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8장 29-35절 제목 : 그리스도와 신앙
막 8:29-35 (그리스도와 신앙)
이름 : 우리교회(IP:220.81.176.150)
본문 : 마가복음 8장 29-35절
제목 : 그리스도와 신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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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교회
08-11-09 13:29
그리스도와 인간의 신앙
2008년 11월 9일 본문 말씀: 마가복음 8:29-33
(막 8:29) 『또 물으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 하매』
(막 8:30) 『이에 자기의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 경계하시고』
(막 8:31)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비로소 저희에게 가르치시되』
(막 8:32) 『드러내놓고 이 말씀을 하시니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간하매』
(막 8:33) 『예수께서 돌이키사 제자들을 보시며 베드로를 꾸짖어 가라사대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베드로는 책망을 받습니다. 지금 베드로는 왜 자신이 책망을 받아야 하는지를 모릅니다. 마치 오늘날 우리와 같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위하여 최선을 다한다고 여깁니다. 하지만 여전히 평생토록 예수님으로부터 책망을 받아야만 합니다. 책망을 받지 아니하면 일방적인 자기 관심사가 마치 신앙인 것처럼 오해하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서 베드로는 예수님으로 인하여 사단의 일을 하는 자로 졸지에 등장하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그 연유를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베드로를 비난할 위치에 있지 않습니다. 도리어 베드로와 같은 처지입니다. 왜 우리의 신앙마저 책망의 대상이 되는지를 알았습니다. 창세기 2장에 보면, 하나님의 창조의 원리가 나옵니다.
하나님의 창조의 원리를 쥐고 있는 것은 의외로 우리 인간이 아닙니다. 에덴 동산 한 가운데 자리잡은 것은 생명나무와 선악과 나무입니다. 사람의 의미란 이 두 나무의 취지를 드러내기 위하여 붙여준 피조물입니다. “따먹지 말라”라는 명령은 인간보다 우위에 있습니다. 과연 생명나무와 선악과 사이에 어떤 관계에 있는가 하는 것은 아담이 선악과 과실을 떠먹은 난 이후에 나타나게 됩니다.
그것은 선악과를 따먹은 후에는 결코 생명나무를 따먹을 수 없도록 되어 있습니다. 즉 선악과를 따먹고 선과 악에 대해서 지식을 가졌다는 그 상태로 인하여 도리어 생명나무의 본래의 가치를 훼손시킬 수 있다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인간들이 선악과실을 따먹으므로 말미암아 인간들 속에 선악과가 들어온 셈이 되었습니다. 이제 인간은 ‘움직이는 선악과’입니다.
이런 상태로는 생명나무와 접촉불가합니다. 에덴의 동쪽 길은 순전히 사람을 지켜주기 위함이 아니라 생명나무를 지키기 위하여 차단되어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인간의 일에서 하나님의 일로 넘어가는 경우는 일어날 수 없습니다.
베드로는 지금 아무리 자기 눈으로 둘러보아도 보이는 것은 예수님이라는 인간 뿐입니다. 제가 친구 따라 교회를 처음 갔을 때, 아무리 교회 예배 현장을 둘러보아도 보이는 것은 강단에 선 목사와 그리고 교인들 뿐이었습니다.
목사 입에서 섞여 나오는 개념인 하나님이나 예수님이나 성령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당연히 악마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단지 목사와 외치는 말 가운데 알아들은 것은 헌금, 즉 돈 내어야 교회가 유지된다는 말 뿐이었습니다. 바로 이런 상태에서 예수나, 십자가나 언약이나 구원이나 천국을 이야기해봤자 모두 선악적인 인식 위에서 쏟아내는 관념일 뿐입니다. 따라서 예수님 입장에서 이 선악과를 따먹게 한 원인제공자와 인간을 결부시키십니다. 그 자가 바로 악마입니다.
인간과 악마와의 관련성은 법 의식으로 맺어져있습니다. 로마서 7장에서 분명 성도는 법과는 이혼하고 이제는 성령님과 혼인했다고 하지만 필히 무시해야 만하는 법과의 관련성이 실은 성도의 내부에서 활개치고 다닙니다. 즉 선과 악이라는 인식의 바탕이 성도의 내부에 그대로 자리잡고 있습니다. 선으로 악을 이기고 보다 착한 짓으로 악한 짓을 무마하고 싶어합니다.
