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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20081104b 부산강의 : 조지래드 [신약신학]-그리스도인의 삶자유게시판데살로니가후서

20081104b 부산강의 : 조지래드 [신약신학]-그리스도인의 삶

이름 : 한윤범(IP:59.6.189.223)

20081104b 부산강의 : 조지래드 [신약신학]-그리스도인의 삶

(강의:이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 시작합시다.

[성화]라는 게 있어요. 위에 성화란 제목 밑에 열 번째 줄에 보면, [성화란 도덕적 성장과 동의어, 같은 말이 아니다.] 이 말을 래드가 하는 이유는 ‘성화를 마치 도덕적 성장론에 같은 것이라고 생각해서 성경을 해석하는 사람들은 잘못됐다’ 이 말입니다.

그건 왜 그러냐 하면 그 다음 페이지에 보면, [성화라 하는 것은 윤리적인 측면을 포함하고 있지만 윤리적 측면이 중요한 건 아니다.] 그럼 뭐가 중요하냐? ‘하기오스’ 구약의 거룩함을 입은 자로 간주되고 있다는 사실이 있어요. [성화는 윤리적 행위의 성장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구속의 진리를 나타내는 것이다.] 이 말은 맞는 말이죠.

그런데 이 말이 맞는 말인데 거기다가 종말론 바로 위에 보세요. 열다섯 번째 위에. [성화는 보편적인 신앙생활 자체를 가리키는 용어가 아니라 그가 살고 있는 사회의 범람하고 있는 죄악들과 대조적으로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께 헌신을 드린다는 의미에서의 용어다.] 그 다음에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중요할 사항은 서술과 명령 사이의 긴장인데 성화는 실제적으로 과거에 일어난 사건이다(서술). 그러므로 성화는 지금 체험 돼야 된다(명령).] 이래 돼있지요.

지금 래드는 ‘서술과 명령’을 나누고 있고, ‘서술’을 사건으로 보고, ‘명령’을 체험이라. 래드가 이야기하기를 뭐냐 하면, 사도 바울은 뭐라고 이야기하느냐 래드가 주장하는 것은, 사도 바울은 사건을 이야기할 때는 서술적으로 이야기하고 그 다음에 ‘그 사건이 과연 체험 되십니까’라고 말하는 대신에 뭘 말한다? 명령으로. 뭘 ‘하라’ 뭘 ‘하지 말라’는 명령으로 이것을 썼다는 거예요.

아마 래드가 이렇게만 이야기해도 개혁주의 주장하는 사람에게 맞아죽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 그럼 왜 ‘이것을 체험하시오’ 하지 않고 명령하느냐 거기에 대해서는 래드는 답변을 못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서술이라는 것과 명령을 이왕 나눴기 때문에 이것을 명령을 서술로 포함시킨다든지, 서술을 명령에 포함시키는 그럴 의사가 전혀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면 이 사람이 서술을 명령, 명령을 서술로 왜 포함을 못 시키느냐? 이 사람은 어느 정도 실력이 그만큼 안 돼있어요. 그 안 된 사람 중에 한 사람이 누구냐 하면, 로이드 존스의 설교집 보면 나오잖아요. 에베소서 강해 보면 뭐가 나옵니까? 이렇다, 이렇다 해놓고 뒤에 ‘그러므로’ 나오면 이건 뭐냐 하면, 로이드 존스 목사님은 뭐라고 합니까? ‘성도가 이러하기에 우리는 이렇게 살아야 된다’라고 하죠.

그런데 래드 책에 봐도 그 로이드 존스 스타일하고 똑같은 게 또 나와요. 분명히 그래 나와 있잖아요. 그렇게 돼있고 하는 말이, 방금 이야기했던 그 대목 앞 페이지에 보면 이래 나와 있어요.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것은 부정케 하심이 아니고 거룩하게 하시기 위함이라.] 나와 있고, 그 위에 다섯 번째 보면, [성화는 성령의 사역이지만(데살로니가후서 2장 13절) 또한 인간의 응답을 포함하고 있다.] 찾았습니까? 그 비슷한 이야기 있지요.

그러니까 방금 이야기한 걸 이렇게 종합해서 보면, 래드가 하는 이야기는 무슨 이야기냐 하면, 성화라 하는 것은 성도가 존재하고 있는 바깥세상과의 차이 나는 면인데, 그 차이 나는 면을 어떤 면에서 그들이 비윤리적이고, 그들이 비도덕적이기 때문에 그들과는 월등하게 차이 나는 윤리와 도덕적인 모습을 보여야 되고, 그것을 래드는 뭐라 하느냐 하면, 삶의 모습, 삶의 모양새라 하는 겁니다.

그렇게 주장하려면 왜 서술과 명령을 나눴느냐? 그 이유는 차이 나는 거룩한 삶을 보여줘야 되는데 그러면 ‘서술만으로 부족했던가’ 하는 겁니다. 서술만으로 부족해버리면, 명령을 지워버립니다. 서술만으로 바깥세상과 다른 성도의 차이 나는 그 면을 보이는데 뭔가 미흡하다고 보는 거예요. 래드는.

왜냐하면 고린도 교회 같은 경우에 서술만으로 성도라 우기지만 실은 세상사람 못지않은 방종과 죄와 더불어 사는 사람이 있기 때문에 여기서 뭐냐 하면, 정말 당신이 서술적으로 십자가 사건에 그리스도의 성령을 받은 사람이라면 여기에 뭘 추가시키느냐 하면, 명령을 추가시켜서 진짜 성도다운 그런 체험을 ①보이라는 말인지, ②없는 실천을 하라는 말인지 이게 모호하단 말이죠.

