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11월 4일 조지래드23 그리스도인의 삶과 이웃
부산 11월 4일 조지래드23 그리스도인의 삶과 이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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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1104 래드의 성화론 고집하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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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11-04 2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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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11-12 18:01
부산081104a조지래드23신약신학-그리스도인의삶a
20081104a 부산강의 : 조지래드 [신약신학]-그리스도인의 삶
(강의:이근호 목사)
오늘은 36과 [그리스도인의 삶]
이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해서 래드라는 신학자가 여러 번 이야기했듯이 이분은 성화론을 계속 고집하는 사람이다. 그런 뜻도 보이고. 그래서 우리는 이런 분이 같은 성경을 보는데 어떻게 성화론을 버리지 않고 고집하는가?
혹시 그 사람이 속해 있던 교단이라든지 그 주위 분위기가 개혁주의적인 성화론을 유지하기 때문에 그들 말 안 들으면 추방될까 싶어서 상당히 불신의 의심을 안 좋은 신학자라고 의심 받을까 싶어서 자기 신상을 고려해서 그렇게 하는지 아니면 이런 사람이 이것저것 다 치우고 오직 성경만을 진리인 줄 알아서 성경대로 하다 보니까 ‘아, 성화론이 맞구나’해서 나온 것인지 우리가 확인할 필요가 있는 겁니다. 왜냐하면 이런 분들은 성경을 무시하면서까지 자기 자리에 연연할 사람은 아니거든요.
성경이 옳다면 비록 자기 자리가 위태롭다 할지라도 그 성경을 따라갈 사람인데 이런 분이 성화론을 주장한다는 것은 그 나름대로의 ‘‘성경을 보는 체계가 잡혔다 또는 주관이 확실하다’라는 게 있기 때문에 그럴 거다’라고 우리가 짐작합니다. 나중에 보면 없어요. 하여튼 일단은 있다고 간주하고 탐색을 해야 돼요. 오늘 36과 분량이 많습니다. 많지요? 안 읽어봤습니까?
그래서 이분이 [그리스도인의 삶]이라 해서 제목은 그래 됐는데 새 번역엔 뭐라 돼있지요? [기독교인의 생활] 쉽게 했네요. [그리스도인의 삶]이라 할 때 두 가지가 논의 되겠지요. 그리스도인의 삶이라 할 때 먼저 ‘그리스도인’이 무엇이냐를 규정해야 되겠지요. 그 다음에 그리스도인의 삶이라 하는 것은 여기 두 가지가 있지요. ‘그리스도인의 개인적 삶을 이야기하는 것이냐, 아니면 이웃에 대해서 어떻게 처신하느냐에 관한 것이냐’ 하는 겁니다.
36과 그리스도인의 삶에 보면 뭐가 빠졌느냐 하면, 이건 완전히 없지요. 이웃에 대한 삶은 없다 이 말입니다. 누가복음 10장에 보면, 그 서기관들이 성경의 핵심이 뭐냐고 했을 때 두 가지를 했습니다. 하나는 뭐냐 하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그 다음에 뭡니까?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라’고 해서 이웃이 등장, 하나님이라는 그러한 배경과 그 한 층 밑에는 이웃 층이 있어서 그 속에서 인간의 삶은 이것이 통합해서 그리스도인의 삶이 나온다. 예수님의 뜻은 이겁니다.
결코 내가 나를 쳐다보는 식의 그리스도인의 삶은, 이것은 예수님께서 설정해놓은 그 환경은 아니다 이 말이죠. 나를 날 쳐다보는 것은 주로 어디의 주특기입니까? 어느 교입니까? 이건 불교 아닙니까. 불교는 현대철학의 윤리, 도덕 이것은 주특기잖아요. 내가 얼마나 인격에 완전을 기하고 얼마나 완벽을 기하느냐 하는 것은 불교와 그리고 현대철학이라든지 심리학, 교육학에서 하는 그거다 이 말이죠.
그런데 서기관들도 그렇고 예수님도 그렇고 막상 성경을 대면 성경은 ‘내가 나를 얼마나 완벽을 기하겠느냐가 아니라 어떤 관계를 형성하느냐’ 이것이 바로 성도의 삶이 되는 겁니다. 바로 래드는 이 이웃 빠져버렸어요. 그렇다면 사도 바울이 알고 있던 그 예수 그리스도는 어디서 흘러오는 예수냐 하면,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에 나왔던 그 공생애 예수님이 사도 바울의 예수님이어야 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사도 바울이 여러 가지 이야기하는 것은 그 원형을 어디서 찾아야 돼요?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에서 찾는 것이 마땅하죠. 또 연결시켜야 되고. ‘이웃이 누굽니까?’ 물을 때 바로 사마리아 사람 이야기가 나오잖아요. 그러니까 ‘너도 이와 같이 해라. 너희도 자비를 베푼 자가 되라’ 이렇게 나온다고.
그런데 이웃과 하나님의 관계가 아니고, 그리스도인이라는 것부터 따져 봅시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이것은 하나님의 창세기 1장부터 내려오는 원류, 흐름을 계속 유지하면서 그리스도인은 언제 나오느냐 하면, 이것은 종말에 나오죠. 종말은 십자가 이후가 종말이잖아요.
고린도후서 5장에 보면, 한 사람이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다. 결국 십자가라는 것은 일단 모든 인간은 무슨 인간으로 보는 겁니까? 죽은 자로 바라보고, 죽은 자 이후에 창세기 1장에 나오는 “빛이 있으라 하니 있었더라” 하는데서 결국 무에서 뭐가 생깁니까? 무에서 유가 생기는 식으로 발생된 것이 누구다? 그리스도인이죠.
그런데 그리스도인 속에 뭐가 들어있습니까? 뭐가 폭발해야 되죠. 뭐가 폭발합니까? ‘없는데서 있게 되었다’가 폭발해야 되죠. 그리스도인이 뭘 마시든지, 먹든지 뭘 하든지 간에 항상 그 바탕은 뭐냐 하면, 없는데서 있어져서 물마시고, 없는데서 있어져서 오줌을 누고, 없는데서 있어져서 공부를 하고, 숨을 쉬고 이래 되는 겁니다.
출발을 창세기부터 하는 경우에는 이 그리스도인이라 하는 것은 무에서 유가 되는데, 그렇지 않고 출발을 어디서 하느냐 하면, 교회를 하나 지어놓고 교회 안에 들어온 사람과 바깥에 교회 안 들어온 사람을 가지고 만약에 사회적 환경 가지고 출발한다면 그리스도인은 뭐가 되겠어요? 그냥 다 같은 인간인데 교회 안 다니다가 교회 와서 그 다음에 뭡니까? 그리스도에 관한 지식으로 포장한 사람, 그 사람을 뭐로 봅니까? ‘그리스도인’으로 간주한다 이 말이죠.
그렇다면 이 사람의 삶이라 하는 것은 결국 뭐냐? 기존 사회의 삶에다가 플러스 알파하는 식으로 플러스 추가하는 식으로 뭔가 성경의 내용을 지식이 들어가는 거예요. 만약에 판사가 교회 안 나가다가 어느 날 교회 나갔다. 그 판사가 자기가 판결하는 것에 대해서 자기가 어떤 성경적인 근거를 찾을 수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답변해보세요.
자기가 판사인데 교회 안 다니다가 옆에 있는 동네 교회 처음 다녔어요. 그래서 교회에서 그 사람보고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러줬답니다. 이런 사회적 구조 속에서 그리스도인을 주장할 때 그 사람이 판사로서 법원에 나가서 행하는 것은 성경적 근거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지요. 분명히 없는데 판사가 교회에 하나 들어오면 목사가 하는 말이, ‘판사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판결하세요’ 이래 돼버리면 그 사람은 기존의 뭘 인정받는 게 돼요? 교회 들어오기 전에 자기의 판사라는 기능이 인정받게 되죠.
강의 다시 해봅시다. 성령 안에 들어오면 판사가 됐든, 의사가 됐든 그 사람은 무슨 자입니까? ‘죽은 자’가 되지요. 사회적 조건 속에서 만약에 그리스도인을 규정해버리면, 이 사람은 안 죽었는데 다만 뭐만 부족하냐 하면 성경지식이 부족했고, 교인이 안 됐다는 게 부족했다 이 말이죠. 산 사람이 교회 와서 더 훌륭하게 산 사람이 돼버렸어요. 이거는 성경적이 아니다 이 말입니다.
