 별에 나타나게 되는데, 타임머신을 탔는지, 무슨 공간이동을 했는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그런 신기한 일들이 일어난다는 말이다.
◈ 주의 성령으로 새 사람이 되었다 !!
그런데 신약시대의 성도를 보면, 그런 정도가 아니라 그야말로 바늘구멍조차도 꽉 박혀버린 상황에서 뭔가 도저히 나타날 수 없는 사람들이 나타났다는 것이다. 그것도 한 두 명도 아니고 말이다. 그런데 이것을 신약성경은 아주 간단하게 이야기하는데, "주의 성령으로 새 사람이 되었다" 라고 말이다.
그야말로 너무 너무 간단한 이야기인데, 그런데 도저히 믿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도 그렇고, 예수님의 제자들도 역시 마찬가지인데, 그렇게 인간들이 도저히 믿을 수 없는 것을 예수님이 말씀하신다는 것이다.
◈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내 백성'은?
이것을 그림으로 그려보자면, 예수님께서 외치는 '내 백성', '내 제자' 라고 하는 것은, 도저히 인간으로서는 도달할 수 없는 상태를 이미 상정해놓고 말씀하신다는 것이다. 모든 예수님의 이야기가 다 그렇다는 말이다. "무엇을 입을까, 먹을까, 마실까 염려하지 말라. 그것은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다" 라는 말씀도 역시 그렇고 말이다.
우리 인간들에게 돈을 바치라고 요구하면 돈을 바칠 것이고, 시간을 바치라고 하면 바칠 수 있지만, 그리고 금식을 하고 전도를 하라고 하면 할 수 있지만 말이다. 그러나 염려하지 말라고 하면 그것은 도저히 우리 인간들의 힘으로는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 최진실의 사인(死因)은?
만약에 그것이 가능하다면 최진실이 그렇게 허무하게 자살을 했겠는가? 그녀는 그만 밀려오는 염려에 깔리고 파묻혀서 죽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런 상황에 처한다면 우리도 역시 마찬가지가 아니겠는가? 그러니 누구를 탓하고 욕할 문제가 아니고 말이다.
◈ 당신은 어떻게 염려하지 않습니까?
저는 개인적으로 "성경말씀대로 살았습니다" 라는 사람들에게 좀 묻고 싶은데, "당신은 어떻게 염려를 하지 않습니까?" 라고 말이다. 왜냐하면, 이 '염려' 라는 것은 마치 파도처럼 밀려오는 것이기 때문에 하기 싫어도 하게 되는 것인데, 자기는 제 아무리 마음을 비우고 염려하지 않으려고 하는데, 그런데 사건이 자꾸만 터지는데 어떻게 하느냐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어떤 사람이 주식투자를 했는데, 그래서 성경에 있는 대로 염려하지 말라고 해서 염려를 하지 않고 느긋하게 넣어놓고 살아가는데, 그런데 요즘처럼 주식이 바닥도 모르고 떨어지고 있다면, 하루에 몇 번씩 사이드카가 발동되고 말이다. 그래서 주식이 반 토막에 또 반 토막이 났다는 것이다.
아마 제도와 형식과 법으로 따진다면, "주여, 저는 전혀 염려하지 않습니다" 라는 것이 나올 것인데, 그러나 그것은 자기가 염려하는 것을 가리기 위한 위장전술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즉 새로운 제도와 형식과 법이라는 말이다. 마치 몸이 아플 때 감사하는 것과도 같은데, 아프면 그냥 아픈 것이지 무슨 감사가 나오느냐는 것이다.
◈ 예수님은 신앙의 문제를 왜 몸의 문제로?
그래서 저는 이런 부분을, 물론 우리 교재에도 나오지만, '아프다', '배고프다', '속쓰리다' 라는 것들이 신앙의 문제이냐는 것이다. 믿음이 있으면 배가 고프지 않는가? 기도를 하면 고프던 배가 그냥 불러지는가? 그것은 신앙이 아닌 우리 몸의 문제라는 것이다. 그러니 '염려하지 말라' 라는 것도 신앙이 아닌 우리 몸의 문제인데, 즉 우리 몸 자체가 염려를 하도록 되어있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주님이 말씀하시는 것은, 지금 우리가 지니고 있는 우리 몸은 정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만약에 자기 몸이 정상이라면 자기도 하기 싫은 염려를 어쩔 수 없이 하겠느냐는 것이다. 사도바울은 이것을 '육(肉)' 혹은 '육신(肉身)' 이라고 하는데, 즉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니 자신을 알라" 라는 것인데, 어디서 많이 듣던 이야기이지요?
◈ 제대로 갇혀있는 인간 !!
지금 우리는 그런 육신을 지니고 있는데, 그것은 도저히 우리가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이다. 왜 그런가? 그것은 바로 우리가 갇혀있기 때문인데, 얼마나 제대로 갇혀있는고 하니, 우리 스스로의 노력으로는 도저히 빠져 나올 수가 없다는 것이다. 아무리 등산을 잘하고 암벽을 잘 타도 말이다.
◈ 예수님은 왜 오셔야만 했는가?
그런 식으로 신약성경에서 계속해서 이야기하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 "예수님은 왜 오셔야만 했는가?" 라는 것인데, 즉 예수님이 왜 필요한지, 그분이 왜 우리의 구주인지, 그러한 것을 더욱 더 부각해서 나온 것이 곧 모든 영광을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 돌리는 것이고, 그것이 또한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라는 말이다.
