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11월 11일 지옥의 하나님 132p
대구 11월 11일 지옥의 하나님 132p
이름 : 우리교회(IP:124.59.86.24)
081111 지옥의 하나님 132p
업적(실적)주의 교회정치 vs 무능함의 기도 집
우리교회(IP:124.♡.86.24)
08-11-11 1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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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12-28 17:39
대구081111지옥의하나님p132
08 대구강의 15 - 지옥의 하나님 33 - 인간구원을 위한 신학4
08,11,11 강의 이근호, 정리 구득영
◈ 주님이 판돈이 적다고 하십니다 ??
이제 시작을 하겠는데, 오늘은 교재 '지옥의 하나님' 132페이지를 보자.
** 사람들은 '간절함'만 있으면 그만이라고 본다. 예배를 드려도 '간절함', 기도를 해도 '간절함', 봉사를 해도 '간절함'으로 모든 일들이 형통하리라고 굳게 믿고 있다. '간절함=교회부흥' 공식 외에 아무 것도 원하지 않는다.
이것은 지난 시간에 살펴본 것이고, 계속해서 교재를 살펴보자.
** 이것은 마치 변비환자가 화장실에서 쏟는 정성이요, 노름판에서 도박꾼이 품는 간절함이다. 모두들 자기 몸뚱아리를 위한 간절함이다. 각자가 두 장의 화투패를 쥐고 있다. 자기가 골라본 화투패와 하나님의 뜻이 새져져 있는 화투패이다.
** 하나님의 뜻이 새겨진 화투패의 뜻을 알기 위해서 손가락 끝에 힘을 준다. 그리고 화투패 한 장을 아래로 밀어 내린다. 혹시 자신의 뜻과 하나님의 뜻이 일치되는지 확인하려는 것이다. 이때 목사가 나선다. "인색함은 하나님이 배척하십니다. 우리 주님께서 판돈이 적다고 하십니다" 라고 말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살펴보자
** 그러나 정작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간절한 기도(간구)는 그 내용이 판이하다. 예수님은 성도가 핍박을 받고, 기근에 처하고, 또한 지독한 가난 속에 있다고 할지라도,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랑에서 끊어지지 않는다는 실제성을 성도가 기쁨으로 받아드리도록 간절하게 기도하시는 것이다.(롬8:34~39)
(롬 8:34)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롬 8:35)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롬 8:36) 기록된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롬 8:37)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롬 8:38)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롬 8:39)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수 없으리라
◈ 기도는 자기 무능함의 표출 !!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기도가 무엇인고 하니까, 인간의 무능함의 표현이고 표출이라는 것이다. 기도를 할 때의 간절함은 인간의 자기 내성(내부적인 성질?)을 이야기하는 것이고, 즉 인간 쪽에서 어떤 자성(自省)을 하느냐는 말이다.
그렇게 기도가 인간 속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해서, 인간은 그 기도의 내용을 자기 쪽에서 끄집어낸 범주에서 도로 해석을 해나간다는 것이다. (휴, 넘 어려워요. 좀 쉽게 설명해주시면 안 되나요? 그렇지 않아도 기도를 할 줄 몰라서 버벅거리는데, ㅋㅋ)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우리 인간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가 간절하게 기도하는 그 바깥에서 이런 인간의 기도를 어떻게 해석하는지, 그것을 살펴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무능' 인데, 어떤 무능인고 하니 창조에 대한 무능이라는 말이다.
◈ 참된 기도는, 하나님의 창조에 동참하고 싶은 간절함 !!
이것이 무슨 의미인고 하니까, 무(無)에서 유(有)로 가는 것이고, 죽은 자를 살리는 것이 곧 하나님의 창조인데, 여기에 대해서 인간은 항상 무능한 입장에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인간은 무능한 입장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하시는 이 창조의 작업에 참여하도록 해달라고 한다는 말이다. 즉 "제가 제 뜻을 버리고, 저 자신을 부인하고 주님의 뜻에 참여할 수 있습니까?" 라고, 그렇게 간절함으로 말이다.
다시 말해서, 인간의 기도는 언제나 간절함인데, 그런데 그 간절함을 유발시키는 동기는 바깥에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무에서 유로 가고, 죽은 자를 살리는 하나님의 창조이고, 바로 그런 하나님의 창조에 동참하게 해달라는 것이란 말이다. 그것이 바로 간절함의 유발동기라는 말이다. 하나님의 그런 창조에 자기를 제발 참여시켜 달라는 것이다.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지요?
◈ 하지만, 인간은 자기 뜻을 관철하는데 !!
그러므로 성경적으로 봐서 인간의 기도는 그만큼 주님이 좋다고 하는 것이고, 자기 뜻을 버릴 수가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만약에 자기를 너무나 사랑해버리면 그 범위가 어떻게 되는고 하니까, 아무리 기도를 간절하게 해도 그것은 주님의 뜻과는 상관이 없이, 오히려 자기 뜻을 넓히고 영향력을 발휘하는데 기도의 노동력을 동원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렇게 인간이 자꾸만 기도의 범위를 넓혀나가니, 기도를 하면 할수록, 간절하면 간절할수록 주님의 뜻과는 더욱 더 충돌이 강렬해질 수밖에는 없다는 말이다. 그러다가 결국에는 삐쳐서 "에이, 나는 몰라" 라고 하면서 돌아서게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바깥에 있는 하나님의 뜻은 알 생각도 하지 않고, 자기가 결핍을 느끼게 되면 본능적으로 간절함이 튀어나온다는 것이다. 그러니 무엇을 위한 간절함인지, 무엇에 참여하기 위한 간절함인지, 그런 것에는 관심도 없이 무조건 달라고 하는 식으로 신에게 매달린다는 것이다.
여기서 교재 133페이지를 보자.
** 목회란 무엇인가? 그들이 간절히 원하는 것을 서비스해주고 중간 커미션을 받아 챙기기만 하면 되는 영업과 같은 것이다. 존재들은 살아있기에 그 존재의 함성을 질러댈 수밖에 없는 입장이다.
◈ 아하, 저 놈이 부르짖고 있구나 !!
여기 나오는 '존재의 함성'은 전에도 한번 강의를 했고, 우리 교재 33페이지에도 나왔었는데, 아무튼 이것은 '알랭 바디우' 라는 철학자가 만든 용어라는 것이다. 무슨 의미인고 하니, 존재는 존재 그 자체로서 알 수가 없고, 거기에서 나오는 함성을 정리해봐야만 아는데, 그렇게 해서 "아하, 저 놈이 저렇게 부르짖고 있구나" 라고 하면서 그의 존재를 느낀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농민들이 트랙터로 논을 갈아엎고 쌀가마니를 태우면서 시위를 해야, 비로소 매스컴에서 관심을 보이고, 또 정부에서도 "아니, 여러분에게 무슨 일이 있었어요?" 라고 하면서, 그렇게 농민의 존재감을 새삼스럽게 느끼게 된다는 말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신이 너무 자기의 존재를 몰라주니 새벽마다, 그리고 금요일 밤마다 '꽥, 꽥' 소리를 질러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신이 비로소 "아하, 니가 거기에 있었구나. 그동안 너무 바빠서 미처 돌보아주지 못해서 미안하다" 라고 하면서 자기를 알아준다는 것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살아있기에 더 살겠다고 하는데 무슨 흠이 된단 말인가? 신을 찾는 것도 다 살기 위한 몸부림에 해당된다. 자신의 생존본능을 배반하며 살 위인이 과연 있단 말인가?
