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9장 1- 8절 제목 : 변화산의 예수님
막 9: 1- 8 (변화산의 예수님)
이름 : 우리교회(IP:220.81.176.150)
본문 : 마가복음 9장 1- 8절
제목 : 변화산의 예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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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08-11-23 13:36
변화산의 예수님
2008년 11월 23일 본문 말씀: 마가복음 9:1-8
막 9:1) 『또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섰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하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 하시니라』
(막 9:2) 『엿새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더니 저희 앞에서 변형되사』
(막 9:3) 『그 옷이 광채가 나며 세상에서 빨래하는 자가 그렇게 희게 할 수 없을 만큼 심히 희어졌더라』
(막 9:4) 『이에 엘리야가 모세와 함께 저희에게 나타나 예수로 더불어 말씀하거늘』
(막 9:5) 『베드로가 예수께 고하되 랍비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사이다 하니』
(막 9:6) 『이는 저희가 심히 무서워하므로 저가 무슨 말을 할는지 알지 못함이더라』
(막 9:7) 『마침 구름이 와서 저희를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하는지라』
(막 9:8) 『문득 둘러 보니 아무도 보이지 아니하고 오직 예수와 자기들뿐이었더라』
사람들은 지상에서 천상을 바라보는 식으로 신앙생활하려 합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을 그것을 뒤집습니다. 천상에서 지상을 바라볼 줄 알아야 한다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열심히 해서 구원되는 것이 아니라 아예 지상의 모든 인간이 이미 ‘죽은 자’에 해당됨이 드러납니다.
산자와 죽은 자가 함께 모여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고 여기는 것은 산 밑의 일상적인 인간들이 생활에서는 상상도 못할 것입니다. 산 자는 산 자들 끼리, 죽은 자들은 죽은 자들 끼리만 모여 산다고 여깁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바로 그런 사고방식이 실은 죽은 자들의 사고방식인 것을 알려주십니다.
'더 아더스‘라는 영화에 보면, 이미 두 자녀들을 목졸라죽이고 자신도 권총 자살한 부인이 유령이 되어 큰 저택에 사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이 유령이 된 부인은 여전히 자신이 산 자라고 여기고 있습니다. 이런 유령을 괴롭히는 자는 도리어 같은 유령이 아니라 진짜 빈 집을 둘러보러오는 부동산 중개인입니다.
이처럼 이미 죽은 자인 엘리야와 모세와 이야기를 하고 있는 예수님이 제대로 된 산 자입니다. 그런데 이런 광경에 대해서 소위 스스로 살아있다고 자부하는 제자들에게는 참으로 기묘하고 신기한 일로 보입니다. 그만큼 자신들에 대해서 여전히 오해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천국의 관점에서 볼 때, 자신들은 이미 죽은 자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아랫 쪽에 사는 자를 예수님께서 윗 쪽으로 불러올리십니다. 이로서 이 두 개의 세계는 서로 연관이 있음이 드러났습니다. 모세와 엘리야가 이 모임에 합세했다는 것은 천국은 결과에 해당되고 그 결과를 낳기 위해 세상이 원인으로 있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천국의 원리가 뭐냐 하면 결과가 원인을 취소시켜 버리는 겁니다.
인간 세계는 인간이 만드는 자리입니다. 인간이 원인이 되어서 생겨나는 자리입니다. 거기에 비해서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이 만드시는 나라입니다. 이렇게 되면 인간은 쓸데없이 인생 산 것이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결과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채 지금도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밑의 세상에서 무엇을 하든지 간에 그들은 무엇하고 있는지 본인들도 모릅니다. 쓸데없는 의미부여나 의미를 만들어 낼 필요도 없고 이유도 없습니다.
누가복음 23:34에 보면,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인생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모릅니다. 무슨 뜻으로 사는지 모릅니다. 이유도, 영문도 모르는채 삽니다. 사람들은 이 세상에 살면서 힘들면, ‘그만 칵 죽어버리지’라고 말합니다. 문제는 죽는 것이 아니라 죽어도 안 죽는다는데 있습니다. 스스로 죽이고 죽여도 못 죽인다는데 있습니다.