그것이 빌립보서 2장 11절에 나오는 말씀인데, 바로 여기에 성경말씀의 모든 초점들이 다 맞추어져 있다는 것이다. 즉 우리가 예수님에게 무릎을 끓음으로 말미암아서 예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고, 그것이 곧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이 된다는 말이다.
(빌 2:9)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빌 2:10)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빌 2:11)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여기서 베드로전서 4장 11절 말씀을 한번 찾아보겠는데, 이 구절은 찾아볼 때마다 다시금 생각하고 또 생각하게 하는 말씀이라는 것이다. 누가 한번 읽어보세요.
(벧전 4:11)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토록 있느니라 아멘
◈ 오잉,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
여기에 보면,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라고 이야기하는데, 우리가 불교나 이슬람교와 대화를 해보면, 그들도 모두가 신의 영광을 이야기하는데, 그런데 무엇이 안 되는고 하니, 여기 있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라는 것이 전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즉 이것을 그들은 도저히 수용하지 못한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예수도 인간이고 우리도 인간인데, 그러니 다같이 살이좋게 하나님을 섬기면 되지 않느냐는 것이다. 그러니 굳이 이스라엘까지 갈 필요도 없이 옛날 우리나라 할머니와 할아버지들을 보면 되는데, 그들이 그야말로 지극 정성으로 조물주를 섬겼는데, 그런데 문제는 그들에겐 예수 그리스도가 없다는 것이다.
◈ 과연 세종대왕도 지옥에 갔는가?
그래서 감리교 진영에서 주장하는 것이, 만약에 예수님을 반드시 알아야만 구원을 받는다면, 그렇다면 우리나라에 기독교가 들어오기 이전에 살았던 사람들은 다 어떻게 되었느냐는 것이다. 그렇게 착한(?) 세종대왕도 지옥에 갔느냐는 것이다. 물론 당연히 갔는데, 그런데 그들이 계속해서 주장하기를, 만약 세종대왕이 지옥으로 갔다고 하면 무슨 그런 신이 있느냐는 것이다. 자기가 만들고 자기가 지옥으로 보내고 말이다.
하지만 제가 여기서 말하고 싶은 것은, 인간들이 천국으로 가는 것만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우리 인간들의 착각이고, 지옥으로 보내는 것도 역시 영광이라는 것이다. 인간이 존재하는 이유가 천국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인데, 그렇다면 아무런 문제도 없다는 것이다. 세종대왕이 지옥으로 가도 말이다. 그것이 무슨 문제가 되느냐는 것이다.
◈ 지옥에 가는 것도 역시 하나님께 영광 !!
그러므로 그들이 평소에 하나님의 영광을 들먹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얼마나 자기 영광을 포기하지 못했으면, 그런 이야기를 하느냐는 말이다. 이것은 그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또한 자유주의가 어떻고 할 문제가 아니라, 오늘날 교인들도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복음을 안다고 해도 역시 그렇고 말이다.
다시 말해서, 인간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말할 때는 순수하게(?) 하나님의 영광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꼭 자기 영광을 집어넣어서 이야기한다는 것이다. 즉 "좋으려면 다같이 좋아야지, 하나님만이 좋으면 되는가?" 라는 식이란 말이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믿음을 선물로 주었는데, 그런데 우리는 무엇이라고 하는가? "그런데 하나님, 저 사람에게는 왜 주지 않습니까?" 라는 식인데, 그러므로 선물의 의미를 전혀 모른다는 것이다. 우리에게 전혀 주지 않아도 준다는 말인데, 그래서 그것이 곧 긍휼이고 은혜라는 것인데,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받는 것이 마땅한 것처럼 여긴다는 것이다.
◈ 신약시대의 성도들은 자기 영광을 몰라 !!
지금 제가 신약시대 성도의 특이성에 대해서, 즉 단절에 이야기하고 있는데, 이것을 모르면 우리 교재 130페이지의 내용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는 말이다. 신약시대 성도의 특징이 무엇인고 하니, 참으로 희한한 인간들의 등장인데, 사람이라면 자기 영광을 챙기는 것이 너무나 당연한데 말이다.
그런데 신약시대의 성도들은 전혀 자기 영광을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영광도 아니고, 그들은 오직 예수님밖에 모른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그렇게 만들어놓았는데, 그런 의미에서 신약시대의 성도는 참으로 특이하다는 것이다.
그러니 괜히 현재 자기 눈에 보이는 교회의 교인들을 모아서, "아마, 이들이 신약시대의 성도가 맞을 거야" 라고 생각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런 교인들은 아무리 모아보아야 교회가 아니라는 것이다. 어느 교회에 다니든지 말이다. 손양원, 주기철, 한경직 목사 등을 운운하는데, 그들이 목회를 한다고 해서 교회이고 성도들인가? 중요한 것은 성경이라는 말이다.
◈ 예수님으로 말미암은 하나님께 영광 !!