과연 자기의 생존본능을 배반할 인간이 있겠는가? 이것은 인간이 아닌 짐승의 경우도 마찬가지인데, 쥐도 코너에 몰리면 고양이를 물고,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하는 법인데, 하물며 인간이 그렇게 하겠느냐는 말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인간들은 자신에게 결핍을 느끼고 신에게는 잉여를 느낀다. 여분이 남아도는 신의 권능으로 자신의 결핍된 요소를 메우려 한다. 그러나 그냥 달라니 미안하다. 자신의 형편과 능력에 따라서 선을 행하고 그 대신 자신의 필요에 따라서 축복을 받기 원한다. 이런 인간의 초조감을 감지하는 전문가들이 목사들이다.
인간들은 그냥 신에게 달라고 하기는 좀 미안하고 해서, 아무튼 주시면 열심히 하겠다는 부류가 있고, 또한 일단 착한 일을 해놓고 그 대가로 달라는 부류가 있다는 것이다. 이 두 가지 양상을 빼면 다른 것은 없고 말이다. 물론 교인들의 이런 초조함을 감지하는 자들이 목회자들인데, 초고성능 안테나를 동원해서 안다는 것이다. "아하, 저 집에 무슨 일이 있구나" 라고 말이다.
◈ 여러분, 하나님은 땅 끝까지 선교하기를 원하십니다 ??
그때 목사들은 그 집의 사정을 들어주기에 앞서서 먼저 자기 입장을 이야기하는데, 그런 목사의 연설문이 교재 133페이지 중간부터 나온다는 것이다. 제가 한번 읽어보겠는데, 즉 목사들은 결핍을 느끼고 나오는 교인들에게 그것을 먼저 채워주겠다고 나오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입장을 먼저 이야기한다는 것이다. 물론 거래를 성사시키려고 말이다.
이제 그런 목사의 연설문을 한번 살펴보자.
** 여러분, 하나님은 땅 끝까지 선교하기를 원하십니다. 이 세상은 악마의 나라입니다. 그 어찌 그냥 두고 보시렵니까? 신의 자녀이면서 그냥 두고 보시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들은 자기 이익밖에 모르는 세속적인 죄인입니다. 하지만 우리 교회에 선교비를 내어주시면, 여러분의 선한 뜻을 모아서 대신 선교를 해드리겠습니다. (중략) 여러분들은 호사스런 집을 짓고 그것을 관리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주신 수입을 전부 쏟아 붓는데, 그런데 막상 하나님이 살아서 역사하시는 이 성전은 그냥 방치하고 있습니다. 일생을 살면서 예배당 하나는 지어드려야 자식으로서 도리가 아니겠습니까? (중략) 하나님은 과부의 두 개의 동전도 귀하게 보시는 분이십니다. 이 기회를 놓치지 마시고 하늘나라에 상급을 남보다 더 받으시기 바랍니다.
물론 교인들은 목사의 그런 교회사정을 들으려고 온 것이 아닌데, 그런데 교회에서 제시하는 프로젝트를 보게 되면, 그것이 아니라 줄 것은 주고 받을 것은 받는, 그렇게 뭔가 '윈윈'을 할 수가 있다는 감을 잡게 된다는 것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이렇게 말하는 것이 사기라고 할 수 있는데, 그런데 이 사기가 인간의 마음을 움직인다. 그리고 통회의 눈물을 짓게 한다. 왜냐하면 인간이라면 누구나 신 앞에서 진심으로 미안해하고 송구스러워 하소연하면서 외치고 싶었던 그 내용이기 때문이다. 이것을 목사가 대신해주는 것이다. 얼마나 반가울까! 인간이 평소에 얼마나 착한지를 신이 제대로 헤아려 달라고 하면서 예배당 바닥에서 기도했던 그 속마음이다.
다음이 중요한데,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형편이 안 돼서 그렇지, 형편만 되면 마음껏 신을 위하여 착한 일을 수행할 대열에 들어설 만반의 준비가 되어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왜 신께서는 자신의 이런 선한 동기를 외면하고 지금의 내 인생을 힘들게 꼬이게 하느냐고 울부짖는다. 이때 목사가 나선다. '치유와 위로의 목회'를 실시할 타이밍이다.
그러니 줄 것을 주고 받을 것은 받는다고 하는 말은, 바꾸어서 말하면, "여러분이 교회에서 하는 일에 협조를 해주면, 지금 여러분이 애타게 부르짖고 그 있는 그 위기의 난관을 주께서 기적적으로 해결해주실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시키고, 사탄의 일을 물리치는데 동참해주시기 바랍니다" 라고 나온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렇게 해서 성공한 경우를 간증을 들어서 이야기하고 말이다.
◈ 우리 목사님은 성경밖에 몰라 ??
아까 이야기한 목사의 연설문에서, 거기에는 여러 성경구절이 언급될 수가 있는데, "여러분, 하나님은 땅 끝까지 선교하기를 원하십니다" 라고 할 때는 사도행전 1장 8절의 말씀을, 또한 "여러분들은 호사스런 집을 짓는데 막상 성전은 그냥 방치하고 있습니다" 라고 하는 것은 학개서 1장 4절의 말씀이고, 그리고 "하나님은 과부의 두 개의 동전도 귀하게 보시는 분입니다" 라는 것은 누가복음 21장의 말씀이라는 것이다.
(행 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학 1:4) 이 전이 황무하였거늘 너희가 이 때에 판벽한 집에 거하는 것이 가하냐
(눅 21:2) 또 어떤 가난한 과부의 두 렙돈 넣는 것을 보시고
(눅 21:3) 가라사대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가난한 과부가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그러니 교인들이 들으면 전부가 다 복음적이고 성경적인 내용이라는 것이다. 성경을 그렇게 덩어리 채 집어넣어 놓았기에 도저히 교인들은 반박을 할 수가 없다는 말이다. 그런데 교인들은 또 자기들 나름대로 아쉬운 것이 있어서 왔는데, 그러니 어떤 거래가 형성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그 다음 자기들의 순서로 가든지 할 것이 아니냐는 말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135페이지를 보자. 이것이 소위 '치유와 위로의 목회' 내용인데 말이다.
**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헌신하니, 과연 하나님은 저를 이렇게 축복해 주셨습니다. 사람은 희망이 없이는 못삽니다. 하나님께서 반드시 성공을 믿는 사람에게는 성공을 허락하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 여러분, 믿으시기 바랍니다 ??
여기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성공을 믿는 사람에게는 성공을 허락하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라고 하는데, 즉 믿음이 들어간다는 것이다. 초신자들도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아는데, 그런데 앞에 무엇이 깔리는고 하니, 성공을 믿는 자에게는 성공이 온다는 말이다. 그리고 또 기적을 믿는 자에게는 기적이 오고, 또 잠자는 신을 깨우면 그 신이 벌떡 일어나고 말이다.
