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1107b 울산강의-창세기41장
20081107b 울산강의-창세기41장
이름 : 한윤범(IP:59.6.189.223)
20081107b 울산강의-창세기41장
(강의:이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에 요셉의 꿈 해석에서 우리가 또 새롭게 생각해야 될 것은 뭐냐 하면, 꿈이 있고 해석이 있는 게 아니고, 해석이 먼저 있고 나중에 해석에 맞추어서 꿈을 꾼다는 거예요. 이게 어려운 거예요. 사람의 실력은 뭐냐 하면, 꿈이 일단 있고 꿈에 대해서 여러 가지 자기의 다양한 견해라든지 해석이 나오는 이것이 인간들이 할 수 있는 한계가 이것밖에 없습니다. 꿈이 먼저 있고 꿈에 대해서 해석한다, 이래 되는데.
하나님께서는 해석이 알맹이입니다. 알맹이를 보여주기 위해서 꿈이라는 상징인데 아까 이야기한 흔적이 등장한 거예요. 그래서 여러분들이 요셉이 꾼 꿈을 보고 ‘요셉 좋겠다. 꿈 잘 꿔서 총리대신 되고. 좋겠다’ 하시면 안 됩니다. 그게 아니고 요셉 자체가 장차오실 예수님을 보여주기 때문에 이 세상에 흔적이란 걸 자극을 남기고 지나가는 거예요. 손톱 길러서 긁으면 긁기잖아요.
하나의 뭔가 이 세상에 흔적을 남기는 겁니다. 인간이 해석할 수 없는 해석이 도리어 인간 세계를 지배한다. 인간이 어떻게 할 수 없는 원래 해석이 인간을 지배하고 있으며 인생이란 하는 것은 뭐와 같은가? 바로 다 꿈에 예속되고 꿈의 범주 아래 담겨있고 주님이 주신 해석에서 벗어나는 그런 인생사는 없다는 겁니다. 몽땅 다 요셉을 통해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소속이 돼버리는 겁니다.
이것을 말로 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는 요셉을 따로 놔두고 요셉이 들어가야 될 여러 가지 상황 속에 먼저 하나님께서 관여하셔서, 침투하셔서, 침공하셔서 꿈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위기와 당황스러움을 남기고 그 차후에 요셉이 어슬렁어슬렁 하는 식으로 요셉이 등장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전도를 전도 안 하면 안 된다. 주의 뜻이다. 이렇게 하시면 안 되고, 전도의 모든 바탕은 추수는 누가 하십니까? 예수님이 다 하시고, 우리는 뒤따라가면서 주님이 하신 추수, 결실을 주어먹기만 하면 되는 거예요. 그렇게 돼있어요.
그런 생각이 발상이 되려면 나부터 하나님의 소속이다, 나부터 하나님의 것이라는 걸 생각을 갖고 있어야 됩니다. 내가 중심이 돼버리면 그 생각이 들지 않지요.
그래서 이 시간에는 요셉의 꿈을 좀더 깊이 분석해보겠습니다. 그게 몇 절에 나와 있느냐 하면, 25절에 쭉 나와 있습니다. 꿈의 해석부터 먼저 읽어 그 다음에 그 해석이 알맹이며 알맹이를 보여주기 위해서 꿈이 먼저 등장했다는 겁니다. 나중에 있는 것이 꿈이 있어야 될 이유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진짜는 나중에 있습니다.
그 나중을 오늘 본문 33절에서는 ‘지혜 있는 사람’이다. 지혜의 등장이라고 볼 수 있는데. 그러면 25절부터 해석이 됩니다. “요셉이 바로에게 고하되 바로의 꿈은 하나이라” 당신은 둘을 꿨다고 생각하는데 사실은 하나입니다. 그러니까 이미 해석이 먼저 있고, 해석에서 꿈이 나오니까 꿈1, 꿈2가 꿈이 두 개지만 어디로 모여져야 된다? 하나의 해석으로 모아져야 된다. 그래서 모든 성경해석은, 예수님이라는 하나에 모아져야 됩니다.
‘나는 암에서 병 낫다. 나는 이런 간증이다.’ 어떤 간증이 있더라도 그 간증은 결국은 뻥뻥뻥하고 하나의 잠시 나타나다 없어지는 비누방울처럼 뻥뻥 소리 내면서 터져버려야 돼요. 그리고 나라는 인생도 터져버려야 돼요. 뻥뻥하고 공중에 다 터져버리고 오직 하나에 모아져야 됩니다. 이럴 때 사람이 행복해요. 사람이 참 편합니다.
여러 가지 인생에 A라는 사람 인생이 있고 B라는 인생이 있더라도 서로가 서로를 비교해버리면 짜증나요. 그런데 이 해석이 예수님에게 모아져버리면 다 같이 죽은 자가 돼버립니다. 죽은 자가 색깔이 뭐더라도 죽으면 검은색이잖아요. 죽은 자기 때문에 죽은 자가 죽은 자를 갈구고 따지고 대비하고 대조하고 누가 높았다, 낮았다 이럴 필요 없어요. 요셉이 높습니까, 왕이 높습니까? 그걸 따질 필요 없다고.
둘 다 어디에 종속됩니까? 하나님 주신 해석에 묶여있어요. 그러니까 누가 높고, 낮고 할 것 없어요. 인생을 살 때 비교하지 않고 누가 경쟁하지 않으면 그것처럼 편한 인생이 없습니다. 이래 사나, 저래 사나 나는 죽은 자다. 왜 죽은 자냐 하면, 이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뭐로 본다? 이걸 죽은 자로 만들어야 하나님의 해석 속에 죽은데서 살리는 하나님의 십자가의 위력이 빛을 발하잖아요.
