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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광주강의(08. 10. 24) 2강자유게시판신명기

광주강의(08. 10. 24) 2강

이름 : 서경수(IP:116.37.101.23)

광주 강의(08. 10. 24) 42-2

“곡식을 밟아 떠는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말라” 여기에서 사도바울은 ‘입에 망을 씌우는 것’과 그 앞에 보면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이’를 연관시키지요. 말씀과 관련된 신체의 부위가 어디지요? 입이죠.

입에다 망을 씌우면 말씀이 안 나오잖아요. 그래서 사도바울은 구약 신명기 25장 4절에 나오는 이 대목을 채택할 때는 소라든지 가정사 전부를 공동체를 위한다는 큰 범위를 몽땅 가져오고, 이 신약에 와서는 어디에다 관심을 두는가 하면, 말씀 가르치는 일에 강조를 두고 신명기 25장 4절을 ‘입과 망’에 관련된 부위를 소를 통해서 말씀 가르치는 장로에게 그것을 적용시킵니다.

강조점이 어디에 있는가 하면, 말씀은 어떤 경우에도 중단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는 말씀으로 운영된다는 것을 여기서는 필히 이야기합니다.

우리교회 김대식 성도님이 주일날 화장실 청소를 하거든요. 제일 먼저 왔다는 이유로 화장실 청소를 하는데, 다른 사람들은 늦게 오기 때문에 청소는커녕 예배 참석하기도 바빠요. 어쨌든 일찍 와서 청소를 하는데, 사도바울 같으면 “밀대에 망을 씌우지 말라.”고 하겠습니까? “청소하는 일을 방해하지 말라.”고 하겠습니까? 청소가 공동체 유지에 중요한 대목은 아니에요.

공동체 유지에 중요한 대목은 말씀입니다. “청소하는 사람이게 배나 존경하라.”는 말을 할 수가 없다 이 말입니다. 그 정도로 이 말씀 가르치는 사람을 ‘배나 존경하라.’고 했어요. 이 말은, 다른 사람은 존경하지 말라는 뜻이 아니고 배나 존경할 인물이 어떤 기능을 가지고 있는가에 주목하란 말이지요. 교회의 교회됨은 말씀이 말씀대로 전파될 때만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겁니다.

그렇다면 구약 신명기 공동체의 ‘소’ 이야기는 공동체가 밥 먹고 사는, 소가 농사를 지어야 밥 먹고 살잖아요. 밥 먹고 사는데 있어서 방해되지 않도록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말라.’고 해서 곡식이 중요하지만, 이 곡식은 신약에서는 어디에 해당됩니까? 말씀이지요.

그런데 이 본문을 가지고 시골에 있는 교인들은 “아하, 목사님이 설교하는데 힘이 되도록 내가 양식을 드려야지. 성경에 보니까 그런 대목이 있던데.” 라고 하면서 고구마나 옥수수 등 간식거리를 목사에게 줘요. 줄려면 아이 피아노 레슨비를 줘야 되는데 그런 것은 안 주고 배나 채우라고 고구마, 감자 이런 것을 준다니까요. 차라리 쌀을 주면 좋겠는데 쌀은 안 주고.

고구마 농사짓는다고 고구마 주고, 이상하게 쌀농사 지으면 쌀은 안 주는데 고구마는 줘요. 자두 농사지었다고 자두는 주는데 절대 현찰은 안 줘요. 그래서 시골 교회 목사님 집에 가면 간식거리가 많아요. 진짜 목사는 소라. 소 같으면 그런 것 먹고 말씀 전하지요.

목사가 설교하려면 아침 양식도 중요하지만 아이 학비 잘 내는 것도 말씀에 도움이 됩니다. 다른 아이들 다 있는 휴대폰 하나 사줄 때 설교가 잘 돼요. 그런데 교인들은 그것도 모르고 “목사님, 이것 잡수시고 힘내세요.” 하면서 고구마 가져와요. 그것도 맛있는 것은 잘 팔리기 때문에 농협에 넘기고 상품 가치가 없는 것들을 가지고 옵니다. 그러나 이런 것이 다 정이지요. ‘고맙습니다.’ 하는 마음으로 주시는 겁니다.