그러니 믿는다는 것은 이미 다 아는 것이고, 문제는 그 앞에 무엇을 채우느냐는 것인데, 그것은 본인이 알아서 채우면 된다는 말이다. 이것을 4글자로 줄이면 "하면 된다" 라는 것인데, 그러니 이 얼마나 쉽고 명료하고 간단한 내용이냐 것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자기 성공을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은 이 땅에서도 실패하고 천국에도 들어가지 못하지만, 자기를 긍정적으로 보고 자신의 비전이 하나님께서 주신 비전이라고 굳게 믿는 자에게는, 하나님께서는 그 꿈대로 반드시 이루어주십니다. 이 희망이 당신을 살립니다.
◈ 빛과 소금에 대해서 !!
이런 설교를 할 때는 창세기의 요셉이나 또한 다니엘을 이야기하면 되는데, 물론 엉터리 성경해석이지만 말이다. 마태복음 5장 13절에 이런 말씀이 있는데, "맛을 잃은 소금은 사람에게 버려져 밟힌다" 라고 말이다. 여기서 맛을 잃었다는 것을 쉽게 표현하면, "맛이 갔다" 라고 하는데, 소금은 그 짠맛을 지녀야 소금 값을 하게 되는데 말이다.
(마 5:13)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없어 다만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마 5:14)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마 5:15)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취느니라
그리고 예수님은 이 소금을 말씀하시고 나서 빛을 이야기했는데, 그런데 이 빛은 항상 상대가 있는데, 즉 어둠을 염두에 둔 빛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소금도 역시 어떠한가? 소금의 그러한 짠맛이 없는 이 세상을 미리 염두에 둔 말씀이라는 것이다.
◈ 왜 하필이면 빛이고, 어둠인가?
그런데 여기서 전제가 무엇인고 하니, "나는 빛이다. 나는 소금이다" 라고 하면 안 되고, 주님이 보시기에 도대체 이 세상이 어떤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기에, 빛을 잃어버리고 맛을 잃어버린 세상이냐는 것이다. 그러니 이러한 것을 제대로 알아야 하는데, 그래야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의 의도를 알 수가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이야기하면 사람들은 무엇이라고 하는가? 긍정적이 아닌 부정적 사고방식이라고 하면서 마구 몰아 부쳐버린다는 것이다. 과연 이렇게 세상을 제대로 알고자 하는 것이 부정적인가? 그것은 오히려 긍정을 위한 동기를 유발시킨다는 것이다.
어디 병원에서 의사가 환자를 보자말자 바로 처방을 하는가? 물론 보는 것도 일종의 진료라고 하기도 하지만, 아무튼 그렇게 바로 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반드시 "어떻게 오셨습니까? 어디가 아픕니까?" 라고 묻고 확인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자기는 지금 발에 무좀이 있어서 왔는데, 위장병을 약을 주는 의사는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 무좀에 합당한 치료를 해주고 약을 주어야 하는데, 이와 마찬가지로 이 세상이 도대체 무슨 문제인지, 어디가 아픈지 알아야 하지 않느냐는 말이다. 즉 왜 이 세상이 어둠인지, 맛을 잃었는지, 그것을 제대로 파악해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야 제대로 처방전이 주어진다는 말이다.
그런데도 세상을 어둡게 본다고 해서 부정적인 사고방식이라고 매도해버리고, 또한 그래서 그런 사람은 천국에도 가지를 못하고 이 세상에서도 성공하지 못한다고 하면 말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떻게 처방을 하고 치료를 하느냐는 말이다. 무슨 재주로 말이다.
◈ 이 세상의 치명적인 유혹, 실적 !!
이 세상에서는 문제가 하나밖에 없는데, 그것이 바로 '실적' 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참으로 치명적인 유혹인데, 그것을 업적, 혹은 성과라고 할 수 있고 말이다. 여기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인간은 아무도 없다는 말이다. 은행과 같은 직장이 월급도 많고 좋아 보이지만, 그들이 이런 실적에 얼마나 시달리는지 모른다는 것이다.
◈ '맛', 요리연구가 이근호 저 ??
하지만 주님은 무엇을 원하는가? 그것을 한 글자로 '맛' 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마음에 든다고 하면서, 어떤 분들은 제가 쓴 이번 책이름이 '피' 라고 하니까, 다음 번에는 '소금'으로 하자고 하는데, 소금보다는 같은 한 글자로 '피'이니까, '맛' 이라고 하면 괜찮을 것 같기도 한데 말이다. 물론 남들이 무슨 요리책으로 볼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아무튼 예수님이 빛이고 맛이라고 한다면, 바로 그런 빛과 맛으로만 살라는 것이다. 자기의 업적이나 성과로 살지 말고 말이다. 소금은 남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고, 어둠은 빛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인데, 그런데 자기 자신의 어려움을 자기 스스로의 힘으로 해결하려고 한다면, 그것은 성도의 모습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한 모습이 바로 주님이 보시기에 오히려 맛을 잃은 소금이고, 그래서 버려져서 밟힐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제 교재 135페이지, '그들의 본색'을 보자.
** 그들에게 어차피 신은 구색이다. 그 인간 속에 있는 지독한 희망을, 산모에게 아기를 받아내듯이 그들은 신의 이름으로 곱게 받아내면 그만이다. 중요한 것은 커미션이니까. 예를 들면, 교회 내에서 동네에 노는 노인들에게 일당을 주면서 출석을 시키고 이 벤트를 벌이면, 그들에게 어떤 유리한 점이 있을까?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여기에 여러 가지 유리한 점이 있는데, 첫째, 교인들에게 인정을 받아서 좋고, 둘째, 그 일을 성사시키는 과정에서 자신이 부각이 되니 좋고, 셋째, 일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조직을 형성시켜 명령에 움직이는 사람이 생겨나니 좋고, 넷째, 그것을 통해서 교회 내에 자신의 입지나 권위가 날로 넓혀지는 기회가 되니 좋고, 다섯째, 그렇게 해서 그 교회에서 자기 권력망이 강하게 확보되어, 앞으로 이 실적이 다른 큰 교회에 알려지면 좋은 조건으로 스카우트 제의가 들어올 가능성이 있어서 좋고, 그리고 여섯째, 그것으로 인해서 자기의 미래가 확보되니 좋은 것이다.
그러니 교인들은 그야말로 목사의 밥인데, 아무튼 이런 목사도 이단이지만 교인들도 역시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왜 이런 목사를 통해서 일을 하시는가? 그것은 바로 그렇게 해야지 지옥이 보다 더 구체적으로 드러난다는 것이다. 이런 목사들에게 신은 어차피 구색을 갖추는데 불과하다는 말이다.
이제 교재를 136페이지 중간을 보자.
** 예수나 바울이나 모두 그 시대에 속한 사람들에 불과하다. 그들은 스스로 흥분했던 사람들이다. 그 당시 인간들의 위선과 허위에 분노했고, 그 실상을 들추어내고자 신의 엄중하심을 끌어당겨서 그 시대의 사람들을 계몽하고자 몸부림치며 희생했던 사람들이었다. 그들이 순순하고자 애썼다는 것은 인정해주지만, 어디까지나 다 과거사이다.