제가 아까 했잖아요. 과거에서 현재로 가지만 계속 현재인 줄 알지만 나중에 결국 현재는 뭐로 끝납니까? 죽음으로 끝나잖아요. 죽음 바깥에 있는 세계가 역으로 우리에게 쳐들어오게 되면 우리는 무슨 자가 되냐 하면, 아무리 지금 내가 잘 살았다, 못 살았다, 잘났다 뭐 해도 결국 하나의 죽은 송장에 불과하다, 죽은 자에 해당된다 이 말이죠.
죽은 자에 해당되는 이런 위기에서 우리가 살 길은 뭐냐 하면, 미래에 있는 하나님의 작업에 들어가야 되죠. 그 작업이 뭐냐? 죽음에서 영생을 얻는 작업이 죽은 자 속에 들어와 버리면, 이 사람은 바로 하나님의 지혜자, 해석자 되는 겁니다. 그 이야기를 지금 하고 있는 겁니다. 한번 하나님 주신 언약은 변치 않는다. 그걸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처음에 해석에 보면, 26절 봅시다. “일곱 좋은 암소는 일곱 해요 일곱 좋은 이삭도 일곱 해니” 자, 여기서 또 어려워요. 암소 일곱 마리 그리고 일곱 이삭, 이거는 개체지요. 하나, 둘, 셋, 넷 개체잖아요. 그런데 개체가 뭐로 바뀌었습니까? 시간으로 바뀌었다면 요셉이 그렇게 해석했다면, 그러면 오늘날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뭐로 바뀌어야 돼요? 시간으로 바뀌어야 되는 거예요. 억수로 어렵지요. 제가 이야기하면서 어렵다.
일곱 암소가 일곱 해라고 이렇게 시간적인 변화를 주는 그런 아이디어는 인간에겐 없습니다. 우리가 일단 알고 난 뒤에는 그 다음에 꿈꿀 때 ‘일곱 해’라고 컨닝해서 흉내는 낼 순 있지만 처음에 해석할 때 일곱 마리 암소가 뭐가 된다? 칠 년이 된다는 여기 시간적인 요소가 가미될 줄은 상상도 못했죠. 인간의 지혜로선 나올 수 없는 겁니다.
그렇다면 일곱 마리 암소로 하지 말고, 일곱 사람으로 합시다. 일곱 사람이 결국은 한 사람, 한 사람 당 뭘 감당하느냐? 시간, 일 년씩 감당해서 칠 년이 된다. 이런 해석과 같은 해석이죠. 이것은 인간은 어느 요소로 분해된다? 결국은 인간의 개체는 시간요소로 분해가 돼버리죠.
그렇다면 인간은 나는 누구라고 할 게 아니라 너는 어떤 역할을 맡은 시간이냐? 너는 뭘 보여주는 인생을 살고 있느냐? 너는 예수 그리스도 가운데서 어떤 대목을 보여주는 그런 인생을 살고 있느냐? 인생이란 시간으로써 그 사람의 질을 결정짓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이 말입니다. 내가 얼마나 가졌느냐? 여러분 시간은 갖는 게 아니에요. 시간은 주어지는 것이지 내가 갖는 게 아닙니다. 이왕 어려운 것 더 어렵게 해봅시다.
여러분들이 사십 년을 못 가져요. 사십 년을 지내왔잖아. 나이가 현재 사십이라면 사십 년을 지내왔지 사십 년을 가지고 있는 게 아닙니다. 여러분이 갖고 있는 건 뭐냐? 점점 더 죽음에 가깝다는 나의 섞어가는 육질, 신체 이것만 갖고 있지 이것도 시간이 흘러버리면 파리하고 흉측한 송장으로 변합니다. 진물 나오지요, 피부 막 뭉개지지요. 내가 봐도 안 돌아봐요. 내가 봐도 내 시체 안 돌아봅니다.
그렇게 애지중지하면서 찍어 바르고 고치고 난리치던 내 신체가, 죽은 시체가 되서 턱 누워있는데 나도 안 볼 거예요. 더러워서 안 봅니다. 내가 성질이 못 되서가 아니라 나의 임무는 아름다운 내 신체를 갖는 게 나의 임무가 아니고 나는 그냥 흘러가는 존재, 시간 따라 흘러가면 그만 이에요. 사십 년 살았습니까? 사십 년 흘러가고 이제 사십일 년째 맞이한 거예요. 내 역할은 시간의 지배를 보여주는 그걸로 끝나는 겁니다.
그 다음에 어려워요. 그 다음에 나오는 흉악한 일곱 마리 암소가 뭐라고요? 흉년 드는 칠 년이죠. 그러면 꿈에 의하면 앞에 있는 아무리 좋은 칠 년이라도 그 다음에 뒤에 있는 칠 년이 쳐들어오면 남는 것은 앞의 것이 남습니까, 뒤의 것이 남습니까? 결국은 뒤의 것이 남아요. 이게 플러스, 마이너스해서 제로가 되는 게 아니고, 플러스, 마이너스해서 마이너스가 된다니까. 이런 계산법이 또 하나님 계산법이 튀어나온다니까. 플러스, 마이너스가 마이너스로 계속 돼버리는 거예요.
이거는 소유개념이 아니고 시간개념이기 때문에 뒤에 시간이 우선권이 있어서 그래요. 이걸 제가 콘크리트 타설 작업이라고 했지요. 위에 덮쳐버리면 안에 뭐가 있든지 덮쳐버리는 거예요. 그렇다면 결국 바로가 예상한 바와 같이 이것은 절망입니다. 이걸 전 ‘파멸’이라고 보는데. 인생사가 전부다 파멸이에요. 결국은 사람이 아무리 화려했다, 출세했다, 뭐했다 하지만 나중에 덮쳐버리면 죽음이라는 것은 인간의 파멸로 끝나버립니다.
제가 고린도전후서 녹취한 것, 그 책을 얼른 보니 어떤 대목이 나오느냐 하면, 대법원 판사하던 사람이 한강다리에서 뛰어내려 자살한 사건이 있었어요. 아까 한 것 다시 해볼까요? 기억 자꾸 해야 돼요.