체험을 보이란 말인지, 아니면 아까 처음에 보면 ‘스스로’ 하는 걸 보면 보이란 쪽이 강한 것 같은데 나중에 명령에 강조한 걸 보면, 이거는 체험을 만들어내라. 이런 것을 실행에 옮겨라 하는 쪽에 무게를 두는 쪽으로 지금 이야기가 전개되고 있어요. 래드 주장에 ‘이것이 바로 사도 바울이 권면했던 본 취지다’ 확신을 가지고 생각합니다.

그 뒤에 종말론 하는 대목에 보면, 바울은 보상이란 이야기 나오고, 여기에 종말론을 끄집어낸 이유가, 종말론 제목 바로 밑에 중요한 문장 하나 나옵니다. [행위에 강한 영향을 주는 또 다른 용기는 종말적이다.] 여기에 번역 한번 읽어보세요. [행위에 영향을 미치는 또 다른 강한 동기는 종말론적인 것이다.] ‘또 다른’ 돼있지요.

자, 그렇다면 종말론이 사실은 핵심이 되는 게 아니고 갖다 붙여야 될 또 다른 하나의 사도 바울의 그리스도인의 삶의 동기로써 덧붙여야 된다 이 말 아닙니까. 종말론 빼면 뭔가 미흡하단 뜻이고, 종말론 말고 다른 건 놔두고 그쪽도 미흡하단 뜻이고, 뭔가 덧붙여야 될 필요성이 있다는 거예요.

래드가 이런 주장을 하는 것을 제가 이해는 하지요. 왜냐하면 ‘긴장’을 처음에 그 사람이 종말론 되기 전에 긴장은 무슨 긴장입니까? ‘서술과 명령’이란 긴장 있고, 또 하나의 긴장은 뭐냐? ‘이미와 아직’이란 긴장 이 두 가지를 합쳐서 뭘 설명한다? 사도 바울이 이야기했던 그리스도인의 삶을 설명해야 완벽을 기한다. 그렇게 보는 겁니다.

방금 쭉 이야기한 것은 이 책에 충실하기 위해서 이 책의 핵심은 뭐냐? 그걸 뽑아내기 위해서 이렇게 했습니다.

그렇다면 종말론에 관해서 ‘이미와 아직’을 종말론적 관점을 그리스도인의 윤리 또 그리스도인의 삶으로 끄집어내는데 여기에 동원되는 구절들이 뭐가 나오느냐 하면, 사회윤리, 절제, 분별, 악덕 그 다음에 재미있는 것이 여자, 결혼 그 다음에 노예제도. 이걸 종말론 항목에다 집어넣는 겁니다.

그 사람은 왜 그렇게 했느냐 하면 아직도 노예에 대해서 묻는 시대가 지났잖아요. 아직도 여자가 머리에 뭘 써야 되느냐 그 문제 아니다 이 말이죠. 그 문제는 지나갔잖아요. 성경대로 하려면 여자 머리에 써야 되고 이래 되잖아요. 그런데 지금은 그런 문제 따질 게 아니다. 결혼문제 같은 경우에 결혼을 하느냐, 마냐. 결혼이 좋으냐, 나쁘냐 그런 문제. 그런 것은 종말론적으로 처리하겠다 이 말이에요.

그런데 윤리, 도덕에 대해서 전체에 대해서 이렇게 돼버리면, 래드가 결국은 뭘 주장하게 되느냐 하면, 아까 ‘성화론은 도덕적 성장이 아니다’ 하는 것이 이게 마찰된다는 것이 본인이 몰라요. 왜냐하면 ‘명령대로 행했다, 안 했다’로 나가버리면, 명령이니까, 명령은 법이잖아요. 명령이 들어와 버리면 어떤 경우가 되느냐 하면, 일번, 못 지켰다. 조금 지켰다. 삼번, 최선을 다했다. 여지간이 지켰다. 완벽히 지켰다. 이런 수준을 누가 판단해요? 주체인 내가 판단할 수밖에 없어요. 이 명령에 대해서.

서술은 일단은 구원받은 것은 알겠는데 구원받고 난 뒤에 체험을 어느 정도 해야 되느냐? 명령을 많이 수행하면 많이 체험되고, 명령을 안 따르면 적게 체험되느냐 하는 문제. 이것은 정말 논리의 기본도 안 된 사람입니다. 체험이라 하는 것은 명령으로 되는 게 아니에요. 생각해 보세요. 체험이 우선이고, 명령은 들러리에 지나지 않는다니까. 인간의 체험이라는 게. 모르겠습니까?

난로가 있다 합시다. 난로가 뜨겁다 할 때 ‘아이고, 뜨거워라’ 할 때 ‘뜨겁다’는 것을 언어로 어떻게 표현합니까? 표현할 방법이 있어요, 없어요? 방법이 없어요. ‘미지근하다’, ‘뜨뜻지근하다’ 어떻게 표현해도 그 ‘뜨겁다’는 것을 언어로 표현을 못 합니다. 하물며 명령으로 ‘뜨거워라’ 이건 말이 안 되고. 그러니 ‘이미 있는 체험을 보이라’ 하는 명령에 해당이 안 됩니다.

