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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울산 11월 7일 창세기 41장강의창세기

울산 11월 7일 창세기 41장

이름 : 우리교회(IP:124.59.86.24)

081107 창41장 꿈해석이 먼저 vs 꿈은 뒤에

우리교회(IP:124.♡.86.24)

08-11-08 09:39

우리교회(IP:220.♡.176.150)

08-11-16 13:38

울산081107a창41장a

20081107a 울산강의-창세기41장
(강의:이근호 목사)

오늘은 창세기 41장.

창세기 41장에 보면 애굽의 제일 높은 사람 바로 왕이 꿈을 꿉니다. 지난번의 꿈은 신하가 꾼 꿈이죠. 신하가 꾼 꿈의 범주가 그 신하의 개인 신상에 관한 거라면 이번에 꾸는 꿈은 왕의 꿈이기 때문에 왕의 개인 신상과는 관계없지요. 왕이 어떻게 된다든지 이런 게 아니라 이것은 애굽의 국가 전체의 운명과 관련된 그러한 꿈을 꾸게 되는 겁니다. 왕은 국가를 대표하기 때문에.

그래서 둘 다 꿈을 꾸는데 여기에 누가 관련해야 꿈아 뭐로 바뀌느냐 하면, 꿈은 해석이 안 되면 허황됨으로 끝나거든요. 꿈은 바로 해석이 필요해서 이것이 구체화 돼야 돼요. 구체화된다는 것은 현실이죠. 현실을 위하여 꿈을 꾸는데 꿈과 현실 사이에 누가 개입돼야 되느냐 하면, 해석자가 개입해야 된다.

제가 지금 말을 어렵게 했습니다만 쉽게 하면 뭐냐 하면, 요셉이 해석자로 개입하고, 왕의 꿈에도 요셉이 개입한다는 말은 요셉과 함께 있는 그 하나님에 의해서 현재 개인의 신하라든지 왕은, 하나님이 알고 있는 그 뜻을 펼치기 위한 하나의 도구에 지나지 않습니다. 개인적으로 꿈을 꾸었다는 것은 본인이 꾼 게 아니고 꾸게 하신 분에 예속이 되지요. ‘예속’ 또는 다른 말로 하면 ‘종속’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창세기 41장에서 꿈이 있었다. 그 꿈을 신하 개인이 못 풀고, 바로가 못 푼다는 말은 결국은 신하나 바로 왕이나 모두가 요셉의 하나님에 의해서 종속돼있다, 예속돼있다, 묶여있다 이래 보면 되는 겁니다. 그런데 요셉의 하나님이라는 것은 곧 무엇을 뜻하느냐 하면, 하나님의 계시가 여기에 침투한 것이죠.

오늘 강의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하나님 쪽에서 요셉을 통해서 하나님의 계시가 침투하면 반드시 기존에 있던 기존의 인간들의 모든 생각들, 모든 사고방식 이것은 전부다 공격을 받게 돼있습니다. 이거는 철수해야 됩니다. 더 알기 쉽게 말해서 ‘나는 예수 믿는다’ 이러면 사람들은 자기가 알고 있는 걸 추가적으로 하나 더 건지는 걸로 알고 있는데 그건 큰 오산입니다.

그게 아니고 예수를 믿게 되면 예수를 통해서 하나님의 침투가 들어오게 되면 기존의 내 생각은 여기서 완전히 예수님에 대한 새로운 계시에 의해서 무너져야 돼요. 이걸 바르트는 ‘위기’로. 하나님의 계시가 오면 이건 위기다.

보통 점쟁이 점칠 때는 위기가 아니죠. 왜냐하면 내가 먼저 이야기했으니까. ‘얘가 결혼하는데 저하고 맞겠습니까, 안 맞겠습니까’ 묻는 것, ‘얘가 합격하겠습니까, 안 되겠습니까’ 묻는 것은 그 범위를 누가 정하느냐 하면, 내가 정하는 거예요. 내가 정해서 거기에 대해서 그 다음에 ‘내가 어떤 결정을 내리겠다’ 이렇게 결정 내릴 수 있는 여지를 두지만

창세기 40장이나 41장에 나오는 하나님 계시는 여지고 자시고 할 게 없어요. 그냥 꾸고 싶지 않은 꿈 꿨고, 그 꿈이 해석자가 없이는 계속 하나의 위기로 남으니까 여기 해석자를 동원시켰다는 이 말은 기존의 자신의 뜻과 생각은 이미 여기서 거덜 난 거예요. 포기된 겁니다. 이게 바로 ‘예수 믿기’라는 겁니다. 하나님 믿기에요.

우리가 보통 종교 생활하는 것 하고 얼마나 차이 나는지 몰라요. 너무너무 차이 나죠. 그래서 ‘예수 믿는다’ 하면 대부분 수상하고 사기에 해당됩니다. 정말 예수 믿으면 이게 깨져야 됩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말은 예수님이 쳐들어온 걸로 이해를 해줘야 그게 믿는 사람이에요.

나의 안정된 내 생활에, 다복한 내 가정에 예수님 쪽에서 쳐들어왔을 때 비로소 예수 믿는다 해야 되지, 뭐 행복한 가정인데 장차 보험 드는 식으로 죽어서 좋은데 가려고 ‘교회 한번 다녀볼까’ 이런 식으로 믿는 것은 점집에 가서 점치는 것과 똑같은 겁니다. 일상적인 종교기 때문에 그거는 가짜 믿음입니다.

진짜 믿음은 주도권이 바뀌는 거예요. 이분은 침투자, 하나님은 우리의, 그걸 저는 ‘공습’이라 하는데. 완전히 폭격이에요. 폭격하듯이 하나님의 계시가, 하나님의 약속이 우리를 완전히 폭격해서 우리로 하여금 스스로 내 힘으로 산다는 것을 완전히 말살시켜놨어요. 우리는 몽땅 거덜 나서 새로 투입된 하나님의 계시에 종속되는 그러한 팔자, 그런 운명으로 그쪽 길로 가게 되는 겁니다.

제가 부산강의에서 방금한 이 이야기를 간단한 선으로 이야기한 게 있는데, 여기서 약간 길게 이야기하면 이렇습니다. 레일 있잖아요, 선로. 선로가 이래 있다면 사람들은 기존의 내세관은 뭐냐 하면, 과거에 밀어붙여서 현재가 되는 겁니다. 과거가 쌓여서, 쌓여서 현재가 되는 겁니다. 미래가 아직까지 남아있고. ‘그렇게 해볼까’라고 남아있고. 미래라는 것도 현재에 근거해서 그렇고. 현재라는 것은 과거에 근거해서 현재기 때문에 미래라는 것도 결국은 과거에서 계속 밀어붙이니까 미래까지 이어지는 겁니다. 여기에 우리가 선로 위에 놓여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앞을 내다보고 있지요.

아까 목사님하고 식사하는데 그런 이야기했습니다만 전도사님이 그런 이야기했습니까? ‘가난한 집안에 태어났으면 큰일 날 뻔했다.’ 그런 쪽으로 이야기했지요. 그래서 제가 그랬어요. 사람이 부자 집안의 아들들은 절대로 자기가 부자로 태어난 것을 당연히 여깁니다. 당연히 나는 부자로 태어나야 된다는 거예요. 그런데 가난한 집 아들이 꼭 ‘부잣집에 태어났으면 얼마나 좋겠노’ 이래 생각하거든요.

현재 내가 있는 그것을 과거가 차곡차곡 누적되어서 현재를 이루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이 노선에서미래라는 것도 뭐냐? 과거에 내가 좀 미흡한 것, 과거에 되고 싶은 것, 이런 것을 미래에 꿈꾸게 되는 겁니다. 과거 없는 미래가 없는 거예요.

우리교회에 윤덕영 집사님이 계시는데 연세가 육십 넷 쯤 됐는데 그림 그리는 게 취미에요. 집에 온 천지에. 몇 년 후에 개인전시회 한다고. 그래서 우리 장로님들하고 집사님들 부러워서 ‘좋다’ 저렇게 팔자가. 그림 배워서 그림 그리는 거예요. 그것은 뭐냐 하면, 과거에 그림 그리고 싶었는데 그동안 못 그렸다가 이젠 자식들 결혼시키고 한가하니까 고상한 취미로써 미래에 자기가 그림을 그리고 있는 겁니다.