지금 이 문장은 유대 지도자들의 생각을 정리한 것인데, 혹시 '두 지평' 이라는 두꺼운 책을 아시는지 모르겠는데, 성경해석학에 관한 책인데, 그 책에 바로 이러한 뉘앙스가 많다는 것이다. 즉 "예수, 바울, 베드로, 모두가 다 그 당시에 필요한 인물이었지만, 그러나 지금은 바로 지금의 인물이 필요해" 라는 분위기가 말이다.
◈ 그들은 스스로(?) 흥분했던 사람들 !!
여기 우리 교재에 보면, "그들은 스스로 흥분했던 사람들이다" 라고 하는데, 사실상 이 '흥분' 이라고 하면 구약의 선지자들은 빼놓을 수가 없는데, 우리가 구약 선지서들을 읽어보면 사실 너무나 교양이 있게 번역을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선지서들을 제대로 번역을 하게 되면 모두가 욕설투성이인데, 십자가 마을에 누가(?) 글을 올린 것처럼 "이 화냥년아" 라고 말이다.
아모스서 4장에 보면 "바산의 암소들아" 라고 하는데, 아니 그것이 무슨 욕인가? 사실상 그 대목도 "야, 이 화냥년들아" 라고 해야 한다는 말이다. 하지만 그래도 성경인지라(?) 언어를 순화해서 번역했는데, 그러나 이사야나 예레미야의 경우에도 자기들만 알아듣는 말만하다가(?) 그냥 욕설로서 끝장을 낸다는 것이다.
그래서 교인들은 이런 구약 선지자의 글들은 보지 않으려고 하는데, 물론 봐도 모르겠다고 하겠지만 말이다. 그런데 이 성경말씀을 믿지 않는 자들이, 즉 중이 성경을 보게 되면 특징이 무엇인고 하니, 그들은 몹시 흥분하고 있다고 여기게 된다는 것이다. 아무 것도 아닌 것을 하지고 괜히 자기 혼자서 흥분한다고 말이다.
◈ 이 미친놈들아, 나가서 뒤져라 !!
신약의 세례요한의 경우에도 입에서 도끼 이야기가 튀어나오는데, 도끼의 용도가 무엇인가? 자르고 부수는 것인데 말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입에서는 무엇이 나오는가? 독사가 튀어나오는데, 그리고 "화 있을진저" 라고 하는데, 그것은 아주 순화를 해서 번역한 것이고, 제대로(?) 번역을 하면 "이 미친놈들아, 나가서 뒤져라" 라는 것인데, 그것도 부드럽게 표현을 해서 말이다. 유다서를 보아도 "패역한 자식들아" 라고 하고 말이다.
성경은 그렇게 같은 동시대를 보면서도 굉장히 흥분해서 이야기를 하는데, 그 반면에 바리새인들은 아무 점잖하고 어른스럽게 이야기한다는 것이다. 결코 흥분하지 않고, 숲을 보되 나무만을 보지 않으려고 노력을 하면서 말이다.
◈ 그래, 차라리 한 사람을 죽여서 !!
그래서 요한복음 11장에서 그들이 뭐라고 하는가? 예수님을 두고서 하는 말이, 물론 나라를 걱정하면서 하는 말인데, "그래, 한 사람을 죽여서 여러 사람을 살리는 것이 낫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바리새인은 굉장히 이 세상을 넓게 보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그것이 다 말씀을 이루는 차원이지만 말이다. 여기에 반해서 세례요한이나 사도바울은 설치고 나대는 것 같고 말이다.
(요 11:47) 이에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공회를 모으고 가로되 이 사람이 많은 표적을 행하니 우리가 어떻게 하겠느냐
(요 11:48) 만일 저를 이대로 두면 모든 사람이 저를 믿을 것이요 그리고 로마인들이 와서 우리 땅과 민족을 빼앗아 가리라 하니
(요 11:49) 그 중에 한 사람 그 해 대제사장인 가야바가 저희에게 말하되 너희가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도다
(요 11:50)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한 줄을 생각지 아니하는도다 하였으니
(요 11:51) 이 말은 스스로 함이 아니요 그 해에 대제사장이므로 예수께서 그 민족을 위하시고
(요 11:52) 또 그 민족만 위할 뿐 아니라 흩어진 하나님의 자녀를 모아 하나가 되게 하기 위하여 죽으실 것을 미리 말함이러라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그들이 소리치던 그 현장과 이제는 너무 멀어져버린 21세기를 살고 있는 오늘날, 우리가 아직도 옛적 사람들의 말을 끌어당겨서 '믿습니다!' 라고 하는 것은 참으로 한심스럽고도 무책임한 짓이다. 지금은 시대가 바뀌고 사람들이 바뀌고 세상도 바뀌었다.
인간은 이렇게 과거가 아닌 지금의 신을 원하는데, 그러한 지금의 신을 땡기는 주체가 바로 본인인데, 그렇게 본인이 신을 땡기니 결국 남는 것은 자기 자신밖에 없다는 것이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과거는 참으로 허망한 시절이었고 말이다. 그렇게 해서 드디어 자유를 가지게 되는데, 당연히 그러한 자유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계속해서 교재 138페이지를 보자.
** 상당수의 교인들 입장에서도 참된 목사를 원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목사가 '자기 부인'을 하게 되면, 곧 자신들의 '자기 부인'을 강요하는 압박감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차라리 자기를 자랑하는 그런 건방진 목사가 더욱 더 좋다. 왜냐하면 자신들도 그런 목사를 본받아 같이 건방지게 자아를 마음껏 내세울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한국교회의 솔직한 분위기인데, 목사가 그렇게 적당히 거드름을 피우고 해줘야 자기들도 그렇게 덩달아 그렇게 할 수가 있지 않느냐는 것이다. 그러니 너무 깐깐하게 성경말씀만 따지는 그런 목사는 결코 원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그런데 십자가 사건이 나타났고, 그것이 복음으로 제공이 되었기에, 그 십자가를 믿는 자들에게는 더 이상 십자가에 연연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마치 한번 맞는 독감 주사는 다시 맞을 필요가 없는 것처럼, 언제까지나 십자가만을 붙들고 있을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 누가 누가 더 성숙하고, 거룩한가?
그러므로 십자가를 계속해서 붙들고 있을 필요가 없는데, 마치 독감 예방주사처럼 말이다(독감주사는 일년에 한번씩 맞는데, 차리리 홍역예방주사로, ㅋㅋ). 아무튼 그렇게 십자가는 일단 믿었으면 되었고, 그 다음으로 나가야하는데, 그렇게 되면 "누가 누가 더 성숙하고, 거룩한가?" 라는 문제가 남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목사와 교인 사이에, 목사와 장로 사이에, 장로와 교인 사이에 끊임없이 암투가 벌어진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그러한 "누가 누가 더 성숙하고, 거룩한가?" 라는 문제는 무엇으로 결정이 되겠는가? 아까 말한 것과 같이 '실적', 바로 그것으로서 판정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한 사람들이 각자 각자 개개인이 이루어놓은 실적과 업적으로 말이다.
◈ 실적 내놔라, 실적 내놔라 !!