결국 남는 건 뭡니까? ‘명령을 수행하게 되면 성도의 삶의 본질을 체험하게 될 것이다.’ 이렇게 밖에 안 되지요. 결국 이게 남아요. 그래 된다면 이것은 뭐냐? 명령을 만약에 수행 안 하게 되면 전혀 체험은 미진한 상태, 보류된 상태로 남게 돼요.

그렇게 되면 뭐가 되느냐 하면, 예수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믿음+행함으로 보태야 구원받는 게 됩니다. 왜냐하면 구원이라 하는 것은 바로 말없이 한없이 감사하고 한없이 감격스러운 것이거든요. 근데 감격하다, 감사하다는 그것을 여기다 명령을 지켜야 그게 나온다면, 결국은 이거는 감사와 감격의 명령의 수행자인 지체, 자기의 주체를 증거하는 것밖에 안 된다 이 말이죠.

계속 제가 자유의 이야기를 미루고 있죠. 조금 있다 할게요. 지금 이 사람부터 이야기할게요. ‘자유라는 개념이 없을 때 어떤 오류에 빠지는가’ 제가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종말론, ‘이미-아직’ 이거는 문제가 더 큽니다. ‘이미-아직’이란 말 자체가 성립이 안 되고. 같은 노선에서 ‘이미-아직’이 성립이 안 돼요.

대전 다음에 대구 아닙니까. 대구 왔으면 대전 지나온 거예요. 그리고 대전 왔으면 대구 아직 안 온 겁니다. 이 같은 선상에서 뭐가 한 지점이 어떻게 ‘이미’가 될 수 있고, 어떻게 ‘아직’이 될 수 있습니까? 그리고 선이 두 개 여야지요. 어떤 선이? 위에서 내려온 선 같으면 ‘이미’가 되겠고, 저 밑에 부산서 올라온 선 같으면 ‘아직’이 되겠지요. 그러면 이 사람은 한 선에 있는 것이 아니고 몇 선이 있어요? 두 선에 있는 거예요.

인간 속에 두 선이 있다는 말은, 결국은 뭐냐 하면, 어느 선이 구원받을지 아직까지 ‘미확정적이다’ 이 말입니다. 일번 선에서 이번 선으로 갈아타야 구원되는 것인지, 일번 타고 내려가면 구원되는 것인지, 일번에서 이번으로 연결되는지, 일번에서 이번으로 연결돼버리면 두 선에서 뭐로 바뀝니까? 한 선으로 바뀌지요. 바뀐 상태에서는 ‘이미-아직’은 성립되지 않지요.

래드는 ‘이미-아직’을 이야기하면서 결혼문제에 대해서 끄집어냈어요. “아내 있는 자는 없는 자같이 하라” 할 때 ‘아내를 귀하게 여겨라’ 해놓고 이 말도 사도 바울처럼 ‘아내를 귀하게 여겨라’ 마치 예수님이 누구를 위해서 목숨을 바친 것같이? 교회를 살려준 것같이 귀하게 여겨라. ‘라’가 나왔으니까 서술입니까, 명령입니까? 이거 명령이잖아요. 명령인데 아내 있어도 없는 것같이 하라. ‘하라’ 또 ‘라’ 명령 나왔잖아요. 그러니까 아까 이야기한 서술과 명령 사이의 긴장이 아니고, 명령과 명령 사이의 긴장이라니까.

또 있지요. “너희들이 사기를 당해도 그냥 참아라.” 왜? 너희들은 천사도 판정하는데 차라리 속는 것이 낫지 아니하냐. 한 마디로 말하면 뭡니까? 차라리 속고 살아라. 제가 지금 뭘 이야기하느냐 하면, 명령과 서술은 절대로 분리될 수 있는 게 아니란 말이죠. 명령으로 모으든지, 서술로 모으든지 사실은 결과가 똑같은 거예요. 전부다 서술로 해도 맞는 말이고, 전부다 명령이란 말도 맞는 말이에요.

‘빛이 있으라’는 말이나 ‘빛이 있다’는 이야기나 같은 이야기란 말이죠. ‘선악과 따먹지 마라’ 하는 거나 ‘선악과 따먹으면 죽는다’ 하는 그 말은 똑같은. ‘선악과 먹으면 죽는다’에서 ‘죽는다’는 서술 아닙니까. 서술이나 ‘따먹지 마라’ 하는 거나 같은 말이라니까. 왜 서술과 명령을 자꾸 따지느냐 하면, 지키려는 주체를 자기 자신으로 잡고 있기 때문에 이거는 서술이기 때문에 안 지켜도 되고, 이거는 명령이니까 지켜야지. 자기가 선별해서 골라잡으려니까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 거예요.

“이미 너희는 죽었고 너희는 하늘나라 보좌에 앉히느니라” 에베소서 2장 7절. ‘이미 너는 하늘의 우편에 앉았느니라’ 하는 그 이야기나 골로새서 3장에서 “너는 땅의 것을 생각지 말라” 명령이잖아요. 왜? 이미 너는 죽었고 네 생명은 하늘에 감추었느니라. 같은 사항을 이야기한다고.

그걸 명령 따로 뽑아내고, 서술 따로 빼고. 서술은 믿어야 될 거고, 명령은 해야 될 거고. 그 행함과 믿음을 결합시켜서 구원받는다. 이거는 진짜 여전히 자기의 주체를 사수하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증거하는 것을 자기 주체를 증거하게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 모든 문제가 래드뿐만 아니고 모든 신학자들의 문제점이 어디서 잘못됐기에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가? 그것은 아까 이야기한 ‘자유’를 몰라서 그래요.