심지어 그것까지 그렸어요. 예수님의 일그러진 십자가 그린다고 그려 놓았기에 제가 이야기했어요. ‘집사님, 예수님 그릴 때는 저렇게 일그러진 십자가가 예수님 모습이 아닙니다.’ ‘그럼 뭡니까?’ ‘나무 상자 그려 놓으면 됩니다.’ ‘그게 뭡니까?’ ‘언약궤 그림입니다.’ 언약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지 일그러진 예수님 상은 폭력입니다. 자학이고. 고통 받는 부처 모습하고 유발하려는 것은 옳지 않지요. 그냥 언약, 약속이죠. 약속이 무슨 일그러진 게 있고 약속이 화려한 게 어디 있어요. 그냥 약속인데. 오후 다섯 시에 만나자. 그게 일그러졌습니까? 아니잖아요.

간단하게 약속으로 구원받지 일그러진 고통으로 구원받는 게 아닙니다. 십자가는 약속이에요. 그 약속이 상당히 우리 죄로 인하여 고난 받는 모습은 있지만 어쨌든 고난을 통해서 약속은 이어지지 않습니다. 고난이니까 약속답다. 이렇지 않고 약속이 먼저 턱하니 자리를 잡아야 거기에 고난이 덮이든 웃음이 있든 그건 상관없이 약속이 약속일 뿐 오해하지 말자. 약속은 약속일뿐이다 이 말이죠. 너무 자기감정에 도취되거나 자기 감정이입하려고 애쓸 필요는 없습니다. 그런 점에서 하나님 감사해요. 약속으로 구원받으면 되는데 ‘일그러져라’ 이런 것을 우리한테 이야기 안 했다고.

그런데 제가 부산강의에서 뭐냐 하면, 하나님께서 볼 때는 우리의 과거에서 밀어붙이는 것이 아니고 미래에서 현재 우리로 마중 나오는 식으로 밀어붙이니까 이것이 우리 안에서 어떻게 만나느냐 하면 과거, 현재로 만나니까 이거는 뭐가 되느냐? 적어 보세요. 이것은 바로 ‘역류’ 역류가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애굽의 술객들이 해석을 못하는 거예요.

지금 인간들 입장에서 보면 왜 미래에서 오는 계시를 해석을 못하느냐 하면, 인간의 미래는 뭐예요? 죽음이잖아요. 인간의 과거는 뭡니까? 지금 생생하게 살아있지요. 우리의 모든 과거가 모든 과거 속에 자기가 죽은 게 포함될까요, 안 될까요? 될 수가 없지요. 죽어버리면 현재가 없으니까.

다시 이야기할게요. 현재라 하는 것은 과거가 쌓여서 현재가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현재라 하는 것은 과거의 살아있음의 흔적이에요. ‘흔적’이라는 말이 굉장히 어려워요. 지나가는 흔적이란 말이죠. 흔적이기 때문에 과거에 살아있다면 과거가 누적된 차곡차곡 쌓인 거라면, 현재는 뭡니까? 살아있죠. 그러니까 과거, 현재, 미래 식으로 사람에게 남는 건 하나밖에 없습니다. 지금 살아있으니까 어쨌든 간에 더 살아보자. 이것만 남아요.

단지 계속 살아왔기에 앞으로 계속 살 거야. 그래서 만약에 미래에 죽는다 하면 이 소리 듣기 싫어요. 왜? 왜냐하면 이게 말이 안 되거든요. 지금 계속 살아왔잖아요. 살아온 게 모여서 뭐가 됐다? 지금 현재 내가 더 살고 싶어. 왜? 살아온 것, 말로 표현하기 그런데.

이렇게 매직이 있는데 내가 여기서 쭉 당기고 있잖아요. 당기고 있으니까 이 지점에 통과할 때 이리 갈 수가 없는 거예요. 왜냐하면 이게 누적 돼있으니 이리 가는 그 힘이 방향성이 계속 쌓이니까 속도가 가속이 붙어서 이 마이크를 통과할 때는 이렇게 돌아갈 수 없다 이 말이죠.

계속 가는데 문제는 앞에 뭐가 있습니까? 절벽이 오지요. 절벽이 뭐죠? 죽음이 오니까 죽는다는 사실과 지금까지 살아왔다는 이것과 어떻게 돼요? 이게 안 맞는 거예요. 성질이 안 맞는 거예요. 성질이 안 맞으니까 죽기를 무서워 할 수밖에 없는 거예요. ‘어, 죽는 거.’ 이거는 내가 평소에 꿈꾸던 게 아닌데.

젊은 애들에게 죽는다는 이야기하면 다 듣기 싫어해요. 왜냐하면 걔의 비전과 꿈은 뭐냐 하면, 일단 기초가 내가 살아있고, 살아있는 내가 얼마나 오바마처럼 대통령 되느냐, 뭐 되느냐? 살아있는 바탕 위에서 그 다음에 찬란한 살아있는 값을 하고 찬란한 열매를 맺히는 그거지. ‘너, 죽는다.’ 그런 이야기해버리면 그러면 걔는 생각하기를 ‘죽는다면 지금 내가 열심히 시험치고 공부하는 것, 무슨 의미 있는데.’ 사모님, 얘한테 죽는다 해보세요. 공부 안 한다 합니다. 죽을 거 뭐 하러 공부하는데.

이것은 단순히 ‘내가 죽는다는 것이 왜 죽을까’ 의문점이 나서 죽음을 기피하는 것이 아니고, 내가 지금 어떤 버릇이 들었느냐 하면, 계속 사는 조로 버릇이 들었는데 누가 감히 나의 잘난 버릇을 그걸 차단시켜서 ‘너, 죽어’라고 할 수 있느냐 이 말입니다.

그래서 복음이라 하는 것은 나에게 별로 도움도 안 되고 듣고 싶지도 않고 지금 당장 필요 없는 거예요. 현재 이런 상태에서 필요한 건 뭡니까? 지금 살아있는 내가 어쨌든 더 여유 있게 사느냐? 그러한 정보, 그런 내용만 필요하지, 펀드를 어떻게 바꾸면 손해 적게 보느냐. 그런 게 필요하지, 나 죽는다는 정보는 나는 왜 죽으면 안 죽는 방법, 그런 것은 필요치 않는 거예요. 버릇이 그렇게 들어서.

그래서 사람들은 신의 계시를 싫어하는 거예요. 하나님의 계시를 싫어하는 거예요. 왜냐하면 하나님은 나 죽고 난 뒤에 하나님 만난다는 것이 상식 아닙니까. 그래서 죽고 난 뒤에 하나님이니까 그전에 이 세계는 어떤 세계냐 하면, 죽음이 빠져있는 세계, 죽음에 도달하지 않은 세계, 삶의 세계 아닙니까. 삶의 세계에서 하나님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곧 죽음을 이야기한다는 건데 삶의 세계에서 죽음을 왜 이야기해요. ‘죽음이 필요 없다’ 하는 것은 곧 무엇이 필요 없다? 하나님의 계시가 필요 없다.

쉽게 이야기해서 하나님은 죽음을 초월하신 분 아닙니까? 죽음을 초월하신 분이 구태여 현재 살려고 애쓰는 내 바탕에 들어올 이유가 없다는 거예요. 나중에 죽을 쯤 되서 그때 ‘하나님, 잘못했습니다’ 회개해서 예수 믿고 천당 가면 될 문제지, 미리 와서 죽음까지 알고 있는 하나님의 죽음의 뒤의 정보까지 미리 내가 챙길 이유는 없다고 보는 겁니다. 이게 역류가 아니고 그냥 자연스런 거죠.

그런데 하나님의 숭고한 뜻, 하나님의 신성한 뜻은 인간이 미처 알지 못하는 인간의 한계를 넘어가요. 인간은 출구가 없습니다. 인간이 상상하기를 자기 인생 끝 지점에 죽음과 맞닿게 될 것이고 그 다음에 죽음 이후의 문제에 대해서 하나님의 영역이기 때문에 내가 어찌 관여할 수 없다. 죽을 때까지는 내가 최선을 다하지만 죽고 난 뒤에는 하나님께 맡길 수밖에 없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인생 계획을 그렇게 세우는 거예요.

그런데 만약에 죽음 이후의 하나님의 계획이 미리 침투했다고 봅시다. 이 사람들은 얼마나 당황스럽겠습니까? 왜 당황스런 줄 알아요? 여기서 과거, 현재 내 꿈을 이룰 때까지는 해석자가 누구에요? 본이이잖아요. 해석의 결론은 이미 나와 있지요. 뭐냐? 이렇게, 이렇게 하면 잘하면 더 잘 먹고, 잘 살 수 있다. 이게 어떤 꿈을 꾸든지 어떤 해석을 하든지 간에 반드시 그런 쪽으로 해석이 간다 이 말입니다.

