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1010-(1) 서울강의녹취 : 에베소서 제 21강
20081010-(1) 서울강의녹취 : 에베소서 제 21강
이름 : 오용익(IP:59.3.201.241)
에베소서 제 21강 (이 근호목사, 2008년 10월 10일-a, 서울의존교회)
에베소서 4:8
“그러므로 이르기를 그가 위로 올라가실 때에 사로잡힌 자를 사로잡고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셨다 하였도다.”
여기에 선물이 나옵니다. 믿음이 선물인데 그 선물보따리를 풀면 그 믿음이라는 상자 안에 어떤 내용이 들어 있느냐? 여기 상자가 있습니다. 이 상자를 믿음이라고 합시다. 이것이 믿음인데 이 믿음을 선물상자로 주신다는 겁니다. 어떤 분은 ‘목사님, 저는 안 받았는데요.’ 하시는데 안 받은 분은 할 수 없습니다.
아무에게나 다 주면 그것은 선물이 아니지요. 하나님이 알아서 택한 백성에게 주는 것이기에 안 받으신 분은 할 수 없습니다. 제가 드리는 선물은 아닙니다. 하여튼 성경에 의하면 선물을 받았다는 겁니다. 선물을 받은 사람의 특징은 ‘야, 선물 안 받았으면 안 믿을 것인데 선물을 받았기 때문에 그래서 나는 믿게 되었다.’ 라는 공통적인 고백을 하게 됩니다.
‘내가 믿는 것은 선물이다. 이것은 도저히 안 믿겨지고 믿고 싶지도 않고 안 믿으려고 했는데 이 선물을 안 받았으면 절대로 나는 예수를 안 믿는다.’ ‘절대로 예수 안 믿는다.’ 고 나올 사람들이 저와 여러분입니다. 그 선물 안 받았으면 꼬치꼬치 따지면서 ‘이래서 나는 예수 안 믿고 이래서 나는 예수를 버리고 이래서 나는 예수님을 포기하고 이래서 나는 예수님으로부터 돌아섰다.’
선물을 안 받은 사람은 전부다 그런 이야기들이 줄줄 이어져 나오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같은 교인이라도 살아가면서 진짜 선물 받은 사람과 안받아놓고 받은 체 하는 사람들을 확실하게 구분하기 위해서 교회나 개인적으로 일들이 자꾸 툭툭 하고 터집니다.
일이 벌어지게 되면 선물 안 받은 사람은 ‘열심히 믿는데 왜 저에게 이런 어려운 일이 생깁니까?’ 하고 따지는 식으로 나올 것이고 선물을 진짜 받은 사람은 ‘야, 보통 사람은 이정도 같으면 교회 발길 끊었다. 그래도 하나님께서는 나 같은 인간도 구원하려고 선물을 주셔서 이런 일이 있어도 여전히 사랑하는 것을 보니 내가 선물을 받기는 받은 모양이다.’
이렇게 자기 선물 받은 것을 다시 한 번 새롭게 알게 되는 겁니다. 방금 한 이야기를 그림으로 그리면 이렇습니다. 1) 선물이라 하는 것은 내가 못 만들어낸다. 2) 그래도 선물은 있다. 이것이 선물입니다. 만약에 ‘이 병을 선물로 줄게’ 라고 했을 때, ‘나에게는 이게 없었는데 이것은 내가 못 만들어내는 것인데, 그래도 나에게는 이 비타 500이 여기에 있네. 아하, 이게 선물이구나.’ 이렇게 선물로 확인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여러분이 앞으로 10년, 20년, 30년 우리 아이들도 앞으로 한 50년 지나면 할아버지 할머니가 될 겁니다. 그런데 세월이 자꾸 갈수록 뭘 느끼느냐 하면 ‘하나님, 이것은 제가 안 만들었어요. 이것은 제가 노력해서 얻은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게 왜 저에게 있습니까?’ 라는 식으로 감사하면서 하나님께 고백하게 되어 있습니다.
선물 받은 사람의 특징이 그렇습니다. 그래서 달라고 하지도 않았고 원하지도 않았는데, 내가 내 쪽에서 원인제공을 하지도 않았고 나는 절대 못 만들어 내는데 그래도 있을 때 그것이 선물입니다. 이것 전체를 괄호로 하고 이것이 1) 번이라면 오늘 제가 이야기하려고 하는 두 번째는, 내가 못 만들어내는데 그래도 나에게 있다면 그러면 여기 있는 이것은 누가 만들었느냐, 하는 겁니다.
‘당신은 누구시길래 나에게 이런 선물을 주셨습니까? 당신은 누구시며 뭐하는 분이십니까? 당신은 왜 저에게 나타나셨습니까?’ 하고 묻는 거예요. 여러분이 보기에 여기 저 말고 아무도 없지요. 그런데 제가 갑자기 강의하는 중에 ‘그런데 아저씨는 누구세요? 뭐하는 분이세요?’ 이렇게 하면 여러분이 ‘저 목사님이 미쳤구나.’ 할 거예요.