자유를 끄집어내려면 우리가 사도 바울 편지에서 ‘나’란 인간이 사도 바울에서 자유를 끄집어내면 안 돼요. 왜냐하면 사도 바울 서신은 앞에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 예수님 공생애가 있고, 예수님 공생애는 바로 구약에 걸쳐서 있습니다.

래드의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문항을 쭉 보게 되면 구약에 대해서 약간 언급한 건 있어요. 약간 언급했어요. 구약을 따른다 해놓고 구약을 거울로 본다 나오죠. 방종, 광야에서. 그게 바로 윤리적인 해석이 나왔기 때문이고. 윤리적으로 해석하다보니까 구약을 뭐로 봅니까? 마치 윤리적인 책처럼 본인이 그렇게 보지 말라 해놓고 본인이 그렇게 해석하고 있어요. 래드가.

이게 자유문제에요. 구약에서 예수님 공생애를 통해서 내려올 때 자유란 것이, 인간이 어떻게 행동하느냐에 관한 자유가 아니고, 구약에서는 여호와 이름이죠. 여호와 이름이 어떻게 행동하는가? 신약에 보면, 예수님이 지금 저와 여러분에게 어떻게 행동하는가를 다른 말로 표현하면 그걸 자유라고 하는 겁니다.

이 말은 결국 뭐냐 하면, 우리는 자유롭지를 못해요. 자유롭지 못한 우리를 자유로운 주님께서 다룰 때만 우리 자유가 나오는 게 아니고, 이게 제일 중요하네. 나의 자유가 나오는 게 아니고 지금 모든 학자들이 설명해요. ‘여러분, 예수 믿고 자유롭게 사세요.’ 나의 자유가 나오는 게 아니고 누구 자유가 나오나? 주님의 자유함이 나오죠. 주님의 자유함이 우릴 통해서 나오는데 우린 철저하게 주님께 예속된 상태이다. 절대 종이 된 상태. 이 책에 보면 종이란 말을 약간 언급해 놨어요. 하여튼 이 사람은 무슨 말인지 모르고 약간 언급해 놨는데

만약에 그리스도의 종이 되려면 어떤 말이 되느냐 하면, 왜 우리는 우리의 자유를 발휘해도 소용없는가를 이야기해줘야 돼요. 그게 설명돼야 돼요. 제가 아까 했죠. 항상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들어오면 ‘우리가 왜 부정적으로 죄인 돼야 되는가’ 이야기했죠.

주님께서 우리에게 자유를 하면 할수록 우리는 자유를 느끼는 게 아니고, 철저하게 주님에 대한 예속과 속박을 더욱 느끼죠. 그걸 저는 뭐로 보느냐 하면, 이걸 말씀에 의한 속박. 더 쉽게 이야기해서 우리는 하얀 도화지인데, 도화지, 지가 펄럭거린다고 그림 나오는 게 아니란 말이죠. 도화지는 그림 그리기 당함을 싫어해. 도망치고 싶어. 도망치고 싶은데 이걸 끄집어냈다가 거기다가 신윤복처럼 초상화를 그린다 말이죠. 할 때 그 그림이 무슨 그림이냐? 말씀이란 그림을 우리 위에다 그냥 그리는 거예요.

‘거봐라. 내 말 맞지.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라고 했잖아. 너는 그걸 체험하려고 명령 지켰지. 봐라. 네 사랑을 보니까 느끼겠지.’ 그러니까 이거는 우리를 완전히 말씀의 판박이로 만들어버려요. 우리를 예속해서.

‘먹는 것, 입는 걸로 족한 알라고 내가 몇 번 하드나?’ 너는 지키려고 하니까 못 지키는 거예요. 사람이 지키려고 하면 뭐가 나와야 돼요? 우리 나름대로 자유가 나와야 돼요. 자유가 나오면 어떤 현상이 일어나느냐 하면, 잘 지켰다, 덜 지켰다. 최선을 다했다. 아까 이야기한 그러한 또 격차 나온다 말이죠. ‘아하, 조금만 애쓰면 되겠다. 잘만하면 지키겠네.’ 그것은 진실을 사실로 바꾸는 거예요. 진리를 자꾸 나를 위한 사실로 바꾸려 하는 거예요.

우리에게 진실은 우리는 몰라요. 그걸 뭐라 했습니까? 비밀. 그러니까 우리는 예수 믿어도 십자가는 여전히 우리한테는 비밀이에요. 이게 중요해요. 그래서 계속해서 비밀이에요. 그 비밀이 공개되는 감격이 구원받은 감격이에요. ‘야, 몰랐는데 우에 이런 걸 알았노.’ 이래 되는 거예요. 이미 알아버리면 재미가 없어. 비밀이 아니죠. 보이지 않는 우리 인간이 보이지 않는 것을 안다는 것은 우리 쪽에서는 갈취하거나 점령하지 못해요. 저쪽 보이지 않는 것이 계속 보이지 않음 됨을, ‘너는 만날 보이는 식으로 하지’라고 꾸중하면서 나무라면서 오는 거예요.

이거 어렵다. 쉽게 이야기하면 이런 거죠. 놋뱀 있잖아요. 놋뱀 괜찮은 거잖아요. 모세 때 괜찮았죠. 놋뱀 돌아서면 뭐가 됩니까? 우상 되죠. 보세요. 하나님께서 계시할 때는 우리의 우상성을 깨면서 주십니다. 놋뱀을 통해서 우리의 우상성을 깨는데 깨지면서 인간은 그걸 모아서 뭐로 만든다? 우상으로 만들어버려요. 지나가면서. 놋뱀 깨져야 되겠지요. 예레미야에 보면 놋뱀 깨집니다. 언약궤 다 깨지요.