회사를 다니다가 때려치운 사람들의 99%가 회사에서 무엇을 요구했기 때문인가? 그것은 바로 실적을 요구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가정주부들은 집에서 아이들을 키운다고 그런 것을 잘 모를지 몰라도, 남자들은 밖에서 이 실적에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는지 모른다는 것이다.
남들이 보기에 대기업에 다니고, 은행이 다니고, 또 카이스트 연구원이라고 하니 엄청 좋아 보이지만, 하지만 그들은 매일같이 자기 회사에 떠도는 유령에게 시달리는데, "실적 내놔라, 실적 내놔라" 라고 하는 유령에게 말이다. 과장은 과장급의 실적유령에게, 또 지점장은 지점장급의 실적유령에게 말이다. 그래서 어떤 의미에서 제일 편한 것이 아르바이트를 하는 학생이라고 할 수 있는데, 잘리면 잘리고 말이다. 하지만 일단 정규직이 되면 실적을 요구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현상이 오늘날에는 교회에까지 퍼지고 말았다는 것이다. 장로는 목사에게 실적을 요구하는데, 물론 목사는 장로에게, 자기가 그렇게 실적을 올릴 테니까 거기에 상응하는 대우를 해달라고 하고 말이다. 심지어 자기 말에 복종을 하라고 압력을 가하고 말이다.
* 장로 : 목사님, 실적을 보여주셔야 합니다.
* 목사 : 그러면 제가 시키는 데로 해야 합니다.
* 장로 : 예. 물론입니다.
* 목사 : 복음이니, 아니니 하는 소리는 하지 마세요?
* 장로 : 예. 알겠습니다.
* 목사 : 김 장로, 당장 이리와 보세요.
그런 것 중에 하나가 교인들의 헌금을 가지고서 연예인을 부르면서 이벤트를 벌리는 것인데, 아무튼 사람만 끌어 모으면 되니 말이다. 나이 든 할머니들은 거리로 내몰아서 앵벌이(?)를 시키고 말이다. 요즘은 마빡이 정종철이 인기강사로 뜨는데, 가끔은 중장년층을 대상으로 뽀식이 이용식도 등장해서 간증쇼를 한다는 말이다.
이제 교재 138페이지에 나오는, 누가복음 16장 14절과 15절의 말씀을 보자.
(눅 16:14) 바리새인들은 돈을 좋아하는 자라 이 모든 것을 듣고 비웃거늘
(눅 16:15)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사람 앞에서 스스로 옳다 하는 자이나 너희 마음을 하나님께서 아시나니 사람 중에 높임을 받는 그것은 하나님 앞에 미움을 받는 것이니라
바리새인이 이렇게 사람에게 높임을 받는다는 것은, 더욱 더 지옥 사람이 되는 것과 같다고도 할 수 있는데, 어떻게 맛을 잃은, 즉 썩어빠진 이 세상에서 사람들이 좋아하는 그런 자가 될 수 있다는 말이냐는 것이다. 무슨 벼락(?) 오바마도 아니고 말이다.
요즘 그 양반의 인기가 보통이 아닌데, 사실 와이셔츠를 걷어올리고서 강의를 하는 것은 제가 먼저 했는데, 단지 그 사람은 저에 비해서 똥배가 나오지 않았다는 것뿐인데 말이다. 사실 인물도 별로 큰 차이가 없고 말이다(ㅋㅋ). 아닌가요? 제가 더 낫다고요?
◈ 인간들은, 실적을 가지고 하나님이 거룩을 !!
다시 강조하지만, 인간들은 실적을 가지고 거룩을 측정을 하겠다는 것인데, 즉 실적을 가지고서 주의 종인지, 아닌지를 알아보겠다는 것이다. 자기 부인을 가지고 측정하는 것이 아니고 말이다. 하나님의 거룩을 실적을 가지고 한번 파악해보겠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저 태양에 자기에게 밀려오면 인간은 그 태양 앞에서 녹아버리고 마는데, 바로 그러한 느낌으로 "저는 태양 같은 하나님 앞에서 타버리는 존재입니다" 라고 하면 되는데, 그렇게 해야 더욱 더 큰 것을 자기 이웃에게 증거하는 현장이 되는데, 그런데 태양이 눈에 들어오지 않으니 자기 자랑밖에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 신학교 졸업생들의 외침 !!
그래서 신학교를 졸업하고서 생각하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 남들보다 더 큰 교회에서 목회를 함으로 자기가 그야말로 주의 종임을 증명해 보이겠다는 것인데, 목사의 경우에는 이것을 죽을 때까지 계속해서 간다는 것이다. 굳이 남들이 그런 강요를 하기에 앞서서 목사 본인이 먼저 거기에 주눅이 들어있고 말이다.
다시 말해서, "복음을 알면 뭐하노? 남들이 그렇게 무시하는데. 그러니 이제 그만 때려치우자" 라고 하는데, 이것이 바로 '영적싸움'이라는 사실을 간과하고 그것을 그만 육적인 싸움으로 바꾸어서, 그런 육적인 싸움에서 승자가 되려고 하니 이러한 현상들이 벌어진다는 것이다.
◈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 !!
하지만 사도바울이 뭐라고 했는가? 고린도후서 6장에서, "나는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는 자 같으나 살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부요한 자이고, 또한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라고 했다는 말이다.
(고후 6:9)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는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고후 6:10)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그런데 신학교 졸업생들은 왜 이런 이야기를 하지 못하는가? "나는 앞으로 수천 수백 명의 교회에서 목회를 해야지" 라고 하지 말고, 신학교를 졸업하면서부터 "나는 아무 것도 없지만, 그러나 모든 것을 가진 자이다" 라고 말이다. 바로 그런 마음으로 목회를 해야 하고 봉사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야 실적을 따지는 육적인 전쟁에 휘말리지 않는다는 말이다.
◈ 이번 고린도전서 녹취록을 보면 !!
이번에 나올 고린도전서 녹취록을 보니 조금 감회가 새롭던데, 그런데 거기에 틀린 부분이 좀 있어서 교정을 봐야하지 싶은데, 예를 들어서, 사도바울이 고린도전서를 것을 A.D.53년으로 보는데, 그러면 예수님이 돌아가신 것이 A.D.30년경이니, 23년 정도의 격차가 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녹취록에서는 제가 60년으로 이야기를 했는데, 그런 것은 좀 고쳐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사도바울이 로마에 간 것이 학자들의 주장에 의하면 A.D.60년 정도인데, 그러므로 예수님이 돌아가신 것과 30년 정도의 차이가 난다는 것이다. 그런데 사도바울은 "내가 십자가에 함께 못 박혀 죽었나니" 라고 하는데, 30년의 세월이 차이가 나는데, 그런데 자기는 예수님과 같이 죽었다고 한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무슨 근거에 의해서, 감히 그렇게 이야기할 수 있는 영적인 해석의 근거가 무엇이냐는 말이다. 그런 대목도 역시 수정을 좀 해야 한다는 것이다.
◈ 가족은, 그 어디를 가도 가족은 가족 !!