‘목사님, 그 옆에 아무도 없습니다. 왜 자꾸 아무도 없는 곳에 말을 걸고 이야기를 하십니까?’ ‘목사님이 미쳤어.’ 할 거예요. 그런데 저는 남이 저보고 미쳤다고 하든 말든 ‘아, 그렇게 하셨어요? 사로잡힌 자를 사로잡고 선물을 주셨어요? 아하, 그렇게 하셨군요’ 하면서 저와 주님이 소곤소곤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다른 사람보기에는 저 혼자 있는 줄 알지만 저 입장에서는 같이 계신 거예요. 그것을 또한 느끼게 되는 겁니다. 예를 들면 스데반 집사님이 돌에 맞아 죽을 때 스데반 집사님 옆에는 아무도 없었어요. 그냥 던져진 돌멩이 만 수북하게 쌓이고 분노하는 민중들만 있습니다. 그런데 스데반 집사님은 말합니다. ‘주여, 주님 보입니다. 저 사람들 하는 짓을 알지 못하오니 저들을 용서해주옵소서.’
이렇게 할 때 다른 사람들은 뭐라고 했겠습니까? ‘저게 얻어맞더니만 완전히 돌아버렸군.’ 그런데 성경은 뭐라고 합니까? “그 때 스데반 집사님을 하늘에서 예수님께서 영접하기 위해서 일어나사 지켜보고 계셨다”(행 7:54-56)고 되어 있지요. 그래서 성경에 나오는 구절들은 흉내 내도 소용없어요. 실제로 있는 일이지만 영적인 사람만이 공감할 수 있지 눈으로 보는 것만 보고 사는 사람은 그 성경에 들어갈 수가 없어요.
이 성경의 모든 것은 한마디로 해서 뭐라고 하는가? “숨어계시는 하나님”입니다(이사야 45:15).
이사야 45:15
“구원자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진실로 주는 스스로 숨어 계시는 하나님이시니이다.”
숨어 계셔야 선물이 선물로 나오는 거예요. 숨어계신데 뭔가 선물로 툭 하고 주어지는 겁니다. 숨어계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나타난 것은 선물인 것을 알고 그 선물을 흔적으로 삼아서 찾아가보면 하나님은 숨어계시는 분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아는 하나님은 다 거짓이죠. 우리가 아는 하나님은 내 열심을 받고 내 충성이나 받는 하나님은 내가 만들어낸 가짜 하나님입니다.
진짜 하나님은 숨어계셔서 선물로만 소통하고 선물 안에서만 대화하는 겁니다.
(하나님) “내가 준 선물 잘 가지고 있느냐?”
(우리) “예 잘 가지고 있어요.”
(하나님) “요새 경제도 어려운데 웬만하면 예수 믿지 말지.”
(우리) “저도 예수 안 믿고 싶어요. 그런데 선물이 와버렸는데 할 수 있습니까? 이 선물은 어쩌고요.”
(하나님) “몸 아픈데 이제 그만 발 끊고 하나님 원망이나 하지 그래.”
(우리) “원망 많이 했습니다. 많이 했는데 아무리 해도 하나님이 주신 선물은 제가 부정할 수가 없네요.”
그렇게 되는 겁니다. 제가 얼마 전에 경상북도 의성이라는 곳에 갔는데 거기서 중국집에 들렀어요. 시골 중국집이 대체로 비싸기만 하면서 맛은 별로 없습니다. 짬뽕 곱빼기를 시켜서 먹는데 얼마나 맛이 없는지요. 의성시 체육대회 한다고 사람들 다 가버리고 손님도 하나도 없어요. 그런데 그 중국집 주인이 뭘 보고 있길래 뭔가 하고 봤더니 절에서 중들이 불자들 교육시키는 교육안이 거기 나와 있어요.
내용물이 제법 두꺼워요. 보니까 ‘참선을 몇 번 하고, 참선을 할 때는 자세를 어떻게 하고, 기도는 어떻게 하고, 법경을 하루에 몇 번 외우면 부처님의 복을 받는다’는 내용들이 상세하게 나와 있어요. 그게 하나의 법전 같아요. 마지막에는 그걸 그대로 해서 성불하라고 나오는 거예요. 숨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너 그거 하면 복주고 안하면 저주한다.’ 그거예요.
아무것도 몰랐는데 툭 하고 선물이 온 것이 아니고, ‘네가 참선을 이런 식으로 하게 되면 부처님의 복을 주는데 만일에 실패하고 실수하면 다음에 기회를 또 주는데 제대로 자세를 제대로 해서 다시 하게 되면 복을 받는다.’ 이런 겁니다. 어느 것이 수월해요? ‘참선을 하는데 꾸벅꾸벅 졸면서 참선을 했다.’ 그렇게 하면 그 책에 의하면 복이 없는 겁니다.
참선을 할 때는 정신을 바짝 차리고 해야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세요. 정신을 바짝 차려 본들 뭐가 되겠습니까? 중국철학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내일의 나는 오늘의 나를 비판한다.’ 만약 내가 내일이 되면 반드시 오늘의 나의 모습을 비판하게 되어 있고 또 그 다음날의 나는 그 전날의 나를 비판하게 되어 있어요.
