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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05칠곡강의(뒤에서본한국교회)26-호세아2,요엘,아모스1(강의정리)자유게시판아모스

05칠곡강의(뒤에서본한국교회)26-호세아2,요엘,아모스1(강의정리)

이름 : 구득영(IP:203.223.97.227)

05칠곡강의 [뒤에서 본 한국교회] 26 - 호세아서2, 요엘서, 아모스서1

05,01,29 강의 이근호, 정리 구득영

◈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한 자는 다 믿더라 !!

* 질문 - 이 새언약을 남들에게 전하려고 하면, 기존 교회에서 우리가 이야기하는 복음 말고 이상한 형태의 새언약을 이미 다 이야기를 해놓은 상태라서 상당히 힘이 드는데요?

사도바울에 의하면 복음은 남들에게 설득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사람의 본질을 들추어내는 식으로, 그렇게 증거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복음을 전하면서도 오히려 마귀의 시험에 드는 수가 있다는 말이다. 그러니 누구를 교회에 데리고 와야 하겠다는 것은 상당히 위험한데, 그런 자체를 마귀가 노린다는 것이다.

우리가 그러한 사람들을 만나서 복음을 전하면서 먼저 우리 자신이 무엇을 느껴야만 하는고 하니까, 그동안 말씀이 자기에게 미처 정립되지 않았던 부분이 다시 정리가 되면서, 그래서 그것으로 인해서 주님께 감사하면 된다는 말이다. 그런데 그것으로 만족해하지 않고, 그만 또 다른 욕심을 내어버리면 안 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자기 힘으로 상대방을 이기려고 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런 것은 마귀의 수법이니 말이다. "내가 나의 말솜씨로 저 사람을 꺾었다. 신난다" 라고, 그렇게 되어버리니 말이다. 하지만 그런 것을 예수님께서 제일 싫어하신다는 것이다. 바로 그런 힘에 의해서 예수님이 희생되지 않았는가?

그러한 사람을 주께서 만나게 해주셨으면 그 자체로서 감사하면 되는데, 그런데 그러한 주님에 대한 감사와 사랑도 없이 자기 욕심으로 복음을 전하게 된다면, 그것은 그야말로 울리는 꽹과리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비록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말이다.

자기가 복음이 너무나도 좋아서 전하게 되면, 그것을 상대방이 듣고 순종하든지 하지 않는 것은 모두 주께서 알아서 할 문제라는 것이다. 그러니 사도행전 13장에 나오는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한 자는 다 믿더라" 라는 말씀을 명심하자는 말이다.

(행 13:48)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

사도바울도 그렇게 영생을 주기로 작정된 자가 누구인지 모르는데, 그런데 복음을 전하다보니 모두 드러난다는 것이다. 즉 자기가 열심히 복음을 전하고 기도해서 상대방이 영생을 받게 된 것이 아니라, 주께서 그렇게 다 작정을 했다는 말이다.

그런데 흔히들 한국교회에서는 뭐라고 하는가? 전도할 대상이 있으면 정해놓고서, 마치 시라소니가 먹이를 노리듯이 그렇게 기도하고 전도하라고 가르치는데, 그러나 그것은 전형적인 마귀가 가르쳐준 방식이라는 것이다.

◈ 하나님의 심판은 두렵지만, 그 사랑은 NO !!

우리가 지난 시간에 호세아서를 조금 하다가 말았는데, 이제 교재 164페이지를 보자.

** 한국교회는 하나님의 심판은 두려워하면서도 하나님의 사랑은 거부한다. 왜냐하면, 이미 자기 사랑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상당히 의미심장한 문장인데, 그러면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가? 왜 하나님의 심판은 두려워하지만, 그분의 사랑은 거부해버리는가? 그것은 바로 하나님을 찾는 목적이, 정말이지 하나님의 사람이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뭔가 도움을 받기 위해서 하나님을 찾는다는 말이다. 마치 다음과 같이 말이다.

예를 들어서, 집을 나간 자식놈이 오랜만에 아버지를 찾아왔는데, 그렇게 찾아온 이유가 자기 아버지의 사랑을 받아들이고 아버지를 도와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가 아버지에게 또 도움을 좀 받아서 다시 자립을 한번 해보려고 왔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 호세아서를 보면 우리 인간들의 심보가 어떠하다는 것이 모두 다 드러나는데, 즉 하나님의 심판은 무서워하면서도 하나님의 사랑은 거부하는 말이다. 지금 한국교회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준다는 것이다. 물론 그것이 우리 자신들의 모습이기도 하고 말이다.

◈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

혹시 이문열의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을 아시는지? 자기 반에 깡패 같은 놈이 전학을 오니까 모두 그 놈에게 복종을 한다는 것이다. 물론 사랑이 아니라 무서워서 그렇게 하는데, 우리도 그런 경험들이 모두에게 있고 말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그런 깡패(?)와 같이 여겨서, 즉 하나님께서 심판해서 지옥으로 보낸다고 하니 할 수 없이 일단 고개는 숙이지만, 하지만 여전히 하나님의 사람으로 다시금 태어나는, 그러한 용단을 내리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바로 그러한 점까지도 이 호세아 선지자는 예리하게 지적을 해주는데,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그러므로 교회에 나와서 예배를 드리는 이유도, 한 주간의 재앙이나 액운이 떨어진다고 믿기 때문이다. 일종의 주술이다. 그러니 여기에는 사랑이라는 관계는 없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사랑 대신에 교회에서 열심히 봉사, 사랑 대신에 전도에 대한 열심, 또한 사랑 대신에 간절한 기도, 그렇게 대체하면서 살아간다는 것이다. 하지만 정작 하나님은 어떤 분인가? 그것이 바로 호세아서 6장 6절에 나오는데, 뭐라고 하는가?

(호 6:6)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 사랑밖에 난 몰라, 심수봉 ??

하나님께서는 인애를 원하지 제사를 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야말로 그 당시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기절초풍할 노릇인데, 이것은 호세아 선지자의 개인적인 주장이 아니라,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전하는 사람이기에,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이라는 말이다. 선지자에게는 "이렇게 했으면 교회가 좀 좋아질텐데" 라는 아이디어가 없다는 것이다.

하늘에서 이 세상을 내려다보는 하나님의 뜻이 바로, 제사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사랑을 알고 있느냐고 하는, 그러한 하나님의 사랑을 찾는 자를 원하신다는 말이다. 인간 자신의 사랑이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나온 사랑을 말이다.

◈ 사랑, 사랑, 누가 말했나, 남궁옥분 ??

하나님께서는 지금 이 우주를 만든 법칙을 제시하고 있는데, 그 법칙이 무엇인고 하니, 바로 하나님은 자기 사랑을 가지고 이 우주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런 법칙이 마태복음 5장에 나오는데, 하나님께서 악인이든 선인이든 가리지를 않고 햇빛과 비를 주신다는 말이다. 이것이 곧 하나님의 자비로움이라는 것이다.

(마 5:45)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

◈ 이 우주의 유일한 법칙은, 사랑 !!

그렇게 하나님은 그런 사람의 행함과 상관이 없이 주시는 분으로 일하신다고 하는 것이, 그것이 바로 이 우주에 가득히 채우고 있는 유일한 법칙이라는 것이다. 이것을 '노모스' 라고 하는데, 그러니 이런 하나님의 은혜를 방자히 여긴다든지 무시하게 되면, 이 우주를 꽉 채운 현실의 진짜법칙에 그만 위배된다는 것이다. 물론 그렇게 위배가 되니 지옥에 가는 것이고 말이다.