사람은 어떻게 산다? 과거가 누적되어서 뭘 만든다? 현재가 된다. 현재를 뜯어보면 뭐가 들어있어요? 과거밖에 없는 거라. 그러니까 한강다리에서 뛰어내린 사람은 현재가 자기가 육십오 세고, 칠십 세고 이게 있는 것이 아니고, 자기 안에 뭐가 들어있습니까? 나는 과거에 대법원 판사였다. 이게 문제에요. 대법원 판사였는데 지금 현재 자기가 몸이 아파요. 가족들에게 짐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그는 자살한 거예요.
인간 속에 시간이 흐르는 게 아닙니다. 인간은 그대로 있고 인간 위에 시간이 덮치죠. 인간이 원하던 원하지 않던 정해진 시간이 우리를 덮쳐버려요. 모든 인간이 마찬가지에요. 신자든, 불신자든 모든 인생은 예수 그리스도가 생각해놓은 그 시간의 길이 덮쳐서 그 사람은 그 시간대로 그 안에서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이며 살게 돼있습니다. 하나는 진노의 그릇, 하나는 긍휼의 그릇으로 그렇게 살다 가게 돼있습니다.
그러면 플러스, 마이너스 합치니까 마이너스 됐다. 여기에 무슨 희망이 있습니까? 지금 바로 왕이 꿈을 꿨고 해석을 들어도 고민이 그거잖아요. 점쟁이한테 가서 ‘어떻게 이번 우리 애가 서울대학 되겠습니까?’ 하는데 ‘아무리 해도 안 되겠습니다.’ 할 때 ‘그게 뜻이네요. 애가 운명이 이번에 떨어지게 돼있습니다.’ 그럴 때 ‘어떻게 안 되겠습니까?’ ‘안 되겠습니다. 이건 운명입니다.’ ‘운명인 줄 알지만 어떻게 빠져나갈 다른 길 없습니까?’ ‘없습니다.’ 얼마나 큰 절망이겠어요. 바로 왕이 꿈을 꾸고 난 뒤에 해석이 안 됐지만 뭔가 절망을 느낀다 말이죠. 뭔가 무서워한 거예요.
그래서 여기 보면 어떻게 되느냐 하면, 28절에 “내가 바로에게 고하기를 하나님이 그 하실 일로 바로에게 보이신다 함이 이것이라” 그러니까 하나님이 하실 일이 바로에게 보였지요. 그게 뭡니까? 여러분 답변해보세요. 하나님 하실 일이 뭐예요? 첫 번째 칠 년 동안 풍년, 그걸 다 까먹지요. 뭐가? 그 뒤에 흉년이 다 까먹지요. 그래서 결국 남는 게 없고 흉년 그대로 남지요. 그것까지 하나님 일이잖아요. 끝났잖아요. 하나님 일 끝나버렸네. 무슨 대책이 있습니까? 끝났는데. 이것 운명이고 숙명인데. 이건 빼도 박도 못하고 마땅히 그래야 되는 일인데 끝난 이야기네요. 꿈 해석 더 들을 것 없네요. 말투가 완전히 베토벤 말투.
31절 봅시다. “후에 든 그 흉년이 너무 심하므로 이전 풍년을 이 땅에서 기억하지 못하게 되리이다” 아주 냉정하고 차갑게 단언을 해버립니다. 결정을 지어버립니다. 기억하지 않을 것이다. 왜 하나님께서는 이런 계시를 애굽에다 집어넣었습니까? 그것은 더 이상 바로나 바로의 신하들이 더 이상 애굽 땅을 애굽 나라를 자기 쪽으로 어떻게 해볼까 하는 그런 여지를 싹둑 잘라버린 거예요. 모든 가능성을 다 잘라버리죠. 이게 남는 것은, 바로 왕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입니까? 전체 애굽 나라를 몽땅 들어서 누구한테 바치면 돼요? 요셉에게. 그게 하나님의 원래 뜻이었습니다.
자, 제가 지금 하는 말을 혹시 눈치 챈 사람도 있는지 모르지만, 하나님이 주신 꿈이 마치 얼른 보기에는 요셉 말고 다른 인간들에게 주신 꿈처럼 느껴지는데 하나님은 인간사에 꿈을 꾼 것처럼 해놓고 사실은 이걸 인수인계 어디다 모읍니까? 요셉이 보여주는 어떤 인물, 누구지요? 예수 그리스도. 요셉 노선으로 모아지게 하는 중간 절차로써, 중간 과정으로써 그 꿈이 세상 사람들의 개인 사생활까지 다 관여한다는 사실이 오늘 본문에서 드러나는 겁니다.
꿈은 요셉이 꾸는 게 아닙니다. 요셉은 그냥 해석자지요. 꿈은 일반 사람들이 꿨는데 다 꾸고 난 뒤에는 일반 사람들이 자진해서 자기 인생을 어디다 반납하느냐 하면, 요셉 노선에 편입시켜요. 편입시험도 없어요. 그냥 갖다 바치면 돼요. 편입시켜서 하나님이 요셉으로서 안 된다는 것, 실패했다는 것, 망했다는 것이 어떻게 요셉 안에서 이게 융성하게 되는가를 이제는 모든 책임은 누가 책임인가? 하나님과 요셉의 관계 속에서 중심점으로 모아진다는 사실을 꿈을 통해서 알려주고 있습니다.
결국은 요셉에 연결된 분이 예수님이니까 결국은 제가 하는 말은 내 인생이란 것은 단독적으로 내 인생은 있고, 없고? 없고 누굴 보여주는? 예수님을 보여주는 인생 되라고 우리에게 예수님의 계시가 십자가의 계시가 복음이 우리에게 주어진 겁니다.