점치러 가서 ‘이번에 우리 딸이 결혼하는데 잘 맞겠습니까? 부채 도사?’ 이렇게 묻는다고. 그러면 점쟁이가 하는 말이, ‘예. 성사 잘 됩니다’ 라든지 ‘안 됩니다’ 이렇게 하면 되는데 ‘당신은 딸 결혼 걱정하지 말고 너나 걱정하세요.’ 왜? ‘당신은 내일 죽어요.’ 이래 나온다면 이거는 당황스럽지요.

왜 그러냐 하면 죽음의 주도권을 누가 쥐고 있습니까? 자기는 안 쥐고 있거든요. 지금까지 잘 나갔잖아요. 왜? 내 인생 내가 주도권 쥐는데 죽음 이후에 하나님만 아는 어떤 계시가 주어져버리면 이미 주도권이 내가 빼앗기에 되는 거죠. 그것은 바로 내 인생의 해석자가 미래에서 오는 하나님의 계시에 의해서 새롭게 도배하듯이 나를 덮어버려야 돼요.

지금까지 내가 인생을 내가 한다고. 내가 화요일 날 그런 이야기했잖아요. 사람이 행동하는 자와 그 행동을 잘했나, 못했나 판단하는 자가 이게 동일 인물이죠. 이게 말이 되느냐? 북치고 장고치고 하는 식 아닙니까. 얼마나 엉터리입니까? 행동 자기가 해놓고, 판단 자기가 하는 거예요. ‘이번 행동은 잘했다, 잘했다. 너무 잘했다. 못했다. 아이고, 못난 인간아.’ 스스로 자기가 비판하고 난리라.

그러나 어쨌든 이렇게 하는 좋은 이유가 해석자가 누굽니까? 나 말고 다른 해석자 없지요. 그럼 인생의 주도권자는 누구에요? 내가 내 인생 주도권자잖아요. 예수 믿어도 내가 믿고, 하나님 믿어도 내가 믿는다 이 말이죠. 이게 바로 종교인 아닙니까. 종교인은 해답이 나와 있어요. 어떻게, 어떻게 하면 내가 살 수 있느냐? 이게 이미 모든 종교의 바탕에 깔려 있단 말이죠.

그런데 해석자가 나 말고 나 외에 다른 해석자가 있어버리면 어떤 게 위기냐 하면, 지금 내가 판단하는 것, 내가 행동하는 것 이게 잘못 될 수가 있는 거예요. 전부다 나의 오독이요, 나의 착각일 수가 있다 이 말이죠. 내가 인생 말아먹으며 살아놓고도 단지 내가 살아있다는 이유 때문에 ‘나, 역시 잘 살았어. 훌륭하게 살았어. 이만하면 남한테 밑지지 않아’라고 스스로 자기한테 세뇌하고 자기한테 계속 착각하고 격려하고, ‘힘내. 또 살아봐야지. 의인은 일곱 번 넘어져도 여덟 번 일어난단다. 또 일어서고. ‘하면 된다. 못 할 것 없어.’ 얼마나 스스로 자기한테 격려해왔습니까? ‘이럴 땐 침착해야 돼, 침착해야 돼.’ 얼마나 자기한테 도전했습니까.

그런 것이 과거에 자기가 살아왔던 방식입니다. 거기에 자기 바깥에 있는, 해석이 전혀 안 되는, 어떤 계시가 떨어져버리면 이것은 결국 하나의 당황스런 정도가 아니라 지금까지 살아왔던 것이 전부다 말짱 도루묵이고 진짜 엉터리 같은 그런 삶을 살았다는 것이 드러나는 겁니다. 몽땅 뭔가 교체작업이 필요한 거예요.

좀더 엽기적인 이야기를 해드릴까요? 이 이론에 해당되는 하나의 예인데, 너무 엽기적이라서 19금해야 될 텐데. 자기가 어떤 사람을 죽여 놓고 시신을 감출 길이 없어서 건설공사 중인 공사장에 묻어놓고 그 위에다 콘크리트 타설 작업을 해버릴 때 이거는 영원히 감추어졌죠. 이미 죽었지만 살아있다 해도 숨도 못 쉴 거예요. 바로 이 콘크리트 뚜께, 콘크리트 굳어버리면 딱딱해지잖아요. 그 안에 있으면 숨도 못 쉬지요. 그처럼 하나님의 낯선 계시가 우리를 덮쳐버리면 우리는 그 안에 갇혀있는 꼴이죠. 이게 바로 신앙인이에요.

죽음 이후를 장악하고 있는 사실 그전부터 장악했지만 내가, 이근호가 미처 모르고 있는 죽음 이후까지 아시는 분의 약속이 저에게 덮쳐버리면 나는 숨도 못 쉬고 그 약속에 의해서 온 몸에 뒤집어써야 돼요. 뒤집어쓰기만 하면 안 되죠. 그게 내 몸에 굳어져버려야 돼요. 그게 바로 뭐냐? 내가 가는 방향과 전혀 다른 방향이 왔을 때 여기서 뭘 느끼느냐? 역류를 느낍니다. 거꾸로 흐르는 흐름을 느끼는 겁니다. 이게 바로 오늘 나오는 바로 왕의 꿈의 해석입니다.

자, 본격적으로 여러분에게 전체 틀을 말씀드렸으니까 과연 그런지 바로 왕이 무슨 꿈을 꿨는지 봅시다.

41장 1절에 “만 이 년 후에 바로가 꿈을 꾼즉 자기가 하숫가에 섰는데 보니 아름답고 살진 일곱 암소가 하수에게 올라와 갈밭에서 뜯어먹고 그 뒤에 또 흉악하고 파리한 다른 일곱 암소가 하수에게 올라와 그 소와 함께 하숫가에 섰더니” 대조가 되지요. 하나는 아름답고 살진 암소 일곱, 두 번째 등장하는 암소는 흉측한 암소, 그 다음에 아름다운 암소 어떻게 돼요? 서로 대비가 되고 극단적으로 대조가 되죠.

이 말은 뭔 뜻이냐 하면, 현재 내가 과거에서 현재, 미래로 나아가는 인생은, 이 인생이 상상도 못할 정도로 정말 나의 진면목, 나의 진짜 내 인생의 모습은 새로 나에게 덮쳐지는 인생사에 비하면 과거의 것은 아름답게 보이고, 미래의 인생은 여기 아름다움에 비하면 뭐로 보이겠습니까? 흉측하고 저주스런 몰골로 우리에게 덮치는 겁니다.

우리는 항상 우리를 아름답게 장식하잖아요. 아름답지 않더라도 남들이 나를 밉다고 이야기하더라도 나는 나를 항상 보호하고 귀하게 여깁니다. 인간은. 왜? 그래야 살아있다는 정당성이 보장되니까. 내가 살아있다는 이유는, 내가 훌륭하기 때문에 살아있는 거고, 아름답기 때문에 살아있는 거고, 살만한 가치가 있기 때문에 살아있다. 항상 살아가는 이유를 거기서 찾는다고요. 우리는 미래에서 찾지 않습니다. 하나님 계시에서 찾는 게 아니고, 내가 지금까지 살아왔기 때문에 살아있다. 여기서 내가 존재하는 가치를 찾는다고.

교회에서 보통 목사들이 교인들하고 다투면 장로가 마지막에 하는 말이 뭐예요? ‘당신은 나가세요.’ 할 때 그 목사가 뭐라 합니까? 과거 이야기를 줄줄 끄집어내요. ‘내가 와서 교인 얼마나 불었고, 내가 와서 헌금 얼마했고’ 하잖아요. 이건 교회뿐만 아니고 부부 사이에도 마찬가지입니다. 극단적으로 ‘그래, 갈라서자.’ 갈라서자 할 때 ‘아이고, 내가 너한테 어떻게 했는데’ 과거 이야기 나오죠.

바로 왕에 있어서 뭐가 지금 단순히 아름다운 암소, 흉측한 암소, 요새 한우 값도 올라서 잡아먹으면 좋겠는데 아무 문제없는데, 문제는 뭡니까? 흉측한 암소가 뭐보다 세다? 먼저 올라온 아름다운 암소보다 더 세고, 이걸 잡아먹는다는 겁니다. 더 놀라운 사실은 성경에 나오는 놀라운 꿈은 잡아먹더라도 ‘아이고, 이제 그만 잡아먹어야지’ 이런 한계점을 드러내지 않고 잡아먹으면 이젠 살 좀 쪄야 되는데 그게 아니고, 잡아먹으면 잡아먹을수록 점점 더 어떻게 된다? 더 흉측하게 된다는 거예요. 꿈의 내용이. 이 꿈 꾸고 가만있을 인간이 없습니다.