성경에서 말하는 신약시대의 성도는 어떠한고 하니까, 바늘구멍조차도 막혀버린 상태에서 저쪽에서(?) 발생한 참으로 특이한 존재라는 것이다. 도저히 이쪽에서는 갈 수가 없고 말이다. 그렇게 해서 도저히 생겨날 수 없는 인간들이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그들의 특징이 바로 '사명감' 인데, 어떤 사명감인고 하니, 주님으로 말미암은 하나님께 영광, 즉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신약시대의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그런 사명감으로 충만한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사명감을 가진 자들의 특징은, 그것을 자기 내부에서 소유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늘 언제나 지시를 받고 살아간다는 것이다.
이런 것을 미리 이야기를 해두어야 2부 순서로(?) 교재를 제대로 살펴볼 수가 있는데, 아무튼 성도는 특이하지만 또한 너무나도 간단하다는 말이다. 예를 들어서, 자기가 어느 회사에 말단사원으로 취직을 했다면, 그래서 회사에서 9시까지 나오라고 하면 그 시간에 맞추어서 그대로 나가면 된다는 것이다.
◈ 지금 손님 들어가유 !!
어떤 변호사를 다른 드라마를 보니, 아침에 이 양반이 출근을 했는데 비서가 밤사이에 팩스로 들어온 것을 한 보따리를 가지고 오는데, 그것을 아침에 일일이 다 살펴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11시까지는 법정에 나가야 되고, 점심때는 누구를 만나야 하고, 오후에는 무슨 무슨 일을 해야하고, 자기가 비록 변호사이지만 그렇게 많은 일에 짓눌려있다는 것이다. 꼼짝도 못하고 말이다. 그러니 연애질을 할 시간도 없다는 것이다.
굳이 변호사 이야기를 하지 않아도 우리가 병원에만 가보아도 아는데, 제가 박사교회에 있을 때 아침시간에 종종 병원에 갈 일이 있었는데, 동네 노인들은 다 온다는 것이다. 아침에 별로 할 일이 없어서 말이다. 의사가 그래도 병원에서 제일 높다고 할 수도 있는데, 아니면 말고, 그런데 의자에 앉자말자 간호사가 계속해서 환자들을 들여다 미는데, "다음 손님, 어서 들어오세요" 라고 하면서 말이다. 전혀 쉴 틈도 없이 말이다.
◈ 목사는 아플 시간도 없어 !!
신약시대 성도의 특징이 무엇인고 하니까, "주여, 오늘은 무엇을 할까요?" 라는 것이 없다는 말이다. 즉 주님으로부터 계속해서 업무량(?)이 밀려들어온다는 것이다. 그러니 자기 영광을 챙기고 말고 할, 그런 정신을 차리리 못한다는 것이다. 즉 지시를 받고 산다는 말이다. 저는 이것을 목회자 강의시간에 뭐라고 했는고 하니, "목사는 마음대로 아플 시간도 없다" 라고 했는데, 사명을 받은 자는 그렇다는 말이다. 그렇게 바쁘게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물론 여기에 대해서 "목사님, 저는 예수님을 믿고 난 뒤에 아무런 지시도 없고, 별로 할 일이 없어요" 라는 사람도 있을 것인데, 그런데 지시가 없으면 사명감이 없는 것이 되고, 그러한 사명감이 없다는 것은 자기 영광을 챙기기에 급급했다는 말이다. 즉 자기 영광을 타인의 영광과 비교하고 대조하면서 게임(?)을 하기에 분주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옆집에서 "김 집사님, 오늘 우리 집에 냉장고 하나 더 들여다놨어요" 라고 하면, 당장에 교회에 가서 뭐라고 기도를 하겠는가? "주여, 우리는 디오스 냉장고 하나만 더"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인간의 모습인데, 그렇게 자기 영광에 급급하다보니 사명감이 없어지고, 또한 사명감이 없으니 지시를 받는 것이 없다는 말이다.
지금 제가 누구를 탓하는 것이 전혀 아니라, 신약성경에 나오는 성도들, 즉 사도바울을 비롯한 그들의 특징이 무엇인고 하니, 지시를 받으면서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는데, 특정한 누구를 모델로 데리고 오라는 것이 아니고 말이다. 모델이 아니라, 성경말씀이 중심이니 신약성경의 성도들은 아무튼 그렇다는 말이다.
◈ 암과 싸우는 것도 사명감 !!
만약에 특정 모델을 제시하라고 하면 사실 얼마든지 할 수 있는데, 대학병원에 가면 암과 투쟁하고 있는 자들이 있는데, 만약에 그 중에서 성도가 있다면 그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사명은 무엇인가? "너는 암과 싸워라" 라는 것인데, 그것이 바로 사명이라는 것이다. 물론 얼마나 농땡을 쳤으면 그런 사명을 받았는지는 모르지만 말이다.
◈ 목사님, 제가 사기를 당했는데요 !!