그렇다면 우리 인생에서 어떻게 주님의 뜻이 우리에게 다가옵니까? 아까 했지요. 부딪침으로. 근데 그 부딪침의 여파로 등장하는 게 뭐지요? 과연 성경말씀은 그게 하나의 가설이 아니고 진짜 현실은 성경말씀대로 돼가는 게 맞구나. 구름 타고 온다더니 진짜 오겠구나. 부활했다더니 정말 부활했겠구나. 십자가 진 그 피가 내 죄를 용서한다는 말이 그게 진짜 맞는 이야기구나. 성경말씀, 복음이 날이 갈수록 점점 더 생생하게 다가오기 위해서 우리로 하여금 우리 인생에 마주하면서 부딪치면서 다가오는 거예요.
그래서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예수 믿고 난 뒤에 우리가 더 착해진다고 하는데 그거는 아직도 정신이 여기에 아래층에 인간 세상에 정신이 박혀있기 때문에 그렇게 해석하는 거예요. 우리 교회가 잘되고 내가 잘되고 이런 건 없어요. 그저 예수님 잘 되면 덩달아 우리는 잘된 거예요. 예수님 말씀대로 그게 실제로 드러나면 그걸로 우리는 아주 잘된 겁니다.
그 다음에 요셉에게 다 맡깁니다. 어떻게 맡기느냐 하면 바로가 맡기죠. 여기에 38절에 보면, “바로가 그 신하들에게 이르되 이와 같이 하나님의 신이 감동한 사람을 우리가 어찌 얻을 수 있으리요” 그 다음에 “요셉에게 이르되 하나님이 이 모든 것을 네게 보이셨으니 너와 같이 명철하고 지혜 있는 자가 없도다” 그리고 40절에 보면, “너는 내 집을 치리하라 내 백서이 다 네 명을 복종하리니 나는 너보다 높음이 보좌뿐이니라”
그러니까 ‘보좌뿐’이라는 말은 높다는 말입니까, 없다는 말입니까? 없다. 이 의자뿐이다. 의자만 높을 뿐이지 실은 높은 게 아니고 ‘네가 더 높다’ 이런 뜻이에요. 갑자기 흉년, 풍년 이야기하다가 싹없어지고 바로 왕은 뭘 느낍니까? 희망을 갖죠. 왜? 까짓것 칠 년 흉년드나 풍년드나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고, 네만 있으면 그건 염려할 게 있다, 없다? 없다 이 말입니다. 이게 예수 믿는 거잖아요. 예수 믿으면 됐지 까짓것 펀드 내려가나 주식값 쪽박하나 그건 상관없다 이 말입니다.
관심사가 나라는 관심사에서 뭐로 이전 됐습니까? 주님이 어떻게 하실 거냐로 관심사가 이전된 거예요. 바로 그러한 조치조차 누구 몫이다? 하나님이 홀로 하신 몫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범사에 하나님께 감사하죠. 이런 것조차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우리가 개입해서 내가 실천에 옮길 수 있는 여지는 없습니다.
그래서 새순교회 여러분, 오늘부터 완전무장해제 되어서 내가 지킬 성경말씀은 있다, 없다? 하나도 없음을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내가 지킬 성경말씀 하나도 없습니다. 참 오늘 복음 중에 복음을 이야기한다.
괜히 내가 개입하면 어떤 현상이 일어나는 줄 압니까? 나는 그 말씀을 일 번, 최선을 다했다. 이 번, 잘 지켰다. 삼 번, 조금했다. 사 번, 잘 할 수 있었는데. 만 날 자기반성, 열댓 가지 항목 만들어서 체크한다고. 오늘은 이쪽인가? 오늘은 삼 번, 사 번. 행동은 본인과 판단하는 본인이 자기가 알아서 하는 게 무슨 성경해석입니까? 엉터리 해석이지. 자기 좋으라고 하는 성경해석이죠.
우리가 지킬 성경말씀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왜냐? 우리는 완수자가 우리는 지혜자가 아닙니다. 따라서 앞으로 인생 성공 했니, 실패 했니 하는 것도 우리 소관이 아니죠. 주님이 우리를 이끌고 가기 때문에 그 자체가 성공된 관계입니다. 성공 관계기 때문에 우리가 염려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거기서 예수님과 이별해야 되는가? ‘예수님, 수고 많이 해주이소. 나는 돈이나 벌랍니다. 고맙습니데이.’ 그만 잊어버리고 빠이빠이 선언할까요? 그때부터 우린 뭘 아느냐? 요셉이 총무대신이 되어서 우리에게 해줄 게 뭐냐를 알아가야 돼요. 이제부터.
모든 걸 요셉에게 일임했지 않습니까? 흉년, 풍년 걱정할 것 없어요. 왜냐하면 흉년이 되던 풍년이 되던 다 요셉이 요셉 되게 하기 위해서, ‘요셉이 과연 지혜자구나’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한 흉년이었고, 증명하기 위한 풍년이었기 때문에 흉년들었다고 실패 아니요, 풍년들었다고 좋아할 것 아닙니다. 계속 우리에게 요셉 같은 분이 있다는 그 자체로써 우리는 안심이 되고 걱정 끝났어요. 염려, 걱정 모든 것이 끝난 상태란 말이에요.
그 다음부터는 뭐냐 하면, 우리가 흉년을 감당 못하고, 풍년을 감당 못하는데 쉽게 말해서 우리는 돈 좀 벌면 막 씁니다. 막 쓰고 펀드 넣다가 나중에 작살나면 그때는 아낀다고 난리라. 콩나물 장사 붙들고 싸움하고. 십 원어치 더 주이소. 돈 있을 때는 기마이 막 쓰다가. 우리 식대로 하면 이런 식이거든요.
그래서 우리는 관심사가 ‘요셉은 이런데 우리는 이래야지’ 이런데 관심 두지 마시고 우리 식대로 하면 모든 것이 조금만 어려워도 어떻게 할 줄 모르고 감당을 못해서 늘 낙담하고 분주하게 허둥대기만 하는 그때 순간에도 살아계신 요셉은, 지혜자는, 주님은 그런 나를 어떻게 선하게 인도하는가? 그 관계에 대해서 우리는 눈이 번쩍 열려서 이거 알면 되는 거예요. 이 관계에 대해서. 그게 앞으로 42장부터 내용이 되는 겁니다.