또 한 가지 예를 들면, 이 교회 옆에 연세 한 팔십 된 할아버지가 살고 계신데 이 사람 평소에 교회 안 나갔어요. 그런데 처음 교회를 나갔어요. ‘아이고, 어르신 오셨습니까? 돌아가시기 전에 예수 믿고 천당 갈 모양입니다.’ 이렇게 반겨줘서 그 사람을 그리스인으로 만들어줬습니다. 그럼 지금까지 팔십 년 동안 산 것은 교회에서는 어르신 대우라 하지만 성경적으론 뭡니까? 그 사람은 사실은 팔십 년 동안 살아온 게 아니고 팔십 년 동안 죽어왔죠.
그러면 진짜 팔십 넘은 노인네가 성령 받은 사람이라면 뭐라고 고백하느냐 하면, 지금 팔십 년 동안 살아온 것은 이건 죄로 말미암아 죽은 거기 때문에 내가 그리스도인으로서 나올 수 있는 것은 팔십 년 인생경험이 나오는 게 아니고, ‘나는 비로소 죄라는 걸 처음 알았습니다’라는 고백성, 이 고백성이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증인이 되겠지요. 이게 팔십이 아니고 사십도, 이십도, 열 살도 마찬가지에요.
기존 신학이 ‘교회를 어떻게 도와줄꼬?’ 이런 아이디어, 이런 발상을 하면 안 돼요. 그리고 개척 교회하는 목사들도 ‘이 동네 교회 없구나. 교회 하나 세우자’ 이렇게 하면 안 돼요. 왜냐하면 그건 전부다 사회적 환경이고 사회적 배경이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성경 속의 세계가 아니라 바깥 세계에다 성경지식을 도배를 하는 식이 돼요. 성경 하나 찢어서 온 도배해서 ‘성경 여기 있습니다, 여기 있습니다’ 도배 하는 식이 된다 이 말이죠.
제가 [오멘]이란 영화를 보면서 아주 인상 깊은 것이 뭐냐 하면, 귀신들린 사람을 낫게 한다고 신부가 온 방에다 성경을 찢어서 도배를 해놨어요. 효과 있겠습니까? 그 신부는 새 언약을 몰라요. 새 언약에 보면 도배를 해도 바깥에 도배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 마음속에 도배를 해버려요. 마음속에만 도배만 돼있는 것이 아니고, 도배된 말씀이 자생적으로 활동해서 우리 속에 있는 팔십 년, 구십 년, 열 살, 스무 살 이것을 죄로 규정하고, 죄의 삯은 뭐다? ‘죽음이다’라는 것을 그걸 소급해서, 이게 중요해요. 소급해서 지적하고 그것을 발라내야 된다하지요.
지난번에 뭐 먹었잖아요. 뼈다구 발라내잖아요. 고기 발라내듯이 발라내는 겁니다. 하나하나 죄를 다 뜯어내는 거예요. 자식 키우는 것도 죄였고, 결혼하는 것도 죄였고, 하여튼 죄 아닌 게 없었구나. 태어나는 것조차 죄였고. 모친의 죄 중에서 태어났고. 다 발라내는 거예요. 다 뜯어내는 거예요.
뜯어낼 때 정말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 다시 말해서 무에서 유가 아니라 그냥 유 있는 그대로 인 사람이 그리스도인을 볼 때 뭐로 보겠습니까? 저 사람은 우리가 주장하는 윤리, 도덕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색깔을 보여주는 거예요. 그게 뭐냐 하면, 뭐든지 죄데. 그리고 그 죄마저 용서하는 그것이 하나님 의데. 그리스도 의만 증거하는 거예요.
보통 그리스도인이 안 되는 사람은, 안 되는 사람 하니까 교인도 포함시켜야 되느냐 문제인데. 성도 아닌 사람은 윤리, 도덕 가지고 마치 제가 처음에 강의했듯이 자신이 자신을 점검해서 점점 더 발전하고 자기 인격을 도야하고 그걸 완벽히 기하려고 하는 여기에 해당되겠지요. 이것과 진짜 그리스도인이 너무 다르다 이 말이죠.
그래서 래드의 그리스도인의 삶을 이런 관점에서 볼 때 너희들은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아직도 성화론을 못 버리는지. 여기 래드가 기존에 나름대로 성경 가지고 기존 교회 성화론을 반박했어요. 줄 다 그어놨어요. 한두 군데가 아닙니다. 그런데 반박하기 전에 이것 하나 먼저 생각해 봅시다. 이건 여러분 다 아신다 하시고.
내가 행동한다면, 행동하는 자가 누굽니까? ‘나’지요. 그러면 그 행동이 옳고 그른 것을 판단하는 자가 누굽니까? ‘나’지요. 내가 날 판단하지요. 이게 말 되는 소리입니까? 동일 인물 아닙니까. 행동하는 것과 판단하는 것 동일 인물이라. 이래서 무슨 발전이 될 수 있습니까? 자기변명이고 핑계로 일관하겠지요.
주체 문제에 대해서 래드는 전혀 손을 못 쓰고 있어요. 단출한 문제에요. ‘나는 성경대로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야지, 그대로 행동해야지.’ 그대로 행동했다. 자, 행동했나, 안 했나? 누가 판단합니까? 지가 하는 기라. ‘역시 나는 성경대로 살았어.’ 그래서 누가 ‘당신은 성경대로 아닙니다’ 하면 화내고 버티고. ‘너는 죄밖에 모르느냐’고 따지고. 십자가 들이대면 ‘그런 것은 옛날에 다 뗐다’ 이러고.
만약에 래드 식으로 이렇게 성경을 보려면, 래드는 무슨 문제를 해결해야 되느냐 하면, 이 주체 문제를 해결해야 돼요. 왜냐하면 성경엔 주체란 게 없거든요. 근데 성경 바깥에, 아까 이야기하면 교회 바깥에 안 나온 사람인데, 아직 무에서 유가 되기 전에 인간은 뭐에서 뭐로 살아가느냐 하면, 주체에서 주체로 말미암아 주체로 회수하게 돼있습니다. 행동하는 것도 나고, 행동을 잘 했나, 못 했나 판단하는 것도 나고, 결국 나로부터 출발해서 행동해서 어디로 돌아옵니까? 나로 돌아오는 거예요.
이걸 간단한 도식으로 보면 이렇습니다. ‘행동한다.’ 인간은 먼저 행동하게 돼있지요. 행동하게 되면 행동함을 통해서 동사로 출발해서 명사가 돼요. 명사가 될 때 이거는 고유명사가 됩니다. 바로 이걸 나라고 직감하게 됩니다. 인간은. 예를 들면 길 가다가 ‘아, 배고프다.’ ‘배고프다’는 내가 지어낸 게 아니에요. 내 신체가 그냥 배고픈 거예요. 내 신체가 배고프면 뭘 해야 되지 않습니까? 아, 이게 잘 이해가 안 되시는 것 같은데.
예를 들어서 아내와 길을 가는데 길 가기 전에 ‘혹시 아내하고 길 갈 때 다른 예쁜 여자 있어도 내가 마음이 눈 돌아가면 안 돼’ 하지요. 그것 누가 하느냐 하면, 내가 하는 거예요. 그런데 아내하고 같이 갈 때 예쁜 여자 지나간다. 눈 맞추는 데까지 안 가지만 이~래 본다. 운전하다가도 이~래 본다. 이건 누가 보는 겁니까? 아침에 이래 본다고 작정했습니까? ‘아침에 아내하고 같이 가면서 오늘은 예쁜 여자 보면 눈 이렇게 봐야지.’ 작심했습니까? 반대로 작심했지요. 그런데 예쁜 여자에 눈이 돌아갔다. ‘아, 이러면 안 돼’ 하고 되돌렸습니다.