어떤 분이 저에게 메일을 보내기를, 그분은 밑바닥에서 힘든 노동을 하는 사람인데 그만 사기를 당했다는 것이다. 왜 그런 사람들이 사기를 잘 당하는고 하니, 노동이 힘이 드니 편하게 돈을 버는 방법이 있다고 하면 그냥 넘어간다는 것이다. 그런 이야기에 그만 마음이 움직였는데, 물론 그것이 욕심인데, 그런 욕심에 사탄이 관여해서, 아무튼 그 사람이 홀라당 사기를 당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분통이 터져서 메일을 보내었는데, 그래서 저는 뭐라고 대답을 했는고 하니, "그냥 계속해서 노동을 하세요" 라고 말이다. 왜 제가 그런 답변을 했는고 하니, 사람이 노동을 하게 되면, 왜 자기가 죄인인가를 깨닫게 되는데, 즉 사람은 힘이 들면 하나님께 원망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하나님을 원망한다는 것은 자기 영광성을 포기하지 못했음을 의미한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그동안 하나님을 믿은 것은 무엇인가? 아까도 언급했지만, 구약에서 인간이 신에게 나아갈 때는 무엇으로 나아가는가? 형식과 제도와 법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자기 자신은 뒤로 빠지고, "주여, 제가 힘든 노동을 하는데, 그래도 이렇게 십일조를 했습니다" 라고 한다는 말이다. 그렇게 뭔가 내미는데, 하지만 그런 것들이 다 모조리 헛방이라는 것이다.
◈ 하나님의 영광성은 무서움 !!
그렇게 하면서도 속으로는 씩씩거리는데, 왜냐하면 자기 영광성을 보장해주지 않기에 말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런 인간의 영광성을 제거함으로서 하나님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는데, 다른 말로 표현하면 하나님의 무서움을 드러낸다는 말이다. 그래서 암과 투병을 하면서 깨닫게 되는데, 미처 암이 그렇게 무서운 줄 미쳐 몰랐다고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병상에서 암과 싸우면서 도대체 무엇을 배우는가? 그동안 하나님의 영광은 제쳐두고 자기 영광을 챙기면서 살았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냥 건성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말로만 장식을 한 것인데, 즉 하나님의 영광을 이용해 먹었다는 말이다.
◈ 이제 정리를 하면 !!
이제 정리를 해보면, 신약성경에서는 성도들이 사명감에 충실한데, 그런데 이것을 사람들은 오해해서 "야, 완전한 인간이 나타났구나" 라고 한다는 말이다. 물론 사명감을 주신 분은 완전하겠지만, 그러나 사명을 받은 사람들은 결코 완전한 것이 아니라 정말이지 특이한 자들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본인들이 생각해도 정말 그러한데, 왜냐하면 다른 사람들 같으면 이미 예수를 믿는 것을 다 때려치우고 돌아갔을 터인데, 그렇게 예수 때문에 고생을 했는데 미쳤다고 교회에 나가느냐는 것이다. 하지만 신약시대의 성도들은, 예수 때문에 고생이란 고생은 다 하면서도 예수님을 원망하기는커녕, "아하, 주님께서는 나를 이렇게 망가지게 하면서도 주님을 증거하게 하는구나" 라고 한다는 것이다.
◈ 성도는, 고난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
그러므로 신약시대 성도의 특징은 무엇인가? 죽으라고 고난을 받는데, 즉 죽을 만큼 매를 맞고, 또한 버림을 당하고, 강도와 도적의 위협을 당하고, 결국은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고 말이다. 그렇게 날마다 환난과 고난을 마구마구 뒤집어쓴다는 것이다.
사도바울의 경우는 어떠한가? 자기는 선으로 상대를 대했지만 그러나 악으로 되돌아 왔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그는 뭐라고 하는가? 그들을 원망하고 자기 신세를 한탄하기는커녕, 이제 자기는 선한 싸움을 다 싸우고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다고 하는 것이다. 그리고 겉사람은 후패하나 속사람은 날마다 새로워지고 말이다.
(딤후 4:5) 그러나 너는 모든 일에 근신하여 고난을 받으며 전도인의 일을 하며 네 직무를 다하라
(딤후 4:6) 관제와 같이 벌써 내가 부음이 되고 나의 떠날 기약이 가까왔도다
(딤후 4:7)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딤후 4:8)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
◈ 성도는, 성령으로 날마다 박살나는 인간 !!
그러니 굳이 성경에서 말하는 완전한 인간을 이야기하라고 하면, 성령으로 인하여 날마다 박살나는 인간인데, 그런 점에서 이 신약성경은 아주 특이하다는 것이다. 우리가 예상했던 신앙의 영웅들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는 말이다. 그러니 그들은 정말로 특이한 사람들인데, 본인들이 생각해도 자기들이 특이하고 말이다.
다른 사람들 같으면 그 정도로 핍박을 박고 고난을 받게 되면, 하나같이 예수도 버리고 교회도 전혀 나가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여전히 주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정말이지 특이한 요소가 그들 속에 있어서 그렇다는 말이다. 성도는 또한 그것을 매일 자기 삶 속에서 깨달으면서 살아가고 말이다.
◈ 제대로만 하면, 교회는 반드시 부흥한다 !!
그렇다면 젊은 사람들은 어떻게 신앙생활을 하는가? 저도 목사로서 이미 그런 시절을 다 지나왔지만, 그래도 남의 인생은 살지 않아서 남의 마음은 모른다는 것이다. 하지만 조금은 아는 것은 무엇인고 하니, 젊은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는 젊은 목사가 어떤 사고방식을 가지고 목회를 하는지, 바로 그런 점만 파악하면 알 수가 있다는 것이다. 즉 젊은 사람이 살아가는 방식이나, 젊은 목사가 목회를 하는 것이나 모두 비슷하기 때문에 말이다.