여기서 사도행전을 17장을 찾아보겠는데, 우리 모임에서 성경을 찾아본지 하도 오래 되어서 조금은 서먹서먹한데(?), 일단 24절과 25절 말씀을 살펴보자.

(행 17:24)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유를 지으신 신께서는 천지의 주재시니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행 17:25)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자이심이라

우리가 낚시나 등산을 가든지, 아니면 친척집에 방문을 하든지, 아무튼 이 말씀을 잊으면 안 되는데, 특히 예배당(성전?)에 들어갈 때는 말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않는다고 했기에 말이다. 즉 그렇게 손으로 지은 전에 들어가는 순간에도, 하나님은 그런 전에 계시지 않는다는 것을 놓치면 안 된다는 말이다.

또한 하나님은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데, 이것을 헌금할 때 기억을 하면 되고 말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주시는 분인데, 그러니 강도이든, 살인자이든,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즉 김정일이든, 빈라덴이든, 이명박이든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말이다.

◈ 마지막 날 은혜는?

그런데 이렇게 주시는 자가 31절에 보면,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라고 하는, 과연 그 정하신 사람이 누구인가? 물론 예수님인데, 그러니 24절과 25절에서 말씀하신 그 하나님께서 마지막에 어떻게 일을 하시는고 하니, 정하신 자, 즉 예수님을 천하에 심판주임을 알리고, 그분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렸다는 말이다.

(행 17:31)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저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하니라

그렇게 하늘에서 비가 내리는 것이 은혜인데, 그런데 마지막 날에 은혜는 무엇인가? 예수님을 보내서, 그분을 믿는 자마다 영생을 주려고 하는데, 그것보다 더 큰 은혜가 있으면 나와보라는 것이다. 우리가 돈을 주고, 뇌물을 받쳐서 예수님을 믿는가? 교회에 충성하고 봉사해서 마지막 날에 구원을 받는가?

하나님의 법을 제가 아까 칠판에 뭐라고 적었나요? 하나님의 사랑, 즉 은혜인데, 하나님께서 태어나게 하시고, 그 태어난 자에게 햇빛과 비를 적절히 주시는데, 심지어 악인이든 선인이든 상관없이 말이다. 그런데 그것을 알아차리는 사람이 있고, 그렇지 못한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생뚱맞은 사건 !!

자기가 그것을 알아차렸다고 해서 그 사람이 남들보다 능력이 특별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한번 생각을 해보라는 말이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모두 예수님을 믿지 않는데 자식이 믿는다고 하면, 그 능력이 부모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결코 부모님의 능력이, 그 부모의 DNA가 유전적으로 자식에게 각인이 되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그야말로 생뚱맞은 일이라는 것이다.

부모는 절에 가서 불공을 드려서 자식을 낳았다고 하는데, 그런데 그 자식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 물론 육체는 부모에게서 물려받았다고 해도, 그 사람의 믿음은 오로지 하나님의 주관 아래에 있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 신앙을 주셔서, 놀랍게도 마지막 날에 받을 은혜를 얻게되는, 그러한 혜택을 입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 사람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의 의미를 눈치채어서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말이다.

그렇게 되면 소급이 되어서, 즉 전에 몰랐던 것까지 모아서 전부가 다, 즉 햇빛과 공기와 자기 심장이 뛰는 것까지도 모두가 다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예수님을 믿는 것만 은혜가 아니라 말이다. 즉 지금까지 살아온 자기의 모든 것들이 다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이다. 24절과 25절에 의해서 말이다.

◈ 우주에 꽉 차있는 하나님의 사랑 !!

거기에다 자식을 하나라도 주신 것도, 그것이 자기 능력이 아닌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총임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성도는 범사에 감사하게 되는데,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말이다. 물론 제가 길게 말했지만, 한 마디로 말해서, 이 우주에 꽉 차있는 하나님의 사랑을 눈치채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지옥에 가는 사람은 무엇을 그렇게 잘못해서 천국이 아닌 지옥으로 가는가? 이유는 간단한데, 이 우주에 꽉 차있는 하나님의 사랑을 거부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배후에 악마가 자리잡고 있기 때문에 말이다. "나는 하나님이 없이도 얼마든지 살아갈 수가 있어. 굳이 하나님이 나를 좀 도와준다면 그때는 좀 생각해보지" 라고 하면서 말이다.

◈ 신에게 대항하는 인간 !!

그러니 굳이 하나님의 사람이 되고 말고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냥 자기 하나 있는 그대로 만족하겠다는 말이다. 즉 자기 자존심과 권위를 신에게 빼앗기지 않고, 오히려 그런 신에 대항해서 싸우겠다는 것이다. 신에게 복종하는 것이 아니고 말이다. 물론 마귀의 조종이지만 말이다.

* 질문 - 그런데 목사님, '거부' 라는 의미보다는, 오히려 하나님께서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하지 않은 것이 아닙니까?

물론 결과적으로 보면 그 말이 맞는데, 하나님께서 그렇게 작정을 하셨는데, 내부적으로 그렇고, 그런데 현상적으로는, 즉 밖으로 드러나기는 거부로서 나타난다는 것이다. 물론 그러한 하나님의 숨겨진 뜻은 인간들이 모르는 것이고, 그것이 밖으로 드러난 현상은 신에 대한 거부이고 도전이라는 말이다.

* 질문 - 하나님께서 주시기로 작정하지 않았으니, 그들이 받아들이지 못했다는 것이지요?

물론 '아멘'인데, 예를 들어서, 아이가 열이 난다고 하면 부모는 아이가 열이 나는 것은 알 수 있지만, 그러나 왜 그런지는 모른다는 것이다. 그것은 의사에게 가보아야 안다는 말이다. 바이러스에 감염이 되었든지, 아니면 편도가 부었든지 말이다.

다시 말해서, "나는 예수가 싫어. 교회에 안 갈거야" 라고 하면서 열을 붕붕 내고 있는데, 그 진단은 하나님께서 하신다는 말이다. "너는 원래 죄인이야. 그래서 그 죄가 너를 데리고 계속해서 하나님을 대적해서 살아가도록 너의 인생을 조종하고 있어" 라고 말이다. 그런 진단이 나오지만, 하지만 본인은 그것을 모르니 그냥 하나님이 싫고, 예수님이 싫다는 것이다.

* 질문 - 그러면 '거부'라기보다는, 하나님께서 주시지 않기로 작정한 것이 더 적합하다는 말인가요?

둘 다 맞는 말인데, 하지만 결국 나중에는 거부하게 되는데, 현상적으로는 말이다. 즉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고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덤비는 것이 바로 하나님을 거부한다는, 그런 표현으로 등장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 질문 - 그런데 하나님께서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한 사람들조차도 거부하려는 모습이 있지 않나요?

물론 그런 면도 있는데, 그런데 그런 사람들은 나중에 그러한 자기의 모습이 바로 죄임을 안다는 것이다. "아이쿠, 내가 또 까불었구나. 그만 또 발작을 했구나" 라고 하면서, 자기의 못난 모습을 제대로 깨닫는다는 말이다.