‘눈이 돌아갔다’는 동사 아닙니까. ‘이러면 안돼’라고 스톱됐지요. 이게 명사거든요. 그 다음 나오는 게 뭐냐? ‘역시 나는 성화되었어.’ 왜? ‘예쁜 여자 봐도 눈 안 돌릴 정도로 대단해.’ 다시 뭐로 바뀝니까? ‘나’라는 위치에서 나오는 새로운 동사를 여기서 조작해 내지요.
자, 움직인다. 그 다음에 움직임에 대해서 갑자기 어떤 사태를 만나지요. 그러면 자기가 예상 못한 사태를 하게 되잖아요. 그런데 그때 스톱, ‘내가 왜 이러지’ 하는 갑자기 내가 들어가죠. 내가 들어갈 때 이거 뭐다? 동사에서 명사가 되고, 이 명사의 주인공이 누구냐 하면, 고유명사가 된 내가 주체가 된다 이 말이죠.
주체라 하는 것은, 여러분 아침에 늘 나는, 이런 인간은 없어요. 언제 주체를 느끼느냐 하면, 흐름이 약간 스톱된다든지, 단절될 때 어떤 자기 방어라든지, 자기 신체를 사수해야 될 때 뭔가 남한테 내세울 게 있어야 된다는 게 올 때 그때 잠시 생각이 멈출 때 그때 뭐가 생기느냐? 명사로써 자아가 생기는 거예요. 이미 한 층 더 올라갔지요. 여기에 자아에 걸 맞는 부합되는 나의 나다운 새로운 행동을 내가 선택을 해서 할 거냐, 말 거냐? 이건 해서는 되는 일일까, 안 되는 일일까 판단해서 뭐 조립해내느냐? 여기서 행함을 끄집어낸다 이 말입니다.
그리고 뭘 잊어버리고? 처음에 왔던 돌발적인 나의 행함은 마치 안 한 것처럼, 그건 내 소속이 아닌 것처럼, 예쁜 여자에 눈 돌아가는 이런 일은 나한테는 아예 일어나지도 않은 것처럼. 뭐냐 하면, 어떻게 규합하느냐 하면, 어떤 일에도 착하게 산다는 이것을 규합해서 이게 어디서 도출 되느냐? 나라는 명사에서 도출된 명사를 명사답게 하기 위한 행동에 동사에 나서지요. 이 동사는 어디로 회수됩니까? 나에게 회수되지요. 이게 주체잖아요.
이 주체 끌고 가다가 갑자기 돌발적인 사태 만나면 다시 이 주체는 깨지고 뭐로 변합니까? 다시 동사로 바뀌면서 여기서 또 ‘이러면 안 되지’하고 또 명사 되고, 다시 거기서 뭡니까? 나다운 동사가 또 시작돼요.
주체라 하는 것은 없는 거예요. 이러면 주체는 누가 만들어요. 주위의 환경이 만들죠. 그걸 아시는 예수님은 그걸 두 자로 ‘이웃’이죠. 나의 나 됨은 이웃을 만나야 돼요. 그 이웃 중에 최고의 이웃이 누굽니까? 바로 예수님이고 더 나아가서는 하나님. 그 하나님이라는 이웃, 예수라는 이웃 그리고 진짜 이웃을 만날 때 ‘너는 사랑을 할 수 있느냐’ 묻는 거예요. 그것이 율법의 핵심입니다.
너라는 인간이 뭘 끄집어내느냐를 묻는 게 아니에요. 왜냐하면 ‘너’라는 게 없기 때문에 그래요. 끄집어낸다면 그건 조작된 거야. 일시적으로 조작된 거예요. 새벽기도 가서 은혜 받았을 때 그때 조작된 겁니다. 두 시간 지나고 아무 일 없었어요. 은혜 받은 것도 뭘 은혜 받았는지 기억도 안 나요. 없어질 때 그때 나는 새벽기도 때 그것하고 나는 달라졌어. 달라진 것 아쉬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왜? 새로운 사태를 받으면 새롭게 또 조립되기 때문에, 나라는 것이.
언젠가 그런 이야기했잖아요. 대중가요 가수가 예수 믿고 난 뒤에 ‘이제는 내가 두 번 다시 유행가 부르나 봐라.’ 서울 강의. 그 인간 나중에 목사 되도 유행가 불러요. 돈 벌이 해야 되니까. 밤무대 뛰어야 되니까. 고상한 지식인과 아주 그런 학식 있는 사람이 소위 티브이에 예능 프로그램 같은 것을 무시하다가 나중에 그것도 아쉬워 거기도 튀어나오는 거예요. 그때는 그때고 지금은 지금이에요. 어쩌면 그 말이 맞아요.
그리스도인의 삶이라 하는 것을 래드는 ‘여러분, 그리스도인의 삶이 바로 당신입니다’라고 고정시켜놓고 풀이했다는 게 큰 모독이에요. 성경에 대한 엄청난 오해를 하고 있는 거예요. 일단 ‘그리스도인은 이렇다’하고 하면 되는데 그게 아니고, ‘그리스도인은 바로 나다’ 가만히 보세요.
‘그리스도인의 삶은 이렇다’ 하고 성경에서 나오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소개하면 되는데 그렇지 않고 성경에서 나오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어디다 밀어붙이느냐 하면, ‘나다’부터 시작해서 나인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살 것인가? 한 군데 들리고 들어가요. 바로 성경에서 들어와 보면 그리스도인의 삶이라 하는 것은 예수님을 증거하게 돼있는데 이 그리스도인의 삶은 ‘나’라는 곳에 모으고 다시 나오다 보니까 이 그리스도인의 삶이 어디로 회수되느냐 하면, 바로 나라고 회수되고,
그 다음 더 문제점은 ‘과연 그러한 그리스도인의 삶이 성경대로의 바른 삶이냐’ 하는 판단을 누가 하느냐 하면, 나라는 것을 거쳤기 때문에 누가 합니까? 지가 하는 거라. 자기가 하는 거니까 남이 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삶이 아니고, 자기가 해야 그리스도인의 삶이라. 예수님을 증거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 믿는 나를 자기가 모델이 돼버렸어요.
그런 모델이 돼있다는 증거가 뭐냐? 그 증거 중에 하나가 대표적인 것이 뭐냐? ‘이근호, 너 잘났냐?’ ‘이근호 니가 뭔 돛대냐’ 그렇게 비난하는 자체가 뭐냐 하면, ‘나도 너보다 못지않다’는 게 있잖아요. 그럼 ‘나도 너보다 못지않다’고 규정된 자체가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게 아니고, ‘나는 너보다 못지않다’를 증거한다니까. 자기 본인 자신이 ‘나는 나 나름대로의 그리스도인의 삶이 있다’고 우김으로 말미암아 이근호 너만 잘난 게 아니란 걸 이야기할 수 있게 돼있단 말이죠.
달을 이야기하면 되는데 전부다 손가락 다 끄집어내는 기라. ‘네 손가락만 좋은 손가락이냐, 내 손가락도 괜찮다’ 이래 되는 거예요. 그래놓고 성화에 대해서 뭐 안다 이래 되고. 역시 래드도 포함해서 마찬가지고. 인간은 죽을 때까지 자아라는 굴레를 못 벗어나는 겁니다. 그리스도를 증거하라 해놓고 만날 그리스도를 아는 자기 자신을 증거하는 이걸 못 벗어나요. 그걸 철저히 규명을 해줘야 되는데 항상 뭔가 감추는 게 있어요.
그렇다면 이 래드가 기존의 성화론에 대해서 자기가 나름대로 벗어났다고 우기는, 안 벗어났어요. 절대로 안 벗어났어요. 왜 안 벗어났느냐 하면, 그 끝부분에 나옵니다. ‘서술과 명령’으로 둘로 구분 돼있어요. 서술과 명령으로 구분하면 이거는 기존의 성화론하고 똑같은 거예요. 아무리 자기가 아니라고 앞에서 수차례 다짐에 다짐을 했지만 자기가 내세우는 게 뭐냐? ‘사도 바울은 서술과 명령으로 돼있다’ 이렇게 주장한다면 그것은 천주교에서 웃습니다. ‘나하고 똑같다’ 이럽니다. 그리고 유대교에서 웃습니다. ‘기독교 해도 별 것 아니네. 우리 품 안에 있네’ 이래 됩니다.