그런 젊은 목사의 사고방식이 무엇인가? "목회만 제대로 하면 교회는 반드시 부흥한다" 라는 것인데, 즉 인간은 그런 환상을 포기하지 못하면서 살아간다는 것이다. 자기만 제대로 하기만 하면 주님께서 들어 사용하시고 교회를 키워준다는 말이다. 그냥 들어서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크게 들어 사용하시는데, 물론 주님께서 나중에 크게 들어 사용하시는데, 왜냐하면 크게 들어 사용해야만 또 크게 꼴아 박으니 말이다.
◈ 예수가 아닌 신의 가호로 !!
이것이 바로 젊은 사람들과 젊은 목회자의 특징인데, 이것을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하나님은 나를 버리지 않는다" 라고 하는, 이것을 한자말로 '가호(加護)' 라고 하는데, 즉 신의 은혜로 돌보아준다는 것이다. 젊은 사람들은 이것을 도저히 포기할 수가 없는데, 즉 대학생이나 간사들의 경우에는 마지막 남은 자기들의 신앙 알맹이가 예수님이 아니라, '신의 가호' 라는 것이다.
그런데 신약성경은 환경을 지독하게 만들어서, 좋은 환경에서 오는 가호가 아니라, 독한 상황에서의 진정한 가호를, 즉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게 하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바로 그러한 방식으로 이끌어 가시는데, 왜냐하면 예수님이 그렇게 하시는데, 주님은 나쁜 환경 속에서도 하나님의 일을 완벽하게 이루셨다는 것이다.
그러니 주님의 일하시는 방식은 무엇인가? 사람이 젊었을 때는 좋은 환경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운운하는데, 그러나 성도에게는 그러한 것에서 벗어나서 아주 어렵고 힘든 환경 가운데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또한 사랑하는 사람으로 이끌어내신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는 것이고 말이다.
◈ 최진실과 막달라 마리아 !!
최진실씨가 죽고 난 다음에 주위 사람들이 뭐라고 하는가? "이제는 눈물도 없고 아픔도 없는 곳에서 편히 쉬소서" 라고 하는데, 정말 그런 곳에 갔는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아무튼 그런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바로 환경이 좋으면 자기도 편안해진다고 여기기 때문인데, 그러나 정말 주님의 사랑을 안다면 환경이 아무리 지독해도 그 마음은 한결같아야 한다는 것이다.
신약성경에 나오는 막달라 마리아의 경우에, 그녀는 요즘 말로 하면 악플의 대장인데, 아니 말을 잘못한 것 같은데, 악플을 다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그 피해자라는 말이다. 그 여자만 가면 주위에서 수근수근거리는데, 즉 악플을 단다는 것이다. "저 여자는 창녀인데, 어제 어떤 짓을 했다. 누구 집 남편을 꼬드겼다" 라는 식으로 말이다.
하지만 막달라 마리아는 그래도 주님을 만나고 난 뒤에 정말로 기뻐한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그것은 바로 자기 자신을 알았다는 것이다. 즉 죄를 많이 용서함을 받은 자가 주님을 많이 사랑한다는, 그런 공식(?)을 알았다는 말이다. 그래서 자기에게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악플을 달고 또 달아도, 자기는 그것이 오히려 당연하다고 여겼다는 것이다. 그 정도로, 아니 오히려 그것보다도 훨씬 더 하나님이 보시기에 죄인이라는 말이다. 그렇다면 더 이상 무엇이 문제이겠는가?
다시 말해서, 막달라 마리아는 그렇게 예수님을 만나서 그분의 사랑을 받고 또한 구원을 받은 것이, 이 세상의 모든 인간들에게 말할 수 없는 모멸감을 당하는 것보다도, 정말이지 그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주님의 사랑이 좋다는 말이다. 예수님이 말이다. (그래서 그녀가 예수님의 애인이었다는 소문이 있었나? 천국에 가서 물어보면 되겠지만, ㅋㅋ)
◈ 사랑을 많이 받은 자가 더 많이 사랑 !!
누가복음 7장에도 보면 그런 여자가 나오는데, 그녀는 눈물을 흘리면서 값비싼 향유를 담은 옥합을 깨트리고, 자기 머리털로 주님의 발을 씻겨드리면서 자기 마음을 전달했다는 것이다. 물론 고맙기도 하고 미안한 마음도 있었지 싶은데, 자기의 못난 모습 때문에 말이다. 아무튼 주님의 은혜에 나무나 감격해서 그렇게 했다는 말이다. (강의시간에 이 여인이 막달라 마리아로 표현했는데, 아니지요?)