◈ '하나님의 사람' 이란?

제가 여기서 강조하는 것은, 아까 제가 '하나님의 사람' 이라는 표현을 했는데, 왜 그런 말을 하는고 하니, 기존의 사람과 구별하기 위함인데, 기존의 사람은 그렇게 서로 좋아하면 그만인데, 그것을 두고 '사랑한다' 라고 하는데, 그렇게 좋아하고 사랑한다고 해서 굳이 상대방의 노예가 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자기가 어떤 연예인을 좋아한다고 해서 그의 노예가 될 필요도 없고 말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런 것이 통하지 않는데,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면, 반드시 하나님의 종이 되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에게는 "하나님, 제가 좋아한다고 해드릴게요" 라고 나올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자기는 자기 자존심을 그대로 가지고 있으면 말이다. "예, 저도 하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도 잘 믿겠습니다" 라고 하면서, 그렇게 똥고집을 부리고 버틸 문제가 아니라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는 것은 무슨 의미인고 하니, 하나님의 사람이 된다는 의미인데, 즉 하나님에 의해서 움직이는 사람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제가 아까부터 이 하나님의 사람을 자꾸만 강조하고 언급했다는 것이다.

◈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

사도바울이 편지를 하면서 자기를 뭐라고 소개하는가?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의 종, 즉 하나님의 종,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그렇게 나온다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자기가 그런 하나님의 종이 된 것에 대해서 너무너무 좋아서 그야말로 몸둘 바를 모르겠다는 것이다. 전혀 자기는 그런 자격이 없는데 말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시켜서 마지못해서 하는, 그래서 그것이 귀찮고 짜증나고, 결국 도망을 치려는 것이 아니고 말이다. 그러므로 사도바울의 이러한 모습을 보면, 하나님의 사람으로 산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자유로운지를 알 수 있다는 것이다.

(롬 1:1)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

* 질문 - 하지만 그런 하나님의 사람과 일상적인 생활은 무관하지요? 그렇지 않으면 새로운 사람으로 살려고 하는 무리수를 두게 되고 말이다.

물론 관계가 없는데, 다만 성령께서 그렇게 인도하신다는 것이다. 그런 새로운 사람이라는 것은 아예 생각도 하지 말아야 하는데, 그렇게 되면 시험에 들게 된다는 말이다. 다만 하나님의 사람이기 때문에 문득문득 하나님에 대한 생각이 떠오른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이렇게 학원을 하면서, 강의를 마치고 쉬는 시간에 아이들이 서로 떠드는 것을 보면서, 이 세상에 대한 모습이 생각난다는 말이다. 이 세상의 비참한 모습과 거기에 대한 안타까움이 말이다. "교회가 이래서는 안 되는데" 라는 생각도 들고 말이다. 그것은 자기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람이기 때문에 그런 현상들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 제사가 아닌 인애를 원하시는 하나님 !!

다시 호세아서 6장 6절을 보면,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라고 하는데, 이것은 호세아 선지자의 개인적인 희망사항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바로 그런 것을 원하신다는 말이다.

(호 6:6)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이렇게 성경공부를 하는 것을 지켜보시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무엇이겠는가? 그런데 한국교회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그 하나님의 사랑만 증거하고, 그래서 하나님의 사람이 되면 되는데 말이다. 그런데 한국교회는 지금 과연 어떠한가? 과연 그러한 넘치는 하나님의 사랑을 증거하고 있는가?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한국교회는 자꾸 하나님께 바치라고 교인들을 못살게 군다. 물질도 바치고, 시간도 바치고, 돈도 바치고, 땀도 바치라고 한다. 그래야 복을 받는다고 한다. 종교 거룩을 빙자한 사기이다. 하나님에게는 모자람이 없다.

지금 이런 한국교회의 모습이, 과연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이 넘치는 모습인가? 당연히 종교를 빙자한 일종의 사기라는 말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모자람이 없기에 말이다. 그런데도 한국교회는 자꾸만 모자란다고 하면서 자꾸만 달라고 하는 것이다. 지금 하나님은 자기 사랑이 차고 넘쳐흐르고 있는데, 그래서 그 사랑을 우리에게 주는데 말이다.

◈ 모자람이 없는 하나님 !!

언제 하나님이 우리에게 "아, 나는 사랑이 모자란다. 사랑을 좀 다오" 라고 했는가? 오히려 자기의 그 넘치는 사랑을 아낌없이 우리에게 퍼주었지 말이다. 그래서 지금 하나님은 우리에게 "내가 준 사랑을 간직하고 있는가?" 라는 것을 묻고 계신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것이 곧 하나님을 아는 것이고 말이다. "아하, 그 사랑이 넘쳐서 나에게 도착했구나" 라고 말이다.

사도바울이 바로 이런 점을 알았기 때문에 자기가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다는 사실에 대해서, 즉 예수 그리스도의 종으로 살아가는 것을 그렇게 기뻐했다는 말이다. "아, 하나님이 내 인생을 조져놓았구나" 라고 여긴 것이 아니라 말이다. 사도바울은 자기에게 주어진 일을 얼마나 황송스럽게 여겼는지 모른다는 것이다.

◈ 근호야, 나는 니가 핍박하는 예수이다 !!

만약에 우리가 길을 가는데, 사도바울의 경우처럼 예수님이 나타나서 "이근호야, 나는 니가 핍박하는 예수이다" 라고 하면서 나타났다면 어떻게 되었겠는가? 그러면 엎어져서 "아니, 당신은 누구십니까?" 라고 하면서 말이다. 아마 같이 길을 가던 마누라는 "저 사람이 왜 저러노? 미쳤나?" 라고 하겠지만 말이다. 하지만 그러게 해도 "니는 못 들었지? 주님께서 나에게 이야기했다" 라고 하면서, 기뻐하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 질문 - 사람은 항상 하나님을 핍박하고 부정하면서 살지요?

물론 그러한데, 하지만 하나님의 사람은 그렇게 하다가도 또 항상 그것이 바뀐다는 말이다. 아무튼지 사람이 자기 잘못을 모른다고 하는 것은 말이 안 되는데, 물론 완벽하다는 것도 역시 말이 안 되고 말이다. 그렇게 사고를 치고는, 그것이 잘못임을 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아까 집사님도 이야기를 했지만, 자기가 누군가를 전도하고 싶은데,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그것조차도 자기 욕심이 아닌가 싶어서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되는데, 그러니 전도를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전도는 전도대로 하면서 나중에 알고 보니 자기에게 그런 모습이 있었다는 것을 깨닫고 발견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인간은 항상 하나님을 대항하는 성향을 보인다는 것이다. 심지어 물이나 커피를 한잔 마시고 나서도, 나중에 거기에 대한 하나님의 뜻에 어긋난 자기 모습이 긴 그림자처럼 그렇게 늘 드리워진다는 것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는데, 일단 마태복음 5장 23절과 34절을 살펴보자.

(마 5:23)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마 5:24)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 하나님의 뜻이 이러함에도 인간들은 이런 하나님의 이야기를 싫어한다. 왜냐하면, 예물을 드리는 것이 형제와 우애하는 것보다 간편하기 때문이다. 즉 죄를 꺼내놓고 회개하기보다는, 자기 죄를 의롭다고 여기는 행위로 포장하는 것이 자기 사랑에 부합되기 여기기 때문이다.