그 다음에 또 이 대목을 목사의 입장에서 어떻게 해석하는가? 사례비 적게 준다고 설교를 성의 없이 함부로 한다든지, 아니면 교회에 들어온 헌금을 다른 교회에 주면 ‘목자가 먹어야할 꼴을 어디에 가져다주느냐?’고 고래고래 고함치는 목사와 부흥사들이 많아요. 여기에서 꼴을 먹었으면 여기에 내야지 왜 딴 곳에 내느냔 것이지요.

교인들이 교회를 잘 못 옮깁니다. 왜 그러냐 하면, 설교가 좋고 교회가 좋아서 못 옮기는 것이 아니고, 의리 때문입니다. 사람은 의리 빼면 시체라고 합니다. 교인이 한 사람 오면 다른 사람들이 많은 정을 줘요. 그런데 이 정을 다 끊고 다른 교회로 가면 정을 준 사람들이 뒤에서 뭐라고 하겠습니까? 얼마나 욕하겠어요.

그래서 제가 화요일 대구 성경공부에서 이런 말을 했어요. “남을 사랑한다는 것은 결국 숨어있는 증오심이다.” 라고. ‘내 사랑 안 받으면 죽여 버릴 거야.’ 이렇게 되지요. 그러니까 ‘사랑한다.’는 말은 “너, 내 사랑 안 받아주면 죽어!” 이런 뜻입니다. 이게 무슨 사랑이에요? 이건 거래지. ‘내가 너를 사랑하니까 네 것 다 내 놓아라.’는 것 아닙니까? 이것은 하나의 욕정이고, 폭력이고, 일방적인 거지요.

인간의 말 속에는 증오가 들어있어요. ‘내 사랑을 네가 안 받아주면 너는 나한테 죽는다.’ 이런 스토커 적인 의식이 있는데, 하여튼 이 말씀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이 공동체를 누가 주도하고 있고, 누가 쥐고 있느냔 말이지요.

말씀 가르치는 사람은 월급을 주든 말든 상관없이 누구의 지시를 받아야 돼요? 공동체의 주인이 누구입니까? 주님의 지시를 받아서 설교한 거예요. 설교 내용도 주님이 주신 겁니다. 이것을 저는 ‘사명감’이라고 합니다. 사명감은 절대로 내 소유가 될 수 없어요. 오히려 내가 소유 당해야 되지요. 보이지 않는 주님에게 내가 소유 당해야 되지요.

그리고 이 말씀은 목사뿐 아니라 교인들에게도 목사가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이 말씀 자체가 말씀이 되어서 교인들에게 “곡식을 밟아 떠는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말라.”고 그 사람에게 대가를 알리기 위해서, 주관적으로 내 죄가 무엇인지 모르는 인간에게 ‘이것도 죄다.’ 말씀 전하는 자에게 배나 존경하지 않는 이것도 죄가 되는 거예요.

어떤 목사는 이것을 잘못 해석해서, 배나 존경을 돈으로 환산해요. 배나 존경하니까 장로들 가운데서 어떤 장로를 배나 존경하라고? 말씀 가르치는 자를 배나 존경하라고 했으니까 현재 장로가 5명이면 장로 수입을 평균을 내요. 그래서 만약 300만원 된다면 목사는 얼마를 가져가야 됩니까? 배니까 곱하기 2를 하면 얼마입니까? 600만원 가져가야지요.

그런데 조건이 있어요. 성경에 보니까 그냥 가르치는 것이 아니고 ‘잘’ 가르쳐야 돼요. 잘 가르치지도 못하면서 돈만 ‘배’로 가져가려고 해요. 잘 가르치려면 희생과 봉사의 길을 갈 때 그까짓 돈 600만원이 아깝겠습니까? 700만원이라도 내 놓지. 문제는 잘 안 가르치면서 단지 가르친다는 이유로 핏대를 올리고 요란을 떨 때 그런 사람에게는 준 것도 빼앗아야 돼요. 안 줘야 돼요. 없어서 못 주는 것과 안 주는 것은 다르지요. 이런 인간들은 있어도 안 줘야 됩니다.

18절 봅시다. “또 일군이 그 삯을 받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느니라.” 이것은 또 성경 다른 대목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레위기에 나옵니다. 이것은 뭐냐 하면, 품꾼은 품삯을 누구에게 받는가? 공동체 주인 되시는 여호와 하나님께 받아요.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이유가 뭐냐 하면, 모든 이스라엘은 여호와의 품꾼이 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자신이 땅의 주인이 아니라 토지 주인은 여호와고 나는 주인의 품꾼이란 생각을 가지고 있어야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생계비나 곡식을 여호와께서 친히 주신 은혜라는 의식을 갖겠지요.