오늘은 내가 참선을 바르게 한다고 했는데 그 다음날 되면 그것이 성에 차고 만족이 되겠습니까? 만족이 안 되지요. 그 다음날 되면 ‘내가 더 정신을 차려야지’ 라고 합니다. 정신을 차리는 것도 ‘더 정신’ 그 다음에는 ‘더, 더 정신’ 그 다음에는 ‘더, 더, 더 정신’ 그러면 그 다음에는 계속 ‘더, 더, 더, 더 정신’ 이 되겠지요.
여러분 많이 해보셨을 겁니다. 의존교회 아이들은 목사님이 그런 것을 안 시키니까 지금모르겠지만 기존교회 다니시던 분들은 다 아실 겁니다. 거기는 계속 시킵니다. 마치 절에 다니는 사람을 시키듯이 교회도 교인들을 가만 두면 아무것도 안되고 뭘 계속 시켜야 돈이 나오니까요. 계속 시키고 훈련합니다.
그것은 선물이라는 개념은 없는 거예요. 그것도 숨어서 몰래 선물 주는 분이 아닙니다. ‘숨어 계시는 하나님’이 이사야 45장의 이야기인데 이사야 53장에 가면 단순히 숨어계시는 정도가 아니라 그 숨어계시는 분이 이 인간 세상에 나타날 때도 숨어계시는 그 이상으로 사람들이 못 알아보는 방식으로만 일을 하도록 되어 있어요.
이사야 53장에 유명한 대목이 나오지요? “그의 찔림은 누구의 허물을 인함이요?”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의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것을 누가 믿었으리오.” 만약 우리가 절에 다닌다 치고 중이 우리에게 자꾸 시킨다. ‘참선은 이렇게, 기도는 이렇게, 헌금은 이렇게 ….’ 그것을 시키는 대로 하다가 틀리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하루에 열 번씩 착한 일을 해야 복 받는다’고 했는데 아홉 번을 하면 어떻게 됩니까? 복 못 받지요. 쿠폰 열장 가져오면 피자 한판을 준다고 하는데 아홉 장 가져오면 줍니까? 안주잖아요. 지금 애는 고3이고 대학을 가야 하는데 거기 보니까 열 번을 착한 일을 하면 소원 대로 된다는 거예요. 지금 제가 지어내는 이야기가 아니라 그 책에 나오는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하루에 열 번 착한 일을 하면 소원이 이루어진다.’ 하는 거예요. 쿠폰열장 가져오면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거 아닙니까? 착한 일 열 가지 못 뽑아내겠습니까? 내가 행동 똑바로 해서 쿠폰 열장 모아서 소원 이루어지는 겁니다. 이게 우리가 알고 있는 신이고 우리가 알고 있는 절대자입니다. 그런데 이사야 53장에 보면 뭐라고 합니까? 너희의 허물을 인하여 누가 죽었고? ‘내가 대신 죽었다.’ 라고 합니다.
쿠폰 열장 모을 때는 ‘내 운명, 내 팔자는 나 하기 나름이다’는 겁니다. ‘사람 사는 것은 나 하기 달렸다’는 그것을 일관되게 밀어붙이는데 성경의 숨어있는 하나님은 말하기를 ‘너희 허물로 인하여 내가 죽었고’ 라고 합니다. ‘내 쪽에서 내행동 똑바로 할게요.’ 가 아니라 ‘너는 가만히 있어. 내가 알아서 할게.’ 라고 합니다.
그림으로 그려봅시다. 지금 제가 강조하는 점을 잘 아셔야 합니다. 1)번은 뭡니까? 못 만들어낸다. 그래도 있다. 참 신기하죠. 2)번은 뭡니까? 그래도 그 선물주신 분은 누구세요? 그 2)번을 지금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 ‘누구세요’를 설명하는데 이사야 45장을 이야기했어요. 그러면 선으로 죽 그어보자는 거예요.
여기가 창조고 여기가 십자가라면 이사야를 보면 45장에 ‘숨어계시는 하나님’입니다. 그 다음에 53장에 보면 뭐로 나오죠? 십자가 나오죠. ‘너희 죄를 인해서 내가 죽었다.’ 십자가이야기가 여기서 나오죠? 그 다음에 이사야 61장 넘어가면 성령이야기가 나온다고요.
이사야 45장에서는 그냥 숨어 있기만 했던 하나님이 이사야 53장의 십자가로 점점 더 가까이 가면서, ‘왜 구원받는 것이 선물로만 되는가?’를 차츰 차츰 부각시키는 겁니다. 부각이 되는데 여기는 그냥 숨어계시는 하나님, 구름 속에 햇님이 숨어 있듯이 그렇게, 숨어계시는 하나님인데, 점점 십자가로 가까이 가면, 하나님이 숨어계시는 정도가 아니고 ‘너는 구원에 무능하다. 뭘 해도 소용없다.’ 이런 것을 강조하면서 햇빛은 햇빛대로 오는 거예요.
‘너는 죄인이다. 무능하다. 그런데 내가 너를 위해 대신 죽으심으로 드디어 너는 영생 얻었다.’ 이렇게 된다는 말이죠. 여러분이 교회 몇 년 다녔는지 모르겠지만 교회 출석하면 할수록 무엇이 성립되어야 하느냐 하면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하나의 선이 좍 이어져야 돼요.