그러면 제가 래드를 편들어서 래드가 주장하는 대로 가봅시다. 일단 가 보고 그것이 어떤 한계에 도달 되는가 봅시다. 여기 그리스도인의 삶, 첫 번에 위에서 다섯 번째 줄에 보면 이렇습니다. [바울은 윤리에 관하여 어떠한 체계도 정립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즉시 드러나야 된다.] 이 말은 뭐냐? 래드의 주장에 의하면 바울편지를 통해서 그리스도인의 윤리는 이렇다고 주장하기가 모호하다 이 말이에요. 왜?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인의 윤리를 정립하기 위해서 편지 쓴 게 아니기 때문에’ 하는 주장합니다.
그 다음에 그 다음 페이지 끝에 보면, [사상의 원천] 바로 위에 보면, 이 사람이 자기주장을 다음과 같이 분명하게 결론적으로 내리고 있습니다. 결론이 나중에 있지만 처음부터 결론 내리고 있어요.
[성도의 삶이란,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그리스도 안에서 이뤄지는 새로운 삶이 스스로 어떻게 나타나야 하는가를 설명하기 위해서 바울이 역사상에 구체적인 상황들을 집착한 당부에 불과하다.] 이 말 맞지요. 그리스도인이라 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이 얼마나 대단하냐가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삶 속에 그 다음에 새로운 삶이, 그 다음이 중요합니다. ‘스스로’ 스스로라 돼있습니까? 번역에. 읽어보세요.
[그것들은 오히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 생명이 어떻게 자신을 나타내야 하는가를 설명하기 위해서] ‘스스로’가 빠졌어요? 어떤 게 맞는지. ‘스스로’라는 게 굉장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스스로’란 말이 왜 중요하냐를 설명해드릴게요. ‘스스로’란 이 번역이 이창우 씨의 번역이 맞는지 신성종, 이한수 씨의 말이 맞는지 모르겠는데.
‘스스로’가 왜 중요하냐 하면, 인간의 주체는 반드시 외래적인 것과의 조우, ‘조우’란 뜻이 뭐예요? encounter, 만남이죠. 인간이란 주체는 외래적인 것에 대해서 조우해서 이것을 자기 주체를 새롭게 조립하게 돼있습니다. 그런데 만약에 여기서 성도 안에서 하나님이 ‘스스로’ 일한다면 반드시 뭘 이야기해야 되느냐 하면, 인간의 주체가 나름대로 새로운 주체를 만들어간다는 진화의 과정, 스스로의 발전의 과정을 뭔가 외래적인 것을 부정시키는 그 작업에 대해서 사도 서신을 통해서 언급을 해줘야 된다니까, 이게. 그렇지 않습니까?
보통 목사님들 설교할 때 언급합니까? 보통 언급하면 뭐라고 합니까? ‘상당히 부정적으로 설교하십니다’ 이래 되죠. 말을 못하는 기라.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슬쩍 넘어가려고 해요.
지금 사람들이 주체가 뭐냐? 래드는 전혀 주체를 안 하니까 제가 이야기를 다 해야 되는데. 목사한테 설교를 듣던 누구한테 성경을 보던 하면, 성경을 외래적이잖아요. 자기의 고유가 아니잖아요. 왔을 때에 나름대로의 인식론을 가지고, 말이 좋아서 인식론이지, 이건 뭐냐? 골라, 골라잡는 거예요.
여러분, 신문에 쫙 기사 나와도 골라 보잖아요. 뉴스 나와도 자기한테 관련된 것만 기억이 나잖아요. 어디 교통사고, 음주 운전했다하면 ‘음주 운전했구나’ 이래 되지만 음주 운전했는데 그 중에 자기 아는 사람 이름 나오면 갑자기 그 뉴스 보고 또 보고 합니다. 왜? 자기가 관련돼 있잖아요. 자기가 아는 사람이 음주 운전, 사고가 났다 이 말입니다. 사람이라 하는 것은 결코 진리에 관심이 있는 게 아닙니다. 사람은 사실에 관심 있어. 어려운 말이다. 사실에는 관심이 있지만 진실에는 관심이 없어요.
목사가 교인이 몇 주 빠지니까 ‘요새 집사님 왜 자주 안 나오십니까?’ ‘아이고, 바빠서.’ 이거 뭐예요? 사실이죠. 근데 교회 나와서 성도와 더불어 하나님께 영광 돌린다는 진실은 사실이 급해서 뒷전이라. ‘악플 단다. 속상하다.’ 분명한 현실입니다. 맞지요. 사실이죠. ‘자살한다.’ 이거는 진실은 아니잖아요. 제 말이 무슨 뜻인지 아시겠죠. 사람들은 사실에는 관심이 있지만 진실에는 관심이 없어요.
그리고 인간 외부에 있는 진실이 내부에 올 때는 내부의 사실이 뭐로 변하느냐 하면, 이게 진실로 변해 있습니다. 이게 독이에요. 이렇게 되면 뭐가 생기느냐 하면, 여기서 우상이 발생돼요. 내가 내 성공을 위한 진실이에요. 내 성공을 위한 예수가 목사 설교를 어떻게 하든 그걸 전부다 추려서 골라잡아 나를 편하게 하는 나를 위한 신이 되는 거예요. 나한테 손톱만큼도 나를 건드리면 안 돼. 나를 상처내면 안 돼.
그래서 처음에 제가 설교하고 할 때 오해를 많이 했죠. 박사교회 있을 때. ‘목사님, 참. 은혜 많이 받았습니다.’ 은혜 많이 받았는 줄 알았지요. 나중에 보니 자기 나름대로 내가 모르는 사정이 있었어요. 제가 설교할 때 성경의 진실을 이야기했는데 그 사람은 그걸 사실로 받아들였어요.
분명히 이야기합니다. 세상의 진실은, 내가 곧 진실이요 길이요 생명이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있어도 진실로 충분합니다. 내가 아프거나 내가 배고프거나 내가 지금 죽어도 그것으로 인하여 진실은 훼손되지 않습니다. 절대로 훼손되지 않습니다. 그것하고 진실은 전혀 손해될 수 없어요.
제가 지난, 지난 오후설교하면서 제가 은혜를 받았어요. 뭐냐 하면, ‘내가 죽고 난 뒤에도 하나님 일은 내 죽은 휑하니 빈 자리에도 주께서 여전히 일한다’는 겁니다. 왜 그걸 진작 내가 살아있을 때 모르고 있었느냐 이 말이죠. 마치 내 중심으로 돌아가는 것처럼 왜 자꾸 착각하느냐 말이죠. 나 하나 꺼져버려도, 나 하나 사라져도 주님은 아무 탈 없어. 그대로 구원의 일을 하고 있는데 단지 이 시대에 내가 있다는 이유 때문에 일방적으로 주님의 일을 내 쪽으로 강제로 편입시키려는 이 무모함, 얼마나 죄악이 큰지.
목사들이 하는 오해 중에서 제일 많은 오해가 이런 겁니다. 교인 하나 안 나오면 분명히 내 설교에 삐졌다고 오해를 하는데 나중에 들어보면 삐진 게 아니고, 자기는 딴 볼 일 보고 있었는데 목사 혼자 생각이 복잡해. ‘삐졌을 거야. 그래서 안 나왔을 거야.’ 혼자. 나중에 보면 아무 일 없는데, 아무 걱정 안 해도 되는데.
외부의 진실이 내부에 들어올 때는 여기에서는 바로 인간이 자체적인 인식론 가지고 골라잡아서 그걸 진실을 사실로 바꾼다는 이 작업을 공격하고 부정하고 정죄하는 식으로 와야 되는 겁니다. 그게 이 책에서 또 부족해요. 래드 책에 또 그게 없는 거예요.
이 사람은 틀은 맞아요. 앞서서 읽어봤잖아요. 기독교 윤리라는 건 따로 없다. 사도 바울이 기독교 윤리 쓸려고 한 게 아니고, 이거는 우리 내부에 하나님이 어떻게 일하는가, 그걸 분명히 맞는데 부정적인 왜 안 들어가느냐 말이죠. 왜 안 들어갈까요? 십자가를 건너뛰어서 그래요. 십자가를 피해가서 그래요. 우회해서 돌아가 버린 거예요.