하지만 그 법의 끝에는 악마의 본색이 튀어나게 된다는 것이 예수님의 말씀하신 바입니다. 그 발언이 베드로의 입에서 미리 튀어나오고 만 것입니다. 즉 베드로는 자신의 선악적 인식의 바탕 위에서 예수를 믿는다고 해서 그것이 곧 악마의 일이라는 사실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선악적인 인식이 가능하다면 그 선과 악을 행하고 판단하는 주체는 죽어서는 아니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자신과 동일한 사고 체제를 지니고 있는 분으로 여겨서 깔끔하게 죽는다는 것은 옳지 않다고 보았습니다. 이런 육안으로 보는 안목은 마태복음 27:40에 나오는 십자가 처형장소에서 예수님의 반대자들이 예수님을 조롱하면서 이미 실시했던 바입니다.
생생한 그들의 증언에 의하면 예수님은 실패한 구원자라는 것입니다. 본인도 본인을 구원못했다는 겁니다. 맞습니다. 바로 예수님에 대한 이러한 안목이 우리의 안목임을 우리가 인정해야 합니다. 그래야 구원이란 우리가 떼쓰고 힘쓴다고 가능한 일이 아님을 우리가 명백하게 수용하고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구원에 실패한 구원자’의 입장에서 예수님을 ‘구원에 성공할 구원자’라고 이해하는 베드로를 불러다가 책망하고 계시는 겁니다. 베드로의 입장에서 뭔가 애착하고 있는 게 따로 있었습니다. 애착없는 인간이란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죽음을 통해서 그 애착하는 바가 어떻ㄹ게 자신에게서 떨어져 나가는지를 실시합니다.
죽음이란 곧 자신이 송장의 신세가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람이 죽게 되면 피가 응고가 되고 피가 응고되면 당분으로 바뀌게 됩니다. 이 달콤하고 맛있는 당분을 먹고서 벌레들이 인간 시신 내부에서 자생하게 됩니다. 그래서 사람이 죽은 난 뒤 구멍이란 구멍은 다 틀어막아야 합니다.
그 뿐만 아닙니다. 그 구멍에서 진물이 나옵니다. 피부는 층층히 뜯겨지면서 서서히 뭉개집니다. 냄새는 그 어떤 생물의 부패시보다 역겹습니다. 염분이 섞여서 그러합니다. 나의 신체였더라도 더러워서 돌아보지 않을 것입니다. 왜 쓸쓸하게 떨어지는 단풍이 사람보다 아름다운 줄 아니겠습니까?
이런 송장될 신체 위에서 우리는 분칠하고 꾸미고 으스대면서 살아오고 있었습니다. 이 신체의 인생의 전부를 걸고 투자했습니다. 노름판에도 실상 받아주지 않을 그런 송장을 우리는 신주 모시듯이 떠받들고 살아왔습니다. 지금도 죽어가고 있으면서도 영원히 안 죽을 것처럼 살아오고 있습니다.
인간의 일이 곧 악마의 일이 일치될 수밖에 없음을 분명히 하는 가운데 구원이 되어야 정말로 예수님이 친히 인도하시는 구원의 길입니다. 내가 날로 단단해지는 구원은 없습니다. 다만 날로 내가 분해되는 가운데 드러나는 구원만이 예수님께서 작용하시는 참 구원입니다. 갈라디아서 6:14에 보면,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사람이 십자가 믿는 믿음으로 구원되는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로 구원됩니다. 이미 성도는 십자가 밑 속으로 콘크리트 타설되어 들어가 있습니다. 빼도 박도 못합니다. 그래서 나올 것은 십자가 능력 뿐입니다. 사랑이란 사랑 그 자체를 위하여 자신의 모든 것을 표현하고 표출합니다. 이 사랑만이 선악과 의식으로 가득차 있는 우리 자아를 잊게 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의 일에 자신을 벗어나리라 여기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