이렇게 선이 이어져 줘야 여러분이 사회에 나가서 취직을 하든지 결혼을 하든지 앞으로 여러분이 사회에서 어떤 파트에서 일하든지 간에, 그 하나님의 선물이 주어진 노선, 그 선이 있잖아요. 그 선물이 주어진 노선을 알게 되면 그 바깥 변두리에서 어떤 일이 벌어져도 거기에 동요되거나 흔들림이 없어요.
그렇지 않고 여러분이 ‘나는 착한 일 했습니다. 복 주세요. 하나님! 나는 교회 충성했으니까 복주세요. 하나님!’ 이렇게 나온다면 만약에 여러분의 인생에 갑자기 악플에 달린다든지, ‘죽어라. 사채놀이를 하다니…’ 이런 식으로, 혹은 ‘저런 얼굴 가지고 텔레비에 나오나?’ 한다든지 ‘저런 인간이 과장? 아이고, 내가 과장 하겠다.’ 이런 식으로 온갖 모함이 들어 올 때에 그만 흔들리게 됩니다.
이런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의 선물 노선이 이어져 있지 않으면 ‘하나님, 나 이제 교회 그만 가렵니다. 예수 못 믿겠습니다. 해도 나에게 아무런 이익도 없는데 내가 왜 갑니까? 내가 지금 하나님을 안 믿는 것은 하나님책임이지 내 책임이 아닙니다. 나는 할 도리를 다 했는데 하고자, 하고자 했지만 이제는 힘이 부쳐서 못하겠습니다. 하나님은 벙어리 하나님이고 하나님은 나에게 존재하지 않습니다. 내가 존재하지 하나님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라는 식으로 한다는 말이죠.
그동안 교회에서 뭘 들었습니까? 사실은 교회 탓도 못하지요. 교회에서 목사들이 아예 이런 것을 이야기하지 않았으니까요. ‘그저 오는 손님들 복습니다’라고 했기 때문에 그 소리만 만 날 들어서 ‘착한 일 하면 복주겠지. 착한 일 하면 복주겠지. 복이 오도록 내가 인내해야지. 하나님은 나쁘지만 내가 착한 사람이니까 선한 내가 참아야지.’ 라는 식이었지요.
요새 교인들 그러잖아요. ‘아이고, 예수는 못되었어도 착한 내가 참아야지. 내가 믿어줘야지, 뭐.’ 성경전체를 꽤 뚫어보는 안목이 증시가 1200선으로 내려간 이 시점에서 대단히 중요합니다. 자 그렇다면 여기4장 8절에 봅시다.
엡 4:8
“그러므로 이르기를 그가 위로 올라가실 때에 사로잡힌 자를 사로잡고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셨다 하였도다.”
선물이 어떻게 오는가? 선물이 오는 노선 죽 앞으로 가봅시다. 그 앞으로 죽 가보면 그 앞에 전쟁이 있었고, 중간에 숨어계시는 하나님이고, 십자가 예고하고, 십자가 지시고 그 뒤에 우리에게 선물 주시고. 우리는 ‘십자가! 아이고, 구원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그것만 챙길 것이 아니라 어떻게 십자가 지신 그것이 선물이 되는가, 그 바탕까지 가보면 여기에 전쟁이 있었어요.
전쟁이 있었는데 에베소서 4장에서는 그 전쟁에 대해서 ‘그가 위로 올라가실 때 사로잡힌 자를 사로잡고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었다.’ 라는 이야기를 한다는 말이죠. 이 사로잡혔다는 말은 뭔가 전쟁이 있었다는 말이고 전쟁에서 포로를 잡았다는 뜻이거든요.
‘사로잡힌 자를 사로잡고 전쟁이 있었기 때문에 선물을 주었다.’ 라고 하니까, 에베소서 4장의 이 이야기는 옛날에 있던 전쟁이야기, 더 나아가면 창조이야기까지 십자가 하나로 다 설명이 되고 다 연결된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예요. 창세기부터 전부 연결되는 거예요. 어려우면 쉽게 이야기 하겠습니다.
우리에게 선물을 주시는 것은 그냥 ‘먹어라.’ 하고 선물을 주시는 것이 아니고 그 전에 뭔가 전쟁이 있었어요. 그 전쟁에서 승리자가 패배자의 것, 전리품을 가질 수 있는 권한이 있습니다. 노예를 사로잡았다는 말은 드디어 승리자가 확정되었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말로 하면 힘드니까 실습을 해야겠습니다.
여기 비타 500을 주면서 ‘여기 선물이다.’ 그러면 선물 받은 학생이 ‘어? 내게 없는 것인데 주셨네요. 이것이 바로 선물이구나. 감사합니다. 그런데 이 선물은 어디서 났지요?’ ‘내가 전쟁을 했거든.’ 비타 500을 가지기 위한 전쟁을 벌였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 인간에게 영생이란 것은 빼앗지 아니하면 생길 수 없는 거예요.