그래서 이 말씀은 바로 목사나 교인 다 같이 목사가 월급 받아도 이것은 교인이 주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친히 복음 전하라고, 단지 복음 전하라는 이유 때문에 주시는 것이고, 그리고 교인들도 이런 돈을 줄 수 있게 된 것을 큰 자부심과 영광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이 귀한 돈을 복음이란 이름 때문에 내 놓을 수 있는 그런 품꾼으로, 하나님의 종으로 느끼도록 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그러면 받는 자나 주는 자나 전부 주님의 능력으로 움직이는 모습이 보여야 이것을 말씀의 공동체라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 자체가. 디모데전서 5장 전체가 마찬가지입니다. “늙은이를 꾸짖지 말고 권하되 아비에게 하듯 하며” 이것도 전부 ‘너희들은 교회 맞아?’ 이런 뜻이고, ‘참 과부는 주야로 항상 간구와 기도를 하고, 일락을 좋아해서는 안 된다.’ 이것도 ‘교회 맞아?’ 라고 되묻는 것이라고 보면 됩니다.

19절을 봅시다. “장로에 대한 송사는 두 세 증인이 없으면 받지 말 것이요” 이것은 왜 그러냐 하면, 구약 때 역시 백부장이나 제사장들은 이 원칙을 따랐습니다. 두 세 증인 아니면 송사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들은 제판하는 일을 했는데, 재판하는 일에는 뭐가 보장되느냐 하면 사적인 감정으로부터 벗어나 있는 그런 위치를 보장해 줘야 되는 겁니다.

재판을 하는데 자신에게 불리한 재판을 했을 때, “판사 너 죽었어.” 하면서 그를 모함하거나 할 수 있죠. 그래서 이런 지도자 급에 있는 사람들의 송사는 반드시 두 세 사람의 증인을 필요로 했습니다.

두 세 사람의 증인을 세운다는 이야기가 디모데전서의 장로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또 해당되는 사람이 있어요. 예수님이죠. 요한복음에 보면 예수님이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요8:12).”고 하셨을 때, 바리새인이 “네가 너를 위하여 증거하니 네 증거는 참되지 아니하도다.” 라고 했을 때, 두 증인이 나옵니다. “내가 나를 위하여 증거하는 자가 되고, 나를 보내신 아버지도 나를 위하여 증거하시느니라(18절).”

이게 예수님 말씀이니까 어쩔 수 없이 인정하는데, 이걸 보통 사람이 말했다면 이것은 뺨 맞을 이야기입니다. 이건 말장난밖에 안 돼요. 본인이 자신에게 한 표 던지고, 보이지도 않는 하나님을 거론해서 또 한 표 던지고 이게 증인입니까? 이것은 결국 표가 있다, 없다? 한 표도 없는 거예요.

결국 이 말은, ‘나는 너희들의 성경 해석에 대해서 일체 인정하지 않겠다.’ 한 표도 받을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본문(19절)이 교회에 적용될 때는 예수님의 정신이 공동체로 확산됩니다. 그래서 장로에 대해서는 증인이 없이는 송사를 받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장로의 기능이 다른 사람을 영적으로 판별하고 죄가에 대해서 가르쳐야 되고 잘못된 것에 대해 지적해야 될 위치에 있는 사람인데, 그 사람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말씀이 중요하기 때문에 그 말씀을 보호하고 그 말씀의 권위를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장로 임직식을 해야 되는가? 장로 임직을 안 받은 집사는 두 세 증인이 없이 송사를 해도 되고, 장로는 두 세 증인이 있어야 하는가?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그 성령 받은 공동체 내에서 배나 존경받을 사람이 있어요.

지난주 우리교회 이종성 장로님께서 기도를 하셨는데, 그 기도 후에 저는 설교를 안 하려고 했어요. 왜냐하면 기도가 너무 좋아서. 너무 큰 은혜를 받았어요. 누구를 통해서든 은혜 받았으면 됐지 내가 왜 또 설교해야 되는데? 복음대로 설교하니까 꼭 내가 안 설쳐도 됩니다. 장로님이 기도하시고 나는 쪼그려 앉아서 듣기만 하면 좋겠어요. 기도가 너무 좋아서.