왜 이런 현상들이 일어나는가? 인간은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자기 사랑에 얽매이기 때문에 그렇다는 말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결국 인간은 누구나 영원한 창녀들 !!

** 그래서 사랑을 외치는 추상적인 설교자보다는 노골적으로 자꾸만 바치라고 하는 설교자에게 훨씬 더 인간적인 정이 가는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무식하다고 마음놓고 비판을 할 수 있으니 말이다. 결국 인간은 누구나 영원한 창녀들이다.

그러니 인간은 자꾸만 자기를 꾸미고 싶어하고 뽐내고 싶어한다는 것이다. 그런 꾸미는 대목을 성경말씀을 통해서 한번 찾아보겠는데, 그게 어디 있는고 하니, 마태복음 23장을 한번 살펴보자.

(마 23:5) 저희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여 하나니 곧 그 차는 경문을 넓게 하며 옷술을 크게 하고
(마 23:6) 잔치의 상석과 회당의 상좌와
(마 23:7)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사람에게 랍비라 칭함을 받는 것을 좋아하느니라

◈ 예수님이 직접 지적한 인간의 위선 !!

지금 이 말씀을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에 관한, 즉 요즘 말로 하면 성직자들인데, 즉 목사들에 관한 이야기라는 것이다. 그 당시는 문자를 아는 사람들이 별로 없었는데, 지금과 같은 이런 성경책도 전혀 없었고 말이다. 그러니 성경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설령 있다고 해도 읽지를 못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당시의 성경인 두루마리 성경은 아주 크기도 큰데 무겁고 말이다. 그래서 회당에 가야만 성직자들을 통해서 겨우 들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니 매일 모였던 것이고 말이다. 모임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성경이 회당에 있었기 때문에 말이다.

바로 이러한 성경말씀을 해석하고 설교하는 자들이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인데, 그런데 지금 그들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그것을 예수님께서 말씀하고 계신다는 것이다. 우리 인간들에게 그런 자기의 잘남을 자랑하는 모습이 있음을, 하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인간들의 이런 위선을 직접적으로 지적하고 계신다는 말이다.

앞에서도 나왔지만, 도대체 그들이 무슨 짓을 하는가? 자기들의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고, 그래서 달고 다니는 경문(기도문?)을 넓게 하며 옷술을 크게 한다는 것이다. 자기는 말씀대로 산다고 하는 것을 자랑하는 것인데, 그리고 잔치나 회당에서 높은 자리를 선호하고, 또 시장에서 문안을 받고, 그리고 '랍비' 라는 소리를 듣는 것을 좋아하고 말이다.

◈ 인간은 왜 남을 의식하는가?

이것이 바로 오늘날 우리에도 하는 동일한 지적인데, 오직 하늘에 계신 하나님만을 의식하고, 하나님에게만 제대로 보이는 되는데, 그런데 왜 사람들을 자꾸만 의식하려는 신앙생활을 하려고 하느냐는 것이다. 예수님에게만 잘 보이면 되는데 말이다. 그러니 그런 것이 종교생활에 불과하지, 그것이 무슨 신앙생활이냐는 말이다. 사람을 의식할 이유가 없는데 말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사랑의 이 우주에 가득 차 있기 때문인데, 그런데 무슨 자기에게 그러한 주님의 사랑이 있다고 하는 것을 굳이 사람들에게 자랑하고 자랑할 이유가 무엇이 있느냐는 것이다. 주님과 그냥 속닥속닥하면서(?), 그렇게 지내면 되는데 말이다. 그것을 왜 동네방네 떠들고 돌아다니느냐는 말이다. 사랑의 주님이 다 알고 계시면 되는데 말이다.

* 질문 - 그런데 우리 인간들은 모두가 다 그렇게 살지 않나요? 항상 자기를 드러내기를 좋아하면서 말입니다. 물론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말입니다.

혹시나 '철학의 함정' 이란 글을 보았는지 모르겠는데, 정식으로 발간한 책이 아니라 제가 울산에서 강의한 것을 녹취해서 간단하게 책으로 만든 것인데, 거기에 보면 인간의 행동 하나하나가 어디에서 나오는지 다 나온다는 것이다. 그런 인간의 행동들은 사회가 다 가르쳐주었다는 말이다.

◈ 인간의 행동은 이 '사회'로부터 !!

자기가 무슨 말을 하든지 행동을 한다는 것은, 그것은 모두가 이 사회로부터 배운 것인데, 부모든지, 친구든지, 그렇게 배운 것이란 말이다. 즉 외부에서 들어온 정보가 누적이 되어서, 한 꺼풀 두 꺼풀, 그렇게 하나 하나씩 벗겨진다는 것이다.

방금 질문한 것을 다른 말로 하자면, "사람은 늘 위장하지 않습니까?" 라는 것과도 같은데, 원래 자기 것이 없으니 나오는 것은 모두가 그 사회가 요구하는 것들이, 그런 것들이 쌓여 있다가, 그들이 원하는 것을 하나 하나씩, 마치 양파껍질을 벗기듯이 그렇게 나온다는 말이다. 이 양파는 그 자체가 껍질로서 되어있는데, 그러니 벗기다보면 하나도 남는 것이 없다는 것이다.

◈ 인간은 양파껍질과 같아서 !!

이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경우에도, 그렇게 인간에게서 나오는 모든 것도 결국은 다 위장한 것이라는 말이다. 부모의 껍질, 친구들의 껍질, 선생님의 껍질 등등 말이다. 왜냐하면, 원래 자기 것이 없으니, 그렇게 자기 자신을 위장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그들이 원하는 것을 하나씩 꺼내서 주다가 보니까, 결국은 자기가 그만 없어지고 만다는 것이다. 쌓이면 주고, 주면서 쌓이고, 그렇게 하면서 말이다. 그래서 인간 속에는 자기 자신의 욕망이 아니라 타인의 욕망이 들어있다고 한다는 것이다.

◈ 라캉 - 인간 속에는 자신의 욕망이 아니라 타인의 욕망이 !!

자크 라캉이 그렇게 주장했는데, 놀랍게도 인간의 자신 속에 자기가 아니라 남이 들어있다는 말이다. 그냥 남이 아니라, 남의 욕망이 들어있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인생을 살아가도, 자기 자신의 인생이 아니라 상대방이 요구하는 인생을 살아가게 된다는 것이다.

◈ 근호씨, 나 이뻐 ??

그래서 여자들이 옷을 입으면서도 남편에게 자꾸만 묻고 또 물어보는데, 자기의 예쁜 모습을 좀 봐달라는 것이다. 그냥 자기 마음에 드는 것을 입으면 되는데 말이다. 자꾸만 다른 사람을 의식하고 물어본다는 것이다. 물론 저는 그렇지 않지만, 보통 남자들의 경우에는 그것을 얼마나 귀찮아하는지 모른다는 것이다. 아닌가요?

* 질문 - 그러면 타인이 욕망이 들어있다는 것이 인간의 본질인가요?

인간은 아담 안에서 모두가 다 똑같은데, 아담이 선악과를 어떻게 따먹었는가? 유혹을 받아서 그만 먹었다는 말이다. 그런 유혹을 받는 그것이 바로, 인간의 속성으로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끊임없이 유혹을 받고, 그 유혹에 반응을 하고 말이다.