전쟁에서 승리하지 않으면 가질 수 없는 거예요. 그 말은 우리 힘으로는 가질 수 없고 우리 힘으로는 얻을 수 없는 것이 영생이고 천국이 되는 겁니다. 주님께서 전쟁을 일으키셔서 승리자가 되셔서 승리자의 선물을 우리에게 줬다는 말은 ‘이제는 네 힘으로는 안 되는 것이 확실하지? 네 힘으로는 안 되지?’ 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제가 어렵다고 한 것은 사람은 자기 신체를 가지고 있고 뭔가 하고자 하는 일이 있습니다. 그래서 ‘뭐든지 내가 해서 안 되는 일이 없다.’ 이것이 사람들의 생리이고 특징입니다. ‘구원받는 것은 내가 열심히 하면 될 수 있고 사업하는 것도 내가 열심히 하면 될 수 있다.’ 뭐든지 내가 해서 안 되는 것이 없다고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데 주님께서 구원받는 것을 선물로 툭 던지니까 ‘내가 해서 안 되는 것이 있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되요.’
‘내가 해서 안 되는 것이 있다’는 그것이 무슨 말이냐 하면 그 동안 나는 세상을 너무 좁게 봤다는 말입니다. 세상을 너무 좁게 보다 보니까 좁은 세상에서는 뭐든지 내가 하면 될 것 같고 뭐든지 내가 하면 승리할 것 같고 전부 다 하기만 하면 얻을 것 같고, 좁게 보니까 그런데 넓게 보니까 내가 아무리 애써도 안 되는 것이 많다는 것을 우리에게 일깨워주면서 선물로 주시는 겁니다.
그러니까 선물을 받았으면 ‘나는 내 위주로 너무 세상을 좁게 봤구나.’ 하는 것을 함께 깨달아야 됩니다. 너무 변두리, 너무 내 것 위주로만 알았고, 아무것도 모르면서 세상 끝장내려고 자살이나 하고요. 세상 뭐 안다고. 세상 뭐 압니까? 그저 하다, 하다 안 되면 ‘에라 죽어버리자!’ 하고요.
세상이라는 것은 자기가 하는, 할 수 있다는 범위만큼만 넓어지게 되어 있어요. 박 지성 선수 알아요? 야구선수 이승엽선수도 알아요? 우리나라 축구선수들이 박 지성 선수처럼 다 잘합니까? 아니지요. 제가 아는 사람 하나 있는데 그 애는 어릴 때부터 축구 신동 났다고 대구에서 난리 났어요.
그 애가 뛰면 경기 이기고 그 애가 빠지면 경기에 지게 되어 있어요.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축구명문 청구중학교에서 스카웃 했어요. 그 다음에 청구고등학교에 스카웃 되면, 그 학교 출신은 우리나라 유명한 대표선수들이 많은데 마찬가지로 축구선수로서 길이 훤히 열리겠지요. 그런데 중학교에 들어가더니 ‘나는 공부가 좋아.’ 하면서 축구를 그만두는 거예요.
그리고 그 애 말고 또 축구를 잘하는 애가 있더라도 그 애들이 다 대표선수 되는 것은 아니잖아요.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우리나라에서 축구선수가 많지만 마지막에 축구를 직업으로 삼아서 하는 사람 되기 위해서는 무수한 사람들이 떨어져 나가는 거예요.
그 사람들은 뭐냐 하면 ‘내가 할 만큼 해보니까 축구는 내가 좀 잘하는데 박지성이처럼 못할 것 같으면 애초에 그만 포기해버리자.’ 부모도 ‘얘야, 네가 박지성이처럼 할 수가 있나?’ ‘못합니다.’ ‘그러면 그만 치워라.’ ‘그래가지고는 아무것도 못한다.’ ‘네가 야구, 이 승엽 처럼 할 수 있나?’ ‘못합니다.’ ‘그러면 때려치워라.’ ‘너, 박 찬호처럼 할 수 있어?’ ‘못하는데요.’ ‘그럼 때려치워라.’
그렇게 중도 포기하는 사람이 한 둘이 아니라는 말이죠. 그러면 그 사람들 다 자살할까요? 축구선수 못되었으니까 다 죽어버릴까요? ‘엄마, 나는 축구는 못하지만 자동차 판매는 잘해.’ 그러면 자동차 판매하는 영업사원 하면 되잖아요. 제가 말하는 것은 이겁니다. 자기가 잘해서 생긴 그것은 뭐가 아니다? 선물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선물이 아니에요. 왜냐하면 선물 뒤에는 반드시 뭐가 있느냐 하면 ‘사로잡힌 것’ 이것이 있어야 여기서 선물이 나오는데, 내 인생 내가 알아서, 자기가 잘나서 하는데 그것이 무슨 선물입니까? ‘하나님, 저는 분수가 이것밖에 안되니까 더 이상 욕심 안내겠습니다. 여기서 구멍가게나 하지 뭐.’ 이런 식으로.
그래서 ‘구멍가게 하는 아주머니, 교회 나오시죠.’ ‘나는 교회 나갈 맘도 없고 내 역량대로 내가 차려놓은 이 구멍가게, 이것밖에 모르니 이거나 하렵니다. 천국 같은 것은 나는 안하렵니다. 나는 이거나 하렵니다.’ 평소에 구멍가게 하는 그것이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면서 선물에는 관심 없고 ‘이것은 내가 할 수 있다.’ 이것만 생각하기 때문에 구원받는 것도 내 쪽에서 뭔가를 해야 구원받는 줄 알고 있어요.