모든 것을 갖고 있는 요셉이 그걸 자신의 개인의 영달과 출세와 영광을 위해서 썼느냐? 아니면 모든 자기 지혜를 어디다 쏟아 부었느냐 말이죠. 생각해 보세요. 예수님이 물 위를 걸었다. 그런 솜씨 같으면 돈 많이 법니다. 한 번씩 울산에 와서 이벤트 열어서 태화강 걸어버리면 돈 막 들어옵니다. 옆에서 돈 받기만 하면 돼. 우리는.
그런데 그분이 돈 벌 수 있는 그런 재주를 갖고 있으면서도 그 재주를 어디다 쏟아 부었느냐 하면, 십자가 피 흘리는데다 쏟아 부었다고. 주님께서는. 돈이 어디 있는지, 물고기 아가미 열어서 돈 있는 걸 아시고, 무화과나무도 저주하시고, 병든 자를 낫게 하고 귀신 좇는 그 능력을 주님께서 어디다 소비했느냐 하면, 우리가 아무리해도 우리 힘으로 안 되는 도저히 할 수 없는 것, 죄 지은 자가 그 죄에서 벗어나지 못하거든요. 우리가 아무리 선한 일 해도 안 되는 그 죄 용서함에 주님께서 그 모든 재주를 거기다 퍼 넣었어요. 그게 바로 죽으심입니다.
한 알의 밀알이 되어서 썩으니까 그 밀알에서 무수한 열매가 맺히듯이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죽는데 다 사용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바로 흔한 말 있지요. 사랑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법으로 따지지 않고 묻지도 아니하시고 사랑으로 퍼부어주겠다는 겁니다.
여러분들이 연애할 때 연인들 사이에 상대방이 귀하던가요, 자신이 귀하던가요? 연애할 때는 상대방도 안 귀하고 자신도 안 귀해요. 그럼 뭐가 그렇게 귀해서 닭살 돋는 행동을 버스 안이나 공원의 벤치에서 그렇게 하는 겁니까? 그것은 바로 오직 무엇을 위한 겁니까? 사랑 그 자체를 안 놓치고 싶어서 그런 겁니다. 너를 위해서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너, 나를 통해서 번쩍하고 불꽃 튄 그 사랑, 사랑 자체를 귀하게 여기고 싶어서 그 사람도 사랑을 위해서 희생하고, 나도 사랑을 유지하기 위해서 희생했던 겁니다.
결혼하게 되면 문제는 복잡하게 되죠. 갑자기 사랑은 하나의 물방울처럼 펑 터져 없어져버리고 그 다음부터는 애 낳으면 애 매달리고 남자들은 취미생활하면 거기에 매달리고. 매달릴 게 없으면 자기한테 매달리잖아요. 연애할 때는 사랑에 매달리잖아요.
바로 요셉은 그 많은 애굽의 모든 재화를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는 거기에 다 소비했습니다. 그러면 그 사랑을 했으면 사랑의 대상이 있을 것 아닙니까? 사랑의 대상이 누구였습니까? 일 번, 애굽의 백성들. 이 번, 자기 식구들. 몇 번입니까? 자기 식구들이에요. 왜 자기 식구들이냐? 애굽 사람들은 자기를 핍박한 적 없으니까. 참 재미있는 말이에요.
더 어렵게 이야기할까요? 예수님은 구원되지 못하는 구원자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구원되지 못한 사람이에요. 본인도 자기를 구원하지 못했어요. 얼마나 무시했는지 몰라요. 심지어 로마 병정이 뭐라고 한 줄 압니까? ‘꼬라지하고는. 지도 십자가에서 탈출 못하면서 어떻게 남을 구해.’ 자기도 탈출 못하는데 무슨 007입니까? 어떻게 매여 있는 유명한 과학자를 구출합니까? 지도 탈출 못하는 게. 하여튼 007은 옆에 본드 걸 때문에 문제라. 꼭 일 잘 되려고 하면 본드 걸 잡혀서 ‘총 버려라’ 해서 총 다 버리고.
사람들이 예수를 안 믿는 이유는 전혀 구원자 티가 안 나요. 물 위를 걸을 때 그때 뛰어났지. 그때 환영했었고, 오병이어 할 때 그때 왔다가 마치 썰물 같이 쫙 빠졌습니다. 주식 내려가듯이 쫙 빠졌어요. 제가 신문에 보니까 주식 한 주가 65원짜리가 있어요. 65원짜리 깡통에 투자하는 놈 있으면 바보입니다. 그건 주식이라고 볼 수 없지요. 그게 30일 계속 되면 그 다음부터 완전히 상장에서 해제된다는 거예요. 그래도 50만 원짜리 삼성전자에 해야지 65원짜리 해서 뭐 합니까? 완전히 말아먹었는데 빈털터리인데.
주님은 남들이 투자하지 않는 곳에 투자하는 아주 바보 같은 구원자에요. 그래서 예수님을 구원자로 믿는 놈이 바보야. 또는 그런 식으로 오셨어요. 그래서 사람들은 진짜 성경에 나오는 구원될 수 없는 구원자에다가 사람들은 내용이 너무 빈약하니까 뭘 집어넣느냐 하면, 기도하면 서울대학 보내주는 예수, 돈 벌게 하는 예수, 사람들이 좋아하는 가짜 예수를 거기다가 잔뜩 입혀놓은 거예요. 교회 부흥시켜주는 예수, 가정에 화목하게 하는 예수, 부부의 갈등을 해소하는 예수, 시름시름 앓는 병도 낫게 하는 예수, 온갖 예수를 다 집어넣어서 가라로 가짜로 만들어놓은 겁니다.