아무튼 지금 제가 말하고 싶은 것은 그것이 아니라, 고린도전서 녹취록에 보자면 '가족'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만약에 가족 중에서 한 사람이 미국으로 갔다고 하면, 그렇게 미국에 간 것 때문에 그 사람은 가족이 아닌가? 결코 그렇지가 않다는 말이다. 제 아무리 지리적으로 떨어져 있어도 가족은 역시 가족이라는 것이다. 가족은 혈연관계이기 때문에, 그 어디를 가도 가족은 가족이라는 말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실적이나 성과나 업적에 주눅이 들지 않는 관계를 이미 주님께서는 자기 종들에게 일러주었는데, "내가 언제 이 세상에서 실적을 원했는가? 너희들도 그냥 나의 증인만 되면 된다" 라는 것이다. 즉 주님은 이미 이 세상이 얼마나 악한지를 잘 알고 계시기 때문에, 그런 것에 결코 구애받지 말라고 하셨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자칭 주의 종이라고 하면서 실적이나 업적에 영향을 받는다면, 그런 사람은 정말이지 주님의 지시를 받는 주님의 종인지, 아니면 자기의 지시를 받는지 곰곰이 살펴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야말로 헷깔리는 사람이 되지 싶은데 말이다.
오늘 진도가 빠른데, 교재 139페이지 중간을 보자.
** 이들은 신학교에서 환상을 듣게 된다. 하나님이 내려주신 정확한 진리가 정확한 신학으로 정립될 수 있다는 이야기를 교수들로부터 듣게 된다. 이것은 곧 신학생들부터 마음을 부풀게 한다.
◈ 진리가 신학으로 정립될 수 있는가?
여기에 보면 "정확한 진리가 정확한 신학으로 정립될 수 있다" 라고 하는데, 과연 그렇게 정확한 신학으로 정립이 되는가? 하나님의 진리가 말이다. 그러나 신학으로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닌데, 즉 진리가 가는 길은 신학이 아니라, 진리는 성령의 몫으로 가버린다는 것이다. 인간들이 할 수 있는 신학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말이다.
여기에서 성경은 언어로 되어있으니, 이 언어에 대해서 인간은 신학으로 간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문제는 간단한데, 진리가 성령의 몫으로 갔는데, 그 성령께서 신학으로 간 인간을 추궁하고 구박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의 만든 신학을 부인하게 만든다는 말이다. 아주 간단하다는 것이다. 기껏해야 인간들이 할 수 있는 것이 신학인데, 그러니 성령께서 그렇게 하신다는 말이다.
◈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
그렇다면 이 성령이 어떤 영이기에 인간을 구박할 수 있는지, 그러한 근거가 무엇인고 하니, 요한복음 14장 26절에 보면,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라고 하는데, 여기에 성부, 성자, 성령이 다 나온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분들이 어디에 묶여있는고 하니, '내 이름'에 묶여있다는 것이다. 보혜사도 그렇고, 아버지도 역시 그렇고 말이다.
(요 14:26)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 성령님만이 예수님을 증거 !!
그런데 다른 말로 하면 예수님의 영이 곧 성령인데, 그래서 "성령을 받았다" 라고 하는 것을 확인해보려면, 그 사람이 과연 예수님을 증거하고 있는지를 보면 되는데, 즉 예수님을 증거하면 성령을 받은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악령을 받았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아버지께서 유일하게 허락한 것이 예수님의 영인데, 즉 예수님의 영 이외에는 결코 그 누구라도 예수님을 증거할 수 없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증거하지 않으면 그것은 전혀 성령님이 아니라는 것이다. 즉 성령님만이 예수님을 증거할 수 있다는 말이다.
여기서 요한복음 17장 26절을 보자.
(요 17:26)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저희에게 알게 하였고 또 알게 하리니 이는 나를 사랑하신 사랑이 저희 안에 있고 나도 저희 안에 있게 하려 함이니이다
◈ 왜 '하나님'이 아닌 '아버지의 이름' 인가?
이것이 무진장 어렵고 중요한 구절인데, 말씀 스스로가 해석을 거부할 정도로 말이다. 여기서 '내가' 라는 것은 예수님이고, '아버지의 이름'은 곧 하나님인데, 그렇다면 예수님은 왜 하나님이라 하지 않고 아버지 이름이라고 하느냐는 것이다. 그 이유는 바로, 이 세상 사람들이 알고 있는 기존의 하나님은 참된 하나님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렇다면 진짜 하나님은 어디에 계시는가? 진짜 하나님은 숨어 계시는데, 그런데 어디서 숨통이 터지는고 하니(?), 예수님을 믿게 하는 그분이 아니라면 진짜 하나님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아버지의 이름' 이라고 하는 것은, 오직 예수님을 통해서만 드러나는, 그런 숨어 계시는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 진짜 하나님은 오직 예수님을 통해서 !!
지금 이 대목을 설명하려고 하니, 제가 사용하고 있는 언어에 대해 그 한계성을 절실히 느낄 수밖에 없어서 조금은 안타까운 마음이 드는데, 표현이 제법 멋있죠? 아무튼 이렇게 하나님이 계시고, 또한 우리 인간이 있다면,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이 보고 싶다고 하면, 그것은 예수님을 찾아내서 하나님을 알자고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이 무슨 말인고 하니까, 우리 인간들이 알고 있는 기존의 하나님이 있는데, 그러나 그것은 전혀 엉뚱한 하나님이라는 말이다. 그러니 진짜 하나님은 예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서 만날 수가 있는데, 즉 기존의 하나님이 아니라 새로운 하나님이 등장한다는 것을, 바로 그 점을 지금 예수님이 말씀하고 계신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 안에 아버지가 계신다" 라고 할 수 있는데, 즉 다른 곳에는 아버지가 없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오직 예수님만이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기존의 하나님을 버려야 하는데, 왜냐하면 그런 하나님은 굳이 성령이 아니더라도 알 수 있는 하나님이기에 그렇다는 말이다. 가짜 하나님이니 말이다.
◈ 오, 갓바위의 하나님 ??
그렇게 성령이 아니고서도 알 수 있는 하나님이 바로 강감찬 장군이 믿었던 하나님이고, 세종대왕이 믿었던 하나님이고, 또한 갓바위에서 갓을 쓰고 폼을 잡고 있는 그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바로 그러한 하나님이 우리 조상들이 대대로 믿었던 바로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우리의 할머니들과 할아버지들이 철석같이 믿었던 말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것을 알 수 있는가? 그것은 바로 성령님은 예수의 이름을 등장시키는데, 그렇게 되면 비로소 숨어있는 하나님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예수님은 싫어하고 하나님을 좋아하는데, 예수님은 그런 줄을 아시고 단도리(조치?)를 잘 했다는 것이다. 그러한 단도리가 바로 "내 이름 외의 하나님은 모두가 다 가짜이며, 그런 하나님은 없다" 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싫은데 하나님은 좋다" 라고 하면, 그것은 전혀 엉터리라는 말이다. 이 말이 의미하는 것은, "원래 사람들은 하나님은 좋아하지만 예수님을 싫어하게 되었다" 라는 것인데, 즉 예수는 같은 인간이니 별로 땡기지 않고 싫어하도록 되어있다는 말이다.
◈ 십자가 - 기존의 하나님은 가짜야 !!