사람이라 하는 것은 그걸 통해서 ‘우상 안 섬긴다’ 하는 우상이 바로 인간이에요. 우상 아니라고 우기는 우상이에요. 왜냐하면 이건 우상이냐, 아니냐는 문제를 누가 판단해요. 지가 판단하니까 그게 우상 덩어리라. 주님 앞에 예수되기 싫어해요. 어쨌든 간에 자기가 자립하려고.

그러면서 주님께서 십자가 이야기한다는 말은, 십자가 져도 십자가 뭐 돼버립니까? 십자가란 이름의 우상 돼버려요. 언약을 이야기해도 언약도 우상이고, 십자가 이야기해도 십자가 우상 되고, 심지어 복음을 이야기해도 복음이 뭐 됩니까? 우상이고. 하나님 의도 우상 돼버리고. ‘이젠 다 안다. 넘어가고.’ 안다고 넘어가고가 아닙니다. 비밀은 계속 감추어진 식으로 우리에게 이런 십자가마저 우상으로 만드는 그것을 깨부수는 그러한 하나님의 계시로써 계속 작용되어야 돼요. 그것을 저는 그리스도의 삶이라고 봅니다. 그리스도의 삶이란 주님의 자유함이 우리의 자유를 박살내는 삶.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정반대로 이야기하죠. 예수 그리스도의 자유함으로 말미암아 우리도 뭐 됐다? 자유다. 자유란 말은 행동주체권이 있다. 행동을 우리가 할 수 있는 권한이 있다. 전에는 우리가 마귀에 예속되었지만 이젠 성령에 의해서 우리가 행위의 주체고, 그 행위의 주체의 모델케이스는 바로 성경의 권면이고, 사도 바울의 명령이며 그리고 그리스도를 본받아서 우리도 그처럼 살라고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명령했다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서술은 믿으면 되고, 명령은 행하면 된다는 겁니다.

사람이 윤리, 도덕적으로 성숙했다. 이게 안 믿는 사람한테는 성립이 돼요. 왜냐하면 담배를 피우다가 담뱃갑 수를 줄인다든지, 술을 세 병 먹다가 한 병으로 줄었으니까 분명히 양적으로 줄어든 것이죠. 분명히 자기는 발전한 것이고 성숙한 것이고 성장된 거다. 하지만 그 사람의 문제점은 뭐냐 하면, 사람의 인간 속에 있는 자유가, 어려워요. 어려우니까 잘 들으세요. 오늘 강의 중 제일 어려운 대목인데

주님께서 자유를 외칠 때 바리새인들이 뭐라 했습니까? 우리가 언제 종 된 적이 없었다. 우리는 아브라함 자손인데 우리는 애굽에서 해방되었는데 종 된 적 없다. 이 말이 뭐냐 하면, 나름대로의 뭐가 나옵니까? 자유가 나오지요. 제가 어느 대목에서 어렵다 하는 이 말은 뭐냐 하면, 인간의 자유가 어디서 나오는지 본인이 모른다는 거예요. 술을 끊었으면 기뻐하고 만족해야 되잖아요. 이거 며칠 못 갑니다. 그게 시들해져요. 뭔가 알 수 없는 더 넓은 자유를 갈구하게 돼있습니다. 인간은.

그걸 저는 뭐로 보느냐? 인간이 뭐 된다? 신이 될 때까지 인간의 자유는 멈추지 않습니다. ‘네가 바로 신이야. 왜 신을 믿어. 네가 신인데. 왜 신을 의식하면 너는 동질성이 상실 돼. 예수의 뜻은 그것이 아니야’라고 이호식 씨가 이야기했어요.

뭐냐 하면, ‘예수는 처음 믿을 때 믿는 거고, 그 다음부터 예수 믿고 난 뒤에는 네가 신이고, 네가 말씀을 행할 수 있는데 이제는 예수 믿지 말고 네가 신으로 살면 그만이야.’ 이것은 바로 무엇을 호소하느냐 하면, 우리의 진솔한 내부의 본성에 호소하는 겁니다. 이것 말고 다른 호소는 없어요. 뭐냐 하면, 내가 완벽한 신이 되는 것. 신은 뭐냐? 자유 덩어리. ‘언 놈이 나를 밟아.’

남자가 결혼하고 난 뒤에 제일 먼저 후회하는 것이 뭐냐? 여자가 잔소리 그만큼 할 줄 몰랐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사랑한다 하면 잔소리 안 할 줄 알았지. 사랑한다 하니까 기를 더 세워서 잔소리 더 하는 거예요. 왜냐하면 남자는 여자하고 결혼할 때 자기가 예속되리라 생각 안 하고 예속 시켰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결혼하나 전이나 내가 부릴 종년 하나 되는 것이지, 내 경력에 내 위신에 어떤 상처가 난다든지 재앙을 만난다는 생각을 꿈에도 못하거든요.