세상에 불길하다 이렇게 불길할 수 없어요. 그리고 이게 하나의 개인이 꾼 꿈이 아니고 왕의 입장에서 왕의 자격으로 꿈꾼 거예요. 보통 인간은 개인이 꿈꾼 겁니다. 심지어 아기 임신해도 임신한 엄마가 꿈 안 꾸고 옆에 처제가 꿈꾸고, 동서가 꿈꾸는 것도 전부다 억지로 갖다 붙이고 태몽이다. ‘형님, 호박이 어떻게 되고, 돼지가 들어오는데 좋은 꿈입니다.’ 지 꿈을 남의 꿈에다 갖다 안길 정도로 그렇게 꿈에 대해서 사람들은 예민해져 있어요. 왜냐하면 사람은 과거는 알고 현재는 아는데 뭘 모릅니까? 미래를 모르니까 꿈을 꿔서라도 미래를 엮여보려고 애를 쓰거든요.

그런데 현재는 아름답듯이 미래는 더욱더 아름다운 꿈이기를 원하고 또 꿈꾸더라도 나쁜 꿈은 가려내고 좋은 꿈만 골라서 이야기한다고, 사람들이. 꿈속에서 나쁜 짓 한 것 누가 이야기 안 하잖아요. 그런 법인데 이 바로가 꾼 꿈은 그게 아니고 나중 온 흉측한 소가 여기 일곱 마리 진짜 내가 원하는 소를 다 잡아먹는 정도가 아니고 완전히 그렇게 먹어도 아직도 그 차가운 냉정한 기운은 사라지지 않고 기세를 부리고 있다는 겁니다.

그 다음 성경 봅시다. 또 5절에 보면, “다시 잠이 들어 꿈을 꾸니 한 줄기에 무성하고 충실한 일곱 이삭이 나오고 그 후에 또 세약하고 동풍에 마른 일곱 이삭이 나오더니 그 세약한 일곱 이삭이 무성하고 충실한 일곱 이삭을 삼킨지라” ‘삼킨다’는 말은 이게 식물인지 동물인지 분간 안 돼요. 짐승 같으면 성립되는데 식물이 뭔가 꿈틀 움직인다는 것은 강력한 메시지를 던지고 있지요.

참 좋았던 시절, ‘야 풍성한 이삭이 피었구나’ 하고 굉장히 자아도취에 빠져 잠시 그랬다 싶었는데 갑자기 파리한 이삭이 나와서 그것을 다 삼켜버릴 때 자, 이 꿈 해석을 어떻게 하느냐 하는 겁니다. 그래서 8절에 보니까 바로가 마음이 어떻게 돼요? 번민해서 애굽의 술객과 박사를 모두 불러 그들에게 꿈을 고했습니다. 신학박사들 다 모았어요.

자, 그러면 제가 여러분한테 문제를 냅니다. 여러분들도 바로한테 불려나온 신학박사 중에 한 사람이라고 봅시다. 바로가 이와 같은 꿈을 이야기했습니다. 문제는 쉬워요. 이거 해몽만 하면 돼요. 해몽을 어떻게 하시랍니까? 여기 오늘 성경에서 뭐라고 합니까? 해석하는 자가 없다고 돼있지요. 까짓것 너나 나나 모르는데 아무 것이나 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이 해석은 어느 수준이 돼야 이게 해석이 되느냐 하면, 일단 죽어서 하나님을 만나 뵈어서 하나님은 모든 걸 통괄하신 분이니까 승리하신 분이니까 일단 죽어서 하나님의 하시는 전체 내용을 다 통째로 일단 보고 난 뒤에 도로 죽은 자리에서 다시 살아나서 죽음의 세계에 갔다 나온 사람에 한해서 이 꿈은 해석이 가능합니다.

그런데 바로도 죽어 본적 없지요. 여기 술객들, 박사들 전부다 죽어 본적 없지요. 그러니까 어떤 인간도 이 해석에 대해서 풀지를 못해요. 까짓것 아무데서 갖다 붙이면 되잖아. 천만에 말씀. 이게 개인의 꿈이 아니고 바로 왕의 꿈이잖아요. 그러면 그 해석을 내놨다 합시다. 엉터리로. 자기도 모르니까 아무렇게나 그럴싸하게 내놨다 합시다. 이 해석 내놓은 그대로 이 사람이 해석자가 이 해석에 책임을 져야 됩니다.

현재 단순히 바로 왕이 ‘내 꿈 좀 풀어주삼’ 이걸 원한 게 아니고 꿈은 곧 미래 아닙니까. 미래를 보장해 줄 사람을 찾는 겁니다. 왜? 자기는 꿈 해석자가 아니니까. 자기는 꿈의 해석을 못 하니까 결국 꿈이 자기를 지배하고 있는 거예요. 자기가 모르는 낯선 미래가 지금 바로 왕의 현재를 만들고 있는 겁니다.

다시 이야기해봅시다. 상당히 여러분들이 이해가 안 되는 것처럼 하고 있는데. 출발이 미래에서 출발한다 이 말이죠. 그 다음이 현재고, 그 다음이 과거가 된다 이 말이죠. 그렇다면 미래에서 주어진 것이 현재에 침투돼있는 거예요. 그러면 현재에서 꿈이 만약에 발각이 되고 해석이 된다면 노선이 과거, 현재 그리고 인간적인 일을 하던 이 레일, 노선에서 이게 경상도라면 ‘경상도로 갈까요~’ 하다가 어디로 갑니까? 전라도로 가야 되는 거예요.

다시 ‘아, 꿈이 그랬었어’ 하고 다시 경상도로 갈 수 없는 이야기다 말이죠. 그렇게 가면 사기죠. 세상에 이런 사기가 어디 있습니까. 지금 이쪽 노선을 포기할 참이에요. 근데 지금 바로나 술객들이 살아온 것은 이쪽 A라는 노선, 레일, 아는 게 이것밖에 없어요. 이걸 하루아침에 B노선으로 바꾸어야 된다 이 말이죠. 근데 아는 게 A밖에 없는데 어떻게 B를 삽니까?

목사님들이 설교할 때 그냥 십자가 이렇습니다. 복음 이렇습니다. 말만 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어요. 문제는 교인들이 사는 것과 다른 십자가 삶을 살면서 그 이야기를 해줘야 그게 해석자가 되는 겁니다. 그리고 교인들은 일단 미래에 대해서 자기가 현재 사는 식을 포기할 마음자세가 돼있고, 예수님 주신 약속 안에 헌신할 마음자세가 돼있기 때문에 그걸 앞장서서 그 길을 책임지고 이끌어가야 될 목사님이 필요한 거예요. 단순히 성경지식을 원하는 게 아닙니다. 현실을 원하는 거예요.

‘그래 옛날에 예수님이 십자가진 적이 있단다. 알겠지요? 됐어요.’ 이게 아니고 자기가 살아왔던 이것이 뭔가 교인들은 현재 내가 살아온 이 식대로 지금 살아가면서도 분명히 십자가 앞에 문제 있다는 거예요. 왜냐하면 불신자와 같이 되니까. 불신자도 과거, 현재, 미래, 현재해서 꿈꾸고, ‘난 우리 애는 이렇게 됐으면 좋겠다’ 꿈꾼다 말이죠. 그 꿈이라 하는 것은 어디서 밀려들어왔다? 과거에서 밀려들어온 거예요.

아이가 만약에 자폐증이라면, 말을 못한다면, 다른 애들은 ‘우리 애 서울대학 가야 돼, 연고대 가야 돼’ 할 때 이 엄마는 자폐증 애는 기대하지 않아요. 뭐만 하는 줄 압니까? ‘제발 얘가 들을 수만 있고 말만 했으면 좋겠다’ 할 거다 이 말이죠. 그렇다면 왜 다른 사람처럼 서울대학 같은 것 기대 안 합니까? 과거가 자폐증이고 저능아라는 과거가 형성돼있기 때문에 이 과거에 준해서 미래가 이미 과거에서 결정돼있는 겁니다. 모든 인간이 다 그래요. 지금 바로 왕도 그렇고, 술객도 그런 거예요.