그러나 개가 비에 젖으면 어떻게 합니까? 털지요. 털털 털어버리면 남는 건 뭐냐 하면, 그냥 조용히 돌아가시는 예수, 그것도 혼자서. 그냥 말만 해요. ‘내 죽는 것 있잖아. 네 죄 때문에 대신 죽는데이. 근데 그게 약속이다.’ 그것만 남기고 약속만 하고 죽어버려요. 뭔가 성과를 주는 게 아니고 약속만 남기고 돌아가시죠.
그리고 마지막에 베드로 보고 뭐라 했습니까? 내가 친구를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있다, 없다? 없다. 사랑을 할 때 우리를 친구로 삼으면서 자기를 뭐로 보느냐 하면, 어떤 자? 죽는 자. 죽음은 인간 세계에서 구원의 모습이 아닙니다. 죽음을 이겨내야 구원의 모습이에요. 그러나 예수님의 마지막 모습은 그냥 쓸쓸하게 죽는 거였어요. 그리고 부활한 것은 택한 자에게만 나타났지 다른 사람들한테는 뭐로 된다? 비밀이에요.
제가 화요일 날 그런 이야기했죠. 한 번 비밀은 계속해서 비밀이어야 돼요. 비밀이 공개되었다고 해서 비밀이 끝난 게 아닙니다. 십자가는 계속해서 비밀이에요. 계속해서 비밀 되기 위해서 예수님은 구원되지 못한 몰골이어야 하는 거예요. 주님은 구원되지 못하고 남는 것은, 구원되지 못한 주님에게서 나오는 것은 뭐만 남고? 약속만 계속 나오고.
그 약속은 뭐냐? 십자가 약속이죠. ‘네 죄가 용서되었다. 하나님의 의다.’ 이런 약속만 계속 나오고. 우리는 그 예수님을 눈으로 봐서 예수님을 만져서 구원받는 게 아니고, 그분의 약속과 죽으심과 약속이 있기 때문에, 해석이 있기 때문에 죽는다는 현실적인 꿈의 실제 내용과 결합을 시키죠. 우리가. 왜? 우리는 해석자기 때문에 우리는 성령 받았기 때문에.
예수님께 어떤 일이 있었더라도 예수님은 승리자고, 다른 말로 내 인생이 어떻게 꼬이더라도 그것은 예수님께서 우릴 구원하는 하나의 경로고, 경과고, 경유다. 하나의 과정이라고 우린 해석을 할 수 있는 겁니다. 남들 보기에는 일방적인 해석이죠. 그 비난을 우리는 견디기 힘들어요. 우리 힘으로는. ‘착각하고 있네. 힘드니까 예수 믿지’라는 그런 놀림을 남이 하기 전에 누가 먼저 하는 줄 알아요? 내가 나한테 먼저 해요.
그래서 타인은 시체입니다. 남들이 우리 보고 뭐라 하는 그건 문제 안 돼요. 제일 우리가 거부할 수 없고, 제일 힘든 게 뭐냐? 내가 내 믿음을 의심할 때 우리는 대책이 없습니다. ‘많이 믿었다. 이제 그만해라. 믿어봤자. 별 것 없제, 껍데기밖에 없제? 원래 그거다. 믿음은 처음부터 환상이고 착각이었어’ 하고 내가 나 혼자 궁시렁궁시렁 거릴 때 ‘주여, 계시단 증거를 보여주이소.’ 증거야 있지요. 그냥 남 구원하지 말고 혼자 죽어간 십자가가 증거지요. ‘나는 너를 위해서 죽는다’ 하고 죽는 혼잣말인지 들리란 말인지 혼자서 돌아가신 그 증거 외에는 없지요.
이제 그 극단적인 방금 제가 ‘아이고, 목사님. 너무 극단적입니다. 있는 믿음도 다 부셔졌습니다. 어떻게 합니까?’ 하는데 요셉이 형제들에게 사랑을 주기 전에 한 작업이 그 작업이었어요. 네가 갖고 있던 선입감 있잖아요. 뼈에서 고기 발라먹듯이 뼈다구에 남아있는 돼지갈비에 약간 남아있는 돼지 살 있잖아요. 몽땅 다 벗겨냅니다. 아예 염산을 발랐어. 몽땅 벗겨내서 완전히 그 형제들로 껍데기만 남게 해요. 특히 누구? 야곱한테.
다시 이야기합니다. 사랑이 들어오려면 여기에 기존에 있던 사랑, 이것은 지워져야 돼요. 왜냐? 이 사랑은 누굴 위한 사랑이냐? 하나님의 지혜의 사랑이 아닙니다. 해석자 사랑이 아닙니다. 이건 자기를 위한 자기 사랑이에요. 따라서 자기 사랑에 있다가 결국은 뭐로 끝나느냐? 절망으로 가야 돼요. ‘더 이상 나는 예수도 못 믿지만 나도 못 믿는다. 결국 예수가 누군지 이야기하기 전에 내가 누군지 모르겠다. 내가 어떤 인간인지, 내가 어떤 존재인지, 어떤 덩어리인지, 송장인지 내가 모르겠다.’ 할 정도로 전적으로 자기에게 절망해야 돼요.
그리고 절망하지 않고 절망하는 척 하면서 주의 사랑을 바란다면 이거 가짜입니다. 죄송합니다. 가짜입니다. 정말 절망해야 돼요. 절망하는 척, ‘절망해도 주의 사랑이 이건데’ 이거 가짜입니다. 이것마저 깜깜해야 돼요. 정말 깜깜해야 돼요. 깜깜할 때 그때 예상치도 않는 용서와 사랑이 들어올 때는 그때만 이게 뭐냐 하면, 이게 바로 선물이요, 이게 바로 은혜라고 비로소 고백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은 앞으로 어디를 쑤셔도 은혜가 튀어나오고, 어디를 쑤셔도 내 인생 자체가 선물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가 할 일은 성화가 되느냐 그 문제가 아니고, 우리 할 일은 아주 간단해요. 이것만 하면 돼요. 절망. 우리가 못합니다. 주께서 절망케 하십니다. 그러면 그 절망의 상태는 어떤 상태입니까? 절망이 어떤 상태냐 하면, 의외로 눈물나고 짓누르는 그런 상태가 아니에요. 절망의 상태는 예수 그리스도를 잊어버리는 상태입니다. 절망이라 하니까 여러분 바짝 긴장했지요. 앞으로 죽는구나 하고.