* 질문 - 그렇게 인간이 사회로부터 모든 것을 다 배우는데, 그런데 그런 사회로부터 떨어져나가려고 하는 것은 왜 그런가요?

◈ 인간은 사회적 산물 !!

인간은 이 사회에서 배우는 정도가 아니라 인간은 사회적 산물인데, 그러니 인간은 이 사회에서 떨어져나갈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사회로부터 떨어져나간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는데, 지금 자기가 속해 있는 사회에 적응하기 힘들어서 또 다른 새로운 사회의 일원으로 되는 것이지 말이다. 그렇게 해도 그것도 역시 사회이고 말이다.

예를 들어서, '로빈슨 크루소우' 라는 소설에 보면, 주인공인 로빈슨 크루소우가 섬에서 혼자 떨어져서 살아도, 그것은 이미 그 당시 사회의 사고방식을 그대로 유지한 체로 혼자 사는 것뿐이지, 그 사회로부터 떠난 것은 결코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니 다시 섬을 떠나서 사회에 쉽게 합류가 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 섬에서 계속해서 살아도, 그것이 또 하나의 사회가 될 것이고 말이다.

* 질문 - 그러면 사회로부터의 분리를, 또 하나의 사회를 생성하는 것으로 보면 되겠네요?

◈ 천 개의 고원에서 각자가 !!

그렇게 인간은 자기가 점령하고 있는 위치에서 자기 나름대로의 새로운 사회를 또 만드는데, 그것을 두고 그 '철학의 함정' 이라는 강의 보면 '천 개의 고원' 이라고 했는데, 고원을 알지요? 즉 개마고원 같은 그런 고원인데, 물론 거기에는 높은 고원도 있고 낮은 고원도 있지만, 아무튼 자기만의 그러한 고원을, 즉 자기만의 세계를 각자가 만들어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 고원에 다른 사람이 합류를 하게 되면 종으로 만들어버리는데, 그렇게 하다가 그 사람이 견디지 못하고 도망가는 것을 '탈주' 라고 하는데, 아무튼 그것을 '탈주선', 혹은 '도주선' 이라고 하는데, 또한 그렇게 해서 또 새끼를 치고 말이다. 이것을 라이프니치는 '단자(單子)' 라고 해서, 즉 '폐쇄된 자아상' 이라는 것이다.

* 질문 - 목사님, 여기 교재 164페이지에 있는 마태복음 5장 23절과 34절의 말씀을 그냥 지나갔는데, 설명을 좀 해주세요.

(마 5:23)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마 5:24)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 무엇을 하려고 제단에 나왔는고?

이 말씀은 무슨 의미인고 하니, 여기 나오는 제단은 제사를 드리는 곳인데, 즉 그 당시에 유대인들이 하나님에게 잘 보이면 자기에게 도움이 되고, 또 자기가 구원을 받는다고 여겼는데, 그러면 하나님께 잘 보이는 것이 무엇인가? 하나님이 시키는 데로 제사를 드리면 되는데, 그런데 호세아서에 의하면 하나님은 제사를 원하지 않고 인애를, 즉 사랑을 원하신다는 것이다.

이 사랑이 바로 온 우주를 꽉 채우고 있는 법칙인데, 그러니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사랑이라는 말이다. 그러니 진짜 제단의 주인공이신 예수님인데, 그들이 제사를 드리던 가짜 제단은 말고 말이다. 그런 예수님께서 오셔서 묻는 것이, "지금 니가 양을 바쳤는가? 소제를 바쳤는가?" 라는 것이 아니라, "지금 너희들이 왜 싸우지? 하나님의 사랑을 왜 몰라?" 라고, 그것을 지적하고 계신다는 것이다.

◈ 심판주 앞에서는 양이 아니라, 오직 사랑만이 !!

그러므로 진짜 제단이 되신 분이, 그분이 바로 심판자인데, 그것이 이 산상설교의 내용인데, 그러니 제단 앞에 나온다는 것은, 심판주 앞에 나오는 것과 같은 말인데, 그런데 그러한 심판주 앞에 나와서 뭐라고 하는가? "하나님, 이번에 제가 양을 가지고 왔습니다. 잘했지요? 그런데 저 놈은 엉망입니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진짜 심판주가 되시는 분이 뭐라고 하는가? "나는 지금 니가 바치는 제물로 심판하지 않는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무엇인가? "니가 왜 온 우주에 가득 찬 하나님의 사랑을 모르는가? 나는 것을 가지고 심판해" 라고 한다는 것이다. 즉 심판의 기준이 제물이 아니라 사랑이란 말이다.

그런데 그 당시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했는가? 형식적으로 제단에 뭔가를 바치게 되면, 모든 것들이 다 해소되는 것처럼, 그렇게 오해를 했다는 것이다. 바로 유대인들이 그러했는데, 바로 거기에 대해서 주님이 그들의 질못을 지적하고 있다는 것이다.

* 질문 - 그런데 제가 질문한 것은, 여기 24절에 보면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라고 했는데, 여기에 대해서 좀 설명을 해달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그 당시 유대인들이 예물을 드리는 것은 다른 것은 다 제쳐두고 반드시 해야만 한다고 여겼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설령 그렇게 한다고 해도, 그 예물을 예물답게 하는 다른 요소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형제와의 화목이라는 것이다.

* 질문 - 그러므로 목사님은 예물이 아니라 형제와의 화목에 중점을 둔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기존 교회에서는 형제와 화목은 대충 얼버무리고, 그것보다는 예물을 강조하지 않습니까?

물론 그것은 잘못이고, 여기서 말하는 형제와의 화목은 그냥 서로 사이좋게 잘 지내라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그 어떤 인간도 형제와 화목하게 된 다음에 예물을 드려서 구원을 받은 인간은 없다는 것이다. 지금 이것이 산상설교의 일부분인데, 산상설교의 내용은 다 그렇다는 말이다.

* 질문 - 그렇다면 예수님은 왜 그런 식으로 말씀을 하시지요? 사람들이 알아듣지 못하게 말입니다.

그것은 바로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다 가지고 있는 인간의 자기 의를 공격하기 위함인데, 여기 20절에서 예수님이 뭐라고 하시는가?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 라고 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인간들이 할 수 있는 모든 의는 이미 유대인들이 다 시도를 했는데, 그런데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수준에 도달하려면 그 정도를 가지고는 결코 안 된다는 것이다. 유대인들이 못했으면 다른 사람들도 못한다는 말이다. "지금 니들이 흉내는 내고 있지만, 그것으로는 어림도 없다" 라는 말이다. 즉 "인간은 안 된다" 라는 것이다. 인간으로 하여금 좌절하고 절망케 한다는 말이다.

(마 5:20)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 질문 - 그러면 먼저 앞에서 걸려버리니까, 뒤에 있는 것은 자연적으로 안 되는 것이네요?

물론 안 되는데, 도대체 이 세상에서 형제와 화목할 놈이 누가 있느냐는 것이다. 서로가 한 몸이라고 하는 부부간에서 하루가 멀다하고 서로 싸우는데 말이다. 그렇지 않은가? 특히 부부가 서로 식당이나 같은 일을 하면 하루에 몇 번씩을 다투고 난리가 난다는 것이다. 물론 집사님은 운영하는 이 학원은 아니겠지만 말이다.

◈ 산상설교는 십자가를 사건 이전이기에 !!