그런데 지금 바로 왕이 꾼 꿈은 술객이나 박사들이 과거, 현재, 미래 식으로 살아왔던 그 생활방식으론 도저히 해석이 안 돼. 그래서 그들에게 딜레마가 된 거예요. 대충 가짜로 거짓말하고 넘어가면 안 됩니까? 거짓말하고 넘어갈 성질이 못 돼요. 왜냐? 애굽의 미래가 달려있기 때문에. 그래서 이렇게 돼요. 꿈을 꾼 자가 곧 미래의 통치자가 되는 겁니다. 내가 말 잘못했다. 꿈을 꾼 자가 통치자가 아니라 그 꿈을 해석해내는 자가 미래를 책임져야 될 마스터가 되는 거예요. 애굽나라의 매니저가 되는 겁니다.

그리고 애굽의 입장에서는 ‘이 해석을 받을 거냐, 말 거냐’라고 선택의 여지도 없어요. 왜? 꿈은 이루어지는 게 아닙니다. 꿈은 꿨다는 그 자체가 이미 이뤄진 거예요. 자꾸 사람들은 꿈 해놓고 그 다음에 별표하고 이루어진다고 카드섹션 하는데, 꿈은 이뤄지는 게 아니고 꿈 자체가 스스로 자체 내에서 이뤄가고 있어요. 거기 대해서 만약에 소외된다든지 거기서 해석을 못하게 되면 꿈 자체에서 이탈되기 때문에 그건 저주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시 바깥에서 노는 사람이에요.

그래서 흔히 선교단체에서 ‘요셉이 꿈을 꿨잖아. 우리도 꿈을 꿉시다.’ 전부다 이것은 사기입니다. 사기고 거짓말이에요. 이거는 자기가 과거 행세, 그대로 밀어붙이겠다는 하나의 발상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한 것을 한 마디로 하면 이렇습니다. ‘부딪침’ 부딪치는 거예요. 나는 내 식대로 살아가는데 뭔가 10톤 트럭이 와서 나를 받아버렸어요. 내 인생은 내 미래가 저지당합니다. 뭔가 ‘그렇게 살아서는 안 돼’라고 강력하게 저지하는 게 있어요. 다른 노선으로 빼는 겁니다. 경상도로 가는 노선을 전라도로 바꾸는 거예요. 넓은 길로 왔다면 이제부터는 무슨 길로 가야 됩니까? 좁은 길로 가야 되는 거예요.

넓은 길로 왔다면 이제부터는 새 길로, 좁은 길로 가야 되는데, 이 좁은 길로 가야 된다는 아이디어가 어디서 나왔습니까? 바로 우리에게 부딪치는 하나님의 계시에요. 마태복음 7장에 있는 이야기입니다. 성경 전체가 우리의 인생을 저지시키는 저주로써 부딪침으로 계속 성경전체가 우리에게 다가오는 거예요. 그래서 성경이라는 것이 정말 하나님의 계시입니다.

감사하게도 우리는 성경의 해석자가 우리자신이 아닌 것을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성경의 해석자가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요한복음 5장 39절에서 “모든 성경은 내게 대해서 증거하는 것”이다. 이미 완수 되었기에 완수된 그것이 미래까지 보장 되었기에 보장된 그것이 나라는 인생 속에 담겨버리면 더 이상 나를 위한 인생은 없고, 그리스도의 완성됨을 증거하는 새로운 인생길을 우리를 거기서 이끌림을 인도를 받게 돼있습니다. 치열한 다툼이 일어나겠지요. ‘내 사는 방식이 있는데 갈수록 저지하십니까?’ 그런데 나중에 보면 갈수록 저지하신 것에 대해서 감사해야 돼요.

요셉의 인생이란 것은 한 마디로 말해서 자기가 생각하는 인생은 전혀 없습니다. 요셉의 인생은, 자기가 생각대로 되는 인생은 아무것도 없어요. 요셉은 자꾸 꿈 이야기만 해요. 자기는 없고 자기 속의 꿈만 살아있어요. 주신 꿈이죠. 하나님의 계시만 살아있고 요새 말로 하면 하나님 말씀만 살아있고 자기 나름대로의 어떤 미래 계획이라는 게 전부 없는 상태입니다.

하나의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나도 남들처럼 돈 벌고 부자 되고 싶은데 어느 날 말씀이 어떤 꿈이 주어지느냐 하면, ‘돈을 사랑하는 것이 일만 악의 뿌리다’라는 이 꿈, 이 계시 맞지요. 이 계시는 어디에 통용된다? 미래에 필요하죠. 미래에 필요한 그 계시가 현재, 과거에서 미래로 꿈을 꾸어가는 나에게 5톤 트럭으로 우리에게 부딪침이 오게 되면 우린 강력하게 저지하죠. 주님이 나를 저지하고 나도 주님을 저지하고. 여기서 십자가가 팍팍 터지요. ‘나 교회 안 다닌다. 이제부터 예수 (안 믿어).’ 혼자 중얼거리고 난리라.

그런데 누가 승리합니까?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라는 이걸 체험화시킬 때 비로소 이 사람은 뭐가 되느냐? 꿈의 해석자가 됩니다. ‘집사님, 돈 너무 좋아하면 안 좋습니다. 나 터졌잖아. 와장창 깨졌어. 펀드 넣어서 이번에 반 토막 났어.’ 지 자랑하는 게 아니고 성경말씀에는 옛날에는 ‘그럴까? 에이, 그럴 리가 있겠어?’라고 했다가 ‘야, 진짜로 성경말씀은 어느 하나 틀린 말씀이 없구나’라는 것을 절감하게 만드는 그러한 부딪침이 있을 때 그 사람은 요셉이 되는 겁니다. 세상을 제대로 해석하는 자 되는 거예요.

세리와 창기가 천당 간다. ‘그럴 리가 있겠어. 창녀질 했는데 뭘 천당 가.’ ‘네가 오늘 밤에 낙원에 있으리라.’ ‘아이고, 그럴 리 있겠어. 강도덴 강도가 지옥 가야지 무슨 천국에 가.’ 그런데 자기가 생각지도 못한 죄를 깊이 알 때 ‘야, 강도보다 못한 인간이 나였구나’라는 것을 알았을 때 그럼 나 같은 인간도 누구 때문에? 옆에 계시는 예수님의 대신 죽으심 덕분에 오늘 밤에 죽더라도 어디 갑니까? 낙원에 간다는 그것을 체험할 때 그 사람은 어떤 누구를 만나도 ‘이 사람아, 돈이 최고가 아니데이. 예수님의 피가 최고데이.’ 하나님의 용서가 최고라고 해석자로 등장될 수 있는 겁니다.

그것도 몇 분 안 가요. 또 좋은 게 있으면 헤헤 이러지만 어쨌든 그 순간만큼은 말씀이 장난이 아니라는 것 그리고 이 말씀은 하나의 그냥 소설이 아니고 실제로 앞으로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을 미리 딴 사람 말고 하필이면 나에게 그걸 집어넣은 거예요. 칩처럼.

우리가 후다닥 읽어버리는 많은 성경책, ‘그런 게 있었나’ 하고 그냥 넘어가버리는 욥, ‘아이고, 고생 좀 했네’ 이런 식으로. 이사야에 그런 말씀 있죠. “사람의 영광은 풀의 꽃같이 곧 질 수 있으나 영원히 없어지지 않는 건 말씀이다.” 그런 게 이사야에 나오지만 ‘아이고, 뭐 그렇겠지’ 했는데 막상 자기한테 그럴 당하면 ‘주여, 이것을 다른 사람에게 감추시고 왜 저에게 알려주십니까?’ 그걸 마태복음에서 이걸 ‘귀’라 하지요. 앞에 뭐가 붙지요.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왜 이런 단서를 붙입니까? 아무나 미래로부터 초청받은 자가 아니라는 말이죠. 따로 있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깔아놓은 레일이 있어요. 내가 깔고 가는 레일이 있습니다. 내가 매일같이 깔고 또 딛고 징검다리처럼 조심스럽게 살피고 또 내가 딛고 가는 조심스럽게 가는 내 인생 따로 있어요. 그런데 그 인생 말고 주님께서 이미 완수해놓은 길이 있어요. 주님께서 내가 구태여 징검다리 안 놓더라도 주님께서 천국까지 일사천리로 쫙 이어져가는 그 레일이 따로 있습니다. 그 레일로 우리의 발길을 옮기게 하는 그런 부딪침이 성경말씀대로 우리에게 성경계시로써 계속 주어지는 겁니다.