기도 내용이 이랬습니다. ‘돌아온 탕자가 무슨 권리로 이것 달라, 저것 달라 할 수 있습니까? 돌아온 것을 받아 준 것만도 감사한데 뭘 더 원하겠습니까?’ 그런 내용입니다. 얼마나 은혜가 되고 감사한지 더 설교할 필요 없겠다. 3분 기도(설교) 듣고 그냥 집에 돌아가도 아쉬움이 없겠다.

이처럼 존경이 우러나오게 되어 있어요. 복음 안에서 존경이 우러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오 목사님 설교 할 때 얼마나 열정적으로 합니까. 보면 존경이 우러나지요? 이런 경우(존경이 우러나오는 때) 어떤 문제가 해결되는가 하면, 돈 문제가 생각이 안 납니다. 아무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펀드, 주식 값이 추락하는 것은 아무 문제가 안 돼요.

그래서 복음 전하는 교회에 오면, 오기 전까지는 돈 문제, 자식문제, 온갖 세상 걱정을 가득 지고 왔는데, 복음을 들으면 전혀 낯선 세계에 와서 세상 것을 다 잊게 되는 그런 감격을 누립니다. ‘세상의 문제로 근심, 걱정한 것 자체가 무의미한 일이다. 쓸데없는 일에 마음 빼앗긴 내가 밉다. 그런 일에 스트레스 받은 내가 우습다.’ 라고 할 정도로 모든 것이 환하게 다 풀립니다.

성령이 주는 기쁨이 퍼지게 되면 눈이 녹듯이 모든 문제가 녹아버립니다. 그런데 희한한 것이 말씀을 듣고 모든 것이 다 녹아 내렸는데, 예배 후에 식사시간이 되면 조금씩 다시 먹구름이 끼기 시작하고 식사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면 다시 원점으로 돌아옵니다. 그러다가 또 말씀 들으면 구름이 확 걷히고 이것이 교회입니다.

자, 그 다음 20절을 봅시다. “범죄한 자들을 모든 사람 앞에 꾸짖어 나머지 사람으로 두려워하게 하라.” 이 말은 사도바울이 교회에게 하는 말입니다. 결국 이것은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나니”라는 말씀과 충돌되는 것처럼 느껴지지요?

죄는 전부가 아니면 아무것도 아닌 것입니다. 죄는 개인을 묻는 것이 아니고 어디 소속이냐? 하나의 구조를 이야기합니다. 사랑의 구조 안에는 두려움이 없어요. 그런데 두려움이 없다는 것을 알려면 두려움을 느껴야 두려움을 없게 하는 사랑의 위대함을 느낄 것 아닙니까. 그렇지요?

이론상 지식으로 잘 들어오지요?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나니” 두려움이 없을 때는 이해가 돼요. 그런데 두려움이 생기면 “주님이 날 사랑한 것 맞아?” 하고 주님께 항변해요. 이것이 바로 감춰진 증오지요.

이런 두려움을 가질 때, 그 두려움이 어디서 생기는가?

공포영화나 괴기영화를 본 후 잠에서 가위눌리고 두려움에 사로잡힐 때가 있어요. 귀신이 왜 무서운가 하면, 귀신이 무서운 것이 아니고 내가 해체될까봐 무서운 거예요. 팔은 여기 있고 몸통은 저기 있고 이런 식으로 내가 하나가 되지 못하고 분리되어 흩어질 것에 대해서 무서워합니다.

갑자기 차가 나를 향해 달려오면 무섭지요? 그러면 있는 몸을 더욱 움츠려요. 어떤 위기가 왔을 때, 엄마가 아이를 품에 안고 모으지요. 사람의 공포는 내가 해체될 것에 대해 두려움 때문에 생깁니다. 귀신이 무서운 것이 아니고 내가 해리(풀어서 떨어짐)되는 것이 제일 무서워요.

활극 또는 스파이 영화를 보면 시청자들을 애타게 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이 뭐냐 하면, 마지막 대목에 남자가 혼자서 적 소굴에 들어가려고 하는데 그 때 꼭 남자가 여자에게 뭐라고 하는가 하면 “너는 여기 있어라. 나 혼자 갔다 올게.” 라고 합니다. 그런데 여자는 말을 안 들어요. “싫어. 나도 따라 갈 거야.” 그렇게 해서 여자가 인질로 잡히곤 합니다.