우리 몸을 우리가 만들었으면 우리라는 존재를 취소시킬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몸은 하나님이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아무리 우리가 애쓰고 하나님께서 우리 몸을 취소시키지를 않습니다. 기어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용도로 영원토록 활용하고야 마십니다.
하나님 나라는 우리 지상의 인간들이 생각하는 그런 식으로 산 자와 죽은 자를 구분하지 않습니다. 영원히 축복받을 자와 영원히 저주받을 자만 있을 뿐입니다. 지상의 삶이 어떠한 삶이라는 것은 베드로가 잘 대변해주고 있습니다. 5절에 보면, “베드로가 예수께 고하되 랍비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사이다 하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언뜻 보기에 베드로 입장에서는 예수님에게 자신의 즐거운 뜻을 그런 식으로 제대로 표현했다고 여겨질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 다음 말씀인 6절을 보아야 합니다. “이는 저희가 심히 무서워하므로 저가 무슨 말을 할는지 알지 못함이더라” 베드로와 제자들은 여전히 주제 파악을 못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빌라 세 채가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과 엘리야와 모세를 무엇 때문에 하나님께서 함께 등장시켰느냐를 알라는 것입니다. 베드로의 이러한 제안은 인간들이 평소에 지상에서 살아가는 의식을 말해줍니다. 이 땅의 인생들의 삶이란 자신이 쌓는 공든탑을 계속 소지하는데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 공든 탑이 무너뜨리십니다. 사람들의 공든 탑은 다 무너져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그 다음 말씀이 천국을 이루기 때문입니다. 7절의 말씀입니다. “마침 구름이 와서 저희를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하는지라”
천국에는 인간들이 애지중지하는 공든 탑이 필요치 않습니다. 오로지 예수님의 공로탑만 있을 뿐입니다. 왜냐하면 인간들은 모두 죽은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엘리야와 모세가 왜 등장했는지를 알아 봐야 합니다. 엘리야는 죽을 때 불수레를 타고 하늘로 승천한 자입니다.
하지만 그 당시 선지학교 생도들은 엘리야의 시신을 찾기 위해 사흘 동안 해맸지만 소용없었습니다. 그들은 여전히 자기 안목에만 갇혀 있습니다. 엘리야가 기적으로 살아났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자신들이 죽어있는 유령이다는 점을 알아야했습니다. 모세의 경우, 그는 시내산에서 직접 하나님을 뵙습니다.
그가 하나님에게 받은 내용은 곧 ‘죽은 자’인 자기 백성이 어떻게 천국에 입성할 수 있는 ‘산 자’로 만들 수 있느냐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그 핵심은 제사였습니다. 모세가 이런 구원 방식을 받고 내려올 때에 산 밑에서 죽은 인간들이 나름대로 구상한 구원방식이 따로 있었습니다.
그것은 ‘형식’이었습니다. 인간들은 껍데기에 불과한 형식으로 구원을 이루어내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모세가 전수받은 것은 형식이 아니라 ‘희생’이었습니다. 하나님의 희생의 피로 말미암아 죽은 자가 산 자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과 엘리야와 모세와 이야기한 주제는 예수님의 별세에 관한 이야기였습니다. 이제 제자들 차례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했습니다.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라는 지시를 받았습니다. 제자들은 자신의 자리를 삭제당해야 합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가야합니다. 그래야지만 예수님의 자리만이 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는 우리 인간의 자리가 아닙니다. 예수님의 자리입니다. 천국도 그런 공간입니다.
비록 엘리야와 모세도 합세한 천국이지만 결국에는 예수님의 공로만이 인정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만이 하나님보시기에 유일하게 ‘산 자’이기 때문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이 아무 것도 아님을 알게 하옵소서. 뭘해도 아무 것도 아님을 인정케 하옵소서. 그래서 늘 우리 자신의 자리가 주님의 공로에 의해서 삭제당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