그게 아니고 바빠서, 뭐에 바빠서? 돈에 미처 바빴을 때 이것보다 더 큰 절망은 없습니다. 아주 즐겁습니다. 아주 즐거워요. 손끝에 돈맛이 들어서 이 맛이 죽이는 맛, 괜찮은 맛이거든요. 보너스 타는 맛. 돈맛 들어서 ‘내가 언제 예수님 생각했던가?’ 이럴 때 절망입니다.
전체적으로 이야기하면 이렇습니다. 야곱이 요셉을 잃고 난 뒤에 늘 마음이 괴로웠어요. 하지만 뭣은 아니었다? 절망은 아니었어요. 여기에 압박이 가해집니다. 무슨 압박? 가뭄이라는 압박이 주어집니다. 가뭄이 주어지니까 절망이 주어지니까 인간의 본성상 과거에서 현재, 미래로 가잖아요. 현재 자기가 살아야 되지 않습니까? 살아야 되는 인간이 더 살기 위해서 어떻게 합니까?
‘야야.’ ‘예. 아버지.’ ‘애굽에 양식 판다는데 너희는 왜 관심도 없노.’ 이래 됐어요. 수입쌀 먹으면 ( ) ‘뭐하노. 빨리 팔아 온나. ‘애굽에는 쌀이 남아돈다는데 왜 너는 가만있느냐?’라고 방향이 애굽쪽으로 가지요. 지금 이런 상태가 무슨 상태냐? 절망 상태지요. 왜? 요셉을 잃어버렸으니까. 요셉 죽은 것은 중요한 문제가 아니에요.
여러분 인생 살면서 하루 종일 예수 생각 안 합니다. 여러분들이 하루 종일 생각하는 것은 뭐냐 하면, 어쨌든 간에 내가 살아야 된다. 그것이 여러분 주 과제입니다. 그래서 절망을 할 필요도 없이 우리는 어떤 상태다? 절망적인 상태에요. 왜? 살아있는 몸둥아리 살아야 될 것 아닙니까. 죽었으면 말을 안 하지만 살아있으니까 몸을 굴려야 살지요. 그게 또 자연스럽고.
그래서 결론 내립니다. 그냥 자연스럽게 사세요. 그게 절망이고 여러분에게 복음이 주어지거든 비로소 내가 그 동안 절망 속에 살았는데 이 절망에서 뭘 봤다? 주의 은혜를 비로소 은혜답게, 선물이 비로소 선물답게 나는 주여, 주여 부르짖지도 않았는데 주께서 용서를 해주셨으니까 그야말로 선물보따리가 알아서 떨어진 거예요.
그냥 사시면 일은 누가 합니까? 주님이 알아서 하십니다. 그냥 절망 가운데 사세요. 다른 말로 하면 돈만 세시고 사세요. 사시면 주께서 순간순간 어떻게 하신다? 요셉이 알았던 지혜 있잖아요. 죽음 뒤까지 미리 아는 복음을 가끔은 여러분에게 쿡쿡 쑤십니다. ‘야들아. 너희들 애굽에 쌀이 남아돌아 판다는데 안 가고 뭐 하냐?’ 야곱은 뭐냐 하면, 자식들이 가서 말 잘해서 양식을 돈 주고 사서 현재 살아가는 식대로 그대로 살아갈 줄 알았지요. 절망은 절망대로, 요셉이 없는 상황은 상황대로, 하나님의 계시가 끊어지면 끊어진 상황대로 그대로 갈 줄 알았지요.
하지만 바로가 꾼 꿈 있잖아요. 세상에 바로가 꾼 꿈이, 바로가 잘되기 위한 꿈이 아니고, 애굽 잘되기 위한 꿈이 아니고, 누구 잘되기 위해서? 언약을 받은 야곱 가족이 잘되기 위함까지 연계된다는 것을 야곱이 상상도 못했습니다. 나중에 끝에 보면 요셉이 살아있다는 소식을 듣지요. 그때 야곱은 깜짝 놀랐습니다. ‘요셉이 살아있다니.’
그러면 요셉이 살아있는 그 순간 뭘 느끼겠습니까? 지금까지 요셉이 없는 생활을 해왔다는 걸 느낀단 말이죠. 그러면 요셉이 빠진 채 구성했던 인생을 다시 뭘 집어넣어야 돼요? 다시 요셉을 새롭게 거기다가 집어넣고 새로 구성된 자아 인생을 다시 꾸며야 돼요.
돈만 세다가 어느 날 갑자기 예수님의 십자가 용서하심을 안다면 그때부터 그 인생은 어떻게 달라집니까? 예수님의 십자가가 주도권을 쥐고, 예수님의 용서가 주도권을 쥔 인생으로 이게 달라지겠지요. 그렇지 않아요? 그걸 하나님께서 원하고 있는 거예요. 그 전에 하나님께서 절망을 보여주기 위해서 다시 말해서 우리의 속셈을 나도 모르는 나의 속셈이 내 안에 어떤 절망이 들어있는지를 하나하나 끄집어내는 작업을 합니다.