예수님은 십자가를 들이댔는데 사도 바울은 모든 걸 십자가 들이대거든요. “나는 그리스도와 십자가에 못 박힌 것 외에는 알지 않기를 원하노라” 고린도전서 2장 2절. 그 2장 2절을 가운데 두고 ‘알지 않기를 원하노라’ 해놓고 나머지 이야기 많이 했다고, 사도 바울이. 그 말은 뭐냐? 그게 중심이란 말이죠. 왜? 그것은 바로 비밀이기 때문에 그래요. 우리가 알 수 있는 비밀이 아니고, ‘비밀’이라 하는 것은 비밀 쪽에서 한두 번이 아닙니다. 계속해서 영원히 알려 줄 때만 알려지는 것이 비밀이거든요.
십자가를 우리가 덥석 삼키는 게 아니에요. ‘뭐가 딱 왔다’ 이게 아닙니다. ‘십자가 다 뗐다’ 이게 아닙니다. 십자가는 직접으로 주체가 돼요. 우리는 객체가 되서 십자가를 조금씩 알게 할 때만 우리는 오히려 삼킴을 당하지요. ‘아하, 십자가 여기까지 알았네.’ ‘아이고, 십자가 그런 깊은 뜻이. 여기까지 알았네.’ 점점 십자가가 우리를 삼켜 나갈 때 그때 우리는 모든 것이 나에게 회수되는 것이 아니고 어디로 간다? 이런 진실 안에서 십자가 쪽으로만 회수가 된다. 이게 마태, 마가, 누가에 나오는 공생애에 나오는 예수님의 모든 말씀의 취지잖아요.
떡을 뗀다. ‘또 떡을 떼 줄까?’ 물 위를 걸었다. ‘또 물 위를 걸을까요?’ 물고기 아가미 벌리니까 동전 있다. 그럼 그때부터 제자들이 아가미 돈 있는 것 다 끄집어냈습니까? 안 했지요. 그건 전부다 일회성이죠. 그 ‘일회성’이란 의미가 뭐냐? 일회성을 여러 번 해도 그거는 다회성이 아닙니다. 맨 일회성입니다.
그 일회성적인 말씀과 일회성적인 기적들은 결국 뭘 이야기하느냐 하면, 모든 세상의 비밀은 일회성 있는 사건에 의해서 감춰져 있고, 그 일회성 있는 사건에 의해서 비로소 공개된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 일회성 사건이 뭡니까? 십자가 아닙니까. 사도 바울이 그 이야기하는 거예요. 갈라디아서 3장 1절에서. “십자가가 눈앞에 보이는데 누가 너희를 꾀더냐?”
그런데 오늘날 목사들과 교인들은 십자가를 중심으로 보지 않고 십자가를 신약에 나오는 여러 가지의 항목들로 쭉 늘어놓고 언약도 나오고, 율법도 나오고, 땅 개념, 하늘 개념 쭉 나오고 골라잡아 바구니에 담는 식이라. 담는 건 좋아요. 그렇게 담을 때 어떤 취지로 도대체 무슨 취지로 담느냐 말이죠.
그게 바로 나름대로의 사실을 나름대로의 진실로 바꿔놓은 가짜 신이 들어있기 때문에 이 가짜 신에 의해서 외부에 있는 것을 자기 임의대로 자기의 선택에 의해서 만들어서, 만들어서 그 다음에 뭐 할 건데? 만들어서 자기가 원하는 주체를 다시 한번 재조립하는 그런 일에 지금 완전히 매진하고 있습니다.
제가 여기서 다시 정리하면, 주체는 없습니다. 주체는 그때그때마다 조립됩니다. 그 조립의 주체자가 누구인지는 자기가 몰라요. 항상 자기는 누가 주체자냐 하면 자기가 조립한다고 보는 거예요. 주님을 달리 봅니다. ‘우리 안에 마귀 있다.’ 마귀가 주체를 조립할 때는 예수 그리스도를 배제하는 방향을 성향을 띠고 조립하는 것입니다. ‘나는 죄인입니다’라는 것을 피해가는 식으로 조립하게 됩니다. 마귀가 그렇게 시켜요. ‘예수보다 네가 더 중요해, 임마. 예수는 들러리야. 네가 중요한 거야. 교회 와도 네가 중요해.’ 그걸 우리 내부에서 그렇게 끼어들죠.
그러면 성령을 받은 사람은? 우리도 그래요. 성령 받은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중요해’라고 할 때 성령 받은 사람은 성령이 어떻게 합니까? ‘그래서 너 같은 인간을 위해서 죽었다’라고 십자가를 다시 한번 보여주지요. 이게 감추어진 십자가란 비밀이 자꾸 조금씩, 조금씩 공개되면 될 수록 나는 점점 죄인이 되가는 거예요. 점점 더 죄인으로 드러나는 거예요.
내가 알고 있던 사실은, 사실이 아니라 이 사실은 허망한 것이다. 현실이 아니다. 내가 죽고 난 뒤에 이근호란 인간을 장례 치러서 한 사나흘 지났다. 그러면 내가 읽었던 줄그었던 책도 모든 내 옷가지들도 다 불 태워 없는 거예요. 처음부터 우리는 무였어요.
사람이 시체 죽을 때 보세요. 여덟 시간만 지나면 시체에서 벌레 생기죠. 왜 벌레 생기느냐 하면, 인간의 혈액이 응고되면 그게 당으로 바뀌어요. ‘당’이란 말은 뭔 뜻입니까? 맛있다는 거예요. 그 당을 맛있게 먹는 벌레들이 기어오릅니다. 그래서 사람 죽고 난 뒤에 구멍이란 구멍은 다 막아버려요. 윗구멍, 아랫구멍 다 막아버려요. 안 그러면 벌레 기어 나오기 때문에. 옛날에는 그것을 짚으로 둘러쌉니다. 냄새가 인간 썩은 냄새가, 피부가 다 뜯겨나가게 돼있어요. 내부에서 쏟아져 국물이 다 나오지요. 피부는 누렇게 뜯게 나가지요. 바이러스는 때를 만난 듯이 활동하지요. 박테리아들은.
왜 사람 썩은 게 그렇게 냄새가 지독하냐 하면, 염분이 많기 때문에. 요즘 다행스런 것은 비닐봉지가 나와서 비닐봉지로 싸서 아주 엄숙하고 고결한 장례식처럼 보이지만 그걸 짚으로 둘둘 쌌다고 보세요. 인간은 뭡니까? 벌레의 아지트였습니다. 그게 인생입니다. 부자, 판사, 의사 뭐, 변호사? 소용없습니다. 그것이 인생입니다. 목사, 집사? 아무 차이 없어요. 죽은 송장에 트릭이 없어요. 송장에는 속임수가 없습니다. 송장은 정직해요. 본래로 돌아가는 무로 돌아가는 허망하기 짝이 없는 거예요.
그런 송장을 위해서 주님을 거론하고 하늘을 거론하고 지 마음대로 해석했어요. 그리스도인의 삶? 삶 같은 소리하고 있네. 죽는 게 삶이에요. 내가 송장되는 이게 멋진 기준이에요. 하나님의 십자가에서 나온 능력이 나 죽는 거예요. 다시없는 자로 죽는 게 놀라운 주님의 사랑이 되는 겁니다.
그동안 내 주체는 두 분이에요. 한분은 예수님이었고, 다른 주체는 악마였어요. 주님께서 악마를 이겨서 나를 조립해서 천국 보냈어요. 아주 간단한 방식이죠. 베드로가 말하기를 ‘제가 죽기까지 따라가겠습니다.’ ‘베드로야, 너 모르지. 마귀가 널 꼬시려고 널 잡아먹으려고 지금 밀 까부르듯이(이 말은 골라내는 거죠) 선별작업에 너는 포함되었어. 내가 만약에 너를 위해서 기도하지 않으면 마귀와 함께 지옥 가야 돼.’