자기가 그렇게 살아왔기 때문에 그런 사고방식 가지고 자기가 뭘 해야 구원받고 그럴 시간 없으면 구원도 안 받겠다고 하는 거예요. ‘내가 요즘 교회 갈 시간이 없네.’ ‘예수님은 선물입니다.’ ‘선물도 신경 써서 받아야지 그냥 받으면 줍니까?’ 이렇게 나옵니다. 제가 보기에 전체적으로 볼 때에 사람들은 소위 개성위주로 나가요.
‘이것이 나의 개성이다. 이것이 나의 특징이다. 작으나마 이것으로 만족해야지.’ 이러고 말아요. 세상전체, 우리의 바깥에는 치열한 영적인 전쟁, 악마와 예수님의 영적전쟁이 있다는 것을 모르고 그저 태어나서 눈앞에 보이는 것, ‘아이고, 저 직업 좋아 보인다. 저 일 좋아 보인다. 저 일만큼은 내가 성공해야 되는데 아이고 실패했구나. 그렇다면 이 일을 해야지.’
그저 하루 종일 24시간 생각하는 것이 ‘내 힘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 그것만 생각해요. ‘주께서 주신 선물이 뭡니까?’ 이것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고 ‘내 힘으로 어디까지 얻을 수 있느냐?’ 그것만 열심히 생각해요.
‘그런데 목사님, 사람이 자기 할 수 있는 것만 생각하면서 사는 그것이 얼마나 겸손하고 좋습니까? 영어도, 수학도, 실력이 다 안 되는 것이 만날 서울대 수석합격이라는 허황된 꿈만 꾸는 것보다는 낫지 않습니까? 자기분수를 알아야죠. 나는 이것밖에 안 된다, 는 그것이 뭐가 잘못되었습니까?’ 그렇게 나오신다면 골로새서 1장 3-4절이 그 사람에게는 해당이 안 됩니다.
골로새서 3:1-4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엣것을 생각하고 땅엣것을 생각지 말라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중에 나타나리라.”
4절을 다시 읽어 봅니다.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중에 나타나리라.” 지금 우리는 하루 종일 ‘오늘 내가 뭐할까? 뭐하면서 살까?’ 이것만 생각하는데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은 뭐냐 하면 ‘주께서 영광중에 나타나실 때에 너도 같이 주와 함께 영광중에 나타날 것이다.’ 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생각의 폭을 크게 넓혀라.’ 고 하는 거예요. 기껏 ‘이것은 내가 할 수 있고, 이것은 내가 못하고…’ 그것이 아니라 ‘생각을 크게 가지라.’ 는 것입니다. 생각을 크게 가지기 위해서는 ‘내 것만 생각하는 이것이 왜 잘못되었는가?’ 라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밥 먹고 살 시간도 없는데 교회 갈 새가 어디 있습니까?’ 이러면 자꾸 좁게 생각하는 겁니다.
복음을 전하는 교회에 가보세요. 교회 문 열고 들어올 때에는 ‘아이고, 빨리 예배 마치고 가서 장사나 해야지.’ 이렇게 왔다가 복음을 듣고는 ‘내가 쓸데없는 것 가지고 걱정했고 내가 신경 안 써도 될 일을 너무 중요하게 여겼구나. 그것은 내 중심이 아닌데, 그것은 아무것도 아닌 문제인데 거기에 내 목숨이 달린 것처럼 굴었구나. 이미 우리는 죽었고 우리의 생명은 하늘에 있는데 그것도 모르고 그저 나는 어디까지 할 수 있을까, 하면서 만날 자기 생각만 했구나.’
그것을 설교 듣는 중에 깨닫게 되지요. 목사님, 그렇지요? 물론 깨닫고 나서는 계단 내려가면서 다 잊어버리지요. 다 잊어버린 뒤에 그 다음날부터 ‘아이고, 내가 이제 뭐 먹고 살까? 교회? 교회 안 나가도 목사님이 무슨 말을 할지 내가 다 안다.’고 하죠.
그래도 하나님의 뜻이 있어서 강제로 교회에 오게 되면 ‘아, 내가 아는 게 아니구나. 내가 안다고 한 것이 아는 게 아니었어. 내가 안다는 것은 그냥 아는 것이지, 정말 주님을 사랑하고 고마워하고 감사한 그것이 빠진 상태에서 복음 안다, 다 안다, 많이 들었다, 그런 식으로 안다는 것이었구나.’
실제 관심사는 ‘아이고, 나는 뭐 먹고 사는가?’ 그것에만 관심이 가득하고 기쁨도 없고 즐거움도 없고 행복도 없으면서 ‘교회에서 하는 소리 내가 다 안다’ 만 날 그 소리만 하고 있어요. 선물 노선이 있는데 자꾸 선물 노선을 놓쳐버려요. 이 과거 창세로부터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일관된 엄청난 홍수 같은 큰 선물, 죽은 자도 사는 이 선물을 모르니까, 이 선을 놓쳐버리니까 나오는 것이 뭡니까?