그게 뭐냐? 자식을 죽이죠. 요셉의 복수가 시작됩니다. 처음에 죽인 자식이 누굽니까? 시므온이죠. 그게 어디에 나오죠. 42장. “때에 야곱이 애굽에 곡식이 있음을 보고 아들들에게 이르되 ... 사 오라”라고 하니까 드디어 아들이 가는데 그때 야곱이 어떤 아들만 안 가게 했습니까? 막내아들 베냐민만 안 가게 했어요. 베냐민이 요셉과 엄마가 같기 때문에 그럴 수 있겠지만 이것은 중요한 문제가 아니고, 베냐민만 쥐고 있었던 것은 아마 혹시 아들이 다 죽더라도 현재 내가 살아가는 보람은 요셉을 대체할 인물은 뭐밖에 없다? 역시 베냐민밖에 없다.
여기서 야곱이 자기 아내, 라헬을 얼마나 사랑했는지 알 수 있지요. 비록 아내는 떠나보내도 그 몸에 난 자식만큼은 끝까지 책임지려고 하는 그 모습, 마치 자식을 보면서 일찍 죽었던 사랑하는 아내를 그리워하는 멋있는 남자의 모습을 엿볼 수 있거든요. 하여튼 어쨌든 간에 야곱은 막내아들만큼은 안 된다. 왜? 이미 요셉도 죽은 마당에 이 막내아들 베냐민은 안 된다. 다른 아들들이 기분 나쁜 것은 기분 나쁜 거고 아들 취급도 안 해. 죽든지 말든지 모르겠다 이 말 아닙니까.
그래서 갔을 때 요셉을 누구를 하나 볼모로 잡습니까? 시므온을 볼모로 잡지요. 여기서 야곱이 형제들이 제대로 절망을 느끼고 이런 이야기합니다. 22절, 누가 읽어보세요. “그들이 서로 말하되 우리가 아우의 일로 인하여 범죄하였도다” ‘범죄하였도다’했지요. 이거는 요셉이 그들에게 ‘너희 정탐꾼이지’라고 고발 안 했으면 이런 일 안 생기지요. 22절 끝에 ‘그러므로’부터 읽어보세요. “그러므로 그의 피 값을 내게 되었도다”
아! 피 값. 이거 진짜 중요하기 때문에 제가 말씀드려야 되겠는데. 사람은 과거에서 과거가 누적되어서 뭐가 된다? 현재. 현재에서 미래는 아직 장래의 꿈으로 남아있죠. 일방적으로 과거 속에서 현재를 정당화하잖아요. ‘나는 현재 살만해’ 정당화할 때 이 정당화 때문에 뭔가 희생당하는 게 있죠. 요셉의 형제들의 현재 정당화 때문에 뭔가 희생당한 자가 있는데 그게 누굽니까? 요셉이잖아요. 요셉을 밟고 오늘의 그들이 있잖아요.
그런데 요셉이 와서 뭘 끄집어냈습니까? 그들이 오늘이 있기까지 밟혔던 과거 중에서 그들이 싫어했던 범죄한 것, 죄, 이걸 다시 들추어서 죄 없이 현재되는 것, 그 노선에다 뭘 첨가시켰느냐 하면, 죄 있는 노선에다 현재를 집어넣으면 이 죄는 어디서 탄생된 현재입니까? 바로 죄에 구축된 현재지요. 그 죄를 지었던 현재와 뭐가 만난다? 요셉의 은총을 만나게 하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내가 저 인간 때문에 피해 입었다는 자를 들추어서 현재 나의 의로움 때문에 의로 죽었던 그 자를 통해서 내 죄를 추궁하시고 그래서 그 죄와 현재 우리의 죄인 됨과 여기서 절망을 느끼고 죄인은 죽어야 되는데 여기서 절망에서 드디어 아무 대가도 없이 거저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주어지게 되면 이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의 사람이 되는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감춘, 우린 왜 자꾸 죄를 버립니까, 죄를 생각 안 합니까? 그래야 지금 내가 사는 것이 살만해서 산다는 자기 오기가 있기 때문에 그래요. 주님께서는 이것을 분석해서 우리의 죄 위에 우리가 오늘날 있게 되었다 하는 것을 알려줍니다.
취직자리 하나 있는데 열 명이 지원했습니다. 결국은 아홉 명은 떨어져나가야 돼요. 한 명만 돼야 돼요. 법 하나 제정하면 그 법에 이익 보는 단체와 손해 보는 단체가 있을 거예요. 하지만 결국 하나의 법이 성립 보고 누가 누구를 구속한다? 이익 보는 단체가 억누른 대가가 자기는 이익을 가져가는 겁니다. 완전히 판돈 다 가져가요. 인생은 도박입니다. 돈 놓고 돈 먹기인데 돈 없으면 떨어져나가는 거예요.
사실은 그런 식으로 해놓고, 좋아요. 그렇게 사세요. 하나님께서 그걸 문제 삼는 게 아닙니다. ‘똑바로 해. 바르게 살아.’ 이걸 문제 삼는 게 아니고 그런 식으로 살아온 인생을 제발 잘 살았다. 정당하다는 소린 하지 말란 말이죠. 누구 앞에서? 십자가 피 앞에선 그런 소리 하지 말란 말이죠.
만 날 주님이여, 오병이어, 그저 물 위 걷는 것 보고 싶습니다. 아무 물고기 잡아서 동전 끄집어냈으면 좋겠습니다. 만 날 이런 예수님의 기적자료 가지고 예수 끌어내리는데 그러지 마시고,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가 사는 게 사는 게 아니구나. 살려줘서 사는구나.’ 하지만 영원히 사는 것은 미래의 지혜까지 보장하시는 주님께서 이미 미래의 지옥이 얼마나 무섭다는 걸 아시고, 우리가 철없어 모르는 것까지 아시기 때문에 조치를 취하려고 죽기 전에 우리에게 예수님의 피 믿고 깨끗하게 죄를 처리하도록 그렇게 조치하셨습니다. 그게 주님의 사랑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의 인생 얼마나 자기 삶을 남한테 과시하고 당당하다고 외쳤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실은 주님께서 살려주셔서 살았습니다. 이러한 은혜와 사랑을 우리가 잊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