주님의 선별작업이 마귀란 주체의 선별작업보다 더 우세합니다. 그래서 여러분 교회에 교인들 몇 명이든 오거든 고마운 줄 아시기 바랍니다. ‘아이고, 송장. 오늘도 고맙게 오셨네.’ 바로 복음의 능력 받으라고 하나님께서 부족한 날 세우고 전하고, 그분은 듣게 해서 자신이 죽고 난 뒤에 상황을 자신의 사실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뭐가 중요하다? 진실이 중요하다는 것. 진실이 사실이라는 이게 진짜 사실이다. 이것 외에는 주님이 바로 사실이다.
그런 감추어진 비밀을 볼 수 있는 눈의 통로, 유일한 창구가 뭐냐? 십자가밖에 없습니다. 왜? 십자가라야 우리가 완전 부정당하니까. ‘너 대신 내가 죽었어. 너는 죽어야 돼’ 하는 것을 지적하는 손가락은 바로 십자가 외에는 다른 손가락은 없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난 십자가 다 뗐다. 그건 지나간 거고.’ 그런 이야기 왜 하려고 합니까? 그건 바로 성화를 주장하려 하지만 그건 핑계고, 사실은 뭘 주장하기 위해서? ‘나는 내가 주체다. 나는 내가 믿는 것은 나밖에 없다’ 하는 것을 강력하게 외치기 위해서 그렇게 한 겁니다.
그 다음에 중요한 게 뭐냐 하면, 바로 ‘자유’ 문제입니다. 이 자유문제에 대해서 또 래드는 빼먹고 있습니다. 자유문제에 대해서 감간 생각해 봅시다. 여기 [동기부여]라 하는 것 찾았습니까? 거기서 일곱 번째 위에 제 번역 읽어 볼 테니까 찾아보세요. [바울의 윤리적 사상이 가능한 원칙들에 대해서 지금까지 살펴 본 이러한 수많은 결론들이 등장하고 있다. 바울은 결코 형식주의자가 아니란 것이 명백한 사실이다. 그는 구약의 율법을 윤리에 관한 새로운 기독교의 법전으로 대치하고자 시도하지 않는다.] 찾았습니까?
이걸 보면 래드가 하는 말이 뭐냐 하면, ‘구약에는 법이 있듯이 신약에도 법이 있는데 그 법대로 살아야 된다’라고 주장하는 사람을 완전히 반박하죠. 구약의 율법에 매인 채로 신약에도 사도의 권면이라든지 이런 법을 새로 조립해서 만들자. 이거는 있을 수 없다고 주장하는 거예요. 이걸 보면 성화론 아닌 것처럼 보여요.
그렇다면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생명이라는 측면에서 해석한다. 새로운 생명을 보여주기 위해서 사도 바울은 여러 가지 권면이나 명령을 이야기한 것이지 결코 새로운 권면이나 명령 줘서 ‘이렇게 살아야 구원받습니다’ 하는 식은 아니라고 래드가 이야기하고 있다 이 말이죠.
그렇다면 이 사람의 주장에 의하면 사랑이라는 게 뭡니까? 사랑은 어디에 해당되지 않습니까? 사랑은 법에 해당되지 않지요. 그럼 로마서 13장에 나오는 것처럼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가 있지만 그 중에 무엇이 모든 걸 다 이루었다? ‘사랑함으로 모든 걸 이루었다’ 해서 사랑이 법은 아니라 했습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이라든지 이런 데 보면 “서로 사랑하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서로 사랑하라면 이거는 법이 아니라 했으니까 서로 사랑하라면 이건 법으로써 해결할 순 없지요.
법이란 것은 항상 우리 외부에 있어서 외부에 있는 법이 내부에서 법을 하려면 나에게서 뭐가 나와야 돼요? 여기서 ‘지킨다’가 나와야 돼요. 지킨다가 나오려면 지키려는 나의 행동의 주체가 있어야 되죠. 그것은 뭡니까? 나라는 주체자가 있어서 누가 지킨다? 옆 사람이 지키는 게 아니고 남이 지키는 게 아니라 누가 지켜야 돼요? 내가 지킬 때만 이 법은 내 안에 쏙 들어온다 이 말 아닙니까.
그렇다면 이게 법인데 사랑이 법이 아니라면 그럼 이 사랑이 우리한테 어떻게 구현된다는 말입니까? 여기서 이 사도 바울은 단어는 몇 개 썼어요. 단어 한 개 딱 나오고 중요한 것을 이 책에서 놓치고 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자유’란 거예요. 사도 바울은 바깥에 있는 사랑이 우리한테 들어올 때는 법은 아니란 거예요. 법은 아니라면 어떻게 들어오느냐 하는 문제에 있어서 사도 바울은 뭘 제시했느냐 하면, 자유를 이야기했다고. 무슨 뜻인지 아시겠습니까? 사도 바울의 편지에 그렇게 돼있어요.
자유는 결국 뭐에 포함되지 않는다? 자유는 법에 포함되지 않는 방식이 자유 방식이다. 그러면 그 자유는 어디서 벗어난 자유여야 돼요? 법에 매이지 않는 억매이지 않는 법에서 벗어난 자유, 그 내용이 과연 무엇이냐? 그거는 십 분 쉬고.
우리교회(IP:220.♡.176.150)
08-11-12 18:03
부산081104b조지래드23신약신학-그리스도인의삶b
20081104b 부산강의 : 조지래드 [신약신학]-그리스도인의 삶
(강의:이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 시작합시다.
[성화]라는 게 있어요. 위에 성화란 제목 밑에 열 번째 줄에 보면, [성화란 도덕적 성장과 동의어, 같은 말이 아니다.] 이 말을 래드가 하는 이유는 ‘성화를 마치 도덕적 성장론에 같은 것이라고 생각해서 성경을 해석하는 사람들은 잘못됐다’ 이 말입니다.
그건 왜 그러냐 하면 그 다음 페이지에 보면, [성화라 하는 것은 윤리적인 측면을 포함하고 있지만 윤리적 측면이 중요한 건 아니다.] 그럼 뭐가 중요하냐? ‘하기오스’ 구약의 거룩함을 입은 자로 간주되고 있다는 사실이 있어요. [성화는 윤리적 행위의 성장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구속의 진리를 나타내는 것이다.] 이 말은 맞는 말이죠.
그런데 이 말이 맞는 말인데 거기다가 종말론 바로 위에 보세요. 열다섯 번째 위에. [성화는 보편적인 신앙생활 자체를 가리키는 용어가 아니라 그가 살고 있는 사회의 범람하고 있는 죄악들과 대조적으로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께 헌신을 드린다는 의미에서의 용어다.] 그 다음에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중요할 사항은 서술과 명령 사이의 긴장인데 성화는 실제적으로 과거에 일어난 사건이다(서술). 그러므로 성화는 지금 체험 돼야 된다(명령).] 이래 돼있지요.
지금 래드는 ‘서술과 명령’을 나누고 있고, ‘서술’을 사건으로 보고, ‘명령’을 체험이라. 래드가 이야기하기를 뭐냐 하면, 사도 바울은 뭐라고 이야기하느냐 래드가 주장하는 것은, 사도 바울은 사건을 이야기할 때는 서술적으로 이야기하고 그 다음에 ‘그 사건이 과연 체험 되십니까’라고 말하는 대신에 뭘 말한다? 명령으로. 뭘 ‘하라’ 뭘 ‘하지 말라’는 명령으로 이것을 썼다는 거예요.
아마 래드가 이렇게만 이야기해도 개혁주의 주장하는 사람에게 맞아죽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 그럼 왜 ‘이것을 체험하시오’ 하지 않고 명령하느냐 거기에 대해서는 래드는 답변을 못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서술이라는 것과 명령을 이왕 나눴기 때문에 이것을 명령을 서술로 포함시킨다든지, 서술을 명령에 포함시키는 그럴 의사가 전혀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면 이 사람이 서술을 명령, 명령을 서술로 왜 포함을 못 시키느냐? 이 사람은 어느 정도 실력이 그만큼 안 돼있어요. 그 안 된 사람 중에 한 사람이 누구냐 하면, 로이드 존스의 설교집 보면 나오잖아요. 에베소서 강해 보면 뭐가 나옵니까? 이렇다, 이렇다 해놓고 뒤에 ‘그러므로’ 나오면 이건 뭐냐 하면, 로이드 존스 목사님은 뭐라고 합니까? ‘성도가 이러하기에 우리는 이렇게 살아야 된다’라고 하죠.