그러면 이쪽에 내가 꾸려나가는 인생길에서 벗어나서 그걸 ‘말씀 위에 선다’ 하는데, 말씀의 레일 위에 서서 다시 나를 돌아보게 되면 비로소 그 사람은 뭐냐? 세상을 볼 수 있는 해석자가 되고, 그 사람은 세상의 어떤 일이 어떤 경제, 금융위기에 있더라도 놀라지 않습니다. 심지어 자기가 죽는 일이 있더라도 죽음 이후까지 알기 때문에 ‘차라리 죽는 게 낫다’ 이런 마음으로 느긋하게 ‘차라리 옷 갈아입자’ 이런 식이지 이 세상 사람처럼 죽음에 대해서 두려워하거나 떨지 않습니다. 이미 죽음 바깥에 일어나는 말씀이 우리로 하여금 두려움이 없게 만들죠. 사랑이 두려움이 없게 만드는 그러한 해석자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 꿈의 해석을 통해서 어떻게 해서 단순한 꿈의 해석인데 어떻게 이 꿈을 통해서 바로가 애굽을 통치했던 그 시절이 끝나고 요셉이(요셉 그때 나이가 서른 살이었어요. 스물여덟 살 때 꿈 꿨거든요.) 서른 살 때 요셉이 그 넓은 애굽의 제국의 통치권자가 되었는지 어떻게 그게 가능한지, 그걸 우리가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41장 8절에 보면, “바로가 깬즉 꿈이라 아침에 그 마음이 번민하여 보내어 애굽의 술객과 박사를 모두 불러 그들에게 그 꿈을 고하였으나 그것을 바로에게 해석하는 자가 없었더라” 위기죠. 왜 해석자가 없다 했습니까? 전부다 그들이 가는 방향과 정반대 방향으로 날아오는 꿈이기 때문에 자기 인생을 포기해야만 아는 그야말로 죽음 이후에나 알지, 지금 자기 죽는 것도 벌벌 떠는 자들에게 이런 해석은 해석이 안 됩니다.

그런데 10절에 보니까 이 이야기만 하고 십분 쉽시다. “바로께서 종들에게 노하사 나와 떡 굽는 관원장을 시위대장의 집에 가두셨을 때에 나와 그가 하룻밤에 꿈을 꾼즉 각기 징조가 잇는 꿈이라 그곳에 시위대장의 종 된 히브리 소년이 우리와 함께 있기로 우리가 그에게 고하매 그가 우리의 꿈을 풀되 그 꿈대로 각인에게 해석하더니 그 해석한 대로 되어 나는 복직하고 그는 매여 달렸나이다”

이십 대의 요셉이(십 대 일수도 있는데) 지가 뭐가 그래 똑똑해서 어른들 운명을 꿰뚫겠습니까? 요셉이 점을 쳤습니까? 수리수리마수리 콧김 불어 점을 쳤습니까? 아니에요. 요셉이 가는 곳마다 이 인간 세상에는 뭐가 된다? 위기. 그러니까 요셉이 있는 곳이 바로 복 받은 곳이죠. 왜? 인간의 자기의 허물과 자기의 한계를 요셉이 들어와야 한계가 드러나게 돼버렸어요.

자, 요셉의 자리에다 뭘 집어넣는가? 예수님을 집어넣어 봅시다. 예수님이 우리 가정에 들어오고, 예수님이 우리 직장에 들어오고, 예수님이 우리 교회에 들어옴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뭐가 돼요? 이 교회는 위기가 되지만 그것이 뭐다? 바로 축복 받는 찬스, 기회라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10분 쉽시다.

우리교회(IP:220.♡.176.150)

08-11-16 13:39

울산081107b창41장b

20081107b 울산강의-창세기41장
(강의:이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에 요셉의 꿈 해석에서 우리가 또 새롭게 생각해야 될 것은 뭐냐 하면, 꿈이 있고 해석이 있는 게 아니고, 해석이 먼저 있고 나중에 해석에 맞추어서 꿈을 꾼다는 거예요. 이게 어려운 거예요. 사람의 실력은 뭐냐 하면, 꿈이 일단 있고 꿈에 대해서 여러 가지 자기의 다양한 견해라든지 해석이 나오는 이것이 인간들이 할 수 있는 한계가 이것밖에 없습니다. 꿈이 먼저 있고 꿈에 대해서 해석한다, 이래 되는데.

하나님께서는 해석이 알맹이입니다. 알맹이를 보여주기 위해서 꿈이라는 상징인데 아까 이야기한 흔적이 등장한 거예요. 그래서 여러분들이 요셉이 꾼 꿈을 보고 ‘요셉 좋겠다. 꿈 잘 꿔서 총리대신 되고. 좋겠다’ 하시면 안 됩니다. 그게 아니고 요셉 자체가 장차오실 예수님을 보여주기 때문에 이 세상에 흔적이란 걸 자극을 남기고 지나가는 거예요. 손톱 길러서 긁으면 긁기잖아요.

하나의 뭔가 이 세상에 흔적을 남기는 겁니다. 인간이 해석할 수 없는 해석이 도리어 인간 세계를 지배한다. 인간이 어떻게 할 수 없는 원래 해석이 인간을 지배하고 있으며 인생이란 하는 것은 뭐와 같은가? 바로 다 꿈에 예속되고 꿈의 범주 아래 담겨있고 주님이 주신 해석에서 벗어나는 그런 인생사는 없다는 겁니다. 몽땅 다 요셉을 통해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소속이 돼버리는 겁니다.

이것을 말로 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는 요셉을 따로 놔두고 요셉이 들어가야 될 여러 가지 상황 속에 먼저 하나님께서 관여하셔서, 침투하셔서, 침공하셔서 꿈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위기와 당황스러움을 남기고 그 차후에 요셉이 어슬렁어슬렁 하는 식으로 요셉이 등장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전도를 전도 안 하면 안 된다. 주의 뜻이다. 이렇게 하시면 안 되고, 전도의 모든 바탕은 추수는 누가 하십니까? 예수님이 다 하시고, 우리는 뒤따라가면서 주님이 하신 추수, 결실을 주어먹기만 하면 되는 거예요. 그렇게 돼있어요.

그런 생각이 발상이 되려면 나부터 하나님의 소속이다, 나부터 하나님의 것이라는 걸 생각을 갖고 있어야 됩니다. 내가 중심이 돼버리면 그 생각이 들지 않지요.

그래서 이 시간에는 요셉의 꿈을 좀더 깊이 분석해보겠습니다. 그게 몇 절에 나와 있느냐 하면, 25절에 쭉 나와 있습니다. 꿈의 해석부터 먼저 읽어 그 다음에 그 해석이 알맹이며 알맹이를 보여주기 위해서 꿈이 먼저 등장했다는 겁니다. 나중에 있는 것이 꿈이 있어야 될 이유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진짜는 나중에 있습니다.

그 나중을 오늘 본문 33절에서는 ‘지혜 있는 사람’이다. 지혜의 등장이라고 볼 수 있는데. 그러면 25절부터 해석이 됩니다. “요셉이 바로에게 고하되 바로의 꿈은 하나이라” 당신은 둘을 꿨다고 생각하는데 사실은 하나입니다. 그러니까 이미 해석이 먼저 있고, 해석에서 꿈이 나오니까 꿈1, 꿈2가 꿈이 두 개지만 어디로 모여져야 된다? 하나의 해석으로 모아져야 된다. 그래서 모든 성경해석은, 예수님이라는 하나에 모아져야 됩니다.

‘나는 암에서 병 낫다. 나는 이런 간증이다.’ 어떤 간증이 있더라도 그 간증은 결국은 뻥뻥뻥하고 하나의 잠시 나타나다 없어지는 비누방울처럼 뻥뻥 소리 내면서 터져버려야 돼요. 그리고 나라는 인생도 터져버려야 돼요. 뻥뻥하고 공중에 다 터져버리고 오직 하나에 모아져야 됩니다. 이럴 때 사람이 행복해요. 사람이 참 편합니다.

여러 가지 인생에 A라는 사람 인생이 있고 B라는 인생이 있더라도 서로가 서로를 비교해버리면 짜증나요. 그런데 이 해석이 예수님에게 모아져버리면 다 같이 죽은 자가 돼버립니다. 죽은 자가 색깔이 뭐더라도 죽으면 검은색이잖아요. 죽은 자기 때문에 죽은 자가 죽은 자를 갈구고 따지고 대비하고 대조하고 누가 높았다, 낮았다 이럴 필요 없어요. 요셉이 높습니까, 왕이 높습니까? 그걸 따질 필요 없다고.