여자가 따라올 때부터 시청자들은 불안해요. ‘또 일이 꼬이겠구나. 보나마나 잡히겠다.’ 그렇게 해서 실컷 남자가 죽을 고생을 하고 난 뒤에 나중에 극적으로 구출해서 둘이 뽀뽀하고 영화가 끝나잖아요.

여자는 이렇게 헤어지는 것이 아니고 합치려고 하는 거예요. 아내가 남편을 제일 미워할 때가 언제인가 하면, 남자가 여자를 당연히 보호해야 할 시점에서 남자 혼자 행동할 때 정말 밉습니다. 여자는 항상 합체를 통해서 사랑을 확인해요.

잠 잘때 등을 돌리고 누우면 괜히 미워요. 등을 돌리는 것은 분리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등 안 돌리가 서로 마주보고 자면 잠이 안 와요. 왜 그런가 하면 콧김 때문에. 등 돌리면 절로 잠이 오는데. 그런데 등 돌렸다고 서운해 해요. 물론 40대 넘어서는 아니고 2~30대 때 그래요.

두려워한다는 것은 결국 (해체되지 않고)자아를 지키려고 하기 때문에 생깁니다. 자아가 있는 장소가 따로 정해져 있으니까 공격 표적이 되지요. 자아가 이곳저곳 분리되어 있으면 공격 대상이 없어요. 그러니까 공포를 느끼는 것은 본능인데, 어떤 본능인가 하면 자아를 자아대로 지탱하려는 마음이 두려움을 낳지요.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다.”는 말은, 네가 다 흩어져 있어도 어디를 가도 너는 하나의 사랑이라는 그 영역 속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느껴야 그것이 사랑입니다. “환란이나 곤고나 핍박” 이것은 전부 두려운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것이라도 주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

나쁜 짓은 두려움에서 나옵니다. 사람이 성령에 충만하면 나쁜 짓을 할 이유가 없지요. 이미 기쁨을 얻었는데 또 새삼스럽게 기쁨을 얻기 위해서 나쁜 짓을 할 필요가 없어요. 사람이 본의 아니게 나쁜 짓을 할 수 있어요. 하지만 돌아서면 다 시시한 거예요. 화투 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믿고 화투 칠 수도 있는데, 화투 치는 것이 시시하다니까요.

성령 받기 전에 화투 칠 때는 고부간에 형제간에 화투치면 살벌합니다. “왜 속입니까? 왜 한 장 더 많습니까?” 난리를 치는데, 예수 믿고 난 뒤에 화투 치면 “형님, 마음대로 하세요. 돈 잃으면 잃지 뭐.” 하면서 그 자체에 대해서 자아를 거기다 걸 만큼 중요한 일이 아니잖아요.

범죄는 꼭 자아를 몽땅 건데서 일어납니다. 가스관 타고 올라가는 범죄. 그것이 뭡니까? 죽기 살기로 ‘나는 살아야겠다.’는 데서 오는 행동이잖아요. 뇌물 받는 것도 그렇고. “나는 그냥 월급으로 살랍니다. 뭐, 돈 좀 더 있다고 해서 특별히 달라질 것도 없고.” 하면서 그런 것들이 시시합니다. 죄를 못 지어서가 아니라 너무 시시하고 재미가 없어서 안 하지요.

교회 가운데 범죄가 있거든 더 큰 두려움을 가지고 작은 두려움에다 더 큰 두려움으로 네 자아가 하나님 앞에 합당치 않은 일을 했다는 것을 알려 주고,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자아를 여전히 고수하고 있는 죄가에 대해서 아직도 잘 모르고 있는 사람들에게 ‘아하, 자기를 위해서 살면 저런 나쁜 짓을 할 가능성이 나에게도 있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해서, 우리가 속해있는 영역이 성령 안인 것을 확인하게 하는 겁니다.

그 다음 21-22절에 “하나님과 그리스도 예수와 택하심을 받은 천사들 앞에서 내가 엄히 명하노니 너는 편견이 없이 이것들을 지켜 아무 일도 편벽되이 하지 말며 아무에게나 경솔히 안수하지 말고 다른 사람의 죄에 간섭치 말고 네 자신을 지켜 결정케 하라.”