그런데 래드 책에 봐도 그 로이드 존스 스타일하고 똑같은 게 또 나와요. 분명히 그래 나와 있잖아요. 그렇게 돼있고 하는 말이, 방금 이야기했던 그 대목 앞 페이지에 보면 이래 나와 있어요.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것은 부정케 하심이 아니고 거룩하게 하시기 위함이라.] 나와 있고, 그 위에 다섯 번째 보면, [성화는 성령의 사역이지만(데살로니가후서 2장 13절) 또한 인간의 응답을 포함하고 있다.] 찾았습니까? 그 비슷한 이야기 있지요.
그러니까 방금 이야기한 걸 이렇게 종합해서 보면, 래드가 하는 이야기는 무슨 이야기냐 하면, 성화라 하는 것은 성도가 존재하고 있는 바깥세상과의 차이 나는 면인데, 그 차이 나는 면을 어떤 면에서 그들이 비윤리적이고, 그들이 비도덕적이기 때문에 그들과는 월등하게 차이 나는 윤리와 도덕적인 모습을 보여야 되고, 그것을 래드는 뭐라 하느냐 하면, 삶의 모습, 삶의 모양새라 하는 겁니다.
그렇게 주장하려면 왜 서술과 명령을 나눴느냐? 그 이유는 차이 나는 거룩한 삶을 보여줘야 되는데 그러면 ‘서술만으로 부족했던가’ 하는 겁니다. 서술만으로 부족해버리면, 명령을 지워버립니다. 서술만으로 바깥세상과 다른 성도의 차이 나는 그 면을 보이는데 뭔가 미흡하다고 보는 거예요. 래드는.
왜냐하면 고린도 교회 같은 경우에 서술만으로 성도라 우기지만 실은 세상사람 못지않은 방종과 죄와 더불어 사는 사람이 있기 때문에 여기서 뭐냐 하면, 정말 당신이 서술적으로 십자가 사건에 그리스도의 성령을 받은 사람이라면 여기에 뭘 추가시키느냐 하면, 명령을 추가시켜서 진짜 성도다운 그런 체험을 ①보이라는 말인지, ②없는 실천을 하라는 말인지 이게 모호하단 말이죠.
체험을 보이란 말인지, 아니면 아까 처음에 보면 ‘스스로’ 하는 걸 보면 보이란 쪽이 강한 것 같은데 나중에 명령에 강조한 걸 보면, 이거는 체험을 만들어내라. 이런 것을 실행에 옮겨라 하는 쪽에 무게를 두는 쪽으로 지금 이야기가 전개되고 있어요. 래드 주장에 ‘이것이 바로 사도 바울이 권면했던 본 취지다’ 확신을 가지고 생각합니다.
그 뒤에 종말론 하는 대목에 보면, 바울은 보상이란 이야기 나오고, 여기에 종말론을 끄집어낸 이유가, 종말론 제목 바로 밑에 중요한 문장 하나 나옵니다. [행위에 강한 영향을 주는 또 다른 용기는 종말적이다.] 여기에 번역 한번 읽어보세요. [행위에 영향을 미치는 또 다른 강한 동기는 종말론적인 것이다.] ‘또 다른’ 돼있지요.
자, 그렇다면 종말론이 사실은 핵심이 되는 게 아니고 갖다 붙여야 될 또 다른 하나의 사도 바울의 그리스도인의 삶의 동기로써 덧붙여야 된다 이 말 아닙니까. 종말론 빼면 뭔가 미흡하단 뜻이고, 종말론 말고 다른 건 놔두고 그쪽도 미흡하단 뜻이고, 뭔가 덧붙여야 될 필요성이 있다는 거예요.
래드가 이런 주장을 하는 것을 제가 이해는 하지요. 왜냐하면 ‘긴장’을 처음에 그 사람이 종말론 되기 전에 긴장은 무슨 긴장입니까? ‘서술과 명령’이란 긴장 있고, 또 하나의 긴장은 뭐냐? ‘이미와 아직’이란 긴장 이 두 가지를 합쳐서 뭘 설명한다? 사도 바울이 이야기했던 그리스도인의 삶을 설명해야 완벽을 기한다. 그렇게 보는 겁니다.
방금 쭉 이야기한 것은 이 책에 충실하기 위해서 이 책의 핵심은 뭐냐? 그걸 뽑아내기 위해서 이렇게 했습니다.
그렇다면 종말론에 관해서 ‘이미와 아직’을 종말론적 관점을 그리스도인의 윤리 또 그리스도인의 삶으로 끄집어내는데 여기에 동원되는 구절들이 뭐가 나오느냐 하면, 사회윤리, 절제, 분별, 악덕 그 다음에 재미있는 것이 여자, 결혼 그 다음에 노예제도. 이걸 종말론 항목에다 집어넣는 겁니다.
그 사람은 왜 그렇게 했느냐 하면 아직도 노예에 대해서 묻는 시대가 지났잖아요. 아직도 여자가 머리에 뭘 써야 되느냐 그 문제 아니다 이 말이죠. 그 문제는 지나갔잖아요. 성경대로 하려면 여자 머리에 써야 되고 이래 되잖아요. 그런데 지금은 그런 문제 따질 게 아니다. 결혼문제 같은 경우에 결혼을 하느냐, 마냐. 결혼이 좋으냐, 나쁘냐 그런 문제. 그런 것은 종말론적으로 처리하겠다 이 말이에요.
그런데 윤리, 도덕에 대해서 전체에 대해서 이렇게 돼버리면, 래드가 결국은 뭘 주장하게 되느냐 하면, 아까 ‘성화론은 도덕적 성장이 아니다’ 하는 것이 이게 마찰된다는 것이 본인이 몰라요. 왜냐하면 ‘명령대로 행했다, 안 했다’로 나가버리면, 명령이니까, 명령은 법이잖아요. 명령이 들어와 버리면 어떤 경우가 되느냐 하면, 일번, 못 지켰다. 조금 지켰다. 삼번, 최선을 다했다. 여지간이 지켰다. 완벽히 지켰다. 이런 수준을 누가 판단해요? 주체인 내가 판단할 수밖에 없어요. 이 명령에 대해서.
서술은 일단은 구원받은 것은 알겠는데 구원받고 난 뒤에 체험을 어느 정도 해야 되느냐? 명령을 많이 수행하면 많이 체험되고, 명령을 안 따르면 적게 체험되느냐 하는 문제. 이것은 정말 논리의 기본도 안 된 사람입니다. 체험이라 하는 것은 명령으로 되는 게 아니에요. 생각해 보세요. 체험이 우선이고, 명령은 들러리에 지나지 않는다니까. 인간의 체험이라는 게. 모르겠습니까?
난로가 있다 합시다. 난로가 뜨겁다 할 때 ‘아이고, 뜨거워라’ 할 때 ‘뜨겁다’는 것을 언어로 어떻게 표현합니까? 표현할 방법이 있어요, 없어요? 방법이 없어요. ‘미지근하다’, ‘뜨뜻지근하다’ 어떻게 표현해도 그 ‘뜨겁다’는 것을 언어로 표현을 못 합니다. 하물며 명령으로 ‘뜨거워라’ 이건 말이 안 되고. 그러니 ‘이미 있는 체험을 보이라’ 하는 명령에 해당이 안 됩니다.
결국 남는 건 뭡니까? ‘명령을 수행하게 되면 성도의 삶의 본질을 체험하게 될 것이다.’ 이렇게 밖에 안 되지요. 결국 이게 남아요. 그래 된다면 이것은 뭐냐? 명령을 만약에 수행 안 하게 되면 전혀 체험은 미진한 상태, 보류된 상태로 남게 돼요.
그렇게 되면 뭐가 되느냐 하면, 예수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믿음+행함으로 보태야 구원받는 게 됩니다. 왜냐하면 구원이라 하는 것은 바로 말없이 한없이 감사하고 한없이 감격스러운 것이거든요. 근데 감격하다, 감사하다는 그것을 여기다 명령을 지켜야 그게 나온다면, 결국은 이거는 감사와 감격의 명령의 수행자인 지체, 자기의 주체를 증거하는 것밖에 안 된다 이 말이죠.