둘 다 어디에 종속됩니까? 하나님 주신 해석에 묶여있어요. 그러니까 누가 높고, 낮고 할 것 없어요. 인생을 살 때 비교하지 않고 누가 경쟁하지 않으면 그것처럼 편한 인생이 없습니다. 이래 사나, 저래 사나 나는 죽은 자다. 왜 죽은 자냐 하면, 이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뭐로 본다? 이걸 죽은 자로 만들어야 하나님의 해석 속에 죽은데서 살리는 하나님의 십자가의 위력이 빛을 발하잖아요.

제가 아까 했잖아요. 과거에서 현재로 가지만 계속 현재인 줄 알지만 나중에 결국 현재는 뭐로 끝납니까? 죽음으로 끝나잖아요. 죽음 바깥에 있는 세계가 역으로 우리에게 쳐들어오게 되면 우리는 무슨 자가 되냐 하면, 아무리 지금 내가 잘 살았다, 못 살았다, 잘났다 뭐 해도 결국 하나의 죽은 송장에 불과하다, 죽은 자에 해당된다 이 말이죠.

죽은 자에 해당되는 이런 위기에서 우리가 살 길은 뭐냐 하면, 미래에 있는 하나님의 작업에 들어가야 되죠. 그 작업이 뭐냐? 죽음에서 영생을 얻는 작업이 죽은 자 속에 들어와 버리면, 이 사람은 바로 하나님의 지혜자, 해석자 되는 겁니다. 그 이야기를 지금 하고 있는 겁니다. 한번 하나님 주신 언약은 변치 않는다. 그걸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처음에 해석에 보면, 26절 봅시다. “일곱 좋은 암소는 일곱 해요 일곱 좋은 이삭도 일곱 해니” 자, 여기서 또 어려워요. 암소 일곱 마리 그리고 일곱 이삭, 이거는 개체지요. 하나, 둘, 셋, 넷 개체잖아요. 그런데 개체가 뭐로 바뀌었습니까? 시간으로 바뀌었다면 요셉이 그렇게 해석했다면, 그러면 오늘날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뭐로 바뀌어야 돼요? 시간으로 바뀌어야 되는 거예요. 억수로 어렵지요. 제가 이야기하면서 어렵다.

일곱 암소가 일곱 해라고 이렇게 시간적인 변화를 주는 그런 아이디어는 인간에겐 없습니다. 우리가 일단 알고 난 뒤에는 그 다음에 꿈꿀 때 ‘일곱 해’라고 컨닝해서 흉내는 낼 순 있지만 처음에 해석할 때 일곱 마리 암소가 뭐가 된다? 칠 년이 된다는 여기 시간적인 요소가 가미될 줄은 상상도 못했죠. 인간의 지혜로선 나올 수 없는 겁니다.

그렇다면 일곱 마리 암소로 하지 말고, 일곱 사람으로 합시다. 일곱 사람이 결국은 한 사람, 한 사람 당 뭘 감당하느냐? 시간, 일 년씩 감당해서 칠 년이 된다. 이런 해석과 같은 해석이죠. 이것은 인간은 어느 요소로 분해된다? 결국은 인간의 개체는 시간요소로 분해가 돼버리죠.

그렇다면 인간은 나는 누구라고 할 게 아니라 너는 어떤 역할을 맡은 시간이냐? 너는 뭘 보여주는 인생을 살고 있느냐? 너는 예수 그리스도 가운데서 어떤 대목을 보여주는 그런 인생을 살고 있느냐? 인생이란 시간으로써 그 사람의 질을 결정짓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이 말입니다. 내가 얼마나 가졌느냐? 여러분 시간은 갖는 게 아니에요. 시간은 주어지는 것이지 내가 갖는 게 아닙니다. 이왕 어려운 것 더 어렵게 해봅시다.

여러분들이 사십 년을 못 가져요. 사십 년을 지내왔잖아. 나이가 현재 사십이라면 사십 년을 지내왔지 사십 년을 가지고 있는 게 아닙니다. 여러분이 갖고 있는 건 뭐냐? 점점 더 죽음에 가깝다는 나의 섞어가는 육질, 신체 이것만 갖고 있지 이것도 시간이 흘러버리면 파리하고 흉측한 송장으로 변합니다. 진물 나오지요, 피부 막 뭉개지지요. 내가 봐도 안 돌아봐요. 내가 봐도 내 시체 안 돌아봅니다.

그렇게 애지중지하면서 찍어 바르고 고치고 난리치던 내 신체가, 죽은 시체가 되서 턱 누워있는데 나도 안 볼 거예요. 더러워서 안 봅니다. 내가 성질이 못 되서가 아니라 나의 임무는 아름다운 내 신체를 갖는 게 나의 임무가 아니고 나는 그냥 흘러가는 존재, 시간 따라 흘러가면 그만 이에요. 사십 년 살았습니까? 사십 년 흘러가고 이제 사십일 년째 맞이한 거예요. 내 역할은 시간의 지배를 보여주는 그걸로 끝나는 겁니다.

그 다음에 어려워요. 그 다음에 나오는 흉악한 일곱 마리 암소가 뭐라고요? 흉년 드는 칠 년이죠. 그러면 꿈에 의하면 앞에 있는 아무리 좋은 칠 년이라도 그 다음에 뒤에 있는 칠 년이 쳐들어오면 남는 것은 앞의 것이 남습니까, 뒤의 것이 남습니까? 결국은 뒤의 것이 남아요. 이게 플러스, 마이너스해서 제로가 되는 게 아니고, 플러스, 마이너스해서 마이너스가 된다니까. 이런 계산법이 또 하나님 계산법이 튀어나온다니까. 플러스, 마이너스가 마이너스로 계속 돼버리는 거예요.

이거는 소유개념이 아니고 시간개념이기 때문에 뒤에 시간이 우선권이 있어서 그래요. 이걸 제가 콘크리트 타설 작업이라고 했지요. 위에 덮쳐버리면 안에 뭐가 있든지 덮쳐버리는 거예요. 그렇다면 결국 바로가 예상한 바와 같이 이것은 절망입니다. 이걸 전 ‘파멸’이라고 보는데. 인생사가 전부다 파멸이에요. 결국은 사람이 아무리 화려했다, 출세했다, 뭐했다 하지만 나중에 덮쳐버리면 죽음이라는 것은 인간의 파멸로 끝나버립니다.

제가 고린도전후서 녹취한 것, 그 책을 얼른 보니 어떤 대목이 나오느냐 하면, 대법원 판사하던 사람이 한강다리에서 뛰어내려 자살한 사건이 있었어요. 아까 한 것 다시 해볼까요? 기억 자꾸 해야 돼요.

사람은 어떻게 산다? 과거가 누적되어서 뭘 만든다? 현재가 된다. 현재를 뜯어보면 뭐가 들어있어요? 과거밖에 없는 거라. 그러니까 한강다리에서 뛰어내린 사람은 현재가 자기가 육십오 세고, 칠십 세고 이게 있는 것이 아니고, 자기 안에 뭐가 들어있습니까? 나는 과거에 대법원 판사였다. 이게 문제에요. 대법원 판사였는데 지금 현재 자기가 몸이 아파요. 가족들에게 짐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그는 자살한 거예요.

인간 속에 시간이 흐르는 게 아닙니다. 인간은 그대로 있고 인간 위에 시간이 덮치죠. 인간이 원하던 원하지 않던 정해진 시간이 우리를 덮쳐버려요. 모든 인간이 마찬가지에요. 신자든, 불신자든 모든 인생은 예수 그리스도가 생각해놓은 그 시간의 길이 덮쳐서 그 사람은 그 시간대로 그 안에서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이며 살게 돼있습니다. 하나는 진노의 그릇, 하나는 긍휼의 그릇으로 그렇게 살다 가게 돼있습니다.

그러면 플러스, 마이너스 합치니까 마이너스 됐다. 여기에 무슨 희망이 있습니까? 지금 바로 왕이 꿈을 꿨고 해석을 들어도 고민이 그거잖아요. 점쟁이한테 가서 ‘어떻게 이번 우리 애가 서울대학 되겠습니까?’ 하는데 ‘아무리 해도 안 되겠습니다.’ 할 때 ‘그게 뜻이네요. 애가 운명이 이번에 떨어지게 돼있습니다.’ 그럴 때 ‘어떻게 안 되겠습니까?’ ‘안 되겠습니다. 이건 운명입니다.’ ‘운명인 줄 알지만 어떻게 빠져나갈 다른 길 없습니까?’ ‘없습니다.’ 얼마나 큰 절망이겠어요. 바로 왕이 꿈을 꾸고 난 뒤에 해석이 안 됐지만 뭔가 절망을 느낀다 말이죠. 뭔가 무서워한 거예요.