지금 여러분이 무엇을 잊고 있는고 하니까, 전에도 몇 번 이야기를 했는데, 신학공부를 하지 않으면 사실 이런 감각을 가지기가 힘든데(?), 지금 이 예수님의 산상설교는 예수님이 십자가를 자기 이전의 일이기 때문에, 예수님의 모든 말씀은 우리 자신의 무능함과 부족함을 깨닫도록 하기 위해서 주셨다는 것이다. 결코 지키라고 준 것이 아니라고 제가 여러 번 이야기를 했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지금 예수님의 이 말씀도 우리로 하여금 절망토록 하는 것인데, "아하, 내 힘으로 화목하고 바친다고 되는 일이 아니구나" 라고 말이다. 그러니 그때는 무엇을 바라보아야 하는가? 십자가에서 나온 것인데, 그것을 두 글자로, 즉 '사랑' 이라고 한다는 말이다.

◈ 오직 십자가의 사랑 안에서 !!

그러니 성도는 온 세상에 가득한 예수님의 사랑을, 즉 십자가의 그 사랑을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바로 그 십자가의 사랑에 의해서 이 모든 말씀이 완성이 되면서, 물론 성도는 그 사랑 안에서 구원을 받는다는 말이다. 그 사랑 안에서 말이다.

* 질문 - 그렇다면 기존 교회에서 이렇게도 나올 수 있지 않나요? "예수님이 형제와 화목하도록 했으니까, 즉 그렇기 이루었으니 이제 너희들은 제단에 헌금을 해라" 라고 말입니다.

◈ 주님께서 한꺼번에 와장창 !!

그것이 따로 따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한꺼번에 나온다는 말이다. 즉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모두 다 지켜서 우리에게 한꺼번에 주었다는 말이다. "이것을 하고, 저것도 하라" 라는 것이 아니라, "어때, 니들은 아무도 하지 못하지? 이제 그 손을 떼라. 내가 다 해서 줄게" 라고 한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부분 부분적이 아니라, 그렇게 전체를 다 한꺼번에 처리해서 우리에게 주셨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렇게 못난(?) 세리와 창기들도 천당에 갈 수가 있다는 말이다. 그렇지 않다고 하면, 어떻게 그들이 천국에 갈 수 있겠는가?

◈ 어, 녹음이 안 되었어요 ??

지난 시간에 바로 그 세리와 창기 이야기를 했는데, 그때 아마 집사님이 없었지 싶은데, 지난 시간에 결석을 했지요? 물론 결석을 해도 천국에 가는데는 아무 지장이 없지만 말이다. 아무튼 주께서 그렇게 모두 다 이루어서 주신다는 것이다. (녹취자 - 목사님, 지난 번 강의가 녹음이 안 되었나요? 전혀 자료가 없습니다. 기억을 되살려서 다시 좀 녹음해주세요. 플리즈!!)

* 질문 - 흔히 교회에서는 그 말씀을 두고서, "일단 둘이 사이좋게 화해를 하고 난 다음에, 그 다음에 헌금을 해라" 라고 하지 않나요? 물론 대부분은 그냥 헌금을 받겠지만 말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형제와 사이좋게 한 다음에 예물을 바치면 되는 것으로, 그렇게 여긴다는 것이다. 그러니 완전히 사기가 아니냐는 말이다. 마치 예물을 바치기 위해서 형제와 사이좋게 하라는 식으로 나오니 말이다. 하지만 교인들은 그것이 사기인 줄은 모르고, 성경대로만 하는 줄로 안다는 것이다. "야, 우리 목사님은 성경에 있는 그대로 하네" 라고 하면서 말이다.

* 질문 - 금요 기도회에 가는 목적이 바로 그것이지 않습니까? 자기가 일주일 동안 자기가 지은 죄를 회개한다고 하면서 말입니다. 그러니 회개를 해도 엉뚱한 꿍꿍이가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을 받지 못한 사람은 할 수 없는데, 이렇게 하나 저렇게 하나 어쩔 수가 없다는 것이다. 사실 그렇게 교회에 속아넘어가는 것도 성령을 받지 못해서 그렇고 말이다.

* 질문 - 전에 목사님이 말씀하시기를, 율법은 완벽한 의(義)을 내어놓으라는 것이라고 했는데요?

◈ 율법은 먼저 죽이기 위해서 !!

율법의 목적은 우리를 죽이기 위해서 있는 것인데, 살리는 것이 아니라 말이다. 그러니 하나님이 그렇게 죽이려고 하는데, 우리는 살려달라고 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냥 죽으면 되는데, 그 다음에 다시 살리고 말고 하는 것은 성령의 몫이고 말이다. 즉 우리 인간들이 무엇을 행한다고 되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 제가 바로 세리이고, 창기입니다 !!

기존 교회에서는 성령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이것을 하라" 라고 하지만, 그러나 복음을 아는 사람은 영생을 받았기 때문에 그 의미를 제대로 안다는 것이다. 주님이 주신 사랑과 용서의 가치를 말이다. 그래서 자기가 바로 세리와 창기임을 고백하고 말이다. 그러므로 지금 한국교회에서 저지르고 있는 사기행각이 보통 큰 일이 아닌데, 그야말로 말씀을 왜곡하고 인간들을 완전히 가지고 논다는 것이다.

* 질문 - 그러니 지금 교회는 복음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들의 속성들을 이용한다는 것이지요?

어느 아는 집사님이 우리교회 사이트에 부흥사들의 사기행각을 고발하는 글을 하나 올려다 놓았는데, 물론 자기 글은 아니고 말이다. 거기에 대해서 제가 뭐라고 답 글을 했는고 하니, 그런 부흥사가 나쁘다고 하기 이전에, 또 그런 사람을 비난한다고 해서 하나님의 종이라는 것도 아니고 말이다.

◈ 청렴을 빙자한 영업 ??

그것을 제가 '청렴을 빙자한 영업' 이라고 표현을 했는데, 거기에 사람들은 마구 마구 속아넘어간다는 것이다. 목사들이 평생을 연구하는 것이 사람들을 낚아채는 것인데, 그래서 지갑을 열게 하고 말이다. 그러니 그런 목사의 협박과 공갈에 좀 배웠다고 하는 교수들도 다 넘어간다는 것이다.

하지만 성령을 받은 사람은, 아무리 무식해도 "뭔가 이것은 아닌데" 라고 한다는 것이다. 미처 정리가 되지 않아서 그렇지 말이다. 하나님은 분명히 모든 것을 주시는 분이고, 또한 모자람이 없는 분인데, 그래서 마지막에는 자기 아들까지도 다 내어주셨는데 말이다. 그런데 교회에서는 그와 반대로 자꾸만 모자란다고 하면서 바치라고 하니, 조금은 이상하다는 것을 느낀다는 것이다.

◈ 혹시 첫 만남을 기억하세요?

그래서 제가 여러분과 처음 만났을 때, 저기 앞에는 있는 음식점에서 말이다. 그때 눈도 좀 내렸는데, 그때 사실 저는 조금은 걱정이 되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까, 그동안 속아온 것에 대해서 쌓이고 쌓인 것이 많이 있을 텐데, 하지만 성령을 받은 사람이라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사랑을 알아서 감사할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열을 받아서 흥분하겠지만 말이다.