이 대목에서 또 모순이 돼요. 뭐냐 하면, 20절에서 ‘죄 지은 사람에게 공적으로 꾸짖어 다른 사람으로 두려워하게 하라.’고 해놓고, 22절에는 ‘다른 사람의 죄에 간섭치 말라.’고 합니다. 그러면 이것은 누구에게 하는 소리입니까?

금연 지역에서 담배 피는 사람에게 잔소리 하고, 버스 안에서 큰 소리가 통화하면 지적하고, 길에 휴지 버리면 주우라고 하고 이러면 이것이 남의 일에 간섭하는 것이지요. 그 때 주께서 뭐라고 하십니까? “너나 잘 해.” 라고 하시는 것 같은데.

이게 무슨 소리냐 하면, 이런 뜻입니다. 사명이 중요해요. 나라는 인간은 흩어져야 마땅한데, 어떤 경우에 나가 모아져야 하는가 하면, 주님의 말씀과 복음을 전할 때는 그 복음을 위해서 주님께서 나를 사용하십니다. 이것은 목사뿐 아니라 일반 교인도 마찬가지입니다. 본문에서는 목사, 장로에게 이야기하지만.

내 사명이 복음 전하는데 있다면, 펀드 내려가고 주식 값 떨어지고 해도 사명이 중요하다면 그런 것은 시시하게 여겨집니다. 사모님이 학교 교사로 계시는데 복음 때문에 많은 다툼과 충돌이 있잖아요. 그럴 때 양보를 하란 말이지요. 양보하는 것이 이 본문에 “다른 사람의 죄에 간섭치 말라.”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지요. 저것은 틀렸고, 논리도 없는 일방적 주장이고 한 것을 알지만, 그런 것을 자아를 동원해서 억지로 이기려고 할 필요 없다는 말입니다. 그런 시시한 것까지 간섭하지 말고 내 사명은 예수님의 사랑과 용서하심을 증거하는 것인데, 이것이 너무나 귀하기 때문에 다른 것에는 져도 괜찮은 인생을 사시라는 말입니다.

또 “아무에게나 경솔히 안수하지 말고” 이것은 무슨 뜻인가 하면, 실적 위주로 나가지 말라는 것입니다. “나는 3명 안수했다. 나는 5명 안수했다. 이번에 장로 또 세운다.” 그것이 교회에 자랑인줄 아는데, 안수 할 때는 “배나 존경하라.”는 조건에 맞을 때, 이것은 공동체가 이미 알아요. 안수하는 것은 하나의 형식이고, 공동체가 “장로님으로 봉사해 주세요.” 또는 “말씀 전하는 목사님으로 봉사해 주세요.” 라고 요청하면 그냥 실행에 옮길 뿐입니다.

다음 주일 세례식 하는 것도, 제가 세례식을 해야 한다고 우기는 것도 아니고, 분위기가 아이들 커고, 세례 안 받은 성도가 있어서 그냥 집사 직분을 주기도 뭣하고 해서 저는 그냥 소이기 때문에 요청하는 대로 순종하는 마음으로 합니다.

성찬식은 먹는 사람 있고 못 먹는 사람이 있으니까 그것은 하지 말고, ‘그냥 세례식만 합시다.’ 라고 해서 세례식만 합니다. 성찬식 하는 것이 나쁘다는 뜻은 아니고, 지금으로서는 안 하는 것이 좋다는 것이 우리교회 대세이기 때문에 그렇게 합니다.

그 다음 23절에 “이제부터는 물만 마시지 말고 네 비위와 자주 나는 병을 인하여 포도주를 조금씩 쓰라.” ‘이것이 거룩한 하나님의 계시입니까?’ 라고 묻는 사람이 있어요. 이것은 계시가 아니고 민간요법입니다. 왜 민간요법이 성경에 있느냐? 이것은 바로 ‘너의 사명은 네 몸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을 일러주기 위함입니다. 이것이 계시입니다. ‘네가 맡은 사명(복음 전하는 것)은 네 몸보다 더 중요하기 때문에 중요한 사명을 위해서 너는 네 몸을 함부로 굴리지 말고 연약할 때는 잘 신경 써서 좋은 컨디션을 유지하라.’는 것입니다. 너 좋으라고 포도주 마시라는 소리가 아닙니다.