그래서 여기 보면 어떻게 되느냐 하면, 28절에 “내가 바로에게 고하기를 하나님이 그 하실 일로 바로에게 보이신다 함이 이것이라” 그러니까 하나님이 하실 일이 바로에게 보였지요. 그게 뭡니까? 여러분 답변해보세요. 하나님 하실 일이 뭐예요? 첫 번째 칠 년 동안 풍년, 그걸 다 까먹지요. 뭐가? 그 뒤에 흉년이 다 까먹지요. 그래서 결국 남는 게 없고 흉년 그대로 남지요. 그것까지 하나님 일이잖아요. 끝났잖아요. 하나님 일 끝나버렸네. 무슨 대책이 있습니까? 끝났는데. 이것 운명이고 숙명인데. 이건 빼도 박도 못하고 마땅히 그래야 되는 일인데 끝난 이야기네요. 꿈 해석 더 들을 것 없네요. 말투가 완전히 베토벤 말투.

31절 봅시다. “후에 든 그 흉년이 너무 심하므로 이전 풍년을 이 땅에서 기억하지 못하게 되리이다” 아주 냉정하고 차갑게 단언을 해버립니다. 결정을 지어버립니다. 기억하지 않을 것이다. 왜 하나님께서는 이런 계시를 애굽에다 집어넣었습니까? 그것은 더 이상 바로나 바로의 신하들이 더 이상 애굽 땅을 애굽 나라를 자기 쪽으로 어떻게 해볼까 하는 그런 여지를 싹둑 잘라버린 거예요. 모든 가능성을 다 잘라버리죠. 이게 남는 것은, 바로 왕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입니까? 전체 애굽 나라를 몽땅 들어서 누구한테 바치면 돼요? 요셉에게. 그게 하나님의 원래 뜻이었습니다.

자, 제가 지금 하는 말을 혹시 눈치 챈 사람도 있는지 모르지만, 하나님이 주신 꿈이 마치 얼른 보기에는 요셉 말고 다른 인간들에게 주신 꿈처럼 느껴지는데 하나님은 인간사에 꿈을 꾼 것처럼 해놓고 사실은 이걸 인수인계 어디다 모읍니까? 요셉이 보여주는 어떤 인물, 누구지요? 예수 그리스도. 요셉 노선으로 모아지게 하는 중간 절차로써, 중간 과정으로써 그 꿈이 세상 사람들의 개인 사생활까지 다 관여한다는 사실이 오늘 본문에서 드러나는 겁니다.

꿈은 요셉이 꾸는 게 아닙니다. 요셉은 그냥 해석자지요. 꿈은 일반 사람들이 꿨는데 다 꾸고 난 뒤에는 일반 사람들이 자진해서 자기 인생을 어디다 반납하느냐 하면, 요셉 노선에 편입시켜요. 편입시험도 없어요. 그냥 갖다 바치면 돼요. 편입시켜서 하나님이 요셉으로서 안 된다는 것, 실패했다는 것, 망했다는 것이 어떻게 요셉 안에서 이게 융성하게 되는가를 이제는 모든 책임은 누가 책임인가? 하나님과 요셉의 관계 속에서 중심점으로 모아진다는 사실을 꿈을 통해서 알려주고 있습니다.

결국은 요셉에 연결된 분이 예수님이니까 결국은 제가 하는 말은 내 인생이란 것은 단독적으로 내 인생은 있고, 없고? 없고 누굴 보여주는? 예수님을 보여주는 인생 되라고 우리에게 예수님의 계시가 십자가의 계시가 복음이 우리에게 주어진 겁니다.

그렇다면 우리 인생에서 어떻게 주님의 뜻이 우리에게 다가옵니까? 아까 했지요. 부딪침으로. 근데 그 부딪침의 여파로 등장하는 게 뭐지요? 과연 성경말씀은 그게 하나의 가설이 아니고 진짜 현실은 성경말씀대로 돼가는 게 맞구나. 구름 타고 온다더니 진짜 오겠구나. 부활했다더니 정말 부활했겠구나. 십자가 진 그 피가 내 죄를 용서한다는 말이 그게 진짜 맞는 이야기구나. 성경말씀, 복음이 날이 갈수록 점점 더 생생하게 다가오기 위해서 우리로 하여금 우리 인생에 마주하면서 부딪치면서 다가오는 거예요.

그래서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예수 믿고 난 뒤에 우리가 더 착해진다고 하는데 그거는 아직도 정신이 여기에 아래층에 인간 세상에 정신이 박혀있기 때문에 그렇게 해석하는 거예요. 우리 교회가 잘되고 내가 잘되고 이런 건 없어요. 그저 예수님 잘 되면 덩달아 우리는 잘된 거예요. 예수님 말씀대로 그게 실제로 드러나면 그걸로 우리는 아주 잘된 겁니다.

그 다음에 요셉에게 다 맡깁니다. 어떻게 맡기느냐 하면 바로가 맡기죠. 여기에 38절에 보면, “바로가 그 신하들에게 이르되 이와 같이 하나님의 신이 감동한 사람을 우리가 어찌 얻을 수 있으리요” 그 다음에 “요셉에게 이르되 하나님이 이 모든 것을 네게 보이셨으니 너와 같이 명철하고 지혜 있는 자가 없도다” 그리고 40절에 보면, “너는 내 집을 치리하라 내 백서이 다 네 명을 복종하리니 나는 너보다 높음이 보좌뿐이니라”

그러니까 ‘보좌뿐’이라는 말은 높다는 말입니까, 없다는 말입니까? 없다. 이 의자뿐이다. 의자만 높을 뿐이지 실은 높은 게 아니고 ‘네가 더 높다’ 이런 뜻이에요. 갑자기 흉년, 풍년 이야기하다가 싹없어지고 바로 왕은 뭘 느낍니까? 희망을 갖죠. 왜? 까짓것 칠 년 흉년드나 풍년드나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고, 네만 있으면 그건 염려할 게 있다, 없다? 없다 이 말입니다. 이게 예수 믿는 거잖아요. 예수 믿으면 됐지 까짓것 펀드 내려가나 주식값 쪽박하나 그건 상관없다 이 말입니다.

관심사가 나라는 관심사에서 뭐로 이전 됐습니까? 주님이 어떻게 하실 거냐로 관심사가 이전된 거예요. 바로 그러한 조치조차 누구 몫이다? 하나님이 홀로 하신 몫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범사에 하나님께 감사하죠. 이런 것조차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우리가 개입해서 내가 실천에 옮길 수 있는 여지는 없습니다.

그래서 새순교회 여러분, 오늘부터 완전무장해제 되어서 내가 지킬 성경말씀은 있다, 없다? 하나도 없음을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내가 지킬 성경말씀 하나도 없습니다. 참 오늘 복음 중에 복음을 이야기한다.

괜히 내가 개입하면 어떤 현상이 일어나는 줄 압니까? 나는 그 말씀을 일 번, 최선을 다했다. 이 번, 잘 지켰다. 삼 번, 조금했다. 사 번, 잘 할 수 있었는데. 만 날 자기반성, 열댓 가지 항목 만들어서 체크한다고. 오늘은 이쪽인가? 오늘은 삼 번, 사 번. 행동은 본인과 판단하는 본인이 자기가 알아서 하는 게 무슨 성경해석입니까? 엉터리 해석이지. 자기 좋으라고 하는 성경해석이죠.

우리가 지킬 성경말씀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왜냐? 우리는 완수자가 우리는 지혜자가 아닙니다. 따라서 앞으로 인생 성공 했니, 실패 했니 하는 것도 우리 소관이 아니죠. 주님이 우리를 이끌고 가기 때문에 그 자체가 성공된 관계입니다. 성공 관계기 때문에 우리가 염려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거기서 예수님과 이별해야 되는가? ‘예수님, 수고 많이 해주이소. 나는 돈이나 벌랍니다. 고맙습니데이.’ 그만 잊어버리고 빠이빠이 선언할까요? 그때부터 우린 뭘 아느냐? 요셉이 총무대신이 되어서 우리에게 해줄 게 뭐냐를 알아가야 돼요. 이제부터.

모든 걸 요셉에게 일임했지 않습니까? 흉년, 풍년 걱정할 것 없어요. 왜냐하면 흉년이 되던 풍년이 되던 다 요셉이 요셉 되게 하기 위해서, ‘요셉이 과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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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