하지만 그런 것들은 모두 다 하나님께 맡기라는 것이다. 전혀 자신들의 소관이 아니니 말이다. 그리고 감히 바라기는, 여러분이 이제 "이것은 이다. 아니다" 라는 것을 넘어서서, 그야말로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 질문 - 그러니 하나님의 사랑만 알면 되지 않습니까? 자기가 지키려고 노력하지도 말고 말입니다.

바로 그런 것들이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반응이고, 즉 심령이 가난한 것인데, 그렇게 심령한 가난해야 주님의 사랑이 들어올 구석이 있는 것이지, 그런데 "내가 이것을 지켜야지" 라고 하면, 주님의 사랑이 있을 공간이 다 추방되고 없다는 것이다.

◈ 이제 요엘서에 대해서 !!

이제 요엘서를 살펴보겠는데, 그런데 이 요엘 선지자를 생각해보면 참 가슴이 아픈데, 얼마나 고생했을까를 생각해보면 말이다. 왜 그런고 하니, 지금 백성들이 손꼽아 기다리는 것이 바로 여호와의 날, 즉 구원의 날인데, 그런데 선지자는 그런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한 마디로 말해서 '희망' 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것은 그 당시에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그런데 어떤 선지자가 나타나서 그런 희망 대신에 절망을 이야기해 버린다면, 사람들이 좋아하겠는가? 당연히 굉장히 싫어한다는 것이다.

◈ 선지자는 희망이 아닌 절망을 !!

바로 요엘 선지자가 그런 경우인데, 백성들이 뻔히 희망을 원하는 것을 알고 있는데, 그런데 그렇지가않다는 것이다. 그래서 교회이름도 희망교회, 소망교회, 꿈이 있는 교회, 그렇게 짓지 않는가? 그것은 그 당시에도 마찬가지였는데, 그런데 절망을 이야기하면 어떻게 되겠는가?

* 질문 - 선악체제 때문에 그런 현상이 나타나는 것인가요?

꼭 그런 것은 아닌데, 자기 의로움을 포기할 마음이 없기 때문에 그렇다는 말이다. 즉 자기는 그러한 희망에 같이 얹혀서 망가지지 싫다는 것이다. 장래의 멋진 희망에 자기가 같이 합류되기를 원한다는 말이다. 그러니 자기가 영원히 살아남으려고 하면 자기를 포함시키는 희망이 있어야하고, 그것이 자기를 건져낸다는 것이다. 즉 그런 괜찮은 블랙홀과 희망에 자기가 빨려 들어가기를 원한다는 말이다.

◈ 하박국 선지자의 희망은?

그런데 문제는 그 희망이 하나님이 주신 것이 아니라 자기가 만들어낸 것인데, 즉 그렇게 자기와 연결된 희망이란 것이다. 하나님이 주신 것이 아니고 말이다. 우리가 잘 아는 구절인데, 하박국 3장에서 하박국 선지자가 뭐라고 했는가?

(합 3:17)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합 3:18)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자기는 외양간에 소가 없어도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고 즐거워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말이 되는가? 외양간에는 소가 가득히 차야 기뻐하는 것이지 말이다. 농부가 외양간을 왜 만드는가? 소를 가득하게 채우는 재미로 만든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그것이 바로 믿음이라는 것인데, 그러니 믿음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것이지, 자기 희망을 믿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러니 믿음은 우리의 그런 희망을 꺾는 것을 의미하는데, 즉 그런 희망이 없어도 구원을 받는데, 왜 그런 희망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면 낙담을 하느냐는 말이다.

* 질문 - 하지만 인간은 그런 희망을 본능적으로 못 버리지 않나요? 그래서 복권도 사고 말입니다.

물론 버릴 수가 없는데, 외양간을 짓고 하는, 그렇게 밑천이 들어갈 때는 다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다는 것이다. 물론 복권도 그렇지만, 그러나 이 복권은 참 곤란한데, 아무튼 제발 사지 말라는 것이다. 이 복권이 왜 웃기는 것인고 하니, 정신병 증상이 있는데, 그것은 마치 왼손으로 주머니에 만원을 넣어놓고는, 오른손을 주머니에 넣어서 만원을 발견하고는 "야, 만원 벌었다" 라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 로또복권의 악마성 ??

만약에 그 복권에 당첨이 되어도 그 돈이 어디서 나온 것인가? 하늘에서 떨어진 것이 아니라, 자기가 평소에 복권을 산 바로 그 돈이라는 말이다. 물론 거기에는 남들이 구입한 돈도 포함이 되지만, 아무튼지 그 당첨금은 그렇게 해서 생긴, 바로 자기 돈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자기가 로또복권 1등에 당첨되어서 10억을 벌었다고 하면, 바로 다른 사람들이 10억을 날린 것이고 말이다. 즉 자기 한 사람 때문에 다른 수만 명이 눈물을 흘린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것을 두고 좋아한다는 것 자체가 너무 잔인하지 않는가? 자기 재수가 좋은 것만 생각하지, 그것 때문에 남들이 돈을 다 날렸다는 생각은 하지 않고 말이다. 물론 인생자체가 그런 것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그러니 당첨이 되어도 문제고, 되지 않아도 문제인데, 그러니 그런 것에 흥분한다는 것 자체가 정신병에 걸린 것과 같은데, 즉 없는 희망을 무지막지하게 하나 만들어낸 것이 바로 로또복권이라는 말이다. 그것을 복권을 하나 구입해놓고는 일주일을 기다리는 재미로 살아가는데, 그런 없는 희망에 목숨을(?) 건다는 것이다.

◈ 희망을 절망으로 바꾸시는 하나님 !!

아무튼 사람은 이렇게 희망이 없으면 안 되는데, 그런 희망 가운데 살아가는 인생을 하나님께서 그냥 지켜보는 것이 아니라, 자기 택한 백성에게는 진짜 참된 희망을 이야기하시는데, 그것이 바로 희망을 절망으로 바꾼다는 것이다. 그런 하나님이 진짜 하나님이고, 약속의 하나님이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은 자기 희망을 버릴 줄 알아야 하는데, 그렇게 되어야만 진짜 희망을 가진 사람이 된다는 것이다. 그런 자가 구원을 받은 백성이란 말이다. 자기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그러한 사사로운 희망이 하나님에 의해서 절망으로 바뀐 자들이 말이다. 그런 교체됨이 있을 때, 그런 자들이 바로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말이다.

* 질문 - 그러면 붕어를 잡으러 가는 것도 일종의 희망인가요?

물고기를 잡는다는 희망을 품고 가지를 않나요? 아무튼 낚시를 간다면, 고기를 얼마나 잡아서 마누라에게 자랑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야, 하나님의 은혜로 이렇게 많이 잡았다" 라고 말이다. 그러니 그렇게 하지 말고, 낚시를 가는 도중에 말씀을 생각해야하는데, "지난번에 요엘서를 배웠는데, 그 내용이 무엇이었지?" 라고 하면서 말이다.

◈ 낚시를 해도 자기를 돌아보는 !!

그러니 그런 낚시를 가는 과정 자체를 자기를 돌아보는 조용한 시간으로 보면 되는데, 그런데 마치 자기가 커다란 사업을 벌이는 것처럼, 그렇게 "이 놈의 고기야, 기다려라. 내가 간다" 라고 떠벌리지 말라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나중에 물고기가 아닌 실망만 가득하게 돌아오는데, 그래서 수산시장에 들러서 고기를 사든지 해서 집에 들어오고 말이다.