만약 이 구절을 문자대로 이해하면 “포도주 몇 년 산을 마실까요? 몇 잔 마실까요? 프랑스 산으로 할까요, 아니면 캘리포니아 산으로 할까요?” 이렇게 나온단 말이지요. 그런 뜻이 아니고 “네가 받은 사명은 너무 중요하기 때문에 네 몸을 잘 돌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요즘 식으로 한다면 “이제부터 아침마다 조깅해라.” 이렇게 됩니다. 운동 안하면 뱃살 나오고 더 심하게 되면 서서 설교하는 것도 어렵다. 이런 소리입니다.

24-25절에 “어떤 사람들의 죄는 밝히 드러나 먼저 심판에 나아가고 어떤 사람들의 죄는 그 뒤를 좇나니 이와 같이 선행도 밝히 드러나고 그렇지 아니한 것도 숨길 수 없느니라.”

이것은 한 마디로 이런 뜻입니다. ‘네가 지금 증거하려 하고, 네가 소속되어 있고, 네가 같이 살아가고 있는 이 집단은 하나님께서 친히 만드신 단체다.’ 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단체가 아니고.

만약 우리가 창고라면, 하나님이 만드신 거룩한 창고인데 그 거룩한 창고 안에서 ‘너는 네 할 일을 다 하고 있느냐?’ 라고 묻는 겁니다.

다시 이야기합니다. 개인주의가 아닙니다. 개인주의를 위해 성경이 있는 것이 아니고, 신약에는 그리스도의 몸을 위하여 말씀이 있어야 개인은 부인되고 공동체를 위한 개인이 되는 겁니다.

제가 아까 말했지요. 가정에 문제 있으면 그 가정의 문제를 공동체까지 가지올 정도로 주님 만든 공동체가 그만큼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디모데전서 5장 1절에 보면 “늙은이를 꾸짖지 말고 권하되 아비에게 하듯 하며, 젊은이를 형제에게 하듯 하고, 늙은 여자를 어미에게 하듯 하며, 젊은 여자를 일절 깨끗함으로 자매에게 하듯 하라.” 이게 뭡니까? 교회 이전에 자기 집안 식구 아닙니까. 자기 집안 식구처럼 돼야 제대로 된 교회라는 것입니다.

가족의 특징이 뭐냐? 아무리 집안에서 싸워도 가족이 술 취해 길에 쓰러져 있으면 달려가서 다친 곳은 없는지 살피고 데려오는 것이 가족입니다. 자식 공부 못한다고 쥐어박고 해도 그것이 미워서 하는 것이 아니고 좋은 대학 가고 좋은 곳에 취직하고 잘 살기를 바라는 것이 부모의 마음입니다.

이제 정리하고 마치겠습니다.

이 공동체는 어떤 공동체인가 하면, 죄와 심판을 항상 들춰내시는 사랑. 고마운 공동체. 겉치레로 위로와 칭찬만 남발하는 그런 단체가 아니라 죄와 심판을 들춰내서 진짜 사랑, 진짜 용서를 날마다 같이 공유하고 감격하고 감사하는 그 공동체를 위해서 너는 양보 없이 전해라. 미워서 전하는 것이 아닙니다. 미워서 나무라지 말고 지금 우리가 성령을 받았잖아요. 사도행전 10장 안 봐도 되지요? 이방인에게 뭐가 임하더라? 성령이 임하니까 죄 사함을 알게 되고, 성령을 안 받으면 ‘내 죄가 사함 받았다.’는 소리를 못해요. 성령을 받으면 “와, 내 죄 사함 받았다.” 이런 소리가 나온단 말이지요.

정말 우리 죄가 사함 받았다면 나머지는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이미 우리가 받은 용서가 얼마나 큰 사랑인지를, ‘이것은 죄야. 이것은 나쁜 것이야.’ 지적하는 가운데서 도리어 주님께서 거저 용서하시고 구원 받은 것을 감사하는 이것이 참된 교회입니다. 이것이 디모데전서 5장의 내용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사람의 능력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기적이 임했습니다. 사도행전 10장에서 성령이 임해서, 성령이 쏙 들어가니까 그들이 예수님의 죄 용서를 알고 기뻐했습니다. 이런 성령 받았사오니 성령 받은 값을 하면서 우리의 죄가 무엇이며, 우리의 부족이 무엇이며, 말씀을 통해서 깨달아서 이런 죄에서 일시에, 한꺼번에 다 용서해 주신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을 감사하는 귀한 교회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08. 11. 13. 16:15 녹취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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