그러니 그들은 전혀 십자가를 이해하지 못하는데, 즉 기존의 하나님으로 가기 위해서 십자가는 그냥 예방주사처럼 한번 맞으면 되는 것으로 여겨버리고 만다는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의 십자가는 기존의 하나님을 부정하고 없애는 것인데, 즉 기존 하나님이 가짜임을 드러내는 것이 곧 십자가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진짜 하나님은 우리가 좋아하고 흠모할 만한 그런 하나님이 아니라, 그야말로 우리를 죽이시는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즉 "죽어라, 이놈아!" 라고 하면서 도끼를 들고 나타나는 하나님이 진짜 하나님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그 도끼를 중간에서 대신 찍히신 분이 누구인가? 그분이 곧 예수님이고, 그것이 바로 그 예수님이 달리신 십자가라는 것이다.
◈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
창세기 22장에서, 아브라함이 이삭을 도끼를 들고서(?) 내려치려고 하는데, 하나님께서 "이삭아, 그만 멈춰라" 라고 하면서, 그 대신에 수풀에 걸려있는 수양을 치도록 하셨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수양이 아브라함의 아들이 아닌 하나님 자신의 아들일 줄이야 누구인들 상상이나 했느냐는 것이다.
그것을 '여호와 이레' 라고 하는데, 즉 하나님께서 미리 다 준비를 해놓으셨다는 것이다. 바로 그러한 가운데, 즉 하나님의 아들이 대신해서 희생을 당하는 가운데 우리는 "야, 정말로 하나님을 만났구나" 라고 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야만 진짜 하나님을 만나게 된다는 말이다. 이러한 방법 외에는 결코 다른 하나님은 없다는 것이다.
(창 22:10)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그 아들을 잡으려 하더니
(창 22:11)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그를 불러 가라사대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시는지라 아브라함이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매
(창 22:12) 사자가 가라사대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아무 일도 그에게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창 22:13)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살펴본즉 한 수양이 뒤에 있는데 뿔이 수풀에 걸렸는지라 아브라함이 가서 그 수양을 가져다가 아들을 대신하여 번제로 드렸더라
(창 22:14) 아브라함이 그 땅 이름을 여호와이레라 하였으므로 오늘까지 사람들이 이르기를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 하더라
◈ 가족은 실적에 얽매이지 않아 !!
바로 그러한 십자가 앞에서 자신을 부정할 수밖에 없는 그러한 몸, 또한 가족, 그것이 바로 교회라는 것이다. 마치 가족이 미국을 가든 프랑스를 가든 간에 여전히 가족이듯이, 교회도 역시나 그 어디에 흩어져 있어도 가족이라는 말이다.
그렇게 한 가족이 되면 어떻게 되는고 하니, 아까도 말했지만 가족이 되면 어디에서 탈피가 된다고 했는가? 실적과 성과에서 벗어났다는 말이다. 그러니 가족이란 것은, 실적이 없어도 가족이고, 또한 못 생겨도 역시 가족이라는 말이다.
◈ 누가 뭐라고 해도 '너는 내 새끼' !!
예수님이 그렇지 않은가? 아무리 가난하고 볼품없어도 자기 새끼라는 것이다. 그것은 잃어버린 양이라고 하는데, 주님이 이 잃어버린 양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모른다는 것이다. 그가 탕자이든, 창녀이든, 강도이든, 거지이든, 그런 것은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말이다.
그러니 우리가 실적과 업적의 유령에서 벗어나는 길은 이것밖에 없는데,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평생동안 이 실적과 업적의 노예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얼마나 불쌍한지 모르는데, 바로 그런 사람을 두고서 "맛이 갔다" 라고 밖에 할 수 없는데, 소금의 맛이 말이다.
사실상 교인들은 잘 모르는데, 당회장이 얼마나 부교역자들을 달달 볶아대는지 말이다. "작년에 주일학교 학생이 100명이었는데 지금은 10명밖에 안 된다. 어떻게 할래? 나는 그래도 괜찮은데, 장로들이 난리를 치더라" 라고 하면서 말이다. 자기는 빠지고 꼭 다른 사람에게 핑계를 대면서 그렇게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대전에 있던 제가 아는 어느 부교역자가 잘렸는데, 실적이 좋지 않다고 말이다.
아까 본 교재 139페이지 중간을 다시 보자.
** 이들은 신학교에서 환상을 듣게 된다. 하나님이 내려주신 정확한 진리가 정확한 신학으로 정립될 수 있다는 이야기를 교수들로부터 듣게 된다. 이것은 곧 신학생들부터 마음을 부풀게 한다.
◈ 정확한 진리는 오직 성령님만이 !!
여기에 "정확한 진리가 정확한 신학으로 정립될 수 있다" 라고 하지만, 그러나 정확한 진리는 정확한 신학에 담겨지는 것이 아니라, 정확한 진리는 오직 성령님에게 담겨지는 것인데, 그래서 로마서 8장에서 뭐라고 하는가?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무엇을 빌어야 하는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그런데 성령께서는 어떻게 하시는가? 제대로 빌 바를 알아서 우리들로 하여금,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던 것이다. 그러니 그런 목회의 몫은 목사가 아닌 성령님의 몫이라는 말이다.
◈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는 성령님 !!
(롬 8:26)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롬 8:27) 마음을 감찰하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롬 8: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롬 8:29)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롬 8:30)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이렇게 우리는 빌 바도 모르는데, 그래서 우리는 무엇을 하는가? 매일같이 자기 자신의 실적과 성과를 위해서 기도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부모도 역시 마찬가지인데, 보통 부모들이 기도할 때에, 잘된 자식은 기도를 조금 덜하게 되고, 조금 뒤떨어지는 자식에 대해서는 기도를 많이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기도의 양이 성과를 나타낸다고 여기니 말이다.
◈ 신학교 교수들의 무지한 점 10가지는?
그렇다면 이렇게 "정확한 진리가 정확한 신학으로 정립될 수 있다" 라고 가르쳐준 자가 도대체 누구인가? 신학교 교수들인데, 그들은 개척교회가 하기 싫어서 도망친 놈들인데, 너무나 뻔한 것을 우기는 것을 보면 기도 차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제가 전에 "신학교 교수들의 무지한 점 10가지" 라는 글을 썼는데, 그러니 이런 신학은 그야말로 장난감이라는 말이다.
개혁주의 신학이 왜 문제인고 하니까, 사람들이 개혁주의 신학 자체에 매달린다는 것은 곧 장난감에 매달리는 것이 되니, 도대체 그것이 무슨 짓이냐는 말이다. 물론 그렇게 신학이 장난감임을 알고서는 얼마든지 신학을 해도 되는데, 그런데 거기에 자기 목숨을 걸고 있으니 얼마나 한심한 노릇인지 모른다는 것이다.
◈ 장난감을 바꿔서 ??
그런 사람은 서유석에게 한 수 배워야 하는데, 혹시 그가 부른 "장난감을 바꿔서 어쩌고저쩌고" 라고 하는 노래를 아세요? 그 가사에 보면 이런 내용이 있는데, 어릴 때는 장난감을 가지고 놀지만 나이가 들면 장난감을 '빠샥' 하고 모두 부수어 버린다고 말이다. 원래는 그 노래가사가 유명한 시(時)인데, 독일인지 잘 모르겠는데 말이다.