왜 연애할 때는 그게 안 나오는 이유가 연애할 때는 바로 섬기죠. 술 먹고 난 뒤에 ‘내가 낼게’ 탁 지가 내고. 그리고 연애할 때 여자는 섬김 받기만 하면 되는 줄 알았어요. 결혼 한 뒤에 섬김 받는 게 아니고, 그동안 연애할 때 남자가 섬긴 것은 ‘이제부터는 반대로 ‘네가 날 섬겨라’ 그걸 요구하기 위해서 결혼했구나’라는 것을 결혼하고 난 뒤에 눈치 채죠.

그러니까 결국 여자, 남자는 무엇에 방해받는다? 자기 내부의 자유 덩어리에 방해받지요. 인간은 왜 행동합니까, 인간은 왜 움직이고 왜 생각하고 왜 합니까? 무엇에 방해받기 때문에 그걸 피해서 하는 겁니까? 내가 신인데. 언 놈 내가 신 됨을 방해하느냐 말이죠. 똥 밟았다. 왜 싫은데요? 내가 신인데 신이 똥 묻으면 안 되잖아요. 그럼 똥 덩어리 되잖아요. 고상한 것, 고상한 것 싫어하는 사람 누가 있습니까? 문제는 고상한 커피점, 고상한 식당이 돈이 비싸니 문제 아닙니까, 그렇잖아요.

주님께서 왜 자꾸 우리하고 상대 안 하고 마귀, 마귀, 마귀 말을 자꾸 하는 이유가 우리는 아예 자유를 부르짖는데 그 자유를 부르짖는 그 바른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우리 내부에서 누가 부르짖는 거예요? 마귀가 부르짖는 거예요. 왜? ‘우리가 신인데 왜 네가 자꾸 나한테 와서 깔짝대느냐’ 이 말이죠. ‘예수가 왜 깔짝대느냐’ 이 말 아닙니까. ‘우리는 신 돼버렸는데, 뭐. 이대로 그냥 가자는데 왜 자꾸 잔소리 하느냐’ 이 말이죠.

예수 당신이 거룩하다고? 거룩하면 명령만 하면 내 자유를 가지고 뭐한다? ‘거룩해지면 될 것 아이가.’ 너처럼 완벽하진 않지만. 형제를 위해서 목숨 바칠 리는 없지만 그쪽 방향으로 간다는 게 얼마나 대견스럽노. 그거 주장하는 거예요. 그게 내부에서 호소를 하는 거예요. 이게 우리 속에 뭐가 있다는 말입니까? 아직도 자유가 있다는 거예요. 이 자유를 어떻게 활용해볼까 자유를 어떻게 성경으로 해볼까? 자유 없습니다. 자유 없어져야 돼요. 우리 자유를 뭘 해도 뭐가 됩니까? 죄가 된다는 걸 성령 안 받으면 몰라요. 래드도 그걸 모른다니까.

예수 믿고 난 뒤에 새 사람이 되자. ‘새’ 떼고 뒤에 뭐가 남습니까? ‘사람’만 남죠. 사람 속에 뭐가 있다? 자유 있다. 그러니까 새 사람이니까 새로운 행동하면 될 것 아니냐. 결국 이건 뭐냐? 철학자들이 물어보면 이걸 가지고 뭐라 합니까? 윤리와 도덕이라 하는 거예요. 래드가 처음에 뭐라 했습니까? 윤리, 도덕은 아니라고 그렇게 극구 이야기했지만 결국 이야기하는 것 뭐가 나와요? 철학자들이 보면 결국 윤리, 도덕이에요. 다만 신학적 용어로 포장된 윤리, 도덕일 뿐이에요. 법은 무슨 법으로? 사도 바울의 명령으로 법이 된 윤리, 도덕이란 말이죠.

칸트란 사람이 이랬어요. 인간에겐 예지계가 있고, 인간은 또 여기에 물질계가 있는데, 인간은 아무리해도 예지계에 도달할 수 없다. 왜냐? 인간이 인식하는 것은 인식하는 범위 내에서 대상을 결정짓게 돼있어요. 자기가 생각하는 범위 내에서 대상을 보게 돼있습니다. 코끼리를 어느 부위를 만지느냐에 따라서 소경들은 나름대로의 인식이 있다니까.

그래서 칸트가 뭘 알았느냐 하면, 분명히 이건 안 거예요. ‘내가 아는 게 전부는 아니다.’ 이건 알아요. 그럼 내가 아는 게 전부가 아니라면 내가 아는 것 이상 남아 있는 게 있죠. 그 남아 있는 걸 예지계라 했다 이 말이죠. 남아 있는 것을 어떻게 접근해 가느냐? 그거는 돌발 사태로. 우연이죠. 우연으로 접근한다는 겁니다.

여기에 대해서 뒤에 나오는 라캉이라든지 이 사람들이 욕을 되게 했어요. 그것은 뭐냐? 바로 ‘관계’다. 그 관계에 대표적인 사람이 히틀러. 왜 관계냐 하면, 인간은 ‘내가 아는 이상 뭐가 있다’라는 그것마저 외부의 시대적 상황과 자기의 삶의 성장과정이나 삶의 분위기에 따라서 잉여, 여분에 남아있는 그러한 신비는 조작된 신비일 가능성이 높다. 못 느낍니까?

고3이 서울대학 가려고 공부 열심히 하니까, 왜 하느냐? 서울대학 법대 가서 판사가 되면 좋다는 거예요. 거기서 뭐가 예지계입니까? ‘좋다’는 거죠. 판사가 되면 뭐가 좋은데? 그거는 비전이고 드림이기 때문에 그냥 좋은 거예요. 뭐가 좋은지는 판사한테 안 물어봤어요. 물어보면 안 되지요. 왜냐하면 판사한테는 이건 예지계가 아니고 현실이기 때문에.