그것을 보고 바리새인들이 비웃었는데, 그때 주님이 뭐라고 하셨는가? 500만원이나 탕감을 받은 인간과 겨우 50만원을 빚진 자가 있는데, 누가 더 사랑을 많이 알겠느냐는 것이다. 그러니 많이 용서함을 받은 자가 더 많이 사랑한다는 말이다. 그러니 결국은 환경이 문제가 아니라 자기의 분수를 제대로 알게 되면 감사와 사랑이 흘러나온다는 것이다. (강의가 마태복음 18장의 일만 달란트 빚진 자와 조금 짬뽕이 된 듯해서 약간 수정함, ㅋㅋ)
(눅 7:36) 한 바리새인이 예수께 자기와 함께 잡수시기를 청하니 이에 바리새인의 집에 들어가 앉으셨을 때에
(눅 7:37) 그 동네에 죄인인 한 여자가 있어 예수께서 바리새인의 집에 앉으셨음을 알고 향유 담은 옥합을 가지고 와서
(눅 7:38) 예수의 뒤로 그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씻고 그 발에 입맞추고 향유를 부으니
(눅 7:39) 예수를 청한 바리새인이 이것을 보고 마음에 이르되 이 사람이 만일 선지자더면 자기를 만지는 이 여자가 누구며 어떠한 자 곧 죄인인 줄을 알았으리라 하거늘
(눅 7:40)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시몬아 내가 네게 이를 말이 있다 하시니 저가 가로되 선생님 말씀하소서
(눅 7:41) 가라사대 빚 주는 사람에게 빚진 자가 둘이 있어 하나는 오백 데나리온을 졌고 하나는 오십 데나리온을 졌는데
(눅 7:42) 갚을 것이 없으므로 둘 다 탕감하여 주었으니 둘 중에 누가 저를 더 사랑하겠느냐
(눅 7:43) 시몬이 대답하여 가로되 제 생각에는 많이 탕감함을 받은 자니이다 가라사대 네 판단이 옳다 하시고
(눅 7:44) 여자를 돌아보시며 시몬에게 이르시되 이 여자를 보느냐 내가 네 집에 들어 오매 너는 내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아니하였으되 이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그 머리털로 씻었으며
(눅 7:45) 너는 내게 입맞추지 아니하였으되 저는 내가 들어올 때로부터 내 발에 입맞추기를 그치지 아니하였으며
(눅 7:46) 너는 내 머리에 감람유도 붓지 아니하였으되 저는 향유를 내 발에 부었느니라
(눅 7:47)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저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저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
◈ 신약과 구약의 인간 사이에는 단절이 !!
그래서 저는 이런 막달라 마리아와 같은 사람을 두고서 아주 특이한 존재라고 하는데, 도대체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느냐는 것이다. 그런 특이한 신약의 인간과 구약의 인간 사이에 분명한 단절이 있는데, 그렇게 단절된 것을 찾아내는 것이 오늘 강의의 핵심이라는 말이다.
그러니 "제가 이렇게 되겠습니다" 라고 하지 말라는 것인데, 왜냐하면 이미 끊어졌으니 말이다. 다만 주께서 그렇게 하신다는 말이다. 지독히 나쁜 환경 가운데서도 감사하는데, 과거에는 좋은 환경 속에서 기뻐했는데, 그런데 이제는 그런 환경에서는 오히려 허무를 느낀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자기가 좋아했던 것은 이제 싫어지고, 자기가 피하려고 했던 것은 오히려 땡기고 말이다. 그것이 바로 환난 가운데 인내를, 인내 가운데 연단을, 이 연단에 가서야 비로소 소망이 보인다는 것이다. 그래서 눈에 보이는 소망은 소망이 아니고, 눈에 보이지 않는 소망이 소망이라는 말이다.
(롬 5:3)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롬 5:4)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그렇게 참으로 특이한 자들에게만 이 신약성경이 이해가 되는데, 즉 적용되는 그 기준점이 과거와는 전혀 달라졌다는 것이다. 그렇게 다른 기준점이 바로 '단절' 인데, 즉 "나는 내 힘으로 천국에 갈 수 없다" 라고 말이다. 목사가 되어도 전혀 갈 수 없는 곳이 천국인데, 그것이 바로 단절이라는 것이다.
◈ 인간들의 교회 만들기 !!
이제 교재 130페이지에 있는 '인간들의 교회 만들기'부터 살펴보자.
** 교회는 주의 이름으로 세워지는 것이지, 결코 인간이 동원되어 세워지는 법은 없다. 만약 인간이 세워놓은 교회라면 '교회 있음' 그 자체를 신봉하는 것이다. 그러나 '주의 이름'으로 세워지는 교회는 사람들이 자신의 소유로 인정하지 않는 주님께 소유된 교회이다.
조금 어려운 말인데, 만약에 우리 인간이 교회를 세우데 되면 '교회 있음'을 신봉하게 된다는 것인데, 즉 구약에서 '성전의 있음'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게 인간은 교회 있음을 신봉하게 되는데, 그러나 진리로 세워진 교회는 또 따로 있다는 것이다.
구약에서 사람들이 성전을 외치고 부르짖는 것은, 그것은 성전을 신봉하자는 말인데, 즉 성전이 없이 안 된다는 것이다. 자기들의 막대한 자기의 자본과 열성이 투자된 곳이 바로 성전이니 말이다. 그런데 만약에 그 성전이 없어지면 어떻게 되겠는가? 지옥으로 가는가?
아까 제가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을 두고서 조금 어려운 말로 '과도기 과정' 이라고 표현했는데, 그렇다면 그 과도기가 무엇인가? 예수님은 누구에게로 왔는고 하니, 당연히 이스라엘에게로 왔는데, 그런데 그 이스라엘을 분해해보면, 이스라엘은 12지파로 구성되어있다는 것이다.
◈ 12지파와 12제자 사이에는 차이성이 !!