왜 그런 행동들을 하는가? 그것은 바로 자기가 그만큼 잘났다고 하는, 그렇게 남들에게 자기 자신을 뽐내기 위한 것이란 말이다. 즉 "나는 다른 것은 몰라도 낚시 하나는 도사이다" 라는 것을 남들에게 자랑하기 위해서 그렇게 한다는 것이다. 그것을 두 글자로 '환상' 이라고 하고 말이다.

이제 교재를 보겠는데, 즉 하나님께서 왜 요엘 선지자를 보내었느냐는 것이다.

** 요엘서는 백성들이 손꼽아 고대하던 구원의 날인 여호와의 날이 심판의 날로 바뀌었음을 알리는 책이다. 직접 땅을 황폐케 하는 무서운 심판이다. 여기에 대해서 백성들은 울어야 마땅하다. 그러나 옷을 찢는 그런 형식적 회개는 무용지물이다.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어야 한다고 했다.(2:3)

(욜 2:13) 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올지어다 그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나니

◈ 옷이 아닌 마음을 찢어라 ??

여기에 보면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어야 한다" 라고 하는데, 옷은 힘을 강하게 주면 찢어지는데, 물론 아깝기는 하지만 말이다. 그러나 도대체 마음은 어떻게 찢는가? 자기 마음을 무슨 재주로 찢는다는 말인가? 그러니 하나님의 말씀은 지킬 수가 있다는 것인가? 전혀 지킬 수가 없다는 말이다.

예를 들어서, 절에 중이 도를 닦으면 자기 마음을 찢는다고 한번 생각해보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자기 마음을 찢는 그 마음은 도대체 어디에서 나왔느냐는 말이다. 그것도 역시 자기 마음인데, 그러니 전혀 찢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물에 빠진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을 외부에서 누군가가 그 사람의 머리카락 등을 잡아당겨서 건질 수는 있는데, 하지만 물에 빠져서 떠내려가고 있는 자기 자신이 자기의 머리카락을 잡아서 당긴다고 해서 물에서 빠져 나올 수가 있는가?

◈ 불교 - '나'를 없애려고 하는 그 '나' 조차도 없애라 !!

제가 너무 어려운 예를 들었나요? 불교가 마치 그와 같다는 것이다. 불교는 자기 마음을 없애기 위한 것인데, 불교에서 말하는 번뇌는 '나' 자신 때문에 생겼고, 그 '나' 때문에 대상이 생겨서, 그런 자기와 대상 사이의 폭을 줄이려고 하니 너무나도 고통스러워서 '나'를 없애버린다는 것이다. 그렇게 자기를 없애면 자기 앞에 있는 그런 환영이나 환상이 사라지니, 그것을 곧 '해탈' 이라고 하고 말이다.

하지만 그것이 말장난에 지나지 않는데, 왜 그런고 하니, 그렇게 자기 마음을 깨겠다고 하는 그 마음은 도대체 누가 어디서 깨느냐는 말이다. 그러니 불교도 역시나 사기꾼들이라는 말이다. 목사만 그런 것이 아니고 말이다. 그런데 거기에 민중들은 또 속아넘어가는데, 나이가 많은 할머니들뿐만 아니라, 절에 다니는 사람들이 다 속는다는 것이다.

◈ 동안거, 용맹정진, 무안태행 ??

불교에 보면 '동안거(冬安居)' 라는 것이 있는데, 중들이 1년에 한번씩 추운 겨울에 벽만 쳐다보면서 도를 닦는 것인데, 즉 '자아'를 없애는 수련을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3달 동안을 하는데, 그 중에서 제일 어려운 '용맹정진(勇猛精進)' 이라는 것이 있는데, 밤에 잠도 자기 않고 7일 동안 눈을 부릅뜨고 수련을 한다는 것이다. 그때 졸면 어깨죽지를 내리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이 '장군죽비' 라고, 길다란 대나무로 만든 몽둥이(?) 같은 것인데, 그것을 '탁', '탁', '탁', 3번을 내려친다는 것이다.

그런데 차라리 그렇게 하는 놈들을 몽둥이로 내려쳤으면 좋겠는데, 왜 그런 짓들을 하느냐는 것이다. 모두가 사기를 치는 것인데 말이다. 아무튼 그것을 '무안태행(?)' 이라고 하는데, 즉 자기 마음을 깨겠다는 그 마음이 없어질 때까지 그렇게 하겠다는 말이다. 그런데 그것이 말이 안 되는 것이, 그런 자기 마음이 없어졌다고 하는 것을 언제 누가 알겠는가? 그것을 정하는 마음이 또 있어야 하는데 말이다.

조그만 생각해보면 다 들통이 날 사기를 그렇게 치는데, 그런 짓을 하는 자들이 무슨 도사라도 되는 줄 알고, '스님', '스님' 이라고 하면서 졸졸 따라다닌다는 것이다. 법정이나 종철도 다 그런 사기꾼들에 불과한데 말이다. 마치 그것이 무슨 해탈을 한 도사(?) 수준에 있는 것처럼 착각을 한다는 것이다.

* 질문 - 인간은 이상(理想)과 육적인 현실을 따로 놓고, 그래서 정신은 이상을 추구하는데, 육신은 현실을 추구하는데, 그런 것 때문에 생긴 것이 종교가 아닌가요?

물론 그것이 종교인데, 그러한 두 가지 시스템, 즉 하늘과 땅 사이에 누가 있는가? 바로 '자아'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종교는 결국 자아가 스스로 해탈하기 위함이라는 말이다. 그것이 곧 '자립종교(?)' 이고 말이다.

* 질문 - 그러니 인간은 아까 말씀하신, 청렴이나 무아지경과 같은 것을 추구하다보니, 그런 세계를 향해서 나아가는 것이지요?

그것이 바로 인간의 희망사항인데, 즉 그렇게 되고 싶다는 것이다. 지금 현실은 번뇌로 인해서 고통스러우니 말이다. 예를 들어서, 독실한 불교집안에 태어난 아이가 그만 정박아라고 하면 그 얼마나 힘이 들겠는가? 그때는 절에 가서 정진(精進)을 하게 되는데, 일반인들도 머리를 깍지 않지만 그렇게 수련을 하는데, 그렇게 괴로울 때는 그 괴로운 마음을 죽여버린다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 자기 현실이 정박아를 낳았든지, 사업에 부도가 났던지 간에, 지금 자기 마음만 안정이 되면 어떻게 되는가? 그 다음부터는 아주 객관적으로 단정된 마음에서 정박아인 아이도 사랑으로서 돌보고, 무너진 사업도 다시 일으키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 수련을 한다는 것이다.

◈ 보살님, 여기 게보린을 한 알 ??

하지만 그것은 결국에는 그 순간순간을 모면하는 것밖에 되지 않는데, 마치 머리가 아프면 게보린을 먹듯이 말이다. 즉 궁극적인 진리나, 자기가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는 것이다. 그냥 자기가 소유한 것 때문에 고통이 따르는데, 그러므로 그 고통은 '나'에 관한 것인데, 즉 '나'의 고통 때문에 '나'를 다스려서 그 고통에서 벗어나려고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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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 8,422건 중 305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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