아침에 출근하면 처리할 판결문이 이만큼 쌓여있는 이런 이야기 안 한다니까. 그것 한다고 스트레스 받아서 원형탈모, 그런 이야기는 고3한테는 얘길 안 하지요. 판사 되고 난 뒤에 얼마나 고달픈지 이야기 안 한다고. 걔는 판사의 업무가 좋은 게 아니고 뭐가 좋습니까? 판사가 되서 친구들이 성공했다고 부러워하는 그게 좋잖아요.

그렇다면 예지계라는 건 어디서 나온 겁니까? 현재 나의 현실계+알파죠. 이 잉여, 남아 있는 이걸 라캉은 실재계라 하지요. 현재 고달픈 인생을 상징계라 하고. 실재계가 아니죠. 이게 상상계. 상상계가 날마다 깨질 때 이걸 실재계. 다시 이야기할게요. 판사 되고 싶다하는 이건 상상계고, 현재 판사 못 되고 나는 상징계라 하고, 판사 되려고 하는데 만약에 여러 가지 어려움이 많고 판사 되지 않고 의사 된다면 깨지겠죠. 자기 꿈이 깨질 때 깨지게 만드는 사태를 그걸 가지고 실재계라 합니다.

그러나 이런 것도 출발이 뭐예요? 그게 바로 나의 자유라고. 무슨 뜻이냐? 나는 아직도 자유할 권리 있고, 아직도 내가 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는 나의 권한이 있음, 있다. ‘예수 나 안 도와주려면 저리 가라. 날 도와주면 예수 믿어줄게. 날 도와주면 교회 나와 줄게. 하지만 날 안 도와주려거든 저리 가라.’ 젊은 얘들 연애하려고 교회 나왔다 그 다음에 대학 들어가면 교회 안 나옵니다. 자기의 상상계를 위해서 상징계에서 분투노력해야지.

결국 여기서 라캉은 이걸 가지고 자유라 하지 않고 ‘잉여’라 해요. 계속 어느 지점 가도 또 남아 있으니까. 잉여는 미흡함이죠. 이 미흡함을 가지고 이걸 인간의 욕망이다. 그리고 항상 자기가 있으면 자기를 밀어붙인다. 나 아니고, 고3 아니야. 판사 된 나야. 판사 돼 보세요. 나, 아니고 판사 되서 국회의원 되는 것. 국회의원 되고 난 뒤에 미국 대통령 되는 것. 대통령 되고 난 다음에 뭡니까? 더 높게 대통령하는 것. 이게 근본적으로 인간의 마귀가 심어준 자유.

그래서 래드는 뭘 알아야 되느냐 하면, 자유를 이야기할 때 뭐부터 이야기하는 것을 놓쳤습니까? 인간의 근본적인 주체로서의 자유, 그 자유가 어디서 왔는가를 전혀 이야기 안 해줬습니다. 그걸 이야기 안 해 주다 보니까 마치 예수님이 와서 자유를 처음 주는 것처럼, 예수 믿을 때 처음 자유가 오는 것처럼 사람들은 혼돈 시켜버렸어요. 한국교회가.

그러니까 ‘전에는 악마의 매였으니까’ 이러거든요. 전에는 악마에 안 매였지요. 전에는 악마에 매인 게 아니라 마음껏 자유를 누렸지요. 그렇잖아요. 전에는 악마에 매였지만 지금은 예수에게 온 자유다 이러거든요. 사실은 전에 악마에 매인 게 아니고, 어떤 게 악마에 매인 상태입니까? ‘악마 없다’ 이게 악마에 매인 것 아닙니까. 악마 없으니까 누가 독재입니까? 예수도 없고 하나님 없고 악마도 없으니까 자기가 신이잖아요. 그때가 성경에서 악마한테 매였다고 보는 거예요. 예수님의 보는 시선과 인간의 보는 시선이 이렇게 달라요.

이 버릇이, 그래서 예수 믿고 마음대로 한다. ‘예수 믿는데 술 먹어도 되겠네요.’ 만날 이런 버릇이 옛날 버릇 개 못 줘서 그 버릇 그대로 가서 이런 거예요. 그러니까 이런 버릇 나오니까 목회자들이 이걸 엎는다고. 예수 믿고 더 잘 살아야지. 법을 엎는다고. 사도 바울의 명령을 봐라. 방종하지 말라 했다. 또 엎는다고.

여기 나온 대로 래드가 이야기한 대로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예수를 본 받으라.” 이게 명령인 동시에 서술입니다. 자, 봅시다. 예수님은 어떤 분이다? “하나님과 동등 되신 분이나” 그걸 뭡니까? 래드가 빌립보서 2장 5절 “자기를 비워서 종의” 그걸 거론한건 잘했어요. 왜 잘했느냐 하면, 모든 방종, 방탕, 술 취하지 말라 무슨 이야기해도 그건 어디서 나와야 되는가? 예수 그리스도를 섬겼던 그 사상이 이어져야 되지, ‘예수만을 본 받으라’ 이것 없이 만약에 누가 돛대 돼버려요? 지가 돛대 되니까 지가 난처하니까 그걸 방지하기 위해서 한 건 좋아요.