그러므로 12지파의 후손들이 바로 이스라엘이고, 예수님은 그러한 12지파로 구성된 이스라엘에 오셨다는 것이다. 그런데 오셔서 무엇을 하셨는고 하니, 12제자를 따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과거부터 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선택을 받은 민족이라고 자부했는데, 그렇다면 이렇게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받은 이스라엘이란 나라와 하나님이 육신이 되신 분이 직접 선택한 12제자 사이에는 반드시 차이성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제가 지난 시간에 뭐라고 했는고 하니, "본질은 차이성이 있어야만, 본질이 그 틈새로 나온다" 라고 했는데, 물론 기억이 나지 않겠지만 말이다. 주님도 이와 같은 방법을 사용하시는데, 기존의 12지파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엄연히 12지파가 존재하고 있는데, "우리는 다 아브라함의 자손이고, 이삭의 자손이고, 야곱의 자손이다" 라고 말이다.
그렇게 자기들이 약속의 자손이라고 모두가 다 확실히 믿고 여기고 있는데, 그런데 그러한 상황에서 예수님께서 12제자를 뽑아서 "나는 잃어버린 양을 찾으러 왔다" 라고 했을 때 어떻게 되겠는가? 기존의 12지파와 12제자들 사이에는 혼선이 생기게 된다는 것이다. 즉 사람들이 그런 혼동을 느낄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 12제자들은 과연 어느 쪽인가?
그러면 여기서 제가 묻고 싶은 것은, "이 12제자들은 과연 어느 쪽인가?" 라는 것이다. 예수님 쪽인지, 아니라면 기존의 이스라엘 쪽인지 말이다. 어떻게 생각하세요? 그런데 놀랍게도 이스라엘 쪽이라는 말이다. 그 정도로 인간의 육은 집착이 대단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도행전 1장에 보면, 제자들이 "주님, 이스라엘의 회복이 이때니이까?" 라고 하는데, 그런데 예수님은 가르쳐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너희의 알 바 아니요" 라고 하는데, 즉 허구가 아닌 허구라는 것이다. 분명히 실제로 이스라엘이 있는데, 즉 그렇게 이스라엘이 실제로 있으면서도 허구가 되어버린다는 말이다. 왜 그렇게 하시는가? 그것은 바로 주님의 새로운 선택 때문에 말이다.
(행 1:6) 저희가 모였을 때에 예수께 묻자와 가로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때니이까 하니
(행 1:7) 가라사대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 바 아니요
(행 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 그들은 예수님 대신에 12지파를 !!
하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12지파를 신봉하고 있는데, 주님은 그러한 우상 덩어리를 12제자를 뽑아서 대비시켜서, 그들이 믿고 있는 것을 버리도록 촉구했지만, 하지만 그들이 버릴 리가 있는가? 그들이 왜 예수님을 죽였겠는가? 사람을 죽이는 것이 그들의 취미가 아닌데 말이다. 자기들은 기존 12지파를 버리지 못하겠다는 의미라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를 죽일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성도는 예수님 당시의 사람들과 같은 입장에 놓여있는 교회 신봉자로부터, 그야말로 엄청난 미움을 받고, 또한 배척을 받고, 결국에는 죽임을 당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바로 그런 관계 속에 놓일 수밖에 없는 것이 지금의 현실이라는 말이다.
물론 주님의 이름으로 만든 교회와 인간이 세운 교회가 똑같은 교회라고 하겠지만, 그러나 그 둘이 같은 교회 내에서 어떻게 차이가 나는지, 그러한 차이점을 일부러 만들어내는 것이 주님께서 하시는 일이고, 신약의 성도들이 가야할 좁은 길이라는 말이다.
◈ 주님께서는 어떤 교회를 세웠는가?
만원짜리 지폐가 하나 흘렀는데(?), 그렇다면 여기에서 우리가 궁금한 것은, "과연 주님께서는 어떤 교회를 세웠는가?" 라는 것인데, 그것이 마태복음 16장에 나오는데, 주님께서는 자기가 선택한 12제자 위에다가 교회를 세워버린다는 것이다. 그러니 기존의 집단은 부정이 되는데, 저주의 대상으로 말이다.
(마 16:15) 가라사대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마 16:16)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마 16:17)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마 16:18)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 교회는, 예수님과 12제자의 관계를 통해서 !!
그렇다면 예수님이 그렇게 12제자들의 바탕 위에 세우지 않은 교회는 교회가 아니라는 이야기인데, 즉 주님께서 머릿돌이 되시고 그 위에 사도와 선지자의 이름으로 성령께서 전을 만든다고 했으니까 말이다. 그러므로 "교회가 무엇이냐?" 라고 하는 것은, 예수님과 12제자가 어떤 관계인지, 즉 그러한 관계가 유지되면 교회이고, 그런 관계가 유지되지 않으면 당연히 교회가 아니라는 것이다.
(엡 2:20)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
(엡 2:21)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가고
(엡 2:22)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 예수님과 12제자의 관계는, 바로 '선택' !!
물론 말로는 굉장히 쉬운데, 맞는 말이고 말이다. 그렇다면 예수님과 12제자가 어떤 관계인가? 도대체 예수님이 무엇을 하셨는가? 그것이 바로 '선택' 이라는 것이다. 주님께서 하신 일이 선택인데, 그런데 사람들이 선택을 받으려고 하는 것이 아니고, 주님께서 일방적으로 선택을 했다는 말이다. 주님께서 그렇게 하신 것은 아버지께서 이미 창세 전에, 즉 성부와 성자 사이에 한 계약에 의해서 선택을 했다는 것이다. 창세 전에 그렇게 했는데, 예수님이 자기 마음대로 한 것이 아니라 말이다.