계속 제가 자유의 이야기를 미루고 있죠. 조금 있다 할게요. 지금 이 사람부터 이야기할게요. ‘자유라는 개념이 없을 때 어떤 오류에 빠지는가’ 제가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종말론, ‘이미-아직’ 이거는 문제가 더 큽니다. ‘이미-아직’이란 말 자체가 성립이 안 되고. 같은 노선에서 ‘이미-아직’이 성립이 안 돼요.
대전 다음에 대구 아닙니까. 대구 왔으면 대전 지나온 거예요. 그리고 대전 왔으면 대구 아직 안 온 겁니다. 이 같은 선상에서 뭐가 한 지점이 어떻게 ‘이미’가 될 수 있고, 어떻게 ‘아직’이 될 수 있습니까? 그리고 선이 두 개 여야지요. 어떤 선이? 위에서 내려온 선 같으면 ‘이미’가 되겠고, 저 밑에 부산서 올라온 선 같으면 ‘아직’이 되겠지요. 그러면 이 사람은 한 선에 있는 것이 아니고 몇 선이 있어요? 두 선에 있는 거예요.
인간 속에 두 선이 있다는 말은, 결국은 뭐냐 하면, 어느 선이 구원받을지 아직까지 ‘미확정적이다’ 이 말입니다. 일번 선에서 이번 선으로 갈아타야 구원되는 것인지, 일번 타고 내려가면 구원되는 것인지, 일번에서 이번으로 연결되는지, 일번에서 이번으로 연결돼버리면 두 선에서 뭐로 바뀝니까? 한 선으로 바뀌지요. 바뀐 상태에서는 ‘이미-아직’은 성립되지 않지요.
래드는 ‘이미-아직’을 이야기하면서 결혼문제에 대해서 끄집어냈어요. “아내 있는 자는 없는 자같이 하라” 할 때 ‘아내를 귀하게 여겨라’ 해놓고 이 말도 사도 바울처럼 ‘아내를 귀하게 여겨라’ 마치 예수님이 누구를 위해서 목숨을 바친 것같이? 교회를 살려준 것같이 귀하게 여겨라. ‘라’가 나왔으니까 서술입니까, 명령입니까? 이거 명령이잖아요. 명령인데 아내 있어도 없는 것같이 하라. ‘하라’ 또 ‘라’ 명령 나왔잖아요. 그러니까 아까 이야기한 서술과 명령 사이의 긴장이 아니고, 명령과 명령 사이의 긴장이라니까.
또 있지요. “너희들이 사기를 당해도 그냥 참아라.” 왜? 너희들은 천사도 판정하는데 차라리 속는 것이 낫지 아니하냐. 한 마디로 말하면 뭡니까? 차라리 속고 살아라. 제가 지금 뭘 이야기하느냐 하면, 명령과 서술은 절대로 분리될 수 있는 게 아니란 말이죠. 명령으로 모으든지, 서술로 모으든지 사실은 결과가 똑같은 거예요. 전부다 서술로 해도 맞는 말이고, 전부다 명령이란 말도 맞는 말이에요.
‘빛이 있으라’는 말이나 ‘빛이 있다’는 이야기나 같은 이야기란 말이죠. ‘선악과 따먹지 마라’ 하는 거나 ‘선악과 따먹으면 죽는다’ 하는 그 말은 똑같은. ‘선악과 먹으면 죽는다’에서 ‘죽는다’는 서술 아닙니까. 서술이나 ‘따먹지 마라’ 하는 거나 같은 말이라니까. 왜 서술과 명령을 자꾸 따지느냐 하면, 지키려는 주체를 자기 자신으로 잡고 있기 때문에 이거는 서술이기 때문에 안 지켜도 되고, 이거는 명령이니까 지켜야지. 자기가 선별해서 골라잡으려니까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 거예요.
“이미 너희는 죽었고 너희는 하늘나라 보좌에 앉히느니라” 에베소서 2장 7절. ‘이미 너는 하늘의 우편에 앉았느니라’ 하는 그 이야기나 골로새서 3장에서 “너는 땅의 것을 생각지 말라” 명령이잖아요. 왜? 이미 너는 죽었고 네 생명은 하늘에 감추었느니라. 같은 사항을 이야기한다고.
그걸 명령 따로 뽑아내고, 서술 따로 빼고. 서술은 믿어야 될 거고, 명령은 해야 될 거고. 그 행함과 믿음을 결합시켜서 구원받는다. 이거는 진짜 여전히 자기의 주체를 사수하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증거하는 것을 자기 주체를 증거하게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 모든 문제가 래드뿐만 아니고 모든 신학자들의 문제점이 어디서 잘못됐기에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가? 그것은 아까 이야기한 ‘자유’를 몰라서 그래요.
자유를 끄집어내려면 우리가 사도 바울 편지에서 ‘나’란 인간이 사도 바울에서 자유를 끄집어내면 안 돼요. 왜냐하면 사도 바울 서신은 앞에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 예수님 공생애가 있고, 예수님 공생애는 바로 구약에 걸쳐서 있습니다.
래드의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문항을 쭉 보게 되면 구약에 대해서 약간 언급한 건 있어요. 약간 언급했어요. 구약을 따른다 해놓고 구약을 거울로 본다 나오죠. 방종, 광야에서. 그게 바로 윤리적인 해석이 나왔기 때문이고. 윤리적으로 해석하다보니까 구약을 뭐로 봅니까? 마치 윤리적인 책처럼 본인이 그렇게 보지 말라 해놓고 본인이 그렇게 해석하고 있어요. 래드가.
이게 자유문제에요. 구약에서 예수님 공생애를 통해서 내려올 때 자유란 것이, 인간이 어떻게 행동하느냐에 관한 자유가 아니고, 구약에서는 여호와 이름이죠. 여호와 이름이 어떻게 행동하는가? 신약에 보면, 예수님이 지금 저와 여러분에게 어떻게 행동하는가를 다른 말로 표현하면 그걸 자유라고 하는 겁니다.
이 말은 결국 뭐냐 하면, 우리는 자유롭지를 못해요. 자유롭지 못한 우리를 자유로운 주님께서 다룰 때만 우리 자유가 나오는 게 아니고, 이게 제일 중요하네. 나의 자유가 나오는 게 아니고 지금 모든 학자들이 설명해요. ‘여러분, 예수 믿고 자유롭게 사세요.’ 나의 자유가 나오는 게 아니고 누구 자유가 나오나? 주님의 자유함이 나오죠. 주님의 자유함이 우릴 통해서 나오는데 우린 철저하게 주님께 예속된 상태이다. 절대 종이 된 상태. 이 책에 보면 종이란 말을 약간 언급해 놨어요. 하여튼 이 사람은 무슨 말인지 모르고 약간 언급해 놨는데
만약에 그리스도의 종이 되려면 어떤 말이 되느냐 하면, 왜 우리는 우리의 자유를 발휘해도 소용없는가를 이야기해줘야 돼요. 그게 설명돼야 돼요. 제가 아까 했죠. 항상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들어오면 ‘우리가 왜 부정적으로 죄인 돼야 되는가’ 이야기했죠.
주님께서 우리에게 자유를 하면 할수록 우리는 자유를 느끼는 게 아니고, 철저하게 주님에 대한 예속과 속박을 더욱 느끼죠. 그걸 저는 뭐로 보느냐 하면, 이걸 말씀에 의한 속박. 더 쉽게 이야기해서 우리는 하얀 도화지인데, 도화지, 지가 펄럭거린다고 그림 나오는 게 아니란 말이죠. 도화지는 그림 그리기 당함을 싫어해. 도망치고 싶어. 도망치고 싶은데 이걸 끄집어냈다가 거기다가 신윤복처럼 초상화를 그린다 말이죠. 할 때 그 그림이 무슨 그림이냐? 말씀이란 그림을 우리 위에다 그냥 그리는 거예요.
‘거봐라. 내 말 맞지.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라고 했잖아. 너는 그걸 체험하려고 명령 지켰지. 봐라. 네 사랑을 보니까 느끼겠지.’ 그러니까 이거는 우리를 완전히 말씀의 판박이로 만들어버려요. 우리를 예속해서.
‘먹는 것, 입는 걸로 족한