‘나 여기 있다. 그 나가 어떤 행동을 한다. 그것을 나는 얻었다. 그것까지 내 것이다.’ 생각하는 것이 그것밖에 없잖아요. 세상 사람들에게 물어보세요. 제일 처음에 뭐가 옵니까? ‘나 여기 있다. 나 행동 이렇게 한다. 나 이것까지 얻었다. 그러면 되었지.’ ‘나(이명박)는 대통령이다. 경제가 어렵다. 그래서 금리를 내렸다. 그래서 어느 정도는 환율이 유지되었다. 이정도 하면 되었지.’
이게 대통령이든 판사든 검사든 의사든 어디에 적용해도 다 이것밖에 없어요. 이게 무슨 선물입니까? 여기에 무슨 사로잡힌 것이 있어요. 그래서 이런 사람들은 골로새서 3장도 이해 못할 뿐더러 에베소서 4장도 이해 못하는 거예요. 그저 이 사람들 하는 짓이 ‘하면 된다.’ 입니다. 조폭들 배에다 새기는 글자 있잖아요. ‘하면 된다.’
용 같은 거 지저분하게 그려놓고 새겨 넣잖아요. ‘착하게 살자.’ 골로새서 3장이 창세기까지 흡수하거든요. 골로새서가 창세기까지 흡수하게 되면 ‘내가 여기 존재한다.’ 는 그 자체가 선물입니다. 선물의 폭이 팽창됩니다. 이 정도까지는 죄용서가 선물인데 창세기까지 전체를 알아버리면 내가 여기 살아 있다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내가 왜 바퀴벌레가 아닌가? 내가 왜 코끼리가 아니고 인간인가?’ 이 자체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이것을 선물이라고 하기도 하고 로마서에서는 이것을 그릇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하나의 그릇이다.’ 그릇이 걱정하면 안 되지요. 토기장이가 있으니까. 토기장이가 만드는 데로 거기에 뭐가 담기든 그것이 자비거든요.
그래서 내 인생에 뭐가 담기든, 어떤 자녀를 주든지, 자식을 안주든 뭐가 되었든지 간에 ‘나는 단지 그릇이다.’ 라는 말이죠. 담기는 족족 선물이고 담기는 족족 주님에게 사로잡혀서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 것입니다. 거기에는 예수님의 명예가 들어있고, 예수님의 영광이 들어있고, 예수님의 자부심이 들어있고, 예수님의 자랑스러움이 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이 선물을 제대로 아는 사람 같으면 매일 밤낮을 감격에 울어야 됩니다. 어떻게? ‘내가 감히 예수님의 그릇이 되다니…, 이 못난 인간이 보배, 예수님을 담고 다니는 그런 보매가 되다니…, 비록 내가 똥차 1톤짜리 트럭이라도 짐칸에 10조원짜리 다이아몬드가 가득 담겨 있다면 그 트럭 가지고 서울 시내 어디를 가도 청와대 앞에 가도 자기에게 실린 것으로 인하여 자랑스러워하면서 맘 놓고 달려간다.’
그러다가 교통순경에게 걸렸다. ‘푹 집어가요. 자, 선물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구원받는 것이 감격스러워서 우리가 가는 곳 마다 듬뿍 듬뿍 선물을 주는데, 선물 받은 우리는 ‘이거 뭐, 다 아는 건데…, 의존교회에서 많이 들었습니다. 십자가….’ 이런 식으로 다 흘려버리는 거예요. 주님은 선물로 줬는데 우리는 선물 값도 못해!
어떤 남자가 여자에게 청혼을 하면서 ‘당신은 이제부터 나의 영원한 동반자요’ 하고 다이아몬드를 줬는데 그 여자가 ‘이거 가짜 아니에요?’ 하고 한강변에 툭 던져버리면 그걸 준 남자가 얼마나 성질나겠습니까? ‘대체 뭘 얼마를 원해?’ 이렇게 나올 거란 말이죠. 그 비싼 다이아반지를 버린다면 무엇을 더 원한다는 뜻입니까?
신랑 되시는 우리의 주님께서 신부된 우리에게 가장 주고 싶은 것이 뭐냐 하면, 지금 우리가 죽어도 괜찮은 팔자로 만드는 것, 그런 인생을 만드는 것이 신랑 되시는 주님 보시기에 그것보다 더 큰 영광은 없거든요. 그런데 우리는 생각이 좁아서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다 볼 줄 모르고, 십자가를 몰 줄 몰라요.
모르니까 ‘나는 여기 있다’ 하고 욕망이 나오지요. ‘나는 내가 원하는 것을 내가 역량껏 행동하고 그 행동한 범위 내에서 얻은 것이 있으면 그게 기분 좋다. 하지만 신에게 빌어서 내가 행동 안 해도 내가 원하는 것을 더 받았으면 좋겠다.’ 항상 출발점이 ‘내가 여기 있다’고 하지요. 주님은 ‘내가 여기 있다.’ 우리는 ‘나는 여기 있습니다.’ 둘 다 고집이 세요.