그런데 신학교 교수들은 머리가 허옇게 되어도 그런 장난감을 가지고 논다는 말이다. 그래서 신학생들은 여기에 속아서, 정확한 신학을 하게 되면, 거기에 정확한 진리가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자기를 먹여 살릴 것이라고 여긴다는 것이다.
◈ 정확한 진리는 신학생에게 ??
정확한 진리는 오직 성령에게만 오는데, 그런데 신학생들은 그 정확한 진리가 자기에게 오기 때문에, 자기를 무시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정확한 진리를 알고 있는 자기를 무시하면, 하나님도 장사가 되지 않으니, 그래서 하나님은 반드시 자기를 살린다는 말이다. 물론 인간들이 다 그렇지만 말이다.
하지만 그것은 이미 바리새인들이 이미 모두 다 했던 것들인데, 그러니 이러한 인간의 마음을 마귀는 다 아는데, 베드로의 마음을 알았듯이 말이다. 마귀는 당연히 목회자의 마음도 알고 말이다. 그렇게 바른 신학을 한번 해보겠다고 하는 것이, 하나님을 위하는 것처럼 보일지 몰라도, 그러나 그것은 자기 생존본능과 연결되어있다는 것을 본인들이 도저히 숨길 수가 없다는 것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그들은 자기가 살기 위해서, 바른 신학을 강단에서 실수 없이 구사하기 위해서 열심히 공부한다. '정확한 신학이 나를 먹여 살린다'는 공식이 이미 구축되어 있기 때문이다.
◈ 정확한 신학이 '나'를 먹여 살린다 !!
이것이 신학교를 졸업한 뒤 3년 정도는 효과가 있는데, 그런데 세상에 나가보니, 자기가 정확하다고 여겼던 그 신학이 말짱 도루묵이라는 것임을 알데 된다는 것이다. 정확한 신학이 자기를 먹여 살리지 않음을 알게 되는데는 그렇게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제야 비로소 눈을 뜨게 되는데, "나는 더 이상 소녀가 아니예요" 라고 하듯이 말이다.
그러니 더 이상 신학이라든지 진리에 대해서 믿었던 것이 그 얼마나 순진무구한 것인지, 또한 철없던 시절이었는지 말이다. 그래서 때로는 "아, 불교와도 손을 잡아야 하겠다" 라고 느끼는 것이 늙은 목회자의 바램이기도 하고 말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기존 교회에 부교역자로 들어간다. 그런데 교인들의 사랑이 오직 한 사람, 당회장에게로 쏠리고 있음을 보고서 은근히 배알이 꼴린다. 그 원인이 강단 설교의 독점적 권한에 있다는 결론을 내린다. 만약 내가 설교를 독점적으로 하게 된다면? 그런 경우에는 말할 것도 없이 교회의 모든 사랑은 자기에게로 쏠릴 것이 뻔하다.
◈ 누구, 나를 사랑해줄 사람 없소 !!
그렇게 되니, 신학을 외치고 진리를 외치다가, 비로소 자기가 가장 근본적으로 추구하는 것이, 물론 돈과 생존도 중요하지만, 그것보다 더 큰 문제가 자기에게 "사랑을 받고 싶어" 라고 하는 본능이 있었음을 그동안 몰랐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그것을 질투를 통해서 안다는 말이다. 당회장이란 인간이 설교를 개떡같이 하면서도 교인들의 사랑을 독차지하니 말이다.
여자의 경우에 신랑이 바람을 피웠을 때, 물론 바람을 피웠다는 자체에도 열을 받지만, 그러나 그것보다도 더 참을 수 없는 것이, 그 상대방 여자가 술집 작부였을 때, 그것이 얼마나 화가 나는지 모른다는 것이다. 그때 여자는 말할 수 없는 자괴감을 느끼게 된다는 말이다.
◈ 말할 수 없는 자괴감을 !!
제가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고 하니, 당회장이 자기보다 설교를 잘하면 교인들의 사랑을 아무리 많이 받아도 그런 대로 참을 수가 있는데, 물론 그때도 배알은 좀 꼴리지만 말이다. 자기도 한 수 배워서 그런 사랑을 받겠다고 다짐을 하면서 후일을 기약하면 되니 말이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라 설교가 완전히 개판인데도, 그런데도 교인들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것을 보게 되면 그야말로 환장을 한다는 것이다. 즉 질투심에 눈이 멀게 되는데, 그래서 그 원인을 파악해보니, 당회장이 강단설교를 독점하고 하는 그 설교의 독점권에 있음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설교를 잘하고 못하고는 그 다음 문제이고 말이다.
어떤 분의 말을 빌리자면, 합동측은 장로가 광고를 하고, 통합측은 목사가 한다고 하는데,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아마 정말 그렇다면 그것은 장로가 목사를 견제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지 싶은데, 물론 그렇게 한다고 해서 견제가 될지는 의문이지만 말이다.
계속해서 교재 140페이지를 보자.
** 돈을 탐내고 명성을 탐내다가 가만히 따져보니, 인간은 우선 사랑을 받아야 살 수 있는 동물인 것을 알게 된다. 일단 사랑을 얻고 난 뒤, 그 다음에는 자신의 욕망을 채워줄 돈과 명성을 획득하는 것이 사람이 사는 순서라는 것을 점차 눈치챈다. (부교역자가 말이다)
유행가 중에서 '당신은 사랑 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이라는 유명한 노래가 있는데, 바로 그러한 것이 여기에 해당한다는 말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낯선 이방 교인들로부터 주의 종이라는 정체성을 확인 받고 싶어 당장에 선교사로 나가고 싶지만, 선교사는 막다른 길에서의 선택이며 불확실한 위험부담이 있다.
◈ 교회목회는 □ □ □이다 ??
선교사는 그야말로 최후의 보루인데, 거기에는 위험성이 있다는 것이다. 자기를 도와줄 친척도 없고 말이다. 그래서 선교사 자리는 일단 연줄만 닿도록 해놓고, 개척을 시작한다는 것이다. 그때는 자기가 실험맨(?)으로 등장하는데, 마치 스펀지처럼 말이다.
혹시 '스펀지' 라고 아는지 모르겠는데, 어떤 명제를 하나 정해놓고는, 실험맨이 나와서 실험을 해서 그것이 맞는지 틀리는지를 가리는 TV프로인데, "교회목회는 □ □ □이다" 라고 하는 식으로 말이다. 그렇게 실제로 실험을 해본다는 것이다.
◈ 개척교회를 성공하는 비법 !!
(1)기존교회는 썩었다 (2)썩지 않는 교회는 이런 교회이다 (3)나는 주의 종이다
그런데 실험을 할 때 자기들이 배운 진리대로 하는 방법은 무엇인고 하니까, "(1)기존교회는 썩었다" 라고 하는데, 그러면 교인들에게 썩은 이유가 무엇인지 설명해준다는 것이다. 그 다음에는 "(2)어떻게 하면 썩지 않는 교회가 되는가?" 라는, 그런 차별화가 되는 방법에 대해서도 이야기해주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렇게 해놓고 교인들의 반응을 살펴서 좀 성과가 있다 싶으면 그 다음단계인 "(3)나는 주의 종이다" 라는 것으로 넘어간다는 것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