◈ 아빠, 진주예요. 너무 보고 싶어요 !!
어제 저녁에 독일에 있는 딸에서 전화가 왔는데, 자기가 다니는 교회의 목사가 요한복음 3장 16절을 설교하면서,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다 사랑하는데, 그들이 믿지 않아서 구원받지 못했습니다" 라고 하더라는 것이다. 분명히 아닌 것 같은데, 그런 증거(?)가 어디 있는지 좀 가르쳐 달라는 것이다. 물론 전화를 한 주된 목적은 사랑하는 아버지 음성이 듣고 싶어서 했겠지만 말이다. 그래서 제가 요한복음 17장 9절을 이야기해주었다는 것이다.
(요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요 17:9) 내가 저희를 위하여 비옵나니 내가 비옵는 것은 세상을 위함이 아니요 내게 주신 자들을 위함이니이다 저희는 아버지의 것이로소이다
여기 두 개의 구절을 비교해보면, 3장 16절에서는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라고 하는데, 그런데 17장 9절에 보면 "내가 비옵는 것은 세상을 위함이 아니요" 라고 한다는 것이다. 물론 이 세상을 버린 것도 아니고 말이다. 그렇다면 이것이 무슨 의미인가? 두 개중에서 하나가 잘못된 것인가?
◈ 예수님은 알뜰 주부 !!
이것이 무슨 의미인고 하니까, 이미 이 세상 안에서 아버지께서 지정해놓은 자기 백성이 따로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주부가 마트에 물건을 사러간다고 해서 마트 물건이 모두 다 사는 것인가? 물론 그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마트에 가서 자기만 필요한 것을 골라서 산다는 것이다. 마트에 있는 물건을 전부다 구입하는 것이 아니고 말이다.
그렇게 주님께서는 이 땅에 쇼핑(?)을 하려고 오셨는데, 물론 그 대가가 자기 목숨이었지만 말이다. 그런데 쇼핑을 해도 충동구매를 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구입할 것을 목록으로 다 적어왔다는 것이다. 즉 이미 생명책에 기록된 대로 그 목록을 뽑아서 데리고 간다는 말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자유이고 선택이라는 것이다.
◈ 주님의 선택은 인간의 선택을 !!
물론 이 선택에 대해서 인간들이 강력하게 반발을 하고 저지를 하는데, 그렇게 하는 이유는 하나밖에 없는데, 그것은 바로 인간의 가능성이, 즉 인간의 권리와 자유가, 인간의 그러한 모든 권리가 다 깨어지니 말이다. 인간의 행동은 자기 영광성을 위해서 하는데, 인간은 그냥 행동에 나서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자기 영광을 쫓아서 하고, 또한 선택을 하면서 행동을 한다는 말이다.
이렇게 인간은 언제나 자기의 영광성을 쫓아서, 즉 자기 선택의 값어치를 발휘하는 쪽으로 나간다는 것이다. 심지어 "아들을 낳을까, 딸을 낳을까?" 라는 것도 선택을 하면서 말이다. 그러니 인간은 그런 자기의 선택이 무산될 때, 그것은 인간의 선택을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자체에 대한 공격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 세상에 결국 남는 것은 무엇인고 하니, 혹시 'B29' 라고 아세요? 미국의 무서운 폭격기인데, 주님께서는 바로 이 'B29' 라는 천사들을 대대적으로 몰고 와서 이 세상을 공습한다는 것이다. 마치 구약에서 이스라엘이 여리고 성을 점령하듯이 말이다.
◈ 하나님의 선택과 할례 !!
이러한 하나님의 선택이 구약에서부터 있었는데, 즉 선택하는 방식이 구약의 법과 제도 속에 다 들어있었다는 말이다. 물론 백성들은 겉모양만 보고 그 속에 담겨있는 것은 몰랐지만 말이다. 그것이 과연 있는지 여호수아 5장을 보겠는데, 7절부터 한번 살펴보자.
(수 5:7) 그들의 대를 잇게 하신 이 자손에게 여호수아가 할례를 행하였으니 길에서는 그들에게 할례를 행치 못하였으므로 할례 없는 자가 되었음이었더라
(수 5:8) 온 백성에게 할례 행하기를 필하매 백성이 진 중 각 처소에 처하여 낫기를 기다릴 때에
(수 5:9)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오늘날 애굽의 수치를 너희에게서 굴러가게 하였다 하셨으므로 그곳 이름을 오늘까지 길갈이라 하느니라
여기에 '할례'가 나오는데, 여호수아가 애굽에서 나와서 광야에서 태어난 자들이 할례를 받지 못해서 그들에게 할례를 행했는데, 그것을 보고 하나님께서 뭐라고 하셨는고 하니, 9절에 보면 "오늘날 애굽의 수치를 너희에게서 굴러가게 하였다" 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곳 이름을 '길갈' 이라고 했고 말이다. 그렇게 '굴러가게 했다' 라는 것은, 뭔가 더러운 것이 떨어지게 했다는 말인데, 아무튼 미련 없이 다 버리게 했다는 것이다.
◈ 할례 받은 자들과 받지 않은 자들을 구별하는 이유는?
여기 이런 장면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