하여튼 내가 래드를 좋게 이야기한 거예요. 사실은 그걸 연결시켜야 되는데 연결시키다보면 힘들고 다만 래드가 ‘그리스도를 본 받으라’ 나오거든요. 나왔을 때 내가 지금 좋게 해석해 주는 거예요. 아마 이걸 먼저 언급한 것은, 언급하고 난 뒤에 그 다음에 나오는 게 [그리스도의 연합] 아닙니까. ‘아, 예수를 본 받는 정신을 가지고 그 다음에 뭔가 예수님과 연합하게 되면 그 다음에 뭐가 나온다? 여러 가지 윤리, 도덕이라든지, 그리스도의 삶 모든 게 다 해결된다. 이렇게 하려고 한 모양이다.’ 내가 좋게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런 뜻이 있었는지 모르고.

그런데 한번 들어봅시다. “예수님을 본 받으라. 그는 하나님 본체시나 동등하게 여기지 아니하시고 종의 형체를 지니사 죽기까지 복종” 이 대목, 이거 됩니까? 이게 사실 자살은 할 수 있어요. 죽기까지 복종이 안 되는 이유가 있어요. 왜냐하면 예수님 같은 경우에 누가 있습니까? 성령님이 계셔서 한 거예요. 지금 예수님 동등 됨을 취하지 아니하시고 죽기까지 복종하게 된 것은 배후에 누가 있기 때문에? 성령님이 계셔서 한 거예요. 그러면 예수님께서 일하실 때 자기의 자유는 결국 누가 주신 자유에요? 성령님 안에서의 자유죠. 성령이 시킨 대로 한 자유 아닙니까. 그 자유를 지금 주님께서 우리 성도에게 준다 이 말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는 한 마디로 말해서 뭡니까? 말씀대로 살았잖아요. 말씀대로 산다는 게 말씀을 지키는 것이 아니고 말씀대로 된다 이 말입니다. ‘내가 한 것은 말씀에 응하게 함이라.’ 예수님에게 말씀이 우선 있어요. 거기에 말씀이 응하는 거예요. 예수님이 말씀에 종속된다 이 말이죠. 나중에 예수님이 부활하고 난 뒤에 그 말씀을 자신의 말씀으로 바꾸어서 온 우주에 퍼뜨리지만. 예수님 공생애 때에는 말씀에 순종했잖아요. 그죠? 맞지요?

말씀에 응하게 함이라. 이거는 말씀대로 함이라. 많은 과부들이 있어도 한 과부란 것도 어디에? 그게 말씀대로 됨이라. 다른 제치고 저 사람 구원한 것도 아버지께서 보낸 자만 내가 받는다. 물론 나중에 보면 예수님도 자기가 원하는 자를 한다. 일치시키죠.

그렇다면 정리해보면, ‘성령 받았다’ 이 말은 ‘말씀대로 한다’ 말씀대로 한다는 것은, 우리가 어디에 종속된다? 말씀에 종속된다. 결국 우리는 뭐가 되느냐? 말씀이 이렇다는 것을 성경말씀이 내용을 보여주기 위해서 우리는 하나의 종으로 부림을 받는 이것이 인간의 완전한 박탈을 의미하며 그것을 성경에서 뭐냐? 마귀로부터 벗어났다고 해서 두 자로

그러니까 다니엘 세 친구가 불 속에 들어가야만 하는 거예요. 빼서도 뺄 수도 없고 가야만 했고, 불타는 속에서 자기가 살았다는 말은 불 바깥에 있는 저 사람들은 불에 타죽을 인간이라는 것을 불 속에 들어가 봐야 알잖아요. 그게 어떤 의미에서는 아까 이야기한 ‘체험’이죠. 주님이 주신 자유 안에서 우리는 이미 살았다는 겁니다.

정리해 봅시다. 강의 너무 많이 하면 연세 많으신 분 피곤하시니까.

무에서 유가 된다 했지요. 우리는 뭘 모른다? 무를 몰라요. 왜 그러냐 하면, 우리는 유에서 유만 되고, 그것도 모자라서 유에서 뭐가 된다? 신 된다. 현재 나다. 나는 뭐가 된다? 신 된다. 이거는 타고난 거예요. 마귀로부터 타고난 거기 때문에 고칠 수도 없어요. 주님께서는 성령을 통해서 우리를 어디로 데려갑니까? 무로 가지요. 아까 송장 이야기했지요. 송장은 정직하다. 송장은 속임수가 없어요. 송장에다 화장해도 소용없어요. 다 뜯겨나갑니다. 박테리아에 의해서. 무로 돌이키지요.

무의 자리가 뭡니까? 너는 이미 그냥 죽는 게 아니고 죄로 말미암아 저주 받아야 될 저주 자리. 저주 자리에서 축복의 자리로, 영생의 자리로 여기에 누가 들어갑니까? 숨어있는 비밀이 나오지요. 한 자로 뭡니까? 피. 이 피는 무엇의 완성? 말씀의 완성. 말씀의 완성이 피를 적용하는 이 영역을 이쪽 영역, 내가 있는 마귀 영역을 벗어났다고 해서 이걸 자유. 그래서 성도는 예수님처럼 성도의 삶은 자유 안에서 삶, 그게 바로 예수님의 자유를 보여주는 성도의 삶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는 아무것도 한 것도 없이 이 땅에 우연히 태어났고 결국 우리는 내 주장만 하다가 쓸쓸하게 사라지고 나중에 빈 공터만 남습니다. 이걸 미리 알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한 평생 살아가면서 천국 갈 사람을 우리 주님과 하나님이 정했다는 사실을 자랑스럽게 온 세상에 전파하면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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