우리는 그릇입니다. 그 그릇에 뭐가 담겨 있느냐 하면, 우리 주님께서 그 동안 어떻게 싸웠는지 그 업적이 거기에 실리게 되어 있어요. 그 업적을 지금부터 설명하겠습니다. 구약신학에 보면 암픽티오니(Amphictyony)란 말이 있어요. 이게 어려운 말인데 ‘열두지파연맹체’라는 말입니다. 열두지파연맹이 어떤 정신으로 되어 있는가 하는 것은 여호수아에 잘 나옵니다.
여호수아 13장 33절을 봅시다.
여호수아 13:33
“오직 레위 지파에게는 모세가 기업을 주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그들에게 말씀하심같이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기업이 되심이었더라.”
이거 보세요. 이게 말이 됩니까? 아버지가 아들에게 유언을 합니다.
(아버지) “큰 아들아!”
(큰아들) “아버지, 건강하셔야 합니다.”(벌써 뭔가 하사받는 낌새를 채고)
(아버지) “땅, 네게 물려준다.”
(큰아들) “아버님, 어서 일어나셔야 합니다. 땅 같은 것 안 바랍니다.”
(아버지) “그래서 안 받겠다는 이야기냐?”
(큰아들) “아닙니다. 그런 뜻은 아니고 그저 주신다면 감사히 받겠습니다.”
(아버지) “둘째 아들아!”
(둘째아들) “예, 아버지 둘째 여기 있습니다.”
(아버지) “너는 양천구에 있는 50층짜리 빌딩 그거 네가 맡아라.”
(둘째아들) “아버지, 건강하셔야죠. 저는 그것밖에는 바랄 것이 없습니다.”
(아버지) “그래서 받기 싫다는 말이냐?”
(둘째아들) “아니요. 그것이 아니고 그저 황송하고 감사해서….”
(아버지) “그럼 둘째도 되었고 셋째 아들아!”
(셋째아들) “예, 아버님.”
(아버지) “너는 외제차 네가 맡아라.”
(셋째아들) (형들은 땅 주고 빌딩 주는데 자기만 외제차를 주니 기분 팍 상해서) “…….”
(아버지) “안 가질래?”
(셋째아들) “아닙니다. 고맙게 받아야죠.”
(아버지) “내가 가장 사랑하는 넷째 아들아!”(가장 중요한 대목입니다.)
(넷째아들) “예, 아버님!”
(아버지) “너에게는 중요한 상속할 것이 있다.”
(넷째아들) “그게 뭡니까?”
(아버지) “너에게는 이 아버지가 상속이다.”
(넷째아들) “……?”
이게 말이 됩니까? 이건 아니잖아요. 이게 말이 안 되잖아요. 지금 성경은 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예요. 사실은 열 세 지파거든요. 열 세 지파를 주님께서는 열두지파로 만들어버려요. 그래서 한 지파를 가운데 두고 나머지 열두지파는 이 지파를 빙 에워서 레위지파가 중심이 되게 합니다. 이게 바로 열두지파연맹, 열두지파 공동체입니다.
아무 중심도 없이 그냥 열두지파는 이스라엘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을 열두지파는 서로서로를 쳐다보면서 강강술래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열두지파는 뭘 쳐다본다? 레위지파를 쳐다보라는 거예요. 이것이 모세언약시대의 이스라엘의 구조입니다. 다시 이야기하겠습니다. 우리가 교회 와서 신앙생활 한다는 것이 ‘열심히 간절히 성심성의껏 울면서 떼를 쓰면 복 주신다.’ 는 그것이 신앙생활이 아닙니다.
처음부터 다시 해볼까요? 신앙이란 두 글자로 뭐라고 했습니까? 선물이잖아요. 선물이 어디서부터 왔는가를 알아야 그것이 신앙입니다. 선물로서의 신앙이 아니라 ‘주시옵소서. 간절히, 간절히….’ 이렇게 해서 얻어내는 것은 자기최면을 거는 거예요. ‘나는 믿는다. 하면 된다. 하면 된다.’ 이것은 자기최면 거는 것이고 성경에서 말하는 것은, 숨어계시는 하나님께서 몰래 몰래 작업하신 것이 있습니다.
그 작업하신 것을 우리에게 넣어주는 거예요. 넣어주는 그것이 있어야 되요. 넣어줄 때 넣어주는 그 선물의 노선에 보면 이스라엘의 열두지파가 있는데 그 들은 서로 서로 형님, 동생 하면서 서로 서로 존중해주는 인간연합체가 아닙니다. 그 연합의 가운데 있는 레위지파를 쳐다보는 거예요.
레위지파가 제사 잘 드리면 복 받고, 레위지파가 제사 잘 못 드리면 다 저주받는 거예요. 심지어 무슨 직업을 가지든지, 수공업을 하든지 농사를 짓든지 관계없이 중심지가 있다는 거예요. 중심지가 없는 성도는 가짜입니다. 그리고 이 중심지에 계신분에 의해서, 그 작업에 의해서, 그 작업은 다음시간에 이야기합니다만, 그 작업에 의해서 이 열두지파가 구원받습니다.
이 구조 외에 다른 구조는 성경에는 없습니다. 10분 쉬고 계속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